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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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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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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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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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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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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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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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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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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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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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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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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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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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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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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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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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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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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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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성 장로] 하늘빛 닮아 가야 할 우리
- 얼마 전 국내 유명 어느 배구선수가 경기 중 게임이 뜻대로 안 풀리자 순간적으로 욕을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를 지켜본 기자가 입 모양을 보고 이 선수의 무안함을 두둔해주려고 ‘식빵’이라 했다고 둘러대어 그 일 이후 그 선수는 ‘식빵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가끔씩 지인들과 운동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동반자마다 본인의 게임이 뜻대로 잘 안되면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는 경우를 종종 듣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 있었는데 운동하면서 욕을 다 배웠다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었다. 욕, 그 자체는 비신사적이고 반사회적 언어로 분명 비난 받을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도 욕을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될수록 욕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모양이다. 최근 어느 카드회사에서는 욕에 가까운 발음의 시발(始發)카드를 출시해서 젊은이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고 구매 욕구를 높이려는 얄팍한 상술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욕을 상술이나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억지 변명을 한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은 어떨까? 오래전 부흥회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 강사 목사님을 모셨는데 식사를 가면서 자기 교회 부목사와 통화를 짜증스럽게 끊으면서 “XX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면서 흥분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일로 부흥회 내내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전혀 은혜가 되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엠 4:29)” 어디 그뿐인가?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나가라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늘을 닮은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서도 진실한 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 곧 우리들이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상대방을 인정하고 덕을 세우며 존중히 여길 때 곧 그곳이 진정한 교회며 그곳에 주님이 계실 것이다. 이 가을에 아직은 세상은 힘들 수는 있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언어도 하늘빛 닮아 가는 모두가 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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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성 장로] 하늘빛 닮아 가야 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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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보좌 앞에 있는 나를 봄
- 주님을 만났던 자들은 감격과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는 보좌를 본 후 감격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라고 했다. 보좌를 본 후 너무 황송해서 감화와 감동으로 한 말이다. 사도 요한도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요한계시록 1:17)라고 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된 사울도 “땅에 엎드러져 들었다”라고 한다(행9:4). 주님의 보좌를 본 사람들은 감격의 고백과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도 보좌 앞에만 선다면 감격과 감사의 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도취적인 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 믿음으로 선 감격을 말한다. 보좌가 어디에 있는가? 멀리 있지 않다. 사실 우리는 항상 보좌 앞에 있다. 우리 몸이 ᄒᆞ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보좌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사는 분이 많지 않다. 사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보좌 앞에 있는 자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라고 하신 말씀은 듣기 좋아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 몸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보좌를 품은 성전이다. 성령님이 안에 우리 몸 안에 계신다. 그 성전에는 보좌가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 우편에 앉았다고 알려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6)라고 한다. 성경은 거짓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항상 보좌 앞에 있다는 말이다. “주님의 보좌 앞에 있다”라는 말보다 “주님의 품에 안겨있다”라는 말을 부담 없이 더 많이 사용한다. 나는 이 두 말이 같은 뜻이라고 본다.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 때문에 익숙하지가 않아 “주님의 보좌 앞에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전재하자. “주님, 저는 주님의 품에 안겨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많이 고백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종일 고백하며 “주님, 저는 주님의 품에 안겨있습니다”라는 진심 어린 고백을 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항상 충만함 속에 살 것이다. 더 나아가 주님의 품에 안겨있는 나의 모습을 계속 상상한다면, 행복한 모습을 세상을 드러내어 복음이 전파됨을 볼 것이다. 주님의 품에 안겨있는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며 살아가기만 한다면 복음증거의 삶은 풍성해질 것이다. 상상하고, 그림을 그린다고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상상이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지만, 실재다. 마찬가지로 내 몸 안에 좌정하신 보좌 앞에 선 우리를 그림으로 그려보고, 천사들이 영광과 찬양을 쉼 없이 올려 드림을 그림으로 그리며, 이십 사 장로들과 함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면류관을 벗어 던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잘 하는 일이다. 성경대로 생생하게 그림 그리는 실력을 깨워보라. 나는 내가 주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있는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한다. 나를 앉고 행복해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좋아한다. 내가 그린 그림이지만 실제라고 믿고 감격한다. 믿음으로 상상한다. 포근한 품에 평안을 느낀다. 행복하다. 주님의 채취가 향기롭다. 그림으로 그려보는 주님의 품이지만 기도하며, 그리는 신랑의 품은 따뜻하기만 하다. 감격이 된다. 자주 눈물이 흐른다. 행복의 눈물이다. 감격의 눈물이다. 상상의 나래는 끝이 없고 더 깊어만 간다. 나는 그 세계가 좋다. 보좌도 자주 그려보자. 복음으로 충격을 받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주셨다는 소식임을 분명히 알게 되면 언제든지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의로움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육의 눈으로 보좌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어 좋다. 직접 그린 그림이지만, 이사야를 통해, 에스겔이 말한 말씀을 통해, 요한 사도가 본 천국을 통해 보좌를 얼마든지 그릴 수 있어 좋다. 그림을 그려보라. 그린 그림이 사실임을 알 때 신바람이 날 것이다. 주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네 생물을 보라. 에스겔이 말한 네 생물, 요한 사도가 말한 네 생물을 상상하며, 그려보라. 보좌 앞에 있는 당신을 그려보라. 이십사 장로들과 천사들의 찬양 속에 화답해 보라. 보좌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보라. 영원한 찬양의 힘을 가진 당신을 그려보라. 성경에 있는 대로 그려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잘하는 일이다.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실제 세계이가 아닌가! 실제 세계를 성경은 기록해 두었다. 정확하게 말씀해 두었다. 자주자주 보좌 앞에 나가 서 있어 보라. 그야말로 감격이다. 이십사 장로들과 천군 천사들과 함께 주님을 노래해 보라.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로 찬양해 보라. 나의 사랑, 나의 신랑께 천상의 노래를 드릴 수 있다. 노래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의 기도시간이 되게 해 보라. 인격적인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감격을 끌어내는 시간이다. 심취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다. 어느새 한두 시간이 훨쩍 가버릴 것이다. 행복한 보좌에서의 만남의 시간이다. 감격의 시간이다. 감사의 시간이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라고 했다(요한계시록 4:6). 자주 유리 바다에 서 있어보라. 보좌 앞에서 당신을 보게 되면 더 부러울 게 없을 것이다. 그곳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다. 그야말로 평안이다. 평강의 바다다. 모든 풍랑이 잠재워진 바다 위다. 이십사 장로들과 함께 노래하는 보좌 앞의 당신을 발견하라. 날마다 감격하며 살 수밖에 없는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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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보좌 앞에 있는 나를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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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삼우제(三虞祭), 성묘(省墓)와 졸곡(卒哭)에 대한 고찰
- I. 서언 (序言) 삼우제는 무엇일까? 기독교인으로서 성묘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졸곡이란 말은 흔히 듣는 말은 아니지만, 탈상(脫喪)이란 말과 함께 이 말들과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목회자가 되어서도 교인의 장례식 이후 3일이 지난 다음 유가족들과 함께 삼우제 형식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은가? 에 대한 마음의 고민을 가진 일들도 많았다. 요즈음은 장묘문화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과거 많 큼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우리 자체의 정체성의 흔들림은 물론이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타 종교의 의식을 행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삼우제와 성묘와 졸곡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삼우제(三虞祭), 성묘(省墓)와 졸곡(卒哭) 1. 우제 : 먼저 우제(虞祭)란 말은 염려할 우(虞), 제사 제(祭)로서 지하에 매장된 고인의 영혼이 방황할 것을 염려하여 그 망자의 혼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한 제사이다.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고서이면서 유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5경 중 예기(禮記)에 기록된 제사 의식에 관한 가르침에서 전래된 유교식 제례의식의 용어이다. 장례를 치른 후 3일 동안 세 번 행하는 제사로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고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장례 당일에 지내는 초우제, 그 다음날은 재우 제, 그다음 마지막 날은 삼우제가 있다. 재우와 삼우는 지방과 문중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삼우제는 거의 모두 재 우제를 지낸 다음의 첫 강일(剛日)에 날이 밝을 무렵에 집에서 지낸다. 삼우제를 마치고 나면 상주는 묘지에 가서 간단한 묘제를 행한다. 현재는 장례의 절차가 간소해지면서 삼우제를 마치고 봉분 옆에 흙을 파고 혼백을 묻는 매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우제의 유래와 그 의미는 우리 기독교적인 예식이 전혀 아니다. 2. 성묘 : 삼우제와는 달리 성묘는 기독교 예식에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배격할 필요는 없으며 그 의미는 좋기 때문에 수용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먼저 “성묘(省墓)”란 말은 살필 성(省), 무덤 묘(墓)라는 뜻으로 무덤의 상태가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장례를 치른 후 3일 만에 무덤에 가서 살펴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유무를 떠나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먼 외지에서 장례일 까지 오지 못한 가족이나 친족들이 사후에 무덤에라도 가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며, 또 분묘가 잘 조성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요즈음은 매장보다 화장을 해서 유골함으로 처리하는 경향이지만, 유족들이 고인의 별세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인생의 삶에 대한 신앙적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는 것도 장례 후 첫 성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앞에서 논한 우제란 말 보다는 횟수에 관계없이 위로 예배란 말과 3일째의 삼우제는 매장이든 아니든, 첫 성묘란 말로 우리 교회 용어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굳이 3일 만에 성묘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성경적인 의미를 찾아본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무덤을 살피기 위해 제 3일 부활절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모습을 예를 들 수 있다. 3. 졸곡 : 모든 장례 행위를 다 마치고, 삼우제를 지낸 뒤 무시애곡(無時哀哭)을 끝내기 위하여 행하는 제사의식으로 강일(剛日:天干이 甲·丙·戊·庚·壬에 당하는 날)에만 지내도록 되어 있고, 그 시기는 장례일로부터 3개월이 지난 뒤에 행하였다. 과거에는 반드시 3개월이 지난 후에 행했으나, 지금은 장례일로부터 10일 내에 행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의식은 졸곡 하루 전에 상(床)과 기구를 준비하고 밥과 음식과 냉수를 진설한다. 날이 밝으면 나물과 과일과 술과 안주을 진설하고 정화수를 채워서 놓고, 그다음 여러 가지 정해진 의식을 진행한다. 모든 의식을 행한 다음에는 상주와 참제관들이 들어가서 마지막 졸곡을 한 뒤 사신배례(辭神拜禮)를 한 다음, 혼백(魂帛)을 깨끗한 땅에 묻는다. III. 맺는 말 지금까지 논한 용어들은 평소 익숙하게 듣는 용어들이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상례문화 속의 단어들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의 용어는 아니다. 성묘를 제외하고는 삼우제나 졸곡 등은 우리가 사용하거나 행할 수 없는 우상숭배이다. 이런 관점에서 항상 제언하는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바른 생활용어는 오늘 날의 수많은 문화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의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도 기독교인의 바른 언어문화와 용어사용정착에 기도와 협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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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삼우제(三虞祭), 성묘(省墓)와 졸곡(卒哭)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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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고신총회 제71회기 신학위원회의 예배에 관한 결의 환영
- 예장(고신) 총회 신학위원회의 결의는 그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다. 그 동안 고신총회의 결의는 한국 기독교계와 타교단의 결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으며, 또 이번 고신 총회 기간 중 신학위원회의 결의는 최근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당면 현안들의 기준점이 될 수 있기에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고신 총회 신학위원회의 많은 결의 중 코로나 팬데믹 상황 하에서 혼란스런 예배에 관한 문제들을 정의하였는데 그 결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영상예배, 비대면 예배는 비성경적이다. 둘째,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병원, 요양병원, 해상근무 등)에 있는 분들은 영상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셋째, 예배에 대한 논의시 당회가 예배를 (더) 잘 드릴 수 있는 논의는 가능하나, 공예배를 폐하는 논의는 할 수 없다. 넷째, 예배에 관련한 일체의 변경사항은 언론이나 당국의 발표가 아니라 총회의 공식통보를 따른다. 점점 예배에 대해 소위 열린 자세를 취하므로 예배의 대상이 사람들의 잔치로 변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은데, 최근 코로나 팬데믹 현상아래, 이런 점은 더울 가속화될 우려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예배 이외의 활동들, 즉 교제활동 등은 그 방법의 다양성을 개발하여 효과적 방법을 찾는 것은 유익할 수도 있으나, 예배에 대해서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편리나 유익을 추구함이 우선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고신총회 신학위원회의 결의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예배를 드림에 방역수칙을 무시하거나 정부의 방역준수 요청을 거부하며 무시하거나 투쟁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과도히 방해하거나 교회를 폐쇄하는 경우, 국민의 신앙의 자유를 과도히 막을 경우는 거룩한 저항을 하더라도 "예배는 지켜져야 한다"라는 원칙을 선언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부가 국민과 교회를 위한 정책들이 특별히 악하지 않을 경우, 정부와 대척점에 서기보다는 긴밀히 협력하여 함께 하는 것이 더 성경적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번 고신총회 신학위원회의 결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정부는 기독교의 정체성인 예배에 대해서 방역수칙을 준수할 경우 열린 자세로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며,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정도의 방역관련수착을 준수할 경우, 예배의 자유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교회와 성도들 역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최대한 준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반드시 세워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버리면서 '인간 중심'의 편리를 따라 예배를 결정하는 것에 대해, 엄중함과 심각성을 갖고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선언으로서의 이번 고신총회 신학위원회의 예배에 대한 결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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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고신총회 제71회기 신학위원회의 예배에 관한 결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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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 고신 총회가 지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김해중앙교회(강동명 목사)에서 제7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코로나19 정국의 어려운 상황에서 총회 임원들과 김해중앙교회 강동명 목사와 당회원들이 김해시 지자체와의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에 관한 어려운 협의과정을 거친 후 개최된 고신 총회는 복잡한 현안들을 처리하면서 심도있는 안건심의를 했다. 그 중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에서 가진 성찬예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성찬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고, 성도가 은혜받는 아주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정기 총회 개회예배 시에 가진 성찬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소위 '성찬키트'라는 것을 나누어 각자가 개봉하여 먹고 마심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성찬을 드릴 수 있는 방편으로 성찬키트를 선택한 것은 알지만, 성찬키트를 통한 성찬이 이래도 되는가라는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 까지는 그 고충이 충분히 이해된다지만, 그 성찬의 진행과정을 얼마든지 은혜롭게 할 수 있는데, 이번 성찬키트를 이용한 성찬식의 진행과정은 일반적인 성찬식의 경건함에 미치지 못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성찬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목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서는 모자란다고 소리치면서 부르고, 조금 떨진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키트를 던져 주기도 하고, 개봉하는 과정에서 개봉이 잘 되지 않는다고 옆사람이 개봉을 도와주기도하며 그러다 담긴 것이 엎질러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어색한 총대들은 서로의 어색함이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경건해야 할 성찬예식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사죄의 은총에 눈물과 감격이 있어야 할 성찬이,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죄송함, 무례함에 가슴치며 눈물을 흘리며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하지만 이러한 성찬 예식에 대해 어느 총대들은 깊은 한숨을 쉬고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지,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경헌 목사가 성찬에 참여한 회중 앞에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예식을 이렇게 웃움거리가 되도록 해서 됩니까? 부득이 키트를 사용해야 한다면 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은혜롭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시행할 수 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럽게, 장난스럽게 성찬을 해야만 합니까? 저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고신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장로교단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모든 회의에 앞서서 거행된 예배와 성찬은 이미, 사람들의 모임을 예시한 것은 아닌가라를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소홀히 여기면서, 그 다음을 은혜롭게 하겠다고 그 길을 추구하는 것은 아해하기 어려운 문제풀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깊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총회 유감의 한 모습이며, 누구나 바른 길을 추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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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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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셨고, 성령으로 인치신 주님께 속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회 어떤 조직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공동체는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별과 신분, 빈부와 지식,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곳 저곳에서 불러냄을 받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과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사역 위에 설립되지 않은 “교회”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 곳 저 곳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원래 ‘불러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모임 또는 회집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모임이 없는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친교하고 교육받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집단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이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물론 교회는 감염예방준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예방수칙을 준수하는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의 예배가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이유를 근거로 예배 모임 자체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정치 방역’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정부의 요구에 너무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모임이 자기 만족과 자기 봉사에만 스스로를 진력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는 다시금 이웃과 지역사회를 봉사하고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흩어져서 이웃을 봉사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회적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 있는 인간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수 시대에는 노인대학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봉사하는 사역이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고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서의 짧은 사역이후 자신을 비방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어떤 깊이 있는 신학적 변증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삶 자체가 어떠했는가를 회상시켜주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이론적 논증과 장황한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행동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설교를 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의 율법과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가 개인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디아스포라는 사회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모이는 교인과 흩어지는 제자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의 형태와 제자의 형태, 이 둘의 기능과 책무는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고 동일한 비중의 중요성과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웃과 지역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수 십년동안 지역사회를 효과적으로 봉사해 오던 프로그램을 교회의 당회가 주도적으로 폐쇄해 버리고도 전도 프로젝트를 운운하는 교회가 있다면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그 동안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은 잘 감당해 왔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책무는 잘 감당하지 못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이 비판적인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비전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도취적인 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기들만의 개교회주의와 같은 형태로 교회의 담을 높이 쌓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폐쇄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아닙니다.교회는 모이는 교회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흩어지는 교회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심장과도 같아서 새로운 피는 생산하여 계속적으로 유기체로 내보내고 더러운 피는 정화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열심히 모여서 모이는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치장과 자기 만족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처럼 세속화의 거센 바람을 집어삼키고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많으나 제자가 없고, 모이는 교회는 있으나 흩어지는 교회가 없는 이때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 고백적인 결단과 희생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 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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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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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철 목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지난 주 한 편의 시를 읽는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인데, 이 시의 시작부터가 아주 도발적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연탄이 우리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가 방송과 신문지상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연탄이 꺼져 한겨울의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연탄재조차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연탄처럼 누군가를 위해 한 번이라도 뜨겁게 자신을 불사른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연탄은 마지막 순간까지 겨울 빙판길에 뿌려져서 길을 걷는 사람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하였으니 이런 연탄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은 어떻습니까? 이곳저곳에서 내 생각을 따라 함부로 마치 연탄재를 차듯이 사람들을 차댑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절대 틀린 법이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런 저런 깊은 멍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든 사람들이 있는 살벌한 현장입니다. 모두가 그 여인을 벌레처럼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종교적 위선의 탈을 쓴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 후 주님은 범죄한 여성을 향해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분노로 가득찬 이 세상의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연약한 자를 향해,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연탄재를 차듯이 차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차대는 사람이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찾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고 99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떠나는 사랑에 눈먼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마 18:12). 사람들이 대책 없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하늘 아버지의 사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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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철 목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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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 유치원 다녀본 적 없고, 엄마와 한글도 익혀보지 못하고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의 학업 성적은 부모님을 늘 만족시켰다. ‘왕년에 1등 못해본 사람 있나?’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성격도 차분했으니 당시에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를 공부 잘하고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게 되었다. 즐거운 시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자연’이라는 과목이다. 늘 그랬듯 대부분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충고대로 문제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아닌 것은’ ‘맞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덤벙대며 읽어서 늘 아쉽게 문제를 틀린다며 엄마는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100점을 향해 천천히 연필을 눌러 정답을 적었다. 이번 시험에서도 나는 100점을 확신했다. 그런데!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니 망설임도, 고민도, 함정도 없었던 문제가 빨간색 막대기로 그어져 있다. 단 한 문제. 정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다시 문제를 살피고, 상식을 동원해도 틀리지 않은 답이다. “아래 물체의 이름을 적으세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 물건은 우리 집에 널리고 널려 있었고 아버지의 현장에 늘 쓰이는 물건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문질러서 곱게 만들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던 물건. “빼빠” 우리 가족은 모두 그것을 ‘빼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사포’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나로 하여금 가족을 불신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인정 할 수 없다. 선생님께 수차례 항의했다. 잃어버린 100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부정당하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어머님과 면담을 하셨고 부모님께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것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50원 대출’ 사건 이후로 두 번째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선생님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 점수는 정정되지 못한 95점. 그렇게 나는 가정의 울타리 밖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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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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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 예루살렘 성전의 청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성전으로 들어가셨을 때 성전은 세속의 장터나 놀이터로 변해 있었다. 분노한 주님은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다 좇아 내시고 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을까? 첫째, 성전은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고 섬김의 공동체이다. 성전은 돈을 주고받으면서 이익을 남기는 장사하는 상업공동체가 아니다. 영혼을 죄악에서 구원하는 생명공동체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사역이 이루어지면 곳곳에 교회가 세워져 온 천하 이방인에게까지 기도하고 예배하는 거룩한 처소로 쓰임 받을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전이 특정인 제사장과 그에게 속한 성전 맡은 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둘째, 이제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인을 포함한 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행할 것을 말했다. 지금까지는 성전을 책임진 제사장들만이 지성소를 출입하면서 중보적 대리 사역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주님이 갈보리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휘장을 찢음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만인이 기도하는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자들은 날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셋째, 만민은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이름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모든 기도가 다 주님의 이름으로 드려진다.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다. 세상에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그 어떤 중보자도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무화과나무 저주 본문 12-14절을 먼저 읽고, 20-25절을 보라. 주님은 성전을 둘러보시고 저녁 저물 때에 베다니로 가셨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하지 않고 나오셨던지 무척 시장하셨다. 그때 길가에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가보았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주님은 분노하여 그 나무를 저주하였더니 즉시로 말라버렸다. 이를 본 베드로가 놀라서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하시니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다. 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는가? 첫째, 잎만 무성하여 열매가 없었기 때문이다.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 주님의 오심을 예비한 세례요한은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의 경고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나무에 잎이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법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당시 사랑 없이 외식으로 충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향한 심판의 징표이다. 둘째, 때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유대의 무화과 지명유대나무는 일 년에 두 번의 수확기를 갖는다. 그 첫 번째 수확기는 잎이 무성할 때 익은 무화과를 수확하는 절기이며, 그 다음은 이로부터 시일이 지나 잎의 신록이 지났을 때 거두는 늦은 절기이다. 본문은 이른 절기인 것 같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4월이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잎 만 무성하게 자란 무화과나무는 당시 구원의 메시야가 왔는데도 영접지 않고 외식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같다. 셋째, 믿음 없는 외식을 정죄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다.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요 전능자로 믿으라는 말이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이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이 기도이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 이 같은 믿음이 없이 행하는 무리들은 유대종교지도자 지명유대들 같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독생자를 믿는 믿음은 이 같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다. 의심이 없이 믿음으로 구하고 행하면 반드시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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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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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삶에 수많은 사건, 고난, 즐거움 등이 있는데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지만 수많은 고난도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서의 삶,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가고, 가까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져 죽게될 위기, 애굽으로 팔려 간 일...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이 오히려 요셉의 삶에 유익을 얻게 된 것을 요셉은 깨달았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요셉은 수많은 고난 후에 리더십이 견고해졌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움 때문에 죄수들을 만나게 되고 꿈을 해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총리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때 요셉의 깨달음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고난을 당할 때는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원망하기도 하는데 지나고 보면 그때 고난이 내게 유익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결과를 더 유익하게 해주십니다. 요셉의 신앙,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될까요? 마음이 넓어지며 용서하게 됩니다. 미움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되며 매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염려가 적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도 지나고 보면 감사제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까지 위로해주고 격려해 줍니다. 창세기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고난중에 있는 요셉의 삶을 위로해 주시고 총리가 되는 상을 주셨습니다. 요셉이 축복받음으로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도 잘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선하고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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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