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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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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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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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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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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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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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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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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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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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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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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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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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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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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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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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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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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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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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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
- 간혹, 이단 교주의 영상을 보면 말의 논점이 없고 어휘구사력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단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이단 교주들의 영상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이단에 빠지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재 이단들은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하며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전도 방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입니다. 따라서 이번 칼럼에서는 “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이라는 주제로 이단이 사람들을 어떻게 미혹하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시대적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현 시대는 깨어진 공동체로 인해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챙기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 한편에는 서로를 위로해주고 챙겨주는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를 찾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현재 이단들은 이러한 시대적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도 대상자의 고민과 어려움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 등을 세밀하게 조사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아 보이는 이단 단체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단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정을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뉴스에서 아무리 사기꾼과 다단계를 조심하라고 해도 사기꾼의 말을 직접 듣게 되면 그 말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듭니다. 이처럼 많은 시간 훈련되어진 이단 단체의 강사들의 말과 그들의 확신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찾았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간혹, 우리는 이단은 논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교리는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닌 논리의 근거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셋째로, 기적과 체험을 이용하여 미혹합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적 기적과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실제적인 종교적 체험과 경험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놀라운 기적을 보이고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 기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슨 관계인가?” 따라서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시대적 Need(필요)를 채우려고 하거나 누군가 채워줄 것을 기대하며 막연한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준과 방향성이 나 중심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을 때 Need를 이용하여 미혹하는 이단을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14:13-14)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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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Need(필요)를 통해 미혹하는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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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기도
- 능력발견의 길은 기도에 있다. 동시에 기도를 이해하는 것이 능력발견의 길이다. 기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신나는 일이다. 기도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고백하며, 선포하는 재미나는 일이다. 기도는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아도 항상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 믿음의 고백 그 자체다. 기도만 할 수 있다면 항상 봄바람은 분다. 기도의 불은 기도만으로 불을 붙일 수 있는 불이다. 기도하면 기도의 불이 붙는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라고 했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복음을 붙잡고 신바람 나게 선포하며 기도하다가 보면 믿음의 기도가 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실패가 없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의 완성을 아는 것이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능력발견의 눈이 열린 사람이다. 에스겔은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포로로 잡혀간 지 5년 후부터 22년간 바벨론에서 선지자로 일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방 나라들의 심판을 예언하는 동시에 귀환을 통한 회복을 예언했다. 그의 환상은 성전을 보았고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 풍성함으로 마무리되어 진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실 것을 예표 하며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유다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것을 예언했다. 그들이 열심히 잘 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유다는 능력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인도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케 하겠단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시겠단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란다. 또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행하도록 하시겠단다. 내가 준 땅에 거주하게 하겠고, 계명을 지키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에스겔 36장의 이야기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멸망 당했다. 도저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능력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새 영을 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서 그들의 힘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법도를 지키도록 해 주겠다고 하신다. 이것이 구속의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단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첨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믿고, 주장하고 선포하고, 말하는 것이 기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하나님의 계획이나, 이미 성취된 것, 하나님의 마음을 나의 입술로 고백하며 선포하며 인정하는 것이 놀라운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계획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능력발견의 통로인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을 보여 주셨다. 47장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을 볼 때 어린양의 신부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예루살렘은 유다를 가리킨다. 신부인 유다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올 것을 예언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하신 이런 엄청난 것들이 너희에게 일어났으나 그래도 기도하여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주께서 다 이루신 후 주의 일에 동역하도록 그냥 자리를 내어주시는 것이 기도다. 이미 이루신 일을 숟가락만 올리라는 것이 기도다. 이미 성취하신 주님의 일을 주장하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주님 약속하신 것을 선포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마음에 힘이 생길 것이다. 소망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실 때 볼 수 있는 마음과 눈이 준비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이루신 일을 주장하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고, 도적에게 속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말하고 기도하면 기쁨이 생기고 감사가 생긴다. 문이 열릴 때 뛰어들어갈 수 있다.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가 상상하며 감사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기도다. 기도시간은 신나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을 그림으로 분명하게 그리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 이루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루실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셔서 이루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다. 이미 약속하신 것을 묵상하다 터져 오르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면 능력발견이 된다. 기도는 약속하신 것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감격의 시간이다. 이루어 주신 것을 상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다. 뜨겁게 주신 것을 주장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온전한 나를 받아들이며, 감사하며, 감격할 때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이 깨어난다. 기도를 뜨겁게 하는 것을 좋아하자. 종종 손만 내밀어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생기기까지 기도하고 주장하자. 기도하면 능력발견이 될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악수만 해도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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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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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안동철 목사] 이슈 선점보다 중요한 것은 이슈 전환이다
- 요즘 페이스북을 조금씩 다시 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글을 올리고, 펫친들이 올리는 글들도 보고 있다. 어떤 펫친의 글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린다. 정말 멋진 글에 동감의 댓글이 달리기도 하지만, 민감한 이슈에 대해 피 튀기듯 논쟁하는 댓글이 많은 것 같다. 한국사회, 특히 기독교계에서 이념의 문제는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다. ‘좌’와 ‘우’의 문제는 신앙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같은 하나님,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형제자매가 이 문제 앞에 서기만 하면 거의 원수가 된다. 처음에는 예의를 갖춘 말로 시작하는데, 곧 다시는 보지 않을 것과 같은 말을 주고받고는 파국을 맞는다. 이슈는 이처럼 복잡하다. 특별히 이념의 문제에서는 더욱 심한 것 같다. 물론 리더의 조건 중 이런 이슈를 선점하는 능력은 중요하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이슈를 발굴하고, 그것을 선점해 가는 능력은 오늘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슈의 선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이슈는 항상 그 이슈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자들이 있기에 발생하는 갈등을 푸는 능력은 이슈의 선점 능력보다 더욱 중요하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도 이런 저런 단체 대화방에 회원으로 속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올라오는 글 중에는 참 동의하기 힘든 주장들이 많다. 출처 불분명의 글과 영상들, 많은 경우에는 과장 내지 가짜 뉴스를 자신이 믿는 이념에 매여 끊임없이 올려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공동체의 화평을 위해 그냥 참는다. 어떤 분은 말 없이 탈퇴를 해 버린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논쟁으로 결코 설득될 수 없는 문제에서 한 발 떼서 공통의 교집합으로 이슈를 전환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문제에 대한 회피로 보일 수 있다는 약점이 있다. 지도자는 이슈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풀어야 할 문제는 반드시 책임을 지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풀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풀리지 않는 이슈, 특히 좌와 우의 이념의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풀 수 없다. 어제 또 한 분이 내게 일방적인 한쪽 편에 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글을 보내왔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하나는 무시전략이 있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그분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투쟁전략이 있다. 그 사람의 잘못된 메시지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을 하게 되고, 논쟁으로 진화하여,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답을 하기보다 “요즘 몸은 어떠세요? 이렇게 어려운 때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접근했다. 결코 내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다. 결국 기분 좋게 대화를 마칠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분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았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한다. 바울은 수많은 문제 앞에서 자신이 보잘 것 없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고린도교회와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자신의 연약했던 모습들, 그리고 바울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은 그 자신을 향해 질그릇과 같은 존재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이슈의 전환을 한다. 질그릇과 같은 자신 안에 있는 보배에 집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성령님을 주목함으로 위대한 고백을 한다.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하). 이것이 이슈의 전환 능력이다. 특별히 성도는 이슈를 ‘좌’와 ‘우’ 관점에서 ‘상’과 ‘하’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좌와 우의 접근은 갈등과 싸움 밖에 안 된다.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으로 볼 때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땅의 인간으로 볼 때 우리는 진보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접점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연결을 통해 좌와 우를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6)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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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안동철 목사] 이슈 선점보다 중요한 것은 이슈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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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진 단
- 또닥비 소리에 외로우십니까 봄바람 소리에 가슴 나부끼십니까 여행을 준비하면 삶이 설레십니까 음악을 들으면 맘이 행복하십니까 하나도 안 맞으면 병원으로 소풍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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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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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하나님의 일
- 하나님의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라고 하셨다(요한복음 6:29 참고). 그러기에 누구라도 하나님의 큰일을 할 수 있다. 병든 자도 할 수 있다. 가난해도 할 수 있다. 어린아이도 할 수 있다. 노인도 할 수 있다. 주를 위해 일하고 싶다. 죽도록 일하고 싶다. 주를 위해 노동하고 싶다. 주를 위해 땀 흘리고 싶다. 나의 사랑을 위해 미친 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울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정도다. 주님의 보좌를 보는 나에게 주를 향한 갈망이 끝없이 올라온다. 주의 일이 무엇인지 물었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일은 당신을 믿어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수용하여 믿는 것이란다. 나는 주님의 일을 많이 하고 싶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루신 모든 일을 믿어 드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한복음 6:29)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다. 믿어 드리는 일을 하면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중증 환자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임에 감사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께 하신 일을 믿는다는 말이다.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가장 핵심 되는 일은 십자가를 지신 일이다.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 몸을 성전 삼으시고 임마누엘 하셨다. 주님이 함께함을 어떤 경우에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마가복음 8:34-38 참고). 나의 모습 보니 의인이라 감히 말하기 부끄럽지만, 주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 주님이 산다고 믿어 드린다. 그것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다. 죽도록 내 평생에 주님의 일을 하고 싶다. 주님의 일은 주님을 믿는 것이니 어렵지 않고 오히려 쉽고, 신나는 일이다. 영원한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핍박이 온다 해도 목숨 걸고 주님 사랑하고 싶다. 주님을 향한 사모함이 있다. 주를 향한 갈망이 있다. 자면서도 주님을 생각하고 싶다. 주님을 부르다 목이 아파보고 싶다. 주님을 부르다 잠들고 싶다. 주님도 나의 갈망을 아신다. 나의 갈망을 기뻐하신다. 나의 마음엔 주님의 음성이 있다. 오늘도 들린다! 성전에서 들려오는 우렁차고 엄청난 주님의 음성이! 바울 사도는 복음의 갈망이 깊은 신부였다. 나는 로마서 8장을 너무 좋아한다. 사랑하는 주님의 최고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고백을 한 번 더 고백해 보자. 육신의 생각이 아닌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깨달은 고백이고, 영의 사람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고백이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끊임없이 올라오는 죄의 법을 묵상하지 않고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놓으신 영의 생각, 하나님의 의가 된 생각을 강력하게 하는 사람에게서 터져 나오는 고백을 힘있게 하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9) 오늘도 이 감격 속에 주님을 갈망하며 함께 영광을 돌리며, 육으로는 들리지 않지만, 영원히 들려오는 성전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 우렁찬 찬송 소리에 깊이 파묻혀 보자. 하나님의 일을 하자. 오늘도 그분이 이루신 십자가의 결과를 믿자. 나의 몸을 성전 삼고 좌정하신 놀라운 보좌 앞에서 천군 천사와 함께, 24 장로와 함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믿음의 삶, 하나님의 일을 하자. 이것이 잠재운 성령이 능력을 깨우는 길이며 기름부음이 나타나는 지름길임을 발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믿음은 능력발견의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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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하나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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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이단에서 돌아올 자들을 위한 교회의 준비
- 필자는 대학시절 한 선교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군 생활 중 이단으로 지목된 다른 단체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복학 후 그 이단 단체의 말씀 테이프와 소식지 등을 주변인들에게 나눴는데 그 일이 선교단체의 책임간사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책임간사는 저와의 만남에서 활동여부에 대해 확인을 한 다음 자신의 선교단체에서 나가줄 것과 선교단체의 회원들을 만나지 말 것에 대해 주의를 주었습니다. 책임간사로서 당연한 조치를 취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당시 저로서는 두 단체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는 것보다는 제가 처한 상황과 이단 단체에 들어가게 된 계기 및 저의 심정을 물어봐주기를 바랐습니다. 2년 동안 열정을 바쳤던 선교단체에서의 퇴출은 제게 큰 충격이었으며, 함께 활동했던 회원들과의 교류 단절과 차가운 시선은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목회자로서 사역하는 지금은 어느 누구도 쉽게 정죄하지 않으려고 하며, 경청과 공감을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말 10만 신도 수료식을 전면에 내세우며 37년의 역사 가운데 급성장을 한 신천지가 코로나 19 확산의 중심에 서면서 명단을 조작하고, 방역을 방해하는 부도덕적인 면이 온 국민에게 알려졌습니다. 마침내는 신천지의 총회장인 이만희 씨가 기자회견을 통해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겪으며 그동안 신천지에 미혹되었던 많은 신도들의 이탈이 예상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8월 26일 신천지 12지파 대학부장으로 금년 4월까지 활동했던 한 자매의 기자회견을 통해 신천지의 사악성이 더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천지 신도들의 탈퇴가 더욱 가속화 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이 정통교회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한국교회는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이 현실적인 면에서 교회로 돌아오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신천지 안에 있을 때 정통교회는 타락하였고 구원이 없다는 잘못된 교리들로 세뇌되어 교회를 신뢰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에 대한 자책과 하나님과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 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에서 활동하며 경험한 공동체성이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그리움 등이 마음을 사로잡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반 교회에서는 이들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수용을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회심에 대한 검증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경계심을 넘어 처음부터 배척하는 태도까지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때문에 이들은 심적으로 심각한 공황상태를 경험하게 되며,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영적인 돌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각지대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다가 다시 비슷한 성격의 다른 이단으로 들어가거나 아예 신앙생활을 중단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신천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종 이단 단체를 탈퇴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을 이해하는 시각 중 하나는 그들을 알코올이나 도박, 게임, 성 중독과 같이 교리 중독으로 이해하며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독자들은 단시간에 해결되지 않으며 오랜 상담과 교육 및 훈련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지원 소그룹 공동체들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 단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그 단체를 경험하고 탈퇴한 사례가 있는 상담사 및 지원 소그룹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들만이 깊은 이해를 통한 공감과 소통 및 위로를 해줄 수 있으며, 포기하지 않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단에 미혹되었던 과거의 경험이 아픔으로만 남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존재감을 경험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단 예방교육 강사나 상담사로서의 준비를 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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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이단에서 돌아올 자들을 위한 교회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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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박봉석 목사] 내가 죄인인지 진짜 압니까?
- 오래 전 영국에서 한 청년이 장난삼아서 런던의 유명 인사 20명의 명단을 뽑아서 그들에게 일제히 똑같은 전문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 전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탄로 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 그 이튿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유명인사 20명이 거의 같은 시각에 모두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죄 안 지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3장 10절에는 그것에 대해서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해 줍니다. 어느 한국의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교회에 탐방을 갔습니다. 미국에서 꽤 이름이 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는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였습니다. 탐방 간 첫날에 그 미국의 목사님이 그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저를 좋아하는지 아십니까? 왜 사람들이 저의 교회를 오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저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 목회하는 동안 교인들에게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탐방 간 그 한국 목사님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놀라서 이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그 교회를 바로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 수없이 인간들을 향해서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30년 동안이나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듣기 좋은 말만 계속 해 주어서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모여 들었다고 그들을 다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는 사람들이 구원의 참 뜻을 알고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 갖고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실상을 모를뿐더러 내게 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지 그 필요성을 제대로 절감하지도 못하고 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뭐 걱정할 것 없네요. 조금만 쉬면 나을 겁니다.” 그렇게 말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암을 앓고 있는 사람이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그렇게 말을 해 주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선은 기쁘겠지만 그 사람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늘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는 인간의 심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나를 영적으로 바로 볼 수 없을뿐더러 그래서 시급히 변화되어야 할 것임에도 변화하지 못하여서 신령한 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데요. 여름은 피서 철입니다. 피서 철이 되면 바다의 구조대원들이 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그 구조대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속에 빠져서도 있는 힘을 다해서 발버둥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구조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일부러 주먹으로 급소를 쳐서 반 실신하게 한 다음에 구조한다고 합니다. 발버둥치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는 구조는커녕 함께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 받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 됨을 뼈저리게 알고 죄인 된 나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하고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구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내 힘이나 기상이나 자존심이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받기 힘듭니다. 내가 죄인 됨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삶 가운데 늘 인정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할 때에 우리는 늘 겸손함을 잃지 않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늘 인정하며 사십시오. 내가 죄인 됨을 말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나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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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박봉석 목사] 내가 죄인인지 진짜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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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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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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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마11:28-30
- 조지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 교리 중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한 가지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죄교리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도 오직 선악과만은 따먹지 못하게 금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여부를 알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자신들의 위치를 넘어서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기를 희망했다.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요 죄이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몸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어난 더 큰 변화는 하나님과 관계의 변화였다.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교제했는데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이다. 참된 자유자는 누구인가? 톨스토이의 「돌과 두 여자」란 작품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두 여인이 한 노파를 찾아갔다. 그중 한 여인은 죄가 많다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다른 여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였다. 노파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시켰다. 죄가 많다는 여인에게는 “크고 무거운 돌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으며, 죄가 없다는 여인에게는 “작은 돌 한 움큼만 주워 오라”고 했다. 그들이 돌을 가져왔을 때 노파는 “이제 다시 그 돌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라”고 했다.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정확하게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왔다. 그러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그 돌을 어디서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다가 되돌아 왔다. 그때 노파는 말하기를 “죄가 있다고 한 자는 자기 양심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자유로운 자다”라고 했다. 주님은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낫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주님은 심중에 의를 사모하는 중심이 바른 창기가, 속에는 시기와 쟁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은 선행과 금식과 십일조로 위장한 외식하는 바리새인보다 낫다고 했다. 모든 인생은 짐을 지고 있다 인생은 다 죄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법에 자유 하면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혹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살면 선한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향해 이미 살인했다고 하며, 탐심만 가져도 도적질한 것이라고 했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생은 일평생 속고 속이는 삶으로 최후에 멸망의 길로 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담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였다.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는 바로 이러했다. ① 땅이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포기해 버렸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수고하지 않고는 땅이 소산을 내지 않았으며, 에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②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났다. 에덴에서 버림받은 인간은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피 흘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가시는 인생을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를 얽어매어 세상 염려로 하나님을 등지게 하여 에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다. ③ 땀 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고는 식물을 먹을 수 없게 했다. 학생은 땀 흘려 공부해야 하고, 사업하는 자는 땀 흘려 수고해야 하며, 정치인은 땀 흘려 경쟁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락원이 아니라 복락원이다. 아담이 범죄한 순간 즉시 죽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다. 실낙원의 인생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하다. 만약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 거하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멸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버리셨다. 그리고는 그 에덴을 천사들로 하여금 두루 도는 불칼로 지키게 하셨다. 아담이 에덴으로 복귀하는 데는 칼에 찔리는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의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에덴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 대속의 죽음을 주님은 갈보리에서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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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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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잘한 자를 칭찬해 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은 격려, 칭찬,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급 신앙이 성경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시18:20)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도 상 받는 것입니다.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명예, 지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은 하나님께서 억울함, 고난 속에서 인내로 믿음 지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나의 삶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늙도록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노년의 축복,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상입니다. 바울은 상급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7-8 )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킨 자에게 상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상을 주십니다. 충성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상주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고 목양을 잘한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을 준비하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상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잘 섬기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요셉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상 주신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남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에게 세상에서도 축복받는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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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