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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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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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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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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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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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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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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죄의 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고 속이며 부담을 안겨 온다.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행위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에서 빨리 빠져 나와서 자유 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선 안 된다(렘2:13). 예레미야서의 주제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하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내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발견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발견하라. 당신은 이미 성령의 임재 안에 있으며 성령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참 자유를 만끽하며 능력의 삶을 산다. 자신을 보며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느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실수할 대마다 “나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오늘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구나! 감사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보혈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보면 “이래가지고 되겠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아 온다. 죄의 법은 절망이다. 사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죄의 법이 주는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묵상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길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을 보라. 죄의 법에서 해결 받았음을 선포하며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는 환희를 보는가? 펄쩍펄쩍 뛰는 바울의 모습을 보는가? 이것이 나의 모습니다. 해방이다.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삶이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전체엔 놀라운 복음이 숨어져 있다. 로마서 전체가 그렇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고백한다(롬5:15). 이제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한다(롬5:21). 성경 전부가 이 이야기다. 율법적인 눈을 걷어 버리고 은혜의 복음, 예수의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이 예레미야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정말 안타깝다. 통탄할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로마서 6장).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엡2:6).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공간의 어떤 다른 우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김 집사 몸에도, 박 집사 몸에도, 오 목사 몸에도 계신다. 나누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모든 몸에 온전하게 계신다. 이것은 공간 계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사는 다른 우주적인 공간으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계신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사야가 본 보좌가 우리 몸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몸이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 일까?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쪽만 하늘이 아니다. 옆쪽도 하늘이고 밑쪽도 하늘이다. 하늘이라는 개념이 3차원적인 공간 계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으로 우리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몸으로 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는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명해 본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묵상하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고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바른 복음을 알고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임을 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나를 고치려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해 두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받아들이고 행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또 실수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쌓이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이다. 제가 오늘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십자가로 돌아가면 된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앉혔음을 믿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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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실체와 그림자, 알곡과 가라지가 쌍생하듯, 진짜와 가짜는 항상 쌍생한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다. 가짜는 진짜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진짜는 끝까지 간다. 가짜는 언제까지 속일 수가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가짜인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의 열매는 각각 다르다. 신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 성도인지 가짜 성도인지의 구별은 눈물의 기도에 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있지만, 가짜 성도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없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는 할 수 없다. 가짜라 해도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진짜가 된다. 지속적인 눈물은 절대로 가짜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어느 순간부터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다면 가짜 성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 지속적인 기도가 있는 사람은 진실 된 신앙인이다. 다니엘은 평탄할 때도,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 정한 시간 습관에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이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무사함으로 그의 신앙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애국, 애족한다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애국, 애족의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하였다. 교회를 사랑하며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비난한다. 현재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가족, 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그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다. 진짜 신앙인의 눈에는 영혼의 가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야지 군중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때 두루뭉실 기도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며 구구절절이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전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서 전해야 한다. 전도에는 예수 믿고 체험한 구원의 즐거움과 변화된 나의 삶, 받은 축복 등, 자기만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 진짜와 가짜가 확연히 나타나는 열매 맺는 계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과 애국 애족, 교회 사랑과 영혼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맺고 있는 열매가 진위를 증명하여 준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내 신앙과 교회와 영혼 사랑, 애국 애족도 모두 가짜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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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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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잘못된 만남 복학 후 교내 크고 작은 예배 모임과 지역교회 집회에 초대받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배특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찬양 콘티 작성법과 예배 인도법에 관한 2시간짜리 특강이다. 마침 신혼여행 일정과 맞물려 고민이 되었는데 선하신 아내님의 허락으로 여행을 1주일 미루고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사역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찬양 인도를 다섯 번 이상은 고정으로 하는 것 같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것인지 찬양을 섬기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일정에 고단함도 있지만 좋다. 철가방, 방범대원, 대리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 청년부예배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을 함께 섬겨달라는 요청이다. 초청해주신 교회의 청년들과 찬양을 연습하며 집회를 준비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부장 집사님 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왔다. 강사로 사역을 섬길 때 식사 초대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다. 찬양팀과 맞춰야 할 시간도 부족하고, 배가 부르면 사역에 불편함이 생겨 대부분 식사는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청년부 사역자를 보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부장 집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다. 칼국수 집에서 일하며 철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대부분 배달처는 대학병원이나 사무실이었다. 가정집 배달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늘 불평이 많고 배달원을 함부로 대했던 손님. 그 집 배달 요청이 오면 늘 불편했고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피하지 못해 배달을 가 현관문을 열면 ‘예수만 섬기는 집’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많았다. ‘벽의 그림, 말씀 액자. 테이블에 올려둔 십자가.’ 은혜로운 셋팅과 다르게 집주인은 고약했다. 늘 음식 타박에 배달원을 무시하는 말투.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니 예수님이 욕을 먹지.” 빈 배달통을 들고나오며 늘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배달 일을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내가 다시 이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둘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약한 집주인과 배달부. 아니 이제는 청년부 부장집사와 집회 강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무슨 말을 할까? 형식적인 말들로 식사 자리를 채운다. 애매하고 묘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즘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한 상 잘 차린 식사도, 오가는 은혜로운 말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민낯을 보았기에 잔뜩 꾸며진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회 시작을 앞두고 잡힌 식사였기에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예배는 시작되었고 찬양은 참 은혜로웠다.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찬양, 말씀, 기도. 모든 것이 은혜였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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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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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박동철 장로] 고르바초프의 죽음과 러시아의 복음화
    소련 연방 제국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애칭 고르비의 죽음이 세상에 던지는 여러 얘기에 많은 관심이 끌린다.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 냉전체제가 화해로 돌아서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공산 사회주의의 맹주 소련이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독이 통일되자 소련의 당시 서기장 고르비는 권력의 통제에도 힘을 잃어갔다. 이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고르비와 대화 시스템을 갖추고 미소 냉전을 끝내고 대화의 파트너로 전환하게 된다. 드디어 1988년 5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UN에서 연설을 통해 대결에서 협력의 시대를 선언하게 된다. 사실상 공산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선언이었다. 동유럽 소련 연방 제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은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필자는 이 무렵 일선 기자생활 할 때라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당시 우리는 80년대 신군부의 군사정권이었지만 노태우가 6.29선언으로 다시 정권을 잡아 6공화국 시대를 구가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연장에서 북방 정책을 표방하고 소련과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노 대통령은 90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고르비의 답방형식으로 91년 5월 제주도에서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동토의 땅 소련의 문을 열게 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지금도 러시아는 우리의 중요한 통상 파트너가 되고 있다. 당시 가끔 특별한 기자회견 취재 중 노 대통령은 소련과의 외교 정상화의 북방 외교를 늘 치적으로 앞세우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사실 이후 러시아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도 우리와의 외교는 발전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후 기독교 복음화가 급격히 확장 됐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의 큰 덕택이자 하나님의 큰 역사로 봐야 할 것이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동방 종교의 대표격인 정교(正敎)가 종교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는 공산당 권력 아래에서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 이단의 기능에서 머물러 있었다. 러시아 정교는 로마의 분열과 함께 동방 정교로 발전하여 러시아에서 교세를 떨쳤지만 러시아 혁명과 함께 교리 상 예수 십자가 복음에 이르지 못하고 공산당 최고 권력에 묻혀있는 유사 기독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20년간 선교사로 사역하신 한 목회자는 소련 개방과 함께 우리 기독교가 선교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공산당 문화가 가시지는 안 했지만 러시아 정교의 불간섭하는 정서 속에 지금은 한국 교회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사역에 사명을 다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러시아의 정교는 국교화하여 85% 이상의 인구를 가졌지만 개신교는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 선교사는 현재 400여 가정이 러시아 곳곳에서 복음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故 조용기 목사님이 이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역사적 대 집회를 갖고 복음의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제 또 러시아는 푸틴의 독재 권력하에서 제국의 탐욕에 불타고 있다. 고르비의 죽음도 국장으로 치르지 않고 장례식에 불참하는 등 고르비의 소련 제국화 포기에 불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일으키고 온 세계에 호전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북방의 괴물 푸틴의 러시아를 순화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임을 깨닫게 한다.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했다. 적그리스도 북쪽이라는 표현 아래 곡과 마곡이 이스라엘을 깊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설파했다. 에스겔 38장과 39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명과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의 본거지 러시아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역사의 깊은 곳에 복음의 행함이 함께 깊이 자리를 잡아 나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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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6: 추석(秋夕)에 대한 분석과 기독교적 입장
    I. 서언(序言) 어렸을 때, 동심에 젖은 설레임으로 설날과 함께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면 바로 추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불신자였든 필자로서는 이 추석은 세시풍속(歲時風俗)의 하나인 차례(茶禮)를 지내는 일로인해 많은 부담감을 가진 날이기도 했다. 바로 오는 10일이 우리나라 고유 명절의 하나인 추석이다. 이에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기독교인으로서 이 추석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추석(秋夕)이란 말의 의미와 유래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仲秋節) 혹은 중추가절(仲秋佳節), 가위, 한가위로 불리어 진다. 원래는 한가위라고 했는데 ‘한’이란 말은‘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말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때 배를 짜는 여인들이 ‘길쌈’을 하며 놀이를 하는 ‘가배(嘉俳)’에서 유래된 말로서 나중에‘가위’라는 말로 변형되었다. 또한 ‘가배’란 말은 한자어로서 가운데 중(中) 또는 반(半)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한가위를 가을(秋)의 반, 즉 중추(中秋)의 의미를 담아 중추절 혹은 중추가절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음력으로 8월 15일 중추의 저녁에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뜬다는 의미에서 달과 연관된 저녁 석(夕)자를 포함하여 추석(秋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때는 온 들판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시절이다. 그래서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과 첫 곡식을 거둔 기쁜 마음에서 만월인 8월 15일에 길쌈놀이의 유래와 함께 기쁘고 즐거운 날의 명절로 지켜지게 된 것이다. III. 추석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인 차례(茶禮) 추석의 의미와 그 유래로 볼 때에는 우리 기독교인으로 볼 때에도 전혀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아주 아름다운 날로 장려할 만한 명절이다. 하지만 이 추석 절기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추석에 행하는 세시풍속과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추석의 세시풍속으로는 성묘(省墓)와 차례 등이 있다. 그러나 성묘에 대해서는 본고의 장례 용어에서 논한 바가 있어서 생략하고 차례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하겠다. 차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제사제도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와 정사는 아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등을 보면,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는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가 있음을 믿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의 음력 10월에 지낸 동맹(同盟), 부여의 12월의 영고(迎鼓), 동예의 10월에 술과 춤을 추며 지낸 무천(舞天) 등이 그러하다. 바로 이런 제천(祭天)행사가 지금의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일의 유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제사 행위는 고려시대까지 말 그대로 천신에 대한 제천행사였다. 즉, 오늘날과 같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조상숭배와 제사는 조선시대의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정착된 것으로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차례라는 말도 그 어원을 살펴보면 한자어 표현 그대로 다례(茶禮)라는 말이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기 때문에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에는 조상의 죽은 날을 기억하며 윗대로 4대까지 지내는 기제사(忌祭祀)가 있다. 반면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모든 조상을 향한 제사이고, 또 시제(時祭)라는 제사도 있는데 이는 4대 이상의 조상의 묘를 직접 찾아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IV. 기독교적 입장과 맺는 말 앞에서 논한 대로 추석의 근본적인 유래와 의미는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추수감사절의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 간혹 어떤 교회들에서는 추석을 전후해서 추수감사절기로 지키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는 바로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근본적인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추석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절이요 아름다운 명절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차례를 행하는 세시풍속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130여년의 역사 속에서 추석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현재의 짝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더 이상 명절이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들과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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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최호숙 목사] 진정한 유토피아를 찾아서
    육신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이상향(理想鄕)을 꿈꾼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움 속에서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에서 원망과 시비 갈등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쟁의 위협과 질병의 위협과 경제적 빈곤의 위협,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번민과 고뇌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일어나는 공통된 양상일 것이다. 이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 이상향(理想鄕)을 중국 대표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427년)은 도원경(桃源境)을 그리며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했다. 무릉도원의 유래를 보면 한 가난한 어부가 배를 타고 무릉 마을의 계곡 강줄기를 따라 올라 가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진경을 보게 되었고 동굴 하나가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처음 보는 별천지 세계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왜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전쟁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사는데 바깥세상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것이다. 그곳은 꽃들과 새소리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곳, 인정이 넘치는 곳, 그들로부터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을 나오려고 할 때 그들의 요구가 “바깥세상에 나가면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어부는 나오면서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중간에 표시해놓고 와서는 고을 태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함께 다시 이 마을을 찾으려 했지만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를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무릉도원을 유토피아(Utopia)란 용어로 사용하는데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만들어낸 것으로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이 단어의 유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헬라어의 ~을 부정하고 없음을 뜻하는 (ού)와, 장소를 뜻하는 (τόπος)를 합하여 “없는 장소 곧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현실 세계에 인간의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무단히 노력을 해왔다. 대표적 인물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막스-(Karl Marx)’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통해 유토피아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이 건설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성경은 분명히 있다고 설명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자력으로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 이루지 못할 세상 유토피아를 세우려 한다거나, 이루어 놓은 알량한 물질의 만족 때문에 행복에 겨워 진정한 천국을 사모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성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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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1/3)
    성령충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더 강조하여 다루려고 한다. 나는 오래 동안 성령충만 하려고 목표를 세웠다. 성령충만을 믿고 믿음으로 출발해야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해야 성령충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많은 노력을 해 보기도 했지만 성령충만을 확신할 수 없었다. 늘 부족의식이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성령의 능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는 자이면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완전한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완전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완전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더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에게 계시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완전하신 성령님이 계신다. 더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조금 와 계신 것이 아니라 생수의 강으로 넘치도록 들어와 계신다. 어떤 사람에겐 적게 와 계시고 어떤 사람에겐 많이 와 계신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39절에 말씀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부터 기도를 매일 3시간 이상 하면 생수의 강이 넘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마시기만 하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다. 어떤 시험이 오면 다른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생각을 사로잡아서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구나! 내가 몰랐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입니다.”하고 자꾸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돌아선다. 워낙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돌아서는 것이 더 편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안 된다. 주님이 우리를 이미 해방시켜 놓으심을 믿고 감사하자. 당신 안에 생수의 강이 넘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 뭘 하려고 돌아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렘34:11)라고 했다. 돌아간 그들은 하나님의 굉장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들을 하나님의 때에 풀어 주게 되어 있는데 노비를 풀어주고 나니 여러 가지 불편했다. 그러니 다시 노비를 데려다가 노비로 삼았다. 우리도 죄의 몸에서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후 습관이 안 그렇고, 생각이 안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가져와서 다시 종노릇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라고 하셨다. 옛사람은 죽었다. 나의 옛사람은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음으로 이미 장사 되었다(롬6:4). 이것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말은 옛사람을 죽이려고 사는 신앙생활에 초점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고, 나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패배감과 좌절감 밖에 올 수 밖에 없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죽은 자임을 믿고 다른 소리를 듣지 않고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예수님이 이미 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또 하려고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해 놓으셨다. 물론 실수한다. 넘어진다. 이때 깨닫고 감사하야 한다. 율법은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으로 우리를 보면 언제나 범죄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 예수의 필요성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을 통해 죄를 철저히 깨닫는 것은 복이다. 죄를 깨닫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라고 한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산다.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는 말도 한다.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서 그렇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을 깨닫기 전에는 “내가 산다.”고 아우성들이다. 계명이 이를 때는 죄가 살아난다. 나는 법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자만심은 죽는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롬7:12). 그러나 율법에 머문다면 절망이다. 살아 보려고 할수록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율법에 머물러 “나는 왜 이것 밖에 못할까”라는 식에 빠져 죄의식과 죄책감을 생각 밑바닥에 깔고 살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음을 잊지 말라. 죄가 발견되면 은혜를 더 깨달아라. 우리의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크게 깨달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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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오태열 목사] 내 삶의 주어
    사람들에게 삶의 실패와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기의 꿈이 이루어지면 성공이요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패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공의 원인을 물으면 가장 큰 원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반대로 실패의 원인을 물으면 다른 사람이 도움을 주지 않았다거나 내 일을 방해했기 때문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실패의 책임을 전가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성공은 자기 잘난 탓이요 실패는 다른 사람 탓이란 뜻이다. 이런 자는 성공 시 교만, 욕심, 탐욕으로 가득 차고, 실패 시는 분노, 원망, 좌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기 뜻과 계획이 욕심과 탐욕으로 이끌고, 꿈을 이루면 교만해지고 이루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생긴다.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하였다. 단란한 가정을 파괴한 엄청난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충고에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고 깨끗이 자기 책임이라 인정하고 철저히 회개한다. 위인의 특징은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잘못이요 내 탓이요 하는 것이 회복하는 길이다. 믿음이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를 보면 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이익 때문에 분노한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분노한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할 때, 다윗은 분노하며 싸우러 나간다. 그리고 자기의 힘을 믿고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믿고 나갔다. 훗날 다윗은 승리의 요인을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이라 고백하였다(시18:1). 삶의 주어가 하나님인 사람은 강하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한다. 위기 시 어떤 힘을 붙드느냐가 중요하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검은돈, 사채, 마약 등 독이 있는 힘을 붙들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당장은 도움이 되나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돈에 궁핍한 예쁜 아가씨가 유흥업소에 나가서 쉽게 돈을 벌려 한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곳에는 항상 함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위기는 신앙을 붙들게도 하지만 오히려 믿음을 저버리게 하는 유혹의 시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힘 외에 다른 힘을 의지하지 말라.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내 삶의 주어가 하나님이 되게 하라. 그리하면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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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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