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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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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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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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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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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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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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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기도는 약속을 붙잡고 이미 이루어 진줄 믿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다. 확신 있는 기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약속을 다 해 두시고 난 다음에 말씀하신 것이 기도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4-27)라고 하신 후에 그래도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라고 하셨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그래도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도 마찬가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 때 활동을 했다. 유가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선지자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러니 멸망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회복의 메시지를 하셨다. 특히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서는 70년 후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올 것을 구체적으로 선언하셨다. 특히 30장부터 33장은 집중적으로 회복의 메세지를 한다.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하신다. 물 없는 동산 같은 곳을(사1:30)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겠다(렘31:12)라고 하신 후 그래도 기도하라고 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을 쉬지말고 기억하고 믿고 기도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비밀의 문이 열리면 삶 전체가 변화된다. 믿음의 사람은 기도가 바뀐다. 행동도 바뀐다. 목적이 바뀐다. 하나님의 뜻이 땅이 이루어지는 것이 목적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한 회복임을 잊지 말자. 믿음을 갖게 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성령받기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더 많이 믿자는 말이다. 성령 받는 것인 믿는 것이다. 성령받기는 성령께서 내 안에 임마누엘 하셨음을 믿기다. 방언 말하기도 성령님의 언어가 이미 나에게 있는 것 믿는 것이다. 방언 말하기는 이미 방언할 수 있음을 믿기다. 그러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신구약에 성령을 주시겠다고 했다. 우리 편에서는 받는 다고 하는 것이다.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이미 손을 내 밀고 계신다. 받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믿는 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는 것이다. 은혜는 항상 내려지고 있다. 은혜로 구원을 주시고 계시지만 은혜만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이미 주시고 계심을 믿고 받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주셨다. 기도가 그렇다. 아멘하고 받으면 된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다(막11:22). 그 다음 구절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라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되리라”(막11:24)라고 대박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시겠다고 하신다(렘31:31~33). 우리가 볼 땐 내가 두는 것 같이 보인다. 이것이 은혜와 믿음의 관계다. 은혜 없이는 믿을 수 없다. 믿음 없이는 은혜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붙잡고 나는 선포하며 믿는 훈련을 쉬지 않고 하려고 한다. “나에게 부드러운 마음이 있다.” “나에게 새 영이 있다”고 계속 읊조리고 주님께 고백하며 나에게 이야기 해 준다. 새 영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주님이 내가 주겠다고 하셨다.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셨다. 주님이 우리를 부드럽다고 하신다. “주님, 저에게 부드러운 마음이 있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도다. “하나님 나는 부드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새 마음이 있습니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라고 믿고 고백한다. 이것을 놓치면 굳은 사람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에겐 부드러운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믿음이다. 은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성경대로 믿자. 믿음으로 기름부음이 나에게 있음을 믿을 때 기름부음을 유지할 수 있다. 부어 주겠다고 했으니 부은바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욜2:28-29)라고 했으니 우리가 장래 일을 말한단다. 이상을 본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라고 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가, 안 나오는가?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외쳐도 좋다. 아니 외쳐야 한다. 나는 말마다 외치고 감사한다. 너무 감사하다. 또 “영원토록 함께하리라”고 했으니 나는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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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신재철 목사] 미안, 용서가 안 될 것 같아
    아파트 분리수거장. 정확히 표현하면 ‘분리수거용품 배출장’이 맞을 것이다. 이곳은 분리수거가 가능한 물품을 내어두는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를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생각보다 많다. 관리하기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다양한 물품을 이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회피 1순위는 위험한 물건이다. 칼, 쇠꼬챙이, 깨진 유리 등은 상당한 위협이 된다. 여러 물품에 섞여 있는 것을 모르고 치우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다. 가볍게 몇 번 다친 적이 있어서 이제는 미지의 쓰레기 더미 속에 함부로 손을 넣거나 번쩍 들어 올리지 않는다. 왜 저런 흉기를 분리수거장에, 그것도 ‘꽁꽁’ 숨겨 두는지 모르겠다. 누구 하나 죽어보라는 걸까? 회피 2순위는 더러운 물건이다. 사용한 생리대, 사용한 기저귀, 변(똥), 배달음식 쓰레기 등 정말 토할 것 같은 녀석들이 나타난다. 불쾌하겠지만 이 글을 보시는 분도 상상을 해보시라. 아파트 공용공간에서 이런 흉물과 마주할 때 어떨 것 같은지. 다른 입주민 보기 전에 치워야 하는 사명이 내게 있지만 나 역시 회피 본능이 앞선다. 민망하게 구역질이 나오기도 한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다 보면 황당함에 어느 트로트 가수의 노랫말처럼 혼자 말이 터지기도 한다. 한 번은 지하 주차장 청소하다가 구석에서 발견된 변이 있었다.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양으로는 애매했으나 발견된 위치가 구석진 것으로 봐서 사람의 소행이지 싶다. 동물이 굳이 저 장소에서 변을 누진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치우기 너무 싫고 구역질 나서 한참을 그냥 두었다. 자연적으로 말라 냄새도 줄고 말라 굳었을 때 치운 적이 있다.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가끔은 모든 일에 주께 하듯 못하겠다. 비위가 너무 상해서. 계약된 근무는 주 5일이다. 주말에는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분리수거장은 하루만 그냥 두어도 그 기능을 상실할 지경이기에 주말에도 잠시 나가 물건을 정리한다. 너무 하기 싫지만, 주일이면 오전 예배가 끝난 후 바로 아파트로 향한다. 양복바지에 작업화를 신고 3M 장갑을 낀 이상한 차림으로 신속히 정리한다. ‘아... 오늘 이건 또 뭐냐.’ 한 봉투 안에 음식물과 잡쓰레기가 사이좋게 모여 있다. ‘그냥 치울까.’ 예배 끝난 후라 넉넉한 마음이 들다가 그냥 봉투를 까 보기로 한다. 뭔가 단서가 발견되면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는 더욱 선한 마음이 역사한 것이다. 큰 비닐을 주차장 바닥에 깔고 봉투 안의 쓰레기를 다 쏟아낸다. 오늘 주인공은 ‘회’다. 한때 싱싱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고약한 냄새가 난다. 주문하신 분은 채소를 싫어하나 보다. 함께 딸려 온 상추가 작은 비닐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섞여 있는 휴지와 플라스틱 용기를 뒤적거려 본다. 「초장을 많이 주세요.」 잔뜩 구겨진 주문서를 찾았다. 광어회 사이즈(size)와 초고추장을 추가 요청한 특이사항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주소와 연락처까지 남겨져 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월급이 작은 관리소장은 용감하다. 입주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간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린다. 어물쩡 넘어가려던 입주민이 음식 종류와 크기까지 설명하며 따지니 부인할 수가 없다. 증거가 명백한 상황에 연신 죄송하다는 말 외에 변명조차 하지 못한다. 유사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사과를 받았지만,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차장에 펼쳐둔 쓰레기 사진을 찍는다. 경고문을 만들 계획이다. 물론 이번에 식겁한 입주민의 신상은 드러내지 않고 공지할 계획이다. 까칠한 목사 관리소장이라는 말이 나와도 어쩔 수가 없다. 예쁜 글꼴을 골라 큼지막하게 문서를 만들어 출력한다. 「관리소장이 요즘 시간이 많습니다. 특이한 물건이 분리수거장에 나와 있으면 하루 종일 CCTV를 돌리거나 관련 증거를 수집해 공개할 계획입니다. 서로 어려운 일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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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박봉석 목사] 돌담 구멍 예찬
    이전에는 제주도를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렀습니다. 세 가지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지요. 그 세 가지는 돌과 바람과 여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주도에 가보면 돌로 만든 담이 지금도 꽤나 많습니다. 시골 집 담을 돌담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도 있지만, 심어 놓은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논과 밭에 야트막하게 돌로 담을 쌓아 놓은 것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돌담을 보면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담입니다. 일반적으로는 큰 돌로 담을 쌓을 때 그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어서 담벼락을 완성하는 법인데 제주도의 담은 의외로 구멍이 많이 뚫린 모습이어서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큰 돌은 많은데 작은 돌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게을러서 대충 만들다 그만 둔 것일까?’ 뭐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렇게 담을 만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바람이 강한 제주도이기에 담벼락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만들어 두면 돌담이 그 바람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은 담이 무너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람이 지나갈 구멍을 두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다가 그 구멍을 출구 삼아 통과하게 되고 그러면서 바람이 약해져서 돌담은 무사한 것이지요. 그것은 제주도의 땅 바닥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은 집중호우가 내리지만 제주도의 땅은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비가 그렇게 억수같이 쏟아져도 금방 물이 빠져 나가버려서 비로 인한 피해가 다른 지역보다 현격하게 적다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 대입하여 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차곡차곡 마음에 다 담아 두는 사람도 있지만, 허허 웃으면서 쉬이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살다 보면 마음에 불쾌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고 또 소문에 휘둘릴 때도 있습니다. 그 때 그런 말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아 두면 병이 될 수 있습니다. 안 좋은 이야기가 내 귀에 들릴지라도 구멍이 뚫린 담을 통해서 바람이 빠져 나가듯이 그러려니 생각하면서 흘려보내는 여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들은 제주도 바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때 바로 내 마음을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도 돌담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말로 인한 상처가 내 마음에 남지 않고 그 말의 바람이 나를 쓰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과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내 마음에서 금방 잊어버리고, 반대로 마음에서 빨리 내어 버려야 할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원수 같은 말들은 돌에 새기듯이 단단히 새겨 두고 기억합니다. 마음에 은혜를 새기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이 되고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 같은 말들을 새기면 그것은 내 마음에 쓴 뿌리가 되어서 사람에게 부정적이 되고 그래서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기도하며 지금 내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원수를 자꾸 새겨서 계속해서 쓴 뿌리가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의 원수를 어서 지워버리십시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에서 원수를 지우라는 바로 그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학생은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고 직장인은 일이 손에 잘 안 잡히고 주부는 집 안 일도 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렇게 마음이 상처를 입어서 그것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몸도 함께 고통을 받고 또 삶이 엉망이 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32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내 마음에 돌담 구멍을 더 크게 내는 작업을 기도하는 가운데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의 바람이 내 마음에 머물지 않고 빨리 빨리 빠져나가게 하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참 중요합니다. 마음의 돌담 구멍이 클수록 행복은 더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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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최호숙 목사] “사쿠라”는 일본의 꽃이 아닌 하나님의 꽃
    모든 꽃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색깔과 관계없이 크기와 관계없이 예쁘고 마음을 편하게 한다. 꽃을 표현하는 영어 단어가 있는데 ‘flower’ 와 ‘blossom’이라는 단어다. 화초 식물에 피는 꽃을 ‘flower’라고 지칭하고, 과수 관목에 피는 꽃을 ‘blossom’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 벚꽃을 영어로 ‘cherry blossom’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모든 사람이 각종 꽃향기를 기대하며 마음 설렘(exciting)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설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운 설렘을 앗아가는 기상 악화 또는 병리 현상으로 인한 우울(depression)도 있다는 것이다. 2023년 올해의 봄은 한없이 기쁜 봄이요, 의미 있는 봄이다. 왜냐하면 코로나 시대를 맞아 3년의 세월 동안 봄꽃축제를 하지 못했었지만 마스크 벗도 마음껏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목회하는 통영에도 벚꽃의 명소 진해에 견줄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소규모 벚꽃축제를 하였다. 특히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통영 출신 축구선수 김민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김민재 사인(sign) 선물을 준다는 홍보로 더욱 열기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벚나무 자체를 싫어하고 벚꽃축제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벚꽃을 싫어하고 벚꽃축제를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벚꽃이 사쿠라 꽃이기 때문이란다. “사쿠라”라는 단어는 “사쿠라니쿠”에서 온 말로 연분홍색인 말고기에서 비롯되었다. 소고기인 줄 알고 샀더니 색깔은 비슷한데 말고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정치 세계에서 변절자들을 “사쿠라”라고 불렀던 시대가 있었다. 둘째 이유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란다. 일본이 전쟁에 승리하여 승리 기념 축제를 위하여 벚꽃축제를 하였고 그 축제 분위기를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벚꽃의 정체성에 대한 진위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벚꽃 원산지가 일본이 아니라 한국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것이 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졌다. 1962년 식물학자 박만규 국립과학관장은 “벚꽃은 우리나라 꽃 한라산이 원산지”라고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유전자 해독을 통해서 제주의 왕벗나무가 일본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고려시대 제작한 팔만대장경판 60% 이상이 벚나무로 만들어 졌음이 최근 조사에서 밝혀졌다. 정치적 이념에 따라 마음이 요동치며 벚꽃축제를 즐기면 친일몰이로 몰아가는 불편한 진실이 우리 삶 속에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나무를 우리 나무라 말하지 못하고 우리 꽃을 우리 꽃이라 말할 수 없다면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잃은 것이다. 벚꽃 하나 때문에 내 마음이 요동친다면 우리가 당당하게 주권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증거요 아직도 일본에 패배 의식, 피해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증거이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은 시각이 조금 달라야 한다. 벚꽃은 일본의 꽃도 한국의 꽃도 아닌 하나님의 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한 꽃을 인간의 생각으로 미워하고 제한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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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오성한 목사] 말씀에 푹 빠진 믿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현재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놀랍지 않은가? “믿습니다.”와 “믿음”은 다른 것이다. “믿습니다.”라고 하면 믿음인 줄 아는데 어떤 면에서 소망이다. 진짜 믿음은 “믿습니다.”라는 말을 안 해도 믿는다. "믿습니다."라는 말을 안 해야 하느냐, 그 말은 아니다. 소망도 있어야 한다. 소망과 믿음이 같이 가야 한다. 믿는 것은 "믿습니다."라는 말보다 강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믿는 것이다. 부부가 만날 때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아도 믿는다. 우리가 어머니를 믿는다고 하지 않아도 그냥 믿는 것이다. 우리가 깊은 신앙에 들어가면 어머니를 그냥 믿듯이 주님을 소망하고 믿게 된다. 믿음은 그냥 믿고 있다. 믿음으로 출발하고 마친다. “나는 치유 받을 것을 믿습니다.”라기 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나는 지금 치유 받은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믿음으로 나온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해 보자. 왜 못 믿는 것일까? 무지 때문이다. 영적 무지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암송하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모르면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믿음이다.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도 알아야 믿어진다. 여호와를 알면 주님이 나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오감과 경험을 통해 믿으려고 하기 때문 못 믿는다. 오감은 육이다. 육은 혼에서 나온다. 혼을 어떻게 훈련시켰냐가 육이 만들어 진다. 우리의 생각이 육을 움직인다. “학교 가야지”하는 생각이 몸을 움직이게 한다. 혼이 육을 움직인다. 그런데 혼의 생각이 새로운 피조물인 영에서 나온다면 영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육적이면 육의 영향력이 나온다. 혼이 육을 움직이다. 그래서 육적인 오감을 통해서만 느끼는 것은 믿음이 아닐 수 있다. 말씀에서 나오는 오감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모르기 때문에 못 믿는다. 믿음의 사람으로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 완전해 질수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 보면 온전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말이 온전하면 온전하다고 했다. 말이 완전하면 완전하다. 무슨 말 말인가? 착한 말과 선한 말이 아니다. 복음을 말하면 온전한 말이다.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다. 야고보서는 혀가 온 몸을 움직인다고 그랬다. 혀가 중요하다. 물론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좋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2).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했다.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다섯 가지다. 묵상은 주장하는 것이다. 묵상은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묵상은 읊조리는 것이다. 읊조리는 사람이 있다. 읊조리는 사람은 그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읊조리며 살아야 한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주님은 이 일에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나는 평안함이 있고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이 있다." "내가 불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괜찮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나를 안위하시고 보호하신다." "이 사망의 음침함이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어떤 어려움도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 나는 주님 안에서 평강이 있다."고 계속 읊조린다. 말씀을 들으라. 읽으라. 공부하라. 암송하라. 묵상하라. 나는 이것을 다섯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성경책을 다섯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다면 누가 쉽게 못 뺏을 것이다. 듣는 것만 하면 엄지손가락 한 개에 성경책을 올려놓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잘 올라가지도 않지만 올려놓는다고 해도 조금만 흔들리면 떨어집니다. 듣기만 하는 사람은 어쩌다 손가락에 올라가면 올라갔다고 좋아한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듣기만 하면 안 된다. 여러분이 듣기만 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무리 믿음을 가져도 떨어지기 쉽다. 읽기까지 한다면 이제 손가락 두개로 성경책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야, 이제 들었다. 야, 좋다"그러는데 옆에서 쉽게 빼앗아 갈 수 있다. 공부한다는 것은 세 손가락으로 성경을 잡는다고 보면 된다. 힘이 좀 더 들어간다. 그래도 빼앗기기 쉽습니다. 암송을 한다. 암송을 하면 힘이 생긴다. 그래도 불안하다. 묵상까지 한다. 다섯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는 것과 같다. 누가 쉽게 빼앗아 가지 못한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말씀을 어떻게 먹어야하는가?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서재를 만들어라. 책상을 만들어라. 공부도 하라. 암송도 하라. 자꾸 암송하고 묵상하고 주장하면 내 안에서 말씀의 역사가 나온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6-9).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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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신재철 목사] 괜히 인사했나?
    “소장님, 혹시 교회 다니세요?” 입주민의 전화는 늘 긴장이 된다. 좋은 일로 전화 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이번 전화의 용건은 신선했다. 나의 카톡 사진을 보았다며 신앙을 물어오셨다.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딱히 감출 이유도 없기에 개척교회 목사임을 밝힌다. “아이고, 그러셨구나. 역시 일하시는 모습이 다르시더라.” 나의 쑥스러운 고백과 다르게 입주민께서는 아주 반가워하시며 연신 칭찬 세례를 하신다. 교회에 가봐도 되냐는 말씀이 얼마나 반갑던지. 그분은 출석과 함께 등록하셨고 매일 예배드리며 눈물을 흘리는 울보 성도가 되었다. “목사님, 손자가 피아노를 치는데 반주를 해봐도 될까요?” 개척교회 사모는 바쁘다. 식사 준비, 예배 반주, 아이들 돌봄. 그 와중에 손을 조금 다치게 되었다. 하지만 반주를 쉴 수는 없어 상처를 싸매고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시고는 울보 성도님, 아니 권사님께서 중학교 3학년 손자가 피아노를 친다며 반주자로 추천하신다. 무조건 환영이다. 어느 지역의 중형교회 출석하던 아이는 그렇게 개척교회 반주자가 되었다. 실력이 제법이다. 그전 교회에서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반주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잘 왔다. 여기서 너를 사용하시나 보다. 얼마 뒤, 권사님의 세 딸과 사위 한 분이 교회에 방문하셨다. 물론 반주하는 아이의 어머니도. 어머니와 아들이 다니는 교회에 단순 방문인지 정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내심 기대를 해본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면 좋겠다는 생각. 대부분 개척교회 목사는 방문만 해도 이런 환상을 가져보지 않을까? “목사님, 지금 다니는 교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좋은나무교회 출석하겠습니다.” 환상이 현실이 되었다. 협소한 공간에 내놓을만한 시스템도 없는 교회. 목사 설교도 어눌하고 화려한 음악도 없는 교회에 등록하겠다는 뜻을 전하셨다. 둘 중 하나다. 교회보는 안목이 없는 초보 신앙인이거나 교회를 세우며 동역하고 싶은 열정 있는 신앙인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나는 무조건 할렐루야다. 나는 그렇게 일터 아파트에서 교회 가족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허름한 작업복에 청소하는 모습 보이기가 민망했지만 오가며 나누는 반가운 인사에 이제는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자주 볼 수 있어서 ‘진짜 목회’에 근접한 것 아닐까 싶은 느낌마저 들었다. “목사님께 인사드려야지. 뭐가 부끄러운거야?” 권사님 댁에 놀러 온 손녀. 이제는 우리 유치부 교인이 된 아이. 진짜 똘똘하고 예쁘게 생긴 아이다. 아들만 둘 있는 나에게는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 교회에서 만나면 살짝 와서 아는 척을 하고 자기 인형을 자랑하는 아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파트에서 만나면 너무 어색하다. 교회에서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네지만 아이는 숨어버린다. 하긴, 지금 나의 행색이 좀 그렇다. 작업하는 복장에 목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 자꾸 몸을 숨기는 아이에게 나의 행색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괜히 아는 척을 했나 싶다. 어느 주일 아침. 녹화해 둔 영상을 올려두었기에 온라인 예배 준비는 끝났다. 그래서 주일 오전이지만 여유가 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었을까? 코로나로 교회를 사용하지 않아 청소하지 않았던 공용 화장실이 떠올랐다. 코로나 이전에는 매주 직접 청소를 했는데 한참을 청소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화장실은 엉망이었고 나는 뜨거운 마음에 갑자기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다.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 고무장갑을 끼고 손에 청소 솔을 들고 있다. 주일 아침에 목사가 그러고 있다. “안녕하세요. 교회 가시나 봐요? 저는 여기 좋은나무교회 담임입니다.” 성경을 들고 말끔하게 차려입으신 노부부가 청소하는 앞을 지나간다. 교회 가시는 길이라 확신하고 반가움에 인사를 드린다. 그런데 어르신의 눈빛이 불편하다. 반가움은커녕 경계한다. 나를 살피는 눈빛이 호의적이지 않다. 하긴, 주일 아침에 슬리퍼 끌고 청소하는 목사가 좀 이상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초라함이 묵상되며 묘한 감정이 밀려온다. 짧은 시간 마주했지만, 그분도 나도 어색해진 느낌이다. ‘하, 이놈의 오지랖. 괜히 인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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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28)
    I. 서언(序言) 유대인들에게는 지켜야 할 많은 전통적인 절기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지키는 절기는 무교병의 절기라고도 하는 유월절과 맥추절(칠칠절)과 수장절(초막절)의 3대 절기이다. 이는 “매년 세 번 절기를 지키라”(출 23:14~17)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또한 새해의 개념을 포함한 나팔절과 죄를 속죄하는 속죄일, 오순절과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일을 기념하는 부림절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유월절은 고난 주간 중의 십자가 지심과 유월절 만찬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3일만의 부활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이에 유월절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또한 부활주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러한 절기 중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의미와 절기의 명칭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고찰 기독교의 절기는 구약과 달리 성탄절과 1월 6일부터 8주 동안 지키는 현현절(epiphan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는 사순절과 그 일정 중에 포함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 뒤를 이은 부활절, 또한 오순절과 연관된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종교개혁주일 등의 많은 절기들이 있다. 이상의 절기들 중에서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에 대한 의미와 명칭에 대해서 논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부활절을 1주일 앞둔 주일을 교회력으로 ‘종려주일(Palm Sunday)’라고 한다. 또한 그다음 월요일부터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절 전날인 8일까지는 ‘고난주간(passion week)’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애매모호하고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절기가 바로 종려주일이다. 필자의 경우도 종려주일이 되면 예배의 중심을 예루살렘 입성에 맞춘 성경본문과 말씀을 전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당하신 주간에 맞출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에 종려주일의 의미와 유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의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이때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환영했다. 이런 행위가 기념주일로 정해진 유래는 A.D 385년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동로마교회에서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예수님 때와 같이‘종려 행렬’을 행한데서 출발했다. 서로마 교회들의 경우는 6세기 경 스페인 의식서에 의하면, 축하 분위기가 아닌 애도의 분위기를 가짐으로서 고난주간의 의미를 담아서 행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 이후 중세시대에는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의 교회까지 행진하는 종려주일 관습을 가졌다. 이때 성도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또한 그 이후 가톨릭에서는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축성(祝聖)의식을 행하면서 그 중에서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 추방이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종려주일을 지키고 이를 행하기도 했다. III. 명칭과 구분과 결어 마지막으로 종려주일이란 명칭은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한글성경에는 종려나무로 번역됐지만 실제로는 대추야자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려나무로 번역된 이유는 중국에서 자라는 ‘당종려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서 종려주일이란 명칭보다 호산나 주일 등이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도 고민해 볼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종려주일이라고 해 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애매모호한 일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교회의 전통으로 인한 것으로서 동·서로마 교회는 고난주간에 종려주일을 포함시켜 지키지만, 그리스 정교회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리해서 일요일은 종려주일, 월요일부터는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두 계통의 전통에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이제 종려주일을 지나서 고난주간 속의 하루를 지내고 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보다 경건한 자세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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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조희완 목사] 부활의 신앙 (고전15:50-58)
    타종교에 비해서 기독교의 우월성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타종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도덕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별로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도 나름대로 훌륭한 가르침이 있고 이슬람교에도 좋은 가르침이 있고 유교에도 유익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종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한 것은 부활을 믿고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가운데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WCC 문제입니다.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는 단체이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하고 동성애를 인정하고 공산주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결코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비성경적인 사상이고 비 복음적인 이념을 가진 단체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가리켜서 ‘잠잔다.’는 표현을 씁니다. 깊은 잠을 자다가 정한 시간이 되면 다시 깨어서 일어나는 것처럼 성도들은 죽더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부활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고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성도들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환난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까닭은 장차 부활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51) 둘째는 승리를 보장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57) 셋째는, 맡은 직분에 충성하며 살아야 합니다.(58) 그렇게 살다가 주님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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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고난주간, 이단사이비가 급증한다는데···
    2023년 고난주간이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그리스도.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한 주간을 우리는 고난주간으로 기념한다. 한 주간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뇌와 묵상으로 예수당신과 함께해야 한다. 천국 복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이해하는 길은 예수 십자가와 함께 하는 길이다. 천국에 가는 길은 결코 우리가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주간 묵상하면서 오늘날 이단사이비 종교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몇 주 전 교회서 이단세미나를 가졌다. 새로운 사실들에 아연실색했다. 그동안 많은 이단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던 악순환의 상황이 그들의 실체였다. 그런데 최근 엄밀하게 대부분 교주를 숨기고 정통 교단의 가면을 쓰고 포교하던 신천지 등 이단들이 이제 교주를 메시아라 선포하고 노골적인 포교에 열광하고 있다. 우선 통계에 아연실색한다. 국내 이단을 섬기는 인구가 3백만이다. 내가 재림 예수라고 선포한 교주만 200명이라는 통계다. 가히 이단의 전성시대인가. 오늘날 사회 전반에 복음의 진리 싸움을 차치하고도 온갖 사회병리 현상을 초래하는 이단에 대한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이 여러 경계의 말씀을 설파했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이단의 거짓 구원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있을까. 고난 주간에 묵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이단의 가짜 메시아의 주장이다. 국내 200명에 이르는 재림 예수의 정체는 대부분 ‘단순 믿음’으로 현혹하는 구원의 장사 놀음 사기극이다. 영육의 연약한 심령에 접근, 지금 이 땅에 오신 재림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해결 받는다는 둔갑된 감언이설에 불쌍한 양들이 무참히 당하고 있다. 두 번째는 단순 명료하게 포장된 구원교리의 설파에 넘어간다. 유월절 떡과 잔을 받음으로써 구원을 보장받고 이후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단순한 가짜 교리가 인기(?)를 끌게 된다는 것. 여기서 우리는 다소 어려운 정통 교단의 구원 교리를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번 고난주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의 깊이와 높이를 묵상해 보자. 먼저 우리가 섬기는 종교개혁 이후 십자가 구원의 교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 얼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설교가들이 성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 구원 교리가 어쩜 기도와 말씀 그리고 묵상의 신앙 속에서 은혜의 체험에서 확신하는 믿음의 길을 금방 찾기는 쉽지가 않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전한 복음이다.(행16:31)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기초 진리다. 그러나 이 믿음의 이해만으로 예수 구원을 깨닫고 믿을 수 있을까. 이단의 정형화(定型化)된 단순 교리를 넘어야 한다. 성경 속의 예수님이 세상의 우리들의 죄를 한탄하시고 당신이 직접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십자가의 도를 이해해야 한다. 그 구원의 길을 선물하신 크고도 놀라운 은혜에 우리는 환희에 젖어 살아야한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모두 죄악의 괴수들을 구원하는 길은 당신이 모두 죄를 짊어지는 방법밖에 없어 눈물 흘리시고 만왕의 왕이 십자가에 오르셨다. 그 믿음은 저항할 수 없이 만세전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칼빈의 예정설)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 백성이 되는 길이 십자가의 도(道)일 것이다.(롬1:17) 그리고 당신이 주신 그 믿음은 우리와 함께 가꾸어가는 현재진행의 믿음으로 당신을 기쁘게 하며 살아간다. 바로 천국 백성 성도의 삶이다. 심오(深奧)하고 심원(深源)한 주님의 뜻을 만끽하고 사유(思惟)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는 구원 백성의 길을 고난 주간에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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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3
  • [박봉석 목사] 나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한 흑인 선교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한 백인 부인의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큰 출세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하고보니까 딱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흑인 빈민촌 움막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백인 부인이 왜 자기에게 청소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놀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곧장 쫓겨났습니다. 백인 부인이 보기에는 청소는 고사하고 더러운 발로 온 집안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소년이 쫓겨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누추한 흑인 빈민촌에 사는 소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깨끗했지만 백인 부인의 기준으로는 온 집안이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예배 때에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며 나를 변화시켜 갈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다른 기도를 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인지 알 텐데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서 자신의 종교적인 탁월함과 의로움을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성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그는 알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바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독자 여러분, 늘 기도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은 나의 신앙과 헌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성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참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고 죄인 된 존재임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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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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