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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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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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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정의(JUSTICE)가 없어지는 대한민국 사회인가?
세계 지성인들을 넘어 일반인들에까지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는 무엇인가’(JUSTICE)의 책을 읽으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급변하는 세계 정치 경제 사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의문들을 진지하게 풀어낸 가히 세계 베스트 셀러의 가치가 있다. 27세에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마이클 교수가 강의 현장에서 수많은 학생들과의 강의와 질문 그리고 토론 심지어 강의장에서 논제를 놓고 투표를 하면서 정의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살아있는 저서에서 읽히고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속의 사회 정치 경제 석학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토론하고 결론을 내려고 애쓴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별다른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온 세계 인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정의의 뜻을 독자 나름대로 찾을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JUSTICE)는 어떻게 재단되고 사회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가. 보편적 사회 기능에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재화의 분배를 통해 포상과 장려의 삶의 문화를 위해 법치가 기능을 한다. 이에 따른 사회 공공선을 이뤄감이 이상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 정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의가 이때만큼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생겨나고 있다. 갈등과 분열의 사회현상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사회정의의 담론이 우리 앞에서 서있다. 22대 국회의원총선을 겪으면서 정의와 불의가 혼돈되고 있다. 보편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담론에서 찾아낼 수 없는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이 무섭다. 사회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법과 도덕의 적응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한다. 그것이 안 되면 국가관리의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양보해야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전과 기록은 이제 불필요하다. 너무나 무섭고 부끄러운 사회 범죄를 행하고도 정치 권력에 탐욕을 내는 군상들이 사회 정의를 짓뭉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경 창세기에서 보듯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공동체의 선을 함께 이뤄 가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구원의 목적을 위해 심판 현장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공동체 선을 위해 작업하신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덮어 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 운동가 스콧 D 알렌은 ‘사회 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라는 저서에서 설파했다. 사회 정의가 성경적 정의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오늘날 이미 죽었다고 하는 인본주의 막시즘이 문화 막시즘으로 다시 살아나 인류를 혼돈하게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은 이미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인본주의 이념으로 정의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는 것에만 나온 진단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주변 정세에서 흘러들어오는 정의의 가치를 깨고 있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한 수용이 우리사회를 흔들고 있다. 정의사회의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할 것 인가. 오직 복음 전파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정의가 세계 복음화와 함께 인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무브(move)가 필요하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독교 기본 핵심이 온 세계 복음으로 전파될 때 이 땅은 그래도 공동선의 문화가 세계를 리드하지 않겠는가. 정의(JUSTICE)가 살아있는 진정 행복의 땅이 되지 않겠는가. 정의가 메말라버리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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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40년이 넘는 목회 생활과 일정 기간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한 필자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에서는 혼동이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예배인가? 예식인가? 또 예배 형식을 갖춘 집회와 기도회는 예배인가 집회와 기도회인가? 이런 명제 앞에서도 때로는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를 분석하고 논하고자 한다. II.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용어분석 1. 예배(禮拜)란? : 일반적인 사전적 뜻은 ‘초월적 존재 앞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의식’이다.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거의 대부분 예배학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예배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찬양 예배 등이다. 2. 예식(禮式)이란: 사전적인 뜻은 ‘예법에 의해 행해지는 식’으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예를 들고 있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길흉사에서 하나님께 예배형식을 갖추는 것’이라 했다. 이는 기존 예배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 본다면, 예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에서 하나님께 예배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같은듯하나 대상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예식, 장례예식, 각종 임직식, 첫돌, 회갑, 입학, 졸업, 취업, 개업, 첫돌예배 등 인간 중심으로 발생하는 많은 예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집회(集會)란? : 사전적인 뜻은 ‘특정한 공동목표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이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교인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이는 일체의 모임’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러 유형의 부흥회, 수련회 등으로 사람이 중심이다. 4.기도회(祈禱會)란? : 먼저 祈禱의 일반적인 뜻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祈禱會란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우리 개신교적 의미로도 일반적인 뜻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모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경우는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III.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서 정리한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이 4가지 용어는 각각 그 대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일이 중심인 예식과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회와 집회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두 경우도 예배 형식은 있지만, 그 성격이 인간의 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인 성격에 따라 기도회와 집회라고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도 이 4가지 유형은 모두 성격과 목적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들이 위의 이런 4가지 유형들이 혼합되어 저마다의 본질이 퇴색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장복 교수와 같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국문학자인 故 나체운 교수는 4가지 유형의 행위들이 모두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라는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어떤 용어든지 구태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어나 원어로 말하면 간단한 것을 우리는 뜻글자인 한문과 변화무쌍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사용하다보니 통일된 용어 사용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같은 교단의 교수들과 표준 예식서 마저도 견해가 일치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해본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지만, 1부는 예배, 2부는 그 성격과 목적에 맞춘 순서를 진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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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오랫동안 표류한 선박이 드넓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선상생활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객선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선원들은 여객선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주시오. 우리는 갈증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그러자 그 여객선의 승객들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와 있소. 그대들이 바라보는 푸른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마존의 강물이오. 물통을 내려 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되오.” 곧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구원의 맑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믿음의 물통을 내려서 그 구원의 강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물통을 내리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구원의 강물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자 그는 “저는 살면서 공짜로 무엇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 값을 지불했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찬란한 태양 빛을 늘 받으면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매일 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물음에 그 사람은 “그것은 너무 비싼 것이라서 값을 지불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전도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비싸서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은 너무 비싸서 오직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 앞에는 그 그림들의 판매 가격이 각각 붙어 있었습니다. 가령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는 칠백만 달러 정도를 호가하며,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 이백만달러 내외였고, 루벤스라는 화가의 그림은 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그 앞으로 가보니 ‘priceles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들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작품은 값이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지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공짜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셨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의 자녀들을 얼마의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자녀들의 가격을 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죠! 정말 소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다 받으시며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가치로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가 아니고 그 은혜이니 우리는 우리 평생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아니 나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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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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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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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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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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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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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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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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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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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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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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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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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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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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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
- 1. 서언(序言) 언젠가 어떤 교계 신문에서 “예수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란 제목의 글이 게재되어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에서 국어학과 예배학, 비교종교학을 등의 언어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쳤던 필자로서는 아주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칭어로 호칭한다면 그 뒷말도 ‘예수님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님 존함으로’라고 해야 경어 원리상 옳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대해서 이 말의 진위여부를 논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전자이든 후자이든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이 옳은지의 정답을 논하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2. 기고(起稿)의 동기 또한 이 용어 하나를 어떻게 사용 하느냐?를 읽고 보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느낀 점이 아주 많았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교회의 신앙적인 바른 용어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타 종교나 신앙적이지 않는 용어들, 심지어 타 종교의 교리적인 언어들까지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떤 언어든지 그 생성의 근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단일 민족의 역사로 이어져 왔고, 비교적 다 문화가 아닌 단일 문화권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사용언어의 고착화는 옛날부터 되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언어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의 종교적인 전통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그러한 용어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타 종교권의 말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경남기독신문에서 이러한 필자의 작은 사명을 정리하여 발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래서 7-8년 전에 근 3년여 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의 지면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소견을 발표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 형식으로 연재하게 될 것이지만, 용기를 주시는 몇분들의 요청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감히 졸고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기고를 함과 동시에 책으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전문성과 논리성을 갖춘 다수의 선행연구들과 서적들이 있었고, 또 이를 참고하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전1:9)는 말씀대로 앞의 선행연구들과 내용이 비슷하거나 반복되는 내용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고를 내는 것은 용어란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성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그 부침(浮沈)을 계속하며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본 기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기독교 용어를 중심으로 하고, 기타 타 종교권 용어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과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들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각 종교의 역사성과 전문성에 따른 용어들의 새로운 발견과 차이성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3. 결어(結語)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함으로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용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작은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선행연구들을 참고하면서 나름대로 발견한 작은 부분들을 첨가하여 현시대에 알맞은 용어연구를 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연구의 기고가 오늘날의 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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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의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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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희 목사] 함께 노력하는 다음세대 사역
- 얼마전 통합 제주노회 서남시찰 장로회에서 다음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역량강화 사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청소년 이해와 소통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중문교회 오공익목사님께서 2030세대에 대해서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핵심주제는 이러했습니다. 1. 청소년 이해는 불가합니다. 그냥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시작입니다. 2. 아이들을 존중해 주십시오. 루소는 어린이를 '축소된 성인'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보았는데,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고 하셨고,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존중하며 안아줄 때에, 아이들은 그 품이 곧 교회며,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3. 아이들에게 실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아이들은 가상현실속에 심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은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액션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리액션을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부모들과 기성세대에 의해서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늘 실패할것만 두려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럼으로 교회에서 장로님께서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들을 신뢰하며 마음껏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실수가 많고 어설퍼도)정말 잘했다고 “리액션”을 하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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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희 목사] 함께 노력하는 다음세대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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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 어느 크리스천 기업인의 3가지 성공 비결
- 성공한 크리스천 기업인이 두레마을을 방문하였기에 여러 시간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목사보다 더 신앙이 좋은 기업인이 있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기업인이 말하기를 자기가 기업을 경영하여 돈을 버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선교지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지로 찾아다니며 선교사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 자신이 기업 경영에 성공한 이유로 3가지를 들면서, 모두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내용이라 하였습니다. 자유, 토론, 질문 3지입니다. 1. 자유가 없이는 좋은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다음 같이 일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 어떤 권력도, 어떤 권위로도 자유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자유를 땅의 권력으로 누를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권력이나 권력자가 있다면 저항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저항권’이 있습니다. 만약 정부가 부당한 방법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때에 저항하는 권리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신앙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종교를 ‘아편 종교’라 합니다. 신앙은 자유함이 있을 때에 진정한 신앙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 활력이 있고 번영이 있음은 성경적 신앙이 가르쳐 주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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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 어느 크리스천 기업인의 3가지 성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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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열 목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라
-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삶의 자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결과도 확연한 차이를 두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형통의 삶을 살 수가 있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잊지 말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하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미물 하나에도 목적과 뜻을 두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자기 계획으로만 넘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확신의 딜레마에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을 치며 능력자들을 찾아 시간을 허비하고 영적인 혼란만 가중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현명한 척 자고 하지 말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 ( “찬송가(623장)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 그리하면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경륜에 따라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참담한 상황에 직면해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꿈을 가지고 준비만 잘 되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반드시 사용하실 것이다. 계획하고 꿈꾸는 일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희망이 없다”. “이젠 다 틀렸다”고 낙망치 말라. 그 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꿈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희망을 잃지 말고 “나는 너무 늦었다.”고 하지 말라. 나는 늦었어도 하나님은 늦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으라. 짙은 구름이 드리워 세상이 캄캄해서 당장 비가 내려 창수가나 모든 것이 무너져 떠내려 갈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구름 뒤에는 해가 있고 비가 그치면 다시 해가 비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더욱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삶을 구체화하라. 믿음과 소망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헌신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이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며 소박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다.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 후에 더욱 성숙한 믿음을 얻는다. 문제를 극복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을 때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하지만 기적이 순탄한 인생대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주어진다.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실천적인 삶을 더 원하신다. 믿음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뜻대로 살기를 힘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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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열 목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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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보혈의 능력
- 옛날 사극드라마나 전쟁영화를 보면 서로 싸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서로 죽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칼로 싸우든 총으로 싸우든 서로 싸우다가 칼이나 총에 맞아서 피를 많이 흘리면 죽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는 약 5-6ml의 피가 있는데 그 중에 약 30%를 흘리면 생명이 위험해 지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피를 수혈해 주면 다시 살아납니다. 왜 피를 흘리면 사람이 죽고, 피를 공급해 주면 살아난다는 말은 곧, 피가 곧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먹는 것은 곧 생명을 먹는 것이 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생명의 근원인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수혈이 되어서 살아난 것입니다. 성도들이 일 년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때가 바로 이 고난주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생각할 때 가슴이 뛰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고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이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느껴보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보혈은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출12:23) 둘째로, 보혈은 화목의 능력이 있습니다.(엡2:13-14) 셋째로, 보혈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벧전2:24) 십자가 보혈을 힘입어서 구원의 은혜와 화평과 치유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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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보혈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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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건강한 교회
- 아름다운 신앙생활에는 다섯 가지 구호가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인격을 향기롭게 그중에서 교회는 건강해야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혜와 키가 자란다. 식물은 심어놓으면 반드시 자란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 여기서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말한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걸어서 로마까지 가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가 되었다. 그가 가정을 이루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요 동업자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사람은 각자 개성이 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 지방에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해서 세운 베뢰아 교인들은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변화가 되어서 그가 프로그램, 시스템을 만든다. 가정을 이룬다. 교회를 세운다. 가정은 교회처럼, 교회는 가정처럼 되어야 한다. 모든 가정은 행복해야 된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 자녀는 없다. 가화만사성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가정생활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우리는 천대까지 복을 받는 명가를 이루어야 된다. 교회는 영성이 있다.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된다. 성령의 영감이 넘쳐야 된다. 예배의 감격이 있는 곳이 건강한 교회이다. 교회는 복음이 흘러가야 된다. 나라는 국격이 있다. 성경에서 5대 제국은 무너져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성도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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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건강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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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치유와 기적의 삶
- 나는 믿는 자에게 주신 기적의 능력을 믿고 이미 주신 권세를 인정하고 환영하는 기도를 많이 한다. 신바람이 나기도 한다. 뜨겁게 말씀을 인정하는 기도를 할 때, 나에게 주신 능력이 믿어지고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보시고 그 일을 따라 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보았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본 사람은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따라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들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보셨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아들도 그것을 행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열심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 기도를 자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마가복음을 행동 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어진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보다 “즉시”, “곧” 등의 단어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마가복음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본다. 제일 먼저 원천적인 강렬함이 보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기도하면 더 강렬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경들도 나의 기도목록들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 4명을 부르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였다.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였다. 이 두 형제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는데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안에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다섯 가지나 일어남을 볼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이 기사와 표적이 함께 했음을 분명히 보았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심의 권세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뿐만 아니었다. 능력 있는 가르침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르칠 때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막1:26).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장모가 집에서 열병이 들어 누워있었는데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즉석에서 들었다(막1:31). 저물게 되었을 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한다(막1:34). 밤이 되어 주무신 다음 새벽 일찍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아내셨다(막1:39). 연이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간청을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한다((막1:41-42). 이렇게 짧은 기록 속에 다섯 번이나 생동감 있는 표적과 기사와 함께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 것”이다(요5:19).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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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 영국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2019년이 끝나갑니다. 나는 오늘(28일) 올해의 마무리를 위하여 오늘 함양, 산청, 고령을 다녀왔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어 아침 8시에 집에서 출발하였다가 밤 11시에 돌아왔습니다. 피곤하지만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일의 마무리로 다녀오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2019년이기에 나머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하는 데에 하루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인생살이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됩니다. 젊은 날들은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이 범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나이 들어가면서 마무리를 잘 하게 되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도 시행착오도 오히려 보석같이 빛나게 됩니다. 야구 경기에 9회 말 홈런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살이를 그와 같이 9회 말 홈런으로 멋진 마무리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너그러움’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너그러움이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너그러움에 인색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서로 상처 받으며 스트레스를 쌓아 갑니다. 한 해를 너그러움으로 마무리하도록 힘써 봅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너그러워집시다. 자신이 지난날 멍청하게 살아왔던 일들에도 너그러워집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줍시다. 그러면 인생 마무리를 훨씬 더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지난날들에는 그렇게 멍청한 일들을 하였으니, 이제 나이 들어 마무리를 잘하자. 내 인생 9회 말 홈런으로 마무리하자. 이런 식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멋있게 마무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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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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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 어느 집의 아이 하나가 큰 돌 하나를 마당 건너편으로 옮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넌 왜 네가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있니?” 아이는 낑낑대며 고생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밉고 속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 제가 온 힘을 다 쓰고 있잖아요. 제가 낑낑대고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니. 그것이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야!”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전혀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기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도 해보지도 않고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의 주역이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도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다는 확신으로 인해 여러 번 무릎을 꿇곤 했다. 나 자신의 확신과 주변 사람들의 확신만 가지고는 하루를 살아가기에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무릎을 꿇으며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내 삶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갑자기 퇴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상에 해고 통보서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직장과 자신의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는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방황한 후에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나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다 나를 배신하는 것 같소.”그 말을 듣던 그의 아내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만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아내의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며칠 기도하는 동안 마음속에 있던 직장과 상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 속의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자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얻어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5년 만에 작지만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재미를 붙여서 늘 기도하던 그는 어느 날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기 저기 여행을 하다 보니 좋은 호텔이 없습니다. 멋진 호텔은 있지만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로운 호텔을 지었으면 합니다. 아주 깨끗한 호텔, 그러면서도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체인이 된 홀리데이 인 호텔(Holiday In Hotel) 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홀리데이 인 호텔의 창업자인 케몬스 윌슨이라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기도해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그리피스 조이너는 자신의 승리의 비결을 말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고 나서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는 진짜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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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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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
- 주안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최선의 길(the best way)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하나님은 매우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도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계의 벽 앞에서 인내하는 믿음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어찌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19년도는 정치, 경제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갈등이 우리 사회에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산다는 것이 스트레스 가운데 사는 것으로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은 성도님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금하여 주시므로 교회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물겨운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해에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건강, 자녀들의 미래와 경제생활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키고 헌신해 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방인교회와 유대인교회가 하나라는 말씀처럼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오신 올드 타이머(Old Timer)가 계시기에 오늘의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이 뉴 커머(New Comer)가 오셨기에 내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셨듯이 서로를 더욱 존중하면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연말과 연시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송구영신예배에 온 가족이함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신년 및 특별새벽부흥회 등에 온 가족이 꼭 참석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모두가 힘써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와 자녀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를 별처럼 밝혔던 에스더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손들이 삶에서 당하는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는 승리가 이번 신년 예배부터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가까운 성도 중에 차편이 없는 분들을 돌아보고 카풀로 섬기는 등 성도가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우리나라와 열방(列邦)을 위해 쓰임받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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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