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김성수 총장]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더니 …
    국내 주요 일간지의 보도와 같이 북한이 지난 5일과 11일 극초음속(음속의 10배,시속 약 1만 2240km) 추정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단거리 탄도미사일 추정 발사체 2발을 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 미사일은 탐지와 요격이 불가능해서 한미 요격망을 무력화시키는 최 첨단 무기로 미국 본토에 대해서도 핵 타격처럼 위협적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년 9월 15일에 이어 4개월 만에 두 번째로 열차를 활용한 단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장면도 공개했다고 합니다. ‘열차 발사 탄도미사일’은 터널에 숨어있다가 기습발사가 가능하고 북한 전역 철도망을 이용해 어느 지역에서도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다방면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해야 할 우리 정부와 정치인들은 오로지 대선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군대가 과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럴 의지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국민들도 이제는 북한 미사일 발사 소식에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순박한 국민들로서는 어떻게 할 방도도 없고 그냥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에도 이런 위기의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온 땅에 무기를 만드는 철공이 없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을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중인 때였습니다. 블레셋 족속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적인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족속들은 조그마한 군사적인 어떤 모양만 있어도 금방 갈등을 초래하고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들 두 백성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때가 전쟁 때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위험한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적에 대해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적이 있었지만 이들 대적들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대적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새로운 무기들을 전혀 만들지 않았고 일상 생활에만 분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분주해 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데 분주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철공들에게 자기들에게 와서 일해 줄 수 없는지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할 일이 없던 철공들은 기꺼이 동의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 철공들에게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나라간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나팔을 불어 군대를 모았는데문제는 전쟁을 위한 무기를 갈고 만들어야 할 철공들이 없었습니다. 평화의 때에 이들 철공들에 대해서 너무도 무관심했기 때문에 막상 철공들이 필요 했을 때는 이들 철공들이 모두 불레셋에 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마치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던 위기의 시대와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오늘 국가의 안보 위기를 위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교회의 대적을 더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 때에도 우리의 대적들은 항상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대적들이 있습니다. 이 대적들은 너무나도 적극적이고 활기가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제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항하면서도,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고, 직장 생활을 하고,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도 “약은 내가 바르지만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세속주의에 물든 우리는 “약도 내가 바르고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라고 하는 세속적 인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과 지식과 재능과 과학기술을 가지고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바로 이런 생각을 더 고양시키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은 과학과 과학기술의 문제지 더 이상 신앙과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짓 신념을 우리 가슴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흔히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너무도 평화롭고,과학기술의 힘이 우리를 너무 안락하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가?우리는 아직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지 않는가? 자유롭게 직장 생활할 수 있고,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집도 수리하고 꾸밀 수 있고, 죽은 자들을 장사할 수도 있는데, 도대체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화의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세속적 사상들이 도처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성경적 가치관을 송두리체 부인하는 가치관들이 우리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교회 안에도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침투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적들은 아주 우아하고 교양이 있는 듯, 친절하게, 관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안락한 자세로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우리의 바로 대적들을 수용하게됩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언제나 적극적이며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대적들과 더불어 공개적인 전쟁을 해야 하는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자체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철공이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철공들을 준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오피니언
    • 칼럼
    2022-01-19
  • [조희완 목사] 권면할 일들 (행14:19-28)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천 원 권 지폐에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율곡 이이>선생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13세 때 처음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후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합격을 해서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세 때는 장원급제를 해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대제학이라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가 중요한 관직에 올랐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해 있는 정치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10만 대군을 양성해서 국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목숨을 건 충고와 권면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7년 동안 왜군들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외면한 댓 가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권면이나,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의 권면은 귀담아서 듣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까닭은 바로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10)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에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해야 합니다.(행14:21-22)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배를 권면해야 합니다.(히10:24-25) 셋째는, 적극적으로 회해를 권면해야 합니다.(고후5:18-19)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2-01-19
  • [오성한 목사] 성찬과 비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하고, 중요한 존재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가 없이 못살겠다고 지신 것이 십자가 죽음이다. 우리 대신 죽을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나는 죽도록 이 여인을 사랑한다. 나는 이 여인이 없이는 살 가치가 없다”고 만방에 공포한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이다. 온 천하에 나는 이 여인을 사랑하여 하나가 되었다고 공포하는 것이 성찬이다. 성찬은 사랑의 고백이다. 첫 성찬은 사랑하심을 만방에 공포하신 시간이었다. 스스로 하나 되신 시간이다. 우리가 분명한 정체성이 없는 것은 새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정체성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정체성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셔서 주신 정체성을 가져라. 만왕의 왕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단다. 목숨을 걸고 구출하셔야 했다. 성찬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겨있다.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신랑을 얻었다. 신랑은 그 날을 잊지 말자고 한다.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5)고 부탁하셨다.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성찬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찬 속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날마다 성찬을 하라. 성찬을 깨닫는 것은 주님의 사랑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신랑과 신부에겐 비밀이 있다.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창조주와 결혼을 했다. 결혼 서약인 새 언약은 최고의 언약이다. 나를 사랑해서 당신이 스스로 하나 되심을 선포하셨다. 놀라운 비밀이다.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 되었다. 사랑하는 신랑은 언제나 우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한다. 우리가 신랑과 하나 됨으로 신랑이 우리의 죄로 심판받으실 때 우리도 심판을 받았다. 신랑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 한 것이다. 신랑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은 나와 하나가 되어 하신 일이다. 예수님과 하나 됨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 또 우리는 신랑과 함께 일으켜 졌다. 나아가 우리는 신랑과 함께 하늘에까지 함께 앉혔다(엡2:6). 이것은 세상이 모르는 비밀이다. 이제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게 된 놀라운 비밀이다.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이것이 하나 됨의 비밀이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비밀이다. 우리는 “예수님 함께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복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알겠는가?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내가 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기에 떨어 질 수 없게 해 주셨다. 그분이 찾아 오셨기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다. 놀라운 비밀이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도 없는 비밀이다.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나도 하늘 우편에 앉아 있다. 성경은 이 정도로 우리의 정체성의 회복을 완벽함으로 말한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비밀은 알려 줘야 알 수 있다. 신랑은 말씀을 통해 비밀을 알려 주시고 계신다. 듣기만 하면 된다. 들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에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함께’를 넘어 하나 되기를 원하셨다. 그저 단순하게 ‘함께’를 뛰어 넘어 새 언약을 맺으셔서 임마누엘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엄청난 복이 임한 것이다. 우리에게 보여 지고, 깨달아 지고, 다가 올 때 죄에서 벗어난 확신을 갖게 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9절의 거듭난 사람은 죄에 있지 않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는 말씀 앞에 우리는 담대히 “아멘” 할 수 있다. 복음의 완전한 이해가 없으면 이 성경구절이 많이 혼란스럽다. 비밀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죄인인데, 죄를 짓고 있는데,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성경이 말하니 어렵다. 육으로 생각하니 어려운 것이다. 로마서 6장만 잘 읽어 봐도 우리는 죄에서 분리 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청산하셨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청산하셨다. 만약 미래는 “네가 잘 살아서 해결하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누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도를 깨달아 이미 이루어 졌음을 수용하고, 주님과 하나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기독교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우리가 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다. 하나이기에 예수님께서 계신 하늘에도 함께 앉아 있다(엡2:6, 사6:1).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된 존재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다”(엡2:5-6)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죄가 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청산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셔서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당신께서 스스로 새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의 죄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죽었고 부활했고 승천했다. 우리는 주님과 하나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1-19
  • [신재철 목사] 행복한 꼴찌
    시골 초등학교 마을 운동회는 동네잔치다. 일단 먹을 것을 파는 분들이 몰려온다. 커다란 통에서 퍼주시는 아이스크림, 거뭇거뭇한 번데기, 머리통만한 솜사탕까지. 평소에 먹지 못하는 간식을 볼 수 있고 먹을 수 있다. 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나오셔서 함께 즐기는 집도 있다. 우리 학교는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고적대’가 있다. 각종 악기들의 조합도 볼거리지만 가장 선두에 위치한 ‘고적대장’은 시선을 쓸어갈 정도의 매력이 있다. 뾰족한 봉을 흔들며 리듬을 맞추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 고적대장 누나의 미모는 늘 학교의 원탑이었다. 멋진 복장과 씩씩한 음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으로 저런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더욱 신나고 신기한 순서는 ‘차전놀이’다. 커다란 기구를 만들어 장수 복장을 한 사람이 선두에 타서 진두지휘하며 두 진영이 싸움을 한다.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이 되지 않을 듯하다. 놀이의 규칙도 잘 모르겠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커다란 장비를 들고 부대끼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임진왜란의 한 장면이 저와 같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들이 모여 연습하고 시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때 아이들은 정말 강했구나 싶다. 운동회 순서를 즐기다가도 긴장이 되는 순서. 100미터 달기기. 경쟁이 있고 순위가 결정된다. 결승지점에서 손에 찍어주는 숫자에 따라 선물과 부모님의 대우가 달라진다. 어떤 아이는 부모님께 등짝을 맞기도 한다. 달리기를 그리 못하지 않았던 나도 긴장이 되는 시간이다. 줄을 지어 쪼그려 앉아 대기하는데 옆 친구가 신경 쓰인다. 적당히 긴장한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떠들고 있는데 이 친구는 말도 없고 진짜로 얼굴빛이 어둡다. 너무 긴장해 있다.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 상황인지를 물어보았다. “내가 달리기만 하면 꼴찌해서. 너무 싫고 무서워.” 친구의 답을 듣고 고민이 생긴다. 나는 반장이 아닌가. 가능하면 친구들의 고민을 해결해 줘야 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아 걱정하지 말고 뛰어. 내가 같이 뛰어 줄게.” 내 말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였는지 친구는 계속 긴장한 상태로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화약의 거친 소리가 울리고 우리는 초등학생에게 제법 긴 거리를 전력으로 뛰기 시작한다. 친구는 정말 느렸다. 다리도 팔도 같이 느리게 움직이는 듯 했다. 나는 일단 친구와 보조를 맞추었다. 가만 보니 그냥 두면 이 친구의 꼴찌가 확실하다.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포기하지 말고 달려보자고 말을 건네 본다. 앞선 친구들은 이미 하얀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결승 지점에서 기다리던 우리 어머님은 묘한 표정을 지으신다. 아무리 봐도 아들이 열심히 안 뛰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해 못할 순위를 달리고 있었으니. 이미 테이프도 사라지고 결승 라인도 여럿 발자국으로 히끗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던 친구에게 마지막 파이팅을 외치며 나는 한발을 뒤로 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리기 꼴찌를 경험했다. 내 손에는 숫자 8이 찍혔다. 머쓱하게 엄마와 마주하고, 어머님의 눈빛은 내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듯 했다. “친구가 꼴찌하기 싫다고 해서요. 그래서 대신 꼴찌 했어요. 죄송해요.” 엄마가 꼭 안아주신다. 솔직히 혼날 줄 알았는데, 엄마가 등을 두드려 주시며 잘했다 칭찬하신다. 사실 정확히 뭘 잘했는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꼴찌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즐거운 운동회였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 : 삼위일체 하나님의 호칭 문제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로 그동안 타 종교권의 용어나 일반적인 용어들 중에서 그 용어에 대한 바른 인식과 잘 못 사용하고 있는 내용들을 발췌하여 논하였다. 부족한 필자가 이를 논하였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하고자 하는 것은 본인이 전공했거나 가르치고 있는 국문학과 실천신학, 또한 비교종교학 등을 총망라한 것과 선진 연구들을 참고한 것임을 먼저 밝히면서 본 호와 앞으로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용어들이다. 이를 논하는 것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신앙생활 중의 용어들 중에는 잘못 사용하는 용어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용어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존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이다. II. ‘하나님’, ‘예수님’,‘성령님’에 대한 용어의 고찰 흔히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호칭한다. 하지만, 유독 ‘성령’에 있어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공식적인 서식이나 문자로 기록할 때는 ‘예수님’도 ‘예수’라고 쓰고 있다. 이에 예장 통합교단에서는 2001년 86회 총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존칭접미사‘님’자를 붙여서‘하나님’‘예수님’‘성령님’으로 호칭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님’자의 사용은 바로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는“하나님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님’자는 존칭접미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즉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은 보통명사로 부르는 것이지 존칭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예수’, ‘성령’ 등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 명사이기 때문에 ‘님’자를 공식적인 문서에는 쓸 수 없다고 했다. 단지‘가리킴 말’이 아닌 부르는‘부름 말’에 있어서는 ‘님’자는 붙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 성령님이라 부르는 것은 국어학적인 차원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차원에서 볼 때 3위 모두에 ‘님’자를 붙이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 신학자는 “자칫 잘못하면, 이 호칭하나로 ‘하나님’은 주권적 사역자로 인정하고, ‘예수님, 성령님’은 보조적 사역자로 전락 할 수도 있다.”라고도 경고했다. 어쩌면 이런 논란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칭접미사 ‘님’의 문제는 필자의 견해로는 국어학적인 개념을 넘어선 신앙적인 측면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통합교단에서 결의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동일하게 ‘님’자를 붙이는 것이 좋다고 본다. 또한 사전적 용어인 ‘하느님’이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인 종교적인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되듯이 ‘예수님, 성령님’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교회에서 이런 호칭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종교적인 용어로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용어는 비록 교과서적인 단어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느 신학자의 표현그대로 신앙생활 속의 ‘부름 말’에서는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III . 맺는 말 이상에서 볼 때 최소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호칭 많 큼은 항상 존칭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호칭어 하나의 사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기술한 적도 있지만 절의 승려는 어법에도 없는 ‘스님’이라고 존칭어를 사용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믿는 만유의 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수’,“성령’등의 예사 낮춤말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 자체의 모순이요, 하나님께 대단히 죄송한 일이다. 맺으면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는 이런 용어 사용자체가 우리의 언어문화를 또 하나의 우리만의 격리된 울타리를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용어 자체가 우리 신앙의 본질은 아닌, 지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바른 언어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용어 사용은 우리의 신앙적 교양인 동시에 좋은 신앙인의 태도 일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2-01-19
  • [김성수 총장]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홀리데이’
    인류의 구원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축하하는 아름답고 복된 계절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상황 이전 같았으면 교회와 백화점의 성탄 장식과 가끔씩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우리 모두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즐거워야 할 성탄의 계절도 그저 쓸쓸하고 심지어는 암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달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는 찬송을 들으면 가슴이 마냥 설레이고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를 기원하는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가 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Merry Christmas!"라고 하지 않고 “Happy Holiday!"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도 ‘크리스마스’가 빠지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성탄절을 맞아 석가 탄신일과 비슷하게 기독탄신일로 개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곤 했습니다.예수 탄신일도 아니고 기독탄신일로 해야 한다는 소리가 계속해서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석가와 예수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이상한 발상입니다. 부시 대통령 시절에 미국의 백악관이 140만명에 이르는 대통령 내외의 친구와 지지자들에게 카드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 기원’보다 ‘연휴시즌 기원’이라고 표기한 카드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백악관으로부터 카드를 받은 일부 보수 기독교인들이 부시 대통령의 ‘신앙심 부족’에 격분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이때 한국의 서울시청 옆 큰 빌딩에도 ‘Merry Christmas'라는 말이 없어지고 'Happy Holiday’라는 기원이 나붙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시중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카드가 ‘Happy Holiday'라는 단어와 'Season's Greetings’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화적 현상들은 오늘 우리 사회가 극단적 인본주의와 소비주의(consumerism) 가치관에 지배되고 있으며, 극도로 세속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덤파기 작전’(The Gravedigger File)의 저자 오스기니스(Os Guinness)에 의하면 세속화의 가장 현저한 한 가지 특징은 ‘사설동물원 효과’(private zoo effect) 또는 ‘사생활화’(privatization)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사생활화란 인간의 삶을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으로 완전히 구분하여 신앙을 사적인 영역에만 적절성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시켜 버리는 가치관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요컨대 세속화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채색해야 할 신앙의 침투적기능을 삶의 변두리로 몰아내려고 하는 신앙의 ‘주변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핵심에서 우리 삶의 크고 작은 모든 부분들을 이끌어가야 할 신앙의 기능을 삶의 가장 자리로 몰아내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도 주변화되어 있습니다.교회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마치 우리가 먹는 둥근 피자의 한 조각처럼 되어 있을 뿐입니다.크리스마스 카드와 크리스마스 장식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매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 대신 ‘연말연시 인사’ 또는 ‘즐거운 휴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추세는 현대 사회의 세속화 현상을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무리 ‘Happy Holiday!'를 외쳐대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새기지 않고,그분을 우리 삶의 왕으로 모시지 않고는 진정으로 행복한 휴일,Happy Holiday가 있을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참된 소망과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멸망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외치는 ‘Happy Holiday!’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보장해 주는 ‘행복한 휴일’이 될 수 없습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나 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주신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며 기뻐하고 축하하는 계절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장식에 ‘크리스마스’를 빼놓으려는 세속화 사회의 교묘한 술책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Happy Holiday!'가 아니라 ‘Merry Christmas!’를 더 높이 외쳐야 할 것입니다.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김 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오피니언
    • 칼럼
    2021-12-23
  • [신재철 목사] 나는 남자니깐!
    “피아노 배울래? 태권도 배울래?” 전화기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질문하시는 엄마. 옆에는 두터운 전호번호부 책이 보인다. 친구들은 유치원, 학원을 다니며 입학 전부터 뭔가를 시작했다. 동네 친구들의 변화에 나도 고민이 되었다. 가방을 메거나 들고 어딘가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고, 바빠진 친구들 덕에 조금은 심심했다. 나만의 고민은 아니었나 보다. 엄마의 진지한 물음에 나도 함께 진지해 진다. 피아노 치는 남자가 될 수 있다. 태권도하는 박력 있는 남자도 가능하다. 뭔가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유치원생이 될 수도 있다. 잠시 행복한 상상을 하며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린다. 피아노 치는 남자는 뭔가 쑥스럽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피아노는 패스. 매일 가방을 메고 끌려서 다니는 유치원생은 뭔가 좀 즐겁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남자다움을 선택한다. 어머니께서는 바로 두터운 전화번호부 책을 뒤적이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관원 상담’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 ‘태권도장’이라는 곳이다. 습한 나무 냄새가 나고 쿰쿰한 땀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이다. 밖은 볕이 쨍쨍인데 여기는 뭔가 음습하다. 벽에 붙어 있는 ‘관원 상담’이라는 글자가 크게 들어온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무실에는 흰 도복을 입은 한 남자가 맞이한다. 머리카락이 좀 길다. 엄마보다 조금 더 짧은 정도? 그리고 엄청 말이 많다. 어머니는 관장님이라 불리는 그분을 향해 인사드리라 한다. 평소 예의바른 나인데, 그때 왜 그랬을까. 남자다움을 보이고 싶었을까? 이 음습한 기운을 떨어버리고 싶었을까?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격한 경상도 억양으로 관장님께 첫 인사를 건낸다. “니가 관장이가” 나는 그렇게 태권도와 연을 맺게 되었다. 친구들이 유치원을 갈 때 태권도장에 가서 한글을 익히고, 구구단을 외웠다. 결코 쾌적하지 않은 나무마루 바닥을 굴러다니며 공부를 하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샌드백을 치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입학하니 태권도로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1학년이 1품이다. 장기자랑, 체육대회 시범, 심지어 ‘군체육대회’ 태권도 시범단의 가장 앞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 후 체육관은 국민학생 관원이 부흥되었다. 내 영향이 컸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다시 찾은 고향 태권도장은 더 이상 냄새나는 공간이 아니었다. 시설도 깨끗하다. 긴 머리 관장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금의 젊은 관장님은 그의 제자라고 한다. 나도 그분의 제자였으니 ‘사형 사제’인가? 괜한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때보다 작아진 샌드백을 툭툭 건드려 보고, 나의 아들들과 바닥을 괜히 굴러보기도 한다. 나는 3품 심사를 앞두고 ‘겨루기’가 두려워 태권도를 그만두었다. 최연소 3품이 될 것이라며 흥분하던 관장님, 기대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하지만 나는 포기했고 아쉬움이 컸는지 30대 중반이 되어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다. 결국은 3단 자격을 얻게 된다. 도복을 입고 다녔던 나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나보다 더 어린나이에 태권도를 시작한 아들 둘은 이미 4품, 3품이다. 제법 품새 자세가 괜찮다. 그리고 관장님을 대하는 태도도 나보다 깍듯하다. 우리 아이들의 품증과 도복 입은 모습을 살짝 찍어본다. 이제는 노인이 된 나의 사부, 관장님께 사진을 전송한다. 몸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큰 기대가 없었는데 돌아온 답에 내 마음이 뭉클하다. “재철이 어릴적처럼 아주 멋지네.” 삽화 작가 : 강신영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2021-12-23
  • [김상규의 경제이야기] 마산 해양신도시의 문제점과 당면과제
    마산해양신도시 사업이 졸속으로 추진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5차례나 입찰한 결과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으나, 그 추진과정이 불투명하고 위법하다는 의혹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첫째, 심의위원 선정문제다. 공모지침서상 15인 모두를 사업 신청자가 추첨하여 선정토록 되어 있으나, 창원시는 지침서와는 달리 공무원 3인을 ‘당연직’심의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더욱이 이들 3인은 단독 신청자였던 GS컨소시엄에 대해 평가항목 대부분을 최하등급으로 평가하여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다. 국내 4위 건설사, 22조원 규모의 자산운용사와 초우량 증권사가 참여한 컨소시엄이 재무능력과 사업수행 능력면에서 최하점수를 받은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제안내용에서도 5차 입찰에서 낙찰된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의 안 보다 4차에서 탈락한 GS컨소시엄의 안이 더 나아 보인다.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은 3,000억원의 토지가격과 40~70층의 건축물과 2.6조원의 총사업비를 제안했다. 반면 GS 컨소시엄은 2,300억원의 토지가격, 4~45층의 건축물과 1조원의 총사업비를 제안했다. 창원시는 GS 안에 대해 고층 공동주택으로 인한 조망권 침해를 탈락의 근거로 제시하였으나, 건설비용이 2.6배나 되고 70층의 고층 건물을 인정하면서 조망권 운운하며 GS 컨소시엄을 탈락시킨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셋째,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은 지역 업체의 참여비율이 5%로서 대단히 낮다. 40% 이상 지역업체 지분을 보장한 GS 컨소시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GS 컨소시엄의 제안 내용을 잘 알면서도 열악한 안을 제시한 현산 컨소시엄을 우선 협상자로 선택한 것은 창원시민의 이익에 배치되는 결정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공모사업에 대해서는 우선 협상대상자의 제안내용을 시민에게 공개해야 하는데 창원시는 사업자의 영업비밀 보장 운운하며 비공개하고 있다. 무엇이 두렵고 어디가 구려서 자료를 숨기고 있는가. 이렇게 자료를 공개하지 않을수록 해양신도시 사업의 입찰의혹은 더욱 증폭되고 제기된 의혹들은 확실한 증거로 굳어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창원시는 현산 컨소시엄과의 계약체결을 서둘러서는 안 될 것이다. 더욱이 창원시 의회는 12월 13일 이 문제를 조사하는 특위를 구성키로 결의했다. 시장임기를 6개월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사업체결을 서두를 경우 이 사업은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보게 된다. 시의회 특위의 조사가 마무리 되어 모든 상황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창원시는 실시협약을 중단해야 한다. <김상규> 전)제32대 조달청장 전)감사원 감사위원 전)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기획위원장 김상규의 창원경제연구소 대표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2021-12-16
  • [조희완 목사] 권면할 일들 (행14:19-28)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천 원 권 지폐에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율곡 이이>선생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13세 때 처음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후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합격을 해서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세 때는 장원급제를 해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대제학이라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가 중요한 관직에 올랐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해 있는 정치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10만 대군을 양성해서 국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목숨을 건 충고와 권면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7년 동안 왜군들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외면한 댓가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권면이나,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의 권면은 귀담아서 듣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까닭은 바로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10)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에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해야 합니다.(행14:21-22)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배를 권면해야 합니다.(히10:24-25) 셋째는, 적극적으로 회해를 권면해야 합니다.(고후5:18-19)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1-12-09
  • [오성한 목사] 차별 없음
    성경 전체는 로마서를 풀어 놓은 것과 같다. 그것도 로마서 1, 2, 3,장을 펼쳐 놓은 듯하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 이야기다. 이방인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이 주제다. 유대인이 아무리 율법을 중시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3장은 <우리>라는 주제다. ‘우리’도 나은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믿는 너희는 나으냐? 너희도 죄인이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모두 명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로마서 3:23 참고). 이방인의 멸망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즉 모든 인류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을 예언한 곳이 구약의 예언서이다. 여기서 반전이 없다면, 인류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도 소망이 없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있다. 성경 전체를 자세히 보라. 바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전 때문에 로마서를 즐겨 읽었다. 읽을 때마다 “하나님, 이 방법이 아니고는 제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무릎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무릎이 패일 정도로 많이 친 것 같다. 로마서는 나에게 감격이었다. 정말 감격이었다. 로마서를 읽다가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입체낭독으로 바뀌곤 했다. “이제는”을 읽을 때는 힘이 들어갔다. “이”자에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간다. 나는 “이제는”을 좋아한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에베소서는 “전에는”과 “이제는”을 대조하여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은 나의 것이다. 정말 신나는 말씀들이다. 또 강조해서 읽는 부분이 있다.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이제는….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모든 사람에게 미친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차별이 없단다. “와-우! 나 같은 놈에게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임했다”라고 하신다. 놀라운 일이다. 기절할 일이다.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니”, 엄청난 일이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입체낭독으로 “이제는”과 “차별이 없느니라”에 악센트를 넣어 크게 읽고, 고백해 보라. 무릎이 쳐질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일 어둡게 살 때, 놀라운 약속을 선포하셨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 신을 가져와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의 복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잘 살기 때문에 주신 약속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선포하신 것이 복음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라고 예언하신 배경을 볼 때 복음은 우리가 잘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일방적으로, 차별 없이 주신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멸망 당하신 소식이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마귀에게서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고, 하나님의 의가 된 우리 안에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주께서 좌정하셨다는 소식이다. 이 복음의 약속이 유다가 하나님 앞에 잘 살 때 주신 약속이 아니다. 아하스 왕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타락의 길을 신나게 가고 있을 때,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예언의 절묘함을 볼 수 있다. 타락 중인 유다에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쳐들어 왔다. 온 백성과 아하스 왕은 숲이 흔들리듯이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셔서 유다를 공격해 오는 두 나라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을 요청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전했다. 이사야는 “왕이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고, 징표를 구하십시오.”라고 했다. 아하스 왕은 “나는 하나님을 시험할 마음 없어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돌아설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도저히 돌아설 수 없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와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의 징표를 선포하셨다. 아하스가 잘해서 주신 약속이 아니다.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오실 것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이사야 7:14). 예수께서 유다를 대신해서 멸망 당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했기 때문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나나 당신이 잘했기 때문에 ‘임마누엘’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이것이 말씀의 핵심이다. 유다가 망하지만, 영원히 망하지 않고, 포로에서 돌아오겠다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신 복음이었다. 그들이 회개하고 잘 했기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해방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임한 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임한 놀라운 복이다. 차별 없이 주신 복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12-0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