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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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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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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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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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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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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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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생활용어 바로잡기[이정희 목사] 도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좌청룡 우백호와 청와대 논란
    I. 서언(序言) 우리의 전통 중에서 민간 신앙으로 뿌리내린 여러 가지 중에서 지난 호에서 논한 풍수사상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폐단을 낳았다.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최고위층의 위정자들도 풍수가들을 대동하고 명당을 찾아서 조상의 무덤까지 이장하는 경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해프닝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좌청룡 우백호’이다. 이는 비기독교인들 뿐 만 아니라 정상적인 교인들까지도 ‘좌청룡 우백호’에 관심을 두고 있기도 하고, 오랜 신앙생활을 한 교인들도 간혹 ‘무덤을 잘 써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런 풍수사상의 용어에 대한 어원과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서 논하고자 한다. II. ‘좌청룡 우백호’란 말은 무엇인가? 이를 논하기 전에 지난 호에서 논한 풍수의 유래를 조금 더 살펴보면, 그 시작이 옛날 고대인들의 무덤인 ‘고인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에 시신을 매장할 시에는 무덤에다 현무(玄武- 거북으로 상징되는 북방을 지키는 신)와 주작(朱雀-봉황으로 상징되는 남방을 지키는 신),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태양과 달, 토끼 등의 동물들의 그림을 채색하여 그려 넣어서 이들의 기운을 지킴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다는 신앙이 있었다. 이런 민간 신앙과 사상이 풍수의 사신도(四神圖)의 기초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중국에서는 산세의 위치를 조망하여 뒷산의 주봉은 현무, 남쪽은 주작, 청룡, 서쪽은 백호로 칭하였다. 좌청룡 우백호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즉, 좌 쪽의 산이 청룡의 형상이고, 오른쪽의 산이 백호의 형상이 되는 자리의 산세가 잘 배치된 중앙에 있는 땅(穴)이 명당이라 했다. 또한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명당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그대로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는다. 이에 이를 믿는 자들은 사력을 다하여 명당 찾기에 혈안이 되기도 하고, 필자가 어린 시절에 본 바로는 이런 명당에 오래된 무덤이 있으면, 그 묘를 파묘해서 유골을 유기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조상의 무덤을 쓰는 만행을 일삼는 일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풍수지리의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대한 기대는 국운(國運)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으며, 이로 인한 수많은 논란과 사건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청와대는 길지(吉地)인가? 흉지(凶地)인가? 에 대한 논쟁이다. 먼저 흉지로 보는 어떤 풍수가의 견해이다. 그의 주장은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125m)은 너무 낮고 약해서 흉풍(凶風)이 불어와도 혈(穴)인 청와대를 막아주지 못하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340m)은 너무 크고 높아서 오히려 혈인 청와대를 겁박하고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서 역대 대통령들이 순탄한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불운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청와대를 빨리 옮겨야 된다고 했다. 그다음 길지(吉地)로 보는 풍수가의 견해는 이러하다. 청와대는 원래 경복궁터로서 세종대왕이 당시의 많은 풍수가들이 길지라고 해서 정했고, 길지의 장애가 되는 요소는 모두 수정 보완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청와대가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III. 현대인들에게 주는 영향과 결론 이상의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대한 웃지 못 할 청와대 논란까지 볼 때 어떤 생각을 가져볼 수 있는가? 믿지 않는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흥미로울 수 있고, 지나친 맹신까지 가져올 수 있는 사안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관점과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혹세무민(惑世誣民)도 없을 것이라고 통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도참사상(圖讖思想)이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명당에 대한 기대와 언어들이 우리들의 기본신앙과 용어들까지 흔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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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조희완 목사] 노력하며 삽시다.(막1:1-12)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카서스>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산은 너무 높아서 언제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날아올랐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독수리가 그 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독수리는 대단한 성취감에 젖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날개를 활짝 뻗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거미줄을 치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속으로 “아니 저 거미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미가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지만 나는 네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 왔단다!”하면서 독수리를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그만 거미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기쁨이라야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수고하지 않고 불로소득으로 얻은 물질은 가치가 없고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좋은 것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노력하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노력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함께 노력하면 기적을 불러옵니다.(막2:1-5절) 둘째로, 함께 노력하면 승리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대하20:20-23) 셋째로, 함께 노력하면 부흥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행6:1-7) 온 교회가 함께 노력하셔서 큰 역사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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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최호숙 목사] 삶을 “단디하라”
    목회자를 세우는 노회 목사 안수식에 설교 부탁을 받았다. 코로나 감염시대에 설교를 길게 할 수는 없고 짧고 핵심적인 것을 해야 한다고 판단되어 부교역자들에게 좋은 방법을 물었더니 경상도 출신 부교역자가 좋은 의견을 주었다. “목사님, 이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그 말이 뭡니까?” “여러분, 목회 단디하십시오...” 정말로 목사 안수식 당일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단디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말씀이 인상이 깊었는지 단상에서 내려온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서 “단디하라” 이 말을 되씹어 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각인시키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경상도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주 듣는 사투리 중에 “단디하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 말의 원래 표준어 의미는 “단단히”란 뜻이다.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단디’란 말은 폭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수능을 보는 입시생들에게 “이번 시험 단디 봐라” 이 말은 실수하지 말라는 말이다. 초보 운전자에게 “운전 단디 해라” 이 말은 좌우 잘 살피고 교통사고 내지 말라는 뜻이다. 외출하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집 단디 봐라” 이 말은 집에 무슨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말이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 단디 해라” 이 말은 맨 입으로 다니지 말고 꼭 착용하여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에 “겉옷 단디 해라” 이 말은 춥지 않게 따뜻한 옷 잘 챙겨 입으라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영역에 ‘단디’란 말만 넣으면 만사 OK 이다. 우리 인생의 육적인 삶도 영적인 삶도 단디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삶을 항상 훼방 놓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 안에서 견실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꼴을 보지 못한다. 사탄은 우리가 단디 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우리를 유혹한다. 물질로 유혹하며, 육정에 빠지도록 하며, 명예욕에 빠지도록 한다. 우리는 보통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로가 힘을 합하게 되는데 이것을 연대의식이라고 한다. 이 연대의식은 불행한 시기에, 고통의 시기에 잘 형성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에는 연대의식보다 분열이 생긴다. 그 이유는 불행한 시기가 끝나고 무엇인가를 성공적으로 이루면 그 다음에는 성공에 기여한 공로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단디하는 것에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은 성공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면 명예욕에 서서히 공동체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무너지지 않고 단디하는 비결이 많지만, 예수님의 동생 유다의 교훈을 적용해 보면, 세 가지를 단디하라고 하였다. 첫째는, “가인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시기 질투 분노의 삶이다. 둘째는, “발람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물질적인 것에 유혹을 받는 삶이다. 셋째는, “고라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명예욕에 사로 잡히는 패역한 삶이다. (유 1:11)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시험(temptation-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삶을 단디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챔피온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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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농촌 목회 스토리]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골 농촌교회 목회는 섬김과 사랑으로 덕을 세워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마을어르신들과 사랑의 교제와 식탁 나눔을 통해서 알게 되어 진 마을의 쓴 뿌리는 다름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마을에 덕을 세우지 못했던 일련의 일들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거친돌이 되고 교회를 배척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세대가 지나간 일들임에도 여전히 회자되며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있다.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작은 일에 큰 상처를 받고 작은 일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살피는 것이 목회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목회를 하면서 작고 세세한 것에 관심을 갖고 돌아볼 때 그들의 닫혔던 마음의 문들이 하나둘 열려지고 이웃으로서의 자리매김이 되는 것을 느끼며 교회와 마을을 섬겨가고 있다. 돌아보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아픈 상처들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관과 해서는 안 된다.그들의 상처가 나의 아픔으로 와 닿고 그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필요를 적게나마 나눌 때 비로써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드려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굴러온 돌,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고, 우리에게 예수 믿으라고 귀찮게 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관계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이장이 되어 마을을 섬기며 마을의 대변인으로 저들의 문제들을 하나둘 해결해가면서 마음의 문들을 열고 이웃으로 목사를 받아주는 것을 경험하며 나름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제는 저를 이장이라 부르지 않고 목사님으로 호칭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거노인인 한 어르신은 목사님 제가 죽기 전에는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왜요 라고 반문하면 살며시 웃으면서 나 장례를 목사님이 치러 주셔야합니다. 꼭요... 가슴 한 곁에 미여오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내가 뭐라고,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다만 감사할 뿐이다. 우리 마을에는 한창 김장을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교회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누가 목사님 김치를 담아주겠습니까. 라면서 집집이 한통씩 가져오고, 맛보라고 가져오므로 김치 냉장고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소박한 시골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나는 참 행복한 목사이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쓰고 있는데 모회사 부사장님이 저희 집에 찾아 오셨다. 이유인즉 목사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는데 크리스마스에 교회와 마을을 위해 도울 것이 없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돌아보면 일련의 일들은 작은 것을 살피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부족한 종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축복과 보상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하고 평안보다 편안을 추구하며 큰 곳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큰물에서 노는 삶’보다 ‘큰물을 지향하는 삶’이 복된 삶이고 ‘큰 것을 누리는 삶’보다 ‘작은 것을 살피는 삶’이 복된 삶이다.” 작다고 등한시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어디를 가든지 작은 것을 살피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공동체를 살리는 밑거름이 되는 삶처럼 복되고 보람된 삶은 없을 것이다. 서로를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사랑과 섬김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은 육체적 궁핍을 돕기 위해 구제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은 교회와 목회자가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앞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교회가 마을에서 외면당하고 목회자를 불신하는 풍토는 지역사회에 본이 되지 못했고, 덕을 끼치지 못한 결과의 산물임을 자성해본다. 덕을 세우는 것은, 곧 믿음을 세우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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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그루터기 칼럼] 탈퇴한 사람들의 교회 정착을 위한 제언(2) : 확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향한 확신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 확신을 설명할 수 있으신가요?” 탈퇴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동일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포교를 당할 때에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 강사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신도들에게서 확신에 찬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들이 확신에 찬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계속 교리 교육을 듣고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탈퇴자들이 교회에 정착하고자 왔을 때에,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없다면 그들은 교회에 진리가 없거나 우리가 믿음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신앙 공동체입니다. 만약 누군가 교회에 방문했을 때에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예배와 모임 그리고 신앙교육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갈망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지 아니면 종교적 활동으로 신앙적 만족감을 가지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성도들에게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없다면,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진심으로 고백하고 확신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절히 갈망함으로 성도들에게 바르게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일반 서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인문학·과학·철학·문화와 관련된 메시지에 성경 말씀 몇 구절 덧붙여서 성도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있다면,목회자로서 확신을 가지고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갈망함으로 교회에 모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모임에서 세상의 이슈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나누거나 심리적 위로만을 받기 위해 모이고 있다면, 교회 밖의 동아리 모임들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삶의 유일한 진리이시며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며그리스도가 주신 소망과 은혜를 나누는 곳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으로 탈퇴자들을 맞이해야 하며 우리의 확신을 그들에게 전하며 설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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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오성한 목사] 권위 아래 순종하라
    예수님은 권위에 순종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시며, 순종으로 시작하셨다. 세례요한의 권위 아래 들어가셨다는 말이다. 만왕의 왕이신 분이 피조물 아래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인정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다. 아무리 큰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못한다면,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지도자의 타락을 빌미로 내 세우며, 교회가 하나 됨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교묘한 사단의 역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배워야만 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권위를 인정하며 사역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세우신 지도자를 통해 일을 펼쳐 가신다. 당신도 지도자다. 지도자는 일군이다. 하나님의 일군은 부름을 받은 모든 자다. 좋은 일군 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지도자는 지도력이 있어야 한다. 지도력은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적극적인 마음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지도자가 가지는 힘이다. 예배당에 떨어진 휴지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는 자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가진 자가 일군의 자격이 있다. 그래야 지도력이 생긴다. 하늘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일군은 하늘의 뜻을 땅에 끌어 내리는 자다. 예수께서 하신 하늘의 일에 관심 집중하는 자다. 지도자를 리더라고도 표현할 수 있고, 일군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섞어서 사용하겠다. 우리의 원수는 첫째가 세상이다. 둘째는 사단이다. 사실 빛 안에선 세상과 사단은 힘이 없다. 그들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원수는 일군을 가장 힘들게 한다. 세 번째 원수는 사단에게 잡힌 리더다. 바로 내가 그런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사단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면 사단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힘을 주면 엄청난 힘으로 가장 큰 방해가 된다. 그래서 “가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다. “세상을 부인하고”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단을 부인하고”라고 하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주님 주신 생각 즉,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과 감사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가장 큰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다. 요한이 이 땅에 리더로서 살아 있을 동안에 그를 인정해 주셨다. 그의 권위 밑에 들어가셨다. 리더의 기름 부으심을 그대로 연결해 가시길 원하셨다. 요한은 놀랐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복음 3:14)라고 했다. 요한은 자신을 알았다. 자신보다 높은 분이 오실 것을 기다렸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처럼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태복음 3:15)라고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앞서 세우신 리더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교회에서 좋은 일군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목사님이 전달하는 것을 그대로 하려고 하면 된다. 다른 계산 없이 즉시 따라 하려고 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태복음 3:16)의 결과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례요한의 리더의 기름부음 아래 들어갈 때 하나님은 기뻐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7)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만족하셨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십자가에 죽음을 결단하시고, 순종하시는 장면이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질서를 귀히 여기심을 놓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축복하시고, 인정하고 계시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시는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계신다. 세례 요한에게 주셨던 권위를 존중하시고 그 아래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 권위 아래로 들어가셨다. 그때 하늘 문이 열렸다. 우리가 쉽게 놓칠 수 있는 것이 있다. 순종이다. 순종 중에 가장 기초가 되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일이다. 권위에 순종할 때 하늘 문은 열렸고, 음성이 들렸다. 그렇다. 권위에 순종하여 행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음성을 들린다. 권위에 순종할 때 교제권은 회복되고,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은 깨어난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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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박봉석 목사] 당신의 마음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나요?
    두 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래 위에다가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가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가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준 후에는 돌에다가 적었니?”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다가 그 사실을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 속담에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지혜로운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이지요. 은혜를 마음에 새기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이 되고 행복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내 마음에 쓴 뿌리가 되어서 사람에게 부정적이 되고 그래서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기도하며 지금 내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원수를 마구 새겨서 계속해서 쓴 뿌리를 심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의 원수를 어서 지워버리십시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마음에서 원수를 지우라는 말입니다. 한 목사님이 한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스님은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우리 불교보다 낮은 차원의 윤리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을 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예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스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스님은 일생을 살면서 마음속에 미워했던 사람이 없으십니까?” 그 물음에 스님은 “왜요, 저도 많이 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스님, 성경이 말하는 원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님이 미워했던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 미움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마음에는 미움이나 분노가 싹이 틉니다. 그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란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고 내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게 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죄로 인해 자신과 원수가 된 우리를 구원하여 우리와 다시 화목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서 자신과 원수가 된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서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화목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마음에 원수를 지울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제 기도하는 가운데 내 마음의 원수는 지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 서로에게 받은 은혜만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서 긍정적인 인간관계를 이루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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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그루터기 칼럼탈퇴한 사람들의 교회 정착을 위한 제언(1): 교회의 자세
    왜?많은 사람들이 이단사이비에 미혹될까요?이단사이비는포교대상자의 종교적 성향과 심리적 문제(고민)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면밀히 파악하여 포교에 이용합니다.그렇기에 포교대상자는 그들이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이해한다고 생각하기에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게 됩니다. 현재 신천지는,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신천지였던 모태 신천지청년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신천지 포교에 미혹된 청년들,타 종교 혹은 무 종교였지만 신천지 포교에 미혹된 청년들이 있습니다.그리고,최근 5년간 신천지는기독교 신앙을 가진 청년들을 포교한 비율보다 신앙이없는 청년들을 포교한 비율이 더 많습니다.이는신천지의 포교전략이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 교회 밖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는자신들이 가진 그릇된 교리와다양한 포교전략,그리고청년들의 열정을 이용하여무섭도록 성장하였고,그로 인해 외부에서 영향을 주기 힘들 정도로 공동체적 결집력이강해지고 있습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신천지의 양적 성장의 심각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큰 경각심 없이 안일하게 바라보고 무시한다면,신천지를 탈퇴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미혹된 사람들을 무시하며 혐오하게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한국교회는 물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시길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탈퇴한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가르쳐 주신 것은,우리가 알곡과 가라지를 판단하고 구분하라는 것이 아닌,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알곡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가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나,우리는 함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을 ‘무리 or 제자’, ‘팬 or 제자’, ‘알곡 or 가라지’, ‘진짜 or 가짜’인지 판단하고 구분하려고 합니다.이러한 이분법적 비판 모습은 교회 성도들에게 신앙의 감사와 기쁨이 아닌 근심과 두려움을 주게 됩니다,몇몇 교회와 선교단체는 이러한 메시지를 이용하여 신앙생활에 겁을 주어 선교 헌신,봉사 헌신, 헌금 헌신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단편적으로 이용하여 성도들을 이분법적 신앙관에 익숙하게만든다면,이분법적이며 배타적 신앙관이 만연한 이단사이비에 성도들이 쉽게 빠질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왜냐하면,이단사이비는 성경을 교묘히 악용하여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교리를 가르치고미혹함으로,자신의 단체만 구원이 있기에 자신의 단체에만전적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지속적 칼럼을 통해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에서 탈퇴한 사람들을 교회에 정착시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예배자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_ 다니엘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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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그루터기 칼럼[장은정 소장] 탈퇴자 맞을 준비
    1. 신천지에서 나온 사람들은 교회와 사회에 무엇을 원하는가? 신천지로 시작된 교회들에 아픔의 흔적과 피해 가족들의 슬픔이 깊어져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와 교회에 편안하게 나눌 수도 없는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도움을 구하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쉽지가 않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에게 말해야 될지 알지 못합니다. 피해 가족들도 돌아온 이들도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외면당할까 두렵고 교회에서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침묵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혼자 삼켜내야 하는 아픔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함께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함께 주님의 지체가 되었기에 주님을 통해 느끼는 아픔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어찌 지난날의 잘못된 모습들을 잊고 살 수 있을까요? 용서를 구하고 또 구해도 부족하게만 느껴지고 가슴 깊게 파고드는 아픔은 쓴 고통의 약이 되었습니다. 몸을 숙이고 또 숙여도 다 토해 내어지지 않는 가슴의 슬픈 응어리들이 각자의 가슴에 다르게 박혀 있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이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향한 끝없는 외침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다시 시작할 것이고 돌아온 영혼들을 찾은 기쁨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감사의 찬양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천지에서 나온 이들이 교회와 사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상처 난 곳을 함께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용서를 구하는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가리지 않는 긍휼함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대상이 아니며 우리와 함께 빛 안에서 걸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소중하고 귀한 자녀들입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였으니 돌아와서 아파하는 것이 당연하다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통해 주님께로 돌아온 이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 깊이 담을 수 있도록 교회가 그 기회의 장을 만들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된 것은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니 주님과 하나 된 그들에게도 주님을 통한 우리의 사랑이 가장 필요합니다. 2. 교회는 회심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돌아갈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여도 끝나지 않을 번민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마주한 가련한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쏟아내지만 탄식하는 그들을 위로하는 이가 없어 아파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 누군가가 우리라면 잃어버렸던 영혼들을 다시 찾게 된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혹시 찾아오는 발걸음들이 우리 교회로 향하진 않을까 불안하고 걱정스럽지는 않습니까? 만약 고통 속에 울고 있는 그들의 아픔으로 인한 가슴에 통증이 생겼다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시작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이미 이단 교육을 통해 알게 된 신천지인들에 대한 고정된 인식들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하였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왔다 하더라도 반갑지가 않은 것입니다. 바라보는 눈빛에서 오고 가는 말 가운데 이미 주홍글씨가 새겨진 사람들이 되어 버려서 돌아왔다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말을 할 수도 없으니 혼자 묻어둔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교회를 다시 떠나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교회 성도님들은 그동안의 신천지에 대한 교육으로 심어진 인식이 있으니 무섭고 두려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먼저는 우리의 인식 변화를 위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돌아온 이들과의 소통을 통해 그들을 다시 경험하고 서로 알아가야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들이 없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벽이 있다면 그 벽을 허물기 위해서 회개하고 울부짖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어야 합니다. 하는 말들이 닮아 있고 바라보는 소망이 같아 주님으로 인한 관계 회복의 기쁨은 금방 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탈퇴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문제를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닌 그들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대화의 시작이 가장 빠른 방법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하나 되어 함께 만들지 못한다면 어렵고 힘든 일이기에 돌아온 그들과도 동행하고 계신 주님을 통해 그들을 바라봐 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방황하는 이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이단의 경계도 돌아오는 이들의 대한 사랑과 회복도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큰 아픔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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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05
  • 그루터기 칼럼[문보민 목사]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미혹
    세상에는 가짜가 많다. 수많은 가짜들이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모습으로 속고 속인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어느 것이 가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뉴스도 신뢰할 수 없는 가짜 뉴스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가짜가 많다는 것은 진짜의 가치가 그 만큼 귀하기 때문이다. 보석중의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다이아몬드는 그 희소성 때문에 높은 가치를 보장한다.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수많은 가짜 다이아몬드가 등장했다. 전문가들조차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정교함이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다.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다른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이단들과의 싸움이 기독교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대가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하고 있다. 진리와의 전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않으면 가짜를 진짜라고 믿는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어리석은 선택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이단들의 파생은 그만큼 진리의 가치가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이 세상 어떤 가치와는 비교할 수 없기에 수많은 이단들의 파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진리와의 싸움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되었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 에비온파와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 등을 시작으로 오늘날의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 구원파, JMS, 통일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 수많은 이단들의 등장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조금씩 교리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가르침과 자신이 이 시대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이며 자신들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단순히 성경을 왜곡하는 것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종말론을 내세워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문제점들도 드러내고 있다. 이혼, 가출, 자살, 사회 질서를 위반한 범법행위 등을 조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단 문제에 대한 예방책은 무엇일까? 첫째로 관심이다. 단순한 종교문제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넘어 국가적, 사회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종교적 입장만이 아니라 사회적 입장에서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이단 사이비들의 행보를 예의 주시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둘째로 철저한 예방교육이다. 초대교회 바울과 사도들은 이단에 대해 끊임없이 경계하도록 권고하였다. 고린도교회 안에 이단, 갈라디아교회 이단, 골로새교회의 이단에 대한 언급과 요한일서에서와 요한이서 등을 통해서 말씀하고 예방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한 때 보이스피싱 이라는 전화사기가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아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사기 유형을 막기 위해서 갖가지 예방 대책과 교육들이 이루어 졌다. 예방대책과 교육들로 인해 사기 범죄의 피해자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단의 종교사기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예방하고 가르쳐야 이단들의 미혹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짜를 가르치는 것이다. 진짜 진리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위조지폐 감별사는 가짜 지폐를 연구하지 않는다. 진짜 지폐만을 본다. 진짜를 알면 가짜는 보이기 마련이다. 진짜 진리를 바로 알고 가르치는 것만이 이단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예방 대책일 것이다. 요한일서 4:1~3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 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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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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