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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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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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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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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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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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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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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2-19

실시간 초장칼럼 기사

  • [하수룡 장로] 연리지
    일본을 여행할 때 큐슈에 있는 산사 앞에 수백 년 된 연리지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묘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큰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얼싸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그 매력으로 마음을 뺏긴 것은 사실이다. 주로 연리지라 함은 같은 종류의 나뭇가지가 서로 붙어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한 상태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금실, 선비의 우정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연리지의 출현은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기고 귀한 나무로 대우받고 있는 것이다. 큰 나무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라 하고 나뭇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라고 한다. 가지가 맞닿으면 바람에 의해 서로 비벼지는 상태가 되어 산불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땅속의 붙어있는 뿌리 덕분에 나무가 죽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맞닿은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름이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가 심하게 눌리므로 제일 먼저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무의 세포들이 직접 맨살로 맞부딪치게 되어 운명적인 만남이 완성된다. 이것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경우와 흡사하지만 나는 우리 주님의 원가지에 상처 난 우리 인생의 작은 가지가 접붙임을 당한 연리지와 유사하여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의 연리현상은 아무 가지나 서로 맞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동질의 나무라야 가능하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수십 년 붙어있어도 연리지와 같이 결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이 서로 달라 돕는 것보다 맞닿을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상처받지 않고 항상 위로해 주시고 감싸 주시는 우리 주님의 큰 나무에 연리지로 붙어있어야만 잘 생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태안 꽃박람회에서 크기가 같은 원 가지가 붙어있는 벤자민을 부부나무라 칭하여 20년 동안 잘 키워 큰 나무로 성장시켰다. 두 나무처럼 각각 성장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가지가 붙어버린 연리지가 되어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부부일체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처럼 연리지가 되어버렸으나 분명한 것은 부부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리지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 작가 루이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성장하고, 스톨게에 의해 양육되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가진 사랑은 역시 미완성일 뿐이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외치고 연리지처럼 서로 변하지 않기를 염원한다. 심지어 가요까지도 연리지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모두 사랑의 홍수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참 나무이신 포도나무로 보내 주셨다. 원가지이신 주님에게 상처 난 연한 포도나무의 순이 되어 접붙임이 되어야만 참 연리지 같은 삶이 전개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연약한 가지가 주님의 큰 가지에 붙어살면 치유와 함께 연리지의 사랑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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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1-08-11
  • [하수룡 장로] 처음과 나중
    처음 30여 년 전 1991년 5월 18일은 필자가 장로로 장립을 받은 날로 내 생애 최고의 역사적인 날이다. 이 때 이웃에 살던 예수님을 잘 모르는 형님 부부가 장로로 세움 받는 것이 귀하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중동에서 근무할 때 사온 비디오카메라로 나의 기념될만한 모습들을 촬영하셨다. 이 분은 고박사라 불릴 만큼 최고의 기술자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잘 사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선한 이웃이다. 부인은 열심 있는 불도였지만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 가정의 아이들도 학교 선후배로 잘 지냈고 주요 과목을 과외지도를 하듯이 잘 가르쳐 주곤 했다. 자녀들을 데리고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먼 곳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부부끼리도 여러 밤을 같이 보내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고 친근하게 잘 지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했다. 작은 아들의 진로도 색맹으로 원하던 사범계열을 가지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 법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하여 현재는 검찰 쪽 공무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자녀의 결혼 때에도 먼 거리를 혼주인 형님 내외와 어른들을 내 차로 모시고 행복한 결혼식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을 기억한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은 찾아가 위로해드리고 해결 방법도 제시하여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한다. 시간이 잠간 흐른 뒤 부인은 과감하게 절을 버리고 주님을 잘 섬기는 집사가 되어 기쁨으로 헌신하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반면 고 박사님은 좀처럼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황에 못 된 담배 때문에 폐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온 가족이 걱정꺼리가 된 것이다. 자녀도 결혼하여 이제 손자도 보았고 부인도 건강하여 큰 걱정이 없는데 칠순이 넘어 생각지도 못한 말기 암이라는 인생의 폭풍이 이 가정에 휘몰아친 것이다. 그러나 큰 불행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나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주신 것이다. 담임 목사가 간절히 안수기도하면 아멘으로 화답했고 본인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나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간다고 시인하였고 지금은 아버지의 집에서 안식하고 계신다. 처음 꼭 30년 전 이 가정은 나의 장로 장립식 때에는 예수를 잘 몰랐으나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 살아가던 중 예수를 영접하여 많은 변화를 겪고 인생의 굴곡을 맛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론 이해하지 못한 일을 경험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30년 동안 장로로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고 그 사이에 이웃 불신 형님 부부가 예수를 믿고 같이 모신 친정어머니도 천국백성이 된 것이다. 나중 30년 후에는 부인되는 집사님이 처음 장로 장립식 때와 똑같이 2021년 4월 25일 나의 은퇴와 원로장로 추대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놀라운 기적 같은 현실을 목도했다. 남편은 물론 친정어머니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심을 감사하며 집사로 살아가는 부인은 비록 혼자가 되었으나 자기 가정을 전도한 분의 마지막 직을 처음 장립 때를 회상하며 묘한 감정으로 지켜보면서 형제애로 축하한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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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 [하수룡 장로] 고 백
    어떤 연애인이 자기의 과거 행적을 깨끗하게 털어놓지 않아 상대방의 불신이 커져 사랑했던 두 사람의 믿음이 깨어져 이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고백 중 가장 자주 목격되는 것은 사랑에 관계되는 고백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을 다 공개를 해도 문제가 되지만 꼭꼭 숨겨놓고 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여 결별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되신 주님께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고백하면 품어주시고 긍휼과 자비의 옷으로 입혀 주시기 때문에 변질되어지는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고백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로 특히 자기의 죄를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참회라고도 한다.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면 그 죄를 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제가 속죄해 주는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들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고백을 성사적 예식으로 여기며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한 사건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적 성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은총이며 그 은총을 은혜로 의식하는 일에 바쳐지는 모든 일이 성사라 믿는다. 개신교애서는 만인제사장론에 따라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만 하는 것으로 사죄를 특권층에만 부여하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장로교에서는 예배 중에 죄의 고백을 순서에 넣어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 중에 대표기도의 주요기도 제목으로 죄의 용서를 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최근 어떤 신문에서 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가장 싫어하는 고백은 무엇일까를 묻는 설문에서 다른 사람을 통한 대리고백이 최고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도 타이밍에 맞춰 직접적으로 확신에 찬 고백을 해야만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원치 않는 간접적인 고백을 받았을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은 고맙지만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내용이라도 적시에 우리가 직접 나아가 솔직하게 남김없이 고백해야만 기뻐하시고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가 쾌락의 길로 걸었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다.’라고 고백했지만 늘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의 찌꺼기 때문에 회개를 통한 고백보다 더 진한 인간의 행위를 포루티운쿨라 교회의 장미정원에서 알몸으로 뒹굴며 용서를 구하였다. 그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베푸셨고 축복의 증표로 장미의 가시까지도 없애주었다는 실화가 있다. 이곳의 가시 없는 장미를 타지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한다고 하니 진실한 고백이 있는 곳만이 생명이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고백은 경우에 따라 약도 되고 독이 된다. 그러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씻지 못할 죄악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기뻐하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모조리 하나님께 고백하자. 그리하면 우리 주님은 불변의 사랑으로 놀라운 은총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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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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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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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고아
    경기도의 한 지역에 나무들이 버려지는 것을 모아 조성한 수목원이 시민들에게는 더없는 휴식처가 된 아름다운 나무고아원이 있다. 이 곳에 식재된 나무들은 도심에서 병들어 버림받은 나무, 토목공사나 건물신축 등으로 베어버리려는 나무들을 기증받아 심은 것이다. 이것은 마치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데려다가 치료해주고 잘 키워 준 고아원과 같은 곳이다. 조성을 시작하여 20년이 지난 지금은 안정을 찾아 좋은 숲이 조성되어 사람들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된 것은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나무고아원에 버려진 나무들이 아픔을 이기고 우람하게 서있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낄 수 있다. 1만3천여 그루의 나무가 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한강 산책로의 가로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여러 관공서나 기관에 공급되어 좋은 나무로 자리 잡기도 한다. 버려진 고아처럼 제2의 고향인 나무고아원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잘 살아가는 나무를 보면서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버려졌던 자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죽어가는 우릴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나무고아원에서 나무를 기르시는 주인같이 생각되어 정말 고마운 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입대를 앞둔 한 청년이 따뜻한 가정이 없음을 절망하고 한탄을 하는 것을 보고 애절함을 가진 적이 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셔서 작은 아버지 집에 입양되어 늘 눈칫밥을 먹고 자랐다. 스무 살이 다되어 잘 살아 보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냉대 받는 사회 속에서 자립하여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버려진 나무처럼 고아로 살다가 막상 늦은 나이로 군 입대를 하려니까 자신의 신세가 서글프고 절망적이었음을 고백한 것이다. 과연 고아라서 희망이 없고 부모님의 도움이 없어서 절망적일까? 물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고 나만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처한 환경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문제이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영적으로 고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승리자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욕심을 비우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최우선해야 한다. 진정 우린 모두가 버려진 고아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고아원에 입양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대는 부모가 계셔도 고아 아닌 고아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근대화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부요한 나라가 되었지만 실제 영 육간 자식은 물론 부모까지도 버리는 비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6.25전쟁고아가 다 잘 성장하여 사회에 빛 된 일들을 감당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고아는 과부와 나그네와 같이 사회에서 냉대받기가 쉽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압제하지 말고 도우라고 가르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고아를 학대하지 말고 환난 중에서도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지금은 육적인 고아보다 영적 고아들이 너무 많다. 우리 주위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영적고아들을 찾아 천국고아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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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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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아버지
    아버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의 남성 부모를 말하지만 어릴 때에는 통상 아빠라 부른다. 우리 집도 어린 자식들이 다 성장하여 새 가정을 이루어 자식의 자녀들이 태어났지만 호칭은 여전히 큰아들은 아버지, 작은아들은 아부지, 딸은 아빠라고 부른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호칭만 들어도 나도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좋아 옛날을 생각하며 자녀 손들을 축복하게 된다.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것은 진정한 참 아버지의 마음이라 할 것이다. 에콰도르의 침보라소라는 산이 있는 데 이 산을 신성한 아버지의 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적도 인근의 산 중에서 고도가 가장 높아 세계의 전망대라 불린다. 이제는 휴화산이지만 신비와 위용으로 무장된 이 산은 변함없이 산 주위의 주민들에게 깨끗한 빙하얼음과 많은 것을 제공해 주어 항상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순종하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아버지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로 히브리어 ‘아브’는 1191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라는 명칭이 많이 언급된 것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버지를 중심한 가정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육신의 아버지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나 문화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권리인 부권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절대적인 권한이 허락된 것이다. 말씀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사랑하되 편애하지 말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의지함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아빠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아람어이지만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이 호칭을 늘 사용하셨다고 한다.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친밀성을 가지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체를 불경스럽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에게는 큰 불만의 요소였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은 부족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복의 근원이시며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언제 어디서나 늘 ‘아버지!’하고 부른다. 육신의 아버지는 계시지 않지만 정감이 넘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확실히 받아들이는 것은 순종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신 희생적인 아버지에게 오직 순종만으로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120년여 전 척박한 조선 땅에 파란 눈의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선교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군산지역에 젊음과 열정을 다 바쳤다. 자녀를 셋이나 잃고 자신도 43세의 나이에 그의 자녀들과 이 땅에 묻혔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 분의 말씀 따라 헌신하여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우리는 늘 그 분에게서 받고 누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조선말기보다 더 못한 지역으로 받은 사랑을 실제로 잘 전하는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수룡 장로(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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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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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하수룡 장로] 초심
    얼마 전에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한 고깃집에 간적이 있다. 번호표를 받아 먹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은 이유가 가격이 저렴하고 질과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지인들과 일부러 그 식당을 찾았을 때엔 우리가 처음 갔던 것과는 너무 달라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주인의 처음 먹었던 마음이 사라진 것 때문에 어느 회사의 상품명같이 ‘처음처럼’이 계속 생각이 났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진리를 안다면 처음에 마음먹고 세웠던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자성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초심불망’은 처음에 다져진 마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가슴에 와 닿는다. 처음 세운 뜻을 이루려고 꾸준하게 나아가든지 처음에 품었던 뜻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만큼 처음 내세운 다짐이나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만 나중에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처음 먹었던 마음이 변치 않고 좋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심(三心)은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다.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초심은 처음 시작이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모든 일에 접근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 우리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심부름을 할 때나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마음은 정말 때 묻지 않은 흰 백지 상태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짓말하고 변명하여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못된 심성이 발동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초심은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은 마음으로 첫사랑의 마음과 흡사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좋게 해 주고 늘 자기의 마음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래서 초심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알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배려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음 생활도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조금 이루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위기의 때를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늘 앓아오던 질병에서 이제 다 나았다고 안심하면 초심의 망각으로 재발하기 쉽고, 자신이 이 정도면 잘 살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고한 마음이 생기면 초심을 잃고 모든 일을 안이하게 대처하여 낭패를 당한다. 이렇게 되면 열정이 식어지고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마음, 즉 초심은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처음사랑과 같아서 애완견과 예쁜 꽃을 가꾸듯이 늘 관심과 애정으로 키워야 한다. 날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처음 먹었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로지 매일 기도하면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고 나의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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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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