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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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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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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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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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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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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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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2-19

실시간 초장칼럼 기사

  • [하수룡 장로] 후손
    내가 섬기는 교회에 믿음이 좋은 장립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달리 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분들은 손자이든 손녀이든 무엇이든 주시는 대로 감사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분은 꼭 손자를 주셔야하고 주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헌금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손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금보다 귀한 손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는 후윤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아도 후손은 정말 귀중하다. 어느 기업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 가정의 노후 된 집들을 개보수해 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뜻 깊은 훌륭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친일을 한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잘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지킨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진 것이 없어 배움의 기회가 상실된 상처뿐인 삶으로 10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에게서 가훈의 교육은커녕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에야 조상이 가치 있는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로 존재하는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가인은 악을 선택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살해하고 땅의 저주를 받는 최악의 후손으로 전략하였다. 오늘날도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으면서 선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단절하고 자기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늘 염려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담은 의로운 후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셋을 허락하심으로 큰 기쁨을 얻는다. 아벨 대신 다른 의로운 씨로 아들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다스리라는 깊은 뜻이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문으로 후손을 잘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믿음의 친구들이 모이면 간절히 바라는 공통분모가 자녀 손들이 믿음으로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선망의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 만족한 직업을 가진 후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부모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상적인 신앙인의 믿음이고 올바른 생각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은 후손교육 실패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손자가 탄생된 기쁨보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많은 내 나라, 나의 자녀손들이 사는 이 땅에 올바른 후손교육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잘 가르치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면 성공한 후손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늘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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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9-23
  • [하수룡 장로] 욱 여 쌈
    '욱여쌈'이란 말은 바울이나 요셉에게 어울리는 말로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면 적격이다. 이 말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는 형용사‘욱다’와 ’싸다‘라는 동사와 어울려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로 물건을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씌어 가리거나 둘러 말다는 뜻이다. 물건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 욱여쌈을 당한다면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여 사방이 캄캄하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욱여쌈을 당한 사람하면 조선시대 이 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정은 조정대로 위태한 나라를 위해 적극 힘을 보태주지 못하여 방해꾼이 되었고 아군은 아군대로 지도자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싸움은 뒤로한 채 허위보고와 헐뜯는 일에 몰두하여 적군 아닌 적군이 되었다. 지원군인 명나라도 일본과의 약은 정치로 군대 해산과 적대 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여 돕는 아군이 아니라 방해하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적군인 왜군은 어찌하든지 이 순신 장군을 죽이고 조선 수군을 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돕는 이 하나 없는 이 순신 장군은 아마 온 천지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욱여쌈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나 아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죽으면 살리라.’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종자를 멸할 것을 명령하여 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것이다. 작금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국내외적으로 욱여쌈을 당한 형국에 처해졌다. 정파는 정파대로 교파는 교파대로 편을 나누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유대나라처럼 온통 찢어진 상태로 분열된 느낌이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무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지 않게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믿는 백성들까지도 방황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한다. 게다가 기상이변과 코로나까지 더 심해져 어려운 형국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최악의 순간처럼 도저히 미래가 암담하다.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 직장도 결혼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축하하지만 시국적으로 현재는 어려운 시기로 개인도 국가도 욱여쌈을 당하여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순신 장군도 바울도 요셉도 욱여쌈을 당하여 도저히 인간적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죽기로 각오하면 살리라.’하고 상황을 대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시고 높여 주셨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분야에 욱여쌈을 당한 상태로 어려운 위기의 비상상황임을 기독교인이 먼저 절감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정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는지 자성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인 나라는 존재는 극히 작지만 예수님은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성질이 날 때 내가 나를 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도 나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고 불평과 불만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와도 나를 죽이자. 그리하면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크게 역사해 주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경제 침체의 욱여쌈을 당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만 죽으면 전능자는 삽니다. 나 자신을 죽이세요. 그 분이 모든 환난을 감당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그 분이 환난을 능히 감당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한 때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명심하자. 2022.08.22. 경남기독신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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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하수룡 장로] 존재감
    2010년경부터 빛나는 조연이 등장하면서 장면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바람에 갈수록 이들의 가치는 커지고 있다. 폭발력 있는 개성적 캐릭터는 주연보다 조연이 매력적으로 구현되어 환호를 낳게 된다. 식상함이 없는 신선함으로 주연과 주변 인물을 섬기는 자세로 연기할 때 그 존재감으로 명품조연이 탄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과 자존감이 남다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인싸’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감이 남다른 사람이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선택받은 자로 구별되게 선민이 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결코 아니다. 왕이신 주님이 최고의 주연이 되셔서 우리를 조연으로 뽑아 잘 받들며 섬기라고 명하였기에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자긍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성할 때 ‘그래도 예수쟁이는 믿을 수 있어.’라는 말로 불신자에게서도 존재감을 인정을 받았다. 선진국이 된 오늘날 모든 것이 풍족해서인지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마저 망각하고 소명감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조연으로 주와 남을 섬기고 산다면 존경심이 담긴 존재감이 드러날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말이다. 요즘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존재감은 어떠한지 자문해보자. 물론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학력의 스펙, 각종 자격증과 세상 지위로 무장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무조건 쫓아가면 나중 될 자가 많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진정한 성도의 존재감은 그리스도를 주연으로 모시고 기꺼이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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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7
  • [하수룡 장로] 보험
    현대인은 일상생활 가운데 화재나 자동차 등에 큰 어려움이 생겼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손해보험이나 생사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보장을 받기 위해 생명보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의료나 건강을 위해 보험을 넣는 경우와 직장을 잃어 곤란을 당할 때 도움을 받는 사회보장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앞날의 안위를 알아보기 위해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는 것은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험의 역사는 개항 이후 영국 보험회사가 설립되었고 일본도 1880년 동경 보험 주식회사가 제일은행 부산지점에 대리점을 개설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자기의 인생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덜어주는 보험 제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의료발전으로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오래 살아서 좋은 것보다 문제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다. 장수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간 무엇을 먹고 살며 혹시 병이 들어 장시간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의료 혜택으로 수명이 늘었다고 좋아하지만 그 수명이 늘어난 만큼 걱정과 염려도 비례하여 늘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인 생사화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살면 해결되는데 왜 걱정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제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한낱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세상 보험에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자는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만이 세상의 어떤 보험보다 든든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누구든지 형식적으로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 나를 위해 큰돈을 보험에 투자를 하는 것과 같이 제대로 투자하고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모두 책임을 지신다. 세상에 걸쳐 살던 삶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믿음으로 결단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보자. 전능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분명히 누리고 질병도 이기고 사망도 이긴다. 세상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머뭇거리지 말고 큰 믿음으로 아낌없이 보험에 투자해보자. 분명 주님의 말씀에 의거한 보증 보험에 투자한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 분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도 붙여주시고 불치의 병도 낫게 해 주신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가능한 길도 열어 주시고 미래의 안위도 책임져 주는 보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보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투자하는 보험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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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하수룡 장로] 순 교 자
    한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순교가 옛날에 믿음이 좋은 어른이 자기 믿음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것이란 것을 알고 자기 엄마에게 대뜸 “엄마, 엄마도 순교자 처럼 순교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요즘같이 실제 보기에 평화스러운 시대에는 순교자가 나타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잘 안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의 박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일어나는 순교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저 우리의 마음만 아파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말이나 행위로 자신 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행위를 말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순 교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오랜 박해를 받아온 유대교에서 순교 의 이상적 형태가 전승되어 왔었는데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종교들이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웃에 순교자의 삶을 살고 간 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함안 부봉 교회의 이현속 전도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처럼 유명하진 못했으나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 하고 생명을 버리기까지 일제에 맞섰던 것은 정말 존경할 만한 일이다. 일본 순사의 혹독한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주님을 배반하지 않 은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발휘한 최고의 순교자요 변치 않는 믿음의 훌륭 한 선배라 하겠다. 훌륭하고 이름 있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 것은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한 것이기에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평양 형 무소로 이송되어 간 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순교하신 것은 슬프다. 지금은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요즘은 부모도 교역자도 순교자의 값진 순교의 삶을 교육하기보다 늘 축복에만 치중하다 보니 회개와 순교란 말씀을 듣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을 쉽게 애국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지 성역화 작업은 놀라운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신총회나 재건 총회 이외에는 개신교의 대부분이 신사에서 참배했으며 전쟁을 지지하고 배교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참회는 고사 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순교한 자들을 입으로만 높임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후예인 양 자랑하는 모순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위선 이다. 특히 외국 선교사 묘지도 단장하고 그 역사를 소유하여 자기의 업적을 높이 거나 상술에 이용되는 것은 순교자를 다시 한 번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000년이 되면서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경쟁하듯이 역사실과 박물관을 건립 하여 유적지 지정에 힘을 쓴다. 100년 넘는 교회들은 왜곡까지 하면서 자기 교회 역사를 거룩하게 미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뼈를 탑에 넣고 모시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선배의 순교신앙을 정기적으로 교육하여 그 정신을 이 어 받고 순교신앙을 이어받는 뼈대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몰락의 위기에 서있는 기독교의 쇠퇴기를 이길 수 있고 혼란기에 겪고 있는 죄악의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와 부모는 함께 즐거운 하 루를 보내고 축복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순교지에 들러 순교자의 숭고 한 믿음을 이어가도록 학습지를 제공하거나 목회자는 정기적으로 순교에 관한 내용을 설교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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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하수룡 장로] 사나래
    세월이 흘러 다 성장한 손자들을 보면 이제는 아들의 아들이나 딸도 부모를 떠나 짝을 찾아 독립할 때가 다 되어 뿌듯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조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어릴 때 다 쏟아 부어 그렇게 딱 붙어 있는 껌처럼 밀착되어 좋아하던 그 모습은 손자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자와 같이 놀아 주었던 조부모들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추억을 먹으면서 종종 행복해 하며 웃음을 지우곤 한다. 엄마의 젖을 빨며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었던 아이가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국군 용사가 되었고 손녀는 결혼할 나이만큼 성장해 있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다. 어려서 부모나 조부모의 사랑을 잘 느끼지만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사랑만 먹고 성장하여 건강하게 잘 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놀랍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랑은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조부모는 손자 어릴 때의 콩딱콩딱 뛰며 꽉 안겨 떨어지지 않는 그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가슴에 그려져 있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훈계 때문에 불만으로 차 있을 때 조부모의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할머니가 청년 손자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은 항상 사나래 같은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끊임없는 조모의 사랑 때문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성인이 다된 아이들이 조부모를 보는 순간 거침없이 달려와 가슴이 터지도록 아낌없이 포옹하게 만든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손자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믿는 노인의 추억 속에 세 네 살 때 손자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던 어린 아이가 ‘우리 하바, 좋은 하바, 우리 하바, 좋은 하바.’하면서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기쁨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세든 노인에게 손자가 감사한 마음을 특별한 날 쭉 써온 편지의 내용을 꺼내보면 더욱 감동하여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늘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맛있는 것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해요.’‘할머니 사랑해요.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세요.’‘은퇴하시면 건강도 챙기시고 행복하십시오.’‘열심히 공부하여 꼭 보답하겠습니다.’‘저희들의 앞날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심을 감사드려요.’‘제가 잘되어 꼭 좋은 차를 꼭 사드릴게요.’등을 다시 읽어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항상 주님이 우릴 안아 주시는 것처럼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의 사나래가 손자들을 늘 품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손자는 할머니가 사나래가 있는 천사가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손자의 성난 상태를 당신의 지혜로 다스리시고 미운 투정에 달콤한 사랑의 케이크로 달래 주신다고 믿는다. 쭈글쭈글한 나이든 손마저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칭송한다. 어여쁜 당신 나의 할머니, 부디 나의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절하게 노래한다. 조부모도 부모와 다름없다. 손자도 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조부모가 사나래를 활짝 펴 그들을 아낌없이 감싸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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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 [하수룡 장로] 탓할 데가 없는 자
    필자기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장로라 하면 보통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인품과 선하고 뛰어난 행동으로 탓할 데가 없는 분으로 신불신간 존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잘 아는 예화 중에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은 사제기간으로 제자를 담임목사로 모신 것이다. 초대 조선일보 사장인 조만식 장로가 급한 일로 주일 예배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도착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보통 목사라면 그냥 넘어 갈 일이지만 주목사는 강단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거기 서서 예배드리시지요.”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늦으면 성도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명한대로 예배를 다 드린 후에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이 못된 장로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울먹이니까 온 교인들이 같이 울어 순식간에 은혜의 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믿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두고두고 아름다운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만 하더라도 장로의 숫자는 엄청 많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즐기고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다 누리던 분이 돈이나 세상명예를 가지고 장로가 되어 옛날의 것을 다 끊어버리지 못하고 장로의 직을 수행한다면 정말 교회가 시끄럽게 된다. 술 담배를 즐겼던 자는 과감히 끊어야 하고 해외여행 가서 불건전한 골프나 마사지를 즐겼던 장로이면 회개하고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 특히 교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를 중심으로 당을 만들어 교회를 어지럽힘은 죄악임을 깨닫고 훼파해야 한다. 서울의 대형교회 어느 장로는 형제간에 부모의 재산 때문에 원수가 되어 사회법정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정말 부끄럽다. 어린 성도들이 장로는 목사를 쫒아내는 주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 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장로선택의 맹점은 교회의 형편이나 조직의 방침대로 장로를 뽑게 되니까 수준이하의 장로가 탄생되어‘장로가 왜 저 모양이이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보통 장로 장립할 때에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충성되이 살 것을 다짐하는 모습은 든든하고 희망적이었음을 기억한다. 오랫동안 장로의 일을 수행하면서 배우고 익혀 탓할 데가 없는 장로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인데 해가 갈수록 헌신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림과 권위의식에 젖어들어 교회의 귀중한 일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좋은 장로는 청지기의 삶으로 교회의 밑거름이 되고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은 매우 귀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꼭 필요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매일 내가 장로의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고 주님께 탓할 데가 없는 좋은 장로의 자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내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는 장로로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고 살아가는지를 스스로 평가하고 또한 질서 있게 당회를 잘 섬기는 장로가 되었는지 자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보통 목사와 장로는 부부관계라고 말하는데 목회자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고 목회자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피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진정 장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나의 직무를 찾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분별력도 절대 필요하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는 소리에 공감한 적이 있다. 교회 장로는 머슴같이 섬기는 위치에 서있어야지 대우받는 감독의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적인 것은 버리고 낮은 자의 자세로 탓할 데가 없는 자로 성도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보통 목사는 좋은 장로를 만나는 것이 목회의 행복이고 장로는 목사를 잘 만나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말한다. 작금에 병들어 시들어가는 한국교회를 올곧게 성장시키려면 장로가 바로 서야한다. 장로가 탓할 데가 없이 바로 서야 교회와 나라가 산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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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요즘 신학교 입학은 재수는 필수이고 보통 삼수를 하는 것이 상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양질의 우수한 목사를 양육하여 배출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 마치고 목사가 된 후의 모습의 차이로 많은 성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여 분쟁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때만 하더라도 목회자의 사례가 형편없었다. 가정을 가진 목회자는 자녀교육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충분히 되고 남았다. 그 당시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처럼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고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잘 양육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존경을 받는 분이지만 작금에는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회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청년들이 꼽는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청년 사역자들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여’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 이었다. 최근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눈물로 부흥시켰지만 결국 자만하여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주역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분노케 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회보다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회를 진행했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잃고 성도는 실망과 혼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지 못한 목사를 소수의 추종자들이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성도를 험담하고 욕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목사가 진정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희망이 없다할지라도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분열이 있을 수 없고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선다고 확실히 믿는다. 의지할 곳이 없는 혼돈한 지금은 수백만 성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전 국민의 귀감이 될 존경 받을 만한 진정한 목회자 한 사람이 절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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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하수룡 장로] 파랑새
    작년 봄 창가에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이상한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 같아 눈을 돌렸더니 파랑새 같은 큰새 한 마리가 날아와 베란다 꽃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파랑새는 활엽수가 많은 인가 부근에 서식하며 높은 나무에 앉는데 우리 집이 산중턱에다 아파트라 이 새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행복이나 사랑을 노래할 때 파랑새가 많이 등장한다. 실제 이 새는 둥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우고 욕심이 많은 새로 날씬하거나 예쁜 새는 아닌데 노래나 소설에서는 이상적인 새로 표현되는 것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파랑새가 일제 강점기에는 녹두꽃을 짓밟은 위협적인 새로 등장하고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미실을 엄청 사랑했는데 전장에서 돌아왔더니 이미 궁중으로 시집을 가버려 임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파랑새가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전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반대로 어느 60대의 문맹자인 초등학교 교장의 사모는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 초중고까지 검정고시를 합격했지만 대학은 가지 못한 채 암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훌쩍 날아간 한 마리의 파랑새가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애틋하고 맘 아프다. 벨기에 작가 마테를 링크의 동화인 파랑새에도 가난한 나무꾼 아이인 남매가 마법사의 병든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온갖 고생을 한다. 결국 꿈을 깨어보니 바로 머리맡 새장 속에 그 새가 있음을 발견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명약도 바로 가까이 있음을 알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먼 곳이 아니고 내 곁에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과소평가하고 소문만 듣고 멀리 있는 잘 모르는 어느 누구가 능력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다. 어떤 문제를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기보다 우수하거나 잘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풀어가려는 잘못된 습성을 과감히 버리고 고쳐야 한다. 현대인의 문제점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감을 갖지 못하고 산 넘어 먼 곳에 내가 만족할만한 좋은 파랑새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늘 이상적인 직장이나 자신이 만든 부푼 희망으로 자기가 만든 허울에 갇혀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게다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방송 드라마가 우울증과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남이 볼 때에는 좋은 직장인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인생을 찾으려는 파랑새 증후군이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고 만다. 지금도 파랑새 증후군의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는 파랑새의 행복과 행운을 바라고 기다리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되는 모든 분들과 환경을 황폐하게 만든다. 현실 부정보다 주어진 모든 여건을 감사하며 가족들과 더불어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운의 파랑새가 내게 오기를 바라기보다 현실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족과 더불어 서로 대화하면서 그분과 함께 더 많은 것을 꿈꾸자. 그리하면 나무꾼 아이처럼 가정의 울타리 안에 파랑새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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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하수룡 장로] 천국 환송 콘서트
    늦은 가을에 94세를 향유하시고 생을 마감하신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남은 온 가족이 지상천국을 경험했다.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도우미로 섬겼던 분들의 말씀이 한결같이 한 가정의 장례는 식장에서 ‘모가 아니면 도’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장례가 주일이 끼어 4일장 치루는 동안에 옆 상가에서 고성이 오갔고 새벽까지도 시끄러워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됨을 목도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죽기 전에 금전 문제와 복잡한 문제 등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 쉬운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사후에 시끄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 보통 어른들은 사후에 남아있는 후손들의 가정의 평안과 형제우애로 가정천국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재산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후에 큰 걱정이 없다. 우리 가정에도 막내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천국환송이 되기 전에 소유한 적은 재산을 모두 내어 주었더니 노환으로 고생하실 것을 미리 알고 효심을 발휘하여 모든 형제자매를 안심시킨 것이다. 진심으로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었고 다른 형제에게도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한결 용이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게 했다. 늘 어머니는 병상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 찬송하셨고 크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필사하신다고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놀라운 사실은 노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관 예배를 드릴 때 유가족이 망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들 인자한 모습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얼마나 평안하셨던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30년 동안 장로로 시무하면서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렇게 맑고 온화한 모습을 처음 접한 것이다. 유능한 목회자도 돌아가실 때 천국이 없는 것처럼 절규하였고, 유명한 장로도 마지막에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고 뭐고 다 귀찮소.’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는데 한낱 이름 없는 평신도의 마지막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아마 막내아들의 효심과 사랑이 어머니를 만족하게 했고 성령 하나님의 위로와 역사하심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주검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유가족이 어머니가 천국으로 환송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함으로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다. 어머니는 네 자녀와 일곱 손자들을 남겨두고 만족한 마음으로 천국 가셨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천국환송 길을 배웅하였다. 발인 전날 저녁에 자연스럽게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천국환송을 축하하는 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뮤지컬 배우인 외손녀가 축하 송을 시작으로 유일하게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둘째아들의 ‘참 아름다워라’가 모인 회중을 압도하고 감동을 주었다. 한 달 동안을 연습했단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제는 예수를 영접하도록 권유하여 믿기로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날 천국환송 콘서트의 열기 속에서 자녀 손들과 도우미들까지 입을 모아 천국 환송곡을 부르면서 지상천국을 맛보았다. 35년 전에 천국가신 아버지의 한 줌의 흙을 모셔와 어머니와 함께 상복원에 나란히 모셨다. 천국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천국환송을 위한 아름다운 환경을 꼭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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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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