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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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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앙교육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학교 교육은 물론, 심지어는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교실의 위기와 학교교육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러한 시점에서 언약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더 개혁주의 관점에서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러 가지 말들로 개혁주의 교육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개혁주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도교회의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롬11:36).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고백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 실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구속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full-time)의 왕국 봉사를 하도록 요청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This is mine)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혁주의 원리는 교회의 신앙 교육뿐 만 아니라, 가정 교육, 학교 교육, 그리고 사회 교육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권 하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신앙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상업, 정치, 과학, 예술, 의학, 연극 영화, 음악, 저널리즘, 그리고 기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의 왕국 봉사자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포괄적이며 보편적,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창조의 성경적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의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대로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강조하는 신앙 교육의 한 기본 원리는 한편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 신비로움, 곧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질서에 순응하고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갈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되 단순히 분리된 조각들로 가르치거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답들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원칙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창조 세계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주는 성경의 역할, 비유컨대 ‘광부의 전등’과 같은 성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교육은 인간 타락의 영향이 철저하며 창조 세계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교육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도 아니며, 창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님을 가르친다. 요컨대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의 의미를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창조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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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4) (민12:1-3)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오히려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직분과 사명 때문에 원망 거리를 찾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할 때부터 직분과 사명을 망각한 미리암의 원망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어도 깜짝 놀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역사가 확연하게 드러나면 멈추는 것이 상식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오리무중이고,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될 때야 혹 의심도 생기고, 불신도 생기고, 원망이나 불평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인정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눈앞에서 나타난다면 성도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무서워서라도 하던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리암은 한평생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미리암은 어릴 때부터 동생 모세가 그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미리암은 목숨을 걸고 동생 모세를 살렸습니다. 모세가 후일을 도모하고 애굽을 떠난 40년의 세월 동안 미리암은 선지자가 되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돌보았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10가지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미리암이 몰라서, 애매해서, 헷갈려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단순한 비방 같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비방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혹 모세는 넘어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넘어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목회자가 하는 일이나 교회 일에 불구경하는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교회가 함께 나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기준이나 주장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통해 교회가 집중하는 일보다 자신의 강조점을 우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하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 분명한 명분도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과 교회를 위한 사명도 매우 중요한 사역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할 때는 자신이 하던 그 어떤 일도 멈추고 그 일을 우선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소천하셨습니다.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릅니다. 가야 합니다. 인륜지대사로 부모님의 장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삿짐을 사야 합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토를 달고, 그것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호와의 구름이 이 상황에 떠오르느냐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원망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역사의 진행에 원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고개를 쳐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분명한 일에는 그 어떤 원망도, 원망은 흉내도 내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 중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처럼 귀하지 않은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도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관심하다거나 반대의 길을 걸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과 목회자의 교회를 위한 방침에 무관심한 자는 혹시 그것이 나름 자신의 신앙적인 결단과 믿음을 향한 일이라 할지라도 미리암이 될 위험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은 미리암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함께 하는 자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역행하니 당연히 원망이 생깁니다. 세상의 물줄기는 역행을 해야 시궁창으로 빠지지 않고 하늘로 비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하는 복음과 교회를 역행하면 땅으로, 지옥으로 빠지게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찬송하는데 자신은 기도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기도하는데 자신은 찬송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이런 것들도 위험한데 감사해야 할 상황에 원망 거리를 찾는다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원망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정당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심을 잊어선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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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어린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난 호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구비 시켜 주는 사역은 가능하면 어린 시절에 시작하고 기초를 놓아주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그렇다면 아동 및 청소년의 신앙과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미국 바나(Barna) 연구소의 조사 연구자들도 이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602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모님 외에 롤 모델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바나 연구소의 이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다섯 그룹은 ①부모 ②다른 가족 구성원(일반적으로 조부모) ③교사 및 코치 ⑤친구 ⑥목회자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부모 다음으로 아동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조부모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회자나 또래 집단 또는 교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동 및 청소년들의 삶에 미치는 가장 큰 두 가지 영향력은 모두 가정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돕는 주요 수단으로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자도의 훈련을 계획하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세 번째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교육자다. 교육은 가정 다음으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래 집단의 영향력도 영향력을 미치는 목록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바나 연구소의 추후 연구에서는 이들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실제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켜주고 있다. 교회는 젊은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연구 결과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교회의 울타리 너머로 확장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십대들에게 특정 인물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그 사람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역할 모델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젊은 세대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들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삶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바나 연구소의 연구가 보여주는 다섯 가지 영향력을 살펴보면 비로 이 논리를 따르고 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생 동안 젊은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들은 인생의 초기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그대로 흡수한다. 사람의 신념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유전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바로 그 사람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누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선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삶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전11:1)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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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3) (민12:1-3, 창5장)
미리암은 자신의 선지자 직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자신이 받은 선지자의 직분과 사명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직분과 사명이 하나님을 앞서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과 사명을 받고 나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교회를 위임하십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 잡는데 대부분 시간이 가면 착각을 합니다. 교회를 목회자 자신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망각합니다. 급기야 자신이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리암의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미리암은 여 선지자로서 모세가 오기 전까지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의 사명, 모세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제 참 선지자인 모세가 와서 본격적으로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은 모세의 길을 예비한 자신의 사명에 감사 감격했어야 했습니다. 훗날 실제로 완전한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출애굽을 위해 오셨을 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요한은 미리암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3: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미리암의 전철을 밟지 않고 주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1: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만약 미리암이 세례요한처럼 이 사실을 잘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여인으로 그 이름으로 남겨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창5장에서부터 족보를 기록합니다. (창5:4-5)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0-31)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시작하는 족보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5: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죽었더니 낳았더라”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의 때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의 때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 받았습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140세에 아들 이삭이 결혼합니다. 175세에 죽었으니 그 후 35년 동안 한 장막에서 이삭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160세에 손자 에서와 야곱을 보았습니다.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한 장막에서 3대가 한 장막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삭 결혼 후 죽을 때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삭에게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매정한 듯합니다.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한 사건 이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언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25:7)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렇게 볼 때, 성경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향년을 기록한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성도가 얼마를 살았다는 기록조차도 우리에게 성도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지표가 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여백조차도 구원을 향하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역이 죽었더니 이삭의 사역을 낳았더라!”입니다. “이삭의 사역이 죽었더니 야곱의 사역을 낳았더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경의 구절뿐만 아니라 여백 안에도 우리의 구원을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득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을 이어받은 야곱은 이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현합니다. 자신의 손자를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의 아들을 형제로, 형으로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는 믿음장에서 야곱의 신앙을 다 한 줄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1: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성도는 항상 “미리암이 되느냐? 세례요한이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죽었더니 낳았습니다.” 모세가 죽었더니 여호수아를 낳았습니다. 교회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가해집니다. (창3: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여자가 죽어야 자식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죽을 때 그리스도의 후사를 잉태하게 됩니다. 날마다, 예배 시간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므로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믿음의 후사를 낳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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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과 공동체성
복음은 우리 삶의 전체 실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복음은 인간이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갖고 있는 신념들의 총체적 틀에 대하여, 인간의 감정과 태도의 전체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 행위의 전체 양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배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의식을 실천하는 것 이상이며, 설교를 듣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윤리를 따르고 실천하는 것 이상이며, 기도와 말씀 묵상 등 경건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교리를 수용하는 것 이상이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독교적이라는 삶의 방식에 총체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는 자신의 삶의 전체 넓이와 폭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전 존재에서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세속적인’ 활동들을 포기하고 소위 ‘종교적’인 어떤 특별한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이러한 활동의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적인 신뢰를 행사하는 하나의 수단을 모색한다. 종교의 실천성에 대한 강조는 종교를 생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어떤 종교를 갖느냐는 문제는 자신의 삶의 질과 방향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종교와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 ‘마음’(heart)의 경향성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 전체가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종교와 관련하여 성경적 세계관은 특별히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빈(Calvin)은 인간의 마음을 종교가 거하는 ‘좌소’(seat)라고 보면서 ‘종교의 씨앗’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이 종교의 씨앗은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의식’에서 나타나며, ‘경건’(마음의 올바른 자세)(a right set of the heart)과 ‘종교’(올바른 삶의 방식)(a right way of life)를 생산해 낸다고 보았다. 성경은 종교를 ‘마음’(heart)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마음에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다(잠 4:23). 성경에는 800여 곳 이상에서 ‘마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마음을 인간의 인격의 핵심 또는 인간 생활의 핵심적 지도력을 의미하고 있다(잠 23:7).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고 말씀하셨다. 마음의 헌신이 우리의 종교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것은 또 다시 우리 삶의 걸음걸이를 설정한다. 종교는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표출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표출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구현해 내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릭 워렌(Rick Warren)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며, 다른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고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가족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믿는 사람들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목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종교와 교육의 문제를 논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기본적인 전제는 공동체적으로 표출되는 종교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단순히 적응하거나 사회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공통적으로 표출해 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신자들의 공동체, 신앙의 가족, 교회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조화의 회복은 사람들 사이의 조화의 회복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로서 이해되는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맥락이며 성취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사회로 부터 도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오히려 사회의 한 가운데서 그 공통 신앙을 행사해야 한다. 도피적인 삶은 아무런 유익도 가져오지 못한다. 세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바울도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내가 행하노라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피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 병든 세상 속에서 치유하는 향유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새로운 삶을 세상에 증거 하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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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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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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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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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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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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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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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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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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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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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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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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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곤 목사]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13:22) 이 아침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영육간에 강건함과 행복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제21대 국회의원으로써 나라와 민족, 우리 경남을 위해서 일하게 되신 국회의원님들에게 하나님께서 따뜻한 가슴과 지혜와 명철함을 주셔서 뛰어난 의정활동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바쁜 중에서도 참석해 주신 김경수 도지사님과 김지수 도의회 의장님과 각의회의원님들, 박종훈 도교육감님과 허성무 창원시장님, 멀리 거제에서 오신 우리 변광용 시장님과 참석하신 모든 분들에게 큰 은혜와 복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은 법과 제도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움직입니다. 좋은 법은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고, 국민들의 행복지수와 삶의 질을 높입니다. 그러나 악한 법, 좋지 않은 법은 삶을 퇴보시키고 나라를 나락으로 떨이지게 합니다. 1586년 3월 13일 조선 선조 19년에 전남 나주에서 이상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다물사리’라는 80세 노파가 자신이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시대 노비는 사람으로서의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노비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그런데 이 80세 할머니는 자기가 양인이 아니라 노비라고 주장하고, 그의 주인 이지도는 ‘다물사리’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라고 고소했습니다.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것은 조선시대의 잘못된 악법, 종모법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아시는 대로 조선은 양반 중심의 계급사회입니다. 법은 만민에게 평등해야 하는데 조선의 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양반중심이었습니다. 여인이라고 차별받았고(七去之惡, 칠거지악), 천인이라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평생토록 노동력을 착취 지옥같은 삶을 살게 하고, 그 자녀까지 자동적으로 노비가 되게 했습니다. 노비는 소나 짐승처럼 그저 주인의 재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양천법(일천즉천) 즉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자동으로 노비가 됩니다. 종모법, 노비의 자녀는 그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따라갑니다. 양반과 노비에게 각각 다른 법을 적용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는 종법(宗法) 의식에 의거해서 부계(父系) 혈통을 지향하는 사회였다. 그런데 유독 천인(賤人), 노비(奴婢)들에게는 종모법(從母法)을 적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종모법(從母法)은 말 그대로 자녀들이 어머니의 신분과 소속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노비(奴婢)이면, 자녀들도 노비(奴婢)가 되고 그 소유주도 같다. 노비(奴婢)끼리 혼인해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계집종 상전(上典)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사내종이 다른 집안의 계집종과 결혼하는 것은 주인 입장에서는 매우 큰 손실이었다. 그래서 양반(兩班)들은 다른 집 계집종과 혼인한 자기 집 노비(奴婢)의 전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결국 사내종은 양반(兩班)들의 재테크를 위해 양인(良人) 여성과 혼인하도록 반강제적으로 강요받았다. ‘다물사리’는 이지도의 노비 윤필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지도(李止道)의 주장대로 다물사리(多勿沙里)가 양인(良人)이라면 그 6명의 자식들은 노비(奴婢)인 아비를 따라 모두 이지도(李止道)의 사노비(私奴婢)가 되어 이지도의 재산이 증식됩니다. 반대로 다물사리가 양인이 아니고 노비이면 6명의 자녀들은 이지도의 노비가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관노비 소속으로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다물사리’는 자신의 어미가 성균관(成均館) 노비(奴婢)인 길덕이며, 그러므로 자신과 6명의 자녀들 역시 성균관(成均館) 소속 노비(奴婢)라고 주장했다. 참 기가 막힌 현실이었으나 그것이 조선이었습니다. 성종실록(1478년 4월 8일)의 기록을 보면 백성 중 십중팔구는 노비이고, 양인은 불과 한 둘에 불과하니, 갈수록 노비만 늘어난다고 탄식했습니다. 왜입니까? 노비는 양반들의 재산 증식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명종실록(1551년 9월 28일)에도 노비가 양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니, 노비만 많아지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17세기 우리 경상도 전체 인구의 42%-64%가 노비였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제5왕자 광평대군, 제8왕자 영응대군은 노비가 각각 1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재판의 30%가 노비관련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이 천하의 악법, 종모법은 19세기 영조 때에 와서 폐지됩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하는데 양반과 노비의 법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의 법이 달랐습니다. 그러니 백성의 한이 하늘에 쌓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국민의 대표적인 정서가 한이었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이 한을 가슴깊이 못 느낄 것입니다만 저는 이 한의 개념을 똑똑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한 많은 이세상은” 그 구슬픈 가락은... 지금 우리나라는 노비제도도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능력에 따라서 꿈을 키우며 사회의 전분야 진출합니다. 김지수 의장님도 여성으로서 도의회 의장이시잖습니까? 박근혜 대통령님도 여성으로서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지난 2009년 1월 21(20)일 흑인 버락 오바마가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이 되었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흑인들이 누구였습니까? 저들은 거의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학교도, 프로운동선수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들보다 더 비참했던 사람들이 흑인 노예였습니다. 그랬던 흑인들이 어떻게 해서 오늘 이처럼 마음껏 꿈을 꾸며 모든 면에 진출하게 되었습니까? 꿈꾸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 1759.8.24.-1833.7.29.75세), 그는 21살에 의원이 되어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위대한 꿈을 꾸며 그 일에 일생을 바칩니다. 1807년 2월 23일, 정치 입문 20년 만에 11번의 실패 끝에 영국의회에서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을 가결합니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1833년 7월 26일 드디어 노예제도가 금지되고, 영국에서 모든 노예는 해방됩니다. 그 놀라운 소식,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이루고 3일 뒤에 윌리엄 윌버포스는 75세의 생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생애 한 사람의 정치인이 꿈을 갖고 노력한 결과, 이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노예무역이 금지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습니다. 1863년 또 한 사람의 꿈에 의해서 노예가 해방됩니다. 바로 미국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꾸었던 꿈이 아브라함 링컨에게 이어졌습니다. 링컨은 행정가로써, 통치자로서의 결단으로써 흑인 노예를 해방하였던 것입니다. 노예무역이 금지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과 제한으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해방한 그로부터 꼭 100년 뒤인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링컨 대통령 기념관 근처에서 25만(1/5 백인)의 시민들이 모여서 자유를 위한 대행진을 했습니다. 그 때 35살의 마틴 루터 킹(1929.1.15 – 1968.4.4.)목사님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명 연설을 남깁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꿈같은 현실입니다. 윌리엄 윌버포스의 꿈, 그 꿈을 이어받은 아브라함 링컨의 꿈, 그 꿈을 가슴에 품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님같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희생한 사람들에 의해 마침내 불가능의 벽이 무너지고, 그 꿈이 이루어져 세상은 평등과 자유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흑인 버락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등장하는 다윗은 양치기 소년에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약 3천년 전 이스라엘의 제2대왕으로 등극하여 40년을 통치하면서 태평성대를 이루고 이스라엘을 반석 위에 세워 놓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위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興亡盛衰(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인생을 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정치를 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 다윗을 통해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꿈이 있습니까?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는 꿈꾸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저에게도 우리나라를 향한 꿈과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정직한 나라, 진실한 국민, 정직과 진실이 승리, 성공하는 나라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한 양심이 살아있고,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나라, 통일한국의 꿈,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확고한 기반위에 평화적인 남북통일, 복음 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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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곤 목사]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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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
- 인생의 삶은 환난, 고난의 연속입니다. 환난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환난을 통해 연단 받고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환난 당할 때 담대해야 합니다.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사무엘하 4:9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다윗의 삶은 평탄한 삶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수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다윗은 수 많은 환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생명의 위기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사울 임금에 의해 죽을뻔 했을 때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습니다. 생명의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 당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건져 주십니다. 인생의 삶에 여러 가지 예기치 않는 위기가 찾아 옵니다. 경제의 위기, 인간 관계의 위기, 건강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환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환난의 때에 건져주십니다. 욥기 5:18-19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인간은 인간이 당하는 환난, 위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해결하실 수 있으신 전능자이십니다. 평생 건강해서 장수하는 것이 아니고 건강의 위기 때마다 건져주시고 병을 치유 하여 장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환난과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난과 위기의 때에 생명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부르짖으라 내가 건져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50:5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시편 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로마서 12: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야고보서 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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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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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사울 왕을 버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버리시기도 하고, 세우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최고의 비극이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최고의 은혜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울 왕을 버렸을까요?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의 운전을 잘 해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마음을 강조합니다. 마음이 선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제사 드려야 하는데, 사울 왕이 교만하여 제사장을 제쳐놓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인도합니다. 교만한 자는 남의 위치를 뺏으려고 합니다. 영적 질서를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공격합니다. 사울은 마음의 분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분노의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불행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살펴보다가 버리시기로 작정했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했는데, 나중에는 교만했습니다. 언제나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야 합니다. 초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음이 교만하면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교만이 숨어있는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자기 자신 관리가 최고의 관리입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겸손의 고백입니다. “사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사울은 키도 크고, 외모가 준수했습니다. 외모가 중요하나, 내면의 세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내면의 세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외모는 초라해도 내면의 세계가 아름다우면, 하나님께 신뢰를 얻게 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문에, "the Lord looks at the heart"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마음을 자세히 살피십니다. 예레미야 17장 9-10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the LORD search the Heart)” 다윗의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히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100%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마음은 얼굴과 행동에 영향을 주어서 나타나게 합니다.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 얼굴에 나타납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당시 잘 난 사람, 잘 생긴 사람, 재주 많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입니다. 당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찾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찾으시고, 뽑으시고, 세우시고,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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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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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키지 못할 말을 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약속 언약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거짓말하게 되고 약속을 지키지 않기도 합니다. 인간은 부패했고 거짓되고 죄성이 있기에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황 따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거짓말하기도 합니다. 온전한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거짓되고 죄성을 가진 자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거짓되고 약속을 어기기도 하나 하나님은 진실하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19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거짓된데 하나님은 거짓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 인간은 늘 실수하고 죄짓고 후회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완벽하고 실수가 없기에 후회가 없으십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진실한 하나님이시기에 신뢰하게 됩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은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없고 진실하기에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고 진실합니다. 진실한 약속 말씀이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약속을 주시고 지키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에 믿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찬송가 267장1. 주의 확실한 약속의 말씀 듣고 주만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2. 나의 갈길이 험하고 위험하나 항상 예수의 도우심 믿고가네3. 주의 보좌에 천사들 둘러서서 우리 구주를 높이어 찬양하네4. 예언자들과 왕들도 반여대로 황금길 따라 나아와 찬송하네5. 우리 모두 다 그 반열 뒤따르며 함게 즐거운 찬송을 부르리라(후렴)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루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가 예수를 믿어 그의 흘리신 피로 내 죄 씻었네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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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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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유가 없이 고통스럽게 사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고, 자유를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레위기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구원하시고, 자유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군가를 구원해 주거나 자유를 주거나 인도할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레위기 22:33,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 힘과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구원해주고, 자유를 주고, 인도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을 주시면서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애굽은 세상입니다. 세상은 죄와 유혹이 가득 찬 세상, 사건사고가 많은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의미는 세상에 있는 자를 불러 모은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성도의 삶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넘어지고, 죄 짓고, 타락하지 않도록 은혜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항상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3:1-3,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네”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세상에 내버려 두지 않고 불러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레위기 22:31-33, “31너희는 내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32너희는 내 성호를 속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이니라”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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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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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기도할 때 주의 긍휼로 건지시는 하나님
-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크신 긍휼입니다. (느헤미야 9:17-19) 17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18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19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목자 없는 양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27-31) 27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긍휼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한 번의 긍휼이 아니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주십니다. 환난을 당하면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건져 주리라”고 약속합니다.환난, 고통의 때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면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 주십니다.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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