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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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오랫동안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과 총알택시 운전사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가 당연히 총알택시 운전사 보다 훨씬 더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왜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동안 설교를 하면서 항상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이 총알택시 운전사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기도하게 했기 때문 이니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는 이다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 생리적인 욕구 다음으로 강한 욕구가 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학생은 선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성도는 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던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했을까요? 믿음이 칭찬을 받은 결과 그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그날을 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칭찬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정말 대단합니다. 첫째는,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입니다.(잠언16:24절) 둘째는 칭찬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전8:15) 셋째는 칭찬은 사랑의 비타민입니다.(잠15:23) 우리 모두 칭찬 보약을 많이 먹고, 칭찬 비타민을 많이 먹고, 건강한 인생 춤추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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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7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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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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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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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0-12-09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미국 하버드대학교 폴 케네디교수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의 문화이다. 한 민족은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래서 민족의 저변에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한이 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게 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배후에 촛불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둘째, 가족 문화이다. 가족 중심의 정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머니 품에서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는 감성이 풍부하다.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때 한민족의 효 문화가 세계 열방을 선도할 강점이 되었다. 셋째, 엘리트 의식이다. 한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이 하나의 긍정적인 목적으로 작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넷째, 모험정신이다. 적극적인 모험정신은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마지막 다섯째, 단일민족의 정체성이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로 뭉쳐진 공동체의 저력은 다이나믹한 폭발력을 발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긍정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고장 난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에서 해결을 받는다. 인간은 사고뭉치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자유를 얻었다. 마태는 세관에서 돈으로 얻을 수 없었던 참 평안을 예수를 만남으로 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억지 금식을 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을 통한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을 보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본문 1절에서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마을이다. “수 일 후에”라고 하심은 성구막 1:21막 1:21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던 때가 다음 안식일이 이르기 전이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온 이후로 온 동네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온전해지고, 각색 병든 자가 와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 주님이 다시 오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이런 상황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에게로 나온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일차 가버나움을 다녀간 이후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오셨고 그들은 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을 만나러 왔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불가능한 환경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매고 가는 사이에 벌써 사람들이 먼저 와서 꽉 들어 차 있어 문 앞까지 들어 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불가능한 환경 앞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적극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동서사방으로 다 막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 넷째, 지붕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사실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사건이다. 우선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속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환자를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는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어떤 중풍병자라도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혼연일체 된 마음이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도 그러했지만 최후의 순간 환자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릴 때는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는 초긴장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풍환자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런 믿음의 행위를 보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중풍병자가 많이 있다. 제 발로 걸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은 다 영적 중풍병자이다.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함께 물질적인 헌신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풍병자를 말씀 앞으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를 그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리 마태 집에서 주님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다. 가버나움에서 세관을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가정과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본문 14절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알패오란 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자라서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에 앉아 사역하면서 그 마음에 수많은 영적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란 “하나님과 연합”이란 뜻이다. 알패오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 지었을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레위는 세관에 앉은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세리는 로마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매국 행위를 행하므로 창기보다 더 추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그 아들 레위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이 직업에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레위는 미련 없이 세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와 그 아버지 알패오는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증오하여 주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때 주님은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나는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세관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하는 자를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둘째, 기쁨과 감격을 주기 위한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 주님은 율법적 제약에 얽매여 있는 부자유한 신부들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복음의 신랑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득세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의 능력으로 흉악한 결박을 풀어서 승리해야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주중에 2일 이상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그러나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에 가면 이런 금식의 법에서 자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제의 자유를 준 영적 신랑이다. 셋째, 새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로 오셨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당시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적인 전통은 생명력이 없으므로 변화에 신축성이 없는 묵은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진 운동하는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였다. 주님은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병든 인생은 영적 대 의사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의 기쁨으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생베 조각의 복음적인 가치를 낡은 구습과 전통에 붙여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생명의 복음은 어떤 언어와 문화적인 삶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안식일에 밀밭 가에서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갔다. 분주하게 서두르다 보니 식사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시장한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었다. 이것이 용케도 바리새인의 렌즈에 잡혔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해서 보도 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이며, 그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정미소에서 방아 찢는 것이며, 껍질을 날리기 위해서 입으로 분 것은 타작마당에서 가라지를 날리는 키질행위라고 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님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집에서 행했던 것을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사울 왕에게 쫓겨 온 다윗에게 베풀 항용 떡이 없음을 보고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 떡을 주어 먹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은 안식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을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금지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회당과 동네를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 안식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함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창조질서에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철저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안식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런데 그 안식일에 주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이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은 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행하신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농부가 추수할 때 밭이랑에 이삭 얼마를 남겨 두어 길가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양식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친히 금식하여 주려 죽는 아픔을 체휼해 보았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 지명유대인 전통을 계승하는 소극적인 금지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복음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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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실시간 성경 기사

  • [바이블 큐티]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마 21:1-46)
    주님을 성전에 모셔라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성전은 어떠했는가? ① 매매하는 상거래 장이었다. 우리가 간혹 교회에서 바자회도 하고, 또 기관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팔기도 한다. 그 자체를 보면 상거래 같지만 그것은 선교와 전도를 위한 선한 동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지적한 것은 구원의 감격을 찬미하는 성전이 상거래 하는 이익의 도장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돈 바꾸는 금고였다. 물론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디아스포라들이 본국에 왔을 때 돈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전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성전 안에 들어온 모든 돈은 연보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보궤 안에 들어가지 않은 돈이 교회 안에서 유통이 되고 실력행사를 하는 것은 타락한 중세 교회상이다. ③ 비둘기파는 새장이었다. 성전에 갈 때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간다. 그것은 놋제단에서 재물이 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울어대는 양이나 비둘기는 아직 제물이 되지 않았기에 죽어야 할 제물이 살아 있으니 소음 공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 제물이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자아가 살아서 소리를 지르니 온 교회가 소란한 것이다. 성전은 만민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집이다. 성전에서 상거래 소리가 나서도 안되고, 성전에서 돈이 실력행사를 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오늘 우리 시대에 참된 제사를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주님을 배불리 대접하라 시장했던 주님은 열매를 얻기 위해 무화과나무 곁으로 갔다. 그 날은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가 당시 유대의 종교적 실상이요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이다. 이 무화과는 어떠한 존재인가? ① 길가에 심겨진 나무다. 유대지방에는 6월과 8, 9월 두 차례 열매를 거둔다. 그런데 지금은 4월 유월절 때이니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마가는 무화과 때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는 3-4월에 지극히 맛이 없는 빈민들이나 길 가는 나그네들이 식료로 사용되는「빠김이」라는 것이 있다. 주님이 찾으신 것은 바로 그 열매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그 사명을 저버린 것이다. ② 잎만 무성했던 나무이다. 잎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다. 이는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모습이었다. ③ 결국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가 되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처럼 사명을 저버린 인생도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열매 없는 나무는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없는 인생은 죽은 존재와 같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의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살아있는 설교였다. 외적으로 율법의 규례만 좇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잎사귀 속에 감춰진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나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흔한 빠김이 하나라도 맺지 않았으니 더 이상 땅만 허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께로 돌아와 순종하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①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가겠소이다”하고는 자기 할 일 다 하고 가지 않았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이다. 대답은 속시원하게 ‘예’했으나 행위는 그와 정반대였다. ② 이제 둘째에게 가서 이같이 말하니 ‘싫소이다’하고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다. 이는 당시 세리와 창기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자기의 정욕대로 살았다. 그러나 후일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왔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 자인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신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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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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