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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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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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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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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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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어린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난 호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구비 시켜 주는 사역은 가능하면 어린 시절에 시작하고 기초를 놓아주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그렇다면 아동 및 청소년의 신앙과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미국 바나(Barna) 연구소의 조사 연구자들도 이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602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모님 외에 롤 모델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바나 연구소의 이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다섯 그룹은 ①부모 ②다른 가족 구성원(일반적으로 조부모) ③교사 및 코치 ⑤친구 ⑥목회자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부모 다음으로 아동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조부모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회자나 또래 집단 또는 교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동 및 청소년들의 삶에 미치는 가장 큰 두 가지 영향력은 모두 가정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돕는 주요 수단으로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자도의 훈련을 계획하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세 번째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교육자다. 교육은 가정 다음으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래 집단의 영향력도 영향력을 미치는 목록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바나 연구소의 추후 연구에서는 이들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실제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켜주고 있다. 교회는 젊은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연구 결과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교회의 울타리 너머로 확장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십대들에게 특정 인물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그 사람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역할 모델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젊은 세대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들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삶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바나 연구소의 연구가 보여주는 다섯 가지 영향력을 살펴보면 비로 이 논리를 따르고 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생 동안 젊은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들은 인생의 초기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그대로 흡수한다. 사람의 신념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유전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바로 그 사람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누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선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삶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전11:1)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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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3) (민12:1-3, 창5장)
    미리암은 자신의 선지자 직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였습니다. 자신이 받은 선지자의 직분과 사명을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직분과 사명이 하나님을 앞서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과 사명을 받고 나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교회를 위임하십니다. 처음에는 위치를 잘 잡는데 대부분 시간이 가면 착각을 합니다. 교회를 목회자 자신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망각합니다. 급기야 자신이 교회의 주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리암의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미리암은 여 선지자로서 모세가 오기 전까지는 출애굽을 위한 준비의 사명, 모세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이제 참 선지자인 모세가 와서 본격적으로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은 모세의 길을 예비한 자신의 사명에 감사 감격했어야 했습니다. 훗날 실제로 완전한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출애굽을 위해 오셨을 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요한은 미리암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3: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미리암의 전철을 밟지 않고 주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친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1:1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만약 미리암이 세례요한처럼 이 사실을 잘 깨닫고 믿음으로 순종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여인으로 그 이름으로 남겨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창5장에서부터 족보를 기록합니다. (창5:4-5)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30-31)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시작하는 족보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5: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죽었더니 낳았더라”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삭의 때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의 때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 받았습니다.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140세에 아들 이삭이 결혼합니다. 175세에 죽었으니 그 후 35년 동안 한 장막에서 이삭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160세에 손자 에서와 야곱을 보았습니다.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한 장막에서 3대가 한 장막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삭 결혼 후 죽을 때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삭에게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매정한 듯합니다.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에게 축복한 사건 이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언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25:7)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렇게 볼 때, 성경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향년을 기록한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성도가 얼마를 살았다는 기록조차도 우리에게 성도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지표가 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여백조차도 구원을 향하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사역이 죽었더니 이삭의 사역을 낳았더라!”입니다. “이삭의 사역이 죽었더니 야곱의 사역을 낳았더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경의 구절뿐만 아니라 여백 안에도 우리의 구원을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득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을 이어받은 야곱은 이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현합니다. 자신의 손자를 아들로 인정하고, 자신의 아들을 형제로, 형으로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는 믿음장에서 야곱의 신앙을 다 한 줄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1:21)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성도는 항상 “미리암이 되느냐? 세례요한이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죽었더니 낳았습니다.” 모세가 죽었더니 여호수아를 낳았습니다. 교회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신부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가해집니다. (창3: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여자가 죽어야 자식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죽을 때 그리스도의 후사를 잉태하게 됩니다. 날마다, 예배 시간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므로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믿음의 후사를 낳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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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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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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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1 : 정월 대보름과 세시풍속 용어들 2
    I. 서언(序言) 오는 24일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정월 대보름 날이다. 이런 날이 되면 동심에 젖은 어린 시절, 설날과 함께 마냥 기뻐하며 뛰놀던 그날들을 추억하게 된다. 그때 그 시절, 아침에는 오곡밥과 견과류를 먹으며 복 조리개로 또래들과 집집을 방문했고, 저녁에는 달집을 태우는 동시에 불붙는 관솔가지를 휘휘 돌리며 온 논두렁에다 불을 붙이는 쥐불놀이를 했다. 지금도 우리의 고장인 마산 진동의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와 줄다리기는 매년 성대하게 열린다. 이는 필자의 경우에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동심의 추억으로 가슴에 수를 놓아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월 대보름의 유래와 풍속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지면에서는 여기에 대한 풍속들과 그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정월 대보름의 유래와 여러 풍속들 그 유래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을 많 큼 오랜 전통을 가진 대동제 행사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날에 행해지는 풍속들과 그 용어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1. 개인의 복을 비는 풍속들: 먼저는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밤, 잣, 호두 등 단단한 견과류를 먹는 ‘부름(부스름의 준말) 깨물기’, 그다음은 보름날 해뜨기 전 다른 사람에게 더위를 파는 ‘더위팔기’, 다섯 가지 이상의 곡물로 지은 오곡밥을 먹는 일, 좋은 것만 들으라는 의미에서 찬술을 마시는 ‘귀밝이 술’, 액(厄)을 날리기 위한 ‘액막이 연날리기’ 등이 있다. 2. 집단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풍속들: 먼저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洞祭), 그다음은 줄다리기, 12 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는 다리밟기, 고싸움, 쥐불놀이, 탈놀이, 별신 굿 등이 있으며, 마을의 풍물패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땅을 밟아 주어 복을 빌어주는 지신밟기 등이 모두 다 그런 전통적인 풍습들이다. 3. 달집태우기: 대보름 풍속 중 가장 큰 대미를 장식하는 행사는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달집태우기’ 일 것이다. 대보름 날의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한 해의 농사와 각종 자신의 소원을 빌고 점치는 대표적인 세시풍속이다. III.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정월대보름의 여러 풍속들과 결론 앞서 소개한 여러 풍속들 중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의해야 될 점은 이런 행위들이 거의 모두 미신적인 방법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액(厄)막이’ 행사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거나 동참할 수 없는 행위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 이다. 이는 한해의 풍년과 받을 복을 위해 악귀를 불로서 물리치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불꽃놀이로 유명한 중국인들이 빨강색을 유난히 많이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영향을 받은 우리 한국전통에서도 이런 예들이 아주 많다. 부적의 빨간 글, 동지 때의 붉은 팥죽을 끓이는 일, 담장 밑에 빨간 봉선화를 심거나, 그 즙으로 손톱에 빨간 물을 들이거나 신부의 양쪽 볼에 빨간 연지와 이마에 곤지를 찍는 이유도 출발하는 새 가정에 귀신이 붙지 말라는 시도인 ‘액막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런 행위들이 악귀를 물리치려는 조상들의 의지가 담겨있어서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적인 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전통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역이용하여 정월대보름에 오히려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행사를 많이 만들어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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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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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박봉석 목사] 고장 난 자동차와 목사
    부산에서 서울로 가기 위한 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 하나뿐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 고속도로라도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남북을 잇는 물류와 사람의 통행이 활발해졌고 그래서 경제가 발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 길은 여러 가지가 생겼고 그래서 그런 도로를 유효적절하게 잘 이용하면 최단 거리로 서울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탈 때에 흔히 이용하는 내비게이션은 바로 그 최단 거리를 안내해 주기에 우리가 목적지로 가는 데 훨씬 더 쉽고 빠른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속도로가 많고 내비게이션이 발달되어 있어도 도로에 사고가 나거나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가 거북이걸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에는 작은 경승용차이든지 벤츠 같은 최고급 차든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거북이걸음을 해야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언젠가 필자가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데, 막힐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앞의 차들이 꽉 막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필자도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를 30분 정도를 더 허비하면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계속 가다보니까 차 한 대가 비상 깜빡이를 켜고는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자동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서 고속도로이지만 설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저런 고장 난 자동차 같은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말입니다. 고장 난 차 한 대로 인해서 수많은 차들이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결국 목적지에 제 시간에 가지 못하는 것처럼, 목사 한 사람이 고장 난 차 같이 되어 버린다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은 정체되고 교회 또한 제대로 설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정말 부족한 종을 이렇게 목사로 택해서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세워 주셨는데, 이 성역을 다 마치는 그 날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영적으로 고장 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성도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교회다움을 막는 목사가 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기도는 은퇴하는 그 날까지 내 자신을 성찰하면서 날마다 해야 하는 기도여야 하겠다는 결심을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해 봅니다. 어느 책에서 본 한 목사님의 목회 경험담입니다. 이 목사님은 한 큰 기업의 사장님의 집을 그 분이 초청을 하여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담이 되고 가고 싶지 않은 집이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더 복음이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그 사장님의 집을 방문하면서 느낀 바로는 그 집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그 집의 수위였다고 합니다. 왜 목사님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처음 그 집을 방문했을 때라고 합니다. 수위 되시는 분이 “어디서 왔느냐?” “용건이 뭐냐?”하고 묻는데, 이 목사님이 젊고 그리고 자동차도 낡은 것을 타고 왔고 용모도 후줄근해서 그런지 거의 반말을 하면서 박대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집주인이 초청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인터폰으로 확인을 하였고, 그러자 집주인 되는 사장님이 직접 나와서 정중하게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집주인은 이렇게 정중하신데, 이 집에는 수위 되시는 분이 제일 높은 분 같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술회하기를,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 수위 분과 같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진짜 높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자신은 고용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높아져 있는 그런 모습,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일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마치 내가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내가 상전인 것처럼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것은 내 위에 더 높은 권세 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 아무리 높은 위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 위에는 더 높은 상전, 더 큰 상전인 하나님이 계심을 교회의 리더인 목사부터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아야 고장(?) 나지 않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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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과 공동체성
    복음은 우리 삶의 전체 실존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복음은 인간이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갖고 있는 신념들의 총체적 틀에 대하여, 인간의 감정과 태도의 전체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 행위의 전체 양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배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의식을 실천하는 것 이상이며, 설교를 듣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윤리를 따르고 실천하는 것 이상이며, 기도와 말씀 묵상 등 경건 활동에 참여하는 것 이상이며, 기독교적 교리를 수용하는 것 이상이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독교적이라는 삶의 방식에 총체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는 자신의 삶의 전체 넓이와 폭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전 존재에서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세속적인’ 활동들을 포기하고 소위 ‘종교적’인 어떤 특별한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이러한 활동의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적인 신뢰를 행사하는 하나의 수단을 모색한다. 종교의 실천성에 대한 강조는 종교를 생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어떤 종교를 갖느냐는 문제는 자신의 삶의 질과 방향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종교와 관련된 성경의 가르침이 인간 ‘마음’(heart)의 경향성 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 전체가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종교와 관련하여 성경적 세계관은 특별히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칼빈(Calvin)은 인간의 마음을 종교가 거하는 ‘좌소’(seat)라고 보면서 ‘종교의 씨앗’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데, 이 종교의 씨앗은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의식’에서 나타나며, ‘경건’(마음의 올바른 자세)(a right set of the heart)과 ‘종교’(올바른 삶의 방식)(a right way of life)를 생산해 낸다고 보았다. 성경은 종교를 ‘마음’(heart)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이 마음에서부터 생명의 모든 것이 나온다고 가르치고 있다(잠 4:23). 성경에는 800여 곳 이상에서 ‘마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마음을 인간의 인격의 핵심 또는 인간 생활의 핵심적 지도력을 의미하고 있다(잠 23:7).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고 말씀하셨다. 마음의 헌신이 우리의 종교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것은 또 다시 우리 삶의 걸음걸이를 설정한다. 종교는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표출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표출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구현해 내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릭 워렌(Rick Warren)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며, 다른 믿는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자매가 되고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가족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믿는 사람들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갖고 계시는 목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종교와 교육의 문제를 논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기본적인 전제는 공동체적으로 표출되는 종교의 본질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단순히 적응하거나 사회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자신들의 종교를 공통적으로 표출해 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신자들의 공동체, 신앙의 가족, 교회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조화의 회복은 사람들 사이의 조화의 회복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의 교제로서 이해되는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맥락이며 성취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사회로 부터 도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오히려 사회의 한 가운데서 그 공통 신앙을 행사해야 한다. 도피적인 삶은 아무런 유익도 가져오지 못한다. 세상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존재한다. 바울도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내가 행하노라고 고백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피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이 되어야 한다. 병든 세상 속에서 치유하는 향유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한 새로운 삶을 세상에 증거 하는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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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SFC폐지, 파사현정(破邪顯正)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이라는 구호는 너무도 당연하고 단순해 보이는 구호이지만 신앙의 핵심이요, 기초요, 뿌리다. SFC를 고향으로 여기는 고신의 중장노년들에게는 옆구리만 쿡 찔러도 자동적으로 복창하는 구호다. 그런데 이제는 이 구호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신앙의 정통과 계승의 위기를 논할 때 간혹 세대차를 거론하면서 달라진 신세대를 향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과연 그럴까? 신사참배반대와 공산당의 총부리의 위협 앞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우리의 선배를 잘 모르는 신세대가 신앙의 정통이 허물어지고 계승의 단절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일까?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SFC라고 하면 절대적인 거품을 무는 세대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우리 중장노년들에게는 과연 책임이 없을까? 필자도 1983년 동부산노회 진지구 SFC 위원장으로 정통 SFC 맨이다.당시에 진지구 SFC가 수백명씩 월례모임에 모이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니 지방 SFC임원들이 비결을 알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현재 필자가 목회하는 고신교회는 언젠가 부터 자연스럽게 불려지고 있는 “학생회”라는 용어를 “학신회”로 바꾸고 SFC강령과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교육관에 부착하여 고신신앙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SFC를 복원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 보지만, 신앙의 계승이 결코 쉽지 않음을 체감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SFC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시는 중장노년의 SFC맨들이여 정말 SFC를 사랑하시는가? SFC 신앙 계승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SFC를 핑계로 한 시대를 그저 풍미하고 즐기기만 하시지는 않으셨는가? 그 결과가 오늘의 SFC라고 한다면 또 “SFC폐지”한다고 손가락질 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교회가중심되지 않으면 변질되고 불신앙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오늘 고신은 과연 교회 중심이 맞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동일한 교회 안의 조직인 남전도회와 여전도회가 MOU를 맺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1남 전도회와 청년회가 MOU를 맺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는가? 작금의 고신총회는 그런 짓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 고신총회 안에 있는 조직인 KPM과 SFC가 MOU를 맺는 것이이해가 되고 상식적인가? 일반 성도들과 총대들이 잘 모르는 물밑 의도가 없다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교회중심이라는 강령을 가진 중장노년층에 있는 SFC맨들이 일삼는 오늘날의 모습이다. (마8:32)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학원SFC라는 위대한 명분을 걸고 불순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지도급에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 순수한 SFC맨들의 열정을 이런 작태로 통째로 몰살시키고 있다고직고한다면또 “SFC폐지”를 주장한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 분명하다. 학원복음화!!! 대부분의 SFC간사들은 학원복음화를 이루어 미래를 준비하자는 구호 아래 복음의 열정으로 청춘과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SFC동문들 역시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를 SFC에 두고 헌신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학원복음화라는 명분을 내세웠던 시작부터 순수하게 볼 수 없다. 학원복음화도 교회가 해야 한다. 학원복음화도 교회중심이어야 한다. 교회중심 SFC를 학원으로 분리시켜 나간 것은 불건전한 의도가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신앙적인 행태다. 소위 지방 SFC, 학원 SFC, 주류 SFC, 비주류 SFC, PK SFC, TK SFC라고 하는 말들은 학원복음화라는 가면을 쓰고, 시작부터 불건전하고 불신앙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열매들이다. 누가 SFC ‘폐지’를 외쳤던가? 필자는 “SFC를 ‘교회로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지 SFC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SFC를 본래의 자리인 교회로 반드시 복귀시켜야 한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요, 성경적인 문제다. SFC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가? KPM이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가? 국내전도위원회가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공교회’가 하는 것이성경적이다. ‘교회 중심’으로 ‘개체교회와 노회’가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정신이다. 중장노년에 계시는 SFC맨들이여 그대들이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지 않는가? SFC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대들이 SFC의 이름을 망령되이 이용하여 사욕을 취하고 있다고 직고한다면 또 “SFC 폐지”한다고 손가락질 하실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헌신이고,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10년 후면 청소년 세대 인구가 반토막 난다. 오래 전에 대구경북지역 SFC간사를 지내셨고 총회장 출신의 목사님께서 2년동안 2억을 투자했는데 2명 전도했다고 탄식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에 우리는 SFC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SFC를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탕자가 되어 도무지 방법이 없어보여도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면 가능하다. 하나님과 교회에 죄를 얻었음을 고백하고 품군의 하나가 되겠다는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이 방법 밖에는 없다. (눅15: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에게는 0.1%의 가능성도 없다. 아버지께서 달려오셔서 안고 입을 맞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교회가 두 팔을 벌리고 탕자를 안아 주는 것 외에 그 어떤 시작도 불가능하다. 중장노년의 SFC맨들이여! 대부분 SFC맨들의 순수한 열정을 돼지에게 넣어 떼로 몰살시키고 있는SFC 지도자들이여!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사리사욕에 붙잡힌 불순한 동기를 인정하고, 비본질적이며 비성경적이며 탈 교회적인 불신앙을 인정하고 더 이상 SFC를 인질로 잡고 있지 마시길 조심스럽게 부탁해 본다. 또 이런 주장을 “SFC폐지”라는 누명을 씌워 순수한 SFC 동문들에게 문자 보낼 것이고, 순수한 SFC동문들 역시 그 문자를 받고 돼지 떼에서 몰살당하는 순간까지 “SFC 폐지”한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SFC가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성경적이요, 유일한 방법이기에 “SFC폐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할지라도다시 한 번 아픈 고함을 질러본다. SFC가 교회중심으로 돌아와 옛적같은 고신신앙을 회복하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계승할 수만 있다면 “SFC 폐지”라는 소리를 천번 만번 듣는다 해도내 기꺼이 감당하리라 다짐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물이 빠지고 나니, 돌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사탄의 전략핵심은 탈교회운동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하지 않는 것의 결과는 자동적으로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행보를 걷게 된다. 이런 SFC의 현실을 보며 파사현정하는 심정으로 호소한다. 이제는 SFC가 ‘변질’의 길에서 돌아서서 진정한 개혁주의 신앙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하며 저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 함께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 독자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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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하수룡 장로] 비 나 리
    비나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노래나 옛날부터 비나리패가 놀이의 마지막 과정에서 덕담으로 기원할 때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행복을 빈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을 빌고 미래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인생을 염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들에겐 참 좋은 말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 아내의 칠순 때 우리 부부가 중국 태항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산은 험했지만 규모나 아름다운 대협곡은 과히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우리가 만선산과 왕망령을 오가는 터널 길을 지날 때 놀라운 사실을 알고 감탄했다. 오랜 옛날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을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13명의 청년들이 무려 21년 동안을 삽과 괭이로만 절벽을 뚫어 만든 길이 1250m 동굴 도로이다. 소위 ‘괘백공로’인데 그 당시에 작업에 참여한 분은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연로한 한 분만 생존하여 그때 상황을 증언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 자녀들이 바깥 큰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배워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길 바랐기 때문에 긴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험난한 길을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선배는 부족하나 후손이 훌륭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었기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만든 길이 바로 비나리길인데 큰 의미뿐만 아니라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게 짐을 지고 다니던 옛길을 군민과 도시민의 건강을 위해 증평군과 청원군 미원면을 잇는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길이 바로 소망을 올리는 증평 비나리 길이다. 도로가 생기기 전엔 솟점말, 밤티, 삼기 등 세 마을 모두 율리 마을이라고 했는데 옛날 여기 사람들 모두 고개 너머에 방앗간에 방아 찧으러 넘어 다닌 길이다. 소달구지가 오르기는 어림도 없어서 지게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림공원과 세 곳의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1008개의 계단을 만들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소원을 비는 아름다운 비나리길이 된 것이다.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시며 근심을 내려놓고 길의 끝에서 소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풍광이 된 것은 절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인생의 힘든 언덕을 오르며 기도하며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과 평안을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항상 인생의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길 소원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중국의 태항산 대협곡과 가까운 이웃인 증평에 자녀의 앞날을 위해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만들었고 소달구지도 못 다니는 길을 내가 사는 이웃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아름다운 희망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오죽하면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길의 이름도 비나리길로 명명하였으랴.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빌고 오늘도 숨을 헐떡거리며 고달픔을 꾹 참고 비나리길을 오르는 것은 미래에 자녀들과 이웃의 작은 행복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2024.02.19.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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