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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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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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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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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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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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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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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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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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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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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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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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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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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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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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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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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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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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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탄한 삶을 축복이고 험악한 삶을 불행이라 생각한다. 험악한 삶에는 강한 대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광야로 이끄시고 강한 대적들을 만나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다. 약한 상대는 이기기가 쉽다. 쉽게 이기는 싸움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한 상대를 만나 이겼을 때, 기쁨과 영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부터 일약 스타가 되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니 바로 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모든 편이를 봐 줄 테니 데리고 가라 하였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바로는 착한 자가 아니라 완악한 자로서 그의 완악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여주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삶에 완악한 바로를 만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승리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출애굽이 가능하였다. 애굽에 430년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애굽화 되어버렸다. 이런 이들이 모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을 떠나겠는가? 바로의 완악함이 애굽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긋지긋한 환경을 만들었기에 미련 없이 애굽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쁜 환경은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 병들어 고생하다가 죽는다.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도 있지만, 본인도 가족 식구에게도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우리 지역에 국회위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국회위원은 정치 거물인 한나라 당 사무총장인 이○호 씨였고 맞서는 자는 이름 없는 민노당 강○갑 씨였다. 내게 지지를 부탁할 때, 나는 당신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지도와 조직, 선거 자금 면에서 모두가 불리한데 무엇으로 어떻게 그를 이길 것인가 라고 물으니 그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이라고 한다. 나는 교만과 자만에 빠져 지역구를 잘 돌아보지 않는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유권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라고 조언하였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전국의 뉴스감이 되었다. 당선 후 그는 승리의 요인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진 선거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온다. 객관적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사울 왕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하였다. 결과는 다윗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이때부터 다윗의 명성은 이스라엘 전역과 주변국까지도 알려지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2대 왕이 된다.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만심과 교만이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방심한다. 사무엘상 17:42절에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이 약점이 다윗에게 패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으나, 자만심과 교만으로 질 수 없는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 이같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지는 이유가 바로 자만심과 교만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바울 고린도전서 10:12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충고하면서, 자신은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다(고후11:30). 약할 그때가 곧 강해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전도서 9:11절에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왕 싸운다면 약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강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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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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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 솔직히 너무 덥다. 컨테이너로 제작된 좁은 관리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여름이지만 오히려 바람이 살랑이는 밖이 더 형편이 나았다. 그래서 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여름이면 집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래, 여기 있다가는 요리가 될 것 같다. 앞으로 누가 근무하든 냉난방이 전혀 안 되는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은 사람이 상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주는커녕 필요한 업무를 위해 잠시 머무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아파트의 큰 이슈는 승강기 공사다. 제법 큰 지출이 예상되었기에 몇 곳에서 견적도 보고 온라인에서 상담도 받아 본다. 아파트 관리실은 이런 문제로 언제든 시끄러울 여지가 있다. “소장이 돈을 얼마 받았다, 부실 업체를 선정했다, 업무 처리가 미흡하다.” 여러 말 듣기가 싫어 최대한 신경 쓰며 진행하게 된다. 업체 선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관리하던 업체에서 맡게 되었다. 우리 시설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이 업체가 했으면 싶었는데 마침 견적도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입주민 대표도 오케이.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소장님, 공사 기간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사 후 건네진 봉투. 내가 고생한 것이 없는데 사례라며 봉투가 전해진다. “??” 평소보다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것이 고생이라면 고생이랄까? 하지만 봉투 받을 내용은 아니다. 웃으며 거절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조금 놀란 듯 표정을 보이셨다. 다른 아파트 소장님들도 이 정도는 다 받으니 받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봉투 전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소장님이라 하더니 이제는 목사님이라 부르며 몇 번 설득하는데, 목사라 부르니 더 받기 어려워진다. “정직한 비용으로 꼼꼼하게 작업해 주시느라 사장님이 고생하셨죠. 저는 여기 일하며 절대 따로 봉투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도 안전한 시설 되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며 몇 번이나 나를 설득하셨지만, 이거 받는 순간 내 명예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소는 짓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장님께 제안. “사장님, 저는 어차피 몇 년 후 여기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장님은 여기 소장 바뀌어도 계속 관리 이어가셔야죠. 관리실이 여름이면 찜통입니다. 그런데 에어컨 하나 사지 못하고 있어요. 차라리 사장님 이름으로 에어컨을 기증해 주시며 어떨까요? 그럼 입주민들이 사장님을 좋게 보실 것 같은데.” 순간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사장님도 나도 만족스러운 대안이었다. 즉시 일은 진행되었고 제법 넉넉한 용량의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입주민들에게 은근히 소문을 냈다. 승강기 용역회사에서 관리실에 에어컨을 기증했다고. 나의 계획대로 입주민들은 승강기 사장님을 칭찬했고 사장님은 계속 아파트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렇게 설치된 에어컨 덕에 가장 신난 건 나다. 한낮 사무실 업무가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야외 업무 후 잠시 땀을 식히기에도 그만이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지.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에 입주민이 불편해할까 신경이 쓰인다. 에어컨 바람에 열 좀 식히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온다. 관리실 방향이다. 큰일이다! 지금 사무실이 지나치게 시원하다. 나는 급하게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 전원을 껐다. 눈치 좀 보면 어떤가. 아무렴 에어컨 있는 사무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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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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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안 들어간 데가 없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인 북한에까지도 거침없이 들어간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코카콜라는 공산권이든 제3세계 국가이든 구별 없이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칼라하리의 부시맨의 손에도 코카콜라 병이 들려있었던 것을 옛날에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회사 사장의 불타는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의 판매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치고, 거기에 아예 자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코카콜라의 판매에만 전념했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때는 기자들과 만나서 자신의 기업 경영에 대하여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입니다.”그는 정말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제1의 기업 브랜드의 아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아성을 쌓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쌓은 것은 위대한 복음의 아성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의 비유대로 하면 아마 그의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복음이 흐르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코카콜라 사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코카콜라 사장은 썩어질 것에 정열을 바치고 집중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영원한 것에 헌신하고 집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복음에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을까요?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이 단어는 로마 황제와 관련된 용어였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 또는 황제가 자신이 다스리는 식민지나 도시를 방문할 때에 백성들은 그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일반 죄수들에게 특별사면을 시행했고, 또 황제가 어느 곳에 가면 신하들과 시민들은 기념 하사품이나 선물, 특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 즉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저 옛날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 바로 그것이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옛날 시대를 살았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45년 8월15일에 라디오를 통해서 침울한 일본천황의 그 항복 선언을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해방이구나. 이제는 자유이구나.”하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유앙겔리온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온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정한 유앙겔리온입니다. 사람들을 마귀가 장악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 하는 것은 유앙겔리온 즉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복음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인생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내 자신을 구원한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유앙겔리온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지식, 지혜, 재물 등을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래서 저 하늘의 상급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몸에도 사도 바울처럼 유앙겔리온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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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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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2)
- 인내 인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내 없이 무엇이든 되는 일이 없습니다. 리더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로 우리가 구원 얻는 길이 열렸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힘들다고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구원 얻는 길이 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인간관계가 좋아집니다. 인내의 리더십이 관계 리더십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사단은 빨리 빨리하며 조급하지만 예수님은 좀 더 참으라며 인내를 가르쳐주십니다. 조급함, 인내 부족이 삶을 실패로 이끌어갑니다. 사람에 대하여 기대를 적게 하고 인내로 기다려 주어야 사람을 얻게 되고 관계가 좋아집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농부의 인내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경주는 인내의 경주입니다.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생활에서 인내가 있어야 성공합니다. 모세는 40년간의 광야생활, 연단, 인내의 시간을 잘 통과하였습니다. 요셉의 13년간의 감옥생활, 인내로 잘 견디었습니다. 인내가 없으면 관계가 깨지고 리더십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위로 인간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고독합니다. 리더는 위로해 주는 자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위로해 줄 때 관계가 잘됩니다. 위로 받을 때 힘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위로의 사역입니다. 슬픈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위로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위로해 주는 마음은 관용의 마음, 따뜻한 마음입니다. 리더는 마음이 넓고 따뜻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차 계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성령님도 위로자, 보혜사가 되십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위로의 말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위로해 줄 때 관계가 잘 됩니다. 예수님은 독자를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를 따뜻한 마음과 말로 위로 해 주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면서 문제까지 해결해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도제목, 고난이 있습니다. 누구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 인간들끼리 위로는 격려입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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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의 덕목에 대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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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길
- 여행하거나 산행을 해보면 걷는 길 위에서 어쩐지 행복함을 더 크게 느낄 때가 많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현재의 흥미로운 상황이 우릴 기쁨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중국 여행지의 마을을 돌아보며 체험했을 때 넘 재미있고 신기해서 그만 길을 잃어버려 혼이 난 적이 있다. 물론 골목길의 미로 때문에 힘이 든 것이 사실이지만 만일 변화가 심한 사막 가운데서 길을 잃으면 엄청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생길은 평범한 길이라 할지라도 나그네를 인도할 안내자가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히말라야의 산행 길은 엄청 힘든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산 정상의 산장에 물건을 날라주고 수고비로 살아가는 두 모자의 삶에서 인생길은 정말 험난함을 보여 준다. 엄마의 쇠약으로 13살 어린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엄마와 같이 짐꾼의 역할을 담당하는 모습은 정말 짠하다. 엄마의 아픈 다리의 통증으로 짐을 지고 잘 걸어 올라가지 못하니까 아들은 어린 마음에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과 분노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불평하는 것을 보고 인생이 힘들고 고르지 못한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행 길에서 모자는 어려운 상황으로 속상함과 분노로 관계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인생의 행복과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오직 살기 위해 안내자도 없이 괴로움을 참고 무조건 산 정상만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야만 하는 모자의 인생길이 정말 험난하고 측은하다. 요즘 우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피로에 쌓인 일과를 떠나 여행 길에 올라 생활 충전을 위해 노력하지만 기대한 만큼 위로를 받지 못한다. 낙안읍성같이 성곽 길을 걸으며 옛날과 현대를 느껴보기도 하고 섬진강의 물줄기를 따라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옛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강을 따라 마음을 내려놓고 몸이 가는 대로 천천히 걷는다. 가로등 길을 지나 호젓한 박물관을 만나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이나 풍류를 맛보기도 한다. 편백이 있는 나무 톱밥 길은 늘 걷는 딱딱한 인위적인 길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걷는 것 그 자체가 기분을 좋게 하여 즐거움에 빠진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길은 아무리 아름답고 훌륭해도 걸을 때는 좋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힘들고 괴로워지면서 전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길이라고 하셨다. 원어를 보면 예수님 자신이 ‘I am the way.’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다. 분명히 'The way'라고 하셨지 the road, the street라고 하지 않으셨다. way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길’ 이외 ‘방법’이란 말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해주시고 평안한 행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 틀림이 없다. 그래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아버지의 집에 가려면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어떤 좋은 길도 우리 인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그네의 힘든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능하신 우리의 안내자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그 길만이 인생을 만족시킬 우리가 안내받아야 할 최고의 길임을 기억하고 그분 의지하여 전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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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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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함께 했습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65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남편과 함께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자신에게는 가능성이 없어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게 됩니다. 그런 세월이 흘러 90세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는 약속 하나를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남편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 자신이 9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 여정에 씨를 보존하기 위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을 했던 사건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창12: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똑같은 사건은 훗날 한 번 더 발생합니다. (창20: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씨가 소멸될 위기를 만났습니다. 남편에게 첩까지 넣어준 사라입니다. 과연 이 결정에는 누가 주도적이었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이 목숨 부지를 위해 아내를 포기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남편의 사명을 위해 오히려 사라가 주저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요했을까요?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런 세월을 보내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라에게 하나 남은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손자를 보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손자는커녕 며느리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미칠 노릇입니다. 결국 사라는 아들이 이삭이 장가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127세에 눈을 감습니다. 사라가 죽은 3년 후 이삭은 결혼을 합니다. 사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극명하게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이란 사라의 일생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성도들에게 사라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과 신앙의 길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까요? 성경은 철저히 공로 사상을 배격합니다. 기복신앙이 무서운 것은 그 속에 공로 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죄가 됩니다. 공로 사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신의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라 정도 되면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여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얼핏 볼 때 백이십칠 세라는 표현이 사라에게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사라의 믿음과 신앙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완성하시고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말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넣어주는 것은 여자로서는 말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충성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충성하는 자가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보다도 순종하는 사람이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 역시 사라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여인을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공로 사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문턱에서 백이십칠 세에 불러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믿음의 영웅들이 열거되는 믿음장에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히11: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혹시 예수 믿어 억울하십니까? 죽도록 믿음의 길과 신앙의 삶을 살았는데 그 결과가 “이건 아니지”라고 여겨지십니까? 우리 성도가 가야 할 길은 백이십칠 세, 거기까지일지도 모릅니다. 백이십칠 세를 살도록 하시는 것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로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의 백이십칠 세는 아들 이삭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세월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최고의 은혜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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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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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고유한 요소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윤리의 뿌리를 두게 만든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가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이러한 자신의 성품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기대하신다. 대부분의 이교도 세계에서 윤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의 일부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강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찾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주피터(그리스의 Zeus)는 정기적으로 인간 여성을 임신시켜서 그의 아내 주노(그리스의 Hera)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질투하고 복수하도록 자극한다. 미네르바(그리스의 Athena)는 경쟁에서 여신을 능가한 후 인간 여성 아라크네(Arachne)를 거미로 만든다. 플루토(그리스의 Hades)는 프로세르피나(그리스의 Persephone)를 납치하고 그녀를 강제로 아내로 삼아 세상에 겨울을 가져온다. 이교의 신들은 이처럼 대부분 비윤리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의를 중히 여기시므로 자신이 정하신 기준을 인간들이 이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이시며,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사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열방의 주인이시지만 이스라엘과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법(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고,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자신과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와 정부의 제만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율법의 대부분은 또한 허물과 죄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식의 순결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을 열방의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구별된 민족으로 삼기 위한 의식, 율례, 심지어는 식습관과 위생 관행에도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표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엄청난 책임도 수반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매우 높은 기준을 갖고 계셨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국가 역사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높은 거룩함의 기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이야기이며, 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 당시에도 이방 나라에서 나그네처럼 살던 유대인들은 세상과 그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그들의 이교도 이웃들이 보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유대인의 생활 방식, 신념 및 종교적 관습은 두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로마 정부와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적대적인 이웃 국가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로마의 영토 확장을 지원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들 유대인들에게 황제 숭배와 같은 로마의 종교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다. 그래서 일신교적 신념을 위반하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받았다. 둘째,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과 혼합되지 않는 방법을 수년 동안 배웠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방인들과의 혼합으로 인해 거짓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역사적 교훈을 배웠다. 유대인들은 또한 이방인들과 너무 밀접하게 교제함으로써 종교적 의식에 있어서도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당시 로마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비교적 잘 지켰다. 그들은 당시 이방인들과 사업을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과 많이 사귀거나 통혼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지켜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율법의 수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변 이방 사람들보다는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다른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만이 온 땅을 다스리는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심을 믿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현상 유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로마는 이들 유대인들의 관행을 허용하고, 적어도 종교적인 관습에 관한한 이들을 내버려 두었다. 이들은 사실상 로마 제국이 기꺼이 용인하는 또 다른 이상한 종교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영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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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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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 한 TV방송 프로그램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부부를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시고 퀴즈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카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차례가 되어서 카드에 적힌 단어를 열심히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날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할머니가 알아맞혀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방송 프로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머니가 동문서답(東問西答)만 하시고 알아맞히지를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셔서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혀?”라고 힌트를 드렸더니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말해봐!”라고 다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평생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방청객들과 전국의 시청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안타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같이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으니까 대단한 것이고, 부부이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원수같이 여기고 살았으니까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부부사이보다 우리가 더욱더 신뢰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신뢰하는 자를 견고케 하십니다.(대하20:20-23) 둘째는, 신뢰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렘39:15-19) 셋째는, 신뢰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사30:15-17)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시므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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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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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 I. 서언(序言) ‘이런 세계화 시대에 과연 높임말이 필요한가?’‘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이 없어야 진정한 상호간의 소통이 된다.‘높임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지 그게 뭐냐?’는 등의 높임말에 대한 많은 찬반양론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지면을 통하여 높임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 오는 토요일에는 저희 선친의 생신이어서 고향에 가야하기 때문에 오는 주일날은 고향교회에 참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이 집사님의 말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선친이란 표현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先親)이란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고 생존 시에는 가친(家親)이라고 해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집사님의 선친께서”라는 경우도 있는데 이도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이라는 말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존 시에는 자친(慈親), 돌아가신 때는 현비(顯妣)라고 지칭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은 생소한 말이기도 하고 강요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도 이런 용어는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본인은 알아도 다른 사람이 모르면 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굳이 선친, 가친 또는 자친, 현비 등의 어려운 말들을 하기 보다는 저희 아버지, 저희 어머니 등의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용어로 호칭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호칭을 조금 더 논한다면, 어릴 때는 아버지의 애칭어인 ‘아빠’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아빠라고 하거나 어머니에게도 어릴 때는 엄마라고 할 수 있지만 장성해서는 어머니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혼 후에는 어떨까? 미혼 일 때는 어머니라고 하다가 결혼 후에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당황하는 경우들도 본다. 예를 들어 결혼한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저녁 먹자,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했다. 이에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대화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친근감이 들 수도 있고,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없는 때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결혼 초기여서 시댁과의 관계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언어 예절을 갖춘 시어머니는 어머님으로, 시아버지는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흔히들 이런 경우는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야 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며느리에게는 ‘아가’, ‘새아가’, ‘철수 어미(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철수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말한다. 또한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이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친척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느리’, ‘며늘애’, ‘철수 어미’,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친척 중 윗사람에게는 ‘며늘애’가 가능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며느리’로 부르는 것이 좋다. 또 하나는 며느리의 친부모인 사돈에게는 며느리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아이가 없을 때는‘며늘애’로 하고, 아이가 있을 때는 ‘철수 어미’로 지칭하는 것인 옳은 표현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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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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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
- 얼마 전 목회자 모임이 있어 창원 명서동에 있는 어느 곰탕집을 찾게 되었다. 식당 벽에 큰 문구가 적혀있는데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는 국물의 맛을 내기 위하여 일체 프리마나 기타 첨가물을 쓰지 않으며, 첨가물을 발견하시는 손님께는 1억을 배상하겠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고 손님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증거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궤변에 이런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었고, 소에게는 뿔을 주었고, 문어에게는 먹물을 주었고,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교를 주었다”고 하였다. 궤변이지만 의미 있는 말이기에 생각해 보는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에 위선으로 사는 진실 실종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돈의 세계로 빠져 갈 것이다.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으며,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 앞에 속일 수가 없다. 영어 단어의 진실을 설명하는 단어 “sin care”는 라틴어 시네 세라(sine cera)에서 왔다. 이 말은 “밀초를 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sun tested”,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긴 단어이다. 진실한 도공은 도자기에 금이 가면 깨어버린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도공은 금이 간 도자기에 밀을 칠하여 감춘다. 그것을 실험하기 위하여 햇빛에 비추면 흠집이 보이거나 밀촛물이 녹아 흘러내림으로 거짓은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라틴어 진실 “시네 세라(sine cera)”이다. “절반은 진실이다”라는 말은 전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거짓을 섞어 탄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은 아무리 모여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잠시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거짓을 놓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이 선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옛날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신기루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겨를이 없이 단지 눈앞에 보이는 신기루만을 좇다가 점차 진짜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멀어져 결국 물도 없는 사막에서 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악마를 쓸어내는 빗자루이다.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심비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평생 마귀의 종으로 거짓과 함께 살기보다는 진리의 영이신 주님의 교훈대로 산다면 마음의 평안과 복된 삶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마귀에게서 난 자는 그의 아비의 욕망을 따라 행하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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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