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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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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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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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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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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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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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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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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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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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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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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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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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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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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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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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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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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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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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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 요즘 신학교 입학은 재수는 필수이고 보통 삼수를 하는 것이 상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양질의 우수한 목사를 양육하여 배출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 마치고 목사가 된 후의 모습의 차이로 많은 성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여 분쟁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때만 하더라도 목회자의 사례가 형편없었다. 가정을 가진 목회자는 자녀교육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충분히 되고 남았다. 그 당시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처럼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고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잘 양육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존경을 받는 분이지만 작금에는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회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청년들이 꼽는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청년 사역자들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여’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 이었다. 최근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눈물로 부흥시켰지만 결국 자만하여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주역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분노케 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회보다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회를 진행했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잃고 성도는 실망과 혼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지 못한 목사를 소수의 추종자들이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성도를 험담하고 욕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목사가 진정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희망이 없다할지라도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분열이 있을 수 없고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선다고 확실히 믿는다. 의지할 곳이 없는 혼돈한 지금은 수백만 성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전 국민의 귀감이 될 존경 받을 만한 진정한 목회자 한 사람이 절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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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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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0원으로 시작된 삶
- 오늘도 츄리닝 차림에 칫솔 들고 동생과 목욕을 다녀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오던 삶의 패턴이다. 늘 가벼운 걸음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고등학교 첫 수능모의고사 결과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까지 버티던 성적이 기어이 무너지고 말았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에서 20등을 오갔었는데, 고등학생이 되어 받아든 첫 성적표는 반에서 10등이라는 숫자가 박혀 있었다. 늘 벼락치기로 성적을 유지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무 큰 폭으로 떨어져서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며 큰 꿈을 품고 부모님을 떠나 대전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거나, 경찰대학을 가서 간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나도 부모님의 소원대로 이제는 화이트칼라로 양복 입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노동자이신 아버지의 삶을 보았기에 부모님도 나도 더 간절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두 날개를 가지고 성공할 것이라 믿고 달려왔다. 첫째는 공부 잘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것. 둘째는 도덕성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것. 착실하게 공부해서 내 삶을 멋지게 만들어내고 싶었다. 양복입고 출근하며 예쁜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의 배웅을 받는 것? 아, 집은 밝은 톤의 아파트이면 좋겠다. 하지만 내 나이 열일곱에 벌써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추락하는 것 같다. “다 끝났어.” 시험 한 번에 이런 바닥을 경험 할 수 있구나. 고1, 4월의 어느 일요일은 그렇게 우울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 날이 내 인생을 뒤집는 또 다른 하루가 될 것 역시 예상 못했다. 평소보다 말없이 목욕탕에서 돌아오던 길, 동생은 이유도 모른 채 형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 거의 도착할 즈음 집 앞의 작은 교회에 눈이 머문다. 늘 걷던 길인데...... “이곳에 교회가 있었던가?” 갑자기 어린 시절 잠시 다녔던 교회가 떠올랐다. 교회 가자며 빵으로 나를 유혹했던 농협 아저씨. 종이 괘도에 그려진 악보를 따라 즐겁게 부르던 노래. 늘 좋은 향기를 내셨던 선생님. 내게 교회는 좋은 곳이었다. 성탄 연극 연습하며 마구간 동물 역할이 주어져 섭섭함에 교회를 끊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교회로 생각이 많아졌다. “교회 다녀볼까?” 결정은 아니지만 끌림이 있었다. 동생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금 생각해보면 왜 동생을 돌려보냈을까 싶다.) 나는 나무 냄새 짙은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30여명 모여 예배하는 중이다. 가장 뒷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마치 나 어릴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즐거움으로 관객이 되었다. 그리고 헌금시간, 봉사를 맡은 아이가 바구니를 들고 이리저리 친구 사이를 오가며 성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녀석이 가장 뒤에 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인 나에게까지 왔다. 바구니를 내 앞에 들이민다.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예배 동참했으니 헌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전해온다. 나는 초코렛을 많이 좋아했다. 큰 사각형 초콜렛이 당시 500원이어서 늘 주머니에 500원짜리 동전하나 정도는 넣고 다녔다. 마침 내 추리닝 주머니에 500원이 있었다. 고민했다. 짧은 시간, 고민은 길었다. 그리고 아이의 착한 눈을 피하지 못하고 500원을 헌금바구니에 넣고야 만다. 그제야 평안한 얼굴로 아이는 강단으로 돌아갔다. “그래, 교회 다녀보자!” 그렇게 신앙을 가슴 한 귀퉁이에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신앙이 나를 이끌어주며 꺾이지 않는 날개가 되었음은 부인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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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0원으로 시작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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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중언부언
- 신약에서의 기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2)라고 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길쌈도 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기르고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보다 못했다”고 하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시면서 “나는 너희의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채운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하란다. 주기도문을 말씀하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8-9)라고 가르치심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이방인의 기도와 완전히 다른 것이 우리의 기도다. 기도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셨다. 우리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 주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을 알고 하는 기도다. 비인격적인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이루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비인격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는 한두 번에 족하다. 그리고 믿고 기다리면 된다. 인격적인 기도는 반복해도 좋다. 단순한 표현이고 반복할 수밖에 없는 표현이지만 반복할 때 더 친밀해진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으로 가득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의 능력이 저에게 넘쳐 남을 감사합니다.” 등의 약속을 묵상하며 고백하는 것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하셨다. 받은 줄로 믿고 하는 기도는 구약에 기도의 가르침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약속을 품고 있는 것이 기도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영원토록 함께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 저는 임마누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감사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고 하나님께 올려 드려라. 그리고 자신에게도 말해 줘라. “성한아, 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아들이야. 너는 어디를 가든지 두려울 것 없어. 오늘도 승리의 날이야.”라고 말하고 기도하며 감격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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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중언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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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방법보다 방향
-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마차를 만났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태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태워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마부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얼마나 먼가요?” 마부가 대답했습니다. “한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 나그네는 잠을 깨었습니다. 그리고 마부에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에 다 왔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입니다.” 그 말에 나그네는 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까 30분 거리라고 했고 그새 30분이 지났잖아요?” 그 말을 듣고 마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마차입니다!” 이 탈무드의 이야기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방향이 맞으면 설령 늦어도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속도를 높인다 하더라도 결코 목적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모자를 측은히 여겨서 아들을 고치기 위한 성금을 모았습니다. 마을의 의사도 이 소문을 듣고 감동을 받아 아들을 무료로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수술 날이 잡혔고 수술은 다행히 대성공이었습니다. 아이 엄마는 의사에게 정성껏 감사하는 인사를 하고 그때부터 아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들은 마침내 다른 아이들처럼 걷기도 하고 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마을을 떠나 도시의 병원으로 전근을 갔던 의사는 우연히 그 아이 엄마를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 의사는 자신이 고쳐준 그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부인 그 때 그 아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지요?” 엄마는 머뭇머뭇하면서 얼른 대답을 못하다가 마지못해 말했습니다. “지금 내 아들은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인자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놀라고 실망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의사를 향하여 이 엄마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때 저는 그 아들에게 걷는 법만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는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걷는 방법을 익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곳은 걷는 방향입니다. 그것은 인생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길을 화려하고 세련되게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 걷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떵떵거리며 산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비록 화려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삶의 목적이 바르다면 그 인생은 성공작입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얼마나 화려하게 살았느냐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얼마나 그 목적을 따라 살아왔느냐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바른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거룩한 사람은 삶 또한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닌 방향입니다. 신발을 신을 때마다 일부러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디고 가고 있는가?”를 늘 물으십시오. “아 나는 지금 믿음의 길 가고 있고 생명의 길을 가고 있고 천국의 길 가고 있지.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네.” 늘 그 확신으로 살 수 있다면 최고의 인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인생은 화려한 인생이 아닌 목적이 바른 거룩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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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방법보다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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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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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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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4
- I. 서언(序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 중에는 오늘 논하고자 하는 큰 대(大)자도 그 중의 하나이다. 국어사전에 보면 대(大)자를 쓰는 단어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대산, 대가족, 대궐, 대감, 대청, 대교, 대 심방, 사대문 등등 대자를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경우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규모가 크지 않는 것도 크게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큰 大를 사용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 이유가 있다면,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 같은 대국에 비해 소국의 서러움을 안고 살아왔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 뿐 아니라 미국 같은 대국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뼈에 사무치도록 아주 큰 민족이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은 우리나라의 언어문화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그 많은 용어들 중에서 특히 큰 대자를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해 온 것도 그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II. 교회용어에서의 큰 대(大)자의 남용 1.대예배(大禮拜): 보통 주일 오전 예배를 두고 말할 때 대예배라고 칭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예배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고,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인식과 용어 사용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와 소 예배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학적인 면으로 볼 때 예배는 항상 무한한 크신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이기 때문에, 차별적 뜻을 가진 대소(大小)나 다소(多少)의 뜻을 가진 말은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2.주일 낮 예배 : 필자의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낮과 저녁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주일 낮 예배, 주일 저녁 예배라는 말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오후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관계로 인하여 대예배나 주일 낮 예배라는 말 보다는 주일 오전예배, 주일 오후예배, 주일 저녁예배 등으로 명칭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모두 함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공동예배”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어법상으로 맞는 명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3.대예배실과 소 예배실 : 예배실이 여럿 있는 교회당에서는 예배실을 구분하기 위해서 대, 중, 소로 나뉘어서 명칭을 붙인다. 이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의 대, 중, 소는‘예배’란 말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場所)인 ‘실(室)’을 수식하기 때문에 장소의 대 소에 따라 대 예배실, 중예배실, 소 예배실로 나누는 것도 무방하다. 하지만, 예배실이 하나 밖에 없는 경우는 대 예배실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잘못 된 경우이다. 4.대 심방: 흔히 전 교인 가정을 심방할 때“대 심방”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법상으로 다소의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심방이란 명사 앞에 접두어 大자는, 대상의 다수적 범위와 사물의 수량적 전체규모를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이런 논리로 보면 작은 규모의 심방은“소 심방”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심방은 대소로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볼 때 대심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래서 “전체심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고, 만약 이것이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심방이라면 “정기심방”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의 각종 예배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내용은 일부 예배학자들의 견해이고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의 소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합한 바른 용어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도 다 같이 연구하는 자세로 올바른 교회 언어문화를 창출 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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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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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낙심은 금물 (눅18:1-8)
-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이 되면서부터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술 소비량에 전 세계에서 1위, 자동차 사고율이 전 세계에서 1위, 암 사망률이 전 세계에서 1위, 여성 흡연율 세계 1위, 임신 낙태율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살률이 전 세계에서 1위입니다. 인구 10만 명 당 약 25명이 자살을 하고, 하루 평균 46명씩 자살을 하는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살을 부추기거나 자살할 사람을 찾는 인터넷사이트가 단속에도 불구하고 172개나 버젓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자살 신드롬”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고 “자살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TV에서 웬만한 자살 뉴스가 나와도 무관심할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방예의지국으로 생명을 존중하던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어버렸는지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다고 생각을 하면 낙심을 하고 비관을 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목숨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그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끊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살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동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이 바로 “낙심”(落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낙심하고 절망하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이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첫째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눅18:1) 둘째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면 안 됩니다.(갈6:9) 셋째는, 신앙생활로 인하여 환난 당할 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엡3:15) 어려운 시대에 믿음을 잘 지키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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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낙심은 금물 (눅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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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 목사와 성도의 관계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목사와 성도는 서로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고 좋은 관계 맺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 없이는 방황하게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갈 때 양은 안전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올바른 믿음의 길로 성도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를 가르치고, 인도하고, 보호할 때 성도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성도는 목사의 말씀에 순종하면 행복해지며, 목사와 관계가 좋아집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아지면 삶이 행복하고 교회 생활이 즐겁습니다. 관계가 좋으면 말씀을 잘 듣게 됨으로 믿음이 성장하게 됩니다. 관계가 깨어져 말씀을 듣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넘어지게 되며, 믿음이 식어지게 됩니다. 목사와의 관계가 깨지면 교회를 떠나게 되고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좋으면 신앙생활, 가정 교회생활이 행복합니다. 사탄 마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목사와 성도 사이를 이간시켜 관계를 깨트립니다. 지혜자는 목사와 성도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관계가 깨어졌다면 기도하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양인 성도는 양으로 족해야 하며 목자인 목사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행복한 관계가 됩니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고 말씀을 잘 준비 하여 영의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성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기도해주고, 포용해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목사를 귀히 여기고, 섬기고, 순종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좋은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목사의 협력자가 되어야 하고, 목사의 허물을 덮어주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교회와의 관계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파송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 할 때 기도하고 신중하게 파송해야 합니다. 선교의 소명이 분명하고 신뢰가 되는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파송했으면 재정적 후원을 잘 해 주고 기도도 많이 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해준 교회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도 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진실해야 합니다.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도움 받기 힘들고 심지어 선교사 중단, 후원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선교사는 파송교회, 담임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재정 관리를 투명하게 하여 실수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파송교회가 선교사들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선교사역을 잘 하도록 기도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파송 받은 선교사는 파송해 준 교회와 담임목사, 선교부 몰래 파송교회 성도들과 은밀히 개인 접촉을 하여 금품을 요구하거나 재정 관계에 엮이지 않아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에게 무엇인가 무리하게 요구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중에 파송교회가 알게 되면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채워 주심을 믿고 믿음으로 지혜 있게 선교해야 합니다. 파송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성도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사는 인간관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와 파송 교회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언제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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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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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받은 은혜 감사하며 삽시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이러하다. 영국 국왕의 박해로 청교도들은 7년을 준비해서 180톤 되는 범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65일간 추위와 영양실조와 질병과 싸워 이겨 미국 동부지역까지 도착했고, 이에 살아남은 자는 78명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가을 첫 소산을 얻고 플리머스(Plymouth)에서 3일간 감사제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하여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공포했으며,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감사절로 개정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이 한국에서 시작되기는 1904년 조선 장로교 공의회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가 1945년 광복절 이후로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성경에서 모세는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고 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최선을 다해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16장 강론이다. 마가복음의 총 주제는 섬김이다. 핵심성구는 10:45절로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살다가 섬기는 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주님의 최후부탁은 우리의 최초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밀알교회가 감당할 최대의 사명인줄로 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1-8)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군대 귀신들렸던 여인이었고(눅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주님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살로매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이모였다(요19:25).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현장까지 따라간 자들은 힘 있고 당당한 남자들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우리말에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강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안다. 옛날도 그러했거니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성들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하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일에 여성들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실로 장한 여성들이다. 여인들은 해가 돋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2). 이번 안식일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하루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요 가장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다. 사실 이날은 온 인류가 긴장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검증 받는 최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면 구약의 예언대로 그는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날이지만 만약 그의 부활이 공수표로 돌아가면 예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15:14-15). 이제 그토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2)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여인들에게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문제는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여인들의 생각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은 하셨으나 너무도 큰 돌이 막고 있으니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 역시 가기는 가지만 그 돌을 옮길 힘이 없다. 이 돌을 옮길만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며, 돌 위에는 빌라도가 인(印)을 쳐서 봉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무덤에 도착한 순간 이런 근심은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참된 부활신앙은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의심의 큰 돌들을 굴러 버린다. 불신앙과 염려와 근심 걱정의 돌을 굴러버려야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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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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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도 이어령’ 소천 그 후
- 시대의 지성, 우리 모두의 스승 이어령 박사께서 지난 2월 26일 89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 故(고) 이 박사님은 15년 전 딸이었던 故 이민아 목사로부터 전도 받아 회심하고,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간증과 강연으로 우리들에게 복음의 변증적 희망의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가셨다. 우리나라 학계 예술 문화계에 대표 지성인으로 수많은 저서와 명강연등으로 온 국민 정서에 이어령의 어록은 수없이 남겨졌다. 우리 기독교계는 늦게 73세 때 주님을 만나 특유한 말씀의 깊고 넓은 사유에서 건져낸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대표작에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등 그동안 늦은 자가 먼저 되듯 짧은 기간에 많은 복음 저서까지 남겼다. 필자는 마지막 유작으로 엮어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듣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어령의 영성은 어디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냈을까. 박사님은 평소 깊은 지성의 사고에서 나라의 비전, 사회의 품격 그리고 개개인의 삶 속에 파고드는 희망의 두레박질이 여느 석학들보다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일제와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암울했던 국민 정서에 던지는 메시지마다 희망이었다. 일본에 항상 열등감에 젖어 있던 우리들은 ‘축소지향의 일본’이란 베스트셀러의 박사님의 저서를 읽고 오늘날 일본을 넘는데 우리 모두의 키워드가 된 것 부인 못할 일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국민적 긍정의 희망을 한껏 불어넣었다. 지난 88년 올림픽 때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고 올림픽경기 개회식 오픈 행사에 박사님이 한국 소년의 굴렁쇠 굴리기를 기획함으로써 영상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세계 속의 한국 정서를 세계화하는데 소리 없는 큰 울림이 되었다. 어느 누군가 이어령을 평가한 적이 있다. 단군 이후 최고의 천재라고. 천재라고 다할 수 있겠는가. 박사님이 '마지막 수업'에서 강조한 메시지를 기억해 본다.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성의 열매는 선악과를 먹은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는 한계의 열매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과 함께 끝없이 찾는 지성과 그리고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것은 결국 하늘 아래 머물 수밖에 없는 바벨탑의 그곳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는 믿음의 영성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을 넘을 수 있는 구원과 축복을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지성도 과학도 영성을 만나야 진정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지성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있을지언정 결코 그것이 복음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임을 변증했다. 4차 산업시대 AI의 공간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복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대의 질문과 흐름을 단연코 설명해냈다.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주창했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이치에 따라 믿음의 공동체만이 살 수 있는 시대 즉 교회가 AI를 넘을 수 있음을 설명했다. 성경과 과학기술과의 거대한 담론에서 서로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존중할 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생명이라는 위대한 복음이 온누리를 덮어 나갈 것임을 설파했다. 이 높고 깊은 말씀의 사유,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박사님의 소천에 밀려오는 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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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도 이어령’ 소천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