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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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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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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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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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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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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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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시기심을 축복의 마음으로
    영국에 설교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설교로 인해 나타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가 한참 뜨거운 부흥을 맛보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아주 뛰어나고 유명한 세 분의 목사님이 동시에 런던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우리가 잘 아는 설교의 황태자로 불림 받았던 ‘찰스 스펄전’이고, 또 한 분은 ‘캠벨 몰간’이라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FB마이어’목사님이셨습니다. 이 세분이 당대의 3대 설교가로 평가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스펄전과 캠벨 몰간 목사님의 교회는 나날이 부흥을 하는데 FB마이어 목사님의 교회는 부흥이 되지 않았습니다. 수적으로도 불어나지도 않았고 교인들의 삶도 변화가 거의 없음을 목사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이어 목사님은 그 원인이 뭔가, 내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두 목사님을 향한 영적 시기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깊이 회개하며 그 시기심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이란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좀처럼 자신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두 목사님들의 교회의 부흥의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그 시기심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을 얻어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두 분 목사님에게 더욱 큰 영력을 주소서. 더욱 더 말씀을 잘 증거하고 그래서 그 교회가 더 크게 부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시기심을 오히려 축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제야 비로소 FB마이어 목사님은 심령에 강물같이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며 시기심이 사라지는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러한 신앙의 위인들의 삶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미워지고 시기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미움과 시기심은 사실 결심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각오를 다진다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서 오히려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내 심령에 평화를 주시고 자연히 그 미움과 시기심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모두는 각자의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나 혼자의 힘으로 온전히 세워갈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또한 나 혼자 그것을 해내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각 지체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의 다양한 은사를 주셔서 그것들이 함께 합하여지고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교회를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 한다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잘 할 수 있어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성경이 금하는 시기심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16절에서는 그 시기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교회 안에서도 때로 세상에서처럼 혼란과 갈등이 있는 것은 대부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기심,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높아지고자 하는 다툼으로 인한 것임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시기심과 다툼의 마음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궤계에 속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가 잘 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축복하는 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주님 닮은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 모두에게 시기심은 사라지고 축복의 마음과 언어가 샘솟듯 넘쳐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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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정연철 목사의 행복콘서트>비전의 사람(8)
    꿈을 가진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2) <계속> 3년간 신학교에서 공부 할 때 다른 사람들은 함게 여러 곳을 다니기도 했지만 저는 제일 뒤에 앉았다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회로 돌아오느라 바빴습니다. 동기 목사님들이 요즘은 나에게 “정 목사, 그때 알아봤어. 그때 그렇게 기도하더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게 당연하지.”라고 합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정당한 열매가 따라온다는 원리를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상을 꿈꿔도 현실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 역시 필요합니다. 주의 일을 할 때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심방도 기쁨으로 하고, 봉사도 기쁨으로 하고, 찬송을 기쁜 마음으로 부르면 그것이 복이 되지만 불평하면서 하는 사람들은 죽도록 일해도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불평하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쏟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왕 할 것이면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즐거워야 어떤 일도 힘들지 않고 피곤한 줄도 모르는 법입니다. 교회 일도 반드시 기쁨으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가대도 준비하는 것만큼 주일예배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영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성가대 때문에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멋있는 성가대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운전하는 것도 기쁨으로 하고, 교회를 관리하는 분도 기쁨으로 하고, 부엌에서 일하는 것도 기쁨으로 하면 자신이 복을 받습니다. 경산 진양에 어느 교회가 있습니다. 한 15년 전에 그곳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어느 여 집사님을 소개해 주셨는데 “이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십일조를 한 달에 80만원합니다.”라고 그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흥회를 할 때마다 강사의 수발은 그분이 다 맡아서 하신다고 합니다. 속옷, 양말, 와이셔츠를 두 벌씩 사 가지고 와서 세탁기에 넣고 새로 빤 후 다리미로 다려서 강사의 숙소에 가져다 놓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분이 어떻게 복을 받게 되었는지 들려주셨습니다.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그때는 화장실이 재래식 화장실이었답니다. 그런데 토요일만 되면 화장실이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더랍니다. 알고보니 한 12시쯤 되니 그 여집사님이 물을 지고 와서 청소를 하시더랍니다. 찬송을 불러가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교회를 기쁨으로 섬기니까 하나님이 그분에게 그렇게 복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기쁘게 해야 하고 그래야 힘이 들지 않는다는 원리를 배웠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분명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 하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시간을 쪼개야 하고 하나님께 시간의 십일조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에프 케네디는 1961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먼 훗날 역사의 심판대 앞에서 당신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신은 용감했습니까? 당신은 성실했습니까? 당신은 헌신했습니까?” 이 연설문을 기억하며 저는 과연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해야겠다는 다짐을 항상 되새기곤 합니다. 카네기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할 때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상했던 인물과 너무나 동떨어진 뜻밖의 인물을 후계자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후계자는 바로 ‘쉬브’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쉬브는 그 회사에 입사할 때 실력이 모자라서 정식 직원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청소를 하는 급사로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청소부로 들어와서 아침에는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는 모든 사람이 다 퇴근 한 후에 퇴근을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히 헌신적으로 충성했습니다. 카네기가 일 년간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된 사람이다 생각되어 정식으로 자기의 비서로 채용했습니다. 비서로 채용된 그는 어디에 갈 때마다 손에 메모지와 연필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할 때마다 일일이 메모해서 회장에게 적어주었습니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카네기 회장이 여러 가지 회사 경영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그때까지 그 비서가 퇴근하지 않고 앉아 있더랍니다. 그래서 카네기가 쉬브에게 왜 아직도 가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카네기의 퇴근을 기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후계자를 세울 때 실력이 부족해서 정식 직원으로 입사하지 못했던 이 사람을 후계자로 세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과 성공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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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0-01-22
  • [이정희 목사] 현재 기독교인들로서의 언어적 현실
    1. 서언(序言) 우리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문화는 타 종교 문화권이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종교를 역사적으로 본다면, 샤머니즘은 그 유래를 측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단군신화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4,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불교의 전래도 A.D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으로 본다면, 1,600년이 넘었다. 도교는 A.D 624년(고구려 영류왕 7년)에 전래되었고, 유교의 역사도 종교적 색체 보다는 윤리 적이며 학문적인 면이 강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에 영향을 준 것은 모두 천년의 역사를 이미 넘었다. 이에 비해서 기독교의 역사는 비교할 수 없을 많 큼 짧다. 폭을 넓혀 천주교의 전래까지 합친다 할지라도 230여년, 개신교의 역사는 13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의 종교 문화권은 우리 기독교로 볼 때는 엄청난 타 종교 문화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언어적 현실을 논하고자 한다.2. 기독교인들로서의 언어적 현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세와 그 영향력으로 본다면, 이미 타 종교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종교인구 비율로 본다면, 우리 개신교가 19.7%로 1위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문화, 특히 전통적인 풍속이나 언어문화에 있어서는 그 타종교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무엇이 타 종교권 문화와 언어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이런 현실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논고에서는 지난호 서론에서 밝힌 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하여 우리의 것을 지키는 동시에 우리 용어를 개발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총괄적으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논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불교식 용어들을 살펴보자. 예를 든다면, ‘야단법석’(惹端法席)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원래 야외에서 법문 강좌를 시도하는 불교의식에서 나온 용어이다. 또 흔히 말하는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은 불교의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인 ‘아수라’(Asura)가 다투는 장소를 말한다. 이런 용어들을 나열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흔히 상가에서 사용하는 ‘명복(冥福)을 빕니다.’ 란 말도 죽은 사람이 받을 복을 위하여 행하는 불교의식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앞으로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영결식(永訣式), 발인식(發靷式) 등의 말도 엄격히 보면 성도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말들이다. 이런 예들은 불교적 용어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끼진 샤머니즘이나 도교와 유교적 용어들도 아주 허다하다. 특히 주역의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10간(干) 12지(支)에서 계산되는 도교의 주술적인 용어들은 그 출처와 의미를 거의 알지 못한 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3. 결어(結語)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로서는 주의해서 사용해야 할 용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너무 이런 면으로 구별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용어적인 율법에 갇혀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전통적인 종교 문화권 속에서 생성 된 용어들까지 배격한다는 옹졸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황희 정승의 말대로 ‘너의 말도 옳고, 그의 말도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에서 일반화 된 용어라 할지라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타 종교의 교리적인 용어들까지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다음호부터 본격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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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김문훈 목사] 신행일치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피가 통해야 건강하고 뜻이 통해야 한편이 된다. 소통이 안되면 고통이 오고 불통하면 불행하다. 기독교는 말씀이 중요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역사를 일으킨다. 말은 마음의 알갱이를 줄인 말이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온다.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고 성품이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짓게 된다. 옛적에 인재를 뽑을 때는 그의 신언서판을 보았다. 몸가짐이 반듯하고 말투가 공손하며 문필 즉, 필력을 갖추고 판단력을 겸비한 사람을 말한다. 지도자는 그 말에 신뢰가 있어야 된다. 언행일치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는 신행일치가 되어서 믿음과 행위가 하나로 나타나야 된다. 한국교회 초창기 선교자들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깊은 공감을 했다. 우는 자들과 울고 웃는 자들과 웃었다. 어떤 의료선교사는 단순히 육체적 질병을 낫게 한 것뿐만 아니라 환자와의 깊은 공감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전인적으로 회복하도록 도왔다. 사회가 양극화에 빠져있다. 한 가지를 가지고도 서로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갈등하고 다툴 때 그 사회가 얼마나 혼란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남들은 맹렬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문제는 모를 수가 있다. 바벨탑의 비극은 온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창씨개명 즉,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제 개명하게 한 일, 신사참배는 우리나라의 언어를, 문화를, 종교를 빼앗아 간 것이다. 언행일치는 누구나 어렵다. 신행일치는 더더욱 힘들다. 그래서 믿음의 선진들은 근신하고 절제하고 금식하고 침묵하고... “눈물이 강이 되고 피 땀이 옥토되어”라는 어느 목회자의 간증집 책이 있다. 오랜 기도와 눈물로 여과된 말을 할 때 그 말의 영향력은 지대할 것이다. 겉과 속이 같고, 이론과 실천이 같고, 믿음과 행위가 같아야 된다.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 씨름을 하는 것이다. 추수 때 시원한 냉수처럼 명쾌한 말 한마디가 십 년 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한다. 공감 능력과 전달 능력을 갖추어서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언행심사를 구사하기까지 눈물로 기도하고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하리라.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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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 [오성한 목사] 저절로
    능력은 더 받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발견하는 것이다. 십자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능력이 있다. 더 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있는 능력을 잠재우게 된다. 이미 주신 것을 발견만 하면 능력의 삶이 시작된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시고 이미 주신 능력을 발견하는 것이 능력 있는 삶의 출발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발견하고 깨워라.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몸에 밴 어린 시절로 인에 많이 괴롭힘을 당했다. 급한 성격과 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급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는데 북한에 계신 할아버지도 급한 성품이었단다. 그것이 싫어 급하지 않기로 어릴 때 무수히 결심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결혼한 후 내가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하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가는 자신을 보며 놀랐다. 고쳐보려고 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화를 내는 날은 스스로 고통스러워 반은 죽었다. 후회와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반복되는 행실을 회개했지만 얼마 가지 않았고 소용없는 것 같았다. 변화되고 싶은데 변하지 않는 모습에 스스로 자책하며, 고통스러워하며, 얼마나 많은 죄책감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자책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 것은 급한 성격뿐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짓눌렀기 때문에 나는 위선자로 여겨졌고, 자괴감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잘 알지 못해 속았고, 선포하고 훈련되지 못해 속았었다. 위선자라는 생각에 고통스러워하고, 자괴감을 느꼈고, 아무리 조심한다고 고쳐지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복음의 조명이 더 비취어 오면서 주님께서 해 놓으신 복음의 소식이 고쳐지기 시작했고, 정말 나는 달라졌다. 어느 날 아내는 나에게 99% 바꾸었다고 말할 정도로 변화되었다. “전에 깨닫지 못할 때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났다”(로마서 7:9 참고)는 말씀이 있다. 또 “죄가 계명을 너는 지킬 수 있다고 속여서 나를 죽인다.”는 말씀도 있다(로마서 7:11 참고). 그렇다. 계명을 내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지켜보려고 애쓰며 속았었다. 내가 죽지 못하고,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속았었다. 그러니 죄가 나를 속이고, 죄책감과 자괴감을 들게 하여 나를 죽이려 했다. 노력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을 텐데, 노력이 부족하여 못 지킨다는 생각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곤 했다. 나의 신앙생활의 대부분은 나를 고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니 능력의 삶을 산다는 것은 멀어져 보였다. 지금처럼 기쁨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지 못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감격 되는 때도 있었지만, 자주 위선자라는 자책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귀는 죽이고 도적질하고 속이는 놈이 아닌가! 주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한 삶을 주시는 분이 아닌가! 기도도, 성경도 읽으면서도 잘 알지 못해 마귀가 죽이고 도적질하고 속이는 속임수에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어느 날이었다. 화를 잔뜩 내고 돌아서는데 주님은 “성한아, 네가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네가 의인이라고 믿니?”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로마서를 많이 읽고, 은혜를 받은 터라 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만, “하나님, 꼭 이럴 때 질문하셔야겠습니까?” “그래, 성한아 대답해 보아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예!”라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다음에 들려 온 주님의 음성은 나를 울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 고맙구나! 성한아, 네가 그런 상황에도 너를 믿지 않고 내가 이룬 일을 믿어주니 너무 고맙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화를 내고 있던 나의 눈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계속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은 “성한아, 고맙다.” “성한아, 고맙다. 나를 인정해 주고, 믿어주니 고맙다.”라는 소리가 감격으로 다가왔다. “성한아, 너는 죽었단다. 너는 너 자신을 죽일 필요가 없단다. 너는 나와 함께 죽었단다. 네가 의인임을 믿는다면 너는 나의 삶을 믿음으로 살 수 있단다. 너의 상태와 아무 상관 없이, 나는 네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란다. 나는 너 안에 영원히 흐르는 생수의 강이란다. 네가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안에는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단다. 너는 그것을 믿을 수 있겠니? 이제 너의 삶은 내가 살고 있단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단다. 나는 지금 네 안에서 화낸 일을 지금 사과하고 싶은데 너는 어떠니? 지금 사과할 수 있겠니?”라고 하셨다. 이 마음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지는 날, 죄송하면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 어떤 깨달음보다 강렬했다. 엄청난 복을 알게 된 날이었다. 주님을 아는 것 같았지만, 주님이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사과하려고 상대의 얼굴을 보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사과를 했다. 이런 일이 여러 사건과 여러 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선 저지르고, 후 조치하는 일도 많았지만, 나의 모습은 고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의인이기에, 믿음으로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알고 있던 똑같은 복음이지만 다르게 깨달아졌다. 복음의 조명이 더 밝아진 것이다. 복음의 조명이 더 밝아진 후, 나의 고백은 항상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에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깨끗함과 행동이 있어야 하고 하늘의 불이 떨어져야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는 나에겐 나와 상관없이 넘쳐흐르는 생수의 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엔 기쁨의 샘이 솟았다. 이 일 후 3개월 이상을 극한 흥분 속에 기뻐하며, 성경을 읽고, 기도한 것 같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좋다. 성경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복음으로 꿰졌다. 설교가 쉬워졌다. 단순해졌다. 그전에도 예수만 전하고 싶어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예수만 전하고 예수만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오직 예수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났다. 이 놀라운 복음만 만난다면 교회는 힘을 얻고, 개인이 힘을 얻고,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예수께서 왜 이 땅에 왔다 가셨는지를 분명히 알려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깨워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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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기독교인의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
    1. 서언(序言) 언젠가 어떤 교계 신문에서 “예수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란 제목의 글이 게재되어 있는 내용을 흥미롭게 읽어본 적이 있었다.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신학교에서 국어학과 예배학, 비교종교학을 등의 언어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쳤던 필자로서는 아주 호기심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존칭어로 호칭한다면 그 뒷말도 ‘예수님 이름으로’가 아닌 ‘예수님 존함으로’라고 해야 경어 원리상 옳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대해서 이 말의 진위여부를 논하지는 않겠다. 왜냐하면 전자이든 후자이든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어떤 말이 옳은지의 정답을 논하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2. 기고(起稿)의 동기 또한 이 용어 하나를 어떻게 사용 하느냐?를 읽고 보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느낀 점이 아주 많았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의외로 교회의 신앙적인 바른 용어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허다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타 종교나 신앙적이지 않는 용어들, 심지어 타 종교의 교리적인 언어들까지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계의 어떤 언어든지 그 생성의 근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우리는 고조선 이래로 단일 민족의 역사로 이어져 왔고, 비교적 다 문화가 아닌 단일 문화권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사용언어의 고착화는 옛날부터 되어져 왔다. 또한 이러한 언어문화는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의 종교적인 전통 속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그러한 용어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다. 왜냐하면 타 종교권의 말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경남기독신문에서 이러한 필자의 작은 사명을 정리하여 발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래서 7-8년 전에 근 3년여 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의 지면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소견을 발표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 형식으로 연재하게 될 것이지만, 용기를 주시는 몇분들의 요청과 다시 한 번 정리한다는 입장에서 감히 졸고를 수정 보완하여 다시 기고를 함과 동시에 책으로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전문성과 논리성을 갖춘 다수의 선행연구들과 서적들이 있었고, 또 이를 참고하였음을 먼저 밝혀둔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전1:9)는 말씀대로 앞의 선행연구들과 내용이 비슷하거나 반복되는 내용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고를 내는 것은 용어란 계속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생성하고 발전하는 생물체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그 부침(浮沈)을 계속하며 변화하기 마련이다. 특히 본 기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기독교 용어를 중심으로 하고, 기타 타 종교권 용어들을 비교 분석하려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지 말아야 할 용어들과 사용해도 무방한 용어들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각 종교의 역사성과 전문성에 따른 용어들의 새로운 발견과 차이성을 계속 발견하게 되었다.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3. 결어(結語)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그 말 그대로 타 종교권의 용어를 알고 구분함으로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우리의 용어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면으로 나름대로의 작은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선행연구들을 참고하면서 나름대로 발견한 작은 부분들을 첨가하여 현시대에 알맞은 용어연구를 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연구는 주관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연구의 기고가 오늘날의 올바른 기독 언어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대장정의 글을 시작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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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권오희 목사] 함께 노력하는 다음세대 사역
    얼마전 통합 제주노회 서남시찰 장로회에서 다음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역량강화 사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청소년 이해와 소통에 대해서 강의를 했고, 중문교회 오공익목사님께서 2030세대에 대해서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핵심주제는 이러했습니다. 1. 청소년 이해는 불가합니다. 그냥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시고, 받아들이십시오. 다른 별에서 온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시작입니다. 2. 아이들을 존중해 주십시오. 루소는 어린이를 '축소된 성인'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로 보았는데, 사실 그것은 성경에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고 하셨고,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성세대가 아이들을 존중하며 안아줄 때에, 아이들은 그 품이 곧 교회며,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3. 아이들에게 실수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아이들은 가상현실속에 심취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상현실은 자신들이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액션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리액션을 잘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부모들과 기성세대에 의해서 액션을 취하지 못하고 늘 실패할것만 두려워하며 살게 됩니다. 그럼으로 교회에서 장로님께서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들을 신뢰하며 마음껏 “액션”을 취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실수가 많고 어설퍼도)정말 잘했다고 “리액션”을 하시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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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김진홍 목사] 어느 크리스천 기업인의 3가지 성공 비결
    성공한 크리스천 기업인이 두레마을을 방문하였기에 여러 시간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목사보다 더 신앙이 좋은 기업인이 있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기업인이 말하기를 자기가 기업을 경영하여 돈을 버는 것은 선교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나가 선교지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지로 찾아다니며 선교사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 자신이 기업 경영에 성공한 이유로 3가지를 들면서, 모두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내용이라 하였습니다. 자유, 토론, 질문 3지입니다. 1. 자유가 없이는 좋은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에 대하여 다음 같이 일러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 어떤 권력도, 어떤 권위로도 자유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자유를 땅의 권력으로 누를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의 자유를 억누르는 권력이나 권력자가 있다면 저항하여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저항권’이 있습니다. 만약 정부가 부당한 방법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할 때에 저항하는 권리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신앙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권력에 대하여 순종만 가르치는 종교를 ‘아편 종교’라 합니다. 신앙은 자유함이 있을 때에 진정한 신앙입니다.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에 활력이 있고 번영이 있음은 성경적 신앙이 가르쳐 주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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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박무열 목사]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라
    세상 모든 사람의 삶이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의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삶의 자리가 다를 뿐만 아니라 결과도 확연한 차이를 두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형통의 삶을 살 수가 있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도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잊지 말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하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미물 하나에도 목적과 뜻을 두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자기 계획으로만 넘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확신의 딜레마에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을 치며 능력자들을 찾아 시간을 허비하고 영적인 혼란만 가중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현명한 척 자고 하지 말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말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라. ( “찬송가(623장) 주님의 시간에 아름답게 모든 것 변하리” ) 그리하면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경륜에 따라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리 참담한 상황에 직면해도 하나님 안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라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꿈을 가지고 준비만 잘 되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젠가 반드시 사용하실 것이다. 계획하고 꿈꾸는 일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희망이 없다”. “이젠 다 틀렸다”고 낙망치 말라. 그 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꿈이며 행복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희망을 잃지 말고 “나는 너무 늦었다.”고 하지 말라. 나는 늦었어도 하나님은 늦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으라. 짙은 구름이 드리워 세상이 캄캄해서 당장 비가 내려 창수가나 모든 것이 무너져 떠내려 갈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구름 뒤에는 해가 있고 비가 그치면 다시 해가 비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더욱더 신뢰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며 삶을 구체화하라. 믿음과 소망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며 모든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헌신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이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며 소박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다.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때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그 후에 더욱 성숙한 믿음을 얻는다. 문제를 극복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을 때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하지만 기적이 순탄한 인생대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주어진다.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실천적인 삶을 더 원하신다. 믿음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뜻대로 살기를 힘쓰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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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하수룡 장로] 초심
    얼마 전에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한 고깃집에 간적이 있다. 번호표를 받아 먹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은 이유가 가격이 저렴하고 질과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지인들과 일부러 그 식당을 찾았을 때엔 우리가 처음 갔던 것과는 너무 달라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주인의 처음 먹었던 마음이 사라진 것 때문에 어느 회사의 상품명같이 ‘처음처럼’이 계속 생각이 났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진리를 안다면 처음에 마음먹고 세웠던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자성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초심불망’은 처음에 다져진 마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가슴에 와 닿는다. 처음 세운 뜻을 이루려고 꾸준하게 나아가든지 처음에 품었던 뜻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만큼 처음 내세운 다짐이나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만 나중에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처음 먹었던 마음이 변치 않고 좋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심(三心)은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다.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초심은 처음 시작이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모든 일에 접근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 우리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심부름을 할 때나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마음은 정말 때 묻지 않은 흰 백지 상태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짓말하고 변명하여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못된 심성이 발동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초심은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은 마음으로 첫사랑의 마음과 흡사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좋게 해 주고 늘 자기의 마음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래서 초심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알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배려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음 생활도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조금 이루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위기의 때를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늘 앓아오던 질병에서 이제 다 나았다고 안심하면 초심의 망각으로 재발하기 쉽고, 자신이 이 정도면 잘 살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고한 마음이 생기면 초심을 잃고 모든 일을 안이하게 대처하여 낭패를 당한다. 이렇게 되면 열정이 식어지고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마음, 즉 초심은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처음사랑과 같아서 애완견과 예쁜 꽃을 가꾸듯이 늘 관심과 애정으로 키워야 한다. 날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처음 먹었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로지 매일 기도하면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고 나의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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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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