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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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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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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경의 큰 그림과 안식(1)
1)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창조되었다(창1:26~28).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일 때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안식한다. 사람은 창조 되자마자 안식을 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함께 안식하시려고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완벽이 무엇인가? 완벽하다는 말이 단순하게 세상을 좋고, 아름답게 창조했다는 말로만 보아선 안 된다. 물론 그런 뜻도 있다. 그러나 완벽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태를 말한다. 비 인격체인 피조물이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인격체인 사람이 완벽할 때 완벽할 수 있다.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의 손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하나님과 동일시 될 때 완벽하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였고 완벽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로 완벽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 되게 하신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완벽하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임마누엘을 이루시는 날 우리는 하나 되었다. 완벽 해졌다. 회복된 날이다. 하나님의 완전함 같이 우리도 완전해졌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고 하셨다. 안식을 말한다. 완전함을 말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임을 알 때 완전하다. 또 이것이 행복이고 안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이것을 보고 안식의 삶이라고 한다.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보텔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안식은 피곤해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어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기에 안식이다. 점이라도 하나 더 찍으면 작품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붓을 놓는 화가처럼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어 쉬시는 것이 안식이다. 사람은 창조되자말자 안식을 살았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당연히 모든 피조물도 완전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가 하나님의 첫 번째 그림이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안식이었다. 2) 사단에게 속아 안식을 잃었다 사람은 사단에게 속아 합법적인 하나님과의 분리가 일어나 버렸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완전함이고, 안식인데 안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신적 통치권을 빼앗겨 버렸다.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함으로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는 말씀대로 되었다. 그 결과 안식, 즉 임마누엘의 완벽함을 잃어 버렸다. 마귀도 언제나 말을 먼저 먹인다. 마지막 때도 마귀의 주된 일이 말을 먹이는 일을 한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계12:15)라고 했다. 여자인 교회를 말인 물로 떠내려 보내려 한다. 뱀인 마귀는 입에서 물을 토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많이 토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하늘의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1:8). 마귀는 다른 말을 토해 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큰 그림인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임마누엘은 안식이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보아야하는데 보지 못하게 다른 말을 넣는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고 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그림인 안식이 없으면 두렵다. 안식을 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이다. 안식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내가 다른 복음을 먹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확증한다. 스스로 벗었다고, 두렵다고 고백한다. 그전에도 벗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누가 너에게 벗었다고 알려줬느냐"고 물으신다. “누가 그런 말을 해 주더냐”라는 뜻이다. “네가 무엇인가 스스로 입어야 한다고 누가 말 하더냐”는 질문이다.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 외에도 무엇을 입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따먹었느냐?"라고하시지 않고 "누가 벗었다는 것을 알려줬느냐?"라고 물으셨다. 말의 권세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주는 순간이다. 사단의 속임수는 다 말로부터 온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말을 들으면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큰 그림이 보인다. 사단의 말을 들으면 벌거벗음이 보이게 된다. 두려움을 보게 되고, 두려워 숨게 된다. 주님이 입혀 주신 것 외에 뭔가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엔 온전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는가? 말이 온전하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고 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욕도 안해야하고,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욕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말이 온전하려면 복음을 말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이다. 복음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온전한 말을 하면 아버지의 일인 안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한다. 너무 아까운 세월을, 아까운 인생을, 남의 이야기하다가 다 보낸다. 비판과 불평불만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안식이 있을 리가 없다. 사단은 말로 우리를 속였고 속이고 있다. 안식은 우리의 믿음의 말에서 온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 마귀에게 속아 안식을 잃어버린 것은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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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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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저축할 내용 (창41:46-57)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에 보도 된 내용에 의하면, <영국 교육과정평가원>이 새로운 아동 교육개혁 방안을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11세-16세까지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금융교육을 학교 정규 과목으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수학을 배우고 과학을 배우는 것처럼 이 수업을 통해서 스스로 부채를 관리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연금 계획 짜는 것을 배우고, 금리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는 9월부터는 모든 <영국>의 5세 된 아동들에게는 정부로부터 250파운드가 지원 되어서 자신의 펀드를 개설하게 된다고 합니다. 일반 가정의 아동들에게는 250파운드(약$500)의 펀드 자금이 지원되고 저소득층 아동들에게는 500파운드의 펀드 자금이 지원된다고 합니다. <영국>정부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금융교육을 실시하는 까닭은 매년 해마다 개인 파산 신청자들이 늘어나는데 대한 대처 방안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일찍 돈을 알면 좋지 않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에게 돈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돈을 가르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돈의 가치를 알게 해야 하고, 올바르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야 하고, 올바르게 돈을 저축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보다 더 안정된 내일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정된 내일을 사는데 있어서 저축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꼭 저축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많이 저축할수록 보다 나은 내일을 보장해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축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물질을 저축해야 합니다.(창41:46-57) 둘째로, 기도를 저축해야 합니다.(시32:6-7) 셋째로, 선행을 저축해야 합니다.(딤전6:17-19) 필요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저축해서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안정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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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해녀의 욕심
‘물숨’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 제주도 우도(牛島)의 해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잘 몰랐던 해녀들의 삶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해녀들에게는 계급이 있습니다. 제일 높은 계급인 상군은 가장 깊은 바다까지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보통 15-20미터의 바다까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중군이고, 맨 마지막 하군은 일명 똥군이라고도 부르는데, 2미터 이하의 바다에서만 작업을 합니다. 그 해녀들의 계급은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숨 길이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바로 그 숨길이로 계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상군, 중군, 하군 이라는 계급에 따라 해녀들이 작업하는 바다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지만 모든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마다 동일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숨’입니다. 물숨은 바다 밖에서 숨을 쉬는 것과는 달리 바다 밑에서 들이마시는 숨을 의미합니다. 이 물숨은 해녀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아주 무서운 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에 한 두 명의 해녀가 물숨을 먹고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물숨은 다른 말로 하자면 욕심입니다. 자신의 숨 길이만큼 숨을 참으면서 작업을 하던 해녀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 물 위로 올라가려 합니다. 이 때 저 밑에 큼지막한 전복이 해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에 대한 욕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전복을 따기 위하여 물 아래로 내려가는 해녀는 그 물숨을 먹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해녀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숨만큼만 해산물을 따서 재빨리 물 위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질없는 욕심을 경계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해녀들은 바다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친정엄마처럼 다 내어 주는 곳이야!” 우리는 손안에 그 무언가를 움켜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참으며 견뎌냈을까요? 우리 또한 욕심내지 않아야 할 것,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에 욕심을 내다가 물숨을 마시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4-15절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만족하는 법을 모릅니다. 진짜 자신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없이 사실은 지금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더 더를 외치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에든지 욕심을 품는 순간 불행이 시작됩니다. 욕심이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마귀의 유혹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에 가장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께도 응답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시지 우리의 욕심에는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여서 기도 응답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고보서 4장 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기도는 좋아도 너희의 욕심은 싫다, 나는 결코 너희의 욕심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욕심을 내고 또 내지만 사실은 욕심으로 인해서 인간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것에 자족하는 데 있고, 그 자족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제 헛된 욕심의 물숨을 버리고 자족과 감사의 바른 숨을 쉬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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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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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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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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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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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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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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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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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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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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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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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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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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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직도 남아 있는 영지주의 잔재들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서 사고하고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도 그러했다. 당시에 맹위를 떨쳤던 소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창조세계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고, 유대교 세계관의 많은 요소들 중에서 성경과 부합하는 관점들을 계속적으로 견지하면서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의 어떤 분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날 영지주의로 알려진 분파다. 그 명칭이 헬라어 “그노시스”(gnosis, 지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집단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비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 집단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지 않으신 그분의 비밀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영지주의 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2세기에서 5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영지주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적 경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가 영적 세계보다 단순히 열등한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악하다고 믿었다. 가장 분명한 예 중 하나는 유대교 성경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유대교나 구약성경을 결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완전히 이교적인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에서 끌어낸 틀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였던 예수의 예상치 못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자들의 저술들을 보면 유대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다. 실제로, 일부 영지주의 텍스트는 구약의 신을 하나님을 발산해 내는 주요 계열에서 악한 분파로 묘사하고 있다. 이 유대교의 유일한 신이라는 하나님은 무지하고 사악하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실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한 세계로 보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은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영지주의 저작물은 섹스와 결혼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한 정신(영혼)을 본질적으로 악한 몸(물질)에 가두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서, <도전자 토마스의 책>(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은 영지주의 학자인 카렌 킹(Karen L. King)이 요약한 바와 같이 “육체에 대한 애착과 성행위에 대해 정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주류 교회보다,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훨씬 더 금욕적인 경향을 보여 주었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영지주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혹 예외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성행위를 금하고 여성성(femininity)을 부인할 때만 가능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토마스 복음서>(the Gnostic gospel of Thomas) 114장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되, 여자는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으니 ‘마리아[막달레나]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친히 그 여자를 이끌어 남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너희 남자들을 닮은 산 영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스스로 남자가 되게 하는 모든 여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지주의는 당시에도 결코 널리 퍼진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이 운동은 주로 지중해 동부, 특히 이집트에 흩어져 있던 고립된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이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반박하는 글들을 많이 저술했다. 최근까지도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이들 변증론자들의 글에서 나온 글들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본 발견으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변증론자들의 글들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오늘 성경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에도 아직 영지주의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 잔재들을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개혁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당시에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변증의 방법이 성경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영지주의자들이 취했던 기독교적 피상적 겉치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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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직도 남아 있는 영지주의 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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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성경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면, 미리암과 아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세를 비방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딱 걸렸다는 뜻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숨겨진 비밀이 있는데, 어느 누구도 미리암과 아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생뚱맞게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일까요? 성경이 의도하는 사건의 진행은 무엇일까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이 모세가 온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모세는 누나와 형에 대해서 끝까지 참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먼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시점을 살펴봅시다. 바로 앞장에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낸 모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지도자, 장로를 세워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일에 모세가 져야 할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상 다음으로 발생한 사건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 대한 비방을 누구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구스 여자를 취한 모세에 대해서 미리암과 아론은 누구에게 비방하였겠습니까? 만약 동생 모세에게 허점과 잘못과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누나로서 형으로서 모세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비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충고요, 충실한 충신들이 할 수 있는 멋진 행동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말을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하여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70명의 지도자,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70명의 장로들도 그 비방에 동참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미리암은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의 여론과 정서를 조장하고 충동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분위기를 조성해도 뒤숭숭한데, 백성들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으니 이스라엘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세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습니까?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지도자, 장로들도 무시하지 못할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70명의 장로들이 세워지기 전에는 모세 좌우에 항상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형 아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통치를 위해 세워주신 인물입니다.(출4:14-16) 형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의 입이었고, 대변자였고, 모세와 같은 인물입니다. 아론이 모세를 대신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은 비록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세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입니다. 누나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수많은 여성을 돌아보며 여성들을 대변하며, 모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미리암과 아론이 새롭게 세워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다면 그 여파는 어떨 것 같습니까? 거기에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내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비방과 건의는 차원이 다릅니다. 건의와 충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비방하기 전에 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하여 한다고 하니 70명의 장로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은 당연히 그런 줄 착각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잘못된 정서를 만드는 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비방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여론이 확산이 되고, 정서가 만들어지면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에 대한 대적이요, 반역을 도모하는 최후통첩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비방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미혹하는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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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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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 대한민국의 요즘 화두는 세계 속 강국으로 우뚝 섰다는 평가다. 세계 무역 10대 국가가 된지는 오래전이다. 제조업이 강한 나라, 4차 산업 시대를 이끄는 반도체 분야 사실상 세계 1위에 서있다. 5천만 이상 인구에 186개국과 교역을 하는 세계화에 성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세밀한 수치를 언급치 않더라도 사실상 G7에 속한 세계 최강 나라의 반열에 섰다. 소프트파워의 문화강국으로도 자리매김했다. K-컬처의 바람이 거세다. 제조 반도체 조선 자동차 건설에 이어 K-방산이 주목을 받으면서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갖추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감히 누가 넘볼 수 있을까. 자화자찬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너무 뜨고 있을까. 우리의 취약함, 남북 대치의 심각한 현실 문제에도 미래학자들은 희망을 주고 있다. 미국 조지 프리드먼은 최근 한반도의 미래를 예측한 ‘100년 후 한반도’라는 자료를 냈다. 2030년 한반도는 남한 주도 남북통일이 되고 10년의 혼란기를 거쳐 중국 동북지역 옛 고구려 지역까지 복속하게 된다는 예측이다. 그리고 세계 G2에서 세계를 리드하게 될 것이라는 장밋빛 내일의 그림을 그려 발표했다. 꿈같은 이야기일까. 프리드먼의 예측이 지금까지 미래학자 중 가장 근접하는 예측을 많이 했다는 평가를 볼 때 아주 기분 좋은 일이다. 이러한 미래 예측은 지금 대한민국이 위치한 지정학적 취약에도 역전될 수 있다는데 기인한다. 문제는 주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이 몰락의 내리막길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푸틴의 불행한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의 공룡화 경제는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동족을 노려보고 있지만 거지경제 나라의 내일은 있을 수가 없다. 뭣보다 삼국 공통점인 사회주의 전체 국가의 말로를 불을 보듯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 강국이 되고 미래까지 밝게 보이는데 우리의 교회는 어떤가. 130여 년 전 서양의 선교사들이 온 땅 이곳저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교회를 세운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모든 분야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자양분은 바로 우리의 교회서 나왔다. 세계의 역사 흐름은 프로테스탄트 부흥의 이동에 따라 세계 강국들을 탄생시켜왔다. 이제 동북아로 개신교의 흐름에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있다. 전 국민 20%이상이 개신교이다. 한국교회 모두가 세계 10대 교회 안에 들어서있다. 기라성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세계 기독교를 움직이는 프로테스탄트 리더국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하게 세계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될까. 암울한 미래의 흐름에 우려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장차 한국사회를 리드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크게 일고 있다. 좌파 정치이념의 교회 침투가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동성애 등 인본주의 문화 산물의 급속한 확산이 세상을 음란과 우상 문화로 물들게 하고 있다. 평양 대 부흥에서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74엑스포 집회 등으로 한국교회의 양적부흥은 이루었다. 세계 선교사 파송 강국의 제사장 나라와 경건과 정결의 한국교회 전통이 이어질지 의문이 많다. 이를 지켜내고 온 땅에 한국교회는 복음 전파와 인류 사랑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9절 말씀에서 사명을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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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세계강국 대한민국, 제사장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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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 하늘을 날고 있던 작은 경비행기 한대가 갑자기 고장이 났습니다. 그 비행기 안에는 조종사와 기업인과 판사와 목사와 학생 모두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에는 낙하산이 네 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종사가 자기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기업인이 세계 경제를 걱정하면서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판사가 사회 정의를 위해서 자신이 살아야 한다면서 재빠르게 낙하산을 안고 뛰어내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하산은 한개 뿐인지라 목사님이 학생을 보고 어서 빨리 그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목사님, 여기 낙하산이 두개가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세 사람이 가지고 뛰어 내렸는데 어떻게 두 개가 있단 말이냐?”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하는 말이 “조금 전에 판사님이 제 책가방을 낙하산인 줄 알고 제 책가방을 안고 뛰어 내렸기 때문에 두 개가 남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우스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중요한 메시지는, 양보할 줄을 모르고 나만 살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도리어 망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우선순위를 양보하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결국 복을 받고 내가 더 잘되는 수가 있습니다. 양보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일 뿐만 아니라 복을 받고 잘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회 속에서 양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자신의 중요한 권리를 양보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아주 귀한 사람이요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양보하는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첫째로, 양보하면 나중이 잘됩니다.(창13:8-18) 둘째로, 양보하면 자녀가 잘됩니다.(삼상18:1-5) 셋째로, 양보하면 높임을 받습니다.(눅14:7-11) 생존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서로 양보하는 성숙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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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양보의 축복 (창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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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
- I. 서언(序言) 전에 어떤 자리에서 30~40대의 젊은이가 자신의 남동생의 아내를 보고 어떻게 불러야 될지 머뭇거릴 때, 옆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럴 때는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해야 된다”고 일러주는 말을 들었다. 이렇게 잘 알지만, 순간적으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우리가 늘 사용하는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논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주 참고문헌은 2011년 12월 국어심의회에서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논하는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 1. 한자어 해석을 통한 명칭 이해 : 용어를 쉽게 이해하려면 먼저 한자어와 그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형은 맏형(兄)자로 먼저 태어난 남자 동기(同氣), 제는 아우 제(弟)로 나중에 태어난 동기를 말한다. 자매의 자는 손위 누이 자(姉)로 먼저 태어난 여자 동기, 매는 누이 매(妹)자 이다. 또 형제자매의 배우자의 아내는 아내 부(婦)이며, 남편은 지아비 부(夫)이다. 이처럼 한자어의 뜻을 기초로 호칭어와 지칭어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여성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용어들 : 첫째 오빠와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이다. 오빠를 부르는 말은 일반적으로 ‘오빠’, ‘오라버니’, ‘오라버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오빠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오빠’, ‘오라버니’로 지칭한다. 그다음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오빠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너희 외삼촌’, ‘외숙부’, ‘외숙부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또한 오빠의 아내에 대해서는 ‘새언니’, ‘언니’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오빠의 아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을지라도 오빠가 손위이기 때문에 그의 아내도 ‘언니’로 호칭해야 한다. 두 번째는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남동생이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동생’으로,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동생’이라거나, 아이들이 있으면 ‘OO 외삼촌’으로 지칭한다. 또한 남동생의 아내를 부를 때는 때로는 ‘OO 엄마’라고도 하지만, 주로 ‘올케’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신의 자녀에게는 ‘외숙모’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 번째는 언니와 그 배우자에게 대한 호칭이다. 언니를 부르는 가장 보편적인 말은 역시 ‘언니’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손위 여자 동기를 지칭하는 말도 ‘언니’란 말로 다 통할 수 있다. 시댁 쪽 사람과 그 외의 사람에게도 ‘언니’, ‘우리 OO 이모’로 지칭 할 수 있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언니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 ‘이모님’이라고 지칭하게 하면 된다. 네 번째는 언니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형부(兄夫)’이다. 또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에게 지칭하는 말도 역시 ‘형부’라고 해야 한다. 시댁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형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다섯 번째는 여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여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동생’으로 불러도 된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이름보다는 ‘동생’으로 부르고, 시댁 쪽 사람에게는 ‘친정 여동생’, ‘OO 이모’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섯 번째 여동생의 남편의 경우다. 여기에 대한 호칭은 주로 ‘O서방(書房)’, ‘제부(弟夫)’로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참고로 ‘서방’이란 말은 ‘벼슬이 없는 사람을 그 성(姓)과 아울러 부르는 말’로서 남편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또 ‘O서방’, ‘제부’는 당사자나 부모님, 동기와 그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한다. 또한 시댁 쪽과 그 밖의 사람에게는 ‘동생의 남편’, ‘제부’, ‘OO 이모부’로 지칭 하며,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제부를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역시 ‘이모부’, ‘이모부님’이라고 지칭한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만 노력하면, 아주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언어생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이런 바람직한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기를 주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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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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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처방약을 잘 챙겨 먹기
-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같은 말을 4번 반복하는 것 같다. “주의해라” “귀를 기울이라”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마음속에 지키라”고 4번이나 다른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복하신다. 주의하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떼지 말고,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환자가 약을 먹을 때 의사가 처방한 대로 약을 먹어야한다. 약을 함부로 마음대로 먹어선 안 된다. 의사가 지시한 대로 먹어야 한다. “이 약은 식전에 먹어야지 식후에 먹으면 효과가 없습니다.”라고 하면 어떻게 먹는가? 밥 먹기 전에 꼭 챙겨 먹는다. 혈압 약은 아침에 먹어야 한다고 하면 아침에 꼭 챙겨 먹는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먹는다. 성경말씀도 그렇다. 시키는 대로 해야 효과가 있다. “내 말은 온 육체에 약(처방약, 치료약)이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육체의 처방약이다. 우리가 병들어 아프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는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처방약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프기 전에 미리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시는 데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의 건강과 치유를 위해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건강의 길이다. 말씀의 앱(application)을 깔아야 한다. 동시에 그전 앱(app)은 삭제해야 한다. 좋은 말씀을 받을 때마다 마귀와 우리에게 깔려 있던 예전의 앱은 그 시대에만 가능한 말씀이라고 속삭인다. “나의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에만 속한 말씀이 절대 아니다. 감사하게도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속한 것이다. 나는 요즘 푹 빠져 암송하며 묵상하며 되새기는 말씀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는 말씀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말씀이 입에서 흘러나오곤 한다. 어떻게 약을 먹을 것인가? 의사가 처방한 방법대로 약을 먹는다. 식전, 식후 등을 지켜야 최고 효과가 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처방약을 복용하는데 지침을 주신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방하신다. “내 말은 그것을 발견하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며, 내 말은 모든 육체의 건강이 됨이라”(잠4:20-22)라고 말씀하신다. 의사에게 간다고 해도 서랍 속에 넣어 놓고 약을 먹지 않으면 아무 효과가 없다. 의사에게 가서 바른 처방을 받았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고 더 악화 될 수 있다. 약이 약병 속에 있다고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의 약을 당신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둔다고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당신 안에 집어넣어야만 역사한다! 의식이 무의식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약은 그의 말씀이다. 말씀의 약을 먹는 방법이 있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이때 묵상은 마음에서부터 믿음으로 터져 나오는 읊조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반복하여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반복의 기름 부음이 넘쳐난다. 나는 잠시 검도 운동을 한 적이 있다. 검도는 3가지를 주로 연습한다. 머리, 손목, 허리를 반복해서 치는 연습이다. 10급부터 1급까지 올라가면 1단이 된다. 내가 2급이 되었을 때 일이다. 2단이었던 검도 선배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검도는 머리와 손목과 허리 세 군데만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치면 반칙이다. 반드시 머리를 공격할 때는 “머리!”라고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떼려야 한다. 검도의 죽도는 둔탁하게 생겼다. 크기도 크기 때문에 쉽게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덤도 2단인 검도 선배가 “머리!”하며 공격을 하기에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칼이 머리 위에 와 있는 것이었다. 허리 공격은 동작이 크기 때문에 막기가 쉽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도 오산이었다. “허리!”라는 소리와 함께 벌써 칼은 허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이렇게 빠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반복의 힘이었다. 반복으로 연습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모른다.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반복적으로 암송하고 주장하는 기름 부음은 엄청나다. 나는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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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처방약을 잘 챙겨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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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포기하지 않을 이유
- 옛날 우물을 아주 잘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파다가 그만둔 곳에서도 그는 곧잘 우물을 파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신기하게 여겼고, 하루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우물을 잘 팝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우물을 잘 파는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이 나올만한 곳을 골라서 파다가 안 나오면 포기하지만, 나는 아무 곳이라도 물이 나올 때까지 파기 때문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금광 개발시대에 전 재산을 팔아서 광산을 산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인부들을 동원해서 수개월 동안 그 광산을 파보았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진 돈만 다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낙심하여 황금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 광산을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광산을 산 새 주인이 다른 인부들과 함께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단지 15cm만 더 팠을 뿐이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전의 광부들이 15cm만 더 팠더라면 황금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앞에서 그만 포기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빨리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욕심을 포기해야 하고 또 복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기에 빨리 포기하지 아니하면 그 욕심과 복수는 엄청난 파국의 결과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금하신 것은 가능하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내 신앙을 지키고 내 삶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할 것 또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명하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3절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은 포기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9절에서는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신 선한 일은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고 꾸준히 그 선한 일을 행하면 때가 되면 그것의 열매를 얻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혹시 지금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명하신 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날 때까지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도의 시작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으니 기도의 마침도 하나님이 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의 주권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를 하게 하시는 분도, 가장 좋은 응답을 가장 좋은 때에 헤아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중단 없이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사용하셔서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큰일을 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중단 없이,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나타날 때까지는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더 강하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바로 그 기도의 한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기도로 인해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이 보호를 받고, 이 나라와 한국 교회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 또한 포기하지 않는 신앙으로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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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포기하지 않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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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참 좋은 친구
- 몇 년 전 부산을 배경으로 한 “친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친구에는 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가 있다. 청소년 비행 이론 중에 ‘학습이론’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같이 나쁜 친구를 통해 비행이 학습되어 진다는 이론이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삶의 행운이요 축복이다. 얼마 전 세계적 부호인 W. Buffert(1930-)의 일화가 매체에 보도되었다. 경제 전문지 포춘이 주최한 “여성과 일”의 주제 강연에서 한 여대생이 워런 버핏에게 성공의 정의를 물었다. 버핏은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란 원하는 것을 많이 얻는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당신이 사랑해 줬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 주면 당신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부를 다 얻을 수 있고 당신 이름의 빌딩들을 소유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사람들이 당신을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Buffert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를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폴란드계 유대인 벨라 아이젠버그란 여성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워렌 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매우 더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속으로 질문하기를 저 사람은 나를 숨겨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나이가 70이나 80이 되었을 때 주위에 당신을 숨겨줄 사람이 많다면 성공한 거예요. 반대로 당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돈이 얼마나 많든 당신은 성공한 것이 아니에요 하더란다. 친구는 동문이나 나이가 비슷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같으면 가능하다. 워런 버핀은 B. Gates가 자기보다 25살이 적어도 그를 친구라 하였다. 성화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하는 손”이 있다. 이 작품은 1508년에 그린 A. Durer의 대표작으로 현재 뉴른베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뒤르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진 작품으로 그림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너무 가난했던 뒤러는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친구 한스와 함께 도시로 상경한다. 둘 다 돈이 없어 꿈을 이룰 수가 없게 되자 둘은 약속하기를 먼저 한스가 노동을 해서 뒤르를 뒷바라지하고 후에 뒤르가 한스를 뒷바라지하기로 하였다. 뒤르가 성공하자,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스가 일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그때 친구 한스는 기도 중이었는데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져 더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습니다. 내 친구 뒤러를 화가로 성공하게 해주옵소서”라는 기도의 소리를 듣게 된다. 뒤르는 자기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뭉클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끄집어내어 친구 한스의 기도하는 손을 종이 위에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린 그림이 “기도하는 손”이다. 이 그림으로 뒤르는 유명세를 타게 된다. 후에 뒤르는 이 상황을 회상하며 말하기를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며, 기도하는 자가 가장 큰 자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이다’라고 하였다. 친구는 어떤 의미인가? 친구란 국어사전에 “오래 두고 가깝게 사귄 벗, 이해타산으로 사귀는 친구가 아닌 순수한 사귐”이라 정의하고 있다. 유인진 씨가 쓴 “지란지교를 꿈꾸며”(지란지교란 지초와 난초의 사귐이란 뜻으로 높고 맑은 사귐을 이르는 말)라는 수필에서 친구를 잘 나타낸 글이 있다. 사람이 자기 아내나 자기 남편, 형제나 자녀와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할 수 있으랴. 영원히 없어도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어도 남성이어도 좋다. 나이가 나보다 많아도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고 깊고 신선하며 친구와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렇다, 소중한 친구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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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참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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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월세가 아까운데
- “목사가 나타났다!” 어느 동네, 개척교회 목사님이 길을 걸었다. 거리에 있던 상가 주인들이 속닥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광경이 좀 익숙한데. 맞다! 밤에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불을 켰더니 급하게 숨어버리는 바퀴벌레? 미안한 표현이지만 딱 그 모습이다. 목사님이 나타나자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목사님은 그런 능력의 종이었다. 홍해 앞에 있던 그 백성처럼 내게 이 경험은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하면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개척을 준비하며 가장 큰 고민이다. 어느 동네에서 목격했던 한 목사님의 모습이 내게는 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지역 주민과 접촉이 있어야 한다. 동네에 교회가 유익해야 한다.’ 내 깊은 고민을 듣던 스승님이 한 마디 던지셨다. “만화 어떠니?” 철학박사요, 여러 권의 책을 내신 분이 내게 ‘만화’를 권하셨다. 역시 스승님은 내 수준을 정확히 보셨다. 지역마다 좋은 인문학 서적으로 채워진 작은 도서관이 많다. 하지만 생각만큼 사람들 방문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대중들에게 인문학의 벽은 여전히 높았던 것이다. ‘그래, 어차피 나가는 월세. 만화방 만들어서 동네 사랑방이 되어보자.’ 예배당을 순수하게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일주일에 얼마나 될까? 특히 개척교회는 더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얼마를 사용하든 월세는 나간다. 몇 명이 앉아 있든 월세는 나간다. 그렇다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개척의 유행을 살펴보니 ‘카페교회’ ‘도서관교회’와 같이 예배당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가정교회’ ‘사무실, 학원교회’와 같이 모임 장소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공동체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시작할까? 오래지 않아 고민은 끝났다. 그날부터 교회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가 성경보다 만화에 빠져 살기 시작했다. “개척교회에 무슨 만화? 거 참 이상하네.” 비난, 의구심, 호기심, 기대. 다양한 반응이 앞뒤로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 언제나 그랬듯 내 인생을 타인이 책임져 주는 일은 없다. 내가 결정했고 내가 달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늘 등을 밀어주셨고 필요에 따라 수습도 해 주셨다. 또 뭔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할 줄도 모르는 엑셀 프로그램을 열어서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기록하고 정렬한다. 인터넷을 통해 요즘 잘나가는 만화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마음일까? 가슴이 뛰고 기대가 된다. 부흥을 향한 기대? 아니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추억의 만화를 쌓아놓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내 심장은 달리고 있었다. 열 개 교회가 개척되면 열세 개 교회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시절에 만화방 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철없는 목사는 그렇게 흥분하고 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쿵후 보이 친미’ 생각만 해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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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월세가 아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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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
- Ⅱ. 베드로의 설교(14-36)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베드로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비급한 겁쟁이였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를 잡아 대제사장 가야바 궁전으로 끌고 갔을 때 그도 뒤따라 거서 하속들과 같이 있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마 26:69-75). 그러나 오순절을 통과하면서 성령을 받고난 이후의 베드로는 완전히 달랐다. 소리를 높여 부활의 주를 증거 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때가 제삼 시였다.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9시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삼시, 육시, 구시 기도한다. 이것은 포로 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진다(단 6:10). 그러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시에는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기도한다. 고기와 포도주는 주로 저녁 만찬에 먹는다(출 16:8, (전 10:16-17). 그러므로 “때가 제삼시라”는 말은 지금은 취할 시간이 아니고 기도할 시간이라는 말이다. 지금 당신이 건강하고, 물질이 있고, 배운 기술이 있으면 주를 위해 헌신할 제삼시임을 알아야 한다(전 12:1).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성경을 인용4한 말세의 현상을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화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장사를 할 때 마지막 파물에는 팔던 물건을 막 퍼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셨다. 이는 남 왕국 유다의 요시아 왕 때 사역한 요엘 선지가 예언한 것처럼 자녀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된다고 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욜 2:28-30). Ⅲ. 무리들의 회개운동(37-41)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37.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 성령은 말씀의 레일 위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말씀을 선포하면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기고 자란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이다(요일 5:4). 마음에 찔림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인간이 복음과 접할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것이 죄의식이다. 복음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하나는 복음을 믿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지만 다른 하나는 복음을 거부함으로 저주를 받는다. 노아 시대에 방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유월절 피가 없었던 애굽의 집에는 다 재앙이 내려졌다. 여기 마음에 찔림의 상태는 몽둥이에 많이 맞아서 부어 오른 상태를 말한다. 죄악으로 굳어진 우리의 심령은 말씀의 방망이에 맞아서 우리의 교만이 터져야 한다. 그러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스데반 집사를 통해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회개하기보다는 이를 갈았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말씀을 통해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 이를 갈게 되지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면 회개함으로 주께로 돌아온다.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세례를 통해서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성령 주시는 목적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한 상태로 넘치게 받아야 한다. 성령 충만의 내적인 증거는 믿음의 담력이다. 그리고 외적인 증거로는 언어와 생활의 변화이다. 무디는 유리병에 든 공기를 뽑기 위해서 병에 물을 채웠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 속에 죄악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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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오순절을 통과하라 (행 2: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