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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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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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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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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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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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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성수 총장] 그분의 나라를 위한 변증
    타락한 인간이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살다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기도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써야 할 경우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오해나 누명은 상대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지만 공격자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악의적인 왜곡이나 모함에 기인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빛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진리의 세계를 공격한다. 이런 경우를 만날 때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증거 자료들을 제시해 가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변증한다. 신앙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이교세력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공격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격을 받았을 때 기독교인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무력이나 힘으로 변호한 것이 아니라 사상(ideas)을 가지고 변호했다. 오늘날 “변증론자들”(Apologists)로 알려진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공격을 반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예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성찬의 언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잘못된 주장, 또는 기독교인들이 난교를 벌인다는 비난과 같은 공격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았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이방세계와 이방신들의 부도덕함에 맞서 공세를 펼치고, 성취된 예언을 근거로 기독교의 진리를 논증하고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변증론자들은 헬라 철학에서 가져온 용어를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사실 최초의 변증가 중 한 사람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철학자의 외투를 입고 자신의 가르침을 진정한 철학, 즉 예수 그리스도의 철학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와 다른 이교적 사상을 기독교에 통합하는 작은 발걸음이었다. 가장 분명한 예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이용하여 창조세계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의한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단일자”(One)가 만물의 기원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은 ‘말씀’, ‘논리’ 또는 ‘이성’인 로고스(logos) 라고 보았다. 이 개념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유대 사상과 결합되었으며, 결국 이교적인 우주론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주후 5세기 후반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글을 통해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적 영향은 기독교에 여러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그것은 성경에 대한 보다 우화적인 접근을 장려했는데, 이는 본문의 특수한 문자적 의미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자가 가리키는 더 깊은 보편적인 영적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영적 세계를 위해 물리적 세계를 덜 강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계속해서 가난한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돌보았지만 순교를 점점 더 강조하기 시작했고, 만약 순교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난, 고독, 특히 처녀성과 같은 금욕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유대주의 사상에는 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이교도에는 성전 매춘의 형태나 로마의 베스타신녀들(Vestal Virgins, 영원한 정결을 맹세하고 성화를 지킨 6명의 처녀들)처럼 완전한 금욕의 형태로 성과 영성을 관계지우고 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사상이 기독교 신앙과 관습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순결은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영구적인 고결한 삶의 상태로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헬라의 여성혐오적인 가치관과 태도 역시 서서히 교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성은 성적으로 집착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을 갖고 있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본능적인 충동을 통제함으로써 본성에 반하는 행동, 즉 처녀가 됨으로서만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나중 기독교가 합법화 된 후에 더욱 완전한 사상체계로 발전되어갔지만 여성에 관한 비 성경적인 사상의 중요한 요소는 이미 일찍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예들은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에 대한 외부 세계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 체계를 변호할 때도 철저하게 성경적인 방어가 될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교적인 세상 문화 속에서 고립되기 않고 선교적 대면을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요한과 바울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요한은 물질세계와 영원한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재자로서의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의 접촉점을 사용하면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잘 가르쳤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의 연설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을 매개체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져 있는 사상과 문화의 융단폭격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신앙공동체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우리의 성경적 신앙을 순수하게 잘 지키고 변증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8-24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4)
    감정관리 관리가 중요합니다. 감정관리, 생각관리, 분노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감정관리 못 하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생각도 관리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관리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분노관리 잘해야 합니다. 누구나 분노가 있습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분노와 혈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켜야 분노를 관리하게 됩니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만져 주어야 합니다. 감정은 기분입니다. 기분에 죽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이 상한 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상한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한 감정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말로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목회는 감정을 다루는 지혜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자는 상처가 많은 자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사는 자임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간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순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 ‘건강한 관계’가 있고 ‘병든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는 진실한 관계, 변함없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탄이 틈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건강한 관계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관계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병든 관계가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의 위기를 이겨냅니다. 성령 충만하면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샬롬’ 평안은 건강한 관계의 표지입니다. 관계가 건강한 자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적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시기 질투가 적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누구나 만나고 싶어합니다. 사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관계 훈련, 관계 연습을 하면서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관계는 고독을 이깁니다. 은혜받으면 관계 맺기를 기뻐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3-08-24
  • [하수룡 장로] 실업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자리가 있어도 적성에 맞지 않거나 천한 일이면 일자리를 갖지 않거나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상태를 실업이라 하고 이에 해당되는 사람을 실업자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청년들이 3D업종을 기피하여 많은 다른 나라의 청년들이 조용히 들어와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각종 직업에 종사하여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어 자녀들 교육과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교회 직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러 직종에 일하는 분들이 모여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정말 아름답다. 자기의 재능을 교회를 위해 섬기거나 몸으로 헌신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지만 능력이 있는데도 교회 땅만 밟고 다니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분들이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우리 주님은 섬겨야 할 분이 섬기지 않기 때문에 그 빈자리에 이단이 가만히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고 계실 것이라 믿는다. 물론 뜻있는 성도들이 직분에 따라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지만 직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발달하여 이기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역을 맡기거나 자기가 하지 않고 남에게 미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직분자들이 옛날처럼 자기희생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은 바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버렸다. 현실적으로 교회에도 사회처럼 3D 사역이 있다. 교회당 청소, 화장실 청소, 주차관리, 교회차 운행, 주방봉사 등이 그것이다. 이 일은 쉬운 것같이 보이지만 꾸준히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사역인데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도 많지만 의무사항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명으로 받드는 것이 교회 실상이다. 내가 사회에서 맡은 직분이 중하고 힘들기 때문에 그런 일에 투자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도 할 것이고 한 나이라도 젊은 사람에게 일을 미룬다거나 직분자들이 있으니까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우월의식이나 헌신할 마음이 없어 꾸중물에 손을 넣어 식기를 씻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정말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까? 보이지 않는 차별의식 때문에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청소할 수 없고, 몸에 해로운 가스가 무서워 가스 불에 성도들이 먹을 음식 만들기를 꺼려한다면 이것 역시 자기가 스스로 섬기지 않는 실업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천막 교회가 이젠 현대식 교회로 변모하면서 성도가 봉사할 일자리가 엄청 많아졌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으나 실제로 일하는 사람이 없어 교회 안에는 섬기지 않는 실업자로 가득 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마른자리에만 살 것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로 살아야만 노동의 가치를 알고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죄인들을 섬기려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낮아져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들을 기쁘게 잘 감당해야만 실업자가 아닌 섬기는 자로 헌신하게 되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믿는다.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3-08-2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1-3)
    애굽의 심장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출애굽에 대한 준비를 마친 모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일을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셔서 훈련 시키고 때가 되어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을 성취하시려고 움직이셨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상상도 못 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비방이었습니다. (출2:14)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비방 때문에 “일이 탄로되었도다”하고 합니다. 바로는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출2: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우리는 그 일을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2:11-12)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세계최강의 대국이요, 신의 위치에 있는 애굽의 왕족입니다. 그 제국의 왕자가 애굽 사람 하나 죽였다고 바로가 왕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설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음주운전이나 마약에 마취가 되어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의 위치에 있는 애굽의 왕자가 사람 한 명 죽였다고 사형시킨다면 이해가 됩니까? 그것도 절대 왕권시대에 말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바로가 죽이려 하니 미디안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모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1: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가 미디안으로 간 것이 “믿음으로”라고 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고 합니다. 모세는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세가 참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모세는 바로 지금이 최고의 타이밍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아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창조의 사역이 끝나자 바로 선악과 사건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기대가 무너져버린 것처럼 40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이제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원망과 비방으로 차질이 생겨버렸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참아야 했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참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이제 그 일이 탄로가 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탄로 난 그 일” “발각이 난 그 일”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한 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원망과 비방은 그 일을 탄로 나게 했습니다. 그 일을 발각 나게 했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모세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원망과 비방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출애굽의 역사를 40년 동안 지연시키게 했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은 신앙적입니다. 미리암의 가정이 어떤 가정입니까? 수백 년이라는 애굽에서 생활 가운데서도 “레위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출2:1) 이런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가진 집안입니다. 그러니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 정신에 대해 잘 모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막상 그 문제가 대두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들이 음주운전을 해도 아버지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 장로님께서 결혼기에 있는 딸에게 “네가 만약 불신 결혼을 하면 난 장로직을 사면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지도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미리암의 원망과 비방이 정당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조차도 정곡을 찔러오는 미리암의 지적에 입도 벙긋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리암이 어떤 의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주장하고 있는지 평소의 미리암을 아는 사람들은 미리암의 비방에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헷갈리지 않으십니다. 정확하게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생각까지도, 그 의도까지도 정확하게 다 들으시고 판단하십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 제사장은 말씀을 맡은 자부심으로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는 줄 알았지만 결국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입만 열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외치지만 그 속에 무슨 생각,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헷갈리지 않으시고, 속지 않으십니다. 아니 모세가 하려고 했던 “그 일”을 탄로나게 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그 일”을 40년 동안 지연시키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8-24
  • [박동철 장로] 광복78주년에 생각해본 이승만의 ‘기독교상등문명국가론’
    다시 떠오른 ‘이승만’의 기독교 구국론 광복 78주년을 맞았다. 올해 따라 지난 역사의 재조명이 시선을 끌고 있다. 바로 이승만의 빛나는 발자취이다. 뒤늦게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설립이 구체화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논란과 담론 속에서 대한민국 국가의 정체성이 정치적 견해에 따라 혼란이 있었다. 공과가 분명히 있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없이 역사가 흘러왔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이에 많은 출연 독지가들도 나타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잠시 대한민국 속 ‘이승만’의 많은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분명 공(功)과 과(過)가 많은 초대 대통령이다. 건국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이는 일단 논외로 한다. 오늘의 자유대한민국과 자유시장경제의 초석을 낳은 초대 대통령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였다. 머리가 천재로서 조지 워싱턴 프린스턴 하버드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많은 유명 정치인들을 마음대로 움직인 외교가였다. 이뿐이겠는가. 공적만 나열하기도 여백이 절대 부족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요 3.15 부정 선거의 당사자로 말로가 비참했다. 사실 국민들께 쫓겨나 하와이에서 쓸쓸히 90세로 생을 달리했다. 정치적인 사망선고까지 받았다. 완전히 잊혀져가는 나라를 세운 비운의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 한양으로 온다. 유학의 가정에서 한학을 공부했지만 배제학당에서 영어공부에 매료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이승만의 사상과 철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1899년 20대 때 만민회 활동을 하면서 고종 왕을 비판한 죄로 한성감옥에 들어간다. 이때 하나님 주신 절박함이 작동했다. 배제 학당에서 귀찮게만 들었던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열심히 성경을 읽었다. 이때 성경을 읽을 때 마다 마음이 편하여졌다고 전기에서 적고 있다. 성령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도서관을 세우고 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예수 구원의 말씀 전도를 했다고 한다. 5년 7개월 동안 옥중에서 책도 집필하면서 믿음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생명나무 같이 생긴 사상은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론’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강제 병합과 일정 시대로 들어가면서 이승만은 해외로 이곳 저곳에서 책을 집필하고 신문을 창간하기도 했다. 주옥 같은 저서 ‘한국교회핍박’이란 책을 쓰게 된다.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이승만의 애국 애족 하나님 사랑의 이념이요 사상 그리고 신앙이었다.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특별히 감리교 선교사들로부터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았다. 특히 일본 데라우치총독 암살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붙잡혔으나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나라 잃은 백성의 한숨에 많은 선각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뛰어들었다. 이승만은 특별히 하와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숯 굴을 만들어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실행하는 등 실제 기독교 국가 건설론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기독교 구국론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짧지만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역사학자 이덕주 교수가 밝힌 한국기독교사에 따르면 이승만의 기독교 국가 건설론의 키워드를 읽을 수 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를 통한 독립운동의 저간에 교회가 민족운동의 인사들을 대거 포용하고 교회에서 이들과 많은 토론을 해야 한다는 것. 둘째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을 우리는 신앙의 자율성으로 더욱 복음 전파에 매료한다. 그리고 교회서 많은 민족운동을 논함으로써 기독교 민족운동이 새로운 장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상등문명국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얼마나 담대하고 기묘한 생각인가. 이것이 해방과 함께 복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우린 지금 대한민국에 이승만 기독교상등문명국가를 만드는데 교회가 몸과 마음을 던져야한다는 강한 생각이 떠오른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어조로 들려지고 있다. 교회가 물질과 물량에 파묻혀 가고 있다. 죄악 위에 죄악이 덮여가고 있다. 공산사회주의 이념의 교회공격, 동성애 합법화, 마약 이단 도박 출산 결혼기피 등 등 인본주의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풍요 속에 진정한 복음은 빈곤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이승만의 부르짖는 소리부터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2023년 광복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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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4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3)
    감사 제목 감사가 식어지는 말세입니다. 감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감사보다 불평을 잘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천국은 감사가 넘치는 곳이고 지옥은 불평이 넘치는 곳입니다. 날마다 감사하면 세상에서도 천국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많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탄은 악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탄은 미움입니다. 선한 목자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불평하는 자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자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냐 불평이냐 감사를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하고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위험한 세상인데 하나님이 지켜주어 안전하다면 감사 제목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불평 제목만 찾아 불평합니다. 감사는 건강과 행복의 열쇠입니다. 감사는 긍정적인 언어이고 적극적인 삶입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가 행복하고 감사가 넘칩니다. 감사는 영육의 건강에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라는 인사를 잘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세 가지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감사는 인격이고 인격의 성숙이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시험에 넘어진 자 병든 자가 불평합니다. 불평은 삶을 불행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사도의 직분을 주어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자의 마지막을 해피앤딩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이 있었지만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게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을 때 감사하게 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감사 명령입니다.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의미는 모든 상황 가운데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힘들고 스트레스받고 고난의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이 유익이고 고난을 통해 배우게 되고 겸손해질 수 있기에 고난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는 왜 내가 고난당하는지 알 수 없는데 지나고 보면 고난이 유익이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를 방해하고 불평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욕심과 비교의식 시기 질투 열등의식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욕심 버리고 마음 비우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감사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 만큼 감사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불평합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감사기도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했습니다. 냉수 한잔 마시며 감사해야 합니다.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사업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절망의 환경에서 감사한 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로 예배드리고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감사로 찬송부르고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영감을 주십니다. 저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얻고 감사했습니다. 수많은 글을 썼는데 때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어 기록했는데 다시 그 글을 쓰라고 하면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이 힘들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남긴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교회에 감사 교회에 나아와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무조건 감사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할 때 사탄이 떠나게 됩니다. 불평은 사탄의 친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주의 종과의 만남 성도들과의 만남 만남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건강한 것, 병고침 받는 것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병을 고치고 우울증을 치유하는 최고의 약입니다.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욥은 망하고 나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힘이고 영성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믿음이 성장합니다. 감사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복 받고 쓰임 받은 비결은 다윗의 감사입니다.   역대상 29:13-14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즐겁게 헌금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역대상 29:27-28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더라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은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가정이 행복하고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감사가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감사는 절망과 스트레스를 이깁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인정 받고 사랑받습니다. 감사는 삶의 지혜요 처세술입니다. 감사하면서 일해야 삶이 행복합니다. 감사 제목도 많고 불평해야 할 제목도 많습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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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김성수 총장]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고하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삶의 실제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기독교인들은 노예 제도에 조직적으로 반대한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노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시장에서 노예를 구입했다. 나중에 7세기경에 프랑크족(서독과 프랑스를 지배한 게르만 민족)은 기독교 여왕인 바틸데(Bathilde)의 영향을 받아 역사상 최초로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 과정을 시작한 왕국이 되었다. 중세 중간까지 카톨릭 교회는 전쟁 배상금으로 잡힌 무슬림 포로를 제외하고 서유럽에서 노예 제도를 거의 폐지했다. 1200년대에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노예제도를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민족, 성별, 사회적 차별을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 내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 제국을 이교주의로 되돌리려 했던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황제는 극심한 기근 동안 “이 불경한 갈릴리인[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까지도 지원한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의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쨌든 죽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우선, 그들은 죽음은 자신들을 결국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교도들이 제시한 것과는 매우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남을 위해 행하는 희생적인 봉사에서 의미 있는 삶의 길을 찾았다. 이와 같은 믿음과 행함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은 큰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를 간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역병이 도시를 황폐화시켰을 때 이렇게 보고하였다:우리 형제들 대부분은 지극한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는데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굳게 잡고 두려움 없이 병자들을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고통을 짊어지고 병든 이웃들과 가까이 하면서 기꺼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과 함께 가장 즐겁게 죽기도 했습니다. 병자들을 돌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꺼이 자기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기본적인 간호조차도 사람들이 낫도록 돕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봉사로 인해 병자들의 생존율이 높아졌다. 로마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인들을 세대를 본받지 않는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로 만들었다. 그리고 로마와 같은 관용주의 사회에서 관용의 범위를 벗어난 비 순응주의자들이 치루어야 할 대가는 사형 선고였다. 주후 50년대 이후 기독교인들은 황제에게 분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체제 전복자들이고, 로마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라는 법적 주장에 따라 산발적으로 박해와 고문, 살해를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박해받는 기간 동안에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을 막론하고 가능한 한 고통스럽고, 비뚤어지고, 재미있도록 고안된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은 군중들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싸우지 않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학대에 비굴하거나 겁먹기를 거부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을 거스르는 복음의 능력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면에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 기독교인들에게서 죽음에 다가가는 자신감을 보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도 모질게 경멸받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목적과 자신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교 세계에서 기독교는 인기 없는 소수 종교로 남아 있었지만, 복음의 능력은 인색한 존경을 받으면서도 세상을 이기며 성장하는 생명의 종교로 만들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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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조희완 목사] 아벨의 신앙 (창4:1-8)
    국가 정상들이 다른 나라에 국빈 방문을 할 때 공식 행사로 만찬을 가지게 되는데, 국빈 방문 중에 첫 만찬행사는 대부분 대통령의 공관이나 그와 관련이 있는 장소에서 가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과거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 시절에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이나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찬을 가지지 않고, <시애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집에서 첫 만찬을 가졌습니다. <빌게이츠>는 국가 정상이거나 정치 지도자가 아니지만 세계적인 기업의 CEO이기 때문에 국가 외교의 매우 중요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시애틀>에 있는 <빌 게이츠>의 집은 시가로 약 1억 5천만 달러(약2천 억)가 나간다고 합니다. 1년 관리비가 백 만 불 이상 들어가고, 집을 돌보는 일꾼들이 약 300명에 이르고, 집안 모든 바닥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있어서 방문객의 위치를 15cm 이내로 추적할 수가 있고, 목욕탕의 물은 <빌 게이츠>가 들어오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서 적정한 온도로 가득 채워지고, 지하실에는 20석 규모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극장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의 규모를 보거나, 그가 경영하는 세계적인 기업의 규모를 볼 때 그는 세계적인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생존해 있는 인물 중에 최고의 부자입니다. 그는 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지도자는 아니지만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마이크로 소프트>사라는 IT제국을 건설하고 그 제국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 제일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계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VIP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VIP들을 되어야 하는데 그가 바로 <아벨>입니다. 첫째로, 그는 모범적인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창4:4) 둘째로, 그는 가장먼저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창4:8) 셋째로, 그는 의인으로 기억된 사람이었습니다.(히11:4)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아벨의 신앙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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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민11:1-2)
    민수기 11장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원망이 시작됩니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한 말이 악하고, 원망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만한 “악한 말로 원망”이었습니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들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보면, 핏대를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리치면서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나 생각은 고사하고 지금 자기 입에서 내뱉는 말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진영 끝을 사르고, 모세가 기도하여 불이 꺼집니다. 이어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의 탐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휘둘려 또 원망합니다. 이번에 울고불고 난리를 부립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왜 날 낳았냐고!)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고불고 달래고, 울고불고 달래고 한 모양입니다. 급기야 원망의 코로나는 온 백성을 감염시켜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이라고 아주 재미있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모세도 속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속 상하는 것에 연연할 상황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악한 말로 원망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불이 나타났다면, 지금 울고불고 난리가 난 상황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살이 날 상황, 끝장날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선 모세는 매우 불길한 결과를 짐작하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기분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새끼가 애를 먹여도 애를 먹이면 먹일수록,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모세는 이 난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모세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장의 무기를 꺼냅니다. 이전 우리 어머니들이 엄하신 아버지에게 내놓던 비장의 카드와 같습니다. 애먹이는 아들에 대해 더 이상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어머니는 마지막 수를 내놓습니다. “내 새끼요? 당신 새끼지! 내 씨요? 당신 씨지! 저놈이 내 성을 따랐소? 당신 성을 따랐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소! 그 전에 날 먼저 죽이고 맘대로 하소!” 모세는 이런 어머니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목을 내놓습니다. (민11:15)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어머니가 거품을 물고 이 정도 나오면 아무리 엄한 아버지라도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팽개치고선 괜히 죄 없는 문을 부서지라 쾅! 닫고 나가버립니다. 진노가 심히 크셨던 하나님께서도 똑같으십니다. “알았다, 몰랐다, 잘했다, 못했다” 언급조차 없으십니다. 앞뒤 문맥에도 맞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생뚱맞게 모세를 도와줄, 아니 모세를 살려줄 70명의 장로를 세우십니다. (민11:16-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배필의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했습니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돕는 배필의 사명은 살리는 일입니다.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정말로 죽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참 순진하신 분이십니다. 속내가 너무도 다 들여다보이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진노가 하늘에 닿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는 쩔쩔매시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분입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십니다. 심판하셔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사랑이 확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실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때, 믿음의 족장들이, 선지자들이, 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목사들의 사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모세를 보시고 일언반구도, 가타부타도 없으시고 상황을 종료해 버리시는 속이 다 들여다보이시는 너무도 순진하시고 한량없이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들으신다는 말씀은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좀 알아달라는 하나님의 애닯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납니다. 목사의 말을 들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면, 그것은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한다면 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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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남편이 아내에게(2)/아내, 여편네, 마누라
    I. 서언(序言) 어떤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 ‘여편네’라고 부르는 것은 남편의 옆에 있기 때문에 ‘옆편네’라고 한 것이 변하여 ‘여편네’가 된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용어해설은 다소 무리가 있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어원 분석에서 논하기로 하고, 전체적인 면으로 본다면 우리말의 호칭과 지칭어는 너무 다양하여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앞에서 논한 대로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기고들에서 두 번이나 논한 적이 있었다. 다시 간략하게 논하면, 신혼부부의 경우에 배우자를 서로 부르는 말,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각각 다른 경우들이 많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를 소개 할 때 부르는 말 등도 사람과 환경에 따라서 다른 경우들이 많다. 본 호에서는 이런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바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그 용어의 어원들을 살펴보고 그 뜻의 정확성을 논하고자 한다. II. 남편이 아내를 향한 호칭(呼稱)어와 지칭(指稱)어(2) 1. 아내 : 7~8년 전 예장 통합교단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향한 지칭어를‘아내’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이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는 남편은 주로 밖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은 반면 아내는 집안에서 활동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아내’, ‘여편네’, ‘안 사람’, ‘집사람’, ‘내자’등의 많은 지칭어들이 생겨졌다고 보고 있다. 이는 아내를 높여 부르는 ‘부인’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부(婦)자를 분석하면, 아내 ‘부(婦)’자로서‘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집안 청소를 하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아내’라는 말은 활동 범위가 집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이를 좀 더 어원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내는 원래 ‘안해’라는 말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또한 안은 안‘내(內)’자 이고 ‘해’는 의존 명사로서 소유를 뜻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 유래를 보면 신라시대의 ‘처용가’에서 “둘은 내 해엇이고, 둘은 뉘 해언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의 ‘해’는 ‘내 것’이란 의미였다. 16세기 이전에도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에 ‘네 것이다.’란 말을 ‘니 해라’고 하는 말로 아직 남아 있고, 북한에서는 지금도 아내를 ‘안해’로 표기하고 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집 안에서 일하는 나의 사람’, ‘가정주부’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 같은 부부가 같이 일하거나 양성평등의 시대에서는 맞지 않는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에 있어서는 그래도 가장 무난한 보편적인 지칭어는 ‘아내’라고 할 수 있다. 2. 여편네 :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 ‘여편네’하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로서 ‘여편(女便)’에다 ‘집단’을 뜻하는 접미사 ‘-네’를 붙인 것이다.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앞서 논한대로 “남편 옆에 있기 때문에 여편네”가 된 것은 아니다. 비속어이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은 표현이다. 3. 마누라 : 앞의 여편네와 마찬가지로 마누라도 주로 아내를 낮추어 지칭할 때 하는 비속어이다. 하지만 그 유래를 본다면 비속어는 아니다. 원래 이 말은 고려후기 몽고의 ‘마노라’라는 말에서 조선시대에는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등으로 ‘마마’와 같이 사용하던 극존칭이었다. 따라서 이는 낮춤말이 아닌 ‘노비가 상전을 부르는 칭호’로나 ‘신하가 임금이나 왕후에게 가장 높여 부르는 극존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내에게만 사용되는 비속어로 취급받고 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낮춤말과 비속어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본대로 가장 가까운 부부간의 호칭어와 지칭어 하나도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용어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아내란 정상적인 지칭은 좋으나 잘 모르거나 생각 없이 여편네, 마누라 등의 비속어를 사용함으로서 부부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들도 흔히 발생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만 보더라도 부부간에 적절한 바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는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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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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