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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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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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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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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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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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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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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애착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에게는 늑대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퍼런 칼날에 짐승의 붉은 피를 묻혀 꽁꽁 얼게 합니다. 그리고 늑대가 서식하는 곳으로 가서 칼날은 밖으로 나오게 한 채 땅바닥에 파묻습니다. 그러면 이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칼날을 정신없이 핥기 시작합니다. 북극은 기온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혓바닥이 둔해져서 자기가 핥고 있는 것이 예리한 칼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칼을 핥다가 시간이 지나면 늑대의 혀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그 피가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인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그것을 핥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늑대는 피를 너무 흘려서 탈진 상태에 빠져서 죽고 맙니다. 칼날에 묻은 약간의 피를 욕심내어서 그것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다가 스스로의 목숨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수도를 하며 세상에 대한 애착을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를 사로잡고서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는 수도원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원장님, 제가 속세를 떠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이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수도원 원장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를 데리고 수도원 뒤뜰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습니다. 원장은 그 가운데 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자기의 양팔로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원장은 자기의 몸을 몇 번 뒤척뒤척하더니 그 젊은이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나무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서는 놓아주지를 않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나무에서 나를 좀 떼어주게나.” 젊은이는 원장의 그 말에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더 다급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나무가 나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계속된 원장의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서 수도원 원장을 그 나무에서 떼어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원장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원장은 더 안간힘을 쓰면서 나무를 놓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그 손을 놓으세요! 지금 나무가 원장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장님이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수도원 원장은 그제야 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깨닫겠는가? 세상이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자네가 세상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 마음속의 세상을 향한 애착이 자네를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독자 여러분, 세상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나를 붙들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서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욕심으로 인해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동행하고 있는 세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그것을 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성경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끈질기게 이어온 세상에 대한 애착을 단호히 끊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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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신재철 목사] 고맙다 조교 동생
    28세, 유부남, 아내는 임신 6개월 문제 많은 나는 그렇게 군인이 되었다. 입소대대에서 보내는 첫날.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왜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 밤 혼자 누워있을 아내 생각에 더 마음이 괴롭다. 내 괴로움과 무관하게 소지품은 택배로 보내지고, 빈 가방에는 보급품이라 불리는 다양한 녀석들이 채워졌다. 이거 없어지면 죽는다는 소리만 반복된다. 혹시나 기대했던 간단한 신체검사는 나의 건강을 확인시켜줬고 동기들과 같은 복장으로 줄을 지어 이동했다. 커다란 운동장에 멈췄을 때 들려온 한 사람의 고함에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여기는 논산훈련소다. 학교 운동장 같았지만 우리는 체육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체육 선생님 같았지만 보다 더 고압적이다. 4월의 논산은 딸기향 가득했지만 그다지 달콤하진 않을 듯하다. 고역이다. 밥도, 부식도 남기면 안 된다. 동기들은 컵라면 하나가 부족하다며 난리인데 나는 국물 다 먹기 힘들어서 난리다. 모든 훈련이 행군 같다. 사격을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수류탄 한 발을 던지기 위해서, 공포스러운 가스를 마시러 가기 위해서, 우린 거추장스러운 단독군장 차림으로 많이도 걸어야 했다. 물론, 진짜 행군 훈련을 하고서는 지금까지 교육장 이동은 산책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너무 아파요.” 신체적 한계와 스트레스로 병이 왔다. 심한 몸살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조교에게 상태를 보고한다. 간단히 확인 후 의무대로 이동. 하지만 훈련병은 아파도 혼자 이동이 불가하다. 인솔 조교가 붙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본 것과 다르게 군의관은 친절했고 내게 수액을 놓아주었다. 일단 누워서 천천히 맞고 쉬라는 명령(?)을 듣고 잠시 눈을 붙인다. “96번 훈련병, 일어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교가 옆에서 나를 깨운다. 링거는 다 들어갔고 시간은 벌써 밤 12시가 되어간다. 혼자 복귀할 수 없는 훈련병이었기에 또 조교가 붙었다. 하... 불편하다. 전역이 얼마 안 남았다고 들은 병장 조교다. 그리고 늘 무표정에 성대를 꽉 누르는 듯한 소리로 호통을 치는 조교. 분명 카리스마는 있다. 그리고 잘생겼다. 밖에서 만났으면 호감이 갔을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불편하다. 그리고 아직은 나이 어린 청년이 욕 비슷하게 들리는 반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렇게 나는 생활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몸이 많이 가벼워져서 걸음은 가볍다. 그런데 복귀 코스가 이상하다. 아무리 내게 어색한 길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길은 아니다. 점점 어두운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심지어 연병장을 가로질러 뭐가 있을지도 모를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아, 갈구는 거 아냐?” 말년 병장 귀찮게 한다고 으슥한 곳에서 욕먹을까 긴장이 된다. 나이 먹고 군대 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눈치 보고 있는 내가 너무 서글프다. “형수님한테 전화해.” 연병장을 지나 도착한 구석진 곳. 조명도 없는 그곳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조교 모자를 벗어 내게 푹 눌러 씌운다. 담배 한 대 피고 올테니 여유 있게 통화하라는 말과 함께 더 어두운 곳으로 조교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망설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에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늦은 시간 훈련소에 있는 남편의 전화에 아내는 많이 놀라는 눈치다. 지금 아프다는 이야기, 너무 고단하다는 이야기를 다 전하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난다. “왜 울어... 힘들어?” 아내의 눈물 삼킨 말에 나는 더 눈물이 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눈치가 보였을까? 그리 긴 통화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공중전화 부스 밖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한참 병장 조교는 돌아왔다. 왜 벌써 끊었냐는 말에 딱히 할말은 없다. “형, 나 담달에 전역이야. 시간은 가더라. 아프지 말고 무사히 전역해.” 다시 가로지르는 연병장은 따스했다. ‘유부남, 고령자(?), 아내가 임신 중’ 나의 이력을 알고는 의무대에서 복귀하는 인솔을 자처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잘생기고 무뚝뚝했던 성현준 분대장,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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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황권철 목사] 도마(Thomas Behind Stories)-의심의 사도
    도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이다. 신약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네 번 언급이 되는데 그 중에 도마는 항상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마10:2-4; 막3:16-19; 눅6:14-16; 행1:13). 요한복음에서 도마는 세 번 언급 되었다(요11:16, 20:24, 21:2). 그 뒤에 디두모(Didymus)라는 헬라 이름이 따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디두모인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란 아람어로 ‘트오마’이고, 히브리어로는 ‘트옴’인데 이것은 쌍둥이라는 뜻의 별명이다. 이 사도의 성격은 요한복음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주님이 요단강에서 유대로 돌아오시기를 결심하셨을 때 나사로 죽음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때 도마는 예수께 모든 것을 바치고 따르려고 동료 제자들에게 함께 죽음에 동참하자고 강렬한 충성과 용기 있는 결단으로 말했다(요11:7, 8, 16). 그는 주님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요14:5).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고서야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요20:24-28). 우둔하나 충실한 도마 그는 주후 27-90년경에 활동했다. 아우그스투스가 죽은 후 로마제국은 티베리우스(AD 14-37), 칼리쿨라(AD 37-41), 글라디우스 그리고 네로(AD 54-68)같은 황제들이 다스렸다. 아우쿠스투스 황제 이후 최고의 황제는 글라우디우스(Claudius)였다. 도마는 갈릴리 출신의 제자였으며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둔한 제자로 나타나 있다(요14:1-5).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여 의심 많은 제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요14:1-5). 복음전파 사역을 위해 모든것을 헌신했다.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현장에서 그가 다시 살아 날 것을 통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으나 도마는 그 의미도 모른체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제자로서의 희생과 용기를 드러내 보이는 우둔한 부분을 보여 주고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수난 때도 자신의 우둔함을 드러내 보였다(요14:1-5).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고 하였다(요14:4).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고 그 길은 십자가에 못 박힘의 수치와 부활의 영광을 통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길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고백하며 알려 주셨다. 그러나 도마는 그 길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삽나이까?” 라고 묻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도 도마의 몰이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도마 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제자들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라도 아는 척 하며 말없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순수함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볼 때 지각이 없는 우둔한 사람같이 보이기는 하나 그의 질문은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이었다. 이로 인해 의심 많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는 했으나 이것이 도마의 약점이자 강점이었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표출했던 정직한 심성을 소유한 자였다. 의심자로 낙인찍힌 도마 동료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마침 그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 후일 동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도마는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구약의 예언을 유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만져 확인 해 보고서야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수 있었다. 팔일 후 주님은 도마가 제자들과 집안에 있을 때 다시 나타나셨다(요20:26). 그때 주님은 도마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며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도마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며 바른 신앙고백을 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8). 이 공개적인 고백을 그가 불신하고 의심했던 자들이 다 듣게 되었다. 이 같은 부활신앙을 경험한 것이 도마로 하여금 이방 선교로 나아갈 동기 부여가 되었다. 도마 하면 의심 많은 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의심은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더 잘 믿고 더 확실히 믿으려고 가진 의심이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의 참된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도 도마와 같은 자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도마처럼 꼭 손으로 그 못자국과 발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만져 보아야 믿겠다는 것과 같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가운데 불신하는 자들과 도마와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정직한 고백의 차이다. 도마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정직한 고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같이 우리도 도마처럼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확실한 고백을 통해 약속한 말씀위에 굳게 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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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4)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말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주의자가 많은 시대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이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이기심은 무지요, 불신앙이요, 어리석음입니다. 이기주의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좋은 리더는 남을 배려하고 헌신과 희생, 사랑이 넘치는 리더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어리석음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성숙한 자요 지혜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욕심 부리는 자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의 마음 가진 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섬기면 좋은 관계가 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면 누구나 다 싫어하고 관계가 깨지며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인정받고 신뢰받는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의 삶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유익하게 해주는 삶 전체이셨습니다. 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희생 헌신하는 자가 어리석은 자가 아니고 지혜자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분노를 다스립니다. 화내고 성내다가 관계가 깨집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성내지 않습니다. 성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 한번 화내고 성내면 이미지가 나빠지고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리더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립니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의의 분노, 죄가 없는 분노, 거룩한 분노,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인간의 분노는 죄성을 가진 분노입니다. 미움의 마음을 가지면 혈기 부리고 분노하게 됩니다. 분노가 커지면 크게 싸우게 되고 문제가 커집니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살인하기도 합니다. 사랑은 삶은 문제, 사고를 예방합니다. 미움은 분쟁을 일으키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미움의 마음을 가지면 싸우게 되고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기에 성내지 않고 혈기 부리지 않게 됩니다. 사랑은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힘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상대방에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선한 마음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날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리더는 사랑이 많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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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2-11-23
  • [조희완 목사] 사모할 대상 (시19:7-14)
    어쩌다가 신세가 처량하게 된 사람을 가리켜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말을 합니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담겨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1개 대대규모의 인민군이 필사적으로 우리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낙동강 도하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엔군 전투기에서 네이팜탄을 퍼부어서 적진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아군 중에 한 대대장이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바라보면서 너무 신이 나서 “야! 낙동강에 오리 알이 떨어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물론 낙동강을 건너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던 인민군들도 다 몰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낙동강을 건너려다가 죽음을 당한 인민군들을 조롱하는 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어서는 안 될 대상을 믿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섬기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일생 다가도록 사랑하고 섬겨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헛된 우상과는 달리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특별히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시19:9-10)(벧전2:2) 둘째는, 성전과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시84:1-4) 셋째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히11:16) 사모할 것을 더욱 사모하므로 멋진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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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1
    I. 서언(序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고 했던가?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겨야 되는 날이 가까웠고,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선 이번 주간에 신년 달력을 배포했다. 이런 즈음에 문득 달력이란 용어는 어떤 역사적인 유래와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고,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제정되었는지, 또한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졌다. 필자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자료를 수집해 오기도 했다. 이에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로 나누어 이에 대한 유래와 용어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이를 시도하는 이유는 이런 달과 연호와 요일의 명칭이 기독교식이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기에 고칠 수는 없으나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달력과 기독교적 연호 사용의 유래 1. 달력의 유래 :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흥미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라는 뜻의 ‘칼렌다리움(calendarium)’과 고대 로마에서 매월 초하루의 날짜를 ‘calend’라고 한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는 월 초를 매우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年) 월(月) 일(日)은 각각 독립된 주기이지만, 이런 각 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이를 주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서(曆書)는 달의 규칙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태음력(太陰曆)이었기 때문에 이를 달력(月曆)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역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토대로 한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쥴리아스 시저(Caius Julius Caesar)가 BC 45년에 그곳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양력역법을 보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율리우스력(Julius Calendar)이라 한다. 이는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춘 것이었는데, 16세기까지 천년 이상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오차가 생겨졌고, 이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새롭게 개정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를 그레고리우스력(Gregorius Calender)이라 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B.C 4000년 경 환웅이 달력을 만들었고, 단군 4년(B.C 2096년)에 60갑자를 활용하여 책력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은 앞서 밝힌 대로 거의 모든 세계와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적 연호(A.D) 사용의 유래 : ‘A.D’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때부터 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세계 모든 나라들이 사용하는 연호로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연호의 사용은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되고 있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논한 대로 위의 용어들과 유래는 주전(B.C)와 주후(A.D)를 제외하고는 반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용어도 아니다. 다음호부터 논할 12개월의 월별 이름과 한 주간 7일의 요일 별 용어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하지만 서론에서 논한 대로 이런 용어들은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고, 또한 심각한 반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계속 논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B.C와 A.D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디 이런 연호를 널리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적 언어문화를 창출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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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김성수 총장] 당신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몇 주 전에 플로리다(Florida)주에서 열린 미국 학위인증기구인 TRACS(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tz) 박사의 “섬김의 가르침”(Servant Teaching)이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와 목회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이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섬기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우리의 일상의 사역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슐츠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보기를 바라며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면서 매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모든 수업을 마친다.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업에 올 때마다 나는 영광스럽고 축복받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 역시 섬기는 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섬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사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과 우리의 일을 멋진 선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학문의 세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면역성을 구축하고 있다. 감사는 기독교 교육학의 책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대신 우리에게 부과된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일이 선물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모험이 되기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 학생들, 우리를 고용한 기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능력, 우리를 도와주는 교직원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사와 저자, 멘토,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자. 심지어는 실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보자.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약적 사랑에 접 붙여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4:19)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우리 자신이 기쁨이 없는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것을 감지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과 비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들이 배우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가르치는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사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그날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가오는 시간의 집안일과 스트레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도는 송영 없는 단순한 간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캠퍼스 입구 표지판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시킨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건물과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일터 그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준비되어 있다. 캠퍼스 간판을 보면 나의 마음은 설레어지고 봉사를 위한 준비로 고양된다. 나는 집 서재에 ‘감사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코르크 판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 성경 말씀, 사진, 아이디어, 찬송가, 티켓,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켜 주는 다른 여러 기념 조각들을 붙여 놓는다.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용서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는 ‘감사 게시판’ 아래 소파에서 낮잠을 자며 게시판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나는 서재를 나설 때마다 잘 볼 수 있는 벽에 감사 게시판을 걸어 두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퇴근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삶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감사 게시판은 내가연구실을 나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 방을 나선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주는 이른바 나를 향한일종의 축복 기도의 역할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더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Clairvaux의 Bernard(1090-1153)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수록 사랑에 대한 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감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배은망덕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감사는 섬김의 가르침을 키워준다. 비밀 공식은 없다. 우리의 감사는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4:4). 구속주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감사가 부족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고 있다(시116:12). 우리는 섬기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모든 좋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응답한다. 감사하는 섬김의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 사항은 무엇이며, 당신의 감사 게시판에는 어떤 항목을 붙여 놓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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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박동철 장로] 예수의 경제학, 공자의 경제학 미국과 중국의 ‘화폐전쟁’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國富論)은 오늘날 세계경제를 이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교과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장로교 교회 집사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신앙인이었다.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제학자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의 기초는 재화와 노동을 통해 생산과 이윤을 냄으로써 국가의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원리다. 노동이 철저하게 자본과 결합해야 최고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경제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국부론의 이론은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다섯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가꾸고 번영해야 국가의 개념이 생긴다. 장사(상업)와 노동의 가치관를 말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일명 ‘예수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경제 이론을 내었지만 독일 출신 칼 마르크스가 자본보다 노동의 가치가 더욱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자본론을 주장했다. 자본이 노동의 이익을 착취하면 안 되는 원리의 이상론의 사회주의 경제학이 더욱 발전하며 세계 근대사회를 이끌어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학문적으로도 경쟁을 하면서 수정자본주의 수정사회주의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경제학의 두 산맥은 결국 이념화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소련을 중심한 동구권으로 근대 세계냉전시대를 지내왔다. 소련이 공산 사회주의에서 실패하고 러시아로 잔존하게 되고 이제 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로 맹주(孟主)가 되면서 새로운 세계 패권경쟁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변형된 면이 있다.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 혁명 후 거장 등소평(鄧小平)의 시장중심의 중국경제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사상은 의(義) 에 바탕을 두고 이(利)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를 두고 중국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인자는 밥을 먹을 때도 인(仁)이 있어야 한다.”는 이념의 바탕에서 중국식 사회주의가 발전해왔다. ‘공자의 경제학’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공산당이 모든 국가 경제를 통제한다. 지난 1978년 등소평의 개방 중심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에 눈을 뜨면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데 노력해 왔다. 2001년 중국은 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화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세계화의 호혜적 무역 관계에 힘입어 14억 인구의 내공으로 개도국이면서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 미국은 그동안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중국을 민주주의 시장경제국가로 변화할 것을 유도해왔다. 그리고 무역 환경에서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의 성장이 미국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키면서 미국과의 사실상 화폐전쟁에 돌입했다. 세계 무역에서 경제권을 주도하는 기축통화에도 중국이 위안화를 내세우려 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 간 요즘 오가는 말들이 거칠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미국을 따를 수 없다. 반도체 등 원천기술에는 중국이 먼 거리에 있다. 중국은 희토류등 원자재 공급에 주도권이 있다. 미국은 중국의 화폐도전에 요즘 ‘킹달러’(King dollar)게임으로 중국의 도전에 거리를 멀리하려고 한다. 바로 화폐 전쟁의 치열함이다. 중국은 더욱 중국식 사회주의를 위해 시진핑의 영구 집권을 굳히고 있다. 미국·중국의 경제 전쟁의 화폐 게임이 본격화되었다. 복음의 사명자 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진핑의 중국은 공산 사회주의의 영구 집권 전체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입김을 받은 자유시장 원리의 경제구조가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탄압에 더욱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다. ‘공자의 경제학’은 커녕 ‘시진핑의 경제학’은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까. 기우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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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이정은 사모]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제가 목사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순서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음'이 첫 번째이고 '불의'가 두 번째입니다. 이 순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실수들이 낳은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 - 다윈, 헉슬리, 스펜서...복음의 어그러진 사상가들, 그 추종자들 또한 신앙의 확신이 없어 그들을 마땅히 책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메세지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둔 소심한 교회의 지도자들 - 우리는 그들을 숭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가 들어갈 때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 축제, 동성애 차별금지법, 인간복제, 트랜스젠더, 그들의 인공 자궁이식, 할로윈파티, 여성목사안수...등등 문제는 “왜 이런 것이 시대마다 계속 되어져 나오고 목소리가 커져갈까? 왜 그리스로인들 마저 어정쩡한 모습일까?”입니다. 가만 살펴보면 어떤 이들이,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중에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을 실제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아도, 성경속에 너무나 훌륭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경건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경건을 버리는 즉시 불의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법을 내세우지만 성경은 죄를 다룹니다. 세상이 죄의 개념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죄의 개념을 지워나가며 병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점점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기준을 찾습니까? 하나님도 몰아내고, 십계명도 몰아내면 대체 무엇으로 기준을 삼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의 의견이 기준이라는 겁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일이 곧 옳은 일임을 믿으라고 아주 진지하게 가르치며 반드시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쾌락주의자들(Epicurianism)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대신 전반적으로 효과가 있는가를 묻자는 공리주의자들(Utilitarianism), 여기에 더나아가 신학적 공리주의 교리는 “인간의 행동이 순전히 행복 추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를 낳은 영국의 빅토리아인들이 광적으로 숭배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반대사상을 가진 자였지만 그렇다고 유신론자라고도 할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저 그것이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공리주의를 나름 수정한것이 편의주의(Opportunism)인데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주의이고,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해야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바람직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대중적인 견해로 자리잡아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해서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인기 있는 프레임입니다. 이 편의주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면 “힘이 곧 정의다” “내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파시즘(Facism)의 철학이고 알다시피 여기서 아돌프 히틀러가 나왔습니다. 그는 편의주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가 따른 철학은 편의주의였고 편의주의는 파시즘의 철학입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고의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를 국가의 합법적 수단으로 옹호하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훈육, 권징(discipline)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그에 따른 벌(punishment)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결국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기본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버린 탓에 '도덕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순간 각자 다른 기준을 갖게될 뿐만 아니라 공적인 기준 또한 바뀐다는 것입니다. 1957년 9월 영국의 '동성애 및 매춘 위원회'에서 제출한 울펜덴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있습니다. 그것의 중대한 논지는 “항상 그 시대 사람들 다수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존 밀턴의 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문제는 세상이 율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해온 복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은 설교하지마라,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말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만 하라” “하지 말라”라고 금하는 대신 "이렇게 하는 편이 훌륭하지 않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좋지 않겠는가?”라고 귄.하.라.는 겁니다. 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한.테.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짓입니다. 정죄를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결국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호소를 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땅의 많은 성도(장로, 권사, 집사, 일반 성도)가 이 땅의 많은 목사,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만 허나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음’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질서가 있고 국민이 행복하고, 정부가 원하고, 편하게 목회하고 등등...그래서 동성애도 차별금지법도 여성안수도 더한 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님들도 분명 알 것이라 여깁니다. 궁극적으로 평화주의는 이단입니다. 평화주의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정쩡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행동을 기대합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다툼과 분쟁, 전쟁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람들이 은혜아래 들어 올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13:4) 기독교로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짓 이상주의에 현혹되지 않도록 목사님들은 저희들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아니 성경 어느 책을 대하든 던지는 질문은 “이 복음서는, 이 말씀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입니다. 수많은 박해와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해있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심리치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는 깃발을 든 군대로써 말씀 기록자는 일반적인 위로를 건네지도, 호소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가.르.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이가 없으면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9:5, 26:14)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지 말라는 것, 하나님은 반드시 법을 집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입을 가르쳐 주십시오. 복음의 위로는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사역자님들의 주된 임무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를 원하는 상냥한 사람들에게 한 스푼의 설탕을 맛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께 이끌어 가는데 있습니다.(잠18:24) 말씀만 말씀하여 주옵소서. 말씀만 가르쳐 주옵소서 제발. 저희들이 듣겠나이다. 피렌체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이들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느끼는 것들은 너무 많지만 그 중에 특히 르네상스의 꽃으로 불리는 피렌체의 중심지에서 눈만 뜨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와 수많은 아이콘들과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상끝날까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태를 드러내는 두오모 대성당을 바라보며 장엄하고 웅장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던 그 옛날의 대로마제국을 상상해보며 과연 저들 속에 하나님은 계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헬라인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나무에 달려 죽는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를 알지만 선생으로 존경하기는 하지만 영접하지는 않음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정은 사모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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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2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3)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의 하나님은 겸손하십니다. 모든 것을 가진, 전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겸손하십니다. 교만이 없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교만하지 않으셨습니다. 교만한 자를 책망하신 예수님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우유부단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자, 교만한 자는 말씀으로 책망하고 충고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고 충고해야 합니다.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사랑이 없고 미움으로 가득 찬 사람이 교만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자는 교만을 버리고 언제나 겸손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언제나 겸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사랑의 리더는 교만을 멀리하고 언제나 겸손합니다. 교만하면 관계가 깨지고 겸손하면 관계가 세워집니다. 교만은 미움이요 어리석음입니다. 겸손은 사랑이요 지혜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는 자는 사랑 받고 축복받게 됩니다.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 겸손하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사랑하면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면 함부로 행동하고 예의가 없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이 있으면 예의가 있습니다. 무례하지 않고 예의가 있어야 관계가 좋아집니다. 무례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좋은 리더는 사랑의 마음으로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함은 질서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질서를 귀히 여기고 질서를 지킵니다. 리더가 질서가 없으면 리더십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가까운 관계에서도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무례히 행하다가 상처 주고 관계가 깨집니다. 가정에서의 가족관계, 친한 친구 관계에서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부모, 자녀, 부부관계에서도 무례하게 함부로 행동하다가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무례한 말, 행동이 쌓이면 폭발하게 됩니다. 사랑은 행동이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람이 말하는 내용, 행동을 지켜봅니다. 무례한 말, 행동을 하게 되면 인간관계는 순간 깨지게 됩니다. 관계가 아슬 아슬 합니다. 무례한 삶이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하면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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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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