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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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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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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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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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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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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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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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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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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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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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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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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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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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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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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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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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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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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1)
- 여호와 샬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저 역시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었던 미주초청 찬양집회를 다녀오게 되었고 그 짧지 않은 여정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별빛교회가 어떤 모습으로든지 신곡리를 섬기고 또한 출석하는 15명의 청소년들의 꿈과 소망을 키워 나가기 위해 교회 1층을 영업허가를 내어서 갤러리 카페로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몇 해 전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된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 협동목회를 하시는 김춘곤 목사님과 서경훈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의 동역자들로 힘을 나누고 지내다가 그 교회에서 선교를 하는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배형근 목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면서 과테말라 현지 청년들을 밀양으로 농업교육과 취업을 위해 이런 저런 절차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춘곤 목사님의 밀양 방문을 통해서 밀양 시장님과 만나게 되고 좀 더 구체적인 일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들이 점점 만들어 지는 가운데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이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 선교를 오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아틀란타에서 연락이 오기를 저를 초청해서 부흥회와 문화선교에 관한 일들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일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지난 6월 10일 인천을 통해 아틀란타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기 전 갤러리 카페를 오픈 하려고 했던 저의 계획은 밀양에 큰 불이 나는 바람에 오픈식도 못하고 그냥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갑갑함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니 정말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와 찬양 준비로 마음을 가다듬고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처음엔 아틀란타와 과테말라만 가려고 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오겠나 싶어서 일정을 한 주간 더 늘려서 나오는 길은 LA를 통해서 나오려고 했고 그 일정을 통해 주께서 인도하심을 느끼고 온 시간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6월 10일(금) 아틀란타에 도착 후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마다 예배 찬양으로 영광 올려 드리며 걸어갔습니다.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주일 일정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아틀란타였기에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맘 먹고 기도하며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도착 후 첫 주일, 한인교회인 주은혜교회(강윤구 목사)에서 1부 찬양과 2부 땐 미국인교회인 Lord of Life Lutheran Church에서 특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첫 사역이었습니다. 미국인 교회에서 “생명의 강물”을 부르게 되었는데, 한국말도 모르시는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찬양 속으로 빠져 드셔서 순간적으로 엄청 놀란 시간이었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난 뒤에도 다들 오셔서 눈시울을 붉히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순간을 누리게 되었으며 가기 전 준비한 USB음반이 있었는데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음반을 사주시고 축복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은혜의 시간을 누리고 15일 수요일 양로원 데이케어 사역이 진행 되었습니다. 이민 가신 어르신들께서 아침에 오셔서 오후까지 지내시는 센터에서 예배와 미니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고국에서 왔다고 다들 너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마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르신들과 짧은 만남의 시간도 나누게 되었는데 모두가 하시는 말씀이 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은 정말 오시겠다는 말씀 이전에 고국을 그만큼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저 또한 남은 시간들을 더욱 더 봉사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저 하늘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7일(금) 선한 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선교를 온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과 아틀란타 프라미스교회에서 금요기도회로 섬겼습니다. 과테말라 단기선교팀의 오카리나 연주와 저의 찬양간증집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프라미스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안식월이라 뵙지는 못했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의 프라미스교회는 참으로 따뜻한 교회임을 느끼고 왔습니다. 또한 프라미스교회를 섬기시는 집사님 부부를 만나서 고국의 청년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라는 말씀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사님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한 후 열심을 다해서 살아가시면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향한 남다른 마음이 있으셔서 저에게 고마운 충고를 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별빛교회 청소년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제대로 잘 준비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비전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18일(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그리고 주일 오전과 오후 총 세 번의 집회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주제를 가지고 은혜 가운데 모든 집회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펜데믹 때문에 성가대가 모이지도 못하고 주일 예배 시 한 번도 찬양의 시간을 못했는데 이 번에 제가 인도한 부흥회에 아름다운 하모니로 성가대가 2년여 만에 예배 때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시더군요. 참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집을 숙소로 준비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 이 장로님과 집사님,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장로님 댁에서 지내면서 주님은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셨다고 하셨는데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편한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주일이 지나고 과테말라로 떠나기 전날 급작스럽게 또 다른 데이케어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기쁨으로 찾아뵙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르신들을 위해 찬양과 간증을 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치고 그 어르신들께서 저에게 찾아 오셔서 두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고국에 가게 되면 꼭 찾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갔던 센터처럼 그 어르신들의 마음엔 고국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셨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다가오신 백발의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실은 제가 목사 사모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작년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천국 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빌려오신 헌금을 봉투에 담으셔서 “고국에 돌아가면 꼭 좋은 곳에 사용해 주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사모님의 사랑의 마음을 신곡리 어르신들과 별빛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굳게 맘을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과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태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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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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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렌탈(rental) 문화 시대의 허(虛)와 실(實)
- 지금 시대는 렌탈(rental)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는 내 것, 내 주택, 내 땅이 있어야 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빌려서 사용하는 렌탈의 시대가 도래했다. 스마트폰 자동차,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복사기, 침대, 아이들 장난감까지 실용 제품들은 거의 다 렌탈 가능이라고 보면 된다. 왜 렌탈을 원하는 것일까? 한 번에 목돈을 투자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에는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 제품에 금방 싫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심리 특성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더 좋은 것에 대한 욕구가 발동하며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품을 렌탈하는 것이다. 소유보다는 공유가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석호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욕구와 현실의 괴리가 렌탈(rental) 풍조로 발전한 것” 이라고 하였다. 렌탈 시장의 끝은 어디인지 궁금해 진다. 금융계 전문직에 종사하는 최 모(여 36)씨는 시급(時給)남편 렌탈을 했다고 한다. 시급 남편은 1시간당 1만 5천원~2만 5천원을 받고 진짜 남편인 것처럼 역할 대행을 해 주는 사람이다. 최씨는 업무 파트너들과의 모임에 가면서 “결혼하지 않은 티”를 내기 싫어서 시급 남편을 렌탈했다고 한다. 주 고객층인 골드 미스들은 부동산 계약 같은 중요한 일을 할 때도 찾고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을 때도 렌탈하고, 휴일을 같이 보낼 사람이 없을 때 시급 남편을 렌탈한다고 하였다. 성경에도 인력 렌탈의 문화가 소개되는데 마태복음 9:18~26에 한 관리의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셔서 죽은 딸을 보고 “이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고” 한 사건이 있었다. 관리의 집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피리를 부는 자(장례식장에 고용되어 악기를 연주하는 자) 와 떠드는 자들(돈을 받고 곡하는 자들)을 렌탈 하였는데 이 사람들이 인력 렌탈의 원조는 아니더라도 인류 역사에 오래된 렌탈 문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언제부터인가 성행되고 있는 대리모(代理母 - surrogate mother) 개념도 부정적 인력 렌탈 개념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대리모를 법적으로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는 일부 지역에 따라 합법이고, 영국과 호주, 아일랜,드 덴마크, 그리스,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대리모가 합법이다. 세상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대리모를 합법으로 선언한다 해도 성경적 개념으로는 합법이 되어서는 안된다. 앞으로 예견하건대 성도를 대신해서 교회 예배 출석해주는 렌탈 성도가 어쩌면 탄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종합해 보면 실용 제품 렌탈 문화는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 하지만 인력 렌탈일 경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가짜 남편 렌탈이라든가, 가짜부모 대행, 대리모 렌탈 등 부정적인 요소도 많다. 세상 문화는 편리한 대로 따라가지만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행위라면 역행할 수 있어야 믿음의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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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렌탈(rental) 문화 시대의 허(虛)와 실(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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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무익한 자랑 (약1:9-11)
- “팔불출”(八不出)이란 말이 있습니다. 모태에서 달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좀 덜된 사람” 혹은 “좀 모자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서 팔불출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제 잘났다고 뽐내는 사람, 둘째,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 셋째, 자식 자랑하는 사람(옛 말에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반미치광이, 마누라 자랑하는 사람은 온 미치광이 라고 했습니다) 넷째, 아버지 자랑하고 조상 자랑하는 사람, 다섯째, 자기 형제 자랑하는 사람, 여섯째, 어느 학교 출신이며 누구 후배라고 자랑하는 사람, 일곱째, 자기가 태어난 곳이 어디라고 우쭐대는 사람을 가리켜서 팔불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에 와서 그런 자랑들은 별로 잘못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옛날 양반문화 체면문화 시대에는 팔불출이었는지 몰라도 현대에 와서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연세대학교 가정 의학 전문의인 윤방부교수는 <건강한 인생, 성공한 인생>이란 책에서 자기 자식을 자랑할 수 있고 자기 아내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건강한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자식과 아내인데 그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자랑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주장에 동감을 합니다. 자기 삶의 환경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랑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자랑하는 영적 팔불출이 있습니다. 자랑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영적팔불출입니다. 첫째는, 정함이 없는 재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약1:10-11) 둘째는, 자기 일방적인 내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약4:13-16) 셋째는, 봉사하고 충성한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9:16,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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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무익한 자랑 (약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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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변화
- 어느 날 어떤 일로 많이 화가 나있는 나에게 주님은 질문하셨다. “네가 그렇게 성을 내고 화를 내며 실수를 해도 네가 의인임을 믿니?”라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대답 할 수밖에 없었다. “예, 주님 믿습니다.”는 나의 대답에 주님은 나의 마음의 생각으로 즉시 말씀하셨다. “그래, 고맙다. 내가 생명 바쳐 이루어 놓은 일을 너의 상태와 상관없이 받아주니 고맙구나. 그래, 맞아. 너는 죽었고, 내가 네 안에 산단다. 너는 이제 죽었단다. 네 안에 내가 단단다. 나는 사과하고 싶은데 너도 받아들일 수 있겠니? 받아들인다면 가서 사과하렴. 사과할 수 있겠니?”라고 하셨다. 사과하려니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그날 믿음으로 사과를 했다. 그전에 하던 사과의 개념과는 달랐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는 믿음으로 사과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지나가면서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40-41)라는 말씀을 알 것 같았다. 믿음으로 믿음의 연습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들은 나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성령님의 도움심이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나의 모습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은 스스로 도저히 온전할 수 없는 나를 온전하게 하셔서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하라고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안다고 말했으나 그대로 알지 못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를 믿고 있었다. 나의 모습과 상태에 따라 임마누엘을 믿었다. 이론은 임마누엘이었지만 실재는 임마누엘의 삶을 살 수 없었다. 은혜가 되는 것 같을 때는 임마누엘을 많이 믿었다. 은혜가 떨어진다 싶을 때는 형편없었다.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의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100% 받아들이기로 결단했다. 나의 행위에 기준을 두지 않고 주님께서 하신 일에 기준을 두기로 결단했다. 그러니 쉬워졌다. 행복해 졌다. 감사가 넘친다. 기쁨이 넘친다. 오늘도 능력의 삶을 산다. 나는 변화된 나를 보게 되었다. 임마누엘을 실재로 믿고 생각하고 말하고 기도했더니 많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흥분되기도 했다. 앞을 못 보는 분이 눈이 열렸다.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났다. 마음은 흥분되었다. 치유 전도 집회를 계획하며 전도지를 만든다고 만든 것이 이웃교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모양이다. 이 일로 목회자 모임에서 나를 불렀다. 느낌에 야단치려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적과 기사로 전도하신 예수님 따라하려고 하는데 방해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도 따라해야지!”하는 생각은 않고 방해하려고 한다는 생각에 격분해 진 것이다. 시기와 질투 때문이라는 생각까지 드니 마음이 힘들었다. 모임에 가서 “전도하려 하는데 왜 그러느냐”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다. 나는 마음은 편하지 못했고 분하기까지 했다.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마음 깊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성한아, 기사와 표적이 네가 한 일이니?”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 맞다. 그런데 네 마음은 지금 왜 그러니? 마치 무언가 부숴버릴 것 같구나!”라고 하셨다. 성격이 급한 나를 꼬집으셨다. “예, 주님, 억울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전도하는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방에서 야단들입니다.” “그래, 나도 안다. 그런데 생각해 보렴. 네가 그런다고 내가 더 역사하고, 네가 안 그런다고 내가 덜 역사하겠니? 그렇지 않단다.”라고 하셨다. “주님, 그러면 어째야 합니까?” “화를 내지 마라. 그리고 몰라서 그랬으니 시켜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그래라. 그래야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너도 평안해 진단다.”라고 하셨다. 이 음성을 들은 나는 더 괴로워졌다. 억울한 마음이 식지 않는 것이었다. 계속 기도했다. 주님의 음성과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결국 나는 주님께 순종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했는데 왜 그렇게 기쁨이 넘쳐나든지 주님과 옥신각신할 때의 마음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찬송이 터지고 감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임은 그렇게 은혜로 마무리 되었다. 임마누엘 하셔서 항상 정확히 인도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주님을 믿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은 임마누엘의 생각으로 충만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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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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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5: 삼복(三伏)더위와 개(犬)에 대한 비속어
- I. 서언(序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날들, 이제 삼복(三伏)중에 초복(初伏)과 중복(中伏)이 지나고 오는 15일(월)은 말복(末伏)이 된다. 옛날부터 이런 삼복더위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입추(立秋)와 처서(處暑)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런 기대 속에 지난 8월7일에 이미 입추가 지나갔고, 23일에는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가 온다. 이런 즈음에 삼복의 날들이 오면 왜 ‘개’를 생각하게 될까를 논하고자 한다. 이는 영어권에서도 복날을 ‘dog days’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복날이 되면 왜 보양식의 복달임으로 닭이나 개고기를 즐겨먹을까? 본 호에서는 이에 대한 유래와 오해를 살펴보고, 또한‘개’와 관련한 용어들과 쓰지 말아야 할 비속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삼복(三伏)과 개(犬)의 연관성 서언에서 논한 대로 삼복(三伏)이 되면, 왜 개고기를 생각하게 되고 보신용으로 먹으려고 할까? 실제로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 단지 복날의 복(伏)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변에 개 견(犬)자로 되어 있다는 것뿐이고, 마치 여름철 무더위에 사람이 개처럼 납작 엎드린 모습과 같다고 해서 엎드릴 伏자를 쓰고 있을 뿐이다. 또한 영어에서 복날을 ‘dog days’라고 하는 이유는 시리우스(Sirius)란 별이 ‘큰 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복더위 때가 되면 이 별이 태양과 함께 떠올라 무더운 여름 날씨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서 ‘dog days’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날과 개는 단어의 형성과정과 용어상으로는 관계가 있지만, 개장국을 먹는 일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다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옛날에 여름철의 보양식으로 개고기나 닭을 구하여 먹는 것이 가장 손쉬웠기 때문에 이런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III. 개(犬)에 대한 비속어 우리나라는 개와 연관된 말을 할 때는 거의 다 비속어를 쓴다. 예를 들어 ‘개소리’, ‘개새끼’,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등등 많은 비속어들과 개를 비하해서 사용하는 말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의 뜻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는 말’을 뜻하고, ‘개새끼’는 하는 짓이 얄밉거나 더럽고 됨됨이가 좋지 않는 사람을 말할 때 쓰는 비속어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은 천하게 벌어서라도 떳떳하고 가장보람 있게 쓴다는 뜻으로 이 말도 역시 천하게 돈을 버는 것을 개로 비유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뿔도 없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개 떼 모이듯 하다’ 등, 개를 비하하거나 비속어로 쓰는 용어들이 너무 많이 있다. 또한 직접 개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개꿈’이란 말도 그렇다. 여기의 ‘개’는 동물의 개가 아니고 접두어로 쓰여 질 때 ‘야생의’, ‘마구 되어서 변변하지 못한’이란 뜻으로 명사 앞에 붙여서 사용되는 말이다. ‘개죽음’, ‘개살구’ 등의 말도 다 그런 의미의 말들이다. 또한 ‘개꿈’이란 말은 꿈을 꿀 때 개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어수선하게 꾸는 꿈’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상에서 본대로 개는 옛날부터 천하게 취급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과거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권의 삼강오륜을 논하던 시대에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근친상간을 일삼는 동물이 바로 ‘개’였다는 점에서 개는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이면서도 저속한 동물로 취급되었고, 그래서 비속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견해들이 있다. IV . 결 어(結語)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유래가 어떠하든, 개와 관련된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개 팔자가 상팔자’, ‘반려견(伴侶犬)’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개를 좋아하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삼복더위의 무더운 여름철에 복날과 관련된 개에 대한 오해와 엉뚱한 비속어 등으로 인해 불쾌지수를 높이는 일들은 없어야 될 것이다. 항상 경우에 합당한 말과 아름다운 말로서 막말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또 하나의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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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5: 삼복(三伏)더위와 개(犬)에 대한 비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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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사장님이 너무 싫다!
- 사장님이 너무 싫다! 새벽 신문 배달, 첫 번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동생을 등교시킨 후 나는 잠시 쪽잠을 청한다. 다음 일정을 위해 알람 바늘을 9시에 돌려둔다. 혹시나 일어나지 못할까 싶은 불안감에도 눈꺼풀은 내려앉는다. 눈 한번 감은 것 같은데 신경질적인 알람 소리는 울리고 나는 지겹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시계 버튼을 누른다. 익숙해질 법한데 내 입에서는 욕보다 더 짜증 섞인 소리가 튀어나오며 두 번째 일정이 시작된다. “아, 지겨워.” 출근하는 식당, * * 칼국수. 충남대학병원 건너편에 있는 칼국수 전문점이다. 메뉴는 다양하다. 찌개류, 덮밥류, 돌솥비빔밥까지. 나는 식당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배달을 한다. 가정집 배달은 별로 없다. 주로 대학병원이다. 의사와 직원들 식사는 물론이고 병원식에 질린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비밀스런 접선도 진행된다. 병원 출입 시 경비 아저씨에게 직원식사로 왔다는 당당한 뻥은 필수다. 승강기에 올라타면 음식 냄새에 소리 없는 눈총이 불편하지만 모르는 척, 더 당당해야 한다. 어렵게 환자에게 배달을 완수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식당 스티커를 몰래 병원 안에 붙여둬야 한다. 화장실과 휴게실 구석이 ‘딱’이다. 때로는 환자들이 사용하는 서랍장 안쪽에 넣어둔다. 나의 이런 위험스런 도전은 다음 환자에게 큰 복지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문을 나선다. “재철, 뭐해줄까?” 배달과 그릇 수거를 끝내고 들어온 내게 주방 이모가 반가운 질문을 한다. 식당 직원은 점심 식사가 늦다. 다른 사람들 식사 준비하는 것이 일이기에 모든 일정이 끝나면 오후 3시 정도에나 함께 늦은 식사를 한다. 절대 오후 3시 전후로 식당에 가면 안 된다. 사장 빼고는 아무도 마음으로 반겨주지 않을 시간이다. 여하튼 나에게는 행복한 선택의 시간이 주어졌다. 주방 이모는 언제든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만들어 주었다. 칼국수를 배달하지만 칼국수를 싫어한다. 그래서 엄마 느낌 나는 된장찌개와 돌솥비빔밥을 주로 부탁드린다. 돌솥비빔밥을 앞에 두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 그런데 금방 기분이 별로다. 내 앞자리에 사장님이 앉으셨다. 최근 사장님은 내게 회유와 압박을 넣는다. 학교 복학이나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매일매일 그만두지 말라는 말씀을 한다. 분명 학교에 다시 돌아가거나 군대를 갈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미루고 식당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한다. “칼국수 가게가 잘 되고 있으니 더 일을 도와주면 안될까?”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 학생이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데. 그도 상황이 어려우면 군대라도 빨리 다녀와서 학교로 가겠다고 했는데. 자신의 장사에 차질이 있으니 복학을 미루고 일을 더 하라는 것이다. 난감하다. 아니, 속상하다. 철가방을 들고 다니며 내 또래 학생들과 마주칠 때 보다도 기분이 엉망이다. 무방비 상태로 듣게 되는 손님들의 막말과 모욕에도 웃어넘겼다. 그런데 지금은 웃어지지 않는다. 사장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보다 몇 살 많은 아들이 있는 사장님. 그래서 열심히 사는 내가 아들 같아서 좋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다. 그 좋아하던 돌솥비빔밥인데 그냥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돌비 12개요!” 돌솥비빔밤 12개 배달이다. 분명 의사들이 때를 놓치고 늦은 점심을 시켰을 것이다. 주방 이모가 급히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고 나도 철가방을 살피며 준비한다. 음식이 나오고 무거운 돌솥이 하나씩 채워진다. 한 가방에 12개가 들어가지 않는다. 국물과 김치도 넣어야 하고, 돌솥 12개를 채우려면 철가방 2개를 가득 채 날라야 한다. 돌솥 그릇이라 엄청 무겁다. 들고 나가는 내 마음도 무겁다. 그런데 사장님은 무거워진 철가방을 보며 즐거워한다. 바를 정(正)자로 12개를 표시한 전표가 그에게는 행복이다. 주문이 많으면 사장은 웃고, 직원은 운다. 돌솥 12개의 무게에 나도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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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사장님이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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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일 하루의 삶 또는 예배, 기도, 말씀, 전도, 구제와 같은 삶의 방식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별난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영위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일상적인 문화와 사회적 삶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와중에서 영위되는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 자체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는 세상을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신 것과 같이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므로 교회의 강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현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구비시켜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의 광범위한 영역, 즉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는 구원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은 항상 자신과는 별개의 실체로 저 멀리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적응적인 경향성을 보여서도 안 되지만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잘못된 경건성을 추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속에서 문화적 순종의 기독교적 삶을 완전히 영위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된 거듭난 삶은 세상 도피적인 삶이나 세상 적응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삶을 통해서는 물론,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증거하는 증거적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는 항상 두 가지 위험성이 상존해 왔습니다. 첫째는 우상 숭배적인 세상 문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위험성이며, 둘째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안락한 신앙의 삶을 살고자 시도하는 위험성입니다. 이 두 가지 시도 모두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 발전에 사랑과 열정과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은 소명과 과업을 항상 복음의 조망 하에서 책임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증거의 삶은 언어적인 복음 전도의 행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증거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증거, 그리스도인의 직업과 그리스도인의 선교는모두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이 세상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고 문화적 갱신과 순종의 과업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것은 세상 속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삶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웃을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종으로 섬겼듯이,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동료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모든 구체적인 인간 삶의 노정에서, 그리고 오염된 인간 문명의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곧 의복이 필요한 자들에게 의복을 나눠주며,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며, 권력에 희생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며, 헛된 거짓 신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며, 혼란한 세상 속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자유와 평강의 소망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그리스도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신앙을 구현하는 삶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사회 질서와 구조의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표본심리 메카니즘이 행위 선택의 가장 큰 결정요인인 반면에, 현대세계 체제의 동인이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합리주의의 증가, 분화의 증가, 귀속주의의 감소, 가치일반화의 증가 등이 현대 사회의 미시구조의 특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조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는 단순히 자연적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결정에 의한 산물이며 인간의 협력과 노력에 의해서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은 제자도의 한 일면입니다. 이것은 종교 위에 부가되는 하나의 첨가물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핵심에 있는 어떤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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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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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7)
- 사랑의 은사 사랑의 은사는 큰 은사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지만 사랑의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이고 최고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잘 안 되기도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고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 충만 받고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의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쉽고 즐거움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더 힘들고 미운 생각이 사라집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재산이고, 사람을 잃은 것이 큰 손해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에 대해 기대를 낮추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람에 대해 욕심을 버립니다. 욕심 이 끼면 사랑이 아닙니다. 욕심을 가지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람에 대해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과 사랑의 은사를 하나님께 사모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주십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최고의 삶, 지혜의 삶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며 식어진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능력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핵폭탄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세상 권력보다 사랑의 능력이 큽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사단 마귀는 잔인합니다. 사랑하면 서로 느끼고 통합니다. 사랑으로 대화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육신의 병, 마음의 병, 마음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미움은 스트레스와 병의 원인이 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쫒는 능력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은 사단과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전도하고, 상담하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사랑은 관계의 능력이 되고 갈등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미움은 관계를 깨뜨리고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랑이 최고의 능력이고 설득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교육해야 교육이 잘 됩니다. 사랑은 리더십의 비밀입니다. 다윗의 리더십의 특징은 사랑 실천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시기 질투하며,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마음으로 원수까지 사랑을 실천한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요셉의 리더십도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팔아넘긴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요셉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의 능력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고 지혜자입니다. 참 사랑은 말만 가지고 하는 사랑이 아니고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병든 자를 돌보아 보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리더와 인격이 성숙한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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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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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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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요한(John's Behind Stories)-사랑의 사도
-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다. 사도요한의 정보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한 일반적인 자료는 그 형제 야고보를 통해 언급한 고로 그 외 부분만 기술하고자 한다. 요한은 야고보 형제로 갈릴리 벳새다 출신 어부로서 예수님 사후에 모친 마리아를 돌본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와 계시록을 집필했다. 그는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선교했으며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밧모섬으로 유배를 갔다. 사도들 중 제일 먼저 순교했던 형 야고보와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역하고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또한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를 당하거나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주후 98년 경 에베소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베소에 거주하는 동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몇 년간 모셨다고 한다. 요한이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을 때 로마의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유배당하게 되는데 밧모 섬에 있는 계시의 동굴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묵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유배에서 벗어난 후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왔으며 트라얀 황제 시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요한은 소아시아 전역에 교회를 세우고 주님이 돌아가신 후 68년을 지내다가 에베소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우뢰의 아들 요한 요한은 세배대와 살로메의 아들로서 야고보의 동생이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보아네르게(Boanerges) “천둥의 아들(Son of Thunder)”이란 별명을 가졌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그들이 주님의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하자 성급한 요한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해 버리라고 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마 9:54). 이 같은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갈 5:22-23).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마 4:21-22; 막 1:19-20; 눅 5:10).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모친이 살로메(Salome)였음을 시사해 준다(마27:56; 막 15:40). 마가가 그 아버지와 품꾼들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의 가족들이 부요하게 살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가는 그의 가족이 가버나움이나 그 근교에 거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막 1:21). 세배대의 아들로 그를 언급할 때 두 번째로 불러짐을 보아 야고보의 동생 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와 함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으며(마 10:2; 막 3:17; 눅 6:14), 그는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세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두 사람이 선정될 때 요한이 부름받기도 했다. 예수께서 유월절 준비를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함께 보냈으며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갔다. 요한은 주님이 승천 하신 이후 베드로와 함께 동역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 언급이 되는데 세 번 모두 베드로와 관련되어 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었던 열한 사도들의 명단에 요한의 이름은 베드로 이름 다음에 나온다(행 1:13).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그때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고 밤새 감옥에 갇혀 유대 지도자들의 조사와 협박을 받고 풀려났다(행 3-4장).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의 사역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진실함을 알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행 8:14-25).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요 대변인이었다. 그 형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AgrippaⅠ) 에 의해 처형되었다(행 12:2).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한번 언급한다(갈 2:9).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기독교 지도자대회에 관하여 말하면서 기둥으로 일컬어지는 저명인사 세 사람을 언급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언약사상을 마감한 요한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기록했다. 그가 쓴 복음서는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당시 유대와 로마와 헬라라는 시대적인 정황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요한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그는 태초에서부터 언급하여 당시 유대와 지배국가 로마와 헬라 문화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초자연적 복음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흩어진 유대의 디아스포라들에게 당시 이단자들인 영지주의 유혹에 미혹 받지 않도록 특별한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교회의 모든 환란을 이기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아갈 천국을 소개하므로 구원역사의 언약사상을 마감한 최후의 사도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변함이 없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8-9). 그는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순교자였다. 또한 그는 신약의 묵시록을 기록한 자이다. 신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으로써 문학적 유형으로 보면 구약의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와 결별한 때였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서 독립된 운동으로 간주되었던 시기이다.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요한이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다. 이 책의 환상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 때문에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받은 것이다. 그는 아시아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며 이미 예언자로 인정받았고(계 22:6, 9, 19), 전에도 계시적 성격을 띤 환상을 받아 왔던 사람이었다. 유스티누스(Justinus AD 150년경)는 계시록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사도중 한 명인 요한에 의해 쓰여졌다고 했다. 그 외에도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AD 200년경), 오리게네스(Origenes AD 225년경) 등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 요한의 저작설이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서방교회들에 의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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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요한(John's Behind Stories)-사랑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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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 - 영진칠기사와 안세제 집사
- 지금은 폐업했지만 부산시 동구 좌천동 가구 1번지 거리에 있었던 ‘영진칠기가구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나전칠기(螺鈿漆器) 전문 가구점인 영진칠기가구점은 양질의 제품을 공급했던 신뢰받는 업체였고, 영진칠기 가구점은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입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고, 1970년대 아파트 붐이 일면서 크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진칠기사의 창업주 안세제(安世濟, 1927-2021) 대표가 기독교 신자였고 그가 얻은 상당한 재물을 교회에 기부하거나 장학재단을 설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경남 진주 봉래동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한 안세제 집사는 1970년대 초 영진칠기 가구점을 열었는데, 그는 특별한 경영원칙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직과 신뢰, 그리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것이었고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사업을 시작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아침에 첫 손님이 왔다가 그냥 가면 오늘 재수가 없다며 뒤에서 욕을 하거나 소금을 뿌리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안세제 집사는 첫 손님이 와서 가구점을 둘러보고 그냥 나가도 타올을 곱게 싸서 선물했다고 한다. 물건도 사지 않고 그냥 가게 되어 미안해하는 손님에게 “우리 가게를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인사한 것이다. 다른 가게는 재수 없는 첫 손님이라 하였으나 안세제 사장은 잠재적 고객으로 예우하고 대우해 준 것이다. 그는 가구를 판매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구매자가 원할 때는 언제든 가구를 수선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기업도 판매 후 관리, 곧 AS 개념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AS담당 직원을 채용해 부산 전역을 순회하면서 무료로 훼손된 가구를 수리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제품을 판매하기 전에도 가구 상태를 사전에 철저히 점검하고 말끔히 청소하여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최상의 칠기 가구를 전시했다고 한다. 이런 정신으로 사업을 했으니 신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사업이 번창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정신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안세제 사장은 본래 부산진교회 출석하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 신앙정신을 따라 70여명의 성도들이 부산진교회를 나와 성산교회를 설립할 때 설립 교인으로 참여한 이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성산교회 집사로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고, 물질적으로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특히 2011년 10월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해운대의 110여 평의 상가와 덕천동의 400여 평의 부동산을 성산교회에 헌납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기증받은 부동산(현재 약100억원 상당)의 임대료만 연 1억 원이 넘는데 매년 100여명의 교인 자녀 및 지역 사회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고 있다. 이 때 안세제 집사는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여러 성도들과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도리어 성도들에게 감사했고, 자녀들도 이버지의 결정을 존중하고 순종했다. 안세제 집사는 부동산의 교회 기증과는 별도로 2013년 12월에는 영진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안세제 집사는 이처럼 자신이 땀 흘려 모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 장학사업을 전개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인색했고, 일생동안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부인 임성애 권사에게는 명품 가방 한번 사준 적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는 꼭 필요한 용돈만 주고 그것도 일일이 사용처를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자신은 소박하게 살면서 남에게 한없이 관대한 삶을 사신 것이다. 신앙인으로 선한 모범을 보인 안세제 집사는 2021년 12월 28일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정관의 백운공원 묘지에 묻혔다. 그의 3남 2녀, 곧 5남매는 다 믿음으로 성장하여 각기 교회에서 장로로 집사로 혹은 권사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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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 - 영진칠기사와 안세제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