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망각은 금물 (전12:9-14)
    사람의 뇌 속에는 기억하는 기능과 잊어버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더 새로운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오래 된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쁜 것을 잊어버리고, 기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슬픈 것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신선한 공기를 들이기 위해서 묵은 공기를 내보내는 환기(換氣)의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잘 잊어버려야 하고, 새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옛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기억하는 것보다 망각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음악가 <슈베르트>는 지독한 건망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약 2주가 지나면 자기가 만든 곡을 다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가지고 연습을 시키다가도 “여보게, 그 곡이 참 좋은데 도대체 누가 작곡한 것인가?”하고 물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건망증이 심한 그가 많은 불후의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항상 새 것을 추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가 하면 쉴 새 없이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머리가 돌아버리는 이유는 바로 많은 것을 기억하는데 비해서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뇌 속에 메모리 기능의 용량이 넘쳐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잊어버리는 기능이 없다면 우리도 머리가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축복이지만 잊어버리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평생토록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전12:13) 둘째로, 삶의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33) 셋째로, 받은바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시103:2) 우리 모두 좋은 기억 속에 행복한 인생을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2-06-28
  • [신재철 목사] 도둑놈의 새벽기도
    하나님과 줄다리기 끝에 신학대학에 진학 했고 동시에 집이 망했다. 도망가듯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셨고 동생과 나의 사글세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겨우 입학은 했지만 두 번째 학기 등록이 어려워 휴학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교차로’ 신문을 뒤지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동생이 무너진 환경으로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어설픈 다짐이 나를 더 무겁게 한다. 고등학생의 참고서는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분명 얼마 전에 산 것 같은데... 그닥 성적이 좋지 못한 동생의 참고서 구매 속도에 의심이 든다. 그리고 너무 부담스럽다. 갑자기 시작된 가난이 너무 힘겹지만 원망은 없다. 신학대학 진학에도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짜증은 난다. 집이 망해서인지, 고단하고 서글퍼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새벽 3시 30분 기상. 신문보급소 출근.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중학교 때 경험으로 신문 배달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눈 뜨기가 싫고, 몸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정신줄 꼭 붙잡고 일어나 옷을 단단히 입고 밖에 나선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렇게 움직여야 안정된 수입이 생기는 것을 알기에 해야만 했다. 출근하면 가끔 듣는 배달 사고 소식이 유쾌하지 않다. 잘 던져 넣었는데 신문이 오지 않았다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는다. 특이사항은 없는지 확인 후 신문을 챙겨 뒷자리에 싣는다. 적당한 수량을 둥글게 말아 잘 묶어두면 달리며 던지기 좋은 셋팅이 된다. 내가 볼 스포츠 신문 한 부를 여유 있게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도, 차도 없다. 내 오토바이 소리만 경쾌하게 울린다. 어느 집은 대문 아래로 깔아서 던지고, 어느 집은 2층 계단으로 던지며 집집마다 원하는 곳으로 던져둔다. 앗차! 잘못 던져 한 집은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다. 분명 저 집 보급소로 연락이 오겠지? ‘모르겠다.’ 아직 남은 집도 많고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싫어 그냥 달린다. 소장님께 한 소리 듣고 말지모. 그렇게 속도를 내던 내가 한 집 앞에 멈춘다. 대문에 걸려 있는 우유 가방. 그곳에 신문을 넣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은 우유 아주머니가 먼저 오셨나 보다. 가방에 흰 우유가 들어 있다. 배가 고픈데 왜 머리가 복잡할까? 오토바이에서 내려 우유 주머니 앞에서 잠시 더 고민 하다 신문과 양심은 넣어 두고 우유는 급히 뺀다. ‘과연 손은 눈보다 빠를까?’ 누군가 보지 않을까 싶어 급히 마셔버린다. ‘도둑놈!’ 배고파서 우유 하나 먹은 정도는 무죄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훔친 것은 사실 아닌가.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얼른 오토바이에 올라타 급하게 이동한다. 새벽 골목은 조용하다.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 콩나물, 두부 배달차도 보이지 않는데 내 가슴은 왜 이리 뛰는 걸까. 보급소에서 한 소리 들을 우유배달 아주머니가 맘에 쓰이면서도 입속에 우유는 고소하기만 하다. 새벽 5시 30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아직 동생은 자고 있다. 조용히 전기밥솥에 쌀을 올리고 집 근처 교회로 가 새벽기도에 참여한다. 눈을 감으면 우유가 자꾸 떠오른다. 신학생이 우유를 훔쳐 먹었다는 생각에 괴로움이 깊어진다. 집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경건과는 거리가 먼 스무 살 신학생의 새벽기도는 그렇게 깊어졌다. 집에 돌아오면 밥은 되어 있고 할 수 있는 반찬을 만들어 본다. 오징어 볶음, 소시지 부침, 콩나물국. 그리고 얻어온 밑반찬을 더해서 아침상을 차리며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잘 참아내던 동생이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한다. 형이 할 수 있는 반찬 가지 수가 얼마 없으니 동생도 많이 참다가 저러는 것이리라. 이해는 하지만 또 속상하고 서글프다. 대학 친구들은 멋지게 비전을 이야기하며 학교생활을 하는데 나는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모양이 초라하다. 망해버린 집이 내 삶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28
  • [박봉석 목사] 빨리 할 것 한 가지, 느리게 할 것 두 가지
    한 의사가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는 긴급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급히 들어와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수술실 앞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아이의 아버지가 의사를 보자마자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오는 데 종일 걸리나요? 지금 내 아들의 생명이 얼마나 위급한데, 당신은 의사로서 책임감이 없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저도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왔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금만 진정해주십시오.” “진정하라고요? 만약 당신의 아들이 지금 여기 있다면 진정할 수 있겠어요?” 그런 옥신각신 끝에 의사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 수술을 잘 끝내고 나온 의사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다른 상황은 간호사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는 수술실에서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이를 본 아이 아버지는 화를 내며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저 의사는 왜 저렇게 거만한 거요? 내가 아들의 상태를 묻기 전에 가버리다니, 좀 더 기다려줄 수는 없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간호사는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자녀가 어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장례 중이지만 수술 연락을 받고 급히 들어온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님의 아드님 목숨을 살리고 그리고 지금 자녀의 장례를 마무리하러 급히 가신 겁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여서 그 사람을 비방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았을 때에 비방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그 말을 들어보는 것이 꼭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해도 아무 상관없는 비방, 아니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비방을 먼저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각지 못하는 상처를 상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르면서 성급히 비방을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상처가 그 사람에게 어떤 큰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삶에서 한 가지는 빨리 하고 두 가지는 느리게 하는 습관을 꼭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19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참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랜 옛날에 빈체시오라 이름하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밤낮없이 싸우는 한 부인이 와서 그에게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너무나 큰 절망에 빠져 넋두리하는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빈체시오 수도사는 그 해결법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우물물을 한 항아리 길어서 그녀에게 주며 말을 했습니다. “이 물은 성수입니다. 당신의 가정을 치유할 수 있는 거룩한 물이지요. 남편과 싸우려고 할 때마다 이 물을 마시시오. 그러나 단 하나 꼭 지켜야 할 것은 남편 말이 다 끝날 때까지는 물을 삼키지 말고 입에만 물고 있으시오. 그러다가 남편 말이 다 끝나면 그 때 물을 삼키시오. 그러면 한 달 안에 부인의 가정에 평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이 부인은 성수라고 하니 그 물이든 항아리를 마치 보물을 다루듯이 감싸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그 물을 입으로 들이키고는 수도사가 가르쳐준 대로 남편이 말을 다하기까지는 입에 물고 있다가 남편 말이 다 끝나면 그 물을 삼켰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달이 지나자 가정에 놀라우리만치 평화가 찾아 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유는 말 안 해도 다 아시겠지요? 그 부인은 다시 수도사를 찾아와서 “정말 신비한 물을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빈체시오 수도사가 말을 했습니다.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고 침묵이 신비이지요.” 무엇입니까? 수도사가 준 물로 인해서 저절로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게 되어서 가정에 화목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성경 야고보서에서 명한 빨리 할 것 한 가지와 느리게 할 것 두 가지를 늘 삶에 실천하고 사십시오. 여러분이 속한 곳에 이전에 없던 평화가 찾아들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28
  • [오태열 목사] 믿음은 전적 수용이다
    세상에 장점만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점이 있으면 약점도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최고의 장점이 있으면 최고의 약점도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시, 북군의 패색이 짙었다. 남군에는 탁월한 전략가 “리”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군에는 리 장군과 버금가는 “그란트” 장군이 있었는데 술주정뱅이라는 약점이 있어 군 지휘권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남군의 리 장군과 최후의 일전에서 그란트 장군이 승리한다. 이 역사적 승리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말을 잘하지 못하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며 거절하였다. 그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말을 잘하게 하여 쓰시지 않았다.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주었고,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 약점을 고치시고 쓰시지 않고 약점 있는 그대로 사용하신다. 그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더 강하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다. 우리는 종종 기도시 나의 뜻을 이루려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득당하려 하지 않고 내 뜻만 이루려 고집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떠난다. 세상일은 모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야구 경기에 투수와 포수의 역할을 아는가? 포수는 투수에게 사인을 하나 던지는 것은 투수의 마음이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놓치지 않고 잘 받으면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나님은 투수요 우리는 포수다.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모습이다. 강점이든 약점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으면 된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쓰실 자가 알아서 쓰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냥 가라 하셨다. 가라 하실 때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뜻이다. 도구의 의미는 쓰는 자가 필요해서 쓰는 것이다. 도구는 내 모습 이대로 여야 한다. 우울증, 영적 침체에 자주 빠지는 자들은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자아가 굉장히 강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치유가 된다. 내 뜻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힘쓰고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면 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포도나무가 열매 맺는 것은 그냥 붙어 있으면 된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항공기 조종사들이 훈련받을 때 눈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교육받는다. 회전을 하면 바다가 하늘같이 보인단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계기판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라 한다면 종은 자기의 뜻이 없고 뜻을 내세울 수도 없다. 자기 뜻이 있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면 된다. 종에게는 왜냐가 없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이 나타난다. 주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 하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다. 전문가들이 쓰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전문가란 생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 전문성이 더욱 발휘된다. 고기잡는 전문가는 베드로이다. 목수인 예수의 말을 듣고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전문성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 만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믿음은 전적 수용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28
  • [박동철 장로] 2700년 전 미스바기도회, 2022년 경남미스바 기도회, 창원시 장로 영성회복 기도회
    성경에 ‘미스바’의 지명은 여러 곳에 나온다. 미스바의 지리적 해석도 다양하다. 성경에 분명히 적시하고 있고 설교가들이 많이 강조하는 미스바는 사무엘상 7장에 능력의 기도회 장소로 상술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개척기를 지나면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짐으로써 영적 어둠의 때를 맞게 되었다고 사사기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각기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라고 기록하고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 이어 한나의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이땅에 보내신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을 계획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범죄로 물들어 있었다. 시내산 언약의 상징 법궤는 블레셋에 빼앗겨 다곤 신전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 블레셋의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적 육적 핍박의 깊은 수렁에 있었다. 사무엘은 당시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회개 기도 운동을 주장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미스바로 모여 금식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사무엘상 7장 6절에 “백성들이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나이다.”라고 백성의 회심 소리가 기록돼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 상황을 볼 때 미스바 기도 운동이 장소보다 때가 중요함를 알려준다. 주전 590년, 지금부터 2700여 년 전 이스라엘의 미스바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블레셋으로부터도 구원받은 역사를 쓰게 됐다는 시대가 더 큰 울림이 된다. 오늘날 지구촌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갇힌 세상이 되어 온전한 예배 없는 2년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의 먹구름이 걷혀가는 즈음 경남과 창원지역에서 미스바의 기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가 회개 기도회로 코로나를 이겨내고 예배를 회복하자는 슬로건으로 2022년 미스바 기도 성회를 연초부터 매주 목요일 지역을 순회하며 개최하면서 회개의 부르짖음을 쏟아내고 있다. 경남 지역 2600여 교회를 향하여 미스바로 모일 것을 외치는 사무엘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듯 경남지역을 울리고 있다. 연중 진행될 경남의 2022년 미스바 기동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움직임도 있다. 경남에서 회개 기도 운동이 일어나면 대한민국이 산다는 집회시작의 공통된 기도 소망처럼 미스바 기도회의 열매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 함께 경남의 수부도시이자 대한민국을 이끄는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회장 최주철 장로)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취지로 장로들의 영성 회복 기도회를 지난 9일 창원 상남교회서 개최했다. 600여 장로 부부들이 모여 말씀과 찬양 그리고 어떤 때보다 뜨거운 부르짖음 속에 진행된 영성회복을 위한 장로들의 기도회였다. 대한민국 기독교역사속에 함께 모여서 회개 기도 했던 미스바 기도회가 오늘의 기독교부흥을 이끌었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서 개최된 부흥사경회서 각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부르짖어 기도했던 집회가 평양교회의 대부흥를 이끌었다는 살아있는 역사기록을 남겼다. 1973년 5월 30일부터 5일간 진행된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 집회에서 350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 부르짖음으로써 대한민국 미스바 기도의 큰 장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대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 교회는 선교 130년을 넘기면서 물질 풍요의 세상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펜데믹에서 영성이 메말라가고 예배의 소홀함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 모든 주님의 시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영적 각성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다. 2022년 경남 창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성 회복 기도운동이 대한민국 교회 회복의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2-06-1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1
    I. 서언(序言)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각종 모임과 회의들이 기지개를 켜는 동시에 각종 회의 통지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부쳐져 온다. 하지만, 이 모임과 회의들의 제목들을 보면 일관성이 없이 제각각인 경우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회 소집이나 각종 모임 통지서를 보면, 어떤 경우는 제O회(回)라고 했고, 또 어떤 모임은 제O차(次) 회의라고 했다. 또한 제O기(期) 모임이라는 통지서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 나름대로의 명분과 취지에 맞는 제목이 많았으나 어떤 경우들은 같은 성격의 모임이지만, 제목은 다른 경우들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에 위 3가지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회(回)와 차(次)와 기(期)의 구분 1. 회(回) : 제O회(回)의 회의 사전적인 의미는 ‘횟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즉‘일정한 기준이나 주기에 따라 반복되는 각각의 단계나 차례’를 의미할 때 사용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제1회 정기총회라든지 제2회 정기노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 차(次) : 제O차(次)의 차의 사전적인 뜻은 일의 횟수를 헤아리는 단위인 ‘번’과 일이 발생하는 횟수를 세는 ‘차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일을 나누어서 행할 때 1차, 2차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2회 정기노회의 기간이 1년이라고 가정하면, 이 회기 안에 수차례 이상의 임원회가 모여질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제2회 정기노회 기간 중의 1차 임원회, 2차 임원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차’는 ‘회’가 아니기 때문에 제O차 정기 총회나 제O차 정기노회 등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는 것이다. 3. 기(期) : 제O기(期)의 사전적인 뜻은 시절, 시기, 기간 등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일정한 기간씩 되풀이 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을 나타내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면, 중고대학교 같은 정기 학제가 아닌, 사회교육원이나 각종 세미나에서 주로 행해지는 일정기간 교육을 수료하는 성격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예제 : “OO학교 졸업 동문회”를 어떻게 표현할까? 필자가 받아본 어떤 동문회 소집 통지서에서 어떤 경우는 ‘제O기 졸업동문회’라 했고, 또 어떤 경우는‘제O회 졸업 동문회’란 제목이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표현이 올바른가? 이의 정답은 제O회로 하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기’는 회기 연도적 학제(學制)개념이 아닌 연(年)단위 속에서 단기적 기간의 수료행위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O기로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회’, ‘차’, ‘기’란 용어는 서로 엇비슷한 것 같아 보이지만 그 개념상으로 보면 이런 미세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런 용어를 잘 못 사용했다 해서 행정 질서에 문제가 생겨지거나 법적인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용어상의 작은 부분이라서 간과하거나 무시하다 보면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시시비비가 일어나는 경우들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시찰회나 노회 등 여러 회의들이 소집되고 있다. 이런 각종 회의들과 모임들 속에서 정확하고 바른 용어 사용으로 아름다운 모임과 회의 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2-06-14
  • [조희완 목사] 만족한 인생 (전2:1-11)
    옛날 한 성에 성주(城主)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성을 다스리는 주인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자기 삶에 만족이 없었습니다. 만족함이 없는 삶을 살던 그 성주가 깊은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지혜로운 점쟁이가 그 성주에게 “병을 고치시려면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내복(內服)을 가져다가 입으면 나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주는 즉시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전 영토를 뒤져서라도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일렀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서 신하들이 돌아 왔는데 신하들의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 항상 만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신하가 말하기를 “예, 우여곡절 끝에 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성주가 다급해서 묻기를 “그런데 어째서 빈손으로 돌아왔는가?” “예, 항상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너무 가난해서 내복을 입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으면서도 만족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만족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을 가지고 살면서도 늘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가진 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만족 결핍증” “행복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도무지 만족이 없어서 어떻게 하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모습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영적으로 즐거워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2:1-11) 둘째로, 부부간에 다정하게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9:9) 셋째로, 사람의 본분대로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전12:13)
    • 오피니언
    • 칼럼
    2022-06-14
  • [최호숙 목사] 한(恨) 맺힌 삶의 치유(治癒)를 위하여
    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사건 요소요소 마다 “한 많은”이란 단어를 붙이면 말이 된다. 일제 강점기의 모든 삶이 한이었고, 6.25를 겪은 피폐의 삶이 한 많은 삶이었고, 가난 속에 살아온 모든 삶이 한이었다. 손인호 씨의 노래 제목 “한 많은 대동강” 남인수 씨의 “한 많은 백마강” 요즘 대세인 가수 진성 씨의 “보릿고개”란 노래도 한 많은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만든 곡이다. ♬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초근목피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5~6월이 되면 아버지를 통해 듣고 선배들을 통해 듣던 보릿고개란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추수한 쌀이 바닥이 나고 아직 보리는 익지 않은 5~6월, 주린 배 움켜쥐고 식량을 찾아 나섰던 춘궁기(春窮期), 이때는 사건 사고가 많았었는데 도둑들도 돈보다는 쌀을 훔쳐 갔다는 이야기는 굶주림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恨)이란 무엇인가? “차별적인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쌓이는 심리적인 복합상태”라고 정의 하였다. 한(恨)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분노, 아쉬움, 안타까움, 또는 이들 모두가 한데 뒤섞인 묵은 감정이다. 그렇다면 한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 것일까? 첫째,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다. 예를 들면,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당하거나 또는 못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한국인들은 한을 경험한다고 한다. 둘째,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결핍(relative deprivation) 되었을 때 한이 생기게 되는 데 학자들은 전자의 경우를 객관적 한, 후자를 주관적 한 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여인 한나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괴감(自愧感)이 있었고, 그의 적수 브닌나가 심히 그를 격분하게 하였으므로 그의 심정이 괴로웠다. 때문에 그의 삶은 울음의 삶이었다(삼상1:6~7). 여기에 대하여 개역 성경에는 번민(煩悶)이라고 번역했다. 바로 한나가 경험하고 느끼는 이 번민이 객관적 한이며, 동시에 주관적 한(恨)인 것이다. 한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치료와 치유는 조금 다르다. 치료(治療)는 사람이 하는 행위를 말하며, 치유(治癒)는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치료하는 것도 유익이 있지만 완전 치유를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하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치료하기 위하여 ‘위로(慰勞)’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남편의 위로가 치유되지 못하였다. 한나의 괴로움은 여전하였다(삼상 1:10). 그는 완전 치유를 위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사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이 사무엘인 것이다.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은 이유는 “내가 하나님께 구하였다”는 뜻인데 기도로 치유되고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무엘이라고 지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건 속에는 객관적인 한, 또한 주관적인 한이 복합적으로 병행 되어 나타난다. 완전 치유를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돕는 은혜로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2-06-14
  • [오성한 목사] 성화되는 지름길이 있다(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요1:1). 하나님이 육신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요1:14). 그는 창조자시다(요1:3). 그래서 이 땅은 자기 땅이다. 자기 땅에 오셨다(요1:11). 사람들은 몰랐다. 예수님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요1:13). 예수를 믿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형통이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롬8:1). 이제 우리가 이루어 갈 구원이 있다. 우리가 이루어갈 구원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을 많이 믿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능력의 삶을 산다. 어려움 앞에서도 인도를 믿고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인격적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면 주일을 저절로 잘 지키게 된다. 믿는 자의 삶이 저절로 나오게 된다. 성도의 교제가 풍성해 지고 아름답다. 목사와의 관계도 풍성하다. 교회에서 개인의 덕을 세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자가 된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알고 믿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건강한 정체성 때문에 삶이 건강하다. 이것을 성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성화는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가 좀 노력해서 더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노력으로 무엇을 더할 수도 없다. 예수를 믿으면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완전한 구원이라는 말을 꼭 기억하라. 예수님의 구원이 부족하지 않다. 예수님의 구원은 완벽하다.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육정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빈틈없는 계획이다. 예수님의 완벽한 구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원받은 자의 영은 창조되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 구원받은 자의 영은 더 깨끗해 질 필요가 없다. 점점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고 죄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영이다. 영이 혼과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인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다(요일3:9, 5:18).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고 하나님께 기억되지 않는 의로운 자가 된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능력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완전한 구원을 알게 될 때 감격과 감사의 삶을 살 수 있다. 완전한 구원을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이 땅에서 당신은 힘 있는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성화의 길을 마치는 날 영화의 영광을 볼 것이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그날 구원을 완전히 이해하고 완전한 누림의 영화로 나갈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성만찬의 비밀을 통해 성화가 시작되었다.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셨다. 피와 잔을 나누어 마심으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죄 덩어리가 되셨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앞으로 좀 더 노력하면 점점 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왔다가셨다.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 없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다. 성령의 능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우리가 성화되고, 영화되는 것은 이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지 많이 성화된다고 더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심을 깨달아 가는 것을 신앙 성장이라고 하고, 성화라고 한다. 신앙 성장은 행위에 있지 않다. 성화가 행위에 있지 않다. 믿음에 있다. 신앙 성장은 오직 믿음에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만 있으면 행함은 따라온다. 성화는 하나님의 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당신이 더 성화의 자리로 나아가려면 하나님의 의를 가졌음을 많이 알아가면 된다. 하나님의 의를 깨달아 가는 것이 성화다. 성화 될수록 감격이 생길 것이다. 영화롭게 된 자신을 정확히 발견할수록 감격의 삶이 되고, 변화된 삶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화는 믿음으로 된다. 정체성의 발견이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믿는 삶은 변화된 삶을 살게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6-14
  • [신재철 목사] 피 흘리는 할아버지 그리고 며느리
    최근 머릿속이 복잡하다. 어느 고3, 열아홉의 고민이 가벼울 수 없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역시나 내게는 내 고민이 가장 무겁다. 기도할수록 무거워지는 마음, 복잡한 생각. 하나님의 이끄심과 부담이 있지만 결단과 정리가 쉽지 않다. 딱 불순종의 몸부림이다. ‘신학대학을 가? 아니면 성적에 맞춰 대학가서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 오늘도 야간자율학습 후 교회에 들러 홀로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 신학대학에 가기 싫은 투쟁이라고 봐야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깊은 밤 기도가 교회 노(老)권사님 눈에 적발된 뒤 나는 교회에서 세상 훌륭한 목사 감이 되었다. 밤마다 홀로 기도하는 고3이라는 딱지가 경건하게 붙어버렸다. 기도를 할수록 한 숨이 깊어지는 것은 왜일까? 믿음이 부족해서? 불순종의 불편함? 그렇게 그날도 불순종의 기도를 깊게 드리고 교회 문을 나선다. 밤 12시가 되었으니 집에 가야지. 봄이 오는 듯 했으나 아직은 너무 춥다. 교복 재킷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잠자리를 향해 간다. 골목길 작은 슈퍼마켓은 아직도 불이 켜져 있다. 이제 문을 닫으시려는지 밖에 늘어놓은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 골목이지만 차가 다니는 길이었기에 가에 붙어 걷고 있는데 중앙에 무언가 보인다. 조금 더 다가가 보니 사람이 주저앉아 있다. 술에 잔뜩 취한 듯 중얼거림이 들린다. ‘날이 춥다. 차가 지날 수 있다.’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다가가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할아버지, 댁이 어디세요?” 술에 취한 것은 냄새로 확인 되었다. 넘어졌는지 이마에는 상처와 피가 보였다. 빨리 모시지 않으면 무슨 사고라도 날 것 같아 집을 물었다. 잔뜩 취한 할아버지가 집을 잘 알려줄리 만무하다. 질문을 바꿔 전화번호를 물었다. 얼마나 혀가 꼬부라졌는지 한참을 실랑이 하며 번역을 해가며 번호를 알 수 있었다. 부담스러웠지만 그냥 길에 둘 수는 없어서 일단 등에 업었다. 아직 문이 열려있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아저씨, 전화 한 통 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도 바로 상황을 이해하시고 가게 전화기를 내어주셨다. 가족과 연락이 닿았고 집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화 받는 가족의 목소리가 차갑다. 모시러 온다는 말없이 위치를 설명한 후 전화가 끊어졌다. 마침 내가 다니던 학원 인근 골목이라 찾아갈 수 있어서 다시 할아버지를 업었다. 걸어서 1킬로미터 정도?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가볍지도 않았고 가깝지도 않았다. 땀이 범벅이 되고 몇 번이나 쉬었다 가기를 반복해서 겨우 집을 찾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외침에 달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며 그렇게 도착했다. 문은 열렸지만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할아버지를 넘겨받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내 걸음이 며느리로 보이는 분이 안내하는 방을 향했다. 마지막 내려드리는 자세에서 다리가 후들거려 조금은 던져지듯 착지가 되었다. 교복 입은 학생이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업고 댁에 모셔드렸다. 그렇다면 물 한잔에 칭찬 정도의 보상은 있을 줄 알았는데... 가족이 할아버지를 향해 험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도망치듯 집을 나선다. “왜 또 술은 그렇게 처먹고, 어디서 쓰러져서 이 모양으로 들어와! 차라리 나가 죽어!”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살아 돌아온 사람에게 죽으라니. 내 진로보다 더 짙은 생각이 무게를 더한다. ‘가족이 뭘까? 사랑은 뭘까?’
    • 오피니언
    • 칼럼
    2022-06-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