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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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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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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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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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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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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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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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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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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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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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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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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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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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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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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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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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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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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 오늘 우리 사회를 거듭난 심령을 가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이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으로 좀 바뀌어 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최근 주요 언론의 사회면에 연일 보도되고 있는 아동학대, 성폭행, 패거린 정치 행태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좀 밝혀주고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교회당 수나 교인 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당 수와 교인 수의 증가에 비례하여 부정과 부패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더 악해진 것 같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지만 우리 삶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인간 삶의 핵심영역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소수인 것 같고 그 영향력도 아주 미미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보면, 미국인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 교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 신념과 가치관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의 대도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신문, 잡지들을 보면 마치 복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그저 낯설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이렇게 미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한 가지 이유는 문화변혁적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요 대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산업에서 일하거나,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거나, 방송 매체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겨우 3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와 사회의 주요 유형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에 뭔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제안하고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부정적인 반응만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이나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비하시키면 우리는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보이코트하는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방식은 우리 자신들을 더욱더 우리만의 폐쇄적인 껍질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대응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우리의 사회 문화적인 현실에 대해 이제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둡다고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촛불을 밝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어둡다고 불평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촛불은 거의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흑암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과업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비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역시 인간은 이 변화무상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영원불변한 하나님에게만 시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문화가 이방 신상 앞에 바쳐지는 방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문화를 그리스도에게 다시금 바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활동 외에는 모든 문화적 활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무효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화적 과업의 전체 범위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나 ‘문화와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를 통한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대응 방식의 흐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변혁적 일꾼들로 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수동적으로 죄를 피하려는 데만 관심을 갖는 자녀들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녀들로 양육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경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안전한 플레이만 하다가, 그만 졸전을 벌이고 마는 자녀들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십자가 군병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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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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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3)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경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인간관계가 좋아집니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가 지혜자이며 리더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는 고독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 사랑, 인간관계의 관계, 이웃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명령입니다. 성경을 요약하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흉내는 냈지만,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에 대해 비판하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인이었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면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이웃 사람을 사랑하되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합니다. 나 자신,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표현이요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넓은 사랑이십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이며 변하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선물로 준 사랑의 편지요 사랑의 책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사람은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고 지옥에 가야 하는 인생인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을 구원시키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인간을 구원해 주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살리시는 하나님, 용서해 주시고 기회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외모 형편을 보시지 않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악인과 의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긍휼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지어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과거를 묻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사랑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사랑의 복음입니다. 사랑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Amaging Grace. 놀라운 은총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가르쳐 주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비유입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용서는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서 선택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의 목자, 피난처가 되십니다.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기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이유도 우리가 깨닫고 잘 되게 하기위하여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우리를 품으시고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저주보다는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우리의 감정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고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능력이고 , 지혜요, 리더십 입니다. 사랑은 감동을 주고, 설득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의 열쇠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성령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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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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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3
- 고린도에 게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와 이웃 지역에도 갔을 것으로 본다(고전 1:12) 베드로의 로마 방문에 관한 것에 대한 많은 견해는 있으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 5:13)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당시 로마를 은밀히 바벨론이라 불렀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로마로 가는 도상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로마에 가서 복음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도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설교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곳은 로마라고 했다. 베드로의 최후 순교 주님은 베드로가 이 같이 박해 받을 것을 이미 예언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8-19). 베드로행전과 유세비우스는 베드로가 순교할 때 거꾸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최초로 교황직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이나 로마서에서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혹자는 베드로가 ‘바벨론’에 대한 언급을 통해 제국의 수도에 머물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벧전 5:13). 여기 언급한 바벨론은 1-2세기에 로마에 대한 비밀스러운 전승의 표현으로(계 14:8, 16:19, 17:5). 1세기 말에 베드로가 로마에 살았다고 한다. 이는 2세기 초 안디옥 주교 이그나티우스가 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the Romans)』에 나온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간 주교직을 수행했다고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고 하는 강력한 주장은 로마의 클리멘스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Letter to the Oorinthians)』(96년경, 5:-6:4)에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후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에게도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순교했다. 그는 기독교 박해를 피해 도망가다가 주님을 만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Domine Quo vadis)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네가 버리고 떠난 나의 양떼들을 위해 다시 죽으러 로마로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투옥되었다. 베드로는 햇빛이 차단된 로마의 마메르틴(Mamertine) 지하 감옥에서 9개월 간 갇혀 지냈다고 한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베드로는 몸이 수직으로 고정된 채 기둥에 묶여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곤고한 나날 가운데도 베드로는 간수들을 비롯하여 40여 명의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그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한 AD 67년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기 몇 시간 전에 처형당하였고, 죽기 전에 행한 설교를 통해 아내의 천국행에 대해 감사하면서 “오 주께 기억함을 받을 자여”라는 말로 아내를 위로 격려했다고 한다. 오리게네스(Origenes)는 베드로가 최후에 로마에 왔으며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한다. 바울과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으나 두 사람이 동시에 죽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에 대해 여러 세기 동안 학자들은 논쟁을 벌여 왔다. 이 같은 연구에 교파나 신학적 편견과 이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믿는 자들은 이 같은 편견과 이해관계에서 자유 할 수 있다(요 4:21-24). 베드로가 매장 된 장소는 역사학적이며 고고학적인 문제이다. 적어도 3세기 초까지는 바티칸 언덕 위에 베드로의 유적인 트로피 혹은 기념비적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사실을 믿고 콘스탄티누스 황제(Emperor Constantinus)가 이곳에 교회를 지었다. 현재 성 베드로 성당이 서 있는 곳이다. 1939년 이 성당의 제단 밑을 개축하던 중, 초기 이교도의 묘지와 다른 중요한 자료가 발견되어 대규모적이며 조직적인 탐사가 착수되었다. 2세기 말이나 그 직후부터 확실히 그렇게 여겨왔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 황제 네로(Nero)의 박해로 죽음을 당했다면 그 당시 쫓기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그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이와 유사한 많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로마에서 베드로가 순교했다는 증거가 그를 매장한 곳에 대한 증거 이상으로 훨씬 더 확실하다는 점이다. 베드로의 기념 유적이 발견된 곳에 베드로가 매장되었다는 가능성을 설정하기에는 그 증거가 충분하다. 이삭줍기 베드로에 관한 기록은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행전 전반부와 베드로 자신이 쓴 전후서가 있다. 혹자는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한 것으로 인해 베드로의 저자성을 부인하는 자들도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벧전 5:12). 누가가 쓴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의하면 그는 구약과 이스라엘 전통에 대한 충성,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과 이스라엘의 역사의 성취, 그리고 믿고 세례를 받는 자에게 약속한 성령 부어주심을 모든 자에게 전파된 것이라고 했다. 마가는 베드로의 설교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2세기 이후에 기록된 문헌들 가운데는 베드로의 설교(Preaching og Peter), 베드로의 수난(Passion of Peter),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 슬라브어 베드로 행전(Slavonic Acts of Peter), 베드로 묵시록(Apocalypse of Peter) 그리고 야고보에게 보낸 베드로 서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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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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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기부 공헌도 검증하라
-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의 범주를 신학(神學)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넓게 성경을 깨닫고 실천하는 가치적 학문을 칭하는 데는 ‘사랑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 하나님은 창조자이자 온 세상의 통치자로서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대역사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명령을 함께하기 때문에 성경을 사랑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듯하다. 이 세상을 위임받은 사람들의 세상의 통치와 관리권에서도 이웃과 함께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덕목을 우선시하고 있다. 특히 모든 나라의 정치적 민주주의 근간과 경제적 자유시장경제권에서도 더불어 살아가는 키워드는 사랑의 사회 헌신도이다. 기득권자 가진 자들이 약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은 기부 등을 통한 사회에 대한 헌신이다. 일찍이 산업화를 거치고 민주화를 통해 선진국이 된 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회상은 사회 기부의 헌신 문화가 굉장히 앞서있다. 그것은 기독교 성경의 사랑이 사회교육에 미치고 영향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수많은 곳에 이러한 하나님의 어록이 남겨있다. 구약에서도 레위기 19장 18절에 동포를 원망치 말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수없이 이웃사랑을 강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및 여러 미주 기독교 문화 속에 발전해온 나라들의 사회 기부나 헌신 문화는 가히 놀랄만하다. 최근 미국의 세계적 재벌들이 거의 재산 모두를 기부한다는 뉴스들이 들리고 있다. 미국의 워렌 버핏, 빌 게이츠의 재산 사회 기부 소식들이 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신흥 재벌들이 재산 절반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놀랄만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고무적인 일이기는 하다. 문제는 돈 많은 재벌들의 사회 기부가 아니라 사회 모든 가진 자 지도층 기득권층의 솔선수범하는 작은 기부헌신의 생활화가 정착해야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섬기는 교회 중직자 지도자들은 대부분 수입의 10%를 십일조로 헌금하는데 아끼지 않는다. 교회서 교인들이 낸 헌금이 교회 운영에도 쓰이지만 사회복지 주변 이웃을 섬기는데 많은 예산을 들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실한 교인들은 수입의 20%를 들여 이웃사랑의 사역에 열정을 내는 크리스천들도 있다. 교회가 이렇게 해야 복음 전파는 물론 사회 발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국가 발전을 리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 사회 지도층이자 국가 권력층의 인사들의 사회 공헌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가름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고위공직자 장차관급 평균 재산이 20억을 넘었다는 소식은 옛날 뉴스다. 끝없이 부동산 값이 오르는 강남 거주인들이 고위공직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평균 재산은 나날이 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재산을 강남에서 늘렸다고 죄인으로 몰 수 없다. 우리의 생활상은 양극화로 접어들어 강남 비강남으로 부(富)와 빈(貧)의 이분적 계층이 심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사회적 대안과 치유를 위해서는 사회 공헌 문화가 정착해야 할 것이다. 지난 새 정부 장관급 고위공직자를 검증하는 청문회 과정에서 과거의 불법 사례 투기 전력 등을 파헤치면서 놓치고 있다는 게 있었다. 바로 그들이 삶 가운데서 사회를 위한 작은 공헌을 얼마나 했는지 살피는 과정이 없었다. 고위공직자 청문회에 사회 기부 공헌도 등을 철저히 검증해서 훌륭한 인물을 찾는 기준이 됐으면 한다. 상대적 국가의 부유함 속에도 절대 빈곤층 또는 경제적 하위계층을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전적인 책임을 다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회 기부와 헌신의 정도를 국가 지도자를 찾아내는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야 할 때다. 그것이 더불어 사는 이웃사랑의 행복사회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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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위 공직자 청문회 사회기부 공헌도 검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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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0: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의 차이
- I. 서언(序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또 다시 지방선거의 열풍이 온 나라를 휘감고 돌았다. 이번 호를 받아보시는 시간이면, 벌써 투표를 다 끝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즈음에 투표와 그에 관련된 단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같은 듯 다른 이런 용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필자의 경우도 무수한 회의에 참여하거나 사회를 보는 경우에 때로는 이런 단어의 차이점에 대해서 혼란이 올 때가 있었다. 또 어떤 회의들은 은혜롭게 잘 진행되는 회의들도 있었고, 위와 같은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진행의 미숙함으로 인하여 갑론을박 하며 논란이 벌어지는 경우들도 종종 보기도 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와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 정리를 해 보고자 한다. II. 투표(投票)와 표결(表決)과 표결(票決)의 차이 ‘표결’이란 무엇인가? 참고적으로 어떤 단체의 표결에 대한 회의 규칙을 보면,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참석한 어떤 회의에서는 잠시 혼란이 왔다. 그 이유는 여기의 ‘표결’과 ‘투표’에 대한 뜻을 의장이나 회원들이 잘 구분하지 못한데서 온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두 용어는 어렵지 않은 상식 수준에서 판단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두 용어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에 본 호에서는 표결과 투표에 대한 용어분석과 회의시의 용도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표결의 뜻: 표결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종류와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表決(표결)과 表決權(표결권)이 있고, 또 票決(표결)이 있다. 그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表決(표결) : 여기서의 표는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겉 表’, ‘정할 決자’로 결 정을 겉으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법률적인 의미로서 ‘토의 안건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사를 표시하여 결정하는 일’로서 주로 다수결에 의하여 결정할 때의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2) 表決權(표결권) : ‘회의에서 회원으로서 表決(표결)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3) 票決(표결) :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표시 할 때의‘표(票)자’로 결정을 표로 표시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투표로서 결정하는 일’이다. 이상으로 볼 때 위의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은 한글의 용어로는 동일하지만 한자어로 볼 때는 다른 용어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닌 것이다. 2. 방법에 있어서의 표결 : 표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어느 단체의 회의 규칙에서 본바 대로, ‘표결은 투표, 기립, 거수, 발성 등의 방법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회장이 회원들에게 ‘의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고 ’가부’를 묻는‘약식표결(略式表決)’방법이 있고,‘예와 아니오.’로 결정하는 구두 표결(口頭表決)도 있다. 또한 결정시에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침묵표결(沈黙表決), 회장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서 찬반을 묻는‘점호표결’등이 있다. 3.투표(投票)에 대한 용어: 앞에서 언급한 표결과 그 의미에 있어서 자주 혼란을 주는 용어중에 투표(投票)가 있다. 이는 표결 방법 중의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投票(투표) : 먼저 한자의 뜻 그대로 본다면, ‘던질 投’, ‘표 票자’로 ‘표를 던진다’는 말이다. 사전적인 뜻을 보면, ‘선거 또는 어떤 의견 체결을 할 때 각 사람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표지(標紙)에 이름, 부호 또는 의견을 개입하여 일정한 장소에 제출하는 일’로 되어 있다. 2) 投票權(투표권) : 한자의 뜻 그대로 ‘투표권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즉, 투표는 표결의 한 방법이지 표결 자체가 아닌 것이며, 표결도 한자어의 표기에 따라 그 의미와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I . 결 어(結語) 마지막으로 표결의 결과에 대해서 잠시 논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결정을 했든 가결(可決), 미결(未決), 부결(否決) 등의 결과가 나온다. 여기에서 선거의 경우는 당선과 낙선이란 말을 사용하고 의제인 경우는 가결과 부결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부연한다면, 表決(표결)과 票決(표결), 投票(투표)는 혼돈하기 쉬운 서로 다른 용어들이다. 각종 회의 시에 이를 구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보면서 이에 관한 용어들을 논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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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0: 投票(투표)와 表決(표결)과 票決(표결)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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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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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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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 얼마 전 TV뉴스 중에 전국에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꿀벌들이 죽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벌통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국은 전체 벌의 약 40%가 사라졌고, 유럽은 약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연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바이러스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 규명을 밝혀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종말의 징조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분명 종말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환경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이 시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늘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로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산창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5:21-24) 둘째로, 결단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민10:29-32) 셋째로, 순종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22:6-14) 금년에 우리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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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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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2)
- 하나님의 넓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인간의 머리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신 이유는 사랑이 많으시고 마음이 넓으시기 때문입니다. 넓고 크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온 우주를 품으시고 수 많은 죄인을 품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리더의 기준은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면 누구나 사랑할수 있고 골라서 사귀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관계 맺는다면 많은 사람을 얻을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많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며, 사람 얻는 것이 재산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면 좋은 인맥을 가지게 됩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넓은 마음 포용력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긍휼, 자비, 불쌍히 여겨주심, 오래 참으심, 은혜로우심, 인자하심이 풍부하심, 노하기를 더디하심, 지키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선한 목자,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심, 용서하시는 하나님 등 다양하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둘째 아들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아버지 집에서 떠나간 아들, 망한 아들 가난해진 아들, 허랑방탕한 죄를 짓고 실패한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돌아왔을 때 기뻐하고 잔치하는 아버지의 넓은 사랑 하나님의 넓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넓은 사랑은 죄지은 자, 망한 자, 실패한 자 까지도 사랑하시고, 포용하시고, 사랑하는 넓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탕자같은 삶을 살았는데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 받을 자격 없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의 넓은 사랑 으로 선택 받고 구원 받은 자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 고멜을 사랑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가운데 음란하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과 벗되어 살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삶이 변합니다. 사랑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면 감동을 주고 사람들이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게 됩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제일이고 최고의 리더십 관계의 비결입니다.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이기고 승리합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고통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 산다면 승리자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사랑받고 존경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은 넓은 사랑을 가지신 선한 목자 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 넓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의 증거는 ‘서로 사랑하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까지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이 전부이고 지혜이고 능력이고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넓은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책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버리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가 약하여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똑똑하고 성공하는 자녀만 사랑하지 않고 못난 자녀 실패한 자녀, 병든 자녀를 가슴 아파하면서 늘 생각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 전체의 중심은 하나님의 넓은 사랑이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약점이 많아도 내 모습 이대로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 속성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미워하는 것, 죄짓는 것을 안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서 징계하시고 고난을 주어 연단시키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고난과 시험도 감당할만한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힘들 때 불평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마귀는 싫어 하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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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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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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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2
- 그는 곧 바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비겁한 자였는지를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막 14:72) 했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 기억이 나고 깊이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 지도력이 개발되었다. 그가 물 위로 걸어간 사건이나(마 14:2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고백이나(마 16:16; 막 8:29; 눅 9:20), 그 외에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마 18:21)라 하고 묻는 질문에서 베드로가 항상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중심인물을 언급할 때도 베드로는 항상 선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의 우위성은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셨으며(마 8:14; 막 1:29; 눅 4:38),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베드로의 배를 띄우게 하셨고(눅 5:3), 결정적인 중요한 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눅 24:34; 고전 15:5).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도 그의 동료인 주님의 제자들을 다시 모으는 임무를 베드로가 맡게 되었다(눅 22:31-32).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또한 초대교회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본 자가 사도 중에 으뜸이 되는 것과 부합한다. 베드로의 오순절 성령 체험 베드로의 인간적인 절망보다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더 크고 오묘하다. 다듬어지지 않은 바윗돌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체험 이후 새로운 믿음의 옷으로 단장되었으며 반석 같은 굳건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다. 그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받고 하루에 오천 명을 회심케 하는 부흥을 일으켰다.오순절에 행한 설교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일으켰다(행 2:14-36).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한 빌립을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돕기도 했다(행 8:14-24). 백부장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주었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 요한과 더불어 이방인 구원 문제를 옹호하였다(행 15:1-29). 베드로는 초대교회에서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활약한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맹활약 했다. 그는 고린도와 로마에 교회를 세움으로서 초대교회 지도자로서 많은 일을 했다. 사도행전 전반부 12장에서 15년간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탁월한 지도자였다. 다른 사도들은 별 언급이 없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성전에 갈 때도 베드로를 따라갔다(행 3:1). 요한은 주도권을 가지지 않은 둘째 인물이었다. 사도들 보다는 일곱 집사들을 언급하고 있다. 스데반의 설교와 그의 지도력은 탁월했다(행 6:8-8:1). 빌립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났을 때 사마리아와 가사로 가는 도상에서 설교했다(행 8:4-8, 26-40).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별하고자 할 때 제의한 사람도 베드로였다(행 1:15-22). 베드로는 오순절에 순례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그의 설교를 들은 자들 중에 삼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행 2:14-41),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 하러 갔다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도 일어났다(행 3:1-26).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다(행 4:1-3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판 얼마를 감추고 사도를 속였을 때 베드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저주함으로 죽었다(행 5:1-11). 그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났다(행 8:1).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녔다(행 9:32). 당시 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었으며 베드로는 룻다와 욥바에서도 사역했다(행 9:32-43). 그는 가이사랴 백부장 고넬료 집에서도 복음을 전했다(행 10:1-11:18). 이 같은 것을 볼 때 예루살렘과 그 부근에서 베드로의 지도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행 12:17).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디 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아내가 동행했음은 분명하다(고전 9:5). 아마 시리아 안디옥으로 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는 확실히 그 성을 방문했다(갈 2:11). 고대 전승에 의하면 그가 안디옥에 첫 번째 감독을 했다고 한다. 그가 초기에 그 교회를 방문 했으리라는 것과 실제로 영향을 끼칠 만큼 오랫동안 그 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소아시아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곳 역시 방문했을 것이다. 고린도에 게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와 이웃 지역에도 갔을 것으로 본다(고전 1:12). 베드로의 로마 방문에 관한 것에 대한 많은 견해는 있으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없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 5:13)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당시 로마를 은밀히 바벨론이라 불렀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도 로마로 가는 도상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도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로마에 가서 복음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이레니우스(Irenaeus)도 바울과 베드로는 로마에서 설교하면서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베드로 전서가 기록된 곳은 로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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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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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순 교 자
- 한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순교가 옛날에 믿음이 좋은 어른이 자기 믿음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것이란 것을 알고 자기 엄마에게 대뜸 “엄마, 엄마도 순교자 처럼 순교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요즘같이 실제 보기에 평화스러운 시대에는 순교자가 나타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잘 안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의 박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일어나는 순교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저 우리의 마음만 아파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말이나 행위로 자신 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행위를 말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순 교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오랜 박해를 받아온 유대교에서 순교 의 이상적 형태가 전승되어 왔었는데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종교들이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웃에 순교자의 삶을 살고 간 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함안 부봉 교회의 이현속 전도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처럼 유명하진 못했으나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 하고 생명을 버리기까지 일제에 맞섰던 것은 정말 존경할 만한 일이다. 일본 순사의 혹독한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주님을 배반하지 않 은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발휘한 최고의 순교자요 변치 않는 믿음의 훌륭 한 선배라 하겠다. 훌륭하고 이름 있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 것은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한 것이기에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평양 형 무소로 이송되어 간 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순교하신 것은 슬프다. 지금은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요즘은 부모도 교역자도 순교자의 값진 순교의 삶을 교육하기보다 늘 축복에만 치중하다 보니 회개와 순교란 말씀을 듣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을 쉽게 애국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지 성역화 작업은 놀라운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신총회나 재건 총회 이외에는 개신교의 대부분이 신사에서 참배했으며 전쟁을 지지하고 배교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참회는 고사 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순교한 자들을 입으로만 높임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후예인 양 자랑하는 모순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위선 이다. 특히 외국 선교사 묘지도 단장하고 그 역사를 소유하여 자기의 업적을 높이 거나 상술에 이용되는 것은 순교자를 다시 한 번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000년이 되면서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경쟁하듯이 역사실과 박물관을 건립 하여 유적지 지정에 힘을 쓴다. 100년 넘는 교회들은 왜곡까지 하면서 자기 교회 역사를 거룩하게 미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뼈를 탑에 넣고 모시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선배의 순교신앙을 정기적으로 교육하여 그 정신을 이 어 받고 순교신앙을 이어받는 뼈대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몰락의 위기에 서있는 기독교의 쇠퇴기를 이길 수 있고 혼란기에 겪고 있는 죄악의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와 부모는 함께 즐거운 하 루를 보내고 축복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순교지에 들러 순교자의 숭고 한 믿음을 이어가도록 학습지를 제공하거나 목회자는 정기적으로 순교에 관한 내용을 설교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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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순 교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