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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8) - 묘서동처(猫鼠同處)
동상이 시작되면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져 냉동된 부위 자체보다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한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동상은 추위로 인해 혈관이 좁아지기 때문에 냉동된 부위 자체가 아니라 그 인접 조직이 혈류 감소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추위로 인해 이러한 조직의 소 혈관에서 혈전이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이 혈전은 혈액의 흐름을 심하게 제한하여 조직이 괴사하게 됩니다. 결국, 괴사한 조직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신체 부위는 절단해야 합니다. 구습에 젖어서 ‘동상’에 걸린 고려학원의 썩은 부분은 과감히 절단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 이대로 간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컨설팅 전문가도 아니고 돈의 흐름도 읽을 줄 모르는 목회자입니다. 단순히 총회 산하의 기관이 “내 것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대안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안목이 깊으신 분들께서 좋은 안을 창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대학교 현재 부산의 초중고의 실정은 점점 폐교의 수준입니다. 부산의 23개 대학은 7개 대학으로 구조조정이 됩니다. 게다가 부산 근교의 양산이나 정관 쪽에 산단 이 생겨 일자리를 따라 부산 인구가 이동하고 있고, 그 주변의 학교들은 포화상태입니다. 초,중,고 가 이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학력 인구 감소로 대학은 갈수록 어려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고신은 천안에 캠퍼스가 있습니다. 서울의 학생들은 천안까지 통학이 가능합니다. 인기 학과를 신설하여 천안으로 옮기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고신이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신학 과와 의과는 송도 복음병원을 중심해서 확충 조정하고, 중부권 이상 신학교육은 천안에서 운용하면 충분합니다. 가능하면 부, 울, 경, 호남을 중심한 신학과도 역세권으로 학사를 이전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필수 조건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 이런 경우, 현재 신대 원 자리는 역시 좋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매각하여 역세권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총회 전체적으로 볼 때 천안, 아산 역에서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좋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자연스럽게 대학과 대학의 행정 체계가 통일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문제가 되어 왔던 대학과 신대원의 교류도 조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목회자 후보 양성 목사를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도 현재 시스템은 소명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5개 노회에서 유치원생부터 목회자, 사모, 선교사 후보를 선별하여 노회와 교회가 함께 기도하고 후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로 진학할 때 7년 과정을 교회와 노회가 100% 장학금으로 후원을 하고 사관학교와 같이 엄격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35개 노회에서 각각 3명만 책임지면 100명의 준비된 소명감 있는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고신대학교 매각 과감한 구조조정을 하려면 약 15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저는 200억 정도의 자금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한평생 학교를 위하여 수고하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수와 직원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최선을 다해 대우를 해 준다면 고신의 식구들로서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복음병원의 부실 경영의 원인은 악성 카드깡입니다. 600억 정도가 되는 약품 대금을 일시에 해결해 준다면 복음병원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조의 횡포도 차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학교가 어려울 때 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총회 산하의 기관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재원은 현 고신대를 매각하여 운용할 수 있습니다. 총회 회관과 산하 전 기관을 한 곳으로 고신대를 매각하여 남은 금액과 현 고려신학대학원을 매각한 금액으로 천안아산역에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캠퍼스를 건축해야 합니다. 방만한 운영으로는 안 됩니다. 가장 검소하게, 가장 운영비가 적게 드는 구조로, 총회 산하의 모든 기관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그림으로 건축해야 합니다. 총회 산하는 모든 기관과 상임위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과 간결한 소통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당면한 위기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런 변화의 핵심에는 반드시 교회 중심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총회의 품속에서 우리의 미래가 교육을 받는 그림입니다. 단순히 책에 의존한 교육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육, 관계와 만남의 교육 현장이 될 것입니다 (창 41:53-54)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 우리는 이제 요셉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아직 골든타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골든타임의 끝자락의 위기가 기회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7년을 준비해야 고신의 미래는 밝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하게 눈앞의 명예와 이익만 탐한다면 고신에도 ‘기근’이 찾아올 것입니다. 학교, 병원, 교회가 도미노처럼 무너지지 않으려면 지금의 총회 구조와 운영을 멈추고 재정비해야만 합니다. 이전처럼 해서는 미래가 없습니다. '묘서동처'(猫鼠同處)란 말이 있습니다.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와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북송 때 이것을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라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한 군인이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빨고 서로 싸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 고양이와 쥐를 임금에게 잡아다 바치자 관료들이 복이 들어올 것이라며 기뻐했으나 단 한 관료만이 “이것들이 미쳤다”라고 한탄했다는 역사 기록에서 유래됐습니다. 총회 지도자들이 교권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묘서동처'(猫鼠同處)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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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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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공산주의와 공동체주의
요즘 한국 정치사회 세태를 보면 한번쯤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이념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앞에 놓여있는 정치사회발전의 모습들이 적이 걱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국가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법이 명시하고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76년을 넘기는 정치의 부침 속에 국가는 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의 존재성이다. 지금 한국정치발전의 흐름은 날로 혼돈해지며 국가정체성을 혼란케 하는 갈등이 크다는게 문제이다. 오늘날 정치사회이념의 화두이기도하다. 좌파 우파의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정치사회시스템으로 바꾸자는 무서운 주장이 세력화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공부해봐야 할 아젠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필자는 정치학의 전공자가 아니다. 피부로 듣고 책을 읽고 극히 상식적인데서 의견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정치이념의 경쟁적 현장은 18세기 유럽 독일 영국 프랑스가 중심이다. 18세기 초 유럽은 봉건주의 사회였지만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서서히 정치이념의 장이 생겨났다. 영국의 스코틀랜드출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이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자유민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이 된다. 산업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자본가의 등장, 규모의 경제 즉 공장기업 경제가 발전한다. 영국 프랑스 등 시민혁명에서 발호된 공화정의 자유민주주의가 자본경제와 함께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의 착취행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에 독일출신 정치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1800년 초에 급변하는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나타나는 노동문제를 보고 고민에 빠진다. 오늘날 정치사회 이념의 갈등에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이념의 태동이다.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이상적 이념으로 각광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생산결과물을 막대하게 분배하는 바탕에서 사회주의이념을 아주 과학적 정치이념이라고 명시했다. 공동체의 개념이자 협동적 조직모델이 바로 사회주의 바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이상적 이론적 이념으로서만 머물 수 밖에 없었다. 마르크스와 동시대 엥겔스의 사회주의 이념에 힘입어 나타난 유럽에서 서서히 노동자혁명의 기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 본격적 노동자 운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이 불을 붙인다. 러시아 사회주의 볼세비키 혁명이다. 사회주의 투쟁적 혁명의 공산주의가 생겨나는 계기이다. 독재사회주의가 곧바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독재국가로 자리매김한 러시아 중국 북한의 정치행태를 낳게 된 배경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상적 이론이 현장에서 나쁜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 배경설명을 성경의 공동체주의의 뿌리로 견강부회하는 주장이 있다. 사도행전 2장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로 되어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령이 임하고 각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이웃사랑의 엑기스인 함께 나누며 공동체 삶의 모본을 보였다. 초대교회 믿는 자들의 교회공동체의 모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중심의 엄격하고 경외로운 은혜의 삶이 전제되어야한다. 오늘날 교회 또한 공동체운영이 물질의 나눔으로 근간을 이루게 된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중국의 공산주의가 변화하는 잠깐시대를 지나 새로운 공산주의 정치행태가 우리 주변에서 발전하고 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복음의 바탕에서 발전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밀려들고 있다. 교회 공동체를 참칭하고 농락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경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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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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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7)- 관언유착(官言癒着)
언론이 독자들이나 대중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사실이 아닌 잘못된 기사나 중심을 잃은 기사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줍니다.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몇 해 전 우리 노회에서 모 목사를 순회 선교사로 파송한다고 기독교보에 기사가 올랐습니다. KPM 이사장과 담당자들이 파송 예배에 순서를 맡으며 파송 예배 사진까지 첨부하여 누가 봐도 총회에서, KPM에서 파송하는 선교사처럼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노회 파송 선교사도 아닌데 과장된 허위 기사를 올릴 수 있느냐고 기독교보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몇 주 후 신문 구석 어느 페이지에 짧은 한 줄로 000교회 순회 파송 선교사로 정정한다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 기사를 본 대부분 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KPM 파송 선교사로 알고 있습니다. 짤막한 정정 기사가 났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도 “부산서부노회 파송 선교사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KPM이나 노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처럼 위장을 하고 그것을 교단 신문인 기독교보에까지 기사화한 것은 그 저의를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디 이 한 건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일이 발생하여 총대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거짓된 걸음을 걷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기독교보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보가 KPM 선교사로 파송하는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몰랐다고 하는 말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의 파장도 결코 간과할 수 없지만, 신앙과 교리, 교회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의도적인 허위 기사는 고신 신앙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문제는 고신 언론사는 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유지재단 이사회는 총회장을 당연직 이사장으로 해서 총회 기관 중 최상위 기관으로 총회를 잘 알고, 총대들의 지지를 받아 총회 산하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유지재단 이사회가 직무유기 한 것입니다. 학원 이사들이 잘못할 때만 소환할 것이 아니라 유지재단 이사회가 잘못할 때는 그 파장은 훨씬 더 크고 중요하기에 반드시 소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독교보가 총회 기관지인지, 유지재단 이사회 관할에 있는 기관지인지, 기독교보 자체 언론지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된다고 입을 모읍니다. 언론사 사장 얼굴이 기독교보에 빠지는 일이 없자 이 일에 대해서 총대들은 물론이요, 유지재단 이사회에서도 지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는 마이동풍입니다. 순교 정신을 기본으로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하는 고신의 기관지인 기독교보가 본류의 신앙을 이탈한 것은 이미 옛말이고 특정 계파에 포진한 자들이 기고하는 재고 되어야 할 지나친 인문학적 논의와 신앙 고백적 정체성을 벗어난 잘못된 사상들이나 도배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고신 신앙을 가진 목회자들과 장로들, 교회들은 알게 모르게 기독교보에 대한 불신으로 불매 운동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입니다. 5월 2일 자 코람데오닷컴에 “교계 언론 편집 책임자의 이학규 장로 고소 건, 고검 재정 심사에서도 또다시 기각 판결”이라는 기사가 올랐습니다.(코람데오닷컴 참조) 이 사건의 실상은 전국 남전도회 임원으로 있는 모 장로님이 유지재단 이사로 출마하려고 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웠는데 그해에 언론사 사장 선거가 있어 보수 측 인사가 유지재단 이사가 되면 사장이 되는 길에 장애가 될 것 같아 코람데오닷컴의 기사대로 언론사의 직원이 보수 측에서 후보로 내세운 장로를 “사퇴 종용”했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총회 산하 교회를 잘 돌아보고, 총회의 기관들을 바르게 잘 관리해야 하는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시작부터 유지재단 이사를 선출하는 일반 총대들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는 계파와 개인의 이권과 자리가 그 배경이 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재미를 본 자들은 이제 총회에서 골치 아프게 투표하고 경쟁하는 것보다 아예 노회 총대를 조정하는 기가 찬 수법으로 발전했습니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파에 표를 던질 사람을 골라서 총대라는 자리로 매관매직을 하고, 각 노회 지도급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총회 상임위의 자리로 매관매직해서 4월 노회 총대 선거가 끝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되는 모양새로 발전되었습니다. 이학규 장로가 전국 남전도회 회장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 함께 임원으로 봉사하던 모 장로가 “사퇴를 종용”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한 것이 코람데오닷컴 에 기사 실린 것과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평생 법 없이도, 법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사는 목사, 장로가 이 일로 인하여 교회 생활이나 신앙생활에 방해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경찰서와 법원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고 어려움을 당했던 것에 대해서 고신 언론사를 관리하는 유지재단의 총회장과 목사, 장로 이사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궁금합니다.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이학규 장로는 신앙적으로 잘 해결하고자 언론사의 불법 선거 개입 못 하게 해달라는 진정서를 총회 선관위에 제출했더니 총대가 아니라 진정서를 접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랍니다. 참 훌륭한 총회 선거관리 위원회이십니다. 그래서 “여기 보냈다, 저기 보냈다” 서류 핑퐁 게임을 하다가 결국 사법기관에 판단을 받기까지 하면서 이학규 장로가 당한 심적 피해, 정신적 피해, 일상 업무 손해의 피해는 누가 보상해줍니까? 고신총회가 이렇게 기본을 상실하고 무책임하게 하면 안 됩니다. 펜은 검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오보도 문제이지만, 언론이, 신문이 의도적이고 사욕에 치우쳐 고신의 정체성에 위배 되는 글이나 기사를 올리고, 무책임으로 일관할 때 고신총회 산하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미치는 파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총회 임원회와 학원이사회가 지난 총회 시 총대들을 속이고 총장선출 규정을 통과시켜 불법으로 총장을 선임했다고 신문에 기사화되어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볼 때, 총회 임원회의 수장인 총회장이 유지재단의 당연직 이사장이기에 이 사실조차 그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현 총회장은 기독교보 발행인이 아니기에 변명하며 피해갈 수 있는 좋은 길도 열려 있습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재정적인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릅니다. “반려동물을 장례식”에 대한 안건이 고신총회 신학부에서 재론되고, 어떻게 고신총회에서 “그따위 안건이 거론되느냐”는 회원들의 호통에 경남노회 모 회원이 나와 옹호 발언을 하며 “지난달에 우리 찐이(고양이)가 죽어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하늘나라로 보내줬다”고 말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총회가 불건전하고 이단성이 있어 교류를 금지해도 전혀 문제의식 없이 그런 모임에 참여하고, 순서나 자리까지 맡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신입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는 300M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전하는 것은 법에 명시가 없기에 괜찮다고 하는 고신입니다. 핑퐁 게임을 하다하다 안되면 법리해석을 문제 삼아 법제위에 해석을 요청하여 본질을 잊어버리게 하고 계파싸움 진영싸움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고신입니다. 양파도 아니고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고신이여...... 언론은 “言路”를 여는 것입니다. 言路가 막히면 세상은 암흑세계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리의 개가 먼저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때지어 짖어대듯이 기독교보가 먼저 총대를 메고 총회 여러 현안의 심각성을 알리면 동시에 총회 여러 곳에서 포문을 열고 동참할 것입니다. 언론은 여론을 집약하고 전문가들의 진단과 의견을 수렴하거나 민심을 파악한 후 사안에 따라 전쟁(?)도 불사한다는 각오로 펜 끝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언론의 사명입니다. 총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선도해야 합니다. 독선의 권력을 향한 비판은 언론이 지향해야 할 우선순위이자 언론 존재 이유입니다. 이 가치관이 상실되면 결국 관언유착(官言癒着)이 되기 쉽고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관제언론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사리사욕에 길들어서 소위 ‘독선과 권력’의 ‘종’이 된다면 스스로 펜을 손에서 내려놓아야 함은 불문가지입니다. 기독교보가 그렇게 길들어진 “관보(官報)”라는 비판을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 열심 짖어야 할 개가 요즘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주인 행세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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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6 : 성가대와 찬양대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평생을 예배드리면서도 때로는 이 말이 옳은가 틀리는가에 대한 의문이 되는 용어들이 많다. 본 기고의 목적이 이를 바로 알고 사용하자는 취지에서 계속 기고하지만, 필자 자신도 때로는 헷갈릴 때가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예배 중의 순서에서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통합 측 총회에서는 찬양대라고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수많은 교회들이 성가대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성가대(聖歌隊)와 찬양대(讚揚隊)의 용어 차이 두 용어는 일반적으로 보면 거의 같은 말이다. 국어사전에도 성가대는 “교회 등에서 성가를 부르기 위해서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고, 찬양대도 “남녀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합창대”로 둘 다 영어로도 ‘choirs’로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같은 듯 다른 용어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가와 성가대란? : 먼저 일반적으로 성가라는 용어는 범(凡) 종교적으로 사용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음악과는 다른 거룩한 음악이란 뜻이다. 그래서 성가는 범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는 ‘종교음악’으로서 세속적인 노래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용어가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직 찬양 혹은 찬송으로 표현되어 있다. 2. 찬양과 찬양대란? : 찬양이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서 참된 경건의 중요한 요소이다. 즉 찬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성육신과 십자가 지심과 부활, 종말과 재림 등의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찬양이고 또 함께 부르는 것이 찬양대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찬양은 개역성경에는 213회, 찬송은 98회, 찬미는 14회가 나온다. 하지만 성가란 말은 한 곳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찬양은 일반 종교의 성가와는 차원이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만을 높이는 노래인 것이다. 3. 성가와 성가대란 말을 교회에서 사용해 온 이유는? : 왜 성경에도 없는 이 용어를 그동안 교회에서 사용해 왔을까? 그 이유는 1976년에 나온 공동 번역 성경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을 했다. 또 하나의 성가대란 용어의 기원은 한 출판사가 흑인 영가의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른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 せいかた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을 섬기며 노래할 때 쓰는 용어)가 직수입되면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서 그동안 찬양대라고 했던 용어가 성가대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성가대란 말은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가대란 말은 1958년 출판된 동아출판사 사전에도 성가대란 명칭이 없었으나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에서 처음 등재되었고 그 이전에는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사용되는 곳은 일본의 ‘세이까다이’뿐이었다. III. 결론과 제언 앞서 서론에서 밝힌 대로 성가대와 찬앙대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사용해 왔기 때문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성경에도 없는 말이며, 일본어의 잔재라는 문제도 있다고 볼 때, 또한 타 종교와 같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굳이 성가대란 말을 계속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성경에도 없는 성가나 성가대란 말보다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찬양, 찬양대란 우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올바른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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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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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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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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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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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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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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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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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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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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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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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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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
- 사랑의 리더십 사랑이 제일입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중요한 것을 아는데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사랑은 성령충만의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해야 사랑하게 됩니다. 리더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면 부작용이 적고 열매가 좋게 맺힙니다. 사랑의 리더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이 지혜요, 능력이요, 리더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사랑해 주는 자를 좋아하고 따르게 됩니다. 사랑이 인간관계를 잘 되게 합니다. 미움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미움을 가진 리더는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 관계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심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누가 큰 자일까요? 사랑이 많아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좋은 영향력을 주고 감동을 줍니다. 사랑하면 이해합니다. 대화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줍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섬김, 대접 받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후회가 없게 되고,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진 시대입니다. 인간은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사랑 받기만 바라지말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삶의 지혜, 관계의 지혜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는 사랑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리더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랑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리더십으로 좋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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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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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장소와 상황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장소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루어 진 사건이라고 한다. 마태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거니시다가 시몬과 안드레를 처음으로 부르셨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불렀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마4:18-22, 막1:16-20). 누가복음에는 부르신 장소는 일치하나 안드레에 대한 언급이 없고, 야고보와 요한도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눅5:1-11). 요한복음은 안드레와 형 시몬이 세례요한의 제자였음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을 보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어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것을 권고했다(요1:35-42).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인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안드레이며 그곳은 요단 남쪽 골짜기였다(요1:28). 안드레는 그 형 시몬에게 말했고 그들이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중 주님을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부르심에서 처음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에 언제나 그 이름이 첫 번째 불리게 된다(마10:2, 막3:16, 눅6:14, 행1:13).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이 그의 고향이었다(막1:21, 29). 요한에 의하면 빌립의 거주지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리였다(요1:44). 이는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 거주 지역을 갈릴리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벳새다도 갈릴리에 있는 한 동리로 요한이 생각한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 전도하실 당시에는 이들 형제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들이었다(눅5:10). 누가는 베드로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기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더불어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마4:18). 즉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고기를 잡지 못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물을 다시 내릴 것을 명령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는 주님의 말씀처럼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부름 받을 당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마8:14, 막1:30, 눅4:38). 본문을 보면 마태가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사도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게바가 그의 아내와 여러 교회의 선교 여행에 함께 했음을 진술하고 있다(고전9:5).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베드로의 인간성 그의 성품은 다혈질적이었다.4 생각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도 많은 실수로 넘어지기도 했다. 베드로의 성급하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그가 물 위로 걷고자 했던 사건이다. 주님은 그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다(마14:28-32). 그러나 그는 제자들 중 최초로 주님에 대한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다(마16:16). 하지만 곧 이어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격렬한 태도로 반대했다(마16:22).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23). 또한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베드로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다(요13:4-11). 주님이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모든 제자가 예수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 있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요18:25-27).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 사건은 4복음서 기자들 모두가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에 의하여 이르되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저주와 맹세로써 이루어졌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마26:74).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명세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하니 닭이 두 번 울었다. 그는 곧 바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비겁한 자였는지를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막14:72) 했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 기억이 나고 깊이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 지도력이 개발되었다. 그가 물 위로 걸어간 사건이나(마14:2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고백이나(마16:16, 막8:29, 눅9:20), 그 외에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마18:21)라 하고 묻는 질문에서 베드로가 항상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중심인물을 언급할 때도 베드로는 항상 선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의 우위성은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셨으며(마8:14, 막1:29, 눅4:38),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베드로의 배를 띄우게 하셨고(눅5:3), 결정적인 중요한 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눅24:34, 고전15:5).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도 그의 동료인 주님의 제자들을 다시 모으는 임무를 베드로가 맡게 되었다(눅22:31-32).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또한 초대교회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본 자가 사도 중에 으뜸이 되는 것과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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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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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경의 ‘라마나욧’과 오늘의 대한민국 ‘광화문’
-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대선지자 사무엘이 늙어 고향 라마에 머물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사무엘에게 나라의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한다. 이때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오가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흥미롭다.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하니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으면서 여호와께 기도한다. 또한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당신을 버리고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하는데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리고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에게 잘 경계하게 하고 왕의 제도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을 준비케하고 사울을 택하여 라마에서 기름 부어 세워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운다. 성경에 나타났듯이 사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데 처음에는 당시 이웃 강대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전의 공적을 세우고 통치를 잘했으나 갈수록 사울의 이스라엘 통치는 잘못되어갔다. 무엇보다 우상에 의지하는 죄를 범했으며 왕이라는 자기 본위의 통치에 머물면서 여호와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전쟁사 이야기가 모든 역사였다. 큰 문제가 생긴 것은 다윗이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사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어린 목동이었으나 불타는 애국심에 철천지원수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일약 이스라엘의 대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핍박에 시달렸으며 왕이 되기까지 쫓겨 다녀야 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의 실패의 국가관리에 실망하고 다시 고향 '라마'로 돌아가 거기서 '나욧'이란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쓴다. 이즈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라마로 도망가 사무엘을 만나고 학교 라마나욧에서 사무엘의 지도를 받게 된다.(삼상19:18) 그리고 다시 사울에게 쫓겨다닌다. 여호와는 가만 있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사울의 끝을 경고하고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2대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한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세우게 된다. 성경 사무엘상과 하에 기록된 사무엘과 사울 다윗의 이스라엘 왕정국가의 초기 개략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무엘의 라마나욧에서 사울이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이 한 나라와 지도자를 만들어가는데 깊고 오묘한 뜻이 있음을 은혜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닐지라도 백성이 원할 때 허락하시고 또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을 세워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엮어가심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에 치우친 사울과 신본 주의에 성실한 다윗이 세상을 관리하는데 성패의 결과를 달리 낸다는 점이다. 좀은 비유가 다를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정점인 이때 광화문에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듯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민중의 공동체 힘이 민주주의 선거의 결과를 낸다. 5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선출됨이 이러한 과정이다. 촛불 혁명의 힘이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잘잘못의 평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윤석열 현 대통령 또한 광화문의 애국운동의 불씨에서 민주주의 과정을 거쳐 일약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미래에 행복을 줄 것인가, 불행이 될 것인가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발자취를 잘 읽고 복리민복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길 기대할 뿐이다. 다만 정권의 전환기에 너무 거친 말들이 오고 간다. 적폐 청산이 화두가 되고 적폐가 또 적폐를 만들어 반복되는 슬픈 정치 현실이 되고 있다. 제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자면 위정자들이 성경 사무엘서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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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성경의 ‘라마나욧’과 오늘의 대한민국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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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8 :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용어의 논란
- I. 서언(序言) ‘어떤 말이 바른 말일까?‘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들은 어떤 것일까?’ 또 ‘잘못사용하고 있는 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본지에서 이를 계속 연제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런 질문 앞에 항상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은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는 ‘중보기도(仲保祈禱)’란 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중보기도(仲保祈禱)”,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용어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필자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용어의 어원의 뜻으로 본다면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어사전에도 등제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아닌 교인의 입장에서 이 용어의 사용은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교계에서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필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이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가 많다. 그 많 큼 이 말은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의미는 맞지 않을지라도 아예 기독교적 전문용어로 사용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어 다소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먼저 중보자(仲保者)란 용어는 예수님에 대한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시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의미에서 중보자로 호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절대적인 의인으로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절대적 사랑을 베푸시어 하나님과 가까워지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여 중보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보기도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교황이나 사제가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나 교인이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합동 교단에서는 2002년 9월 총회에서 이 말을 쓰지 않도록 결의 한 바 있고, 여러 신학자들도 이 용어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거나 어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보가 아닌 중재(仲裁)라는 말이 합당하다. 또한 이것이 기도로 연결될 때 그것은 “중재 기도”가 된다. 하지만 중재기도란 말이 한국교회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다면 어떤 용어가 적합할까? 여기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는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라는 말이다. 원어의 뜻은“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가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이웃을 위한 기도”, “도움 기도” 등도 적합한 좋은 말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필자의 고민을 피력하자면, 너무 국어 사전적인 어법과 신학적인 잣대로 용어를 구별하다 보니 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대안으로 내 놓을 말도 많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은 지금까지 논한‘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중요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고착화 되어버린 말을 지금 와서 바로 고친다고 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를 계속 지적하고 논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이런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할지라도 무엇이 올바른 말인지는 분별하고 바로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논의를 계속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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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8 :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용어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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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학교 괴담
- 전학 오기 전 시골학교에서도 이상한 소문은 있었다. 밤 12시만 되면 교내 모든 동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이야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싸움을 한다. 책 읽는 소녀의 책장이 넘어간다. 해태 동상이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 입을 통해 전해졌다. 얼마나 오래된 소문인지 확인조차 어렵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잠깐의 오싹함은 있지만 관심이 지속되지는 않았고 해가 진 후 학교에 오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전학을 온 대도시의 학교에도 같은 소문이 돌았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동상이 움직이고 운동장은 또 다른 존재들로 시끌벅적 하다는 이야기. 이제 머리가 조금 더 커서 그런지 의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 용기까지 더해졌다. 밤 12시가 되면 정말 우리 학교는 그렇게 변할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그래, 한번 직접 확인해 보자.” 늦은 밤 찾아간 학교, 진실을 찾아서 난 이곳에 왔다. 너무 캄캄하다. 오늘 길 문방구도, 오락실도 불이 꺼지고 학교에는 중앙 현관 불만 켜져 있다. 주무시던 할머님께 아무 말도 없이 나온 것이 조금 죄송스럽지만 오늘 나는 꼭 ‘진짜’를 봐야만 했다. 여름인데 몸이 떨리는 것을 보니 이상한 소문을 나도 믿는 걸까? 빈 운동장과 스탠드, 그리고 동상의 적막함이 더 무섭다. 차라리 술 취한 아저씨나 불량스런 형들의 떠드는 소리가 있었다면 덜 무서웠을 것 같은데... 조금만 참자. 그럼 모든 것이 밝혀진다. “12시” 여전히 고요하다.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더 무서운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의 동상도 그대로다. 운동장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가끔 바람에 움직이는 그네가 내 닭살을 돋게 만들었지만 직접 다가가 그네를 흔들어 보고는 안심이 되었다. 더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어슬렁거려 본다. 이제 제법 용기가 났을까? 학교 뒤편의 동물 사육장도 가보고, 자그마한 인공 호수에도 가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할머니 곁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깐. 다음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당당히 어제의 무용담을 나누었다. 밤 12시, 학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곳이라는 것을 알렸다. 친구들은 황당하게 나를 바라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그냥 담담히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다시 확인할 친구도 없었다. 학교의 이순신 장군님과 세종대왕님은 싸우지 않는다. 책 읽는 소녀는 내가 졸업 때까지 여전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학교는 밤새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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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학교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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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강한 힘으로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
- 믿는 자 안에 있는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능력을 알고 사는 자가 몇이나 될까? 통신탄할 일이다. 무지 때문이고, 사단에게 속아서 그렇다. 믿는 자 안에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믿는 자가 알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강한 힘을 얻고 싶어만 한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아는 사람은 적다. 예수를 믿는다면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큰 능력”이 당신 안에 활동하고 있다. 다시 한번 성경말씀을 잘 들어보라.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5:3)고 묻고 있다. 대답해 보라. 우리의 생각 속에는 행위와 성령 충만을 연관시키는 고리를 끊기 힘들다. 너무 깊이 다른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생각에 믿음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믿음이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엄청난 믿음이 있는 자다. 감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자다. 예수를 믿는다면 믿음이 큰 자다. 동정녀 탄생을 믿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믿음이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믿는 믿음은 놀라운 믿음이다. 당신은 믿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믿음이 크다고 믿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행함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것을 믿으면 행함은 따라오게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당신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하셨다. 믿는 당신에게 성령의 샘이 터졌다. 조금 졸졸 흐르는 샘이 아니다. 생수의 강이다. 나는 이전엔 몰랐다. 그래서 늘 충만함만 간구했다. 어느 날 이 사실을 깨닫고 자유하게 되었다. 당신도 이 시간 자유 하라. 금방 자고 일어나도 생수의 강은 철철 흘러넘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는 사실을 아는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8)고 하셨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고 있다. 나는 (엡1:19 새번역)을 붙잡고 몇 개월을 기도하면서 춤을 춘 적이 있다. 정말 신바람이 났다.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나는 대답했다. “주님, 압니다. 제 속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압니다.”하고 감사하며 소리를 질렀다. 수개월을 이 말씀으로 기도 한 적이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말해 주었다. “성한아, 너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해.” “그래, 난 알고 있어 내 안에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능력을 다 접수할 거야. 4복음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다 접수할거야!”라고 확신을 가졌다. 나는 새번역 성경을 읽다가 “아멘”하고 소리를 질렀다. 알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 나는 압니다.”라고 주님께 올려드렸다. 새벽마다 수십 번, 수백 번을 고백해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 반복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오성한”이라고 부르며 수백 번을 말해 주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기도한 내용을 나에게 각인시키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에게 이야기 해주는 일을 성령의 음성인줄을 어느 날부터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멘으로 반복해서 내가 나에게 들려준다. 창조주를 믿는다면 우리 마음을 지키시는 하나님도 믿어라. 창조주를 믿는 것과 동일하게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도 믿어라.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의 말씀 따라 나의 생각을 성령께서 지키신다고 믿는다. 나의 생각을 성령의 생각으로 믿는다.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알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만을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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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강한 힘으로 활동하는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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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자기 안에서 나오기
- 한 작은 아파트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을 하여서 벌써 제 각각 살림을 나가서 명절에만 가끔씩 볼 수 있을 뿐이었고, 아내도 얼마 전에 세상을 뜨고 나자 이 분은 삶의 의욕을 점점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매일 신세 한탄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자식들은 키워봤자 별 수 없다느니,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인데 뭐한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하는 푸념을 하며 하루하루를 자신 안에 갇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아파트 밖을 산책하는데 출근하는 사람들과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 같이 뭔가에 쫓기듯이 종종 걸음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얼굴들이 밝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윽고 바로 앞집에 사는 학생 하나가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것을 보고는 얼떨결에 “공부하는 것 힘들지. 그래도 힘을 내 봐!”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자신을 보고 웃으면서 “고맙습니다. 할아버지!”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이 할아버지는 갑자기 가슴에 환희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어떤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 내가 이거라도 해야 하겠다. 인생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언제까지 내 안에만 갇혀 살 것인가? 아침에 나와서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면 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지 않겠는가?” 바로 그 결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는 다음 날 아침부터 깨끗이 면도를 하고 정장을 차려 입고는 아파트 입구에 서서 출근하는 아파트 사람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잘 다녀와요.” “오늘도 파이팅.” “힘 내봐요.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오늘은 멋져 보이네요.” 등 등 어제 밤에 생각해 둔 여러 가지 인사들을 사람들에게 했습니다. 그러자 아파트 주민들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날마다 그렇게 정장을 차려입고 인사를 하는 할아버지를 아침에 만나는 것이 점점 격려가 되기 시작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파트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늘 자기 연민에 빠져서 자기 안에 갇혀 살았던 할아버지가 자기 안에서 나와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시작했을 때에 자신도 삶의 의욕을 찾고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경 욥기는 믿음의 사람 욥의 극심한 고난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욥기의 결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욥을 고난에서 회복시키시되, 그가 고난 중에 잃어버린 것을 이전보다 꼭 갑절로 회복시키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욥이 고난에서 회복된 전환점이 언제였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욥기 42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은 처음에 자신에게 찾아온 고난 때문에 자신 안에 철저히 갇혀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 안에게 갇혀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이 오히려 “네가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라는 투로 자신을 정죄했을 때에 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더 꽁꽁 갇혀 버렸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때에 갇혀 있던 자신을 깨고 나와서 오히려 그 친구들을 축복하면서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으시고 오히려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를 이전보다 갑절의 복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 욥기는 중요한 인생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내가 고난이나 삶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내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 오히려 내 자신을 깨고 나와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오히려 나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아직 자기 안에 갇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그만 그 안에서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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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자기 안에서 나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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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좋은 습관을 만들라
-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의 몬트레이 지역에는 많은 펠리컨이 서식하고 있다.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 중 작거나 상품성이 없는 물고기를 펠리컨들에게 먹이로 던져주니 습관이 된 펠리컨들은 야생의 본능을 잃게 되어 물고기 사냥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곳에 버려지는 물고기를 처리하는 시스템이 생기자 어부들은 더이상 펠리컨들에게 물고기를 던져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야생의 본능을 잃어버린 펠리컨들은 물고기를 사냥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그대로 굶주려 죽어가고 있더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어 다른 지역의 펠리컨들을 들여다 놓았다고 한다. 그 결과 야생의 본능이 되살아나 물고기 사냥을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경과 한 후에 나타나는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몸에 배고 행동 양식이 되어 무의식중에도 생각과 말, 행동을 좌우하게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습관은 삶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이 된다. S. R. Cobey는 성공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이들에겐 ‘7가지 좋은 습관’이 있었다고 하였다. 첫째, 주도적인 습관. 둘째,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는 습관. 셋째,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는 습관. 넷째,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습관. 다섯째,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키는 습관. 여섯째, 시너지를 활용하는 습관. 일곱째, 심신을 단련하는 습관이라 하였다. 반대로 C. Emery라는 심리학자는 성공과 멀어지는 6가지 나쁜 습관을 말하였는데 첫째, 사물이나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 둘째, 작은 문제를 큰 문제처럼 부정적으로 확대하는 습관. 셋째, 조금 서운하다고 생각되면 크게 비난하고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습관. 넷째, 성급한 판단을 하는 습관. 다섯째, 비약한 습관, 여섯째, 조급한 경향의 습관이라 하였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라는 목표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나의 무의식적인 부분까지 목표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념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에도 습관이 중요하다. 좋은 신앙인들은 좋은 신앙적 습관이 있고, 나쁜 신앙인들은 나쁜 신앙적 습관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의 마음을 마가복음 14:34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상태였기에 보통 사람들이라면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도망하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려 감람산으로 가셨다. 기도하는 습관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그에 대한 고민을 극복하신 것이다. 반대로 제자들은 평소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습관이 없었기에 십자가 앞에서 다들 도망치고 말았다. 작은 습관 하나가 우리들의 미래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습관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좋은 습관은 무엇이며, 나쁜 습관은 무엇인가? 나쁜 습관은 고치고 버려야 하고, 좋은 습관은 계속 유지, 강화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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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좋은 습관을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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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세상 뉴스, 이렇게 보자!
- 요즘 언론을 통해서 보도 되는 국내외 많은 뉴스들은 우리 모두를 정말 짜증스럽게 만들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안타깝고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집무실을 굳이 용산으로 옮기겠다는 대통령 당선인, 용산 이전을 인정하고 예비비까지 책정해 놓고도 떠나기 며칠 전에 굳이 한마디 초를 쳐서 불화를 자초하는 ‘내로남불’과 자화자찬 대통령, ‘검수완박’을 위한 위장탈당 국회의원,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는 쓰레기 같은 일부 정치인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대통령의 애끓는 호소에는 경청은 커녕 자리를 메꾸어 주는 예의도 보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법안의 편법통과를 위해서는 새벽에도 꽉 차게 모여 혈투를 벌이는 깡패 집단 같은 국회를 보면서 적어도 자유 대한민국에는 국회를 해산해 버리는 것이 세금도 아끼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국제적으로는 독재자 푸틴의 우크라이나 불법 침략, 천인공노할 잔인한 만행의 뉴스들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 뉴스를 우리는 어떤 가치관의 틀을 통해 바라보고 들어야 할까요? 러시아군대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도시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살상하며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자리에 모인 한국 아줌마들이 “나는 러시아 산 말린 생선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전쟁 때문에 앞으로 생선 값 오를까 걱정이다”고 말하는 “대갈통 텅 빈” 소리를 들을 때는 오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씌우고 싶었을 뿐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미국 TV 뉴스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국민들을 향해서 이제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하는 조처를 취해야 하는데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진리를 생각하며 석유 값 인상의 작은 고통을 감내해 달라고 호소하는 연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내 정치를 포함한 세상 온갖 뉴스를 대하면서 단순히 주가 폭락, 가스 값 인상, 생선 값 폭등이라는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듣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질 때 이렇게도 악할 수 있다는 인간 타락의 참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와 인간의 문명을 이렇게도 잿더미로 만들 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마음, 인간의 사악함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긍휼, 위로, 궁극적인 심판, 하늘의 평강으로 충만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사의 배후에서 지금도 역사하는 영적인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자주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보기 위해서 신문을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뉴스를 접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되는 소식을 듣고 보면서 우리는 너무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펄전의 방법을 따른다고 하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모든 재난들과 전쟁 범죄, 또는 정부의 실책들에 관해서 읽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이 모든 인간사들을 인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국내외 소식들은 성경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에게 가르쳐준 어떤 진리를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끝없는 진보가 아니라 필연적인 쇠퇴의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세상 제국들간의 힘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투쟁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상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전면전으로 바뀔 때는 자유 민주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들간의 대립도, 동서양의 대립도, 또는 문명간의 충돌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배경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절대적인 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꾸준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첨예화되어갈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다양한 형태의 세속 권력들은 결국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투쟁 후에 이 모든 세상 세력들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은 자에게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사건들 그 자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그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를 올바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흉흉하는 바다에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네 마리의 짐승들을 보았습니다. 이들 짐승들은 동시에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세상 제국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없어지고 또 다른 세력들이 그 뒤를 계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 지상의 국가들과 권력 있는 통치자들은 궁극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항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왕국은 다른 왕국보다도 그 가면을 훨씬 더 빨리 일찍 벗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단지 시간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민족들로부터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다고 주장하는 나라들로부터도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인간 나라들의 종말을 장식하게 될 것이며, 이 때에 모든 지상의 세력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숨길”에 의해서 녹아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번잡한 세상 뉴스들을 접하면서도 하늘의 위로와 평강을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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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세상 뉴스, 이렇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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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담대할 일들 (행4:23-31)
- 기업체에서 신입 사원을 뽑을 때 선발된 신입 사원들을 대상으로 극기 훈련 내지는 담력 훈련을 실시한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해병대 훈련소에 입소를 시켜서 인내의 한계성을 느낄 정도로 극기 훈련과 담력 훈련을 시키는데 그 훈련을 잘 견디어 내는 사람들을 해당 부서에 배치를 해서 업무에 임하게 합니다. 그렇게 신입사원들에게 극기 훈련과 담력 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직장생활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협동심과 인내심과 담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협동심과 인내심과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마라톤 경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협동심이 필요하고, 또 생각지 않은 어려운 일들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협동심이 없고 인내심이 없고 담대함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좀 힘겨운 일을 당할 때 견디질 못하고 낙심하거나 좌절을 하게 됩니다. 힘들어도 포기할 수 없고 고난을 당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인내심과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 할 담대함은 극기 훈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요단강>을 건너가는 일과 <가나안>땅 정복을 앞두고 있던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했던 것처럼, 영적인 전쟁을 치루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도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고 담대함이 없으면 절대로 신앙생활을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중에 특히 담대함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필요한 부분들마다 담대하시면 아주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복음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행4:29,31) 둘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담대해야 합니다.(요일5:14,15) 셋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 담대해야 합니다.(요16:33,히13:6) 우리 모두 믿음을 잘 지키고 하나님 앞에 이긴 자들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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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담대할 일들 (행4: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