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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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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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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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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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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황권철 목사] 너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받은 은혜 감사하며 삽시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이러하다. 영국 국왕의 박해로 청교도들은 7년을 준비해서 180톤 되는 범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구입하여 신대륙으로 향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65일간 추위와 영양실조와 질병과 싸워 이겨 미국 동부지역까지 도착했고, 이에 살아남은 자는 78명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가을 첫 소산을 얻고 플리머스(Plymouth)에서 3일간 감사제를 드렸다. 이렇게 시작하여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1월 26일을 감사절로 공포했으며,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 수요일을 감사절로 개정해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이 한국에서 시작되기는 1904년 조선 장로교 공의회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시작되었다가 1945년 광복절 이후로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성경에서 모세는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고 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최선을 다해 감사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16장 강론이다. 마가복음의 총 주제는 섬김이다. 핵심성구는 10:45절로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오셔서 섬기는 삶을 살다가 섬기는 자로 생을 마감하셨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셨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주님의 최후부탁은 우리의 최초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밀알교회가 감당할 최대의 사명인줄로 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1-8)    안식 후 첫날 무덤을 찾은 자는 여인들이었다. 이들은 다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전에 일곱 군대 귀신들렸던 여인이었고(눅8:2),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도 주님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살로매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이모였다(요19:25).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갈보리 현장까지 따라간 자들은 힘 있고 당당한 남자들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마27:55), 우리말에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강한 어머니가 있었음을 안다. 옛날도 그러했거니와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여성들의 역할은 참으로 대단하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 안에 크고 작은 일에 여성들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실로 장한 여성들이다.  여인들은 해가 돋기가 무섭게 무덤으로 달려갔다.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2). 이번 안식일은 그 어느 때와는 다른 하루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요 가장 불안한 하루를 보내는 날이었다. 사실 이날은 온 인류가 긴장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부활사건은 예수가 메시야 되심을 검증 받는 최후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면 구약의 예언대로 그는 메시야임을 증거 하는 날이지만 만약 그의 부활이 공수표로 돌아가면 예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전15:14-15). 이제 그토록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그 날이 다가왔다.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날이 새기가 무섭게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2) 무덤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여인들에게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문제는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큰 돌이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3). 여인들의 생각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활은 하셨으나 너무도 큰 돌이 막고 있으니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우리 역시 가기는 가지만 그 돌을 옮길 힘이 없다. 이 돌을 옮길만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은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파수꾼이 지키고 있으며, 돌 위에는 빌라도가 인(印)을 쳐서 봉해 두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도착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무덤에 도착한 순간 이런 근심은 순식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4). 참된 부활신앙은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의심의 큰 돌들을 굴러 버린다. 불신앙과 염려와 근심 걱정의 돌을 굴러버려야 부활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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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3-08
  • [박동철 장로] ‘성도 이어령’ 소천 그 후
    시대의 지성, 우리 모두의 스승 이어령 박사께서 지난 2월 26일 89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 故(고) 이 박사님은 15년 전 딸이었던 故 이민아 목사로부터 전도 받아 회심하고, 세례를 받고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간증과 강연으로 우리들에게 복음의 변증적 희망의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가셨다. 우리나라 학계 예술 문화계에 대표 지성인으로 수많은 저서와 명강연등으로 온 국민 정서에 이어령의 어록은 수없이 남겨졌다. 우리 기독교계는 늦게 73세 때 주님을 만나 특유한 말씀의 깊고 넓은 사유에서 건져낸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대표작에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등 그동안 늦은 자가 먼저 되듯 짧은 기간에 많은 복음 저서까지 남겼다. 필자는 마지막 유작으로 엮어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강연을 유튜브를 통해 듣고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이어령의 영성은 어디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냈을까. 박사님은 평소 깊은 지성의 사고에서 나라의 비전, 사회의 품격 그리고 개개인의 삶 속에 파고드는 희망의 두레박질이 여느 석학들보다 남다른 데가 있었다. 우리 사회가 일제와 6.25 전쟁을 겪는 동안 암울했던 국민 정서에 던지는 메시지마다 희망이었다. 일본에 항상 열등감에 젖어 있던 우리들은 ‘축소지향의 일본’이란 베스트셀러의 박사님의 저서를 읽고 오늘날 일본을 넘는데 우리 모두의 키워드가 된 것 부인 못할 일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국민적 긍정의 희망을 한껏 불어넣었다. 지난 88년 올림픽 때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고 올림픽경기 개회식 오픈 행사에 박사님이 한국 소년의 굴렁쇠 굴리기를 기획함으로써 영상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세계 속의 한국 정서를 세계화하는데 소리 없는 큰 울림이 되었다. 어느 누군가 이어령을 평가한 적이 있다. 단군 이후 최고의 천재라고. 천재라고 다할 수 있겠는가. 박사님이 '마지막 수업'에서 강조한 메시지를 기억해 본다.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성의 열매는 선악과를 먹은 우리들이 찾을 수 있는 한계의 열매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과 함께 끝없이 찾는 지성과 그리고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것은 결국 하늘 아래 머물 수밖에 없는 바벨탑의 그곳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는 믿음의 영성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을 넘을 수 있는 구원과 축복을 만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어떤 지성도 과학도 영성을 만나야 진정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지성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왔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있을지언정 결코 그것이 복음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복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임을 변증했다. 4차 산업시대 AI의 공간에 살아야 하는 우리들이 복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시대의 질문과 흐름을 단연코 설명해냈다.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주창했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이치에 따라 믿음의 공동체만이 살 수 있는 시대 즉 교회가 AI를 넘을 수 있음을 설명했다. 성경과 과학기술과의 거대한 담론에서 서로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존중할 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생명이라는 위대한 복음이 온누리를 덮어 나갈 것임을 설파했다. 이 높고 깊은 말씀의 사유, 이제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 박사님의 소천에 밀려오는 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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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박동철 장로] 3.1운동 103주년 교회의 항일독립운동을 다시 생각하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3주년이 되는 해다. 사는 날 동안 잊을 수 없는 온 백성의 비탄과 절망 속에서 일어섰던 민족의 거대한 함성. 그 함성이 온 땅에 가득 찼던 3.1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조선독립만세 운동은 한민족의 역사적 거대한 거사였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백성은 겨우 2천만 명. 이중 20만 명에 불과하던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는 역사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이맘때 당시를 회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교회마다 3.1절 주일을 지켜가고 있다. 거대한 거사를 주도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음을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다. 당시 3.1운동의 불길을 지펴나가는데 전국의 교회들이 불쏘시개가 되었다는 사실도 다시 들추지 않아도 된다. 전국 도시와 농촌 곳곳에 자그마한 예배당이 독립운동에 쓸 태극기 만드는 장소가 되고 거사의 연락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 고마움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130여 년 전 캄캄했던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벽안의 선교사들의 순교의 열매가 아닌가. 필자는 지난 1919년 사단법인 경남기독문화원과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와 함께 편찬위원장을 맡아 '다시보는 경남의 3.1운동' 역사서를 발간했다. 목회를 하시면서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밀양 무지개전원교회 박시영 목사님의 책임 집필에 힘입어 무게 있는 역사서를 발간했다. 기쁜 일은 이후 책자의 대부분이 교회와 경남 전역 중·고등학교에 보급되어 편찬에 땀 흘린 힘든 시간만큼 보람 또한 있었다. 이제 다음 세대들이 온 백성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당시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가 앞장서 민족의 저항운동으로 승화시켰다는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뿐이다. 3.1독립운동이 나라의 완전 독립을 찾지 못했지만 2개월 동안 이어진 백성의 외침이 있었고 수많은 백성이 순국 순교하는 슬픔을 남겼다. 1년여 동안 독립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작으나마 이어져 침묵 속에 독립정신이 백성의 뇌리에 심어졌다. 독립을 위한 정치적 행보도 이어졌다.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은밀히 국외에서 준비되던 우리의 주권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이후 곡절과 고난 속에서 긴 세월 순국 순교의 희생에서 대한 조선은 36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떠했는가. 1945년 광복도 잠시 6.25의 참상을 겪고 전쟁 복구의 과정에서 처참한 한민족의 생활상은 표현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예수 복음의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 소리가 났고 새벽기도운동이 교회는 물론 온 나라를 흔들어 깨웠다. 나라사랑의 교회 독립운동이 나라 발전의 산 제물이 된것이다. 초근목피를 면치 못하던 세계서 가장 못살던 대한민국이 반세기 만에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된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던 때 느헤미야 다니엘 에스더 같은 선지자들이 나라를 살리는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힘써 기도했던 애국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일어났고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다. 사무엘상 2장 9절은 말하고 있다.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 잠잠케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으리로다. 3.1절 103주년에 더욱 숙연해지는 나라사랑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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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구레네 시몬 이렇게 하여 예수는 십자가형을 받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불법적인 재판이 이루어진 곳이 본디오 빌라도 법정이다. 가장 추하고 가장 더러운 죄인이 가장 의롭고 성결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형 언도를 집행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 불의한 행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에게는 불합리하게 몇 가지 죄목이 주어졌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일뿐 아니라 온 인류의 만왕의 왕 되심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여 성전을 놀이터로 만든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다. 그들은 주님의 옷을 벗기고 자색 옷을 입혀 주님을 희롱했다. 결국 갈보리로 가서 십자가를 지게 했다. 심한 고문을 당해 가다가 쓰러져 주님이 일어나지를 못했을 때 구레네 사람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갔다.“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이집트 곁에 있는 지역으로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구경을 하러 가서 잡혔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난밤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느라 밤을 새웠으며, 많은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과 빌라도 법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하여 너무도 많은 기력을 잃은 상태라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힘이 없었다. 그래서 군병들은 그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지웠다. 그때 그는 이렇게 항변했을 것이다. ‘나는 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나는 갈릴리 출신이 아닙니다. 나는 유월절에 성지를 순례 온 구레네 사람입니다. 나는 바쁜 사람입니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고 했으나 군병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강제로 십자가를 지워 가게 했다. 비록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었다. 주님의 제자들도 다 흩어져 도망갔으나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감으로 주님이 지는 십자가를 눈으로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진 후 얻은 것은 무엇인가? 첫째, 주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친히 목도했다. 둘째,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님이 십자가 지는 현장에는 그가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징조가 나타났다. 제 6-9시까지 해가 빛을 잃은 사건이나 골고다 주변 무덤의 문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사건과 바로 그 시에 예루살렘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들은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 하는 사인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그토록 장담하던 제자들은 다 흩어졌으나, 뿌리치고 거절했던 자신에게 억지로 지운 십자가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생각 밖에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를 장사한 아리마대 요셉    이렇게 하여 주님은 갈보리에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는 절정에 이런 기도를 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주님이 십자가 지신 사건을 미리 예견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주님은 세상의 죄 짐을 짐으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 아들의 권세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몸으로 죄수가 되어 하늘의 심판대 앞에 섰다. 그래서 감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율법의 정죄로 주어진 죽음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친히 율법을 다 이루시고 완성하셨다. 이제 그 주님의 시체를 누가 장사했는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8km, 욥바에서 동쪽으로 24km정도 위치한 곳이다. 그는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어떻게 해서 그에게 이런 당당함이 생겼을까? 주님을 장사한 것은 단순한 헌신적인 수고나 무덤 하나를 기증한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리마대의 신앙을 배워야 한다. 첫째, 진리 앞에 당당한 모습이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전에 그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 은밀히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그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너무도 확실히 목도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나아가 주님을 장사하고자 했다. 또한 이 귀한 복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둘째,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다.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다. 산헤드린의 수장이 대제사장 가야바이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청부 살해까지 하는 판인데 공회원으로서 주님을 장사하기 위해 그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신과 가족과 후손들과 친인척들에게 어떤 불이익과 불행이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과 그 주변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주님을 장사하고자 나섰다. 셋째, 천국을 사모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는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사모했다.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메시야를 대망했다. 넷째, 깨끗한 부자였다.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마27:57) 그는 부자였으나 불의하게 치부한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신의 새 무덤에 주님을 장사했다(마27:60). 돈은 이렇게 쓰는 법이다. 성경에 부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깨끗한 돈을 많이 벌어 주를 위해 거룩한 곳에 값지게 쓰임 받기 바란다. 다섯째,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덕망을 갖춘 사람이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눅23:50). 그는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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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김성수 총장] 혼란한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오늘날 국내외 여러 혼란스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요? 북한 김정은 독재정권의 인권유린, 탄도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 및 유럽 연합과 러시아의 대치, 중국 시진핑과 러시아 푸틴의 전략적 동맹과 미국의 긴장, 전염병과 지진, 테러 특히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잊혀 지지 않고 있는 끔찍한 사건으로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이 사용한 화학가스로 인해서 수많은 어린 애들까지 고통당하는 참혹한 모습, 그리고 국내의 혼탁한 정치상황 등을 뉴스로 접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참으로 복잡하고, 안타깝고, 가슴 아프고,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불안하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날 격동치는 이런 세상 역사를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면 아마도 그 옛날 다니엘이 본 환상이 보여질 것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통해서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와 큰 짐승들이 나와 있는 열방의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는 열방들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으며, 서로를 집어삼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들이고,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밤낮으로 라디오와 TV에서 뉴스로 보도 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이들 네 큰 짐승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라디오나 TV에서 뉴스로 보도하고 있지 않는 어떤 것에 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은 겉으로 보이는 사건 배후에 있는 더 중요한 어떤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환상을 통해 큰 바다와 네 짐승들만 본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를 보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단7:9).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은 이 보좌로부터 큰 짐승들 넷이 모두 통제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내용인지 모릅니다. 큰 짐승 넷이 소용돌이치는 흉흉한 바다 위에는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보좌가 있습니다. 이 보좌는 불로 만들어져 있고, 또 불타는 바퀴위에 있습니다. 이 보좌는 수 천, 수 만의 천사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하나님 자신이 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하늘의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분은 하늘과 땅을 심판하는 심판자이십니다. 이분은 최고의 통치자로서 어떤 이들은 낮추시고 어떤 이들은 높이시는 심판자이십니다. 열국들이 나타나서 서로를 잡아먹는 흉흉한 바다위에 있는 이 하늘의 보좌를 다니엘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어떤 질서나 패턴이 없이 그냥 단순하고 우연히 일어나는 혼돈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세계 역사의 모든 실오라기들이 함께 짜여서 모이는 곳은 바로 이 하늘의 보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반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각각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이유는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었기 때문입니다. 짐승들과 그 권세가 정한 시기가 될 때까지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들의 생명의 기한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란한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독재자들의 포악과 세계 역사의 격랑은 도무지 바르게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지만, 우리가 이러한 혼란한 역사의 배후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실제로 하나의 단일적인 계획이 펼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일도 궁극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보다 더 필연적인 것은 없습니다. 역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명령이지, 어떤 다른 명령자의 명령이 아닙니다. 이 지상의 역사를 주관하는 명령은 다니엘이 본 대로 열방의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 있는 하늘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밧모 섬의 요한도 다니엘과 비슷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예언 사이에는 놀랍게도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 진노의 그릇, 고통의 부르짖음, 전쟁, 혼란과 혼돈등 귀를 멀게 할 정도의 대 난리를 보고 듣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계4:2).그것은 마치 주님이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손을 놀라고 무서워하는 자녀의 머리위에 얹어주는 모습과 같아 보입니다. 광풍이 몰아치는 사나운 바다와 무서운 짐승들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 떨고 있는 자녀의 머리위에 아버지의 능력 있는 손을 얹어 보호해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습니다. 이 자녀의 관심은 하늘로 향하고 있고, 그는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저기 저 하늘에 한 보좌가 있지 않느냐? 저 보좌는 텅 비어 있는 보좌가 아니란다. 저 보좌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고 계시단다.” 바로 이 하늘 보좌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 역사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가운데서도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에 가득 찬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보좌의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고삐를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열방의 모든 왕들도 이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보좌의 심판에서 면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재자들도 나와서 심판을 받아야 하고, 대통령과 수상들도 그들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가운데서 정의와 평화가 포옹하며 입 맞추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라나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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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조희완 목사] 깨끗할 이유 (사1:10-17)
    <부자의 운명으로 갈아타라>는 책(매일경제신문사)이 있습니다. 이 책은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을 근거로 집필된 책인데 전 세계에 번역 출시가 되어서 대단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풍수지리학자의 조언을 받아서 백악관 사무실을 개조하고,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 <셰니 블레어> 여사는 다우닝가에 있는 총리 관저를 꾸밀 때 풍수 지리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조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에는 다섯 가지의 원리가 있는데, 그 중에 제 1원리는 “사무실이나 집안의 출입구를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출입구인 현관은 좋은 기(氣)가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입구에 폐품이나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으면 기의 흐름이 굴절되거나 차단이 되어서 좋은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면 출입구에 거미줄이나 먼지를 제거하고 깨끗이 하라고 강조합니다. 풍수지리학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도 출입구가 깨끗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깨끗함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경전들이나 교리들보다 성경이 훨씬 더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출입구가 깨끗할 때 좋은 기(氣)가 들어온다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할 때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를 믿으면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양 털과 같이 깨끗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죄 사함 받고 깨끗한 사람이 되면 복 있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마음이 깨끗해야하고, 손이 깨끗해야하고, 행실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영 육간에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깨끗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1:15,16) 둘째는, 깨끗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5:1,2,8) 셋째는, 깨끗해야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후2:20,21) 거짓과 불법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 깨끗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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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신재철 목사] 황금샤프 : 내 것을 내 것이라 증명하기
    생일의 꽃은 선물이다. 내가 너무 세속적인가? 지역마다, 시기마다 유행하던 선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 고향, 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선물은 ‘샤프 펜슬’이다. 연필을 사용하던 국민학생이 어느 때가 되면 풀리는 금기 중 하나가 샤프의 허용이다. 관리하지 않아도 늘 뾰족한 샤프는 저학년의 희망이다. 연필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생일 선물의 인기 품목은 샤프였다. 친구의 생일초대를 받으면 문방구에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샤프를 구입했다. 문방구 아저씨가 무료 포장지 몇 종류를 보여주시면 그 중 선택해 포장까지 하면 제법 멋이 묻어난다. “은색으로 할까, 금색으로 할까?” 가장 인기 있는 샤프는 ‘제도’라는 이름으로 세 종류가 나왔다. 심플하면서 가장 저렴한 가격의 블랙. 케이스가 없다. 그냥 만만하게 사용하기 좋은 물건. 두 번째는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고 있는 은색. 케이스도 있고 뭔가 고급스러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물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세 번째는 번쩍이는 금색. 케이스는 당연하고 국민학생 선물용으로 과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금색 샤프부터는 문방구 사장님이 서비스 하시는 포장지도 다른 곳에서 나온다.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너무 비싸다는 것. 그래서 선물을 준비하는 대부분 친구들은 은색과 금색 사이에서 잠시 고민을 한다. 하지만 선택은 은색. 금색은 ‘넘사벽’이다. 주기도 어렵고 받기도 어렵다. 내 생일을 맞아 동네빵집에서 만든 크림 케이크와 떡볶이, 김밥, 과자가 준비되었다. 초대한 친구들도 하나하나 집으로 오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집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생일파티는 즐겁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생일의 꽃은 선물이다. 식순이 없어서 타이밍을 잡지 못한 친구들의 선물이 하나씩 쑥스럽게 상 위로 올라온다. 양말부터 조립 로봇까지 다양한 선물이 내 품에 안겨온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포장지로 싸여진 물건들도. 하지만 한 물건은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샤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규격, 포장지 느낌 적당한 흔들림과 소리. 딱 문방구 아저씨가 포장한 샤프이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포장지가 벗겨진다. 충격이다. 아무나 받지 못하고, 누구에게 주기도 어렵다는 황금 샤프이다. 그 친구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품이다. 얼마간 이 샤프는 내게 보물이 된다. 필통에서도 가장 아끼는, 꼭 필요할 때만 꺼내 사용하는 귀중품이다. 학교에서 가장 착하고 너그럽다고 소문 나있던 내가 유일하게 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품목이 생겼다. “어? 어디 갔지?” 없어졌다. 어디에서든 눈에 띄던 황금 샤프가 사라졌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도, 가방에 굴러다녀도 눈에 잘 보이던 녀석인데 보이지 않는다. 샤프가 보이지 않던 수업시간부터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바닥은 물론이고 가장 뒷자리의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약간 넋을 놓은 나를 친구들은 이상하게 본다. 어떤 친구는 걱정이 되었는지 안부를 물어온다.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후, 어느 날. 친구의 손에서 반짝 반짝, 황금샤프가 보인다. “설마?” 아닐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자세히 보니 내 샤프가 친구 손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 것이라 말을 어떻게 하지?’ 많은 고민을 하다가 샤프가 내 것과 같다고, 혹시 주웠냐고 물었다. 주웠냐는 물음은 내가 친구에게 베푼 기회이자 은혜였다. 친구는 갑자기 화를 내며 자기 것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다. 분명 내 것이다. 나는 안다. 끝부분이 살짝 까져 황금색이 벗겨진 것까지 같다. 내가 가장 불편해 하는 말다툼을 샤프를 위해 해야만 했다. 나름의 비장의 카드. 끝부분의 까짐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친구는 샤프를 보더니 자기 것도 이 부분이 벗겨졌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얼마 쓰지 못한 황금 샤프를 포기하게 되었다. “진짜 내꺼 맞는데.” 사실인데 설명이 안 된다. 억울하고 답답한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하다. 앞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그때마다 포기하며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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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 : 사회자와 인도자, 당회장과 위임 및 담임목사
    I. 서언(序言) 어떤 말이 바른 말일까? 또 어떤 용어가 우리 기독교적일까? 연구를 거듭 할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선행연구들을 살펴보아도 아직까지는 이런 용어 정리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고 있고, 또 저마다 견해가 다른 경우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면으로 언젠가 필자는, 본 교회 예배순서지의 내용을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이유는 필자 자신이 전공을 살려 예배학적 근거 하에 정한 예배순서인데도 잘못 쓰고 있는 용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습관 속에 젖어 있다 보니 국문학과 실천신학 전공자이면서도 틀린 용어들을 쓰고 있었든 것이다. 이때 발견한 용어는 다름 아닌‘사회자’,‘개회기도 및 폐회기도’,‘개회찬송과 폐회찬송’등의 순서였다. 혹자는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고 반문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용어는 각종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이지 예배용어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런 논란이 되거나 적합하지 않은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사회자와 인도자, 당회장과 위임 및 담임목사 1. 사회자와 인도자: 보통 여러 교회들의 주보의 예배순서에 보면, 사회자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사회자의‘사회(司會)’는‘모일 회’자로 회의용 단어이지 예배용어가 아니다. 그래서 예장 통합 교단에서는 1998년 총회에서 사회자는‘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執禮者)로 표기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또 다른 견해는, 인도(引導)란 말은 불교적 배경을 가진‘갈 길을 알지 못하는 중생을 이끌어 오도(悟道)에 들게 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도자 보다는‘예배 진행자(進行者)’란 말이 적합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견해들 앞에서 현재로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독자 제위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회의 용어인‘회’자가 들어가는 사회자란 말이나 개회 찬송, 폐회기도라는 용어는 그냥 ‘찬송’,‘기도’로 하든지 영접과 파송의 뜻을 가진‘송영(送迎)’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2. 당회장과 위임목사와 담임목사: 보통 주보라고 말하는 예배 순서지에 시무하는 목사를‘당회장(堂會長)’이나‘담임(擔任)목사’로 표기하고 있다. 또 어떤 교단은 위임목사와 담임목사(과거의 임시목사)에 대한 제도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위임목사’라고 표기한 경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교회는 대표기도 할 시나 일상적인 대화중에서도 종종‘우리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호칭들 때문에 어느 말이 옳으냐는 질문도 자주 받을 때가 있다. 앞서 논한 용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담임목사라는 말은 교단별 차이는 있지만, 단어의 의미로는 맡을 담(擔), 맡을 임(任)자이다. 이는 그 교회의 전체 목회적 업무를 담당하는 대표자라는 의미를 가진 직책의 용어이다. 반면 당회장이란 말은 교회의 조직적인 면에서 교회의 모든 치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행정적인 대표를 의미한다. 또한 이 역할의 주 업무는 시무 목사와 장로가 모여 회의하는 당회에 있으므로‘당회장’이라 명명한 것이다. 앞서 논한 위임목사와 담임목사란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제도적 위치에서 논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예배 순서지에 위임목사라고 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볼 때 이러한 여러 가지 명칭은 여러 가지 기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어로 통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일상적인 교회의 업무와 교회를 대표하는 명칭어로는 목회적 신분인 ‘담임목사’란 말이 옳으며, 노회나 당회 및 각종 회의적인 기능과 기타 행정 업무에 있어서는 행정기능의 신분인‘당회장’이란 명칭이 맞는 말이다. 또한 예배순서지나 교회를 대표하는 명칭에는 당회장이란 용어보다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담임목사’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III.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그 많 큼 이런 면으로는 우리 교계가 우리 자체의 언어 통일에 너무 무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자체 내의 모순을 가져다주는 용어들 많 큼은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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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최호숙 목사] 삶의 수수께끼가 있을 때에
    B.C 2500년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괴물 스핑크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 먹었다. 그 수수께끼의 내용은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다수의 사람이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 죽임을 당했다. 급기야 여왕 이오카스테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나 자신까지도 바치겠노라.” 이 어려운 수수께끼를 푼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오이디푸스” 였다. 그가 맞춘 정답은 “인간”이었다. 어릴 때는 기어서 네 발로 다니고, 성장하면 두 발, 늙게 되면 지팡이를 짚는 관계로 세 발이 된다. 정답을 맞혔기에 스핑크스는 골짜기로 뛰어내려 죽어버리고, 오이디푸스는 테바의 왕이 되었다. 인간의 삶 가운데는 수많은 수수께끼가 있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해답을 알면 쉬운 것이지만 알기 전에는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해답을 알면 쉬운 삶이 되지만 해답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 삶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모르고 나름대로 이것이 정답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남의 일에는 명 재판관이 되지만, 자신의 문제에는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때가 있다. 남의 일에는 명 처방을 다 해 주면서 자신의 일에는 바보 같은 모습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할 때가 많다. 우리 인생이 바른 삶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하며, 예수님처럼 지혜롭게 말하고, 인격적으로 말하고, 예수님처럼 타인의 아픔을 들어주고, 예수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답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인간인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순간순간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유다 왕이 되었을 때 삶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여호와께 묻는 신앙을 가졌다.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고 그분께 묻는 신앙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 - 인생길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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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박동철 장로] 키루스(고레스)같은 나라 지도자
    2022년 새해, 바야흐로 대한민국 정치 대경연의 한해 문이 열렸다. 오는 3월9일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고, 6월1일 지방선거의 일정에 일제히 돌입했다. 주일이면 교회를 찾는 정치인들의 발길이 분주함을 볼 수 있다. 교회서도 정치의 계절이 오면 조국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 단골기도문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지도자로 선출되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더욱 성경적으로 들어가서 구약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페르시아 초대 왕 고레스(키루스)같은 대통령, 그리고 국가지도자가 선출되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린다. 왜 성경상 고레스, 아람어로 키루스 대왕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페르시아의 초대왕 키루스는 고대 근동역사에도 기록이 생생히 있다. 전략에 뛰어나고 훌륭한 치세가였다는 기록이다. 당시 제국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제국이 되어서도 인근 속국들에게 덕을 많이 베푼 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도 고레스 왕으로 선지서에 많은 기록이 있다. 주전 600년경 당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를 점령하고 3차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처참히 포로의 삶을 살았다. 비슷한 시대 메대 바사라는 두 나라가 있었는데 시대의 영웅 키루스가 통일하여 페르시아제국을 건국하고 바벨론을 점령함으로써 페르시아는 근동의 새로운 제국으로 서게 된다. 통일 페르시아 제국의 초대 왕이 바로 고레스 왕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레스 왕이 선정을 베풀고 포로로 잡혀있는 유대 백성을 이스라엘로 귀환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역이 된데 시선이 간다. 더욱 놀라울 일은 성경에서 고레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44장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 지리라 하는 자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주전 539년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기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예언한 말씀이다. 말씀에서 당황케 하는 대목은 먼 훗날 이방 왕이 될 자를 예언하고 그에 대해 ‘내 목자’라고 칭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백성을 구원케 하는 여호와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사람의 지도자를 뽑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이 경외로운 일이다. 대통령이 선출되고 지방자치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정치계절에 공통의 기도 제목이 될 수밖에 없다. 여호와는 이방인과 함께 세계경영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치를 속세의 정쟁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모든 곳에 미치는 여호와의 손길을 찬양하며 비록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모를지라도 국가의 지도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믿음의 백성들을 존중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지도자라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말씀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단의 문화들이 밀려들고 있다. 교회를 공격하는 정치세력, 그리고 복음을 가로막는 악법들, 이들에 대한 바른 교회관의 시각을 갖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국가지도자가 필요한 때다. 또한 본격 지방 시대 지역을 잘 이끌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때가 되고 있다.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려야 하는 중차대한 이때 고대 키루스 대왕 같은 아니 모세와 요셉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찾는 기도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잠시 부여받은 것이다. 권력이 사욕으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됨을 알고 진정 백성을 헤아리는 안목 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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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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