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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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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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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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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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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구원 받았다는 것의 의미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오늘날에 발달한 것이 바로 보험입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보험이 생겨났고, 건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건강보험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경영하는 공장이 불이 나거나 도둑이 들 것을 우려해서 화재보험이나 도난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은 다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거액의 다리 보험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유형의 보험 가운데서 가장 중한 보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생명보험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보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보험 들기를 주저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기가 죽을 때를 기다리는 보험이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둘째는 이 보험은 들어봤자 지금 현실의 삶에서는 내게 뭔가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가 있는데 그 들의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갈 천국은 놔두고 그 복음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 현실의 삶에서는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복음이 저 세상을 보장해주는 것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보장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고 점쟁이를 찾아갑니까? 대부분은 저 세상의 일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서 다가올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타파하고자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은 과연 저 세상에 대한 보장만 있고 이 세상에서의 보장은 없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믿는 복음이 저 세상에서의 보장만 하고 이 세상에서의 보장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보험처럼 불완전한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보험이 출시된다고 하지요. 죽음 후의 보상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동안에 사고를 만나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도 보장하는 종합보험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 역시 굳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종합보험입니다 저 세상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도 역사하는 복음입니다. 바로 그 복음을 믿을 때에 내가 믿는 복음은 염세적인 복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역사하는 참 복음이 됩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복음은 또한 현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도 역사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지금 세상에서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 수 있고, 그 복음 때문에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구원의 현재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구원이란 죽어서 저 천국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구원의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온전한 의미이며, 내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삶을 누릴 때에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역사하는 복음을 믿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미래만을 보장하는 반쪽자리 복음입니까? 아니면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 역사하고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복음입니까? 구원 받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믿는 복음이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역사하는 복음임을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진짜 구원 받은 자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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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하수룡 장로] 파랑새
    작년 봄 창가에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이상한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 같아 눈을 돌렸더니 파랑새 같은 큰새 한 마리가 날아와 베란다 꽃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파랑새는 활엽수가 많은 인가 부근에 서식하며 높은 나무에 앉는데 우리 집이 산중턱에다 아파트라 이 새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행복이나 사랑을 노래할 때 파랑새가 많이 등장한다. 실제 이 새는 둥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우고 욕심이 많은 새로 날씬하거나 예쁜 새는 아닌데 노래나 소설에서는 이상적인 새로 표현되는 것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파랑새가 일제 강점기에는 녹두꽃을 짓밟은 위협적인 새로 등장하고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미실을 엄청 사랑했는데 전장에서 돌아왔더니 이미 궁중으로 시집을 가버려 임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파랑새가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전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반대로 어느 60대의 문맹자인 초등학교 교장의 사모는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 초중고까지 검정고시를 합격했지만 대학은 가지 못한 채 암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훌쩍 날아간 한 마리의 파랑새가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애틋하고 맘 아프다. 벨기에 작가 마테를 링크의 동화인 파랑새에도 가난한 나무꾼 아이인 남매가 마법사의 병든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온갖 고생을 한다. 결국 꿈을 깨어보니 바로 머리맡 새장 속에 그 새가 있음을 발견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명약도 바로 가까이 있음을 알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먼 곳이 아니고 내 곁에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과소평가하고 소문만 듣고 멀리 있는 잘 모르는 어느 누구가 능력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다. 어떤 문제를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기보다 우수하거나 잘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풀어가려는 잘못된 습성을 과감히 버리고 고쳐야 한다. 현대인의 문제점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감을 갖지 못하고 산 넘어 먼 곳에 내가 만족할만한 좋은 파랑새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늘 이상적인 직장이나 자신이 만든 부푼 희망으로 자기가 만든 허울에 갇혀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게다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방송 드라마가 우울증과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남이 볼 때에는 좋은 직장인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인생을 찾으려는 파랑새 증후군이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고 만다. 지금도 파랑새 증후군의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는 파랑새의 행복과 행운을 바라고 기다리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되는 모든 분들과 환경을 황폐하게 만든다. 현실 부정보다 주어진 모든 여건을 감사하며 가족들과 더불어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운의 파랑새가 내게 오기를 바라기보다 현실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족과 더불어 서로 대화하면서 그분과 함께 더 많은 것을 꿈꾸자. 그리하면 나무꾼 아이처럼 가정의 울타리 안에 파랑새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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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02-08
  • [황권철 목사] 인생의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인생에게 위대한 발견이 무엇인가? 당신은 예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에 따라 인생관이 달라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올 수 있으나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세계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런 정도로 아는 것이 자연인이다. 그러나 중생하여 거듭난 자들은 예수를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이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당신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죄와 사망권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그 어떤 자도 이에 대해 자유 할 수 없고 모든 인생이 여기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으로 주님은 이런 문제로 고통 받는 인생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다. 또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다. 오늘은 마가복음 15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가룟 유다와 미리 약속한 대제사장들은 돈으로 로마 군병들을 사서 예수를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 집으로 갔다. 대제사장은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이른 새벽에 공회를 소집했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백성인 그들로서는 사형언도를 내릴 권한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부 빌라도 법정으로 넘겨주었다. 그들은 무리들과 합세한 후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그렇다면 주님은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빌라도 때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최대의 명절이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이런 절기에는 총독의 권위로 죄수 하나를 특사로 풀어주었다. 그때 마침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흉악한 강도 ‘바라바’라는 사람이 처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중한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니 총독 빌라도는 이 둘 중 한 사람을 특사로 풀어 주어야 하는데 누구를 풀어 주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총독으로서 황제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식민지 백성들이지만 여론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여론을 주도하는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떠했는가?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유대의 역대 대제사장들이 모였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여론 몰이를 하여 현직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와서 압력을 가했다. 대제사장은 산헤드린의 의장으로서 유대의 모든 행정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책임자로서 민중의 여론에 귀가 밝은 자였다. 그는 민중을 선동하여 절대적인 지지를 입어 총독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것이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실수요 범죄이다. 이렇게 해서 최후에 공은 로마 총독부 빌라도에게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총독 빌라도는 어떻게 했는가?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리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장본인은 로마 총독 본디오 사람 빌라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한다. 그는 무리를 만족케 하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빌라도를 손가락질 할 만큼 의로운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범죄자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 자신을 위하여 무리를 만족시키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 준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내 속에 있는 가야바와 빌라도를 청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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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신재철 목사] 재철이 건드리지마!
    재철이 건드리지마! 태어나면서부터 친구. 내게는 그런 아이가 있다. 부모님끼리 친구였기에 우리는 엄마에게 안겨있을 때도 친구라 불렸다. 내 기억의 가장 처음부터 그 친구는 존재했다. 강에서 더운 줄 모르고 땡볕 아래 이상한 것들을 함께 채집했다. 돌은 물론이고, 이끼, 흙, 가재, 종종 이상한 벌레도 잡아다 함께 소꿉놀이 주방을 꾸몄다. 발바닥 아픈 줄 모르고 슬리퍼 끌고 돌밭을 누비며 재밌게도 놀았다. 때가 되면 친구네 집에 예쁘게 맺은 앵두도 어지간히 먹었다. 학교 가기 전까지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긴, 친구가 내게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함께 어엿한 국민학생이 되었다. 비록 반은 갈라졌지만 친구는 우리 반을 줄기차게 드나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길지 않은 쉬는 시간이면 찾아와 이런저런 말로 재잘거리던 아이,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커서 1학년 여자아이가 이렇게 호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여하튼 반 친구들에게 그녀는 ‘재철이의 절친’이었다. 학교에 들어와서는 분명 선택지가 생겼는데 여전히 그녀는 내게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키 작고, 깡마르고, 피부 톤은 저 세상 레벨이다. 하지만 주변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기에 가능하면 친구들의 요구를 받아주며 조용하게 지냈다. 다행스럽게도 학업성적은 좋았기에 친구들은 나를 ‘착한 재철이’로 불러주며 모든 아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다. 친구가 많아졌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제법 많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 신재철 내꺼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어느 쉬는 시간, 교실 문이 ‘드르륵’ 급하게 열리더니 나의 그녀가 교탁 옆에 서서 일갈을 외쳤다. 목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얼굴은 약간 화가 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불편했나보다. 큰 사자후와 함께 그 친구는 우리의 관계(?)를 아이들에게 선포한 후 올 때처럼 급하게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민망함을 겪어야 하는가. 반 친구들도 당황했는지, 아니면 그녀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는지 나를 놀리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온 후 엄마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울어버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학교 가기 싫다고. 그렇게 35년이 지났다. 나의 그녀는 개그우먼이면서 훌륭한 방송인이 되었다. 유명 개그맨과 결혼 후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종종 비친다. 방송을 보고 있자니 입담과 목청의 여전함에 웃음이 난다. 전처럼 자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인터넷 뉴스를 통해 친구 소식을 더 자주 접한다. 가끔 휴대폰 메시지와 전화로 소식을 알려주는 친구가 고맙다. 카톡 울림과 함께 전달된 서른한 가지 이상의 맛을 줄 수 있다는 아이스크림 선물. 여전히 살뜰히 챙겨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맙다. “날이 더워. 조카들이랑 시원하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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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김성수 총장] 대선 주자들의 “하나님 찬양”
    3월 9일 대선이 가까워 옴에 따라 유력 대선 주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선 주자들의 토론은 절대 다수 국민들의 화두가 되고있고, 여야 모두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이 자연스럽게 또 교회를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권의 모 대선 후보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인사말을 하면서,“지난해 돌아가신 제 어머님도 권사님이셨고, 아내도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 반주를 했던 독실한 성도여서, 저도 분당우리교회에서열심히 주님 모시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에 담임 목사는 담당교역자들과 함께그분은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였으며, 현재 제적되어 있는 상태”임을 공적으로 밝히고, ‘제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세상 정치에 관여하기 보다는 성도님들이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잘 분별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연 설명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야권의 모 대선 후보도이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고 조용기 목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고, 이때 기독교계 목사들이 단체로 그에게 안수 기도를 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의 권유로 부인이 기독교 원로 김장환 목사를 만나 기도와 위로를 받았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동기에서 소위 “신앙적인” 행동을 표출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유의 행동들은 선거때마다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는 행동들이기에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등 감동을 받거나 의아스럽게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말이나 행동에 감동을 받아 교인들이 표를 줄 것이라고 계산했다면 이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성도들은 정치인들의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종교 행위에 역겨움과 측은지심을 가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사건이 다니엘 당시에 있었습니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고 하는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라 평지의 금신상 앞에 백성들, 나라들, 각 방언하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로 그 권력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3:2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상 숭배 행동을 조직하고 공표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섬기던 우상을 곁에 두고 다른 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덕을 만족시키는 어떤 신들도 경배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놀라운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하나님 역시도 자신의 범신전에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깊은 헌신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유익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유다 청년들의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의 찬송이 불순하고 위선적인 이유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자신이 실제로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한 금 신상을 끌어 내리고 부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금신상은 여전히 두라의 평지에 서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우상적인 금신상의 발 아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는 이 금신상을 파괴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더 잘 경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 어떤 사람도 처형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두라의 평야에 우상 금신상을 세워 놓고 우상 숭배적이며 하나님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게 참 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천하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증스런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목숨을 바치는 신앙의 실천을 통한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권력을 가진 왕의 입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14세 청소년들의 신앙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위선적인 선포에 감동을 받을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가능하게 한 유다의 청소년들이 가졌던 신실한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의 역사를 배경으로 대선 후보들의 종교적인 행위나 현란한 언어 구사에 감동을 받거나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들이 정직한 품성과 인격을 갖고 있는지, 자신과 패거리들의 집단 이익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공의를 추구할 비전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짐없이 투표하고 만에 하나라도 부정한 방법의 투개표가 획책 되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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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2 : 축제와 연조, 헌금 용어들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대명제 아래 지난 호부터는 우리 기독교인들 스스로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교회 용어들을 논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의 적합하고 좋은 용어로 알고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일은 우리 스스로가 자가당착에 빠진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는 흔히 말하는 축제와 헌금 용어들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교회에서 축제(祝祭)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 이 질문은 어떤 신학교 학생으로부터 강의 시간에 받은 질문이다. ‘축제’, 이 말은 현재 일반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말이다. 예를 들면, 성탄절 축제, 부활절 축제, 감사절 축제 등등 이런 용어들을 아무 꺼리 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원의 내용을 보면 그냥 생각 없이 단순하게 교회에서 사용하기로는 다소 문제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워낙 많이 사용하고 있다 보니 사용여부에 대하여 관련학자들 사이에도 찬반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축제란 용어에 대한 서로 다른 찬반양론들을 논하고자 한다. 1.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의 견해 : 사용불가의 이유는 이 단어 자체가 기독교적인 말이 아니라 서양과 일본 등에서 유입된 미신적 행위와 민속적인 언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원래 이 말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페스티벌(Festival)과 같은 행사를 보고 자신들이 행하는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와 비슷하다 하여 그 제사를 ‘축제’라고 한 말에서 유래 되었다. 즉, 축제는 원래 큰 소리로 노래하고 춤추는 형식의 일본의 고유한 민속 제사였던 것이다. 마치 출애굽 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을 연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축제는 글자 그대로 “축하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2.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견해 : 원래적 의미는‘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축제라는 말은 우상을 섬기는 제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날을 축하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3. 두 견해 차이를 어떻게 해야 될까? : 필자의 견해로는 먼저 이런 말을 하는 자를 정죄하거나 잘못 말하는 자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말은 약 60년 전인 1961년 이희성의 국어대사전에 처음으로 등제되었고, 전통적으로 전해져 온 말이 아닌 근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처음 사용된 용어인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다소의 문제가 있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기 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인 잔치, 명절, 절기의 날 등의 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III. 혼돈하기 쉬운 헌금 용어들 헌금 용어 중에는 봉헌, 예물 봉헌, 헌물, 연보 등의 여러 낱말들이 있다. 의미가 거의 비슷해서 구분을 잘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에 한두 가지 헌금 용어들을 구분해 본다. 1. 연보 : 한자어 뜻으로 보면 덜 연(捐), 도울 보(補)로 되어 있다. 말의 의미는 내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후서에 5-6회 정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데, 원어로는 ‘하드로테스’등의 몇 가지 용어로 되어 있다. 이는 모두 당시의 어려운 교인들을 도울 때 십시일반으로 모은 구제금을 낼 때 사용했던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연보라는 말은 일반 헌금이 아닌 구제 모금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2. 헌금이란? : 헌금은 바칠 헌(獻), 돈 금(金)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즉,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연보는 이웃을 돕기 위해서 내는 성금 형식의 예물인 것이다. 이에 의미상으로 본다면 이 두 말은 동일하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서 달리 써야 될 말이다. 또한 어떤 견해들에 의하면 헌금이란 말도 단순히 돈을 바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말도 너무 협의적인 용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헌금보다 좀 더 포괄적인 용어인 ‘봉헌’이란 말이 더 합당하다고 보는 이도 있다. 또 성경에는 예물(禮物)이라는 좋은 말이 많이 명시 되어 있기 때문에, ‘예물 봉헌’이라는 용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IV. 결 어(結語) 이상으로 볼 때 전통 종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의 언어나, 국한문, 또한 영어까지 동시에 사용함으로서 오는 혼란, 또한 근거와 실체를 알 수 없는 인터넷 언어까지 범람하는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교회 용어의 바른 정립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표현되는 말도, 마음도, 우리의 신앙의 자세도 늘 주님께 드려지는 진정한 봉헌이 되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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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박동철 장로] 태영호의원이 던진 통일희망 메시지
    태영호의원이 던진 통일희망 메시지 지난 1월25일 창원극동포럼(회장 조우성장로)이 주관한 제5회 창원극동포럼에서 북한 고위외교관 출신 탈북자 태영호국회의원 초청 특강이 창원극동방송에서 있었다. 이날 특강을 맡은 태영호국회의원은 지난 2016년까지 유럽에서 북한의 주요외교관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국회의원까지 된 우리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이날 특강에서 태의원은 요즘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자본주의 덕을 제일 많이 보고 살아가고있다는 덕담으로 강연의 문을 열고 강의를 열정적으로 이끌어갔다. 자본주의 덕이라는 덕담의 내용은 빠진 머리카락을 이식하여 포스포슬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태의원은 망명후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통일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갖는데 큰 역할을 하고있고 서울 강남 갑에서 제21대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왕성히 의정활동을 하고있다. 더더욱 반가운 일은 그동안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목사님으로 부터 전도받아 지금은 서울 모교회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한다. 참 감사할일이다. 이날 태의원은 강의에서 세가지 키워드를 제시하며 우리의 소원 통일을 전망했다. 먼저 우리의 통일은 빠른 시일내 오기어렵다는 전망을 전제했다. 그러나 통일은 반듯이 올수밖에 없다는 밝은 미래를 던졌다. 서울 부산 열차 2시간20분 걸리는 같은거리 평양 청진간의 열차시간이 4일걸리는 그야말로 낙후된 북한에서 40세도 안된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둘러싼 1세대 군부참모들이 왕조의 절대권력을 쥐고 그 기득권을 포기할수 없게 돼있는 정치구조가 통일지연의 큰원인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북한에도 자본주의 문화와 문명의 이기가 들어가 다음세대들이 몰래몰래 향유하기 시작한 세대의 변천이 북한왕조를 서서히 무너뜨리고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절대빈곤 해결의 마지막 수단이 되는 장마당이 단속속에서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있는 점이 첫째 키워드이다. 둘째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있는 우리의 K팝문화에 북한 젊은이들에게 익숙해져가고있다는 점이다. 남한의 문화가 덮어질때 남북한의 동질을 회복하는 광장이 되고 결국통일의 길이 열리게된다는 진단이다. 셋째는 진정한 세대의 교체기간이 적어도 30여년이 지나야하는 시간적계산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1세대의 측근 참모들이 물러가고 다음세대의 진정한 삶과 문화에의 향기에 함께한자들이 북한사회를 주도할때가 통일의 기회라는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망과 소망은 복음의 물결이 일제히 북한의 땅을 덮어내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교회가 지금 준비하고있는 그랜드플랜인것과 일치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준비하고있을것임이 틀림없다고본다. 1907년 평양대부흥의 깃발을 다시 꽂을 준비를 해야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귀중하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옷을 찢지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주님의 큰음성이 들리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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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2
  • [강학근 목사] 교회, 다시 세상의 빛으로(이사야 60:1)
    새해가 밝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경남 지역 장로회 연합회와 모든 교회위에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 새해 하례를 위해 수고하신 회장님과 모든 임원들께 새해에도 풍성하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올해 참 뜻 깊고 중요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고신 총회가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미 지난 해 우리 총회의 소사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지금 우리는 너무 잘 살고 있습니다. 50년대와 60년 대 우리 소원은 필리핀만큼만 살자 그만큼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GNP 80달러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세계 10권에 진입할 만큼 풍부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서울이야기입니다만 한 끼 15만원하는 뷔페는 줄서도 먹기 어렵다고 가격이 더 올라도 사람이 몰린답니다. 세퍼가 주는 메뉴 없는 한 끼는 1인당 30만원에도 예약이 밀려있다고 합니다. 사치가 극을 달한다고 해야 할까요? 웃고만 넘길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70주년이 되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해 보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과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선조들의 삶을 보며 현실을 볼 때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선지자로서 조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안타까이 외쳤습니다. 옛적 길 선한 길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길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의 말을 듣는 백성들은 한 마디로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가지 않겠나이다. 예레미야도 그 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아보고 그 길을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지금 현재의 안락한 삶이 좋다는 것입니다. 꼭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 잘 먹고 잘살면 되었지 그냥 이대로 좋으니 놔두라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회개의 말을 전하기 쉽지 않고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잘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회개할 일이 무엇이 있는가? 도전하고 있습니다. 평양노회의 법적 정통을 따르는 경남 법통 노회에 속한 자랑스런 고신의 지도자 여러분 이 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편 44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조들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잘 전해 들었습니다. 그 역사는 그들의 선조들이 힘이 있어서 대적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강한 힘으로 대적을 이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약소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강대한 나라도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 손과 팔과 그 얼굴빛으로 대적을 물리친 것임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선조들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자신의 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과거의 하나님으로 끝나지 않았고 이삭의 하나님으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선조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그 하나님을 현실에서도 구원을 베푸실 왕으로 믿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었음을 믿었습니다. 과거 조상들에게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이었음을 확신하고 믿었습니다. 법통노회의 뼈대를 이어온 경남 법통노회가 말씀의 맥을 잘 이어가셔야 합니다, 1938년 9월 11일 제 27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그 후에 한 상동목사는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하였고 경남 지방을 순회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해방 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습니다. 그런데 경남노회에서는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는 치욕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교권을 이용해서 고려신학교를 허무는 작업에 착수하여 고려신학교 인가를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을 취소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경남 노회는 법적 정통을 지켜오는 노회와 김길창을 중심한 노회와 중립을 지키는 노회로 찢겨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로 신사참배를 가결한지 10년 만인 제 37회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를 단절하였습니다. 경남노회는 고신의 뿌리를 가진 노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말씀의 정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70주년 역사를 돌아보며 오늘 우리가 고백해야 하고 결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은도 없고 금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금도 있고 은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없어도 금이 있고 은도 있으니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칼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재주를 의지합니다. 우리의 힘을 의지하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수룬아 네가 살찌매 내가 발로 찼도다. 이스라엘아 네가 세상으로 배불렀으니 내가 발로 차버렸다고 경고하셨습니다. 70년 전의 선배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플러스 알파가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돈이 없어도 예배당 건축을 했습니다. 재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비추라고 하셨습니다. 가진 것 없어도 일어나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도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탓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황 앞에 굴복할 것이 아닙니다. 옛적 길 선한 길이 맞는다면 그 길로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70일 기도회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 고신교회는 기도의 DNA가 있습니다. 위기의 때마다 고신교회는 한국의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 조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는 그 때 고신 교회는 기도 했습니다. 마룻바닥을 적시며 기도했습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회개했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위기의 때에 대구의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 전선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은 매일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 때 부산에 피난 와 있던 목사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초량교회에 모였습니다.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목사는 피난온 교역자들을 위해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한국교회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다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회개만이 살길이라고 외쳤습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교회가 범한 죄에 대한 진노의 칼이라고 했습니다. 함께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거두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주일 하려던 기도회를 한 주간 더 연장했습니다. 2주간에 걸친 기도회가 끝난 3일 후에 하나님은 맥아더 원수를 통해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하셨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모든 군사 전문가들이 불가능하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한 시간만 늦어도 실패하고 몰살당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 전문가들은 다 반대했습니다. 원산 상륙작전을 할 수 있지만 인천은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김일성이도 인천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맥아더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지금 코로나로 한국교회가 심히 어려운 가운데 놓여졌습니다.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전도의 문이 막혔다고 말할 만큼 어려운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다시 고신교회를 통해서 이 땅의 회개를 부르짖게 하십니다. 존경하는 경남지역 교계 지도자 여러분 우리가 다시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이 조국을 위해 우리의 무릎을 드립시다. 오늘 신년 하례를 통해서 이 땅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경남이 하면 됩니다. 경남은 예로부터 큰일을 해 냈습니다. 금번에 한 번 큰일을 냅시다. 존경하는 경남지역 교회 지도자 여러분 다시 고신의 지도자의 자리를 찾읍시다. 고신의 정통을 이어갑시다. 2월 7일 부터 시작되는 70일 기도회에 모든 고신의 교회가 함께 합시다. 물론 70일 기도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70일 기도회가 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고신교회가 기도를 다시 회복하는 원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현장을 다시 뜨겁게 세워갑시다. 지도자들인 우리가 시작하면 성도들은 따라옵니다. 다시 우리의 위상을 세워갑시다. 잃어버린 영적인 능력을 회복합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고백했습니다. 고신교회 70주년인 올해는 다시 원년의 은혜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시대적인 요청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다시 세상의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따라가던 우리의 삶에서 말씀을 따라가는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가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따라 옵니다. 우리가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면 세상이 우리의 빛을 보며 다시 교회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솔직히 너무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너무 세상과 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을 알아보고 회개하며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며 따라오게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교회 가자고 하면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나쁜 것 가르치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빛을 잃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다시 교회가 빛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의 빛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70주년이 되는 이 시점에 다시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고신의 지도자이신 목사님 장로님 그리고 기관임원 여러분 예배를 회복하고 말씀을 회복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육원 이사장님이 계시지만 금번에 15억의 재정을 들여 만들어진 킹덤스토리는 우리를 다시 말씀으로 회복하는 귀한 프로그램입니다. 온 교회가 함께 동참한다면 말씀의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잊지 맙시다. 다시 회복합시다. 금번 70주년은 하나님의 큰 복이 회복되는 원년이 되게 합시다. 코로나 이전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복을 사모합시다. 교회, 다시 세상의 빛으로 나가는 우리 교회를 세워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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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김성수 총장]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더니 …
    국내 주요 일간지의 보도와 같이 북한이 지난 5일과 11일 극초음속(음속의 10배,시속 약 1만 2240km) 추정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단거리 탄도미사일 추정 발사체 2발을 쏜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 미사일은 탐지와 요격이 불가능해서 한미 요격망을 무력화시키는 최 첨단 무기로 미국 본토에 대해서도 핵 타격처럼 위협적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작년 9월 15일에 이어 4개월 만에 두 번째로 열차를 활용한 단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장면도 공개했다고 합니다. ‘열차 발사 탄도미사일’은 터널에 숨어있다가 기습발사가 가능하고 북한 전역 철도망을 이용해 어느 지역에서도 발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미국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다방면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해야 할 우리 정부와 정치인들은 오로지 대선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만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군대가 과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럴 의지라도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국민들도 이제는 북한 미사일 발사 소식에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다. 순박한 국민들로서는 어떻게 할 방도도 없고 그냥 상황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에도 이런 위기의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온 땅에 무기를 만드는 철공이 없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을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중인 때였습니다. 블레셋 족속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적인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 족속들은 조그마한 군사적인 어떤 모양만 있어도 금방 갈등을 초래하고 전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들 두 백성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의 때가 전쟁 때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위험한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적에 대해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적이 있었지만 이들 대적들의 존재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대적들의 존재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유지하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새로운 무기들을 전혀 만들지 않았고 일상 생활에만 분주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분주해 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고 훈련하는데 분주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철공들에게 자기들에게 와서 일해 줄 수 없는지를 요청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할 일이 없던 철공들은 기꺼이 동의하고 블레셋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 철공들에게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나라간에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나팔을 불어 군대를 모았는데문제는 전쟁을 위한 무기를 갈고 만들어야 할 철공들이 없었습니다. 평화의 때에 이들 철공들에 대해서 너무도 무관심했기 때문에 막상 철공들이 필요 했을 때는 이들 철공들이 모두 불레셋에 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마치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던 위기의 시대와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듭니다. 오늘 국가의 안보 위기를 위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교회의 대적을 더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이 때에도 우리의 대적들은 항상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의 대적들이 있습니다. 이 대적들은 너무나도 적극적이고 활기가 있어서,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제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항하면서도, 가정을 유지할 수 있고,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고, 직장 생활을 하고,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그래도 “약은 내가 바르지만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세속주의에 물든 우리는 “약도 내가 바르고 병을 낫게 하는 것도 인간이다”라고 하는 세속적 인본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과 지식과 재능과 과학기술을 가지고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바로 이런 생각을 더 고양시키고 있습니다. 코로나 상황은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은 과학과 과학기술의 문제지 더 이상 신앙과 기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짓 신념을 우리 가슴에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흔히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너무도 평화롭고,과학기술의 힘이 우리를 너무 안락하게 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가?우리는 아직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지 않는가? 자유롭게 직장 생활할 수 있고,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집도 수리하고 꾸밀 수 있고, 죽은 자들을 장사할 수도 있는데, 도대체 대적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화의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을 빼앗아 가는 세속적 사상들이 도처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성경적 가치관을 송두리체 부인하는 가치관들이 우리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교회 안에도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도 모르는 가운데 침투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적들은 아주 우아하고 교양이 있는 듯, 친절하게, 관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안락한 자세로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우리의 바로 대적들을 수용하게됩니다. 우리의 대적들은 언제나 적극적이며 우리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대적들과 더불어 공개적인 전쟁을 해야 하는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자체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철공이 있는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철공들을 준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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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 [조희완 목사] 권면할 일들 (행14:19-28)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천 원 권 지폐에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들 가운데 <율곡 이이>선생은 대단히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13세 때 처음 과거시험에 합격을 한 후 아홉 번이나 연속으로 합격을 해서 “신동”(神童)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9세 때는 장원급제를 해서 젊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대제학이라는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그가 중요한 관직에 올랐을 때 우리 나라의 정치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첫째는,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에 몰두해 있는 정치판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10만 대군을 양성해서 국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목숨을 건 충고와 권면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7년 동안 왜군들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른 양심을 가진 한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외면한 댓 가가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의 권면이나, 바른 양심을 가진 사람의 권면은 귀담아서 듣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한 까닭은 바로 선지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권면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13:10)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차에 서로 권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서로 권면해야 할 일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적극적으로 신앙을 권면해야 합니다.(행14:21-22)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배를 권면해야 합니다.(히10:24-25) 셋째는, 적극적으로 회해를 권면해야 합니다.(고후5:18-19)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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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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