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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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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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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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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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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관리의 책임
    우리나라의 TV 방송 프로 가운데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그 프로에서 오래 전 <벼락부자, 그 후 - 부자라서 행복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방송을 했습니다. 한기수씨(가명)는 로또 복권 1등 170억 원에 당첨이 되어서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고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부부간에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금(巨金)을 관리하는 문제를 가지고 부부가 서로 다투다가 9개월 만에 합의 이혼을 하고 가정에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충청도 한 시골 마을에서 3대째 농사를 짓고 살던 양만철씨(가명)의 경우 토지 보상금으로 120억 원의 거금을 받고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토지 보상을 받는 과정에 동네 이웃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그 일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어느 날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자기 아버지를 잃고 좋은 이웃을 잃은 그의 아들이 말하기를 “지금보다 이전에 삶이 훨씬 더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고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큰돈이 생겨서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큰 돈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좋은 것이지만 그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도리어 화(禍)가 되고 재앙(災殃)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 뿐만 아니라 너무나 귀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것들을 제대로 잘 관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귀한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잘 관리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받은 은혜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갈1:6-7절) 둘째로, 주신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엡5:16-18) 셋째로, 주신 물질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요6:11-12)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을 잘 관리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0-01-01
  • <정연철 목사의 행복 콘서트>비전의 사람 (6)
    사람들은 거룩한 예배에 대해 많이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손뼉을 치지 않고 조용히 소곤소곤 기도하는 것이 거룩한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그의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아들들을 불러 놓고 그 앞을 지나가게 했습니다. 다윗만 빼고 모든 아들을 다 보여주었지만 사무엘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 선지자가 아버지 이새에게 “너의 아들 가운데 또 다른 아들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막내가 있는데 저 목장에서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빨리 올라오라 하라.” 다윗이 갑자기 부르심을 받고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머리에는 먼지가 뿌옇게 앉았습니다. 목동으로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옷에서는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외모를 보지 말아라. 나는 중심을 본다. 다윗에게 기르믈 부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옷 잘 입는 것을 보지 않고 마음의 태도와 중심을 보는 분이심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제물이 될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며 그런 예배자가 성공적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 예배를 열납하십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초청되어 말씀을 전하는데 성령이 이방 사람인 고넬료의 집에 임했습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첫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복음전파에도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서울의 모 교회에서 대형 버스를 타고 소록도를 갔습니다. 소록도 교회당에서는 나병 환자들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먹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는 사람들이 “인애하신 구세주여..., 기쁘다 구주오셨네...”를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신사들이 들어오자 나병 환자들이 “병신들 왔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서울에서 오신 장로님, 권사님 등 쟁쟁한 분들이 들어가니 병신들이 왔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분이 상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못 들은 체하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눈썹도 뭉개지고, 코도 뭉개졌는데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기뻐서 즐겁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장로님들이 코가 납작해졌습니다. “맞아. 저분들이 환자가 아니라 우리들이 환자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거룩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물은 산 것으로 드려야 하며 그 산 제물이 바로 우리의 몸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몸을 드린다는 것은 시간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목사님이 교회 일 좀 하라고 하면 “나는 못해요.”하고, 청소 좀 하라고 하면 “나는 바빠서 못해요. 교회 재정으로 청소부 쓰면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저는 토요일이 되면 모든 부교역자들에게 교회 청소를 시킵니다. 부교역자들에게 목회자로서 실천해야 하는 삶의 목표와 지침들을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교인들은 일주일간 직장에서 수고하고 피곤한데 교역자들이 교회 청소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 청소를 한 후에 교역자 회의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 앞에 돈만 드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돈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함께 드려지는 것이 때문입니다. 성도 각자의 수고와 땀과 눈물이 교회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어야 ‘이 교회가 우리 교회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드리는 것이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땀을 흐리고 수고하는 것이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돈으로 때우거나 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솔선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저는 장로님들에게 “장로님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세요. 종이를 주우시면서 같이 줍자고 하세요.”라고 권면합니다. 어느 날 선임 장로님이 그 무더운 여름에 땀을 흘려가면서 제 차를 세차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 체통이 있지요. 누가 보면 뭐라고 합니까? 빨리 치우고 들어가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은 “체통이 뭐예요. 장로가 해야 될 일이 뭔데요. 목사님이 바빠서 세차할 시간도 없는데 제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하셨습니다. 선임 장로님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니 그 다음 장로님들도 자연적으로 따라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몸을 드려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제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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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0-01-01
  • [김민호 목사] 전광훈 목사 발언에 대한 원론적 접근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텍스트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의 주관이다. 텍스트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받았으면 나쁜 것이라고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선한 의도로 ‘아름답다’고 해도 그 여자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으면 의도(중심)와 관계없이 성희롱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해체주의’라고 한다.최근 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침을 튀긴다. 반대쪽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해체주의자들처럼 “텍스트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일 뿐이다”라고 보아야 하는가? 또는 “그의 중심이 중요하다. 표현을 문제시하지 말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정확하게 해체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입장으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 평가한다면 불신자들과 아무런 구별됨이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의 핵심은 회중들이 어떻게 느꼈는가가 아니다. 제3계명처럼 결코 망령되게 일컬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와 관련된 문제라는 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원론적 접근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야교회에 나가서 열정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할 것이다. 또 질문을 던져보자. “신앙의 자유를 위협받고 나라가 극도의 위기에 처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위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자문해 볼 질문이 더 있다. 우리가 광장에 모여 추운 바닥에서 목이 터져라 기도하는 의도가 ‘진심으로’ 하나님만이 이 위기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권을 향한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퍼포먼스인가? 만약 기도의 의도가 후자에 기울어져 있다면 대중의 단합된 힘이 하나님 노릇해 줄 것이라고 믿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촛불이 아니라 기도 소리로 위협을 할 뿐이다.오해하지 말라. 광장에 모이지 말라거나,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모습 자체는 귀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점검해 보자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시 147:10-11)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군중의 숫자가 아니다. 또는 앞에서 무리를 이끌어 가는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딱 하나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 속에서 우리는 과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의 특징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광장에서 추위에 떨며 눈물로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 경외함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는지 묻고 싶다. 전광훈 목사의 발언을 아무리 좋은 의도로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히 그 표현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에 대한 모독이다. 온갖 궤변으로 합리화하지 말자. 또 이런 궤변적 선동에 경건한 성도들이 부화뇌동하지 말았으면 한다. 현실적으로 위기의 상황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가자는 말에도 현혹되지 말았으면 한다. 전광훈 목사가 사라지면 이 나라는 끝나는가? 하나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렵지 않고 전광훈 목사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려운가? 전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이 나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전 목사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알리딘의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취급하는 듯하다.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표현을 문제 삼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중심을 보신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정확히 읽어보자. 이 말씀은 여기에 사용될 말씀이 아니다. 신명기 10:17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했고, 사무엘상 16:7도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한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핵심은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지, ‘행위’나 ‘말’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의 말과 행위를 심판하신다고 한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시 59:12)고 한다. 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고 한다. 사도 야고보의 말처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약 1:26)이다.무엇보다 전광훈 목사는 평신도가 아니다. 목사다. 목사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더 심각하게 여겨져야 마땅하다. 바울이 한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는 직분자가 아닌가?이런 글을 쓰면 어떤 사람은 좌익으로 전향했느냐고 광분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공격하면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잘 하고 있는 전광훈 목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잘하면 잘한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잘못한다면 잘못한다고 반응해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대의 민주정치는 죽는다. 하나님과 법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기 영합과 선동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 이 영역은 좌익의 영역만이 아니다. 우익 진영도 다를 바 없다. 독일을 히틀러도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국민이 잘잘못을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는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링컨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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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박두용 장로, 원로장로 추대식에서..
    주님을 처음 만난 후 은혜로 당신을 사랑하여송두리째 나의 전부를 당신께 걸었습니다.이제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과 부족한 종은 70년 동안 찬양하며 섬기는 최고의 관계입니다. 단지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와운 마을 천년송처럼 변함없이 한 자리에 우뚝 서서 오직 당신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늘 솔향기를 풍기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치료하는 물질을 나누며 살았습니다.껍질은 물론 속살까지도 다 드렸습니다.30여년을 미련한 장로로 나의 부족함을 드렸더니원로장로라는 칭호를 주셨습니다.내 생명과 같은 마산성산교회,그리고 경남마산노회와 고신총회를 미약하지만 믿음으로 섬겼습니다.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전부가 당신이기에 눈비가 오고 거센 바람이 불어도 은퇴의 순간까지 부족함을 다 바쳤나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손을 털고 후배에게 내가 못한 일들을 다 맡기고 떠나렵니다. 와운 마을 천년송 위에 걸친 아름다운 일곱 빛 무지개처럼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인생백년이라 하셨나요? 남은 세월이 살아온 세월보다 적지만 그래도 주님께 기대어보렵니다.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신 여호와여!종의 여생도 지켜 줄 것을 믿습니다.주신 축복의 자녀 손까지도 주님의 손에 다 맡깁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으로아름다운 무지개를 보내셔서 진실을 보이시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과 늘 한 몸 되어 살아가는 이 기쁨과 행복 진정 아름답다고 하렵니다.오늘이 있게 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모세를 부르셔서 큰일을 하도록 하신 나의 하나님을 의지합니다.불변하는 천년송과 영롱한 무지개처럼 많은 분들에게 행복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간절히 소원하옵기는 이후로도 믿음의 종 갈렙 같은 힘과 건강을 주시기를 원합니다.사랑하는 우리 주님과 더불어변함없이 한 몸 되어 복된 소식을 열방에 전하며 묵묵히 당신만 따라가는 착한 종이 되렵니다. 2019년 12월 18일 마산성산교회 장로 은퇴와 원로장로추대식에서마산회원교회 하수룡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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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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