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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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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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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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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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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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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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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그루터기 칼럼[문보민 목사] 다른 복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에게(2)- 진리는 결코 질리지 않는다.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설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 비성경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이단들 말고도 교단에 속한 전통교회 목회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비성경적 메시지가 기독교인들의 분별력을 흐트러뜨리는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더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미디어를 보고 기존의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다 말하고 영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통계시를 주장하거나 율법주의적 구원관과 회개관, 극단적인 종말론 등을 앞세워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 심지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대속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가르침에 격하게 공감하고 거름망 없이 자신들의 신앙에 그대로 흡수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본다. 기존의 가르침에는 더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식상함마저 느끼는 것 같다.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의 완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행위인가? 그럼 우리는 얼마만큼의 행위로 구원의 완성의 조건을 채워야 한단 말인가? 성경에서 행위를 말하는 것은 구원 받은 백성으로써의 삶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구원이 행위에서 완성이 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염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두둔하며 값싼 복음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다. 그럼 비싼 복음도 있는 것인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절대적인 영원한 대속과 생명의 가치를 감히 누가 비싸다 값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인가? 한국교회의 진짜 문제는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다. 구원의 확신만을 강조한다며 한국교회의 문제를 값싼 복음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리어 확신 없는 신앙이 삶의 방종과 종교적 행위뿐인 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의 가르침에 아멘하며 격하게 공감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깨달아 지는 순간, 나를 위한 절대적 사랑이 나의 가치관에 부딪치는 순간 우리의 삶의 방향은 그 분을 향해 바뀌어져 가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두자.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리는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진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의 대속의 완성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 이 진리는 영원불변하다. 이 진리를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다. 진리는 변함없고 한결같으나 늘 새롭다. 그래서 진리는 결코 질리지 않는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은혜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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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6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하나님 나라의 전담 사역자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세상의 명작이라는 책들은 한번 읽고 나면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한국어로 번역된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라는 명작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명작입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서재에 보관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서적들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균형 잡힌 올바른 시각을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말 다른 책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런 문제까지 이렇게도 세밀하고 심오하며 균형 잡힌 가르침을 제공해 주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모든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예를 들면, 일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신약 시대의 다른 문화권의 관점과 비교해 보면 성경에 나타난 노동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 사상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여 영혼은 귀한 것이고 육체는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에서는 몸으로 일하는 노동자는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요받는 사람, 즉 먹고 사는 데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 경멸당했습니다. 노동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노예 같은 존재였으며, 실제로 거반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헬라의 엘리트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삶은 우주의 이치를 논하며 여가(leisure)를 즐기는 활동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 정치와 철학 혹은 종교를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인은 일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헬라의 엘리트주의적 관점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참된 자유는 일에서 해방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철학이나 종교적 활동을 육체적인 일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서 신실하게 행하기만 한다면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은 다 똑같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는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재림에 강박적으로 심취해서 일하기를 거절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너무나도 영적이어서 육체로 하는 시시하고 일시적이며 세상적인 일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은 사실 날카롭게 비꼬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르치기를 그들이 너무나도 영적이어서 일할 필요조차 없다고 한다면, 먹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적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일 가운데서 그들의 손과 몸과 정신과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나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가르치고 전수하려고 했던 사상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이와 같은 성경적인 노동관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적 활동에만 몰두해 있거나 소위 ‘영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삶을 훌륭한 기독교적 삶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종종 다른 모든 종류의 삶보다 명상적인 삶을 더 높이 추켜올렸기 때문에, 수사들과 수녀들과 사제들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우월한 일급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열등한 이급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개혁가들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 곧 사제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봉사, 모든 종류의 일이 똑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섬김이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전담(full-time) 사역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형태의 일은 신앙에서 비롯될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 사람의 섬김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자기 손으로 정직하게 일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 새로운 본성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손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새 사람은 하나님의 세상 가운데서 일을 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본성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철저하게 ‘세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종교, 정치, 사업, 언론, 교육, 예술 등 어떤 영역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터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이며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견지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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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5-26
  • [기고]고신, ‘개혁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특별 기고> 필자는 고신포럼의 한 일원으로서 고신포럼의 이념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고신포럼으로부터 그 어떤 권위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의 글은 철저히 필자 개인 의견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에게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리고 장문이라 서두에 단락의 제목을 밝히고 그 순서에 따라 의견을 펼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한다. 우리 고신이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유는, 지난날 종교적 혼합과 세속적 타락으로부터 오직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말씀중심의 길을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선진들의 생명을 건 투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Protestant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개혁주의는 전 고신 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이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만이 취급할 수 있는 전유물인양 주장하는 전제를 필자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 점에 관하여 깨어있어야 하고, 특히 고신 인이라면 이 개혁주의 노선을 반드시 지켜야하고 그 길을 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그 권위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것에 대하여 논하고 바른길을 찾는 것에는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는 길은 신학적 논리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00 목사가 고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제기한 신학적 이슈에 관련하여, 첫째는 제기된 문제의 팩트를 확인하고, 둘째는 그 오류가 무엇인지 근거와 논리로 반박하고, 셋째는 그 제기된 문제가 분명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하면, 소위 목회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들이 냉정한 판단을 통하여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 교수와 모 목사는 본질적인 문제 보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고 정치 논리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자못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신학적 문제는 정치적 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고신을 걱정하는 순수한 의도를 지닌 개혁주의 신앙을 걸어가는 자로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향하여 소위 ‘일개 목사’를 운운하면서 무시하는 처사는 결코 고신인답지 않는 처사이다. 적어도 고신포럼이 어떤 정치적인 사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며, 비도적인 집단으로 매도한 모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야지 어떤 정치적 프레임을 둘러씌워,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열정을 가진 한 목사를 매도하거나, 더욱이 우리 교단에 소속된 수백 명의 회원을 가진 고신포럼을 아무 근거 없이 정치적으로 몰아 공격하고 있는 현실에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4) 고신포럼은 고신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신포럼은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친목을 위한 소모임이 아니며, 엄연히 대표를 비롯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모 목사가 폄하할 정도가 결코 아님을 밝혀 둔다. 그런데 모 목사는 고신포럼에서 '고신'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근거로 ‘고신몰’ 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고신몰은 고신교회와 성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교회 관련 물품들을 공급하여 상생하는 길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용자가 너무 적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폐쇄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 목사의 말한 것처럼 따끔한 질책을 한 후에 폐쇄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이를 근거로 목사들의 학문토론을 지향하는 고신포럼의 폐쇄를 운운하는 것에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신포럼의 주제와 강사선정까지 간섭하는 듯한 발언은 그 정도를 넘어선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신포럼을 ‘정치모임,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의 장, 정치화시키려는 장을 삼으려는 합리적 의심이 간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정치적 프레임에 대해서야 말로 고신포럼이 엄중히 경고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경우에는 그 단체의 이름을 사칭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거나, 그 단체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심각한 폐회를 끼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고신포럼에서 고신의 이름에 어떻게 명예를 훼손했으며,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 그 근거를 들어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고신’, 그 자랑스러운 이름은 고신 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며,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 입장에서 학문적인 따끔하고 아픈 지적은 언제든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고신’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는 ‘고신포럼’ 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나 입맛에 맞지않다고 하여 고신포럼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놀음이 아닌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5) 올바른 신학적 논쟁으로 고신 정체성을 회복하자 지금 우리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반석 위에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우리 안으로부터 성숙한 신학적 논쟁으로 바른 신앙과 신학을 회복시켜 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알맹이 없는 발언으로 비난을 쏟아내는가?’, ‘어떻게 정당하게 신학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할 생각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위협에 가까운 말들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싶다. 그렇다. 존경과 공경은 중요한 윤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고 성숙한 논쟁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에서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는 목사의 글에서, 순수하게 학문적,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후배 목사를 향하여, 정치적 배경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닌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교단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한 목사의 열정을 꺾어 버리고 상처를 준다면 교단의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논쟁하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지 않는가? 비난이 아니라 생산적인 비평의 장, 정치적 프레임이 아니라 순수한 신학적 논쟁의 장, 권위의식으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수용하고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이 가감하게 마련되길 바란다. 6) 따라서 ‘교단신학과 정체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 를 제안한다. 제3회 고신포럼을 개최하면서 상당히 미묘한 주제라는 것을 인지한 준비위 측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가진 특정인에게도 동일한 시간을 배정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모 목사가 ‘그렇다면 이슈의 중심이 된 모 목사와 정당하게 공개 토론의 장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 제안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회피성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을 인정받게 될 것인데, 그 논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차제에 소위 말하는 고신 신학의 바른 정립을 위하여 격을 높여 한 번 진중하게 대내외적인 장에서 공개 토론을 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발제자를 3-4명 정도로 하고, 발제 주제 전문을 발제 전에 다른 발제자들이 공유하게 하고, 그 발제 후는 ‘일대일’, 또 ‘일대다’의 형식으로 적어도 3차례의 반론기회를 부여하여 분명하게 대토론회를 가져보면 좋겠다. 이것을 고신포럼이 주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고, 누구든지 당당하게 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모든 목회자들과 소위 젊은 신학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배움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한 젊은 목사에게 완전히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너무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어도 필자에게 ‘고신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고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 일이 일부의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기를, 또한 고신 신학의 발전적인 기회를 놓치므로 후회할 일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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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5
  • [김성수 총장] 풍요하고 행복한 삶
    요즘 참 살기 힘 든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가치 가 후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부동산 가격 폭등,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불안, 빈부격차의 심화, 경제적으로는 IMF때 보다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을 갖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합니다. 취업이 어려우니까 결혼하고 가정을 꾸미고 애기를 갖는 일은 꿈도 꿀 수 없다고들 합니다.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서 살기가 더욱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정도 메말라가고 우리 모두의 삶도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는 꿈 자체가 우리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삶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일까요? 어떤 글을 보니 다음과 같은 조건만 갖추면 행복하고 풍요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받는 것과 같은 액수의 연봉을 받고, 독일 사람들처럼 시간 맞추어 일하고, 영국 집과 같은 큰 집에 살면서 세계 5대 요리 중 하나라고 하는 프랑스 요리를 먹고,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조용하고 순종적인 일본 여자를 아내로 맞아 사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반면, 가장 불행한 삶은 북한 월급 받고, 한국 사람처럼 일하고, 일본 집에 살면서, 영국 음식 먹고, 한국 남자를 남편으로 맞아 사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믿든지 말든지” 라는 말과 같이 이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어쨌던지 여성을 존중하지 못했던 전통적인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사회 경제적으로 다소 열악한 조건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고 풍요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강(shalom)이 있으면 얼마든지 여유가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물질이나 권력, 지식, 명예가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은 탐욕을 부추길 수 있고, 권력은 긴장을 가져오며, 지식은 번뇌를, 명예는 허무감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 권력, 지식, 명예 등 이 모든 것을 다 움켜쥔다고 해도 하늘로부터 오는 평강이 없으면 결단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평강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오는 주관적인 감정이 아니라, 본질상관계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절대자와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면 이 관계에서 막힌 것이나 긴장감, 또는 원한 관계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화목하지 못하면 재물과 권세를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불안하며 궁핍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있으면 긴장감을 느끼게 되고, 사람을 만나기를 주저하고 피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인간은 또한 자연과 더불어 친화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자기 자신을 향해 열등감과 같은 부정적인 관점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각자 조물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자연을 개발하고 문화를 발전시키고 자연을 보존하며 지속적으로 개발해 갈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맺는 관계 속에서 막힌 것이 없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관계 속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평강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하면 관계 속에 누림(enjoy)이 있어야 합니다. 절대자와 더불어 화목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절대자를 내가 즐거워하고 누릴 때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이 물밀 듯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막힌 것이 없이 지내는 상태에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이웃을 즐거워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이 인생의 제일된 목적입니다.이웃을 만날 때 그냥 지나치기보다 다정하게 건네는 인사 한마디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나 혼자만 즐기기보다는 이웃과 함께 더불어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으로 풍요로운 삶입니다. 자연을 즐기는 삶, 보다 더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삶이 행복한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상의 분주한 삶 속에서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새들의 지저귀는 노래소리,계곡 바위틈을 지나 흐르는 시냇물의 맑은 소리, 들판에 피어 있는 야생화 한 송이, 들풀 하나도 예사로 지나치지 아니하고 멈추어서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평강의 삶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지구촌 도처에 갈등과 대립, 폭력과 테러, 실업과 빈곤, 더구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삶이 각박해져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평강의 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평강과 풍요를 누리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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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그루터기 칼럼[김병환 전도사]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전능신교)에 노출된 한국교회
    5년 전 한국교회는 이단으로 규정된 신천지와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피해대책과 예방대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이 시기 중국정부는 ‘전능신교’를 사회에 해악을 주는 종교인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대대적 단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전능신교는중국정부를 피해 본격적으로 한국에들어오기 시작합니다.이들은 ‘강원도 횡성’, ‘서울 구로’, ‘충남 보은’에 중요 거점을 마련하고, 중요신문의 광고와 유튜브 채널을 이용하여 한국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전능신교가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가 된시기는, 2014년 5월 중국 산둥성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에서 한 여성이 집단(일가족)으로 폭행당해 사망한 사건이 보도되고 난 후입니다. 한 이단대책협의회에서 이 사건의 재판영상을 번역한내용을 확인하면, 포교를 거부한 여성을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이유를 ‘악마’가 그 여성에게 깃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악마’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라고 말하며 살인에 대한 정당방위를 주장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죄를 인정하고 잘못을 뉘우친 사람은 작은 딸이었습니다. 작은 딸은가족들이 전능신교를 믿은 후 정상적인 가족생활과 학교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러한 삶을 살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사건은 이단사이비가 종교를 이용한심리 조작을 통해 한 가정의 삶과 사람의 도덕관념을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밖에도 현재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전능신교에 세뇌되어 중국에 있는 가족들과 단절하고 한국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취재한 영상들을 보면, 중국의 가족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배우자와 자녀들을 찾기 위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울부짖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전능신교는 맥도날드 사건에 대해 중국정부가 꾸민 모함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이며 투명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단체를 반대하고 포교를 거부하며 전능신인 양향빈을 거부하는 대상들을 ‘악마’로 간주하고, 그들에게 상해를 입혀도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도덕성과 인격성의 결여를 보입니다. 만약, 평범하던 사람이 전능신교를 믿고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오랜 기간 심리조종(세뇌프로그램)을 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러한심각한 모습들은 기독교방송에서 취재한 영상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기독교’, ‘기독교 영화’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전능신교의 포교영상이 수십개가 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전능신교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온라인 이단예방대책에 힘씀으로 과거에 아픔과 상처를 재반복하지 않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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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06
  • [박봉석 목사] 틀리게 찬송 부른 목사
    어느 교회에서 가족 찬양경연대회가 열렸습니다. 모두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를 했던지 출전하는 가족마다 참 은혜롭고 수준 높은 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가족 순서에서는 아버지인 집사님이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원래 찬양 가사와 다른 가사를 태연하게 불러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그 집사님은 찬양이 끝나자마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자리에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담임 목사님 가정이 찬양을 했습니다. 한참 찬송을 부르다가 목사님이 너무도 태연하게 가사를 틀리게 부르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또 다시 깔깔대며 웃었고, 사모님과 자녀들은 왜 틀렸느냐고 핀잔을 주는 얼굴로 목사님을 힐끗 쳐다보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장로님들이 목양 실에서 목사님의 책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 장로님이 목사님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장로님은 궁금한 마음에 일기를 펼쳐서 읽는데, 장로님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7월 14일, 가족 찬양경연대회가 있었다. 김 집사님이 찬송을 부르다 틀려서 교인들이 다 웃었는데, 김 집사님이 너무 무안해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다음 차례로 우리 가족이 찬송을 부를 때 나도 일부러 틀려주었다. 다시 교인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때 슬쩍 김 집사님을 보니 ‘목사님도 가사를 틀릴 수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는 것 같았다. 오늘도 작은 일로 한 영혼에게 위로를 줄 수 있어서 기쁜 하루였다.” 장로님이 다른 장로님들에게 목사님의 그 일기를 보여 주자 모든 장로님들이 방바닥에 퍼지고 앉아서 한바탕 울었습니다. 교인의 허물을 가려주고 싶은 목자의 배려의 마음을 읽었기 때문이었고, 그런 목사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한 회한이 가슴에 복받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의 수치와 허물을 가려 주기 위해서 나의 수치와 허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목자의 마음을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장로님들은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습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가장 가까이 있는 여러분의 배우자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편입니까? 이상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우자의 허물을 이야기 소재로 삼는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합니다. 그것을 미덕으로 압니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가까이 있는 배우자의 허물도 덮어줄 수 없다면 우리는 사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없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개 집사가 알았으니 이제 온 교회가 다 아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교회 안에는 비밀이 없다.” 이런 말이 교회 안에서 회자되는 것은 사실은 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진짜 맞는지 물어야 할 문제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대상에게도 허물을 보이시지 않지만, 모두 죄인들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인 우리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인간인 서로서로에게도 많은 허물을 보이게 됩니다. 남의 허물 보기를 즐거워하고 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려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려는 마음은 행복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허물을 다 덮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가려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인격을 갖추게 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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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하수룡 장로] 고 백
    어떤 연애인이 자기의 과거 행적을 깨끗하게 털어놓지 않아 상대방의 불신이 커져 사랑했던 두 사람의 믿음이 깨어져 이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고백 중 가장 자주 목격되는 것은 사랑에 관계되는 고백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을 다 공개를 해도 문제가 되지만 꼭꼭 숨겨놓고 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여 결별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되신 주님께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고백하면 품어주시고 긍휼과 자비의 옷으로 입혀 주시기 때문에 변질되어지는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고백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로 특히 자기의 죄를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참회라고도 한다.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면 그 죄를 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제가 속죄해 주는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들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고백을 성사적 예식으로 여기며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한 사건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적 성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은총이며 그 은총을 은혜로 의식하는 일에 바쳐지는 모든 일이 성사라 믿는다. 개신교애서는 만인제사장론에 따라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만 하는 것으로 사죄를 특권층에만 부여하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장로교에서는 예배 중에 죄의 고백을 순서에 넣어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 중에 대표기도의 주요기도 제목으로 죄의 용서를 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최근 어떤 신문에서 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가장 싫어하는 고백은 무엇일까를 묻는 설문에서 다른 사람을 통한 대리고백이 최고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도 타이밍에 맞춰 직접적으로 확신에 찬 고백을 해야만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원치 않는 간접적인 고백을 받았을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은 고맙지만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내용이라도 적시에 우리가 직접 나아가 솔직하게 남김없이 고백해야만 기뻐하시고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가 쾌락의 길로 걸었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다.’라고 고백했지만 늘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의 찌꺼기 때문에 회개를 통한 고백보다 더 진한 인간의 행위를 포루티운쿨라 교회의 장미정원에서 알몸으로 뒹굴며 용서를 구하였다. 그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베푸셨고 축복의 증표로 장미의 가시까지도 없애주었다는 실화가 있다. 이곳의 가시 없는 장미를 타지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한다고 하니 진실한 고백이 있는 곳만이 생명이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고백은 경우에 따라 약도 되고 독이 된다. 그러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씻지 못할 죄악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기뻐하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모조리 하나님께 고백하자. 그리하면 우리 주님은 불변의 사랑으로 놀라운 은총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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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김성수 총장] 가장 중요한 구분
    그리스도인들은 ‘CTR’(Creation-Fall-Redemption/창조-타락-구속)이라는 렌즈를 장착한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세계관적 질문에 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창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이 한 구절은 짧지만 엄청나게 심오하고 풍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Creator)이시고,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creatures)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주와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하는 것’(to distinguish)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다르게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아주 중요한 인식 행위입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구분하기를 배웁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구분하고, 엄마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의 얼굴을 가릴 줄 압니다. 유치원에 가면 숫자(1,2,3,4…)와 색깔(빨강, 주황, 노랑, 초록…)과 도형(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을 구분하는 것을 배웁니다. 나중에는 ‘이것’(this)과 ‘저것’(that)이 다르다는 것을 배우고, ‘이 방법’(this way)과 ‘저 방법’(that way)이 다르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배움의 내용이 심화될수록 이 구분의 학습 과정도 아주 복잡해지고 난해하게 됩니다. 교육은 결국 학습자들로 하여금 구분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구분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creatures)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분을 대문자 ‘C’와 소문자 ‘c’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구분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자신의 깊고 풍부한 지식을 자랑해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배우지 못하고 세상 지식이 좀 부족해도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른 모든 피조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분들이 귀한 분들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엄격한 구분의 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소문자 c(피조물)를 대문자 C(창조주)의 자리로 올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idol)이 됩니다. 피조물이 아무리 신비하고 귀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라고 하셨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출 20:4-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대문자 C(창조주)를 소문자 c(피조물)의 자리로 끌어내려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동양사상과 뉴 에이지(New Age) 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신론적(pantheism)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아무리 아름답고 신묘막측해도 그것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나의 종교이고, 지구는 나의 성전이다.”(Nature is my religion. The earth is my temple!)라고 주장하는 범신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나마스테”(Namaste)라고 인사를 합니다. ‘나마’(Namah)는 ‘경배한다’ 또는 ‘인사한다’는 말이고, ‘아스테’(Aste)는 ‘당신에게’라는 의미입니다. 나마스테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인사 방법입니다. 불교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더해가도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며 피조물의 자리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분을 잘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따라서 명확한 구분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 대충 구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관찰과 이성을 통해서 세상과 세상의 자연 질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하며 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빛 아래서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레스(Thales)는 지구가 엄청난 양의 물 위에 뗏목처럼 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이 물이며, 세상은 신들로 가득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모든 것이 공기(air)며 공기가 바로 신이라고 주장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number)가 우주의 본질이며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주의 기원을 공기나 물 또는 수로 설명하는 것이 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교주의 사상이 오늘도 우리 주위에 활발히 살아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가 바로 그러합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시119:105)의 조명 하에만 창조주와 피조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고, 우주의 질서도 창조 세계를 그분의 임재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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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6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이상택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창간 후 지난 15년의 세월, 쉼 없이 달려온 경남기독신문 직원들에게 박수와 격려와 위로를 보냅니다. 또한 그 노고가 얼마나 귀한지 짐작하기에, 새삼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동안 복음의 황무지와 같이 척박한 경남지역에서 경남지역 최초의 기독신문을 창간하고 지난 15년 동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지역을 넘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복음 신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신문 일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정화시키는 맑은 샘물과 같은, 꽃향기와 같은 신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경남 복음화와 교회를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 주시고, 정확하고 신속한 교계 뉴스를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 교육, 문화, 가슴 따뜻한 사랑과 나눔의 소식을 제공하면서 지역 사회를 더욱 밝게 만들어가는 신문이 되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경남 복음화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사를 써 주시길 당부합니다. 종이 매체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서 꿋꿋하게 경남 기독교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어 주길 바라며 바라기는 교계 미담의 발굴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이 시대에 스마트폰과 연동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속한 교계의 정보를 손으로 볼 수 있도록 어플리케이션의 많은 홍보가 있었으면 합니다. 또 SNS 등으로 빠른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이 때에 스마트폰 교육을 경남기독신문이 실시하여 독자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교계의 정보를 쉽게 그리고 신속 정확하게 알아도록 도와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독 청년들이 읽을만한 소식이 적어 아쉬움으로 남는데, 교회 안에서 청년들이 경남기독신문 기사로 소통하는 일들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경남기독신문과 직원 여러분,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하며, 창간 15주년을 지나 새 시대를 맞는 경남기독신문이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더 높이 비상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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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임명곤 장로]
    경남기독신문 창간 15주년을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그동안의 노고에 먼저 격려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지나온 것 하나님의 은혜라.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겸손히 문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면서 앞으로의 30주년, 50주년, 100년을 내다보면서 변화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좋은 신문이 계속 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15년 전 어느 날 이종승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마산 성은교회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경남기독신문을 법인으로 설립하는 이사회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부탁이라 힘은 없지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이사로 참여한 후 이제까지 신문사에 관심과 기도를 해 오고 있은지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지나갔습니다. 사훈을 ‘복음. 섬김. 연합’으로 정한 신문사가 우여곡절의 아픔을 겪어 오면서 오늘을 맞은지라 경남기독신문의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코로나19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의 나약함을 실감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기대해 봅니다. 이제는 신문이 전국에 배포됨으로 창원과 경남의 교계소식뿐만 아니라 지역의 아름다운 소식도 실어 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시상태와 같은 이때에 기독언론으로서 교회의 형편을 정부에도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코로나19 가운데 15주년을 맞지만 위축되지 말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오직 복음으로 섬기고 연합하는 사훈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또 30주년에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며, 이 시간에도 경남기독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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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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