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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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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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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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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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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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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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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동철 장로]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애틋한 죽음과 경남학생인권조례반대운동 비망록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애틋한 죽음 소식이 쉬 가시질 않는다. 초임교사로 부임하여 제자에게 폭행당해 3주 진단의 중상을 입고 그만 스스로 교사는 목숨을 끊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곳곳 교육현장은 물론 온 국민이 통탄하고 분노해 하고 있다. 그동안 학생의 인성지도에 교사의 교육권이 갈수록 약해지고 학생들은 학생인권이라는 제도적 보호 속에서 많은 갈등이 있어왔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육정책의 현장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번 같은 불행한 사건은 충격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원인을 두고 분석과 주장 또한 뜨겁게 일고 있다. 한눈에 띄면서 이슈가 되는 것은 학생인권조례이다. 이 제도적 문제가 각지자체 차원에서 운영됨에 따라 이러한 문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무게 있는 진단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지난 2010년부터 전국에서 제정이 추진되어 서울과 경기도를 비롯 10개 지자체서 조례가 제정되었다. 교육현장에선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무너뜨리고 한 교사의 자살을 부른 직접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교육 차원의 교권을 무너뜨리고 학생들의 과잉 인권행사가 강조됨으로써 되려 아이들의 훈육적 인성지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잘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공동체가 지향하는 이념교육을 위해 바르게 교육할 수 없는 많은 지장물이 조례안에 품고 있다. 우리 경남지역은 어떨까. 다행히 경남은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강력히 추진되다 무산되었다. 딱 5년 전 경남의 온 교회들이 반대 운동을 펼쳐 제정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오늘 펼쳐보고자 한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은 지난 2007년부터 일부 정치권을 중심으로 시작되어왔다.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있은 후 경남도교육청과 교육의원들 속에서 뜨겁게 추진되기 시작했다. 제정안에 학생인권중심의 내용도 있지만 교회 복음을 가로막는 독소조항들을 품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특히 기독교 복음이 그동안 공교육 현장에도 협력하여 아이들 인성교육을 얼마나 도왔는가.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나아가 복음과 함께 사회에 비전을 던지는 사명이자 희망의 빛이 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구원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함이 진리다. 십자가위에서 목숨을 던진 예수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경남지역 교회는 2018년 초부터 본격적인 조례 반대 운동에 돌입했다. 누가 말하기도 전에 성도들이 연합회에 참여하고 앞서 행동하는 바른 가치 수호의 기독시민단체가 깃발을 들었다. 매일 도의회 앞에서 시위와 구호제창으로 학생인권조례의 반사회적 기능을 설명했다. 교회를 돌면서 전문 강사들의 세미나 집회도 열렸다. 급기야 도교육청은 발의안의 구체적 작업에 들어갔다. 도의회 일부 강경추진 의원들이 제정안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2018년은 봄 여름가을 겨울이 없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를 구심점으로 여러 갈래 시민단체들이 힘을 합하여 도의회 앞에 텐트를 치고 철야농성에 들어가 무한 저항행동에 돌입했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이 어떤 정책에 반대하는 데모꾼이 되는 일이 한편 어울리지 않았다. 세상의 일반인들 또한 고깝지 않은 눈으로 지켜봤다. 경남도교육청과 도의회 의원들은 상정안을 정리해갔다. 1년여 기간 교회 부르짖음에도 끄떡도 없었다. 드디어 분수령이 생겼다. 2018년 11월 25일 주일. 창원 용지공원의 넓은 광장에 경남 전지역 교회 성도들이 오전예배를 드리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반대를 위한 대 집회의 시간의 날이었다. 필자는 일찍이 반대운동 한켠에서 돕고 있는 처지라 일찍이 현장에서 시간 흐름을 체크했다. 오후 2시부터 진행될 행사 시작 2시간 전 낮 12시부터 안개가 자욱했던 날씨가 걷히면서 쾌청한 날씨가 되고 물밀듯 인파가 몰리면서 대집회가 시작되었다. 모여든 성도들의 숫자가 얼추 3만 명이 되는 듯 했다. 집회 후 경찰 또한 2만 명으로 정보 보고되는듯했다. 시위 데모엔 숫자가 움직인다. 여러 채널로 알아보니 도교육청 경남도 수뇌부에서도 심각한 민의로 받아들이는듯했다. 이날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막기 위해 경남도 내 2천5백여 개 교회성도들의 집회는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웠다. 대성공의 집회로 마감했다. 문제는 이후 경남학생인권조례추진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2019년 들어 조례안이 상정되었다. 투쟁도 계속되었다. 그해 겨울은 유달리 차가웠다. 도청 앞에 텐트를 치고 밤낮없이 릴레이 농성으로 저항했다. 조례안은 상정되어 심의하기 시작했다. 그 한겨울은 길거리에서 저항했던 투사들의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일부 교회 장로들이 기획팀을 만들고 크리스천 도의원들과 막후 협상도 시도했다. 그러나 2019년 5월 25일 도의회 교육위원회에 상정되어 의결 절차에 들어갔다. 오후 늦게 9명의 상임 위원 중 6명이 찬성 진보 진영이고 3명 만이 보수반대의 진영이었다. 수적으로 통과의결 불을 보듯했다. 오후 늦게 장시간 토론 끝에 표결에 들어갔다. 도의회 안과 밖에서 찬반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결과는 6 대 3으로 부결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웬일인가. 날 위하여 십자가에 서신 예수님을 만난 듯 모두가 울었다. 진보진영 두 분이 고맙게도 반대표를 주었다. 이래서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무산되었다. 교육감은 늦게 경남학생인권조례는 재추진 않는다는 공식 발표를 했다.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었다. 이것이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무산시킨 비망록(備忘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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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31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2)
    환자를 위해 기도함도 같은 맥락이다. 치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한 자가 부르짖을 때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 이것을 보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어라.”고 하셨다. 치료의 하나님임을 주야로 묵상할 때 마음속에서 치료가 확신 된다. 그래서 저절로 치료를 부르짖고 터져 나올 수 있도록 말씀을 먹고 기도로 부르짖어야 한다.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철저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삶을 살 때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흥분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을 보고 성령님께서 흥분시키신다고 하는 것이다. 매일 정말로 감격으로 말씀을 붙잡고 사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울도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으로 늘 살아갔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다. 그는 그의 기도에 대해 늘 이야기했다. 방언기도를 언급할 때는 “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 방언으로 더 많이 말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다(고전14:18). 그는 방언으로 많이 늘 기도했던 것이 틀림없다. 결국 기도는 말씀의 약속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짜 기도이다. “내가 이렇게 해 주겠다. 그래도 너희가 내게 구해야 한다.”는 말씀은 기도를 잘 설명해준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겔36:37). 그러니까 기도는 들어 주실 때까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당신도 기도응답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믿을 수 있다. 기도는 "나는 이제 죽었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삽니다."라고 늘 읊조리며 실재화 하며 사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께서 70년 후에 해방될 약속을 설명을 하시고는 기도할 것을 말씀했다.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서 말씀했다. 특히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는 회복의 약속이 가득하다. 회복의 약속을 죽 하신 후 우리가 잘 아는 예레미야 33장 3절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는데 네가 나의 설명을 들어서 알 것 같다 싶지만 네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보이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후에도 무엇을 부르짖어야 할지를 33장 전체를 통해 설명하시고 계신다. 그러니 “부르짖어라”는 말씀이 그냥 “네가 생각나는 대로 너의 생각을 부르짖어라”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부르짖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고는 부르짖을 수 없다. 부르짖는 사람은 저절로 부르짖게 된 사람이다. 약속이 분명하기에 흥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하는 것이고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르짖음에 대한 오해를 많이 한다. 단순한 나의 생각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 그 때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다. 그때는 부르짖으면 된다만 단순히 자신의 욕망적인 생각을 부르짖으면 응답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일과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부르짖을 수 있다면 당신은 놀라운 사람이다. 기름 부음이 언제든지 나타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로 성취된다. 이것이 기름 부음이 드러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 뒤에는 언제든지 기도하라는 것이 나온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 제일 마지막 성경인데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는 길목에 기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일 곱 인을 떼기 전에, 일 곱 나팔을 불기 전에, 일 곱 대접을 붓기 전에 전부 기도가 나온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일 곱 인을 떼기 전에 장로가 금향로를 들고 나온다. 금향로에 담긴 향이 있는데 그것이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하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다. 그 기도 내용이 바로 기록되어 있다. 인을 떼는 것, 나팔을 부는 것, 대접이 부어지는 것,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기도와 굉장히 밀접한 것을 볼 수 있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24장로가 하는 노래다. 성도들의 노래다. 피조물들의 노래다. 노래의 내용은 동일하다. 어린양을 노래한다. 요한계시록 8장은 ‘팔’을 생각하며 8장 9장을 나팔재앙으로 외우면 좋다. 나팔재앙에도 보면 8장3절에 금향로가 또 나온다. 성도들의 기도가 또 나온다. 대접재앙은 요한계시록 15장과 16장에 걸쳐 나온다. 여기도 기도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향을 올려 드린다. 이렇게 기도가 나온다. 기도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래도 구하여야한다고 하신 것이 기도이다. 아무리 기름 부음이 넘쳐나도 기도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다. 뜨거운 기도가 없는 사람은 기름 부음이 있지만 나타나지는 않는 사람이다. 성경이 분명히 기도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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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이정희 목사] 가정에서의 호칭어와 지칭어 : 남편이 아내에게
    I. 서언(序言)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불러야 될까? 다른 사람에게 아내를 어떻게 소개 할까? 이런 작은 고민은 결혼한 지 40수년이 지난 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혼 초부터 이런 호칭과 지칭에 익숙하지 못하다 보니 그 어색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주례를 할 때면, 신랑신부에게 서로 ‘여보’로 불러보라고 시키고 있는 것이다. II. 남편이 아내를 향한 호칭(呼稱)어와 지칭(指稱)어 1. 호칭(呼稱)어: 지난 호에서도 밝힌 대로 현대에 있어서 부부간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호칭어는 ‘여보’이다. 그 뜻은 ‘여기보세요’, ‘여보시오’의 준말로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나, 남편이 아내를 부를 때도 같이 사용할 수 있는 공용어이다. 물론 이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약 30여년 정도로서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있어서 가장 보편적인 부부간의 용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다음 또 하나의 부부 공용의 호칭어는 ‘자기’이다. ‘애인이나 젊은 부부간에 상대방을 부르는 속어’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어로 수용해도 좋다는 견해도 많다. 또 하나의 부부공용의 호칭어는‘당신’이란 말이다. 한자로는 마땅할 당(當), 몸 신(身)자로 사용되는 인칭에 따라 그 의미가 각각 다르지만, 부부간에 사용될 때는‘나와 같은 부부일심동체’를 뜻하는 말로‘자기’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은 ‘부부간에 서로 애정과 존경을 나타내는 말’로 되어 있다. 그다음 부부 공용어가 아닌 남편이 아내를 직접 부르는 호칭어에는 어떤 용어들이 있는가? 예를 들면, 자녀가 없는 신혼부부인 경우는 아내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자녀가 출생한 후에는 자녀의 이름을 붙여서‘OO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고, 어떤 남편들은 아내를 부를 때 ‘OO아’ 라고 자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호칭은 아니다. 또한 40, 50대 이상의 중년, 노년 부부들의 경우는‘여보’, ‘임자’, ‘마누라’등의 말로 부르기도 한다. 2. 지칭어(指稱): 이 경우는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제 아내’, ‘제 마누라’, ‘제 여편내’, ‘안 사람’, ‘집사람’, ‘내자’, ‘제 처’ 등 많은 지칭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를 좀 더 분석해 보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는 ‘아내’ 혹은 ‘내자’라고 하고, 아내를 겸손하게 이를 때는 ‘집사람’, ‘우리 마누라’라고 할 때도 있다. 또 높여준다고 ‘우리 부인’이라고 하는 경우도 종종 보고 듣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 높이는 지칭어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고, 앞의 경우는 너무 낮추어 부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에 올바른 지칭어가 아니다. 또 때로는‘제 와이프’라는 외래어를 쓰기도 하는데 이도 바른 표현은 아니다. 이러다 보니 어떤 말이 바른 지칭어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중에서 비교적 무난한 보편적인 지칭어는 ‘아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아내에 대한 지칭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에 대해서 예장 통합교단에서는‘아내’라는 말로 통일하자고 교단 내 교회들에게 권장을 했든 적이 있다. 그리고 아내가 직분이 있는 경우는 ‘우리 김 집사’, ‘저희 김 권사’ 등으로 일반화 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직분 이름을 붙여서 지칭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높이는 존칭이 되기 때문에 주의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목회자의 경우에 자신의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이 말은 오래전에 논한 바도 있지만 경어법으로 본다면 아주 어색한 말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오늘날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남편이 아내를 두고 하는 호칭어와 지칭어 하나도 그곳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현실이며, 이를 바로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국제화 시대에 발맞춘다는 의도 아래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외국어와 외래어, 인터넷 언어 등으로 인하여 호칭어와 지칭어 등도 너무 어려워졌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적절한 바른 용어를 사용한다면 간접적인 전도와 함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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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오태열 목사]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기에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까를 근심하며 약점이 드러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드러나게 되면 화를 낸다. 심청전에 물에 빠진 심 봉사를 지나가던 한 스님이 구해준다. 살아난 심 봉사는 공양미 3백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덥석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심 봉사의 형편을 잘 아는 스님은 그게 가능하겠느냐며 만류하자 심 봉사는 남의 집 사정을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화를 낸다. 이같이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우리 주변에 유난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있다. 이들의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화를 내며 조직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을 외톨이로 무지하게 만든다. 반면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남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가난이 드러나도 숨기려 하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모든 원인과 결과를 나로부터 찾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남에게서 찾는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내 탓으로 돌리고 원망할 일도 감사로 돌리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감사할 일도 불평 원망한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막상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타인이 자신을 존중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힘들어하고 괜한 독선과 오기가 나타나 자신을 괴롭힌다. 타인이 나를 높게 보아주기를 바란다는 것은 정작 본인은 자신을 높게 보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자존심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잣대가 남이 된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고 높게 봐주며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이렇게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는 사람은 항상 타인의 평가에 신경을 쓰지만, 자신을 고치려 하지 않고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반대로 자존감은 모든 것의 잣대가 자신이 되기에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나를 존중하고 인정하며 사랑한다.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기에 남들이 칭찬해 주어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 더 노력해야 한다며 노력하기에 더 발전하게 된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과 하려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그러나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려고 성찰한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존심과 자존감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높혀야 한다.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둘째, 타인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고 타인의 것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사회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셋째,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야 한다. 자존감이 높아지려면 주변 사람이 아닌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을 믿고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 넷째,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자존심을 내세우면 남과 다투게 된다. 싫은 소리는 흘러버리고 좋은 소리만 듣는 습관을 들이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다섯째, 도전해야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에 도전함으로써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섯째, 쉽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화가 날 때 한번 멈추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긴 호흡을 한번 하면 화가 가라앉는다. 일곱째, 메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부정적인 사고로는 지금 처한 환경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정열적으로 뛰어야 한다. 그리하면 나의 자존감을 키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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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조희완 목사] 신언의 능력 (민14:1-10)
    인간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언어(言語)입니다. 언어를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사상이 만들어지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문화가 만들어 지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역사가 발전을 합니다. 그리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든 문학 작품도 언어를 문자화 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의 힘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인해서 낙심했던 사람이 소망을 얻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삶의 목적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언어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만듭니다.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사람이 자주 쓰는 언어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쓰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기쁨이 넘치는 사람은 “기쁘다”는 표현을 자주 쓰고, 슬픔이 가득한 사람은 “슬프다”는 표현을 자주 쓰기 때문에 슬퍼지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내 삶의 형편과 처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에 몸이 갇혀버리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고, 절망적인 말보다 소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기쁨의 언어를 사용해야 기뻐지고, 행복의 언어를 상용해야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신년 벽두에 우리는 언어의 중요성을 알고 의도적으로라도 믿음의 언어를 많이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이 자져다 주는 유익이 어떤 것일까요? 첫째, 신언은 환경을 극복하게 합니다.(7,8) 둘째, 신언은 소망을 성치하게 합니다.(24) 셋째, 신언은 고난을 단축하게 합니다.(34) 코로나 펜데믹으로 세상이 매우 혼란하고 어지러운 이때에 믿음의 말을 많이 하므로 복된 한 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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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신재철 목사] 배신감
    분리수거장 관리를 시작하면서 모으기보다는 버리기 시작했다. 폐지는 가능한 매일매일 수거할 만한 동네 어르신에게 맡겨 정리했다. 고철과 공병은 수집하는 어르신에게 드리거나 구청에서 수거하는 일자에 맞추어 내어 두었다. 몇만 원 수입을 내가 가지는 것보다 아파트의 청결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파트는 정말 깨끗해졌다. 전(前) 관리인, 한 사람의 작은 욕심이 그동안 아파트를 그리 불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른바 돈 되는 재활용품을 수거하시는 어른들과 관계이다. 나도 없이 살아보았기에 하루하루 폐지를 주워 용돈 벌이, 생계유지하는 분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이 된다. 그래서 더 잘해드렸다. 음료라도 하나 챙기고, 명절에 들어오는 선물이 있으면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다양하다. 갑자기 소식이 끊어져서 알아보면 병환으로 일을 못 하시기도 하고, 불미스러운 어떤 일로 함께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오래 함께하면 좋겠는데 쉽지 않았다. 지금은 폐기물 수거하는 어른이 없다. 수소문해 보니 병환으로 입원하셨다는데 아무래도 현장 복귀는 어렵지 싶다. 한동안 직접 폐기물을 정리하며 치우다가 인근 고물상의 소개로 새로운 어르신과 만나게 되었다. 비교적 건강해 보이고 말이 통해서 오래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고 안내도 할 겸 분리수거장에서 만났다. “폐지, 공병, 고철 돈이 될만한 것은 편히 가지고 가시면 되고 쓰레기는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그대로 두고 가시면 제가 치울게요.” 그리고 헌 옷 수거함은 다른 분 소유물이니 손대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도 전한다. 새로운 거래처를 터서 만족스러우셨을까? 아무 대가 없이 가지고 가시라 해서 기분이 좋으셨을까? 반복되는 감사 인사에 내가 다 민망했다. “소장, 여기 헌 옷이랑 내가 다 가지고 가면 안 됩니꺼?” 며칠 후 만난 어르신은 처음과 다른 당당함으로 분명 안 된다고 말씀드린 헌 옷을 요구하신다. 감정이 조금 상했지만 타이르듯 다시 주의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린다. 헌 옷 수거함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파트 입주민이 설치한 것이라 나도 무척 예민하다. 그렇게 수거하시는 어르신을 돌려보냈지만, 마음이 불안하다. “소장님, CCTV 좀 돌려서 한번 찾아 보이소.” 헌 옷 수거함을 설치한 입주민의 전화가 왔다. 누군가 옷을 꺼내 갔다는 것이다. 수거함에서 옷 꺼내 가는 장면을 찾아내려면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지 알고 요청하는 것일까?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헌옷 값을 내가 주고 끝내고 싶었다. 찾아내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답을 드리고는 관리실 CCTV를 돌려보기 시작한다. 무작정 찾으려면 너무 힘든 일이지만 약간의 힌트가 있다면 수고가 줄어든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 부분부터 검색한다. 하루 전 영상에서 고물 수집하는 어르신 모습이 나온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옷 수거함에 손을 넣고 옷을 꺼내어 챙기고 있다. 분명 내가 그렇게 주의 주었는데, 결국에는 이런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르신들과 이런 관계, 처음이 아니다.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일인가. 「배신감」 어려운 분, 힘드신 분, 조금이라도 돕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던 어른들이다. 그런데 매번 결과가 이렇다. 나도 가난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착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나도 나이 먹어 가지만 숫자의 쌓임이 어른스러움을 보장하지 못한다. 실망감에서 정신 차린 후 가능한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다. 정해진 물품만 가지고 가셔야 함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분명 불쾌하다고 느끼겠지? 오히려 속으로 화를 내고 있을지도. 어쩌면 수거하실 다른 어르신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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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8
  • [박동철 장로] 동남아 한중일 경제전쟁, 우린 복음으로 이긴다
    동남아시아 관광중심도시 태국여행의 기회가 있었다. 사단법인 경남기독문화원 이사진들의 비전트립 일정으로 5일 동안 현지를 두루 볼 수 있었다. 이사장으로 섬기는 구자천 장로(신성델타그룹회장)의 사업장을 견학하고 선교지 파타야 선교 교회와 파타야 농아 교회를 방문하는 여정이었다. 구이사장의 배려로 회사가 있는 라용공단 내 신성그룹 태국법인을 방문하고 동남아의 경제와 시장동향을 공부할 수 있었다. 신성태국법인은 주로 LG그룹 전자제품을 생산한다. 특히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단종 된 80년대 절수형 세탁기를 대량생산,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수출하고 있다. 태국현지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태국법인이다. 일행들은 우리기업이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 진출해 기업 활동을 하는 그 현장만 보고도 감동을 받았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세계적 메이커가 된 LG·삼성이 동남아에서는 일찍이 일본을 제치고 선두에서 현장시장을 장악했다. 문제는 자동차 시장이다. 우리의 현대·기아차가 일본을 절대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입주해있는 라용 공단 파타야 시내를 따라 들어가는 곳에 반갑게도 현대차 사무실 하나볼 수 있었다. 일본자동차는 일찍이 현지 생산 시설을 통해 무거운 관세를 피하고 가격 경쟁 우위에 있었다. 구석구석에 즐비한 일본 국적의 편의점 또한 눈에 거슬렸다. 앞으로 더욱 긴장이 되는 일은 중국의 시장 공격이다. 여행 가이드는 중국의 값싼 제품들이 품질이 조금 향상되면 자동차 전자 등 모든 시장에서 중국의 선두가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제국이 되고픈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해외정책 또한 섬뜩히 느낄 수 있는 현장이었다. 그야말로 태국을 비롯 동남아시장에는 한중일의 경제 전쟁이 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면서도 놓칠 수 없는 것은 어디든 생업현장이요, 치열한 경쟁의 시장이다. 특별히 태국을 비롯 엇비슷한 동남아 경제시장은 이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현지인들은 조만간 중국의 공격이 선두에 설 것으로 전망했다. 관광도시 태국에서 동남아 경제현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또 다른 큰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복음의 사역이다. 참 감사한 일은 동남아에서 선교 사역은 우리나라가 단연 앞서고 있다. 세계에 2만2천여 명의 우리의 선교사가 파송, 2위권을 달리고 있다. 동남아에선 우리 선교사들이 아직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모든 곳에서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1천 명 가까이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진출한 태국은 완전 불교 국가이다. 95%가 불교 인구인 태국은 종교의 영향에서 오는 게으름 문화가 팽배해 있다. 살생을 금하는 문화로 유기견들과 뱀이 도시거리에 활보하는 특성이 있다. 귀한 복음의 사명으로 사역하는 심태선 선교사의 파타야 선교 교회와 파타야 농아 교회를 방문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또 다른 회한이 차올랐다. 우리 한국선교사가 태국에서 유일하게 장애인 선교를 함께하는 그 열정에 일행들의 딱딱했던 심령들이 녹아내렸다. 이 선교지 또한 신성그룹 태국법인에서 세우고 지금껏 섬기는 설명에 모두가 감명이었다. 그렇다. 동남아의 경제시장이 아무리 한국 중국 일본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더라도 선교복음의 열기만 있으면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동남아 모든 나라들은 국민소득 겨우 5천 불 전후이며 인구는 여전히 크게 늘고 있는 나라들이다. 모든 나라 한류문화가 급속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코로나 전·후 우리의 선교사들이 크게 줄고 있고 노령화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잡히고 있다. 세계선교협의회(KWMA) 통계에 따르면 동남지역에 파송된 우리 선교사는 1만3천 명으로 전체의 65%에 달하지만 60세 이상 노령이 절반에 가깝다는 것이다. 복음이 확장될 때 현장이 부흥되고 발전됨은 세계 역사에서 알 수 있다. 동남아의 경제현장 최고의 경쟁력은 바로 복음의 힘이라는 사실 불문가지다. 우리가 급속도로 변화·발전하는 동남아에 한국기독교가 새로운 눈으로 돌아봐야할 때임이 분명함을 확인한 여행 여정이었다.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고 나라를 살린다는 진리에 다시 눈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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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10
  • [오성한 목사]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기도는 부르짖어야 한다. “부르짖는다.”는 의미는 무조건 내가 원하는 것을 부르짖는다는 말이 아니다. 부르짖는 것은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주님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제가 그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부르짖는다.”라는 말 속에는 말씀대로 받아들이는 회개가 포함된다.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하지 못했음을 철저히 돌아보고 고치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의 회개가 없는 사람은 돌이킬 수 없다. 성경을 자세히 보고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을 누리지 못한 것을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무조건 "나는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 따라 생각하지 못했고, 말씀 따라 쉼을 얻지 못한 부분들을 통회하고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다 주셨다. 구약에 역사서나 선지서가 다 그렇게 말씀한다. 아니 성경 전체가 그러하다. 선지서를 보라. 철저한 멸망과 함께 하나님의 완벽한 회복의 약속들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약속하고 이미 주신 것을 선포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하신다. 내가 다 줄 것이다. 그래도 너희가 그것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다(겔36:37). 요한계시록에도 요한 사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서 놀라운 하늘의 광경을 본다. 사실 하늘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분리할 수 없는 같은 공간에 속한 하나다. 설명을 위해 편의상 분리하여 설명한다고 보아야 한다. 요한은 보좌에 올라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를 보았다. 일 곱 인이 찍힌 것을 보고는 그 인을 뗄 사람이 없어 크게 운다. 아무도 의로운 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통곡을 하고 운다. 이 책은 열릴 책이다. 예수를 통해 열릴 책이다. 그런데 요한은 통곡한다. 하나님께서 열려고 계획하신 것들이 실행되기 전에 기도를 통해 누리게 하신다. 이미 계획된 것들이다.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계획에 없던 것들을 여시는 것이 기도가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실 것을 내가 깨닫고 선포하며 미리 감사와 평안 속에 거하라는 것이 기도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이루어진 줄 믿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것을 여시고 이루신다. 인을 떼실 때 요한만 크게 울며 기도한 것이 아니다. 요한 계시록 5장에 보면 요한 울고 나니 성도들의 기도가 금 대접에 향으로 담겨져 노래로 나타난다. 이 일 후에 인이 떼 진다. 기도는 이런 것이다. 이미 주신다는 약속을 알고 내가 그렇게 선포하며 미리 누리는 것이다. 기도는 놀랍다. 하나님의 계획이 열리는 것을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다니엘서 9장과 10장에서 다니엘이 예레미야가 쓴 책을 읽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발견한다. 70년 후에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본다. 이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한다. 이 모습을 통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다. 다니엘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레미야 25장과 29장에 나오는 70년 후 해방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본 후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본 사람이 깨달은 것을 부르짖는 것이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계획하신 것들이 열리는 시간이다. 다니엘은 70년이 다 되어 감을 알고 그냥 저절로 기다린 것이 아니다. 엄청난 통곡과 회개로 감격으로 운다.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 9장에 회개의 기도를 한다. 다니엘의 삶을 보면 잘 살았다. 그런데 그는 민족의 죄를 안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미 죄 값을 다 치른 70년이 가까워 왔는데도 기도한다. 이 말은 기도는 하나님이 뜻을 발견한 자가 말씀을 붙잡고 감격하고 읊조리는 것임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부르짖음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부르짖어야 한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져서 부르짖는 일이 있다면 엄청난 기름 부음이 나타나게 된다. 회개하고 감격으로 부르짖는 놀라움이 열려야 한다. 이런 깨달은 없이 지식으로만 복음이 정리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으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 깨달음이 세례 요한처럼, 다니엘처럼 터져 나오게 해야 한다. 회개가 저절로 터져 나올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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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오태열 목사]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하라
    큰일을 하는 사람과 사업에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한다. 고 정주영 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성인의 약점은 너무 깊이 생각하고 이것저것을 따지다가 결단력 부족으로 기회를 놓쳐 버리고 후회한다. 그래서 사업가는 되지 못한다. 사탄의 시험 특징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열등감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주고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여 시작하지 못하게 한다. 쉽게 생각하면 시작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시작이 어렵다.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일화가 있다. 신전 기둥에 주술을 걸어놓은 “고르디온 매듭”이 있는데 이 매듭을 풀어내는 자가 세계를 제패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세계를 제패하고자 하는 영웅호걸들이 이 매듭을 풀고자 애를 쓰지만 아무도 풀지 못하였을 때, 알렉산더는 잠시 매듭을 응시한 후 단칼에 끊어 버린다. 이 일 후 알렉산더가 세계를 제패하였다는 전설적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알렉산더는 쉽게 생각하였기에 쉽게 매듭을 풀어낼 수가 있었다. 쉽게 시작하려면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쉽게 시작 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판단에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경험주의자들은 보고 듣는 것만 믿는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이 모두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히브리서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듣고 사는 사람들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쉽게 시작하려면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할 수 없는 이유는 추진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갖게 되면 자신감과 함께 추진력이 생겨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다윗은 시편 18:1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윗은 왕이라는 절대 권력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의 힘을 더 사모하고 의지하였기에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거인 골리앗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당당히 맞서는 태도에서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힘에는 체력과 지력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힘을 갖고자 몸짱을 만들고 많은 스펙을 쌓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갖지도 못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는데 이를 영력이라 한다. 영력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성령의 권능이다. 이 힘을 소유할 때, 니체가 그토록 염원한 초인이 될 수 있다. 히브리서 11:38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힘은 기도와 말씀, 경건한 삶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두려움과 시기 질투, 범죄는 내게 임한 하나님의 힘을 빼앗아 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영적 에너지를 점화시켜나가야 한다. 하나님께로 나오는 힘은 흥분과 열정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나를 단순하게 만들어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공급받아 능력의 사람이 되어, 매사를 쉽게 생각하고 쉽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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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 [최호숙 목사] 권태(倦怠)를 극복하는 신앙
    인생의 삶 과정에는 육적인 권태(倦怠)뿐만 아니라 영적 권태기가 있다. 권태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이 없어지고 시들해져서 생기는 싫증이나 게으름” 뜻하는 말이다. <군주론>을 쓴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비애(悲哀)도 아니다. 그것은 권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렇게 말했다. “권태 보다는 죽음을...” 인생에 권태를 느끼며 하품만 하고 따분하다고 불평만 하는 사람처럼 세상에 비참한 사람은 없다. 코로나 이후 교회 내 세 부류의 사람이 형성되게 되었다. 첫째 부류는 코로나로 인해서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성도들이 있고, 둘째 부류는 신앙이 떨어진 성도들이고, 셋째 부류는 평상유지하며 사는 성도들이 있다. 코로나로 인하여 오히려 신앙이 성장한 사람이라고 하면 유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욥에 대하여 사탄에서 자신 있게 변호하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留意)하여 보았느냐?” 시인 나태주 씨가 <풀꽃>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풀꽃의 가치에 대해서 변호하며 이렇게 시(詩)를 지었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욥의 신앙의 가치를 칭찬할 때에 욥을 그냥 흘려보아서는 안 되고 자세히 집중하여 보면 그가 가진 신앙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보석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우리의 신앙은 환경에 지배를 받아 무너지는 신앙, 무기력한 신앙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신앙을 세우기 위한 활기찬 전진이 있어야 한다. 노력의 나무에는 반드시 충실의 향기가 있고, 향상의 꽃이 피고, 행복의 열매가 열린다. 우리는 땀의 배려로 노력의 나무를 가꾼다. 권태의 나무에는 반드시 허무의 악취가 나고, 불만의 벌레가 먹고, 불행의 낙엽이 떨어지고, 실패의 병이 들게 된다. 지혜로운 시작과 보람된 출발을 계획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노력의 땀을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모세의 새로운 도약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안전지대를 벗어나 믿음의 지대에서 살았다: He lived in the faith zone out of the safe zone.” 의미 있는 말이다. 우리가 제 2 의 인생을 살고자 도약하려면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하고 신앙의 나태함, 권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벤처 신앙이다.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을 하지 않고는 진정 위대한 일을 이루어낼 수가 없다. 초대교회 시절 사탄의 전술 전략은 환란과 핍박이었으나 실패하였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사탄은 환난 핍박 보다는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9~11). 말씀으로 재 무장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신앙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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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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