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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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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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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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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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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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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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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생각의 차원 (잠23:7)
    옛날에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하던 중에 어느 한 곳에서 점쟁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이 타고 가는 나귀가 만일 세 번 방귀를 뀌면 당신은 죽을 것이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행자는 “웬 별 미친놈의 소리를 한다.”하고 그 점쟁이의 말을 일축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나귀가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계속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한 여관에서 묵고 가려고 여관 앞에 도착을 했는데 나귀가 또 방귀를 뀌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점쟁이가 한 말이 생각나서 영 기분이 언짢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점쟁이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방귀를 뀌지 못하도록 돌멩이를 수건으로 돌돌 말아가지고 나귀의 똥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았습니다. 여행자는 그날 밤에 영 불안한 생각이 들면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무사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나귀의 꼬리를 들고 똥구멍을 들여다보는데 그때 마침 나귀가 참았던 방귀를 새게 뀌는 바람에 틀어막아 놓았던 돌멩이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머리를 맞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그만큼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영양을 받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러나 생각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좋은 생각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잠23:7) 둘째는, 항상 신앙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렘6:19) 셋째는, 항상 소망적인 생각을 품어야 합니다.(전9:4) 합당하고 좋은 생각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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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오성한 목사] 바른 믿음(4)
    육의 사람은 육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편하다. 육의 생각을 하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재미있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게 된다. 거품을 물고 세상 이야기를 하며 산다. 세상의 삶이 습관이 되어 있어 세상이야기가 더 편한 것이다. 우리는 육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사람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영의 삶이 습관이 되어져 영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고 더 편해진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는데 그 곳에서 가진 마음이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생각이 그의 습관이었다. 영의 습관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을 더 쉬게 만들었다. “우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어.”하고 뜻을 정하게 되는데 그것이 다니엘에게 더 쉬운 일이었다. 뜻을 정한 결과는 어떠했던가? 그가 꿈꾸며 생각하고 상상했던 대로 믿음의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1:15). 더 나아가 왕 앞에서 그들은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1:20)라고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이 잘 살았기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복을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복을 받은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바른 믿음인 임마누엘로 출발했던 것이다. 뜻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은 육의 생각이 아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뜻을 정할 수 있다. 바른 믿음으로 출발해야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울 수 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했다. 반복해서 말씀을 묵상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면 담대해 진다. 계속 기도하면 담대해 진다. 예레미야는 스스로를 “나는 아이라”(렘1:6)라고 분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한 결과 담대해 졌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예레미야를 붙잡아 죽이겠다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담대하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담대히 말한다. 얼마나 담대한지 보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렘26:14-15). 그런데 예레미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우리야 선지자는 무서워 에굽으로 도망을 갔다. 여호야김 왕은 몇 명을 보내 우리야를 잡아오게 한다. 그리고 칼로 죽였다. 그리고 그를 평민의 묘지에 장사했다.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연행하여 여호야김 왕에게로 그를 데려오매 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게 하니라”(렘26:23). 담대했던 예레미야는 도움의 손길을 만나 살았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예레미야 26장 한 장 안에 예레미야와 우리야 선지자를 대조해 놓고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도망하면 살 줄 알았다. 우리는 영적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꾸 반복해서 임마누엘을 말해야 한다. 이미 주신 생수의 강을 말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습관적으로 주장하게 되면 점점 강해짐을 볼 것이다.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훈련을 자꾸 하면 강해진다. 앞에 이야기한 조 집사님을 위해 기도할 때 기도하고 구한 것을 그대로 그리는 담대함이 생겼다. 반복해서 주장하고 기도하니 그런 마음이 생겼다. 본인도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할 때 담대한 확신이 왔다고 말한다. 믿음의 출발은 이미 주신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력으로 더 받아 내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의 배에서 샘이 터졌다.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 성령의 능력이 넘쳐난다고 믿고 출발해야한다. 이전의 나는 더 노력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오래 동안 생각하며 예수를 믿었다. 지금은 이미 예수 능력이 내 능력임을 믿고 출발한다.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이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임마누엘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디를 가도 괜찮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다. 하는 말이 무엇인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모독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고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출발했다. 골리앗의 이름이 골리앗 된 이유는 돌에 맞아 쓰러지면서 “아이구! 골이앗!”이라고 해서 이름이 ‘골리앗’되었다고 어머님께서 어릴 때 재미있게 이야기 해 주신 일이 잊혀 지지 않는다. 당신은 매사에 어떤 출발을 하고 있는가? 출발이 믿음이어야 한다. 출발을 또다시 점검하라. 이루어 주신 믿음에서 출발하며 살아라. 은혜에 설득되어 믿음으로 받아 바른 믿음으로 출발하자.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나에게 성령의 역사가 넘쳐난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를 통해 넘쳐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자꾸 바른 믿음으로 고백하고 읊조려라. “주님 오늘 잘 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동행하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 힘을 얻습니다.”라고 늘 고배하라.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루의 삶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산다. 하나님과 믿음의 대화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 죄 안 지어야지. 이겨야지.”하고 긴장하며 사는 것이 아니다. 만약 실수하게 된다면 빨리 회개하고 또 바른 믿음으로 임마누엘의 길을 가야한다. 계속된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진다. 말씀으로 돌아오고 기도로 돌아오는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라고 했음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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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2: 12달과 달별 명칭의 유래
    I. 서언(序言)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남겨둔 체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 보는 이즈음에 달력의 역사적인 유래와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를 지난 호에서 논하여 보았다. 오늘의 본 호에서는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12달의 유래 1. 한 해의 첫 달에 대한 고대의 견해 :인류가 고대로부터 첫 달로 여겼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주로 따뜻한 봄이 왔을 때 쯤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본 것 같다. 이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경우들이 있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봄을 한 해의 기점으로 보았다. 봄이 시작하는 첫 달부터 가을에 해당하는 열 번째 달까지만 이름이 있었고, 겨울의 두 달에는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나머지 두 달에도 이름을 붙이면서 그 두 달을 일 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달로 정했다. 1월을 뜻하는 January와 2월을 뜻하는 February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이 나중에 일 년 중 가장 앞자리로 되면서 두 달씩 뒤로 됨으로 인해서 추운 겨울에 새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또한 12월은 영어로 December인데 그 어원인 Decem은 라틴어로 10이란 숫자이고 영어 ~ber는 ~번째 달이란 의미이다. 이는 원래 10월이었는데 1,2월이 앞서 들어오면서 두 달씩 뒤로 밀려 오늘날의 12월이 된 것이다. 11월을 뜻하는 November는 nine(9)이란 뜻이고, 10월을 뜻하는 October 역시 여덟 번째 달이란 뜻이며, 9월의 September도 본래 뜻은 일곱 번째란 뜻이 내포되어있다. 또한 당시 로마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달력의 이름으로 이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양력을 로마에 도입한 카이사르는 자기가 태어난 7월을 자신의 이름인 율리우스의 달의 명칭으로 했는데 바로 영어의 July이다. 또한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황제도 8월을 자신의 달로 부르게 해서 오늘날 영어로 8월이 Augustus가 되었다. III. 12달 명칭의 유래 로마 시대에는 1년을 지구가 태양을 도는 365일로 정하고 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1년을 열 달로 했고, 폼필리우스 왕은 열 달 앞에다 두 달을 추가하여 열두 달로 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12달의 월별 명칭을 영어 표기로 보면 다음과 같다. 1월 January : 누마 폼필리우스가 추가한 달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야누스가 얼굴이 두 개인 것은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을 질서로 이끌어 사람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뜻으로서 이 달을 첫 달로 지정했다고 한다. 2월 February : 누마가 추가한 두 번째 달은 '정화, 청결'을 뜻하는 라틴어 '페브루아(Februa)'에서 유래되었다. 3월 March: 로물루스가 만든 첫 달로 전쟁의 신인 Mars에게 바치는 달이란 라는 뜻이다.. 4월 April: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에게 바치는 달이었다. '시작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아페레(Aperire)'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5월 May: 헤르메스의 어머니이자 유모라는 뜻을 지닌 마이아(Maia)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6월 June: 결혼의 신이자 주피터(제우스)의 아내인 '주노(Juno)'에게 바친다는 뜻이다. 7월 July: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줄리우스 시저)가 자신 의 이름을 붙여 만든 달이다. 8월 August: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율리우스력을 완성한 옥타비아누스가 위대하다는 뜻으로 붙인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9월 September, 10월 October, 11월 November, 12월 December: 라틴어에서 각각 7, 8, 9, 10을 뜻하는 셉템(septem), 옥토(octo), 노웸·노벰(novem), 그리고 10을 뜻하는 데켐(decem)에서 유래했으나 누마가 추가한 1,2월에 밀려 9, 10, 11, 12월이 되었다. IV. 결 어 이상에서 본대로 12달의 월별 이름은 주로 로마제국에서 제정된 태양력을 기준으로 된 것으로서 주로 신들과 왕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를 반 기독교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친 기독교적인 명칭으로도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는 다음에 논한 요일의 명칭도 마찬가지다. 유래를 알고는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논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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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신재철 목사] 별 세 개와 막대기 세 개의 새벽기도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이다.” 입대하기 전 위로로 많이 들었던 말. 맞는 말이다. 생각보다 빨리 적응이 되었다.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청소하고, 잠을 잔다. 학업과 사역을 병행할 때 비하면 오히려 안정적이고 몸도 건강해지고 있다. 여유가 생긴 걸까? 무섭게만 보였던 나이 어린 소대 선임들도 평범한 20대 청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의지가 되었던 선임 군종병은 한 달을 후 전역했다. 연대에 군종병 보직 인가는 1인이었기에 인수인계를 마치지 못하고 선임은 떠났다. 아니, 전역했다. 업무가 익숙하지 못해 어려움은 있었지만 선임이 없다는 것은 ‘개꿀’이다. 입대 전 두려움은 사라지고 생각보다 군생활은 평안했다. “신대원 졸업했으니깐 내가 못 나오면 직접 새벽기도 인도하면 돼.” 군종 목사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민간이나 군이나 교회에서 새벽기도 펑크는 사역자에게 늘 긴장되는 영역이다. 나보다 두 살 위 목사님도 그런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목사님이 힘들 때, 일어나지 못했을 때 새벽기도 인도하는 것이 큰 부담은 아니다. 성경책에 늘 짧은 설교 한편 넣어두면 그만이니깐. 하지만 그 명령은 단순한 예방 차원의 대비책이 아니었다. 그 후 6개월간 목사님은 새벽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인도하게 되었다. 주석은 커녕 신앙 서적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6개월의 새벽 설교는 만만치 않았다. 주간에 해야 할 업무에 다음 날 새벽 설교가 더해졌다. 군생활에 적응하던 내 얼굴은 피곤으로 가득했고, 반면에 군종 목사님의 얼굴은 평안으로 충만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또한 적응되었다. 군 가족들과 함께 하는 새벽기도는 내게 좋은 훈련이 되었고 민간목회를 준비하기 전 스트레칭과 같은 준비운동이 되었다. 중대 행정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매일 군종병 4시 30분 기상’ 메시지는 충분히 고난 받는 군종병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누구도 연대 군종병은 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아침 점호 열외를 문제 삼지 않았다. 군행정도, 군교회 사역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문제가 생겼다. 군단급 훈련이 우리 연대에서 진행되었다. 부대의 모든 부서가 긴장하며 훈련을 준비했다. “군종은 어떤 준비를 하면 됩니까?” 군종 목사님에게 물어봐야 소득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인사장교님에게 질문했더니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하길. “모르겠다. 그냥 눈에 안 띄게 잘 숨어 있어라.” 일단 다른 병사들과 같이 위장크림을 바르고 소총을 휴대하며 전투준비 상태로 교회에서 근무하게 된다. 낮 밤이 없는 훈련이었다. 식사는 전투식량으로 대체 되기도 하고 위장크림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본부에는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장군이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적당히 숨어서 큰 훈련도 넘어가는가 싶었다. “군종병! 얼른 깨워라!” 상황실에서 군종병을 급히 찾는다며 근무자가 급히 나를 깨운다. 훈련 중이라 불편한 잠을 자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상황실에 불려간다. “군종병아 큰일 났다. 군단장님이 새벽기도 가신단다. 군종 목사님은 연락이 안 되고 니가 어떻게 좀 해봐야겠다.” 그 똑똑한 장교들이 군단장님의 종교행사 참석 의지에 아무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군종 목사님이 연락이 닿지 않자 급한 대로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훈련 기간이라 그나마 새벽기도 없어서 좋았는데. 갑자기 믿음 좋은 장로님이라는 군단장님이 미웠다. 교회는 내 구역이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든 장군이 입장을 하든 긴장하지 않는다. 늘 하던 예배를 진행하면 그만이다. 다만 내 단잠을 깨운 이 상황이 불편할 뿐이다. 익숙하게 예배당 불을 켜고 찬양을 튼다. 장의자 앞자리에 앉아 기도하는데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보다 발소리가 많다. 시간이 되어 강대상에 올라 전면을 바라본다. 별 세 개의 장군님. 그리고 옆에는 우리 연대장님과 참모 장교들이 앉아 있다. 불신자, 타 종교인이 교인이 되는 기적의 현장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상병 계급장이 붙여진 방탄모를 벗어 강단에 올려둔다. 어깨 메어 걸쳐진 소총은 강단 옆에 세워 둔다. 그리고 하던 대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나의 마지막 기도로 새벽예배는 끝이 났다. 군종장교의 부재에 문제가 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조용히 일이 마무리되었는지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내 손에 휴가증 하나가 주어졌을 뿐. 군단장님이 설교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연대장님에게 물었다는 후문이 있다. 나는 주의가 필요한 인물이었을까? 문제 있는 관심병사였을까? 연대장님은 나의 학력, 이력, 애가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보고 드렸고 군단장님은 휴가 한번 보내주라며 큰 웃음을 지었다 한다. 휴가 명령. 군인에게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저 높은 곳에서 이 모든 상황을 준비하신 그분께 감사하며 외쳤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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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박봉석 목사] 애착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에게는 늑대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퍼런 칼날에 짐승의 붉은 피를 묻혀 꽁꽁 얼게 합니다. 그리고 늑대가 서식하는 곳으로 가서 칼날은 밖으로 나오게 한 채 땅바닥에 파묻습니다. 그러면 이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칼날을 정신없이 핥기 시작합니다. 북극은 기온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혓바닥이 둔해져서 자기가 핥고 있는 것이 예리한 칼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칼을 핥다가 시간이 지나면 늑대의 혀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그 피가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인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그것을 핥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늑대는 피를 너무 흘려서 탈진 상태에 빠져서 죽고 맙니다. 칼날에 묻은 약간의 피를 욕심내어서 그것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다가 스스로의 목숨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수도를 하며 세상에 대한 애착을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를 사로잡고서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는 수도원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원장님, 제가 속세를 떠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이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수도원 원장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를 데리고 수도원 뒤뜰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습니다. 원장은 그 가운데 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자기의 양팔로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원장은 자기의 몸을 몇 번 뒤척뒤척하더니 그 젊은이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나무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서는 놓아주지를 않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나무에서 나를 좀 떼어주게나.” 젊은이는 원장의 그 말에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더 다급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나무가 나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계속된 원장의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서 수도원 원장을 그 나무에서 떼어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원장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원장은 더 안간힘을 쓰면서 나무를 놓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그 손을 놓으세요! 지금 나무가 원장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장님이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수도원 원장은 그제야 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깨닫겠는가? 세상이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자네가 세상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 마음속의 세상을 향한 애착이 자네를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독자 여러분, 세상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나를 붙들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서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욕심으로 인해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동행하고 있는 세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그것을 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성경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끈질기게 이어온 세상에 대한 애착을 단호히 끊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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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신재철 목사] 고맙다 조교 동생
    28세, 유부남, 아내는 임신 6개월 문제 많은 나는 그렇게 군인이 되었다. 입소대대에서 보내는 첫날. 생각이 많아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왜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이해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 밤 혼자 누워있을 아내 생각에 더 마음이 괴롭다. 내 괴로움과 무관하게 소지품은 택배로 보내지고, 빈 가방에는 보급품이라 불리는 다양한 녀석들이 채워졌다. 이거 없어지면 죽는다는 소리만 반복된다. 혹시나 기대했던 간단한 신체검사는 나의 건강을 확인시켜줬고 동기들과 같은 복장으로 줄을 지어 이동했다. 커다란 운동장에 멈췄을 때 들려온 한 사람의 고함에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여기는 논산훈련소다. 학교 운동장 같았지만 우리는 체육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체육 선생님 같았지만 보다 더 고압적이다. 4월의 논산은 딸기향 가득했지만 그다지 달콤하진 않을 듯하다. 고역이다. 밥도, 부식도 남기면 안 된다. 동기들은 컵라면 하나가 부족하다며 난리인데 나는 국물 다 먹기 힘들어서 난리다. 모든 훈련이 행군 같다. 사격을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수류탄 한 발을 던지기 위해서, 공포스러운 가스를 마시러 가기 위해서, 우린 거추장스러운 단독군장 차림으로 많이도 걸어야 했다. 물론, 진짜 행군 훈련을 하고서는 지금까지 교육장 이동은 산책이란 것을 깨달았지만. “너무 아파요.” 신체적 한계와 스트레스로 병이 왔다. 심한 몸살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조교에게 상태를 보고한다. 간단히 확인 후 의무대로 이동. 하지만 훈련병은 아파도 혼자 이동이 불가하다. 인솔 조교가 붙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본 것과 다르게 군의관은 친절했고 내게 수액을 놓아주었다. 일단 누워서 천천히 맞고 쉬라는 명령(?)을 듣고 잠시 눈을 붙인다. “96번 훈련병, 일어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교가 옆에서 나를 깨운다. 링거는 다 들어갔고 시간은 벌써 밤 12시가 되어간다. 혼자 복귀할 수 없는 훈련병이었기에 또 조교가 붙었다. 하... 불편하다. 전역이 얼마 안 남았다고 들은 병장 조교다. 그리고 늘 무표정에 성대를 꽉 누르는 듯한 소리로 호통을 치는 조교. 분명 카리스마는 있다. 그리고 잘생겼다. 밖에서 만났으면 호감이 갔을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불편하다. 그리고 아직은 나이 어린 청년이 욕 비슷하게 들리는 반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그렇게 나는 생활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몸이 많이 가벼워져서 걸음은 가볍다. 그런데 복귀 코스가 이상하다. 아무리 내게 어색한 길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길은 아니다. 점점 어두운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심지어 연병장을 가로질러 뭐가 있을지도 모를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아, 갈구는 거 아냐?” 말년 병장 귀찮게 한다고 으슥한 곳에서 욕먹을까 긴장이 된다. 나이 먹고 군대 와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눈치 보고 있는 내가 너무 서글프다. “형수님한테 전화해.” 연병장을 지나 도착한 구석진 곳. 조명도 없는 그곳에는 공중전화가 있었다. 갑자기 자신의 조교 모자를 벗어 내게 푹 눌러 씌운다. 담배 한 대 피고 올테니 여유 있게 통화하라는 말과 함께 더 어두운 곳으로 조교가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망설이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에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한다. 늦은 시간 훈련소에 있는 남편의 전화에 아내는 많이 놀라는 눈치다. 지금 아프다는 이야기, 너무 고단하다는 이야기를 다 전하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난다. “왜 울어... 힘들어?” 아내의 눈물 삼킨 말에 나는 더 눈물이 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눈치가 보였을까? 그리 긴 통화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공중전화 부스 밖에 서 있었다. 생각보다 한참 병장 조교는 돌아왔다. 왜 벌써 끊었냐는 말에 딱히 할말은 없다. “형, 나 담달에 전역이야. 시간은 가더라. 아프지 말고 무사히 전역해.” 다시 가로지르는 연병장은 따스했다. ‘유부남, 고령자(?), 아내가 임신 중’ 나의 이력을 알고는 의무대에서 복귀하는 인솔을 자처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잘생기고 무뚝뚝했던 성현준 분대장,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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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조희완 목사] 사모할 대상 (시19:7-14)
    어쩌다가 신세가 처량하게 된 사람을 가리켜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말을 합니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담겨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1개 대대규모의 인민군이 필사적으로 우리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낙동강 도하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엔군 전투기에서 네이팜탄을 퍼부어서 적진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아군 중에 한 대대장이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바라보면서 너무 신이 나서 “야! 낙동강에 오리 알이 떨어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물론 낙동강을 건너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던 인민군들도 다 몰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낙동강을 건너려다가 죽음을 당한 인민군들을 조롱하는 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어서는 안 될 대상을 믿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섬기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일생 다가도록 사랑하고 섬겨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헛된 우상과는 달리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특별히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시19:9-10)(벧전2:2) 둘째는, 성전과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시84:1-4) 셋째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히11:16) 사모할 것을 더욱 사모하므로 멋진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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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1
    I. 서언(序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고 했던가?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겨야 되는 날이 가까웠고,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선 이번 주간에 신년 달력을 배포했다. 이런 즈음에 문득 달력이란 용어는 어떤 역사적인 유래와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고,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제정되었는지, 또한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졌다. 필자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자료를 수집해 오기도 했다. 이에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로 나누어 이에 대한 유래와 용어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이를 시도하는 이유는 이런 달과 연호와 요일의 명칭이 기독교식이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기에 고칠 수는 없으나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달력과 기독교적 연호 사용의 유래 1. 달력의 유래 :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흥미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라는 뜻의 ‘칼렌다리움(calendarium)’과 고대 로마에서 매월 초하루의 날짜를 ‘calend’라고 한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는 월 초를 매우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年) 월(月) 일(日)은 각각 독립된 주기이지만, 이런 각 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이를 주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서(曆書)는 달의 규칙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태음력(太陰曆)이었기 때문에 이를 달력(月曆)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역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토대로 한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쥴리아스 시저(Caius Julius Caesar)가 BC 45년에 그곳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양력역법을 보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율리우스력(Julius Calendar)이라 한다. 이는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춘 것이었는데, 16세기까지 천년 이상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오차가 생겨졌고, 이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새롭게 개정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를 그레고리우스력(Gregorius Calender)이라 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B.C 4000년 경 환웅이 달력을 만들었고, 단군 4년(B.C 2096년)에 60갑자를 활용하여 책력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은 앞서 밝힌 대로 거의 모든 세계와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적 연호(A.D) 사용의 유래 : ‘A.D’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때부터 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세계 모든 나라들이 사용하는 연호로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연호의 사용은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되고 있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논한 대로 위의 용어들과 유래는 주전(B.C)와 주후(A.D)를 제외하고는 반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용어도 아니다. 다음호부터 논할 12개월의 월별 이름과 한 주간 7일의 요일 별 용어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하지만 서론에서 논한 대로 이런 용어들은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고, 또한 심각한 반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계속 논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B.C와 A.D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디 이런 연호를 널리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적 언어문화를 창출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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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박동철 장로] 예수의 경제학, 공자의 경제학 미국과 중국의 ‘화폐전쟁’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國富論)은 오늘날 세계경제를 이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교과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장로교 교회 집사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신앙인이었다.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제학자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가 지은 국부론의 기초는 재화와 노동을 통해 생산과 이윤을 냄으로써 국가의 경제가 튼튼해진다는 원리다. 노동이 철저하게 자본과 결합해야 최고의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경제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국부론의 이론은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끊임없이 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의 다섯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을 가꾸고 번영해야 국가의 개념이 생긴다. 장사(상업)와 노동의 가치관를 말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일명 ‘예수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경제 이론을 내었지만 독일 출신 칼 마르크스가 자본보다 노동의 가치가 더욱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 자본론을 주장했다. 자본이 노동의 이익을 착취하면 안 되는 원리의 이상론의 사회주의 경제학이 더욱 발전하며 세계 근대사회를 이끌어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학문적으로도 경쟁을 하면서 수정자본주의 수정사회주의 등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경제학의 두 산맥은 결국 이념화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구, 소련을 중심한 동구권으로 근대 세계냉전시대를 지내왔다. 소련이 공산 사회주의에서 실패하고 러시아로 잔존하게 되고 이제 중국이 중국식 사회주의로 맹주(孟主)가 되면서 새로운 세계 패권경쟁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중국의 사회주의는 변형된 면이 있다.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 혁명 후 거장 등소평(鄧小平)의 시장중심의 중국경제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중국의 경제사상은 의(義) 에 바탕을 두고 이(利)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이를 두고 중국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인자는 밥을 먹을 때도 인(仁)이 있어야 한다.”는 이념의 바탕에서 중국식 사회주의가 발전해왔다. ‘공자의 경제학’을 강조한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공산당이 모든 국가 경제를 통제한다. 지난 1978년 등소평의 개방 중심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에 눈을 뜨면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데 노력해 왔다. 2001년 중국은 WTO에 가입함으로써 세계화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세계화의 호혜적 무역 관계에 힘입어 14억 인구의 내공으로 개도국이면서 세계 경제를 주도했다. 미국은 그동안 소련의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중국을 민주주의 시장경제국가로 변화할 것을 유도해왔다. 그리고 무역 환경에서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의 성장이 미국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지키면서 미국과의 사실상 화폐전쟁에 돌입했다. 세계 무역에서 경제권을 주도하는 기축통화에도 중국이 위안화를 내세우려 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 간 요즘 오가는 말들이 거칠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미국을 따를 수 없다. 반도체 등 원천기술에는 중국이 먼 거리에 있다. 중국은 희토류등 원자재 공급에 주도권이 있다. 미국은 중국의 화폐도전에 요즘 ‘킹달러’(King dollar)게임으로 중국의 도전에 거리를 멀리하려고 한다. 바로 화폐 전쟁의 치열함이다. 중국은 더욱 중국식 사회주의를 위해 시진핑의 영구 집권을 굳히고 있다. 미국·중국의 경제 전쟁의 화폐 게임이 본격화되었다. 복음의 사명자 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시진핑의 중국은 공산 사회주의의 영구 집권 전체주의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입김을 받은 자유시장 원리의 경제구조가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탄압에 더욱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다. ‘공자의 경제학’은 커녕 ‘시진핑의 경제학’은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까. 기우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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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최호숙 목사] 단풍과 인생
    우리는 보통 나체(裸體)하면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하는데 원래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로 “나(裸 벗을 나)”자는 나무에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자 적(赤)자도 “벌거벗은”이라는 뜻이 있어, 적나(赤裸)나 적신(赤身)도 같은 의미로 쓰이나 근래에는 사용 빈도가 적지만 한자어 “적나라(赤裸裸)하다”는 것은 “다 까발려진”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와, “다 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naked’와 ‘누드(nude)’가 있는데 둘 다 나체라는 의미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naked’는 자연 그대로의 나체를 뜻하고, ‘nude’는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나체를 뜻한다고 정의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순리를 보면 봄꽃은 남에서부터 물들어 올라가고 가을에는 북에서부터 물들어 내려온다. 단풍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속도는 초속 30cm라고 하는데 필자가 목회하는 이곳 통영에도 나무에 단풍이 들더니 서서히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쓸쓸한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단풍이 드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목 보다는 묘목이 빠르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빠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원인은 뿌리 온도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추위를 느끼면 더 빠른 단풍이 들게 된다. 성목보다 묘목의 흙이 적기에 뿌리가 온도변화를 더 빨리 느끼고 맨땅 보다는 화분이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뿌리가 깊고 말씀의 흙이 많은 성도는 세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기를(엡 3:17)”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나의 신앙의 삶은 얼마나 변색, 세속화되었는가? 겉만 깨끗하게 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형식적인 헌금을 세속화라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의로움과 자비의 예물을 바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탐욕을 추구하는 것을 세속화라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복음화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즐거움과 거룩함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할 수 없기에 결국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를 위해 쓰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쓰는가가 중요한 지표이다. 나의 삶은 누구를 위해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분명히 하나님을 나타내며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이태원 참사는 안타까운 일이다. 핼로윈 데이(Halloween Day) 그것은 바울의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 구별 없는 세상 풍조(엡 4:14)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세속으로 물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물들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아름다운 신앙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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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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