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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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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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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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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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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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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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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2) : 지붕 위의 아버지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재미없다. 늘 보던 시골의 풍경과 익숙한 모습은 지루함을 더한다. 재미난 것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걷던 중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보자!’ 우리 아빠는 온 동네 페인트 일을 도맡아서 하신다. 저기 군청도, 저기 파출소도, 저기 단독주택도, 저기 빌라도. 다 우리 아빠가 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를 누비며 걸을 때 건물의 페인트 상태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 아빠가 칠했을 것 같으니 자꾸 눈이 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종종 어른들이 나의 정체를 물어보곤 하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소개를 한다. “종합페인트, 신희목 사장님이 우리 아빠에요.” 특이한 내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아빠가 유명하긴 한가보다. 그렇게 나는 이곳저곳을 걸으며 아빠가 계실 현장을 찾는다. 분명 이 근처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현장을 찾아 기웃거리며 시멘트가 드러나 있을 공사현장을 찾아본다. ‘찾았다!’ 오래지 않아 지붕 위에서 긴 장대 롤러를 가지고 작업하는 아빠가 보인다. 시커멓게 탄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고생스러워 보인다. 땀범벅에 표정도 무겁다. 안쓰러움을 가져야 했을까? 하지만 내 몸과 표정은 반대로 반응했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의 현장으로 뛰어가 일하는 삼촌과 인사를 하고 ‘새참’으로 나왔을 빵도 얻어먹으며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만들어 내기에 성공했다. 역시 현장은 이 맛에 찾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빠의 마음을 다른 분을 통해 듣게 되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대부분 현장 일을 하신다. 폼 나는 정장이 아닌 작업복, 스킨 향이 아닌 땀내가 아빠와 친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종종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모른척하며 길을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의 친구들은 속이 상하면서도 미안해진다고... 그런데 지붕에서 땀 흘리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반갑게 현장으로 뛰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너무 고마웠단다. ‘에이~ 뭘 그런 걸로’ ^^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아빠가 왜 위험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는지 안다. 그렇게 고생하셔야 내가 좋아하는 고기도 먹고, 간식도 먹는다. 내 가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변신 필통도 아빠가 흘리는 땀의 대가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피부색은 멜라닌 색소 영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멜라닌과 무관할 것 같은 아빠의 검은 피부가 내게는 훈장처럼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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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최호숙 목사]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개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어느 젊은 부부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듯했지만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부터는 남편이 술만 먹으면 폭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가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이의 혈액형이 문제였다. 부인은 A형, 남편은 B형인데 아이는 RH+B형이라 남편 수준의 생각에 확률적으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되었단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결과가 말하겠지만 이처럼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자기 닮기를 원하고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로 새끼는 어미를 닮게 되어 있다. 닭 새끼는 병아리, 소 새끼는 송아지, 말 새끼는 망아지, 개 새끼는 강아지, 그렇다면 호랑이 새끼는 무엇이며, 곰 새끼는 무엇이라 부를까? (정답은 칼럼 뒤에... ) 남해안을 중심으로 서식하는 어종(魚種) 중에 전갱이(일본어로 아지)가 있는데 새끼를 ‘매가리’라고 한다. 명태 새끼는 ‘노가리’,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라고 한다. 이 새끼들은 모두 어미를 닮았고 어미처럼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다.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나온 것인데 그 당시 안디옥에서 많은 손해와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무리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부르던 용어가 그리스도인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삶을 사는 안디옥 교인들을 보고 구별하기 위해 지칭한 말로써 초기에는 조롱하고 경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불렀으나 후대에 영광스런 명칭이 되었다. 헬라어로 ‘Christianos-크리스티아노스), 라틴어로 ‘Christianus-크리스티아누스’인데 단어 어미에 붙는 헬라어 ‘~ianos’ 라틴어 ~ianus’는 ~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어감이 이상하여 ~닮은 자, ~에 종속된 자로 해석한다.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닮아야 하며, 언어가 닮아야 하며, 삶이 닮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을 가지고 사역한다고 고백하였다. 최용덕씨의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찬양 가사를 보면 2절 중반에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주님여, 나를 도와주소서~~♬♪♬♩” - 작사자도 온전히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말뿐이고 마음은 여전히 세속 된 마음 그대로 임을 고백하며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예수님 닮았다고 하지만 삶은 구별되지 못한 개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하며 조소(嘲笑)하는 뜻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녀답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길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호랑이 새끼 : 개호주, 곰 새끼: 능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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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박무열 목사] 선한 영향력을 지속시키자
    본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작은 선물을 손에 들려 보냈다. 필자가가 부임이후 11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초청하고 복음을 전하며 주역주민과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다. 참 쉬운 일은 아니다. 미 자립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시행한다는 것은 재정적 부담감이 늘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고 주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주민들을 초청하지 않고 선물을 준비하여 각 가정에 돌리려는 저의 생각을 교회 앞에 내어놓으니 목사님 그동안 많이 나누어주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해 좋은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초청해서 오시는 분들에게 대접하고 선물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내심 마음으로는 성도들의 성숙에 감사하면서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조심스럽기도 하고 누가 음식을 만들고 차량으로 주민들을 모셔오고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지금까지는 평일 행사를 함으로 이웃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차량운행이 가능했는데 주일이라 완전히 독자적으로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을 추스르기 전에 성도들 간에 메뉴가 정해지고 각자 분담해서 준비하자는 이야기 까지 진행되므로 중간에 저의 생각을 개입시킬 타이밍을 놓쳐 버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올해는 특이한 사항이 누구도 금전적으로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그저 놀랄 뿐 이였다. 순식간에 차량 담당 까지 정해졌다. 매주 금, 토요일은 전도하는 날이다 혹서기 2주간을 빼고는 코로나19 상황이지만 쉬지 않고 전도했다. 전도 팀에게 참석인원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고 준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저에게 주어진 분담은 식자재를 제외한 물품을 마트에 가서 구매해오는 것 이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추수감사절 감사예배와 주민들을 모셔놓고 아름다운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를 나누는 은혜의 날 이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행사를 기획하고 교회 앞에 내어놓으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다고 교회에 옵니까? 라는 부정적인 시각이었는데 이제는 저들이 절기가 되면 목사님 이번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역으로 되묻는 것입니다. 매번 행사를 기획하고 참석 인원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도 예상인원이 미달하여 음식이 남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상 인원 많큼 참석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잡혀 있어서 연기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는 걱정이 있었다. 저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오전에는 비가 오지 않고 저녁 늦게나 다음날 비가 내리게 해 주세요. 저의 아내가 목사님 기도대로 비가 저녁 늦게부터 온 다네요. 우리의 기도대로 비는 오지 않고 전형적인 가을 날 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면 응답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상황에 맞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시기가 되면 주민들이 기대한다는 것이다. 상황을 유지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흔히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다보면 처음의 열정과 결심이 흔들리고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지켜나가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쌓게 되고 관계가 형성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신앙의 길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생명과 삶의 전부를 들려서 가야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 영광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 순수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으로 일 하십니까? 지속적인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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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김상규의 경제이야기] 음식점 총량제의 문제점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선량한 정부의 선량한 규제는 필요하다”며 음식점 총량제를 제안했다. 선량한 목표를 내걸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으며, 어떠한 규제도 그 목적은 선량하지 않을까? 과도해지면 악마의 수단으로 변할 뿐이다. 직업선택과 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거나 대장동을 회피하려는 꼼수란 비판이 쏟아지자 논의를 위한 것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정치인은 말로 승부를 하는 존재다. 대통령이 되려하는 여당 대선후보의 발언으로는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또 이재명후보는 자살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며 총량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음식점 경영주들이 자살한 것은 총량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규제로 2인을 초과한 저녁모임을 금지하고 저녁 9시까지만 영업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빚은 늘어나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자영업자 협의회에 의하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자영업 점포 45만개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음식점 허가를 너무 쉽게 내준다고 한다. 그동안 규제완화와 프렌차이즈 방식의 확대로 창업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중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음식점 수는 그 나라의 문화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서양은 근무시간이 9 to 5다. 딱히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듯이 샌드위치나 커피로 때운다. 반면 우리는 국물문화의 영향으로 점심시간에 음식점을 찾게 된다. 장시간 근로와 잦은 회식도 음식점에 대한 수요를 늘린다. 우리나라의 외식시장은 2020년 기준으로 138조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농산식품유통공사 추계). 시장을 받쳐줄 수요가 71만개라는 음식점을 낳은 것이다. 음식점이 많다 적다는 판단은 시장이 하는 것이다. 2020년 통계를 보면 음식점의 폐업도 많았지만(54,437개), 창업은 더 많았다(65,806개). 어쩌면 음식점이 많은 것은 우리 음식문화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송나라시대에는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부유했기에 모두들 외식을 했고 중국음식을 다채롭게 발달시켰다. 음식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포장마차 등 음식점은 어려운 사람들의 마지막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6.25로 고향을 잃은 이북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팔기 시작한 평양과 함흥냉면이 국민음식으로 정착되었고 고향을 떠난 호남사람들이 조리한 홍어음식을 모든 국민들이 즐기게 되었다. 이 후보의 음식점 총량제는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격이다. 자영업자 간담회에서 방역규제의 합리적 개선을 제안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방역규제로 자살한 사람들이 늘었는데 총량제를 그 해법으로 제시했으니 답답할 뿐이다. 글. 김상규 -. 제32대 조달청장(차관급) -. 감사원 감사위원(차관급) 전_ -.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1급) 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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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5
  • [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를 활용한 다음세대 사역
    메타버스 영역별 사역 실제 <메타버스> 라는 용어를 들으면, 일반적으로 특정한 장비를 장착하고 가상공간에서의 활동하는 것을 떠올린다. 이를 오해하여, 메타버스란 가상공간에서의 모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메티버스 교회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메타버스의 전부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아래와 같은 4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사역이란, 메타버스의 각 영역의 특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교회교육을 활발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 메타버스에서 <가상현실>(VR)의 영역이란, 디바이스를 통하여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여 서로가 교통하는 것이다. 2018년에 개봉된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서로가 직접 만나지 않고 비대면으로 각기 접속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가상현실의 영역이다. 이는, 제페토나 포트나이트 같은 가상공간뿐 아니라, zoom 과 같은 연결 어플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가상현실>을 활용한 메타버스 영역에 해당된다. <가상현실>(VR)을 활용하여 행복나눔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다. 1) 정기모임 (줌일학교) “zoom으로 만나는 주일학교”라는 뜻을 담아 <줌일학교>라고 명명하였다. 모임시간은, 모두의 의견을 모아, 매주일 밤 8시로 확정했다. 모든 참가자가 zoom을 통하여 접속하면, 서로 축복하고, 가벼운 게임으로 마음의 문들을 연다. 한 주간 큐티내용을 요약한다. 그리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축복하는 시간으로 마무리를 한다. 언택트 상황에서 zoom을 통해 학생들과 교사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점이 좋다. 불신가정에서 출석하는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은 홀로 그 가정에서 스마트폰으로 접속을 한다. 이 학생이 너무 즐겁게 반응하고, 교회에서 다양한 선물을 챙겨주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부모도 적극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도록 협조를 하기까지 한다. 이전에는 자녀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유투브나 게임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zoom일학교를 통하여 교사들과, 친구들과 소통을 하면서, 아이가 밝아졌다며 감사인사를 전해오기까지 했다. zoom일학교를 진행하기 이전에 주일 밤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요란한 TV의 예능 프로그램을 온 식구가 보던지, 각자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일밤 8시에 각 가정에 교회가 작동되게 되었다. 가정이 교회가 되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나며, 교회와 주일학교가 학생들을 책임진다는 강력한 의지를 경험하면서,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하여,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었을 때에, 성도들이 다시 모일 때에, 서먹함이 아닌, 반가움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서로가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2) 온라인 여름성경학교 <향기나무>에서 구매한 3주간의 성경학교 교육자료를 사용하여 각 가정별로 준비를 했다. 또한 각 가정이 여름성경학교가 되도록, 여름성경학교 장식용 자료를 준비하여 배달했다. 교육국장으로 섬겨주시는 장로님과 유초등부 부장님과 함께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배부하였다. 학생들은 부모님과 함께 장식을 하면서, 각 가정을 “여름성경학교”교실로 바꾸었다. 각 가정이 단지 주거공간의 영역을 넘어, 거룩한 하나님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 찬양, 말씀,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서야 교회를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속에서 교회학교가 진행되었다. 온라인으로 인하여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는 특별한 성경학교가 되었다. 가정의 온 식구가 함께하는 게임을 통해서, 주일밤이 놀라운 회복의 시간으로 변했다. 놀이공원을 가야만 가족간의 유대감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렇다,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이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 3) 온라인 글로벌 캠프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면서 선교 프로그램도 전면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너무 안타까워 하던 전주의 선교단체 다세모(대표: 윤석호 목사)와 함께 의논하던중, 글러벌 캠프를 기획하게 되었다. 해마다 필리핀 선교를 가는 지역의 교회들도 캠프에 대한 필요성을 갈급하고 있던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랜선 글로벌 캠프를 준비하게 되었다. 강사들을 선정하고, 통역으로는 다세모에서 활동중인 필리핀 현지인 크리스틴이 섬기는 컨셉으로 진행하였다. 전주초청교회당을 메인 스테이지로 설정하고 온라인 사역을 전문적으로 함께 섬겨 섬겨온 크루들(정도환 목사,제주경목사)이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필리핀에서 1,200명의 현지인들과 한국학생들이 참여하고, 국내에서는 12개교회 350명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캠프가 진행되었다. 한국어로 집회가 진행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통역하며 진행된 올라인 글로범 캠프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열매들이 나타났다. 조그만 폰 하나에 온가족이 집중하고, 모니터 하나에 교회에 모인 현지인들이 집회에 초집중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뜨거운 감동 그자체였다. 오프라인으로 선교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의 경비들은 현지의 학생들이 식사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지원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교여행은, 많은 경비와 시간을 헌신하고 진행되었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통하여서는 시간과 경비의 지출을 최소화하고, 이를 더욱 효과적인 선교에 지원하면서 새로운 페러다임의 선교사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증강현실> : 증강현실은 현실속에서 디바이스를 통하여 정보를 확인하는 영역이다. ‘포켓몬고’ 같은 게임은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현실에서 가상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카메라 어플을 활용하여 다양한 모습들로 교제하는 것도 충분히 효과적인 증강현실 활용법이다. 가상공간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메타버스의 기능을 활용하여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였다 1) 랜선 성지순례 2021년의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다가오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좀 특별한 의미의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싶었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해외여행이 차단된 상황에서, 해외 현지의 가이드분들이 카메라로 촬영한 내용들을 나누는 <랜선투어>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오른다는 상황에 착안하여 <랜선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특히 고난주간에 맞추어 “십자가의 길”을 주제로 삼았다. 예루살렘 현지에 계시는 분들께, 영상자료 도움을 청하였다. 십자가의 길 14개 처소들을 소개하면서, 건물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였다.서울, 용인, 인천, 대구, 진주, 부산, 심지어 남아공에서까지 문의가 왔다. 특히 시골교회에서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평생의 꿈인 성지순례를 모니터를 통해서이지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인한 감격을 담은 후기는 메타버스를 통하여 어떤 일들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게 한다 2) QR 방탈출 게임 메타버스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기획하여 집행하지만, 어느새 하나의 일과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온라인으로만 계속해서 모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교회당에 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핵심은 균형적인 교육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균형적으로 진행되어야 효과적이다. 그러한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방탈출 게임>이었다. 몇 가지 단서로 방에서 탈출하는 게임은 최근의 트렌드중의 하나이다. 이를 응용하여 학생들이 교회에 와서 단서들을 찾아서 미션들을 풀어나가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학생들이 자기들의 가진 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정답을 찾을 수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문제의 답이 있는 웹페이지로 연결된다. 웹 페이지 안에서 정답을 확인 후 정답을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것이 첫 미션이다. 학생은 마지 자신의 게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하고 정답을 보낸다. 정답을 보낸 친구에게는, 다음 퀘스트의 단서를 스마트폰으로 발송해준다. 이러한 과정들을 모드 마친 친구들은 간식과 함께 포장한 장소의 약도를 보게 된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약도를 따라서 찾아가면, 박스안에 준비된 간식과 큐티 교재를 만나게 된다. 학생들은 미션을 무사히 마쳤다는 성취감에 크게 환호를 했다. <라이프로깅> : <라이프로깅>은 SNS에 기록을 남기고,이를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학생들은 실제로 대면하여 소통을 하는 것보다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이러한 상황을 응용하여 다양항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다 1) 큐티 단톡방운영 2020년 2월 말부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에, 8개월동안의 큐티훈련 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큐티를 통하여 성경을 지속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주일에는 유튜브로 설교를 송출하는데, 일주일간 큐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하였기에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큐티를 단체 카톡방에 인증하는 ‘큐티톡톡’을 시작했다. 카톡의 단톡방을 큐티나눔방으로 운용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부모, 교사를 단체대화방에 초대하고, 매일 큐티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업로드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어린이는 부모님이 대신 올리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잘 정착되도록 ‘강화’가 필요하여, 첫 주에는 매일 인증하는 친구들에게 치킨쿠폰을 상품으로 걸었다. 그 효과로 평소 참여가 저조하던 어린이들도 열심히 큐티를 하고 인증샷을 올렸다. 매일 큐티를 인증하는 학생들이 특별한 상을 받았다. 그 상은 교장선생님이 주는 ‘큐티잘했상’이다. 큐티를 꾸준히 하는 학생들에게 감동한 담임목사님이 상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단체 채팅방에 공유해주셨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가 가득한 큐티 단톡방은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엔진으로 강력하게 진행중이다 2) 일상속 십자가 찾기 2021년도 고난주간에 <행복나눔교회 교회학교>에서는. 메타버스 교회학교를 통해서 진행될 수 있는 특별한 순서들을 준비했다. 유초등부에서는 <생활속의 십자가> 찾기 프로그램을 했다. 고난주간동안 주변에서 십자가의 무늬를 찾아서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것이었다. “ 과연, 유초등부 학생들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고가 나간 종려주일 오후부터 단톡방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1장씩 올린다는 규칙을 듣지 못한 가정에서 십자가 사진들을 폭탄투하를 한 것이었다.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다른 학생들도 열심히 십자가의 무늬를 찾도록 찾아서 단톡방에 탑재하였다. 이러한 십자가 무늬 찾기는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부모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생들이 한 주간동안 온통 십자가를 찾는 것에 집중하여서 찾아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사하면서도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먹을 것과 놀 것에만 집중하더니, 일상속에서 십자가를 찾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생활속에서 십자가 무늬를 발견하면, 마치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촬영하는 뒷모습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고 했다. 십자가 무늬를 정성스럽게 촬영하고, 단톡방에 탑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자녀의 인생속에 언제나 십자가를 품고 살기를 기도하였다는 고백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3) 고난주간 브이로그 만들기 <행복나눔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조금 수준을 높여 학생들에게 <각자의 고난주간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제출하도록 진행하였다. 자기의 관심사 외에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고난주간이 지나면서 정말 놀라운 결과물을 보면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묻는 말에도 대답을 잘 하지 않던 학생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고난주간>을 보낸 동영상을 탑재했다. 고2 남학생은 한 주간 고난주간 특새에 참석하는 상황을, 잠에서 깨어 일어나 교회당에 착석하는 상황을 브이로그로 만들어 올렸다. 고2 여학생은 한 주간 온라인으로 특새에 참가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고3 여학생은 고난주간의 기도문을 낭송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학생들이 제출한 동영상을 중고등부 담당간사님이 교회밴드에 올리자, 학부모님들과 성도들님이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정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메타버스는 위기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교회에 간다”. 코로나 이전에는 다양항 방식으로 교회학교가 부흥되었지만, 펜데믹 이후에는 메타버스를 적절하게 활용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한 활력으로 부흥하게 되는 결과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7월 8일에 발간한 책 <메타버스 교회학교>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과 급속히 변화된 메타버스 플랫폼들에 대하여는 <교회, 메타버스를 탑승하다> 세미나를통해 좀 더 심층적인 내용을 강의로 전달하고 있다. 1부에서는 메타버스의 개념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 프로구램들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의 세대들에 대한 이해를, 3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에 필요한 능력들은 무엇이며, 이를 교회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나눈다.이러한 세미나를 통하여 더욱 입체적인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메타버스 시대에 움츠리지 말고 더욱 활발한 사역들이 일어나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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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오성한 목사] 지키려 하지 말라.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지키셨음을 믿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주셨다. 깨닫고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으라고 주셨다. 예수님 만이 길임을 알라고 주셨다. 예수님께도 오라고 주셨다. 율법을 지키려 하지 말고, 예수께로 가면 된다. 지키려고 하면 약해진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처럼 지킨다고 생각하면 속이는 것이다(마가복음 10:23 참고). 우리가 지킨다고 말하며,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요한일서 1:8 참고). 예수께로만 가지 않는 사람이기에 교만한 사람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께서 죽으셔야 만 한다는 이야기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고, 망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심은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순종할 수 있는데 불순종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보면 진노의 하나님으로만 보게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면 성경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절대 하나님을 잘 섬길 수도 없고, 섬기고 싶은 마음조차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도저히 가망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노력이나 사건도 순종하게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인간의 완전한 멸망을 말하고 있다. 성경 이야기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줘도 순종할 수 없고, 기적이 일어나도 순종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순종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멸망하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신 역사다. 구원의 유일한 길을 말씀하고 계신다. 율법을 지켜서 가 아닌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 부활하셔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회복하셨다. 예레미야는 25장과 29장에서 70년 만의 회복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수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이 차면,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선포다. 바벨론 포로지에 있던 다니엘은 이 말씀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의 언약을 잡은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감사해서, 금식하며 기도한다(다니엘 9:2 참고). 다니엘이 기록된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때 계시를 크게 열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금식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금식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금식은 하나님께 공들이는 시간이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음식은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금식은 하나님을 생명보다 사랑하고, 더 믿는다는 고백이다. 다니엘의 금식은 발견한 말씀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고 감사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니엘이 금식했기 때문에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해야 더 잘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믿고 감격하고, 감사할 때 기뻐하시고 더 큰 계시의 문을 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멸망 당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그린 역사이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 망해야 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안 망했을 텐데”라는 주제로만 성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젖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만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인 율법은 저절로 지킬 힘이 생기게 된다. 바울은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것이고, 죄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했다(로마서 7:11 참고). 지킬 수 있었는데 못 지켰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잘못을 고백하고, 그곳에 자신이 묶이지 말고 빨리 주님의 용서하심에 감사와 감격을 받아들여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킬 수 없다.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묶이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쏟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을 이길 수 없다. 강력한 복음증거를 위해 복음을 붙잡아야 한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감격으로 인정하고 우리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한다. 당신을 고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고쳐 놓으신 주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능력 있는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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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박봉석 목사] 거룩의 길
    <종교개혁주일을 지나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한 대주교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미사에서는 다른 날과 달리 하나님을 부르면서 좀 더 장엄한 목소리로 “오 거룩하신 아버지여!”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세 번 반복해서 하나님을 부르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냐, 내가 여기 듣고 있느니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 대주교는 그만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거룩이란 말도 아니고 모양도 아닙니다. 즉 내가 거룩한 말을 하고 거룩한 모습을 한다고 내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보혈로서 죄를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기 위해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게 된 자로서 나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도록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원래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부르는 28계단이 있었습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라테란 성당으로 옮겨져서 성당의 입구에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하게 된다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허무맹랑한 미신을 신앙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무릎을 까서 피가 나도록하면서 그 계단을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더 감동하시고 자신은 더 거룩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가톨릭 사제인 루터도 반복해서 그것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는 그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때에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놀라고 의아해 하는 다른 고행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계단에서 뛰어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하던 중에 스승인 슈타우피츠를 찾았습니다. 슈타우피츠는 그에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회초리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라고 말입니다. 그는 그 말에 어떤 빛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성경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그의 결론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깨달음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고 결국에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사람이 죄를 용서 받아 거룩하게 되어 구원 받는 것은 어떤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십자가의 피가 나의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거룩하게 된 자가 구원을 받고 비로소 이 세상에서도 구원 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늘 사용합니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하기오스’라는 말로서, 가톨릭에서 성(saint) 바울, 성(saint) 어거스틴이라고 말할 때의 그 ‘성(saint)’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과 똑같은 원어의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성(saint)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성물(sain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구별하여 쓰기 위해서 기름을 발라 구별한 물건에 대하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흔한 나무 조각이라도 기름을 발라서 구별하여 쓰면 성물(saint)이 됩니다. 즉 나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인 것은 세상 다른 사람들과 똑같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 구별하여 주셨기에 거룩한 백성 즉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삶,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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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1) : 새참과 낮잠
    아빠의 일터에 따라 왔다. 사람들은 아빠를 ‘뺑기쟁이’라고 불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서울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다는데, 지금은 고향에서 페인트칠을 하고 있으시다. 아빠의 일터는 위험하고,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온갖 공구와 신문지가 뒹굴고 있다. 축축한 시멘트와 기름(시너) 냄새, 그리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아버지 일터는 그랬다. 국민학생 어린 아들이 아빠 따라 이곳에 왜 왔을까? 이곳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이 많다. 벽의 위, 아래 다른 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경계선이 필요하다. 긴 먹줄을 양 끝에서 서로 잡아당긴 후 살짝 튕기면 반듯한 선이 그어진다. 처음 보면 조금 신기하다. 먼지가 쌓인 수건을 뒤집어 쓴 엄마의 명령에 따라 문틀 하나를 붙잡고 곱게 사포질을 한다. 사포질하던 나무에 작은 구멍이 보이면 진흙 같은 것을 살짝 넣어서 다듬으면 감쪽같다. 아빠는 그것을 ‘빠대질’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현장에서 쓰는 일본말이겠지. 대강 눈치껏 거친 면을 다듬는 작업 정도로 이해한다. 이런저런 소소한 손질로 아빠, 엄마를 돕고 있으면 드디어 그 시간이 온다. 내가 이곳을 따라온 것은 효심이 아니다. 함께 작업하는 삼촌, 아저씨들은 기특하다며 칭찬을 하시지만 내 목적은 다른 것에 있다. “새참 먹고 해요.” 점심식사 전에 건물 주인이 비닐 봉투를 들고 온다. 그 안에는 쿨피스, 우유, 빵이 가득하다. 아저씨의 호탕한 웃음만큼 간식은 기분 좋다. 어른들은 간식을 새참이라고 불렀다. 그 안에는 크림빵도 있고, 팥빵도 있다. 우선권은 막내인 내게 주어진다. 오늘은 팥빵, 내일은 크림빵. 최고의 즐거움이다. 새참을 먹고 두어 시간이 못 되어 점심시간이 된다. 주변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가 이어진다. 점심식사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두 번째 행복이 있다. “좀 쉬었다 합시다.” 현장에서 점심을 먹고 나면 아빠, 엄마는 물론이고 모든 삼촌들이 현장 바닥에 적당한 것을 깔고 30분에서 1시간을 주무신다. 바로 일하면 힘이 나서 일이 잘될 줄 알았는데 배가 불러 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제 이시간이 되면 나도 능숙하다. 주변에 널브러진, 가능한 깨끗한 박스를 펴서 자리를 만든다. 시멘트 바닥 위에 깔려진 박스 매트는 제법 푸근하다. 그렇게 나는 달달한 낮잠을 청한다. 아빠가 낮잠의 종료를 알릴 때까지. 일하는 것에 비해 누리는 것이 많은 듯하여 죄송함도 있지만, 종종 따라오는 아버지의 현장이 나는 참 좋다. 아빠, 엄마와 종일 같이 있고, 맛있는 새참을 먹고, 달콤한 낮잠이 있다. 박스 냄새 맡으며 기분 좋게 잠들었던 그 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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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 (序言) 어떤 나라와 민족이든 그들만이 가지는 독특한 민족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민족성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많은 독특성이 있다. 예를 든다면,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식이나 “정에 웃고 정에 운다”는 우리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情)적인 정서이다. 그리고 항상 침략을 당해온 약소국의 서러움을 안은 한(限)의 문화가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가 미신과 유교의 효(孝)의 정신, 그리고 불교의 영향권 아래에서 함께 우리의 정서에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화가 가장 많이 녹아져 있는 곳이 한국의 관혼상제(冠婚喪祭)문화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장례문화가 가장 대표적이라고도 볼 수 있고, 이러한 우리의 장례문화 속에는 민족의 전통적인 독특한 정서인 정(精)과 한(恨), 불교와 유교, 미신 등의 영향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우리 기독교인의 문화 읽기와 행동적 습관은 자연적으로 알게 모르게 전통과 타종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교인들도 흔히 사용하는 장례문화의 용어들 중에서 타 종교의 영향을 받아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혼돈하기 쉬운 용어들을 오늘도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그 중에 하나는 삼우제(三虞祭)이다. 몇 주 전 간략하게 논한바 있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II. 삼우제(三虞祭) 1. 삼우제란 무엇인가? : 이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의 고서이면서 유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5경 중 예기(禮記)에 기록된 제사 의식에 관한 가르침에서 전래된 유교식 제례의식의 용어이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이 제사의식은 우제(虞祭)에서 온 것인데 우제란 염려할 우(虞) 제사 제(祭)로서, 오늘 매장된 고인의 영혼이 달라진 자신의 환경에 당황하고 방 황할 것을 염려하여 그 영혼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의미의 제사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삼우제를 논하면 제사의 절차는 장례를 치른 후 3일 동안 매일 행하는 3번의 제사로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가 있다. 초우는 무덤에 고인을 안장한 유족들이 장지에서 돌아와 집안에 남아 있는 여자 상주들과 곡을 하며 첫 번째로 집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초우제 또는 반혼제(返魂祭)라고 한다. 2. 기독교인으로서 삼우제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 때에도 장지에서 집으로 돌아와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초우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우는 이틀째 되는 유일(柔日)에 지내는 제사이며, 삼우제는 3일째 행하는 세 번째 제례로서 죽은 고인의 영혼으로 하여금 이제는 안심하고 편히 쉬라는 의미의 제사이다. 이렇게 볼 때 삼우제는 우리 기독교적인 예식이 전혀 아닌 전통적인 유교의식이므로 이 용어와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삼우제라는 용어가 아닌 “성묘(省墓)”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성묘란 살필 성(省), 무덤 묘(墓)라는 뜻으로 무덤의 상태가 어떤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장례를 치른 후 3일 만에 무덤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특히 먼 외지에서 장례일 날까지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나 친족들이 사후에 무덤에라도 가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며, 또 분묘가 잘 조성되었는지를 살피고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다음, 유족들이 고인의 별세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인생의 삶에 대한 신앙적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는 것도 장례 후 첫 성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삼우제를 적합한 우리 교회 용어로 바꾸어 사용한다면, “첫 성묘”라는 말이 가장 좋을 것이다. III. 맺는 말 삼우제에 대한 용어나 여러 행위들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논한다면, 꼭 이렇다는 의미는 둘 수 없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무덤을 살피기 위해 제 3일 아침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의 모습을 예를 들 수 있다. 그렇다고 굳이 3일 만에 성묘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본다면 우리나라의 전통의 관혼상제 문화와 용어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키고 창조해 가야 할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나 무조건 우리 것이 아니라고 배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한국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관혼상제 문화와 용어 정착에 이바지하는 문화선교사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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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김성수 총장] 정직하고 행복한 대한민국
    거대한 대륙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넓은 국토, 저렴하면서도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개혁 개방 정책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급부상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선진국이라는 평가를 받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민 다수가 정직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고,또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소위 '짝퉁'이 판을 치는 나라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조잡한 싸구려 장난감에서부터 불량식품에 이르기까지 가짜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계란까지도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천진 난만하고 천사 같은 어린 아이들이 바르는 얼굴 로션에도 스테로이드를 넣어서 애들 얼굴을 기형으로 만들고 있는 나라입니다.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납이 들어 있던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던지, 조잡하던지 가짜던지 간에 일단 돈만 되면 만들고 팔아서 챙기고 보겠다는 배짱입니다. 법으로 안 되는 일도 편법으로 하면 된다는 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합법적 밀수’라는 어이없는 말까지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했을 때도 세계 각국은 공장 굴뚝을 통해서 공해를 무차별 뿜어대는 중국이 과연 세계인들의 축제를 개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까지도 되물었을 정도입니다. '중국'하면 불량품을 연상시키는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시키지 않는 한 중국은 선진국의 반열에 끼어 들 수도 없고 그렇게 긴장할 만한 나라로 인식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도 부정직에 관한 한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업의 차명계좌 비자금, 국세청장의 비리, 주가조작, 학력위조, 입시 부정과 청탁 등 온갖 부정과 부패로 우리 사회가 썩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부정공화국이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탐구해야 할 교육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학 사회의 표절과 컨닝, 대리출석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고생들이 사회봉사를 하지 않고도 점수를 받습니다.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통해서 거짓말을 배우는 셈입니다. 수능 시험에서도 부정행위를 교묘하게 자행할 수 있는 최첨단 장비가 개발되고 있다고 하니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와대로부터 국회,정부 각료,심지어는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부정직의 행위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도덕성에 있어서 가장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종교계도 부정직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있는 일들이 빈번하게 보도되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권순택 논설위원이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된 연구논문을 소개한 내용이 참 흥미롭습니다(전북일보인터넷신문(http://www.jjan.kr 2019, 6.26)미국 미시건대와 유타대, 스위스 취리히대 공동연구팀이 세계 시민들의 정직성 실험을 한 결과입니다. 연구팀은 세계 40개 국가 355개 도시에서 ‘잃어버린 지갑 찾아주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 대상자는 우체국 호텔 병원 문화관련 기관 등 공공기관과 민영회사 사람들이었습니다. 돈이 들어 있지 않은 지갑과 13.45달러(1만6000원 상당)가 들어 있는 지갑, 그리고 94.15달러(11만원 상당)가 든 지갑 등 3종류, 1만7303개의 지갑을 사용해 정직성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지갑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열쇠와 명함 등도 함께 넣었고 직접 실험 대상자들에게 분실 지갑이라면서 건네주는 방식으로 실시했습니다.그런데,실험 결과는 다소 의외였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사람들이 챙기려는 의도가 강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지갑에 돈이 많을수록 돌려주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돈이 없는 지갑의 회수율은 평균 40%에 그쳤지만 13.45달러가 든 지갑은 51%, 94.15달러가 든 지갑은 72%로 회수율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지갑 회수율이 가장 높은 국가는 스위스였고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이 뒤를 이었습니다. 회수율이 낮은 국가는 중국 모로코 페루 카자흐스탄 케냐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한때 한국이 세계경제포럼 국가경쟁력 조사에서 23위에서 11위로 12단계나 뛰어올라 선진국형 혁신경제로 진입했다고 요란한 선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비용절감 등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 신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혁신경제 단계로 들어섰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직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경제성장은 모레 위에 세우는 성곽과도 같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대선 주자들이 한결같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다수 의식 있는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 좀 정직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중국이 주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다른 나라, 정직하고 행복한 나라, 그래서 지구촌을 향해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나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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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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