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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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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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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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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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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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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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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어머니와 아들(출2:1-10)
    미국에는 미국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그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의 조각가 「바르톨디」의 작품입니다. 바르톨디는 그 작품을 만드는데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자했고 20년이나 걸려서 그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가 그 작품을 조각할 때 여신상의 얼굴 모델을 누구로 할 것인가 하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을 낳아서 사랑으로 길러주신 자기 어머니의 얼굴을 모델로 삼아서 그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미국 뉴욕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 자유의 여신상의 얼굴 모습은 바로 조각가 <바르톨디>의 어머니의 얼굴 모습입니다. 그 내용을 알고 나면 그 자유의 여신상이 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보입니다.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그 위대한 작품을 만든 조각가 <바르톨디>도 훌륭하지만, 아들이 만드는 그 유명한 작품의 모델이 된 그의 어머니는 더욱 훌륭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르톨디>의 어머니는 바로 “어머니 같은 어머니”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아버지, 가장 위대한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 아들로부터 “나도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말을 듣고, 자기 딸들로부터 “나도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되겠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마 가장 위대한 아버지요 위대한 어머니 일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아들딸로부터 “나는 이 다음에 우리 아버지같이 되지 말아야지, 나는 우리 엄마같이 되지 말아야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에 나오는 여인들 중에서 자녀에게 절대적인 신앙의 영향력을 끼친 어머니 같은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식을 바라본 요게벳과 그의 아들 모세입니다(출2:1-3절). 둘째는,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마리아와 그의 아들 마가입니다.(행12:12) 셋째는, 거짓 없는 믿음을 계승시킨 유니게와 그의 아들 디모데입니다.(딤후1:5) 모두 그런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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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박봉석 목사] 어떤 결단
    한 저명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그분의 장인어른은 어느 때까지 신앙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결혼을 하고 거의 13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에 나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장인어른의 믿음과 구원을 위해서 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장인어른에게는 교회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술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 그렇게 좋아하는 술을 마시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위가 목사이고 딸이 사모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위가 목사라서 사위와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을 늘 아쉬워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인어른이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딱 끊고는 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놀라워서 장인어른에게 직접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장인어른은 “다른 이유가 있나? 내 건강을 위해서 끊은 거야.”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매스컴을 통해서 술이 건강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 듣고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술을 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장인어른의 그런 결심을 듣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건강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즐기고 좋아하던 술을 한순간에 끊으실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 더하여서 “이런 장인어른이라면 주님을 한번 믿기 시작한다면 화끈하게 믿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안에 교회 집사라고 하면서도 아직 술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장인어른은 신앙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단 순간에 끊어버리는데,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도 술 하나 끊지 못하는 교인이 있다는 것을 장인어른이 안다면 기독교인을 얼마나 우습게 여길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하기 위해서 그렇게 즐기던 술을 끊을 수 있다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술을 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모진 고난과 수치를 감수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 지금 내가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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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신재철 목사] 만화방 삼촌, 만화방 이모
    교회 문 앞, 거리에서 숙덕거리는 아이들이 보인다. PC방 하나 없는 동네에 만화방이 생겼으니 궁금도 하겠지. 하지만 교회 입구, 아니 만화방 입구까지 통로가 길어 아이들이 쉽게 첫걸음 하기가 어려웠다. 숙덕거리는 소리나 인기척이 있으면 아내와 나는 일부러 내다본다. 말도 걸어보고 들어와 구경해 보라며 권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낯선 장소에 걸음 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망설이거나 뒷걸음질하기 일쑤다. “안녕, 들어와서 책 보며 놀래?” 며칠째 밖에서 서성이는 작은 아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다. 아내도 권하고, 나도 권하고. 쭈뼛거리며 들어와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한다. 잠시 앉아서 책을 보더니 휙 나가버린다. 숙기 없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런데. “이모, 저 왔어요! 삼촌, 여기 매일 있어요?” 그 아이는 가장 빈번하게 드나드는 손님이 되었고 책장을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엄청난 수다쟁이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목양실에 앉아 있으면 뭐라 뭐라 아내와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목양실 문이 열리고 머리를 빼꼼히 들이밀어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기도 한다. 얼마지 않아 동행도 생겼다. 집에만 있는 오빠를 데리고 왔다. 오빠는 책을 참 좋아한다. 진득하게 앉아 만화책을 열심히 본다. ‘과학 만화, 위인 만화, 역사 만화’ 좋은 책을 찾아 꼼꼼히도 본다. 하지만 이 꼬마 아가씨는 책에 큰 관심이 없다. 아내와 내게 와서 떠들어 대다가, 갑자기 키를 들고 화장실에 갔다가, 책장 주변을 돌고 돈다.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그 남매와 만나며 만화방 주인으로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모와 삼촌이 있는 만화방」 아이가 불러준 호칭. 나는 삼촌이고 아내는 이모다. 삼촌과 이모가 부부가 되는 이상한 관계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나 보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우리가 부부라는 것이 왜 아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될까?) 삼촌과 이모의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이 조금씩 모이며 우리의 조카도 많아졌다. 이모와 삼촌이라. 너무 오랫동안 목사로 불려 와서 어색하긴 했지만, 이 호칭이 맘에 든다. 사람이 된 느낌이랄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동네 사람이 된 느낌이라서 좋다. 삽화 :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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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3)
    I. 서언(序言) 얼마 전에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는 어디에?’라는 작은 논설문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여기의 ‘이도’는 세종대왕의 원래 이름이고 ‘뿌리 깊은 나무’는 훈민정음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작은 글의 의도는 세종대왕의 이 위대한 한글이 오늘날에 와서 너무 많이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한 아픔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필자도 같이 공감하는 바이며, 같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은 호칭이나 지칭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형제자매간에도 이런 적절한 용어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경우도 많으며, 때로는 실수하는 경우도 많아서 당황할 때가 많다. 이런 면에서 본호에서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간의 호칭어와 지칭어에 대해서 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남편의 아우에 대한 경우: 여기에도 여러 관계와 경우가 있기 때문에 각각 그 용어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아우, 곧 시동생이 미혼일 때는 ‘도련님’으로 부른다. ‘되련님’으로 부르는 지역도 있지만 ‘도련님’이 표준이다. 남편의 아우가 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 ‘첫째 도련님’, ‘둘째 도련님’처럼 서열을 넣어 호칭할 수도 있다. 그런데 흔히 남편의 아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전통적인 호칭이 있을 때는 자녀가 부르는 호칭인 ‘삼촌, 고모, 큰 엄마...’ 등과 같은 호칭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호칭하는 당사자의 삼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의 아우가 기혼일 때는 ‘서방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첫째 서방님, 둘째 서방님’처럼 서열을 넣어 호칭하기도 한다. 또한 남편의 아우를 부르거나 지칭할 때는, 시댁 쪽 사람에게 미혼자는 ‘도련님’, 기혼자는 ‘서방님’으로 지칭한다. 그러나 친정 쪽 사람에게는 ‘시동생’, 자녀가 있을 때는 ‘OO 작은 삼촌’, ‘OO 작은 아버지’ 등으로 지칭한다. 2. 남편 동생의 아내일 경우: 이런 경우도 며느리 사이의 관계 말인 ‘동서’로 호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에도 ‘여보게’, 자녀가 있을 때는 ‘OO 엄마’ 등으로 호칭할 수도 있으나 가족이 아닌 타인을 부르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적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동서’로 부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3. 남편의 누나와 여동생에 대한 경우: 당사자나 시댁 쪽 사람에게는 보통 ‘형님’으로 호칭한다. 친정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시누이’, ‘OO 고모’, 형님‘ 등으로 지칭한다. 남편의 여동생에 대한 호칭은 ‘아가씨, ‘아기씨’이다. 이 호칭은 남편의 여동생이 미혼이든 기혼이든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사용하기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전통적으로 사용된 말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친정 쪽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시누이’, ‘OO 고모’ 등으로 지칭한다. 4. 남편의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 대한 경우: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이 관계에 있어서는 엄격한 내외법이 있어서 직접 부를 일도 없었고, 적당한 호칭어도 없었다. 하지만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요즈음은 두 사람이 자리를 같이 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서로를 부르는 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버님’, ‘서방님’, ‘고모부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하나 다른 호칭들과 중복되는 일들이 많아서 표준호칭어를 만든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중에 있어서 아직은 정리된 호칭어가 없는 형편이다. 남편 여동생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전통적으로 ‘서방님’이다. 남편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이 ‘아주버님’, ‘아주버니’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서방님’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 호칭어로 된 경우이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이 살펴본 호칭과 지칭어만 보아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아주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다양성 속에서 어느 하나만을 택해서 꼭 같이 적용하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공동의 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동일하지 않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일은 가장 긴밀한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디서든지 이러한 적절한 호칭과 지칭어의 사용은 아름다운 사회를 형성해 가는 귀중한 잣대가 될 것이다. 이에 우리 모두 이런 문화 창조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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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박동철 장로] 이스라엘 -블레셋, 21세기 중동전쟁
    성경에 블레셋 족속은 창세기부터 주로 구약의 현장에 많이 나온다. 긴 역사와 함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숙적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인도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부터 이스라엘의 신약시대까지 블레셋과의 전쟁 이야기가 많다. 사사기에 잘 알려진 삼손이 사랑했던 들릴라가 블레셋 여자다. 다윗과 맞짱 뜬 골리앗이 블레셋 장군이다. 성경학자들은 이 블레셋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족으로 이어져 중동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비중 있게 설명한다. 여러 학설을 개략 정리하면 모세가 출애꿉하고 다음 지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블레셋은 가나안 토속족 중 한 족속으로 남아 이어진다. 이들은 이스라엘 북서 해양족들과 혼합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족으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이 많다. 역사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불과 며칠 전 발발한 중동전쟁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블레셋 족속의 종주 나라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 키부츠를 예고 없이 폭격했다. 2천 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는 일대 전쟁이 일어났다. 며칠 만에 세계 전쟁으로 확대될 것 같은 비상한 사태로 온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그동안 중동에서 큰 전쟁이 수차례 발생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제국의 21세기 전쟁역사를 쓰고 있다. 이번에도 미국을 비롯 서방세계와 중동 제국들 간의 대리전이 될듯하다. 지금껏 국지적 테러전은 자주 발생하고 있다. 특히 금세기 미국 9.11테러를 비롯 걸프전 등 중동 안팎에서 3차 세계 대전을 방불케하는 아찔한 전쟁 역사의 시간표를 가슴에 안고 있다. 이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지대 폭격이 크게 확전될까 걱정이다. 그동안 UN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 자치지구를 허용하고 긴장된 평화를 몇 년 동안 지켜왔다. 긴 역사 속에 숙적의 품속엔 칼을 버릴 수가 없었을까. 1948년 당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는 국가 인정을 받고 먼 옛날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의 숙원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쫓아냈다. 그리고 시온의 나라를 세웠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쫓겨난 팔레스타인들은 해방기구(PLO)를 만들어 끝없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테러와 전쟁으로 중동에 화약 냄새가 쉴 새 없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중동이 또다시 전쟁의 비극이 발생함으로써 지금 세계 각국에 정치·외교적 비상한 아젠더를 던지고 있다. 세계 각국의 대리전으로 확대되고 우크라이나 전쟁과 겹쳐 너무나도 우려와 걱정이 닥치고 있다. 국제외교 정치 기능이 살아나서 전쟁을 중지시키고 온 나라가 평화를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중동 전쟁은 오일 생산 거점 쟁탈을 위한 의도적 국지전 또는 테러 분쟁의 양상이었다. 이번 하마스의 폭격은 세계 패권을 지켜려는 미국 등 서방에 이란 등 중동 제국들이 도전하는 양상의 전쟁모습이다. 좀 더 우리는 기도하면서 지켜보고 오직 평화를 소망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먼 옛날 창세기 때 고대 중동 전쟁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 창세기 26장과 27장에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우물 이야기가 있다. 가나안에 정착한 아브라함 가족들이 거주하는 동안 흉년이 들었다. 가족들은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가는 동안 남쪽 블레셋 지역 그랄에 머물 때 우물을 팠다. 이때 시샘 많은 블레셋족들이 우물을 강탈했다. 첫 번째 아브라함 우물을 빼앗고 이어 이삭이 옮겨 판 우물도 빼앗았다. 이삭은 이들의 강취에 우물을 내어주고 또다시 옮겨 우물을 계속 팠다. 우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이삭의 우물을 블레셋이 강취하지 않았다. 어떻게 우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당시 우리가 알 수 없는 상황이 있었다고 본다. 많은 설교가들은 하나님이 함께할 때 화평이 있다고 한다. 이삭의 선한 우물 파기에 하나님이 블레셋 족속들에게 마음의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믿음의 족속 우리들은 분쟁과 전쟁에 먼저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과 마음이 중요함을 지금 중동 전쟁을 보면서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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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2
  • [박동철 장로] 추석명절을 한국의 추수감사절로 지키자
    추석 명절이 다가왔다. 벌써 귀성길 차량이 늘면서 일찍 성묘하는 발길도 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즐기는 추석 밥상을 위한 시장보기에 사람이 넘치고 있다. 우리의 고유명절 ‘추석’의 유래는 어디에서 일까. 매년 명절을 즐기긴 해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추석 명절은 삼국시대 신라 유리왕 때 가배(嘉俳)라는 길쌈 놀이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만 해도 우리의 옷 의류는 삼베가 유일했다. 삼베라는 천의 직조기술이 생겨난 때가 삼국시대라고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 얼마나 귀중한 생활품이었겠는가. 그래서 음력 팔월보름날 휘영청 보름달이 뜨는 때 동네별로 삼베길쌈 경연대회를 벌인다. 진 쪽에서 이긴 쪽에게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축일이 발전해서 오늘까지 한껏 즐기는 추석명절이 되어왔다. 이후 고려 때부터 무명 옷이 생겨나고 비단천이 창조 되긴 했다. 당시 삼베 천이 얼마나 귀중했냐하면 오랜 기간 화폐 수단으로 삼베가 통용되었다는 문헌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추석명절은 고려시대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추절(仲秋節) 한가위로 변화 발전 되고 미풍의 양속으로 이어져 왔다. 음력 팔월 보름은 대개 9월에 들어 있다. 우리의 주농 벼농사 수확시기보다 이르지만 일 년 농사 감사의 마음을 즐길 수 있는 지절(之節)이다. 추석명절은 많은 문화를 양산했다. 보름달 놀이, 강강수월래, 줄다리기, 씨름 등 참 좋은 전통 문화 놀이를 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상들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며 이어오는 문화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지키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전통의 좋은 문화야말로 우리의 공동체적 건강한 정신과 마음을 지켜내고 있다. 추석 대명절을 보낼 때 마다 느끼는 소회이다. 그런데 우리교회가 절기로 지키는 큰 명절 중 ‘추수감사주일’의 유래를 보면 획기적으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은 보통 11월 셋 째 주일을 지킨다. 그 유래는 미국에서 온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과 같이 한다. 그래서 같은 시기이다. 미국 국민이 지키는 추수감사주일도 개신교 교회에서 시작 됐다. 청교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미주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감사의 절기로 발전하여 미국의 추수감사주일로 전통화 했다. 캐나다를 비롯 주로 북미에서 추수감사주일은 지켜지며 11월 넷째 목요일부터 3일 동안 휴일로 쉬며 칠면조 고기를 먹고 즐긴다. 최근에는 블랙 프라이데이까지 만들어져 온통 축제와 즐기는 미국의 전통 문화가 되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주일은 성경에서 온 절기가 아니고 미국의 개신교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등 미주국민들이 지키는 절기를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제언이다. 우리는 전통으로 즐기는 추석 명절을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온 국민의 추수감사절로 문화화 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교회의 섬기는 문화에 추석명절에 더하여 이웃을 돌아보며 함께 전통 문화로 이었으면 아름다운 추석명절로 발전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강한 국력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다. 많은 다문화권 이주민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들과 함께 예수복음의 문화를 가꾸며 공동체적 전통의 풍습을 맛보고 즐기는 한국 추석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잘사는 대한민국 그 중심의 추석 명절에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이 넘쳐나는 복음적인 추석명절이 되어 옛말처럼 ‘더도 덜도 아닐 만큼 한가위만 같아라’는 모두가 함께하는 추석 명절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많은 문화이벤트가 함께 만들어져 이러한 명절문화가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 그리고 품격 높은 나라를 이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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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5
  • [박봉석 목사]무엇이 소중한가?
    화려한 옷과 보석 명품들을 좋아하는 유럽의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귀부인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모래폭풍을 만나서 사막에서 낙오가 됐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갑자가 저 앞쪽에서 한 물병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그 물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물병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몇 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탄식을 토했습니다. “아, 겨우 다이아몬드란 말인가?” 무엇입니까? 평소 같으면 눈이 뒤집혔을 그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보다 못했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파송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속이 바뀌고 나서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소중하다면 도대체 구원 받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돈이 가장 소중하고 세상의 입신양명이 소중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지금은 달라야 합니다. 이제는 영혼이 소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소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소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전에 내가 소중히 여기던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드리고 헌신할 줄 아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억만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다른 세상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던 별빛이 아침녘에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면 그 반짝거림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들도 예수님과 비교하면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세상의 귀한 것을 견주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상대적으로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을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잃을 수가 없고, 그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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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오성한 목사] 말씀과 귀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말이다. 주의하는 것이나 귀를 기울이는 거나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있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이다. 성령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마지막 부탁을 반복하심을 볼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8번이나 표현을 달리 하시면서 반복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반복 말씀하신다. 반복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집중하는 일은 믿음 생활에 중심이다. 말씀을 묵상해서 깨달아지면 입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이 틀림없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아 지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손을 올리고 싶어지고 마음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귀를 무엇을 향해 기울이라고 했나?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하나님이 말에 열라. 자동차 엔진이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가 나서 집중하면 그 소리가 들린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는 설명할 수 없다. 말씀은 생명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오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어떻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역사하는지, 방언을 하는지, 거듭나는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 신유를 일으키는지는 알고 있다. 믿음이 그렇게 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병 고침을 일어나게 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말씀을 먹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믿음은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거듭날 때 온전한 믿음을 이미 주셨다(엡2:8). 말씀을 먹으면 믿음이 스트롭(stirrup)된다. 스트롭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을 휘 저어서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소죽을 끊일 때 설거지물을 받아 두었다가 휘 저어서 끊였다. 우리에게 이미 예수를 믿을 때 놀라운 믿음이 다 와있다. 이미 와 있는 믿음을 스트롭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넣고 “아멘”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멘하면 스트롭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의로움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 남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잘 살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믿어야 한다. 의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의로움이 상실 되었다. 주님이 이루어 주신 놀라운 사실로 풍성한 사람은 행함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믿음의 행함은 저절로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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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오태열 목사]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사랑은 종족 번식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뛴다. 친구를 만나면 이런 감정은 없다. 호르몬 분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정은 첫눈에 반해서도 운명적 만남도 아니다. 한 동네 학교 직장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 두고 정겹게 사귀어 온 벗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강력한 감정이 있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학자 J, Tooby와 진화심리학자 L. Cosmides 부부의 공동연구인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Friendship and the Banker`s Paradox)에서 우정과 은행이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은행이란 돈을 빌려주어야 이익을 남기는 곳이다. 은행은 모든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를 통해 재산이 많고 신용이 좋은 부자들에게 저금리로 빌려준다. 부자들은 생계 목적이 아닌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린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 한다. 그러나 은행은 돈을 떼일 우려 때문에 신용과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대출금을 무자비하게 회수해 버리는 사람들이 은행가들이다. 돈이 필요 없을 때는 제발 돈 좀 빌려 쓰라 하던 그들은 막상 돈이 필요할 때는 입을 싹 닦고 매정하게 회수해 가버린다. 우정도 은행가들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잘 나갈 때는 친구 사이에 우정도 호의도 넘쳐흐른다. 그런데 우정이 가장 절실하고 도움이 간절할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류가 사회를 만드는 순간, 구성원들 사이에 우정의 네트워크가 생기는 것은 사냥과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153부족 간의 전쟁 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익 가치 중심적 사고”를 가졌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도와줄 친구를 찾는다. 사회구성원들 가운데는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강한 사람, 힘이 없고 사냥을 못 하는 약한 사람이 있다. Net Work를 구성할 때 사람들은 누구와 친구를 하고 싶을까? Tooby는 사회적 강자 중심으로 우정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수렵을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오히려 친구가 되는 일에서 배제된다. 정작 생존을 위해 우정이 절실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들인데 힘센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 우정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은행가의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관피아, 특히 검찰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검사는 늘 재벌과 보수 세력들이 형성한 강자들의 우정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검찰 개혁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가진 힘을 지키기 위해서다. 검찰 개혁은 강자들의 네트워크를 와해하고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 경제학의 창시자 J. F. Walliel은 행복의 6가지 조건을 돈, 건강, 자주적 삶의 선택권, 공동체성, 우정, 사회의 투명성이라 하였다. 이 중 우정을 행복의 조건 중 제일로 들었다. 웰리엘이 말하는 우정은 잘 나갈 때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이런 친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바닷물에 빠진 친구에게 밧줄이나 구명튜브는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지만 허우적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물에 뛰어드는 친구, 일시적 어려움에 처한 친구는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지만,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그때부터 계산은 달라진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쳐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안다. 옛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주색잡기를 일삼고 친구 많다고 자랑하는 아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거적에 말고 아들과 함께 지게에 지고 아들 친구들 집마다 찾아가서 실수로 살인하여 시체를 암매장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외면하더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인생이다. 혼자 가면 외롭고 힘이 든다. 함께 동행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고난에 처할 때 함께 해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더욱 고독하다. 맹수사냥을 하러 함께 나갈 때 내 옆자리를 지켜주는,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던져가며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우정이 없어 고독하다. 망년회, 신년회, 동창회라는 각종 모임을 빙자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해외여행을 가도 본질적인 외로움은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강도, 폭행, 살인, 약탈 등,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의 역할을 이젠 경찰이 대신한다. 한해 농사를 망쳐 처자식을 굶기게 되면 곳간을 털어주던 우정 역시 복지제도가 대신하고 있다. 조상이 살던 환경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럴수록 더 불안에 떨고 고독해 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잘 나가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 실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오늘의 나를 기꺼이 지켜줄 친구가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또 누가 나에게 그런 친구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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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조희완 목사] 에녹의 신앙 (창5:21-24)
    53억 원을 내고 점심 한 끼를 먹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사람이 서로 그 돈을 내려고 경쟁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인 eBay에서 <워랜 버핏>과의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붙이고 있는데, 금년에는 무려 460만 달러(약5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암호 화폐인 트론 CEO 중국계 미국인 <저스틴 선>씨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4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워랜 버핏>과 함께 한 끼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워랜 버핏>은 매년 자신과의 한 끼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부쳐서 그 수익금 전액을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는 것은 이 시대에 그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명 “투자의 귀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최고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역시 그가 최고의 VIP인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VIP로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우러러 보는 VIP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VIP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신앙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믿음의 인물로 여겨집니다. 첫째로, 그는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5:21-22) 둘째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히11:5-6)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입니다.(유1:14-15) 우리 모두 에녹의 신앙을 본 받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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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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