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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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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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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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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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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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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2-28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4) (민12:1-3)
    비방의 대명사인 미리암이 죽자마자 또 안타깝게도 우리가 잘 아는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20:10-11)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모세도 사람인지라 화가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민20: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다. (민20:24)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신앙의 정통과 생활을 순결을 실천하기 위하여 순교정신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의 직분을 받은 목사와 장로, 집사, 권사는 명심에 명심을 해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석에서 물을 냈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석에 물을 내었는데도 모세와 아론처럼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매우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교회와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핵심은 오직 하나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이라도 내가 한다는 생각을, 내가 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자신의 공로를 첨가하고, 숟가락을 얹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물을 내는 것처럼 반석을 두들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리고, 주어진 직분에 따라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는 자들은 목사와 장로일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특히 코람데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정신을 강조하할수록 “내가, 내, 나”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미리암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오늘날 교회를 적용하여 쉽게 풀어보면 장로와 권사가 같이 목사를 비방했는데 문둥병에는 권사만 걸렸다는 말입니다.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고 많습니다. 여자의 사명이 돕는 것, 살리는 것과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미리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사명은 남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를 돕는 배필로서의 사명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것으로 망각할 때 문둥병에 걸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척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의 변질된 말은 물론이요, 속마음의 말들까지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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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2)
    한 국가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기독교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 문제다.특히 국가 정책의 결정이나 교회 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 지도자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하다.그가 설령 기독교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명목상의 신자인지,아니면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을 정책의 입안과 실천에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실질적인 그리스도인 지도자인지 하는 문제는 공의와 평화의 사회를 꿈꾸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모두의 자연스러운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다.이러한 문제 의식을 배경으로 우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그 진정성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볼 만한 문제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당시 로마에는 성육신 하신 인간 예수는 천사장이라고 하는아리우스(Arius)의 주장과그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주장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오늘날 튀르키에(터키)의 니케아(Nicea)에서 로마제국 전역의 주교 모임을 소집했는데, 이 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이 결정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정통” 입장이 되었다.여기서 문제는 콘스탄티누스가 도나투스파와 니케아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황제로서 자신의 뜻을 교회에 어느 정도 강요하려고 했는지 하는 것이다. 그가 황제로서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고 어떤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통합되는 조건을 지시하려고 했는가 하는 문제는 아주 논란이 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교국가인 로마에서 사람들이 그들의 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단순히 이 전통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황제에 대한 교회의 유일한 모델은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이었는데, 그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도록 돌볼 책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도나투스파들이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접근했지 황제가 이들에게 접근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정의 결정이 도나투스파들에게 불리하자 이들은 폭동을 시작했고, 어떤 정부도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임자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주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상처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정치적인 연극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또한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했던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말하도록 유순하게 허용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콘스탄티누스는 아마도 참된 교리를 결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하려고 노력했을 뿐 자신이 소집한 교회 협의회의 결정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또 다른 요소는 그가 어머니 헬레나를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으로 보내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유물을 정밀하게 조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의 완전한 개종을 향해 가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어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임종할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주 지적하며, 이 때문에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믿었지만,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고,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서 나중에 망칠 기회가 없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신학은 이것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지점까지 발전했지만,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임종 때 세례를 받는 것이 신앙 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신앙에로의 개종을 어떻게 평가하든 황제로서 그의 행동은 기독교와 제국 모두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가장 눈에 띄는 효과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박해받는 소수 종교에서 황제가 선호하는 신앙으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유대를 강하게 형성했다. 정부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교회와 기꺼이 협력하고 상호작용하려는 의지를 보였다.당시에는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고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신에 대한 이교도들의 기본 개념 역시 신들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보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하다. 따라서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교회의 이해관계가 국가의 이익과 충돌하는 영역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의 제도적 구조, 권한, 책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우리는 교회가 정부와 우호적으로 강하게 밀착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지 그 역사적 교훈까지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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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8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3) (민12:1-3)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린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사건은 미리암이 주도한 것 같습니다. 특이한 것은 성경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당한 이유를 근거로 모세를 비방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리암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원망하고 비방할 때는 반드시 나름대로 신앙적인 명분을 내세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무도 당연한 표현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떠나 있는 동안 여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한 미리암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거나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앙적인 명분을 제시하다 보니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치 그 원망과 비방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착각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다 보니 비방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최면에 걸려듭니다. 실상은 자기 최면이 아니라 사탄의 최면입니다.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를 비방하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모세를 비방하는 자신이 무슨 대단한 희생을 하고 십자가를 진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국에는 자신만이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와 다른 생각은 무조건 다 틀렸다고 여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섞여 사는 다른 인종(잘못된 신앙)을 통하여 받은 미혹으로 나타납니다. 원망은 생물과 같아서 쓴 뿌리처럼 자라고 암의 균처럼 전이가 됩니다. 원망은 바이러스와 같이 변종이 만들어지고, 확산하고, 강력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은 비방으로 확산되고, 여론과 정서를 장악합니다. 모세를 향한 비방은 모세를 도우라고 세운 받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오히려 모세에게 짐을 더 무겁게 하는 결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하는 원망은 반드시 비방으로 발전하고, 그다음은 반역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은 문둥병에 걸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씨와 잔재는 곰팡이와 바이러스처럼 숨어 있다가 반역으로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민16장에 와서 그 유명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과 온의 반역이 등장합니다. (민16:1-3)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분위기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고, 정서를 결집하여 당을 짓습니다. 힘이 모여지면 이제 본격적으로 모세와 아론을 거스릅니다. 그렇게 하는 명분과 근거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특이한 것은 이 일은 아론이 나서서 수습하게 됩니다.(민16:49-50) 이 일 후에 아론의 제사장직이 구체화됩니다. 위대한 제사장 직분이 구체화 되자마자 미리암이 죽습니다. 이런 장면도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제사장의 직분이 구체화 되고 미리암이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20:1)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문제는 미리암이 죽었다고 해서 불신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이 죽자마자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20:2)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 미리암은 죽었는데 그녀로 인하여 고개를 들었던 원망과 비방은 죽지 않았습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에 원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히 발견하게 합니다. (빌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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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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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9-21
  • [김성수 총장] 아직도 남아 있는 영지주의 잔재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성경적 가르침에 따라서 사고하고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도 그러했다. 당시에 맹위를 떨쳤던 소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창조세계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했고, 유대교 세계관의 많은 요소들 중에서 성경과 부합하는 관점들을 계속적으로 견지하면서 가르쳤다. 그러나 기독교의 어떤 분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늘날 영지주의로 알려진 분파다. 그 명칭이 헬라어 “그노시스”(gnosis, 지식)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이 집단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비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 집단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연합하여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지 않으신 그분의 비밀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영지주의 복음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가 기록된 후인 2세기에서 5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영지주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도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적 경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가 영적 세계보다 단순히 열등한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악하다고 믿었다. 가장 분명한 예 중 하나는 유대교 성경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유대교나 구약성경을 결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완전히 이교적인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의 극단적인 형태에서 끌어낸 틀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였던 예수의 예상치 못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자들의 저술들을 보면 유대교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지만, 있다고 해도 그것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다. 실제로, 일부 영지주의 텍스트는 구약의 신을 하나님을 발산해 내는 주요 계열에서 악한 분파로 묘사하고 있다. 이 유대교의 유일한 신이라는 하나님은 무지하고 사악하다. 그 이유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한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실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물질 세계를 악한 세계로 보는 극단적인 이원론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원론은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실제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영지주의 저작물은 섹스와 결혼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출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출산은 결코 축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한 정신(영혼)을 본질적으로 악한 몸(물질)에 가두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한 가지 예로서, <도전자 토마스의 책>(The Book of Thomas the Contender)은 영지주의 학자인 카렌 킹(Karen L. King)이 요약한 바와 같이 “육체에 대한 애착과 성행위에 대해 정죄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 영지주의자들은 주류 교회보다, 적어도 그들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훨씬 더 금욕적인 경향을 보여 주었다. 영지주의적 세계관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성에 대한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영지주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다. 혹 예외적으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성행위를 금하고 여성성(femininity)을 부인할 때만 가능했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 토마스 복음서>(the Gnostic gospel of Thomas) 114장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되, 여자는 생명을 얻을 자격이 없으니 ‘마리아[막달레나]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친히 그 여자를 이끌어 남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너희 남자들을 닮은 산 영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스스로 남자가 되게 하는 모든 여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지주의는 당시에도 결코 널리 퍼진 운동이 되지는 못했다. 이 운동은 주로 지중해 동부, 특히 이집트에 흩어져 있던 고립된 공동체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한 영향력 때문에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이들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을 반박하는 글들을 많이 저술했다. 최근까지도 우리가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이들 변증론자들의 글에서 나온 글들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본 발견으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변증론자들의 글들이 아주 정확하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오늘 성경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삶에도 아직 영지주의의 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 잔재들을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개혁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당시에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하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변증의 방법이 성경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교적인 사상에 대항해서 영지주의자들이 취했던 기독교적 피상적 겉치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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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 (민12:1-3)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성경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면, 미리암과 아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모세를 비방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 딱 걸렸다는 뜻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숨겨진 비밀이 있는데, 어느 누구도 미리암과 아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있다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생뚱맞게 모세의 온유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무슨 상황일까요? 성경이 의도하는 사건의 진행은 무엇일까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사건이 모세가 온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모세는 누나와 형에 대해서 끝까지 참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먼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시점을 살펴봅시다. 바로 앞장에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낸 모세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70명의 지도자, 장로를 세워 이스라엘을 지도하는 일에 모세가 져야 할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기록상 다음으로 발생한 사건이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에 대한 비방을 누구에게 했을 것 같습니까? 구스 여자를 취한 모세에 대해서 미리암과 아론은 누구에게 비방하였겠습니까? 만약 동생 모세에게 허점과 잘못과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누나로서 형으로서 모세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비방이 아닙니다. 그것은 충고요, 충실한 충신들이 할 수 있는 멋진 행동입니다. 그런데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 말을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미리암과 아론을 비롯하여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70명의 지도자,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70명의 장로들도 그 비방에 동참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미리암은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의 여론과 정서를 조장하고 충동한 것입니다. 일반 백성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분위기를 조성해도 뒤숭숭한데, 백성들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으니 이스라엘을 이끌어가고 있는 모세에게는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습니까?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지도자, 장로들도 무시하지 못할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70명의 장로들이 세워지기 전에는 모세 좌우에 항상 미리암과 아론이 있었을 것입니다. 형 아론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통치를 위해 세워주신 인물입니다.(출4:14-16) 형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모세의 입이었고, 대변자였고, 모세와 같은 인물입니다. 아론이 모세를 대신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은 비록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세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입니다. 누나 미리암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는 수많은 여성을 돌아보며 여성들을 대변하며, 모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미리암과 아론이 새롭게 세워진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장로들에게 모세를 비방했다면 그 여파는 어떨 것 같습니까? 거기에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내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아론과 70명의 장로들의 반응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비방과 건의는 차원이 다릅니다. 건의와 충고,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비방하기 전에 하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을 위하여 한다고 하니 70명의 장로들과 대부분의 백성들은 당연히 그런 줄 착각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성도들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하고 여론을 호도하고, 잘못된 정서를 만드는 것이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비방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여론이 확산이 되고, 정서가 만들어지면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에 대한 대적이요, 반역을 도모하는 최후통첩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비방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설교자들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미혹하는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다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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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김성수 총장] 그분의 나라를 위한 변증
    타락한 인간이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살다 보면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기도하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써야 할 경우도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오해나 누명은 상대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지만 공격자 자신의 이익 추구를 위해 악의적인 왜곡이나 모함에 기인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빛의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으로 진리의 세계를 공격한다. 이런 경우를 만날 때 우리 모두는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증거 자료들을 제시해 가면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변증한다. 신앙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이교세력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공격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공격을 받았을 때 기독교인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무력이나 힘으로 변호한 것이 아니라 사상(ideas)을 가지고 변호했다. 오늘날 “변증론자들”(Apologists)로 알려진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공격을 반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예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성찬의 언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식인종이라는 잘못된 주장, 또는 기독교인들이 난교를 벌인다는 비난과 같은 공격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았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이방세계와 이방신들의 부도덕함에 맞서 공세를 펼치고, 성취된 예언을 근거로 기독교의 진리를 논증하고 최후의 심판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변증론자들은 헬라 철학에서 가져온 용어를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사실 최초의 변증가 중 한 사람인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철학자의 외투를 입고 자신의 가르침을 진정한 철학, 즉 예수 그리스도의 철학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와 다른 이교적 사상을 기독교에 통합하는 작은 발걸음이었다. 가장 분명한 예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이용하여 창조세계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논의한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단일자”(One)가 만물의 기원이라고 믿었는데, 이것은 ‘말씀’, ‘논리’ 또는 ‘이성’인 로고스(logos) 라고 보았다. 이 개념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유대 사상과 결합되었으며, 결국 이교적인 우주론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주후 5세기 후반 위(僞) 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의 글을 통해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적 영향은 기독교에 여러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그것은 성경에 대한 보다 우화적인 접근을 장려했는데, 이는 본문의 특수한 문자적 의미가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자가 가리키는 더 깊은 보편적인 영적 의미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영적 세계를 위해 물리적 세계를 덜 강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는 계속해서 가난한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돌보았지만 순교를 점점 더 강조하기 시작했고, 만약 순교하지 못할 경우에는 가난, 고독, 특히 처녀성과 같은 금욕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유대주의 사상에는 성(sexuality)과 영성(spirituality)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이교도에는 성전 매춘의 형태나 로마의 베스타신녀들(Vestal Virgins, 영원한 정결을 맹세하고 성화를 지킨 6명의 처녀들)처럼 완전한 금욕의 형태로 성과 영성을 관계지우고 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사상이 기독교 신앙과 관습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순결은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영구적인 고결한 삶의 상태로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헬라의 여성혐오적인 가치관과 태도 역시 서서히 교회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성은 성적으로 집착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을 갖고 있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본능적인 충동을 통제함으로써 본성에 반하는 행동, 즉 처녀가 됨으로서만 거룩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나중 기독교가 합법화 된 후에 더욱 완전한 사상체계로 발전되어갔지만 여성에 관한 비 성경적인 사상의 중요한 요소는 이미 일찍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예들은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에 대한 외부 세계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 체계를 변호할 때도 철저하게 성경적인 방어가 될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교적인 세상 문화 속에서 고립되기 않고 선교적 대면을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요한과 바울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요한은 물질세계와 영원한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중재자로서의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의 접촉점을 사용하면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잘 가르쳤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의 연설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을 매개체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져 있는 사상과 문화의 융단폭격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신앙공동체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우리의 성경적 신앙을 순수하게 잘 지키고 변증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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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민12:1-3)
    애굽의 심장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출애굽에 대한 준비를 마친 모세는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일을 착수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셔서 훈련 시키고 때가 되어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을 성취하시려고 움직이셨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상상도 못 한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비방이었습니다. (출2:14)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비방 때문에 “일이 탄로되었도다”하고 합니다. 바로는 “그 일”을 알게 되었을 때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출2:15)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우리는 그 일을 모세가 애굽 사람 죽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2:11-12)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세계최강의 대국이요, 신의 위치에 있는 애굽의 왕족입니다. 그 제국의 왕자가 애굽 사람 하나 죽였다고 바로가 왕자를 죽이려고 한다는 설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음주운전이나 마약에 마취가 되어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을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의 위치에 있는 애굽의 왕자가 사람 한 명 죽였다고 사형시킨다면 이해가 됩니까? 그것도 절대 왕권시대에 말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바로가 죽이려 하니 미디안으로 도망갔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모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11: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가 미디안으로 간 것이 “믿음으로”라고 합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고 합니다. 모세는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세가 참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모세는 바로 지금이 최고의 타이밍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아시고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창조의 사역이 끝나자 바로 선악과 사건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기대가 무너져버린 것처럼 40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이제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원망과 비방으로 차질이 생겨버렸습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참아야 했습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힘으로 참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이제 그 일이 탄로가 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탄로 난 그 일” “발각이 난 그 일”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한 그 일”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원망과 비방은 그 일을 탄로 나게 했습니다. 그 일을 발각 나게 했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모세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원망과 비방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출애굽의 역사를 40년 동안 지연시키게 했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은 신앙적입니다. 미리암의 가정이 어떤 가정입니까? 수백 년이라는 애굽에서 생활 가운데서도 “레위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출2:1) 이런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가진 집안입니다. 그러니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 정신에 대해 잘 모르고, 지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막상 그 문제가 대두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들이 음주운전을 해도 아버지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합니다. 언젠가 저희 교회 장로님께서 결혼기에 있는 딸에게 “네가 만약 불신 결혼을 하면 난 장로직을 사면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지도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미리암의 원망과 비방이 정당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세조차도 정곡을 찔러오는 미리암의 지적에 입도 벙긋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리암이 어떤 의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주장하고 있는지 평소의 미리암을 아는 사람들은 미리암의 비방에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헷갈리지 않으십니다. 정확하게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생각까지도, 그 의도까지도 정확하게 다 들으시고 판단하십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 대 제사장은 말씀을 맡은 자부심으로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는 줄 알았지만 결국 그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 입만 열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순교신앙을 외치지만 그 속에 무슨 생각,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헷갈리지 않으시고, 속지 않으십니다. 아니 모세가 하려고 했던 “그 일”을 탄로나게 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했던 “그 일”을 40년 동안 지연시키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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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 [김성수 총장]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고하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삶의 실제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기독교인들은 노예 제도에 조직적으로 반대한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노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시장에서 노예를 구입했다. 나중에 7세기경에 프랑크족(서독과 프랑스를 지배한 게르만 민족)은 기독교 여왕인 바틸데(Bathilde)의 영향을 받아 역사상 최초로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 과정을 시작한 왕국이 되었다. 중세 중간까지 카톨릭 교회는 전쟁 배상금으로 잡힌 무슬림 포로를 제외하고 서유럽에서 노예 제도를 거의 폐지했다. 1200년대에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노예제도를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민족, 성별, 사회적 차별을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 내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 제국을 이교주의로 되돌리려 했던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황제는 극심한 기근 동안 “이 불경한 갈릴리인[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까지도 지원한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의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쨌든 죽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우선, 그들은 죽음은 자신들을 결국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교도들이 제시한 것과는 매우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남을 위해 행하는 희생적인 봉사에서 의미 있는 삶의 길을 찾았다. 이와 같은 믿음과 행함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은 큰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를 간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역병이 도시를 황폐화시켰을 때 이렇게 보고하였다:우리 형제들 대부분은 지극한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는데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굳게 잡고 두려움 없이 병자들을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고통을 짊어지고 병든 이웃들과 가까이 하면서 기꺼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과 함께 가장 즐겁게 죽기도 했습니다. 병자들을 돌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꺼이 자기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기본적인 간호조차도 사람들이 낫도록 돕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봉사로 인해 병자들의 생존율이 높아졌다. 로마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인들을 세대를 본받지 않는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로 만들었다. 그리고 로마와 같은 관용주의 사회에서 관용의 범위를 벗어난 비 순응주의자들이 치루어야 할 대가는 사형 선고였다. 주후 50년대 이후 기독교인들은 황제에게 분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체제 전복자들이고, 로마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라는 법적 주장에 따라 산발적으로 박해와 고문, 살해를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박해받는 기간 동안에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을 막론하고 가능한 한 고통스럽고, 비뚤어지고, 재미있도록 고안된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은 군중들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싸우지 않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학대에 비굴하거나 겁먹기를 거부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을 거스르는 복음의 능력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면에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 기독교인들에게서 죽음에 다가가는 자신감을 보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도 모질게 경멸받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목적과 자신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교 세계에서 기독교는 인기 없는 소수 종교로 남아 있었지만, 복음의 능력은 인색한 존경을 받으면서도 세상을 이기며 성장하는 생명의 종교로 만들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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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9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민11:1-2)
    민수기 11장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원망이 시작됩니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한 말이 악하고, 원망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만한 “악한 말로 원망”이었습니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들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보면, 핏대를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리치면서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나 생각은 고사하고 지금 자기 입에서 내뱉는 말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진영 끝을 사르고, 모세가 기도하여 불이 꺼집니다. 이어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의 탐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휘둘려 또 원망합니다. 이번에 울고불고 난리를 부립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왜 날 낳았냐고!)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고불고 달래고, 울고불고 달래고 한 모양입니다. 급기야 원망의 코로나는 온 백성을 감염시켜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이라고 아주 재미있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모세도 속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속 상하는 것에 연연할 상황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악한 말로 원망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불이 나타났다면, 지금 울고불고 난리가 난 상황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살이 날 상황, 끝장날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선 모세는 매우 불길한 결과를 짐작하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기분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새끼가 애를 먹여도 애를 먹이면 먹일수록,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모세는 이 난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모세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장의 무기를 꺼냅니다. 이전 우리 어머니들이 엄하신 아버지에게 내놓던 비장의 카드와 같습니다. 애먹이는 아들에 대해 더 이상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어머니는 마지막 수를 내놓습니다. “내 새끼요? 당신 새끼지! 내 씨요? 당신 씨지! 저놈이 내 성을 따랐소? 당신 성을 따랐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소! 그 전에 날 먼저 죽이고 맘대로 하소!” 모세는 이런 어머니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목을 내놓습니다. (민11:15)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어머니가 거품을 물고 이 정도 나오면 아무리 엄한 아버지라도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팽개치고선 괜히 죄 없는 문을 부서지라 쾅! 닫고 나가버립니다. 진노가 심히 크셨던 하나님께서도 똑같으십니다. “알았다, 몰랐다, 잘했다, 못했다” 언급조차 없으십니다. 앞뒤 문맥에도 맞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생뚱맞게 모세를 도와줄, 아니 모세를 살려줄 70명의 장로를 세우십니다. (민11:16-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배필의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했습니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돕는 배필의 사명은 살리는 일입니다.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정말로 죽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참 순진하신 분이십니다. 속내가 너무도 다 들여다보이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진노가 하늘에 닿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는 쩔쩔매시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분입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십니다. 심판하셔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사랑이 확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실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때, 믿음의 족장들이, 선지자들이, 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목사들의 사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모세를 보시고 일언반구도, 가타부타도 없으시고 상황을 종료해 버리시는 속이 다 들여다보이시는 너무도 순진하시고 한량없이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들으신다는 말씀은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좀 알아달라는 하나님의 애닯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납니다. 목사의 말을 들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면, 그것은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한다면 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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