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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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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인간 삶에 대한 통합된 성경적 관점
만약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전담 봉사’(full-time service)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왔다. 그래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순위였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선택이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다고 느끼면, 우리는 ‘차선’의 선택에 만족하고 간호사, 의사 또는 사회복지사가 되거나 다른 돌봄 직업 중 하나의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미 소위 ‘세속적인’ 직업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전담 기독교 사역’에 대한 관심이 커질 때도 많이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겪는 격변이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현재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게 되고, 우리의 직장은 우리의 선교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교 활동은 두 가지 주요 목표로 구성된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기준을 유지하는 것(또는 적어도 우리의 도덕적 결점을 숨기는 것!)과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로 천국에 가기 위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선교적 활동의 결과가 실망스러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때로 직장 동료들을 우리 자신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직장에서의 근무 시간 외에 소위 ‘주님의 일’(Lord’s work)을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성경 공부 그룹을 인도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데 지난몇 세기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편협하게 도덕적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져 있는 기독교처럼 보이는 신앙 방식을 거부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특정 직업과 활동을 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향유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이 더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과 복음 전도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오로지 내세에만 맞추어져서는 안되며, 직업은 영성의 위계 질서에 속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 있을지라도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 소위 경건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너무 속하고 굴복하여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를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적인 삶이냐 아니면 세상에 속하는 삶이냐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부적절한 선택지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소위 ‘거룩한’것과 ‘세속적’인 삶이라는 두 가지 양립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누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신성한 영역으로 물러나 문화적으로 무관하게 되거나, 아니면 현대 세속주의자들의 관점과 함께 세상에 굴복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되는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을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 않는 통합된 성경적 관점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적인 주권 아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문화적으로 적절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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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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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세계관과 신앙교육
오늘날 우리 모두는 학교 교육은 물론, 심지어는 교회의 신앙교육에 있어서도 위기를 감지하고 있다. 교실의 위기와 학교교육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이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다. 이러한 시점에서 언약의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는 다시 한번 더 개혁주의 관점에서 교육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더 음미해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러 가지 말들로 개혁주의 교육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개혁주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제도교회의 영역에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유지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롬11:36).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재를 고백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 실재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구속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통치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full-time)의 왕국 봉사를 하도록 요청하신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표현과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것’(This is mine)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영역은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혁주의 원리는 교회의 신앙 교육뿐 만 아니라, 가정 교육, 학교 교육, 그리고 사회 교육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권 하에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교회의 신앙 교육은 아동 및 청소년들로 하여금 상업, 정치, 과학, 예술, 의학, 연극 영화, 음악, 저널리즘, 그리고 기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풀 타임의 왕국 봉사자들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신앙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포괄적이며 보편적, 우주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창조의 성경적 의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타락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 세계의 한 구석도 빠짐없이 철저히 영향을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타락만큼이나 그 범위가 넓다. 앨버트 월터스(Albert Wolters)의 표현대로 창조의 지평은 동시에 죄의 지평이며, 또한 구원의 지평이다. 개혁주의 세계관이 강조하는 신앙 교육의 한 기본 원리는 한편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우주의 구조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 신비로움, 곧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질서에 순응하고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세상 속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갈 수 있는 능력의 함양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되 단순히 분리된 조각들로 가르치거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답들을 성경에서 찾도록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성경적 지침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개혁주의 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개혁주의의 위대한 원칙을 결코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창조 세계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빛을 제공해 주는 성경의 역할, 비유컨대 ‘광부의 전등’과 같은 성경의 역할을 강조한다.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교육은 인간 타락의 영향이 철저하며 창조 세계의 전 영역에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교육한다. 그러나 동시에 죄는 창조 세계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도 아니며, 창조와 일치하는 것도 아님을 가르친다. 요컨대 구조(structure)와 방향(direction)의 의미를 분명히 숙지하도록 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구조란 창조의 질서 즉, 어떤 사물의 불변적 창조 구조, 혹은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이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이란 죄와 구속의 질서 즉,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주의 구속과 회복을 지칭한다.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교육의 한 중요한 특징이다. 개혁주의 교육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은 창조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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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4) (민12:1-3)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오히려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직분과 사명 때문에 원망 거리를 찾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할 때부터 직분과 사명을 망각한 미리암의 원망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어도 깜짝 놀래고 정신을 차리는 것이 기본입니다. 원망과 불평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역사가 확연하게 드러나면 멈추는 것이 상식입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고, 오리무중이고,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될 때야 혹 의심도 생기고, 불신도 생기고, 원망이나 불평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인정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눈앞에서 나타난다면 성도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무서워서라도 하던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리암은 한평생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학수고대하며 살았습니다. 미리암은 어릴 때부터 동생 모세가 그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미리암은 목숨을 걸고 동생 모세를 살렸습니다. 모세가 후일을 도모하고 애굽을 떠난 40년의 세월 동안 미리암은 선지자가 되어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돌보았습니다. 미리암은 모세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10가지 기적이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미리암이 몰라서, 애매해서, 헷갈려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단순한 비방 같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비방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혹 모세는 넘어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넘어가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목회자가 하는 일이나 교회 일에 불구경하는 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교회가 함께 나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기준이나 주장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통해 교회가 집중하는 일보다 자신의 강조점을 우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하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이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 분명한 명분도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복음과 교회를 위한 사명도 매우 중요한 사역이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할 때는 자신이 하던 그 어떤 일도 멈추고 그 일을 우선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소천하셨습니다.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릅니다. 가야 합니다. 인륜지대사로 부모님의 장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도는 여호와의 구름이 떠오르면 이삿짐을 사야 합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토를 달고, 그것에 맞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유를 달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호와의 구름이 이 상황에 떠오르느냐고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원망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역사의 진행에 원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반역을 고개를 쳐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분명한 일에는 그 어떤 원망도, 원망은 흉내도 내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 중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것처럼 귀하지 않은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시는 일이 최우선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역사하심에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도 자신의 기호에 따라 무관심하다거나 반대의 길을 걸으면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길과 목회자의 교회를 위한 방침에 무관심한 자는 혹시 그것이 나름 자신의 신앙적인 결단과 믿음을 향한 일이라 할지라도 미리암이 될 위험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성경은 미리암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함께 하는 자들은 원망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나아가는 복음의 물줄기에 역행하니 당연히 원망이 생깁니다. 세상의 물줄기는 역행을 해야 시궁창으로 빠지지 않고 하늘로 비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늘을 향하는 복음과 교회를 역행하면 땅으로, 지옥으로 빠지게 됩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찬송하는데 자신은 기도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교회가 다 함께 기도하는데 자신은 찬송한다면 그것도 위험합니다. 이런 것들도 위험한데 감사해야 할 상황에 원망 거리를 찾는다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원망들은 결국에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으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정당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심을 잊어선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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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어린이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지난 호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구비 시켜 주는 사역은 가능하면 어린 시절에 시작하고 기초를 놓아주어야 할 중요성을 강조한바 있다. 그렇다면 아동 및 청소년의 신앙과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미국 바나(Barna) 연구소의 조사 연구자들도 이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어서 602명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모님 외에 롤 모델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설문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바나 연구소의 이 연구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다섯 그룹은 ①부모 ②다른 가족 구성원(일반적으로 조부모) ③교사 및 코치 ⑤친구 ⑥목회자 또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부모 다음으로 아동들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조부모라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목회자나 또래 집단 또는 교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동 및 청소년들의 삶에 미치는 가장 큰 두 가지 영향력은 모두 가정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도록 돕는 주요 수단으로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자도의 훈련을 계획하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 세 번째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교육자다. 교육은 가정 다음으로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래 집단의 영향력도 영향력을 미치는 목록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바나 연구소의 추후 연구에서는 이들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실제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시켜주고 있다. 교회는 젊은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연구 결과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교회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교회의 울타리 너머로 확장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십대들에게 특정 인물을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했다. “그 사람은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들은 젊은이들의 가치관과 역할 모델로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젊은 세대의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자신을 보살펴 주는 사람들을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아주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삶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바나 연구소의 연구가 보여주는 다섯 가지 영향력을 살펴보면 비로 이 논리를 따르고 있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생 동안 젊은이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어린 아이들은 인생의 초기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그대로 흡수한다. 사람의 신념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유전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바로 그 사람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누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를 선택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삶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전11:1)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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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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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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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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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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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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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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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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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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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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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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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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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
-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권고하였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삶의 실제를 우리는 여러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기독교인들은 노예 제도에 조직적으로 반대한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노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시장에서 노예를 구입했다. 나중에 7세기경에 프랑크족(서독과 프랑스를 지배한 게르만 민족)은 기독교 여왕인 바틸데(Bathilde)의 영향을 받아 역사상 최초로 노예 제도를 금지하는 과정을 시작한 왕국이 되었다. 중세 중간까지 카톨릭 교회는 전쟁 배상금으로 잡힌 무슬림 포로를 제외하고 서유럽에서 노예 제도를 거의 폐지했다. 1200년대에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노예제도를 죄악이라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민족, 성별, 사회적 차별을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 내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후 제국을 이교주의로 되돌리려 했던 배교자 줄리안(Julian the Apostate) 황제는 극심한 기근 동안 “이 불경한 갈릴리인[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들까지도 지원한다”고 불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의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쨌든 죽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르게 반응했다. 우선, 그들은 죽음은 자신들을 결국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세계관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이교도들이 제시한 것과는 매우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다른 대답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남을 위해 행하는 희생적인 봉사에서 의미 있는 삶의 길을 찾았다. 이와 같은 믿음과 행함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은 큰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를 간호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역병이 도시를 황폐화시켰을 때 이렇게 보고하였다:우리 형제들 대부분은 지극한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는데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굳게 잡고 두려움 없이 병자들을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기는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고통을 짊어지고 병든 이웃들과 가까이 하면서 기꺼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며 그들과 함께 가장 즐겁게 죽기도 했습니다. 병자들을 돌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기꺼이 자기들의 죽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기본적인 간호조차도 사람들이 낫도록 돕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봉사로 인해 병자들의 생존율이 높아졌다. 로마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독교인들을 세대를 본받지 않는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로 만들었다. 그리고 로마와 같은 관용주의 사회에서 관용의 범위를 벗어난 비 순응주의자들이 치루어야 할 대가는 사형 선고였다. 주후 50년대 이후 기독교인들은 황제에게 분향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체제 전복자들이고, 로마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이라는 법적 주장에 따라 산발적으로 박해와 고문, 살해를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박해받는 기간 동안에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을 막론하고 가능한 한 고통스럽고, 비뚤어지고, 재미있도록 고안된 수단과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은 군중들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싸우지 않고,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복음을 전하며,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학대에 비굴하거나 겁먹기를 거부하면서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을 거스르는 복음의 능력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면에서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 기독교인들에게서 죽음에 다가가는 자신감을 보았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도 모질게 경멸받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삶의 목적과 자신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교 세계에서 기독교는 인기 없는 소수 종교로 남아 있었지만, 복음의 능력은 인색한 존경을 받으면서도 세상을 이기며 성장하는 생명의 종교로 만들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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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세상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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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민11:1-2)
- 민수기 11장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본격적인 원망이 시작됩니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악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한 말이 악하고, 원망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만한 “악한 말로 원망”이었습니다. 참 무서운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들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보면, 핏대를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소리치면서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나 생각은 고사하고 지금 자기 입에서 내뱉는 말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진영 끝을 사르고, 모세가 기도하여 불이 꺼집니다. 이어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의 탐욕”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휘둘려 또 원망합니다. 이번에 울고불고 난리를 부립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울고불고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왜 날 낳았냐고!)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고불고 달래고, 울고불고 달래고 한 모양입니다. 급기야 원망의 코로나는 온 백성을 감염시켜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런 상황을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이라고 아주 재미있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모세도 속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속 상하는 것에 연연할 상황이 아님을 직감합니다.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악한 말로 원망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불이 나타났다면, 지금 울고불고 난리가 난 상황에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박살이 날 상황, 끝장날 상황입니다.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선 모세는 매우 불길한 결과를 짐작하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기분으로 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아무리 내 새끼가 애를 먹여도 애를 먹이면 먹일수록, 부모의 마음은 더 안타까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습니다. 모세는 이 난제를 풀어내야 합니다. 모세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켜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장의 무기를 꺼냅니다. 이전 우리 어머니들이 엄하신 아버지에게 내놓던 비장의 카드와 같습니다. 애먹이는 아들에 대해 더 이상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어머니는 마지막 수를 내놓습니다. “내 새끼요? 당신 새끼지! 내 씨요? 당신 씨지! 저놈이 내 성을 따랐소? 당신 성을 따랐지!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소! 그 전에 날 먼저 죽이고 맘대로 하소!” 모세는 이런 어머니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목을 내놓습니다. (민11:15)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어머니가 거품을 물고 이 정도 나오면 아무리 엄한 아버지라도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팽개치고선 괜히 죄 없는 문을 부서지라 쾅! 닫고 나가버립니다. 진노가 심히 크셨던 하나님께서도 똑같으십니다. “알았다, 몰랐다, 잘했다, 못했다” 언급조차 없으십니다. 앞뒤 문맥에도 맞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생뚱맞게 모세를 도와줄, 아니 모세를 살려줄 70명의 장로를 세우십니다. (민11:16-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배필의 사명을 완벽하게 감당했습니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돕는 배필의 사명은 살리는 일입니다.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모세이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정말로 죽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참 순진하신 분이십니다. 속내가 너무도 다 들여다보이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진노가 하늘에 닿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는 쩔쩔매시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분입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십니다. 심판하셔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사랑이 확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실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때, 믿음의 족장들이, 선지자들이, 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목사들의 사명)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모세를 보시고 일언반구도, 가타부타도 없으시고 상황을 종료해 버리시는 속이 다 들여다보이시는 너무도 순진하시고 한량없이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들으신다는 말씀은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좀 알아달라는 하나님의 애닯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납니다. 목사의 말을 들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면, 그것은 목사들이 강단에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한다면 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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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민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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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민수기(Numbers) (민12:1-3)
-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는 것은 구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언제 구스 여자와 결혼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구스 여자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라고 하는 것은 학자들에 따라 주장이 다릅니다. 바로 앞 장(민1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 발생했던 수많은 원망이니 이 장면은 오늘날 예수 믿어 구원의 백성이 되어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족장들과 약속의 땅에 대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출애굽을 준비하셨습니다. 먼저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그리고 순교 정신을 가진 부부를 준비하셨습니다. 애굽 땅에 거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묵묵히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하는 레위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출2:1)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그 가정에 출애굽을 위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출2:2)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부모 눈에 자식이 안 예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이 “잘 생겼다, 예쁘다, 아름답다, 보기에 좋았다, 사랑스럽다”라고 하는 표현들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눅2: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우리가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멋있게 컸네!, 멋진 청년이네!”와 같은 사랑스러움일까요? 아닐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인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의 조상 야곱이 라헬을 선택할 때 말 그대로 예뻐서, 아름다워서 택했을까요? (창29: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는 장자의 신앙을 위해, 형과 원수가 되어 목숨을 걸고 나이 70이 넘어 집을 떠나야 했던 야곱이 겨우 외모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맞이했을까요? 자신의 장자 신앙에 함께 할 수 있는 여인, 그 신앙을 함께 계승할 수 있는 믿음의 여인을 아리따운 여자라고 해야 앞뒤 문맥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라헬이 곱고 아리땁다는 것은 믿음이 좋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관점보다는 너무도 쉽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잘 생겼다, 사랑스럽다, 보시기에 좋았다, 아리땁다”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속에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당연히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40년 동안 준비시키셔서 이제 때가 되어 출애굽을 실행에 옮기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의 역사는 시작부터 다름이 아닌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망과 불신앙으로 지연이 됩니다. (출2:13-14)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민수기, Numbers, 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신의 백성들, 자녀들의 수를 헤아리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정작 민수기 안에는 끝도 없는 원망과 불평, 비방과 반역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둘 손꼽아 헤아리셨는데 다 헤아리고 보니 원망의 수, 원망 뿐이더라는 사실입니다. 민수기는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심정을 기록한 책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신앙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사랑하시는 오늘날의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성도들을 하나둘 손꼽아 헤아리시는데 정작 다 헤아리고 나니 그 수가 원망의 수가 될 것 같아 너무 송구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민12:1-3)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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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민수기(Numbers) (민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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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 개혁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어이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교회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이 용어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거나 심지어는 아주 애매하게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혹자는 단순히 수구적 보수주의에 대한 반대적 의미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수구적 보수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진보적 또는 급진적 혁명과는 다른 차원의 변화와 개선을 추구하는 노선을 표방하기 위해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에 덧붙여 개혁주의는 형용사적이며 추상적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Reformed Church), 개혁주의 전통(Reformed tradition), 개혁주의 신앙(Reformed faith),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 개혁주의 세계관(Reformed world view), 개혁주의 철학(Reformed philosophy) 등은 구체성을 갖고 있지만 ‘개혁주의’ 그 자체는 추상적이다.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정통 보수 신앙이라는 아주 평범한 관점이 있는가 하면, 교리공부에 열심이며, 주일 성수에 힘쓰고, 복음송 보다는 시편 찬송을 부르기를 강조하는 신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혹자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으로 흔히 ‘튤립’(TULIP)으로 불리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인간전적부패, 부조건적 선책,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알미니안누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확정된 도르트 총회의 결의문인 도르트 신경(1618-1619)로부터 유래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오직”(sola)의 신앙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 신자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예수”(solus Christus),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리는 삶을 특성으로 강조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개혁주의 신앙과 삶의 특성임은 분명하다. 개혁주의 신자들은 이러한 신앙과 삶을 유지하며 영위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들이개혁주의 전통의 신앙과 삶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다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은 무엇인가? 헤세링크(Hesselink)에 의하면, 개혁주의 신학은 “왕국 신학”(Kingdom theology)이다. “……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인간 개인의 영적인 복지에만 적용되는 불완전한 각색된 복음이 아니라, 전체 세계에 총체적인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다.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다 (계19:16; 17:14). 그의 나라는 무궁하다 (눅1:33). 개혁주의 신앙의 관점은 다른 형태의 기독교 신앙과 비교해 볼 때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루터교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추구하며, 경건주의 신앙은 개인 영혼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웨슬리안 전통은 개인의 거룩성에 관심을 갖지만, 개혁주의 신앙의 궁극적 관심은 개인적인 경건과 개인의 구원을 초월하며, 제도 교회의 범주를 넘어선다. 개혁주의 신앙은 국가와 문화, 자연과 우주의 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고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포괄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헤세링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성을 성경적인 개혁주의 세계관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다. 인생관 세계관, 삶의 모든 영역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대한 비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 나라의 신학,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웅대한 디자인이다.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하나의 주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롬 11:36).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분명히 고상하고 차원이 높고 성경적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고 표방하는 구성원들이 독단적이고 비판적이며 오만한 승리주의에 도취되지 않아야 한다. 모든 신학과 신앙의 전통은 나름대로의 강점과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양한 신학과 신앙 전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겸비함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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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개혁주의 신앙,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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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 (대상6:31-32)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다윗이 이 아래의 무리를 세워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맡게 하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전을 세울 때까지 저희가 회막 앞에서 찬송하는 일을 행하되 그 반열대로 직무를 행하였더라 찬송에 대한 의미가 많이 퇴색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찬송해서 힘을 얻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되고 일이 잘 풀릴 때 감사의 찬송을 합니다. 우리 성도의 입에서 찬송이 사라지지 않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 문화가 우리의 입에 할 말을 너무 많이 넣어주고, 개인적으로 너무 똑똑해지고, 트로트가 너무 많이 들려 저절로 입속에서 흥얼거리는 지경까지 되어버렸습니다. 찬송인지 트로트인지 곡만 봐서는 구별도 잘 안 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은 찬송하는 일, 그 일이 직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하나님께서 평안을 얻으시기가 참 힘드셨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쉬시기가 너무 어려우셨던 것 같습니다. (마8: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런 장면을 들어 “예수님께서 검소하게 사셨다, 소유욕이 없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요단강에도 제일 먼저 들어가야 했고, 전쟁터를 누벼야 했고, 포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이스라엘 속으로 가만히 들어온 섞여 있는 가라지들 때문에 졸지도 주무시지도 못하셨습니다. (시121: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렇게만 보아도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너무 송구스럽고, 죄송스럽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건축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에게 평강과 구원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소속된 교회는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다는 상징이요, 약속입니다. 그런 뜻을 담은 성전이 건축되는 동안 찬송하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찬송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은혜받았다, 감동받았다”의 차원을 넘어 구원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을 향하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라”하면 교회를 그리 오래 다니지 않으신 분들도 다 아실만한 사람입니다. 특히 주일을 성수하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너무도 잘 아실 것 같습니다. (민16:1-2)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라엘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 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주동자가 “고라”입니다. 고라와 그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부여하신 제사장직과 왕직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결정에 반기를 든 결과입니다. 세상 나라도 역린, 반역을 하면 9족을 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반역과 불신앙은 세상의 반역을 넘어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었을 때, 언약궤가 평안한 곳을 얻은 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였음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집, 성전건축을 알리는 찬송하는 직무에 헤만이 등장을 한다는 말입니까? 헤만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반역의 깃발을 든 고라(대상6:38)의 후손입니다. 시편 성경에도 고라의 찬송을 10편이나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송과 기도가 우리의 은혜, 우리의 감동이 목적이 되고, 그 선에서 머물러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입에 찬송과 기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찬송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고라의 후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고라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바로 우리가 고라입니다. 내가 고라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나에게 찬송의 직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성도의 구원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향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9족을 멸하는 대신,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의 고백을 10편이나 할애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여 찬송할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찬송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풍성하시길 소망합니다. 죽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찬송이 끊어지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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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헤만은 찬송하는 자라(대상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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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 함께 했습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65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남편과 함께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자신에게는 가능성이 없어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게 됩니다. 그런 세월이 흘러 90세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바라보는 약속 하나를 위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온 남편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 자신이 9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향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신앙 여정에 씨를 보존하기 위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단을 했던 사건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창12: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똑같은 사건은 훗날 한 번 더 발생합니다. (창20: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씨가 소멸될 위기를 만났습니다. 남편에게 첩까지 넣어준 사라입니다. 과연 이 결정에는 누가 주도적이었을까요? 과연 아브라함이 목숨 부지를 위해 아내를 포기했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남편의 사명을 위해 오히려 사라가 주저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강요했을까요?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런 세월을 보내 사라가 9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제 사라에게 하나 남은 소원이 있다고 한다면 손자를 보는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손자는커녕 며느리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미칠 노릇입니다. 결국 사라는 아들이 이삭이 장가가는 것도 보지 못하고 127세에 눈을 감습니다. 사라가 죽은 3년 후 이삭은 결혼을 합니다. 사라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극명하게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가 걸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이란 사라의 일생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성도들에게 사라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과 신앙의 길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하게 될까요? 성경은 철저히 공로 사상을 배격합니다. 기복신앙이 무서운 것은 그 속에 공로 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죄가 됩니다. 공로 사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신의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사라 정도 되면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높여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얼핏 볼 때 백이십칠 세라는 표현이 사라에게 너무 아프고 안타까운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사라의 믿음과 신앙을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완성하시고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말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넣어주는 것은 여자로서는 말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충성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충성하는 자가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보다도 순종하는 사람이 훨씬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 역시 사라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여인을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보호하시기 위하여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공로 사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문턱에서 백이십칠 세에 불러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믿음의 영웅들이 열거되는 믿음장에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히11: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혹시 예수 믿어 억울하십니까? 죽도록 믿음의 길과 신앙의 삶을 살았는데 그 결과가 “이건 아니지”라고 여겨지십니까? 우리 성도가 가야 할 길은 백이십칠 세, 거기까지일지도 모릅니다. 백이십칠 세를 살도록 하시는 것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로 완벽하게 보호하시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의 백이십칠 세는 아들 이삭을 계승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성도의 세월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최고의 은혜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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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6)(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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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개념은 유대교의 또 다른 고유한 요소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윤리의 뿌리를 두게 만든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창조주가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이러한 자신의 성품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기대하신다. 대부분의 이교도 세계에서 윤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의 일부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강한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찾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주피터(그리스의 Zeus)는 정기적으로 인간 여성을 임신시켜서 그의 아내 주노(그리스의 Hera)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질투하고 복수하도록 자극한다. 미네르바(그리스의 Athena)는 경쟁에서 여신을 능가한 후 인간 여성 아라크네(Arachne)를 거미로 만든다. 플루토(그리스의 Hades)는 프로세르피나(그리스의 Persephone)를 납치하고 그녀를 강제로 아내로 삼아 세상에 겨울을 가져온다. 이교의 신들은 이처럼 대부분 비윤리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의를 중히 여기시므로 자신이 정하신 기준을 인간들이 이들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이시며,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간사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열방의 주인이시지만 이스라엘과는 독특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지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자신과 자신의 법(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고,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자신과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를 갖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은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와 정부의 제만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율법의 대부분은 또한 허물과 죄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식의 순결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을 열방의 다른 민족들과는 다른 구별된 민족으로 삼기 위한 의식, 율례, 심지어는 식습관과 위생 관행에도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요구하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표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그에 따른 엄청난 책임도 수반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독특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보다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매우 높은 기준을 갖고 계셨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국가 역사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높은 거룩함의 기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이야기이며, 이와 같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로마 제국 당시에도 이방 나라에서 나그네처럼 살던 유대인들은 세상과 그 안에서 그들의 위치를 그들의 이교도 이웃들이 보던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 유대인의 생활 방식, 신념 및 종교적 관습은 두 가지 문제를 제외하고는 로마 정부와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적대적인 이웃 국가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로마의 영토 확장을 지원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들 유대인들에게 황제 숭배와 같은 로마의 종교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도록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다. 그래서 일신교적 신념을 위반하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받았다. 둘째, 유대인들은 주변의 이방인들과 혼합되지 않는 방법을 수년 동안 배웠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방인들과의 혼합으로 인해 거짓 신들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역사적 교훈을 배웠다. 유대인들은 또한 이방인들과 너무 밀접하게 교제함으로써 종교적 의식에 있어서도 “부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당시 로마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비교적 잘 지켰다. 그들은 당시 이방인들과 사업을 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들과 많이 사귀거나 통혼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지켜야 할 다른 이유가 있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자 하나님의 율법의 수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변 이방 사람들보다는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이방인들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려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다른 동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만이 온 땅을 다스리는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심을 믿는 배타적인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현상 유지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따라서 로마는 이들 유대인들의 관행을 허용하고, 적어도 종교적인 관습에 관한한 이들을 내버려 두었다. 이들은 사실상 로마 제국이 기꺼이 용인하는 또 다른 이상한 종교 집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영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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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백성의 특권과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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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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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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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5)(창23:1)
-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10년 정도 기다렸으면 하나님께서 무슨 답이라도 주실만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사라에게 주어진 답은 첩이었습니다. (창16: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세상천지에 자신의 남편에게 첩을 요구하는 여자가 있을까요? 여자로서는 불가능의 마지노선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 때문에 사라는 여자로서 불가능한 그 마지노선까지 넘게 됩니다. (창16: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여자의 후손”, 아들에 대한 사명은 사실 사라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를 열어 아들을 보게 하여 메시아를 대망하도록 하는 것이 수순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어디에도 사라의 원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거부하는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근거로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발견하게 합니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사라 할머니의 가슴 시리고 너무도 아플 것 같은 마음에 머리가 어지럽고 먹먹해집니다. 10년을 기다린 사라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남편의 사명을 위하여 믿음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사라가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하갈은 임신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꼴값을 떤다고 하갈은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사라를 멸시합니다. (창16: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세월이 14년입니다. (창16: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그냥 14년의 세월도 만만치 않은데, 성경에서 14라는 숫자는 완전(7)의 갑절(2)을 뜻합니다. 완전의 갑절을 뜻하는 세월 14가 삼 세 번 반복되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마1:17)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이렇게 볼 때, 42(14*3)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영적 세월을 나타내며, 믿음의 세월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하2:23-24)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선지자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던 42명의 아이들이 암콤 두 마리로부터 찢겨 지는 장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지나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계승하여 완성된 메시아의 사역, 42라는 교회의 역사를 살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찢어 죽임을 당하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성경은 사라가 아들을 얻기까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표현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이삭을 가지기까지 세월을 1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록은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남편과 함께 65세에 부름을 받아, 75세까지 남편과 함께 가나안 땅에 10년을 거하게 되고, 10년이 지나도 자신으로서는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남편에게 첩을 넣어주는 결단을 하고, 그렇게 해서 14년의 세월이 지나 아들 이삭을 잉태하게 된 사라......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3: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왜 성경은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성경이 사라가 죽은 햇수를 기록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구원의 도리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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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5)(창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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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4)(창23:1)
-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책이요,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요,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찬 책이요, 성경의 여백 속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이런 성경이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 127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는 기록이 우리에게 어떤 복음이 될까요?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40세에 장가를 갑니다. (창25: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사라의 127세를 묵상하다 보니 이삭이 사십 세에 결혼했다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수가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아 홍수의 40 주야를 시작으로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예수님의 40일 금식까지 그 의미는 너무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40을 감히 잘못된 신앙이 흉내 내는 경우도 있답니다.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이 되고, 하나님께 근심이 되면서 40이라는 수로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창26:34-35)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문제는 이런 식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포장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최고의 믿음과 신앙과 결단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마약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행23: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하나님과 율법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결단인 줄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뜻하는 4, 40에 대해서는 겉옷 규례와 함께 다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15: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사라가 이삭을 90세에 낳고, 이삭이 40세에 장가를 갔으니 사라의 나이는 130세가 됩니다. 그런데 사라가 127세를 살았으니, 정작 사라는 이삭이 장가가기 3년 전에 죽었다는 뜻이 됩니다. 왜 우리는 장가를 간다고 할까요? 실제로는 여자가 시집을 오는데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장가가는 것이 맞을까요? 시집오는 것이 맞을까요? (창2: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완전한 남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에게로 오시네요. 그러니 이 말씀조차도 단순히 우리의 결혼이 주제가 아니라 우리와 한 몸 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 우리에게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고, 우리가 그의 신부 되는 구원이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남편에 보조를 맞추는 아내에 대한 말씀 역시 그 핵심은 구원에 있습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왜 필요할까요? 아담을 돕는다면 무엇을 도와야 할까요? 이 말씀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풀지 않으니 여자는 남자에 귀속된 수동적인 역할 정도로 생각하고, 남녀차별을 논하는 인간적이고 불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을 돕는 배필로서의 여자라고 한다면, 완전한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돕는 배필인 그의 신부된 교회의 사명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사라는 돕는 배필의 사명, 아브라함을 돕는 배필의 사명을 감당한 믿음의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인 사라의 수명이 127세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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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4)(창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