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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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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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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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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3) - 녹비왈자(鹿皮曰字)
“법은 아니라 해도” 총회 본회 석상에서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던 총회장의 발언이 그다음 총회장의 입에서도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하면 된다!”는 식으로 공회에서 공포가 된 이후로 총회 내 많은 결정들이 기준을 잃어버리고 좌충우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경북의 모 노회에서는 이단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어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교리적이고 본질적인 이단 문제를 계파 갈등으로 호도하여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지 않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한 표 차이로 전권위원회의 보고가 받아졌습니다. 당시 모 노회원은 이 상황을 놓고 “한 표는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작 더 한심한 것은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아놓고서도 재판국 구성에 대해서 법제위에 질의 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에 대한 기준을 무시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교회 헌법은 그 기초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원 중 어느 누구라도 법에 근거하여 “법이요!”하면 모두가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이래서 공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무둥치가 조금만 흔들려도 높이 뻗어 있는 나뭇가지는 미친 듯이 흔들립니다. 제발 총회가 매관매직의 행태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거나 사욕이나 진영논리에 빠져 땜빵 식으로 결정을 하면 산하 노회를 물론이요, 개 교회나 성도들에게서는 미친 듯이 흔들림이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과 몇 년 전 총회를 사회하는 총회장이 생각 없이 한 말이 오늘날 고신총회의 전반적인 불법과 혼란을 야기하는 단초가 되고 있음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기를 바랍니다. 작금의 이런 불법적이요 비상식적인 난국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첫 단추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올바르게 선거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고신총회의 선거법이 법대로 집행되지 않음으로써 선출되는 사람들을 불법자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위의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제기되니 규제보완을 내놓았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당해 연도에는 출마자가 위와 같은 행위를 했을 때는 불법선거운동이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럼 현재 부총회장으로 출마의 뜻을 비치고 움직이고 있는 분들은 불법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나 당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8번 집단 적으로 특정 후보자 지지를 결의할 경우에는 관계자를 해당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토록 하며 ......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세상 선거법에서 규정하는 것보다는 엄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2월 23일 오전 11시 하늘샘교회당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는 부총회장 출마를 위한 J 목사의 출정식이었습니다.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일 ... ?”이라는 기사와 함께 J 후보를 부총회장 후보로 지지하는 “48명의 집단결의 성명서”가 보도되었습니다. 어제 4월 4일 오후 4시 천안 신대원 내 고신영성원에서 있었던 “고신총회 미래를 위한 기도회” 역시 부총회장 출마로 이미 행보를 보인 C 목사의 출정식입니다. 이 출정식 역시 집단결의입니다. “집단 결의”가 신문 지상에 광고로 올라왔으니 선관위가 법대로 한다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부정선거요, 불법이라고 명시할 것 같은데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할지 의문입니다. 선관위가 “집단 결의”를 “불법으로 규정”을 한다고 해도 그다음 예상 시나리오가 눈에 훤하게 보입니다. 먼저는 그 사실에 대해 고발자가 있으면 조치할 것이라 할 것이고, 고발자가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 서류를 제출하라고 할 것입니다. 고발자가 나오기도 어렵지만 고발자가 나와 고발장을 제출한다고 해도, 전례를 볼 때 총회 임원회에 올리고 총회 임원회는 진의를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류가 선관위로, 총회 임원회로, 재판국으로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법제위로 문구 해석을 요청하는 수순으로 끝을 낼 것 같습니다. 본인은 끝까지 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만약에 선관위에서 집단결의를 하는 기도회에 대한 조치가 없고,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도 두 번이나 낙마한 사람으로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위한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회”를 하고자 합니다. “법은 아니라 해도” 전례를 볼 때, 선관위도 그 길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예상은 항상 잘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만은 꼭 아니길 바랍니다. 녹비왈자(鹿皮曰字)란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曰)” 자를 위아래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번만은 선관위가 녹비왈자(鹿皮曰字)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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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2) - 양두구육(羊頭狗肉)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인지요? 만약에 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2023년에 고신포럼 주최로 기도회 한 것을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떤 법적 근거에 따라 기독교보에 글을 올려 부총회장으로 출마한 저와 함께 한 분들을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로 오해받게 해서 선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이 되지 못하니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이름으로 올리는 묘수(?)까지 부려야 했던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또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결정과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결정과의 차이는 무엇이며 법적인 권한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임원회 독단적으로 사안을 결정할 <권한과 범위>는 선거관리위원회 규칙 어느 조항에 있는지요? 지난해 선거관리위원회의 기준에 따라 고신포럼에서 주최한 기도회가 기독교보에 경고가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면 이번 2월 23일 부산서부노회 모교회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사실은 부총회장 출정식)”에 대해서는 왜 묵인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번에 보완한 규정을 살펴봅시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1번 접대는 노회 추천일 전까지는 해도 불법이 아니며, 2번 기부행위는 노회 추천일과 상관없이 당해 연도에 다 적용되는 것인지요? 지난해 선관위의 관례로 볼 때 제8조 규제보완은 당해 연도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부총회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분들의 행보는 이미 모두 불법입니다.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것에 대한 질의를 공식적으로 해 본들 서류가 총회 임원회와 선관위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법제위원회에 문항 해석을 요구할 것이고, 올해 총회 마치고 나면 유야무야 되겠지요. 2024년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 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고려신학대학원 43회 동기회 입장”이라는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거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입장문에 따르면 43회 동기회는 “2022년 2월 7일에 결의”했다고 하지만, 결의를 재확인하는 행위도 당 해 년도에 결의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법에 충실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인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준을 잘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적용하여 고신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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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년제 폐지 – 본립도생(本立道生)(2)
지난 3월 18(월)-19(화)일에 있었던 제6회 고신포럼에서 총신대 서창원 교수와 오태균 교수를 모셔 정년제에 관한 연구발표를 들었습니다. 서창원 교수는 성경에 근거하여 정년제 폐지를 주장했고, 오태균 교수는 사회학적 접근으로 정년제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속된 부산서부노회에서는 성경을 기준으로 현재 교회 구성원들의 상황을 고려해 교회 전 직원과 직분자의 정년 연장을 총회에 상정한 적이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장로를 세우지 못해 폐 당회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도 그 기준에 맞는 직분자를 세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175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창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 25장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이삭의 기록은 급하게 야곱에게로 전개되어버립니다. 25장 후반부는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 것을 끝으로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리는 사건으로 넘깁니다. 그리고는 창 26장은 1절에 “아브라함 때에”라고 언급하면서 이삭의 행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고난의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삭의 행전은 짤막하게 막을 내립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을 받아 창 25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삭은 창 25장 중후반부에 등장하여 27장까지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은 이삭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야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창 28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곱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창 35장에서 야곱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봤습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을 하고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16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축복 사건을 시작으로 야곱이 집을 나간 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훗날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굳이 야곱의 나이가 13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41: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총리가 되어 풍년의 세월 7년을 끝내고 흉년의 세월이 시작된 후 약 2~3년 후 야곱은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이 130세일 때, 요셉은 39세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90세쯤 요셉을 보았다고 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때가 적어도 70세 중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습니다. (창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삭이 야곱을 60세에 낳았으니 야곱이 120세 되던 해 180세에 이삭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은 손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던 즈음에 총리가 된 줄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위대한 족장들을 언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을 따라 그 기한을 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지만,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살아 있었지만, 야곱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을 볼 때도, 신약의 사도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속사도 시대의 교회 일군들, 감독들 및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들, 및 20세기에 들어와서 1980년대 중반(합동은 1988년에 처음 정년제 시행)에 오기까지 성직자 정년제가 없었습니다. 정년 연장이냐? 정년 유지냐? 정년 폐지냐? 정년 축소냐? 과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나이가 그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르는 사역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노회가 목사를 세우고,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정년은 노회의 소관이 되어야 합니다. 노회에 “목사(목회) 상담센터” 혹은 “목사 사역 검진 위원회” 같은 기관을 구성해서 그 기관이 노회 산하에서 목사 상담과 각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하고 연구해서 문제들을 안정화하고 각 그 교회의 성도들과 당회의 의견을 모아 교회의 존립을 최우선으로 하되 목사도 살리고 성도들도 살리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서 목회자의 심리와 정신적인 건강도 검사하고, 소명에 대한 열정도 확인하고, 그 목회자 본인의 의향도 고려하여, 각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정년을 노회가 정할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하면 기본권은 물론이요, 목사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지키면 길이 보입니다. 은퇴 목사의 투표권은 기본권이라고 합니다. 이 기본권은 어디서 온 기본권입니까? 목사의 기본권을 유지함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전히 목사로서 판단력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총회 헌법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목회자의 정년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 목사의 기본권을 지키는 정도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정년제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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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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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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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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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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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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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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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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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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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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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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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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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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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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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그리스도인의 '격' 있는 정치참여
- 현재 우리나라는 아주 뜨거운 정치 쟁점 가운데 서 있다. 바로 대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몇 사람이 모이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가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질서, 협의, 상호존중을 위하여 정치라는 단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라는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원래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국가권력의 차원만 아니라 인간이 속한 모든 영역에는 정치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많은 국민이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치임에도 떠나서 살 수 없는 현실적인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역시 한 국가나 단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분별력을 발휘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경은 통치 권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롬13:1-2).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권위를 인정하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가 생기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신다(시146:7-9). 그리스도인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 바로 ‘정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를 바르게 세우는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관여할 때는 반드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에는 명목상 기독교인, 득표를 위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 이름 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때로는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비전과 국가경영에 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인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방인도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경우가 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억지로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을 뻔히 보이는 파멸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선택하는 무분별한 정치 행위는 금물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참여하되 성경 말씀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자기가 지지하는 자를 드러내놓고 강요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더욱이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 배만 채웠던 이단자들과 같이, 자신의 억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반 기독교적인 성향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신대원 모 교수가 작성한 SNS의 글은 성경을 빗대어 특정한 후보를 마치 하나님께서 구별한 자라는 이미지를 주므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안이며,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필자는 신학대학원의 교수라도 정치적 성향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평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견해이므로 한편으로 이해하고 넘겼지만, 최근 SNS에 게재한 그의 성경을 빗댄 해석(?)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도의 네거티브 전략이라면 무서운 사상이고, 실수라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며, 평소의 사상이라면 교수직을 당장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지지한 후보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임을 생각할 때 정도를 벗어난 것이기에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 사안에 대하여 본인도 그 심각성을 고려하여 현재는 SNS를 차단하고, 글도 내린 상황이지만 그 여파는 상당히 커져 버렸기 때문에 본인과 관계기관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조치나 해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모 교수의 SNS에 상에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한 정치적 행위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해학을 넘어 계명을 범한 처사이다. 십계명의 제3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되어 있다. “망령되이”는 히브리어 ‘샤베’로 ‘무익한, 헛된, 거짓된, 가벼운, 경솔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거짓되게 부르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요리문답』 제 113문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경우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시켜 세속적으로 농담거리를 만들거나, 쓸데없이 문제를 삼거나 헛되게 말다툼하며, 거짓된 교리를 주장하는 것(벧후 3:16, 엡 5:4, 딤전 6:4-5, 딤후 2:14, 17), 하나님의 이름 아래 포함되어있는 피조물이나 어떤 것을 악용하여 부적을 만들거나 정욕과 죄악된 행위에 이용하는 것(신 18:10-11)>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 왜곡, 농담거리로 만들지 말 것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수는 분명히 제3 계명을 어겼다. 우리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어겼다. 단순히 ‘독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라는 해명은 어불성설이며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신대원 교수로서 십계명 중 3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준엄한 조치가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김현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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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그리스도인의 '격' 있는 정치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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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 고신 총회가 지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김해중앙교회(강동명 목사)에서 제7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코로나19 정국의 어려운 상황에서 총회 임원들과 김해중앙교회 강동명 목사와 당회원들이 김해시 지자체와의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에 관한 어려운 협의과정을 거친 후 개최된 고신 총회는 복잡한 현안들을 처리하면서 심도있는 안건심의를 했다. 그 중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에서 가진 성찬예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성찬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고, 성도가 은혜받는 아주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정기 총회 개회예배 시에 가진 성찬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소위 '성찬키트'라는 것을 나누어 각자가 개봉하여 먹고 마심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성찬을 드릴 수 있는 방편으로 성찬키트를 선택한 것은 알지만, 성찬키트를 통한 성찬이 이래도 되는가라는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 까지는 그 고충이 충분히 이해된다지만, 그 성찬의 진행과정을 얼마든지 은혜롭게 할 수 있는데, 이번 성찬키트를 이용한 성찬식의 진행과정은 일반적인 성찬식의 경건함에 미치지 못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성찬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목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서는 모자란다고 소리치면서 부르고, 조금 떨진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키트를 던져 주기도 하고, 개봉하는 과정에서 개봉이 잘 되지 않는다고 옆사람이 개봉을 도와주기도하며 그러다 담긴 것이 엎질러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어색한 총대들은 서로의 어색함이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경건해야 할 성찬예식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사죄의 은총에 눈물과 감격이 있어야 할 성찬이,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죄송함, 무례함에 가슴치며 눈물을 흘리며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하지만 이러한 성찬 예식에 대해 어느 총대들은 깊은 한숨을 쉬고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지,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경헌 목사가 성찬에 참여한 회중 앞에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예식을 이렇게 웃움거리가 되도록 해서 됩니까? 부득이 키트를 사용해야 한다면 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은혜롭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시행할 수 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럽게, 장난스럽게 성찬을 해야만 합니까? 저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고신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장로교단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모든 회의에 앞서서 거행된 예배와 성찬은 이미, 사람들의 모임을 예시한 것은 아닌가라를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소홀히 여기면서, 그 다음을 은혜롭게 하겠다고 그 길을 추구하는 것은 아해하기 어려운 문제풀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깊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총회 유감의 한 모습이며, 누구나 바른 길을 추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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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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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 유치원 다녀본 적 없고, 엄마와 한글도 익혀보지 못하고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의 학업 성적은 부모님을 늘 만족시켰다. ‘왕년에 1등 못해본 사람 있나?’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성격도 차분했으니 당시에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를 공부 잘하고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게 되었다. 즐거운 시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자연’이라는 과목이다. 늘 그랬듯 대부분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충고대로 문제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아닌 것은’ ‘맞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덤벙대며 읽어서 늘 아쉽게 문제를 틀린다며 엄마는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100점을 향해 천천히 연필을 눌러 정답을 적었다. 이번 시험에서도 나는 100점을 확신했다. 그런데!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니 망설임도, 고민도, 함정도 없었던 문제가 빨간색 막대기로 그어져 있다. 단 한 문제. 정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다시 문제를 살피고, 상식을 동원해도 틀리지 않은 답이다. “아래 물체의 이름을 적으세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 물건은 우리 집에 널리고 널려 있었고 아버지의 현장에 늘 쓰이는 물건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문질러서 곱게 만들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던 물건. “빼빠” 우리 가족은 모두 그것을 ‘빼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사포’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나로 하여금 가족을 불신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인정 할 수 없다. 선생님께 수차례 항의했다. 잃어버린 100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부정당하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어머님과 면담을 하셨고 부모님께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것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50원 대출’ 사건 이후로 두 번째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선생님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 점수는 정정되지 못한 95점. 그렇게 나는 가정의 울타리 밖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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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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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 나는 유치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아침에 노란 가방을 매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던 소수의 친구들이 조금 부러웠다. 얼핏 구경을 해보니 유치원은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고, 그림도 그리는 곳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되면 동생과 함께 시장터를 누비고 다니거나 빈 땅에 구멍을 만들어 구슬을 던지고 놀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당당히 가방을 매고 갈 곳이 생겼다. 어머님께서 일 나가시기 전에 왼쪽 가슴에 달아주신 손수건.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에 밥과 반찬 두세 가지를 넣어 챙겨주신 도시락. 나는 이제 자랑스러운 ‘청송국민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도, 나와 함께 동네를 누비던 친구도, 같은 동네 살면서도 얼굴을 잘 몰랐던 친구도. 이제는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공을 찼다. 오늘은 엄마가 아프다. 늘 힘든 일을 하시더니 병이 나신 것 같다. 학교를 오기는 했는데 오늘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할까 싶다. 나의 플라스틱 필통은 수납공간이 많다. 버튼을 누르면 여기저기 문이 열린다. 늘 지우개를 넣어두던 그곳을 열어보니 50원이 나온다. 우유는 학교에서 받은 것이 있고, 빵만 사면 되는데 50원이 부족하다. “선생님요, 50원만 빌려주면 안돼요?” 교탁 옆 개인책상에 앉아계신 담임 선생님께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떤 자신감이고 무슨 여유였을까? 분명한 것은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 정도 재력은 있다고 믿었고 나에게 빌려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뻔뻔함도 늘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었으니깐. 선생님께서는 50원의 용처를 물으셨고 역시나 당당하게 내가 가진 50원에 보태어 빵을 사먹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50원은 내 손에 쥐어졌다. 성공. “선생님, 내일 엄마한테 받아서 꼭 갚을게요.” 그렇게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님 표정이 묘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를 하셨단다. 어머님은 너무 부끄러웠다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신다. 하지만 돈도 잘 갚고 내 배도 채운 아름다운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삽화작가 : 김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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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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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 이제 익숙해진다. 등굣길, 학교 앞 문방구, 버스타고 30여분 가면 나오는 시내라는 곳. 그리고 아이들의 사투리까지도. 요즘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절대 사투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사용하는 경상도 말도 사투리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배우는 말은 사투리가 아니면 좋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표준어를 배우기로. 대전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이곳 말을 배우지 않기 위해 나는 좋은 표준어 선생님을 모셨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울말을 쓴다. 유심히 살펴보며 조용히 따라해 본다. ‘에잇 닭살!’ 어색하고 좀 부끄럽다.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한 내가 표준어 연습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느낌이다. 고향을 배신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계속 텔레비전 앞에서 자리를 지킨다. “기여?” - “그래요?” 대전에서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일부러 표준어로 바꿔서 다시 연습해 본다. 절대 “기여?” 이 말은 안 쓸 것이다. 이 말을 쓰는 순간 나는 그냥 충청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 기회에 표준어를 배우리라. 제법 학교 적응도 잘되고 있고, 염려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도 1-2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물론 내 성적이 발표될 때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이 놀랐다. 조금 불쾌했다. 왜 놀라지? 나는 이제 ‘시골에서 전학 온 애’에서 ‘시골에서 전학 왔는데 공부 잘하는 애’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이 주번이라서 무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오면 대신 들어주기도 하는 매너남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가도 남아서 청소의 끝을 보는 성실남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함께 청소해야 하는 아이들은 도망갔고 기다란 학교 스탠드를 혼자 모두 쓸어냈다. 청소가 끝났으니 이제 교무실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아, 나는 오늘도 말 한마디에 교무실 선생님들을 다 웃겨버렸다.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셨던 텔레비전의 스승님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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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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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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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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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 1년에 한두 번, 외가댁에 갈 일이 아니면 지나지 않는 길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 휘청휘청. 아스팔트와 푸른 산만 보이는 이 길은 여전하다. 여전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늘 그 지점이 되면 어머님이 아버지를 황급히 부르며 차를 세우신다. “차 좀 세워줘!” 참지 못하고 오늘도 엄마는 멀미의 끝을 보여주신다. 늘 같은 지점에서 그러는 엄마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다. 온 가족이 그런 엄마를 놀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엄마가 차에 다시 타시고도 여전히 삼부자는 유일한 여성인 ‘한정혜’씨를 놀려먹는다. 차는 다시 그렇게 대전을 향해 출발한다. 나는 오늘 전학을 간다. 고향과 부모님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대전이라는 낯선 곳에서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그것을 유학이라고 하셨다. 입학 후 5학년까지 늘 최상위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아들이 시골에서 살기에는 아까우셨단다. “대전에서 동생과 같이 살 수 있겠어? 엄마, 아빠는 너희가 가서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우리 부모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오셨고 나는 크게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가서도 공부 잘 할 자신이 있었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징징거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전교어린이회장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1톤 트럭은 어느 때 보다 가볍게 우리 네 식구를 태우고 열심히 달린다. 카세트에는 구수한 ‘김란영 카페음악’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늘 나오던 노래였기에 나도 익숙함에 같이 흥얼거린다. ‘안녕,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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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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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 정기총회의 공과 지난 5월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그동안 총동창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간접추천, 추인 등의 절차를 따라 임원들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해된다. 총동창회 회원들의 미온적인 협력이 결국은 그런 행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 바꿔볼 때도 되었다. 마치 어느 특정한 그룹의 밀실 야합적인 모습으로 임원들을 줄 세우기식으로 추천하였고, 총동창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고자 하는 회원들의 임원출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따른 총동창회의 임원선거는 동창회의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회원들이 공회 앞에 합법적인 발언 기회를 얻어 의제를 제시하였고, 의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격론 끝에 상정된 의제를 표결에 붙여서 회칙이 수정되었다. 개정된 임원선거 규칙은 공천위원 추천제에서 본회에서 직접추천, 혹은 자원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인 입김으로 이상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정기총회를 통하여 선출된 회장을 불신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다시 추대하여 보선한 초법적인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법한 정기총회를 뒤집은 불법적인 임시총회 총동창회는 2021년 5월 24일 오후1시 신대원101호 강의실에서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그 일정에 따라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회집된 회원으로 개회되었다. 총회는 회순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었고 임원 개선과 안건을 다루고 폐하였다. 그런데 전임회장단은 총동창회 회칙 12조 2항에 수석부회장을 수정하지 않아 그대로 살아 있고, 13조 1항에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로 전년도 총동창회 총회에서 받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총회를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총동창회 임원회는 임시총회를 받아 들여 공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기총회를 불법적인 임시총회로 뒤집은 초유의 사태이다. 무엇보다 지난 정기총회는 수석부회장을 당연직으로 추대하는 것을 본회에서 직접 추천하여 투표하도록 개정하였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시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하여 관철시켜야 마땅한데, 정기총회가 폐한 후에 문제를 삼아 임시총회를 요구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시총회를 적어도 1주일 전에는 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에 7월10일자에 공고하여 절차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임시총회 소집 요건에 보면 1)적법절차에 따른 임원 구성(보선)과 2)회칙보완 수정이라고 명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상정된 안건도 아니기 때문에 초법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렇게 볼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현 회장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서명한 회원200명에 절반도 못 미치는 61명(전임회장 9명과 임원 14명, 담임목사, 부목사)이 참석하여 정기총회를 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재론하여 회칙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불법적인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임시총회소집이란 말은 이미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임시총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만약 정기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법총회로 규정하고 정기총회 소집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상한 임시총회 사회 금번 총동창회 임시총회(21.07.16) 개회 시 지난 정기총회를 통해 선출된 회장으로 하여금 회의를 주재하게 한 것은 이미 정기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임시총회는 임원 개선에 들어가면서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전임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임원 개선을 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불법적인 임시총회이다. 전임회장은 이미 정기총회를 통하여 그 실효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적법한 회장을 의장석에서 내리고 무슨 자격으로 버젓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권한남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도 부끄럽다. 그리고 전임회장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회칙을 수정하는 것을 주재하였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더욱이 해괴한 일은 다른 임원 개선한 것은 차제하고 전년도 회칙을 들어서 수석부회장으로 있었던 김홍석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후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기에 사의한 것으로 하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임원개선이며, 이는 총동창회의 정기총회를 기만하였고, 또 총동창회 자체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회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코미디 같은 이 회의 진행에 동의하고 박수를 친 회원들은 상식과 법을 어떻게 알고 동의한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전임회장들의 놀이터가 된 임시총회 어느 모임이든 전임회장들은 그 경륜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미미하면 미미할수록 좋다. 한 교회에 원로목사는 담임목사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가도록 온전히 뒤에서 기도하며 도우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이고 정상적이 아닌가. 이런 상식과 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문제되어 상당한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총동창회에서도 전임회장들은 그야말로 전임회장이어야 한다. 전임회장이 상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금번 임시총회 건에도 전임회장들이 소위 총동창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미명 하에 도에 넘치는 개입으로 총동창회를 불법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차하면 세력으로 임시총회를 요구하여 정기총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설령 지난 5월 개최된 정기총회가 본인들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결코 그렇지 않지만), 전례 없는 임시총회 개최를 조종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총회가 전임회장들 발언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므로 총동창회의 격을 완전히 실추시켰다. 적어도 전임회장들이라면 정기총회에서 진행된 것을 존중하고, 문제점이 있을 때 그것을 차기 총회에서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전임회장의 처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총동창회 재정 통장 관리의 이중성 총동창회의 재정운영은 노회에 참여하는 목사회원들에게 소위 협동총무라는 굴레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각출하게 하여 회비를 수령하고 있다. 장학금 등으로 후배들과 신학교를 위해 사용한다니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무런 반론 없이, 회비 각출에 순응하여 지불한다. 총동창회의 운영을 위한 수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대원 장학금 명목으로 전체 회원을 상대로 봄. 가을 노회 시마다 일년에 두 번씩 거두어 가는 회비이고, 둘째는, 임원들의 임원 회비이고, 셋째는, 총동창회 부부수련회를 위한 목사들과 전국교회 후원금이다. 이 세 종류의 수입에 관하여 정기총회에서 종류별로 상세하게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임원회비는 용인된다 할지라도, 총동창회 부부수양회 시에 전국 교회에서 부담한 후원금은 결국 총동창회의 공적인 재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정의 지출에 대해 정기총회에서 공개적, 구체적, 객관적인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총동창회의 공식 행사에 대한 재정보고는 반드시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되는 것이 통상이다. 어떤 회든지 개회가 선언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경우 회칙수정을 하고, 그 수정된 회칙에 따라 임원개선이나 사업 등이 논의된다. 회칙수정이 앞부분인 것은 그 수정된 것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 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한다고 것이 회칙의 통상이다. 그런데 즉시 발효하도록 개정한 것을 두고,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회기, 아니 체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의 입김에 의해 종잇장 뒤집듯이 뒤집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정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려신학대학원 총동창회는 어떤 특정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모르나 왜 이렇게 전임회장들이 그 입김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순수한 친목 단체인 총동창회를 정치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순리를 따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이번 임시총회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고 자위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임회장들이 행동한다면 향후 총동창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 코로나19의 변종으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당장 오는 주일 예배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총동창회가 모여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헌법소원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상황보다도 어떤 더 중요한 명분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에 감염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와 고신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이 분명한데도, 예배보다도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겁쟁이 고신의 목사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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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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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 총동창회 총회가 지난 4월26일 있었다. 이미 한 달이 지나갔다. 여러 가지 논란들이 지면상으로 오갔지만, 동창회원들의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새롭게 출발한 임원들이 총동창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 날 41회 총회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정확한 사실과 절차 과정을 직접 보지도 않고 제삼자와 지면으로만 접한 회원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 진실로 총동창회를 위한 순수한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SNS상으로 퍼 날라 총동창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에 부득이 엄중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당시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1. 41회 총동창회 총회는 적법한 절차에 따랐다. 총회는 상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기에 41회 총동창회는 매우 상식적이었다. 만약 총회 회의 진행상 어떤 불법이 있었다면 그 현장에서 불법성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미 끝난 총회를 장외에서 진행 과정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다분히 다른 <정치적인> 의도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만든다. 총동창회 회칙의 임원 선출 1항에 보면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하여 총회에서 인준을 받는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자동으로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추대하여 인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만약 인준을 받지 못하면 회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41총회는 회칙의 심의와 변경 절차를 거쳐서 “임원 선출 (1)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 (2) 모든 임원은 본회에서 추천을 받아 직접 선출한다.” 로 개정되었고, 그 개정된 회칙에 따라 회장이 선출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전년도 총회를 존중하여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추천했지만 본인이 본회 앞에서 고사한 것이다. 결코 그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차제에 아주 중요한 원칙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적법하게 개정된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는 것이 신법 우선원칙이고 질서의 원칙이고 상식이다. 이러한 법리를 무시하는 그 자체가 지극히 비상식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법질서를 범한 것에 준하므로 자숙하기 바란다. 2. 총회에서 회칙심의와 변경은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이 비정상이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제41회 총회에서 회칙 제13조 (임원의 선출) 1항 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고 개정되었기 때문에 “제12조 (임원) 2항은 해당 없으므로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이다. 그 조항이 그대로 있다면 수정 과정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선거 결과 자체를 무효로 만들 만큼 심각한’ 흠결이 있는 것처럼 적시한 것은 매우 경솔하고 과장된 주장이며, 총동창회 총회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법이 개정되면 즉시 발효되는 것이 상식이다. 차기 총회부터 발효된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공천위원의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천위원을 두는 것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싶은 발상이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년간 실무임원으로 큰 과오 없이 헌신적인 봉사한 회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임원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바로 명백한 공천에 평형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12년 제32회 총동창회 이전과 제33회 총동창회 이후 임원선출회칙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제32회 이전에는 총회에서 부회장을 직접 선출하고 그 중에 다 득표자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제33회부터는 전임회장단이 공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짐작컨대 제33회 그 당시에도 총동창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 회원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회원도 있었을 텐데, 회칙 수정됨으로 원천적으로 그 기회가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잡음과 문제를 제기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사적으로 수용했다는 빙거가 아닌가? 그것이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제41회 총회의 회칙 심의와 변경을 문제 삼는 것인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정된 회칙에 따라 진행된 총회의 임원 선출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성숙한 회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는 순수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용하여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이 있음을 주지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3. 이제 총동창회가 순수한 그 목적대로 그 임무를 감당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총동창회원은 각 노회 회기마다 협동총무들의 수고로 거의 대부분 회비를 납부했지만, 그 동안 총동창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참석이 저조하여 임원선출에 어려움이 있어 부득불 종전의 회칙을 따라야 했던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그간의 임원들의 노고와 헌신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고 그 공을 인정한다. 또한 임원 선출과 배분을 부분적으로 노회와 신학교, 기수별로 안배하려고 고뇌 한 점도 높이 사고 충정을 이해해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총동창회 운영상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많은 회원들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되어 의견 개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폐쇄적인 임원 선거 구조를 개방적인 구조로 바꾼 것은 뜻이 있는 회원들이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총회에 ‘특정한 노회가 그동안 총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목사들을 동원했다.’고 하면서 마치 참석할 자격이 없는 자가 한 참석 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유감이며 분명 선치 못하며, 설사 처음 참석한 회원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참석을 권장해야 옳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 이런 일련의 일을 두고 ‘동창회비 거부 운동’, ‘총회의 파행’, ‘사전모의나 편법’ 등을 운운하면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짐을 공적으로 선언하라는 식의 협박성 선동과 자극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꾼들이 던지는 화두가 아닌지 되물어 보고 싶다. 어떤 법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발전되고, 시정된다. 기도하면서 오늘의 부족한 것을 내일에 시정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다. 차제에 당부 드리고 싶다. 총동창회가 동창회답게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모교의 발전을 위한 본래의 순수한 목적대로 움직여 가도록 현 임원진들을 응원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총동창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이니 적극 협력하자. 그리고 정확한 팩트도 아닌 것을 제기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뻔히 보이는 속보이는 정치 행위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끝으로 좀 더 슬기롭게, 좀 더 지혜롭게 좌우를 살펴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 점 대하여 회원의 일원으로서 유감을 표하며, 모든 동창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에 적극 협력을 잘 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김일영 목사(신광교회, 서울남부노회 서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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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