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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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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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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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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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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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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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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이정희 목사] 부모가 자녀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가?
    I. 서언(序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가장 틀리기 쉽고 혼돈하기 쉬운 용어들 중 하나가 가족들 과 일가친척들과의 지칭어와 호칭어들이다. 오늘의 주제는 이런 용어들 중에서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되는지에 대한 용어들을 계속 논하고자 한다. II.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1. 자녀 혼인 전과 혼인 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들의 경우 혼인하기 전에는 ‘철수야’처럼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혼인한 후에는 직접 이름을 부를 수 있으나, 아이를 낳으면 ‘아비’라고 부르거나 손자의 이름을 넣어서 ‘OO 아비’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미혼의 아들을 가족과 친척에게 지칭할 때는 호칭어인 ‘OO’를 그대로 불러도 좋다. 하지만 지칭하는 아들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그들이 부르는 호칭인 ‘너희 형’, ‘너희 오빠’, ‘너희 삼촌’ 등으로 말한다. 아들의 직장인들에게는 ‘OO씨’, 또는 성이나 성명에 직함을 붙여서 ‘김철수 과장’ 혹은 ‘김 과장’으로, 타인에게는 ‘우리 OO’, ‘우리 아들’로 지칭하는 것이 좋다. 2. 교회 안에서 가족들 :이런 경우는 앞에서 말한 원리대로 아들이 교사나 집사 등의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김OO 선생’, ‘김OO 집사’라든지 ‘김 선생’, ‘김 집사’라고 지칭하면 된다. 이런 면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아들이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정삼품 이상의 벼슬에 있는 자) 이상이면 공석에서는 앞에서와 같이 직함으로 호칭이나 지칭했다고 한다. 이런 면은 교회에서도 아들이나 가정 식구들의 직함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어머니가 교회당 안에서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우리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리 목사라도 존칭인 ‘님’자는 붙이지 않음이 좋고, 또 그것이 자랑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드라마에서 부모가 아들을 계속 ‘우리 이 박사’, ‘이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분히 아들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좋은 호칭과 지칭은 아니다. 또한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아무리 목회자라도 목사라는 호칭이 아닌 자연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호칭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며느리와 시부모님 사이: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어,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렇다면 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호칭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흐트러진 현실에서는 별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높임말은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어머님으로, 시아버지에게는 아버님으로 호칭해야 하는 것이 바른 말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르는 말은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아가’, ‘새 아가’, ‘OO 어미야(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하는 말로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OO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OO 댁’, , ‘OO 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로 여겨왔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즈음은 이상의 용어들이 오히려 서로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며느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들도 많이 본다. III. 결 어 어떤 국어학자는 ‘현재 우리 국어의 어려움과 혼란은 서울시내의 교통 혼잡보다 더 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라고 우려했다. 부족하지만 생활용어를 연구하며 이 글을 연재하는 필자가 볼 때도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상에서 논한 모든 내용들이 다 그러하다. 하지만,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용어의 실제에 대해서 논하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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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신재철 목사] 교회 이사 가요
    교회 2층에는 태권도 학원이 있다. 수업이 끝날 때면 아이들이 입구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조용한 동네에 이 아이들이 다 어디 있다 나왔을까 싶다. 아이를 데리러 오신 어머님들은 현관 앞에 서 기다리다 내려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어머니도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음을 하는 어린아이와 함께 어머니 한 분이 교회 앞 현관에 있다. 아이도 어머니도 너무 심심해 보여 인사를 드리며 말을 붙여본다. “큰 애가 여기 태권도 다녀요. 둘째가 너무 재촉해서 늘 이렇게 일찍 나와서 기다리네요.” 조금은 어눌한 한국말. 외국에서 오신 분인지, 강원도 사투리가 심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깐.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만화방으로 안내했다. 아이도 아장거리며 들어와 만화도 보고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어머니는 편하게 교회에 들어오셔서 커피도 마시고 아이와 잠시 놀다가 큰아이가 끝날 시간이면 돌아갔다. 언제부터인가 태권도가 끝나면 큰아이도 함께 들어와 한참을 책보며 놀다 가곤 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교회에 들어오셨던 분. 아니, 만화방에 오신 것이 맞겠지? 뭐가 되었든 이렇게 찾아주는 분들 덕에 나는 개척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코로나가 길어지며 만화방을 열지 못한 지 오래다. 교회 사무실에서 업무 처리할 때, 잠시 조용히 기도할 때 가는 정도. 목사로서 부끄럽다. 그날도 업무를 보러 가는 길에 그분과 마주했다. 겨우 걸음을 옮기며 아장이던 아이는 제법 많이 컸지만, 여전히 형을 기다리며 길에서 엄마와 놀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 나누기도 잠시. 코로나로 교회가 힘들지 않은지 무거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온다. “저희 이사 가요.”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는데 임대료까지 올라가게 되어 이사를 결정했다는 근황을 전했다. 많이 아쉬워하며 걱정한다. “교회가 많이 어려워지며 떠나시나요? 동네 들어와서 고생만 하다가 나가시는 것 아니세요?”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비록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만남이 마지막일 것 같다. 나중에 놀러 오시라는 인사를 나누어 보지만 코끝이 찡해진다. 이사할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기대된다. 하지만 떠나는 걸음이 더 무겁고 속상하다. 2년 넘게 함께 했던 상가 사장님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목소리 큰 부동산 소장님, 무뚝뚝한 미역 창고 사장님, 해물 된장찌개가 끝내주는 식당 사장님, 언제나 바쁜 간판집 사장님, 우리 교회를 라면 맛집으로 알고 놀러 오시는 태권도 관장님. “모두 행복하세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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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오성한 목사] 먼저 보라(1)
    거듭나는 것은 신비다. 언제 어떻게 거듭나는지는 알 수 없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바람을 알 뿐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는다. 거듭남도 그러하다(요3:8). 거듭나면 분명히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거듭남이보이지 않는다고 헛갈려서는 안 된다. 예수가 믿어진다면 거듭난 증거다. 예수가 믿어진다면 거듭났음을 확신하라. 거듭났다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 있음을 확신하라.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고 살고 있다. “와우!” 거듭나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 있기에 아무리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거듭나면 빛의 세계에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요3:5). 이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진실로”라는 말씀을 하면서 하셨는데, 이 말은 억 만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동일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분리 된 것 같으나 하나의 세계다. 설명하기 위해 분리하여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 한다. 초자연적인 삶을 이해 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거듭남은 하늘의 일이라고 하셨다(요3:12).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은 하나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하나님 안에서는 같은 세계다.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은 놀라운 능력의 통로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어두움의 왕국을 통치하는 마귀는 악한 자다. 거듭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왔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마귀는 나쁜 마귀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쁜 것을 줄 수 없고, 나쁜 마귀가 좋은 것을 줄 수 없다. 철저하게 나쁜 마귀는 나쁜 것만 준다. 이것이 영적 세계다. 영적인 세계는 육의 세계와 하나이기에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따라 이 땅에서도 엄청난 차이의 결과가 있다.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신다(요10:10).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다.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일 뿐이다(요8:44).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함이 있다. 마귀는 지금도 속이고 있다.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려놓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일로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듭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먼 미래에 죽은 다음 그렇게 되겠다는 말이 아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믿음은 알고 본다. 천국을 산다. 천국에는 고통이 없다. 천국에는 눈물이 없다. 천국에는 행복하다. 천국에는 절름발이가 없다. 천국에는 소경이, 벙어리가, 병든 자가 없다. 천국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로알고 누리며 살자. 영이 죽은 사람은 육의 삶에도 동일한 영향을 받는다. 그 아비가 마귀다. 그 아비의 욕심대로 행한다(요8:44). 영과 육은 분명히 연결된 하나다. 성령의 사람은 이 땅에서도 성령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은 확실히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와 하나다.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보이는 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사는 자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자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의 몸을 성전 삼으시고 임마누엘 하셨다. 우리 몸 안에 하늘의 보좌가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지만 보이는 세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세계에도 믿음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하신다(눅17:20-21).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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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조희완 목사] 오해와 이해 (수22:10-34)
    제주도의 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께서 어느 날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려고 동네를 지나가다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어디 감수꽈?”하고 인사를 하기에 “예, 심방갑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주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목사님도 신방 감수꽈?”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동네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무당 집에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더니 며칠 전 심방 가다가 만난 동네 할머니가 원인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尋訪)간다고 한 말을 할머니가 “신방”(神房)에 간다는 말로 오해를 하셔서 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 집을 가리켜서 “신방”(神房)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한 말을 할머니가 잘 이해를 못한 나머지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오해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남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남을 오해하는 것도 나쁜 것이고, 남이 나를 오해하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리게 되지만 그러나 오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참 괴롭고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하거나 오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오해를 하더라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을 끝내고 자기 곳으로 돌아가던 용사들이 요단강 언덕에 기념으로 큰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만 큰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를 풀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오해는 속단에서 비롯됩니다.(10-20) 둘째로, 대화하면 오해가 풀어집니다.(13,14,26,27) 셋째로, 오해가 풀어지면 즐겁습니다.(32,33)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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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여백(餘白)
    필자는 목사입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프린터를 해 보면 항상 설교 원고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 옆으로 여백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백이 없도록 설정을 하고 프린트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종이 한 가득 빽빽하게 적힌 글자로 인해서 읽기가 싫을 것입니다. 그처럼 여백이란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무엇에든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바쁜 현대의 삶 가운데서 너무 여러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고 탈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기도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습니다. 악독한 우상 숭배자였고 악녀였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열왕기상 19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는 그 이세벨의 위협에 낙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의 위협 앞에 그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한계가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갈멜산의 그 놀라운 승리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죽기를 간구할 만큼 한 없이 약해졌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두 번이나 구운 떡과 물을 주어서 먹게 하시고 오랫동안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그의 삶에 여백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를 푹 쉬게 하시고 다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고 감사합니다. 연약함을 가진 우리 인간은 그렇습니다. 삶의 여백이 없이 달리기만 하다가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나락을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엘리야를 그렇게 위로하고 먹이고 재웠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목표만을 바라보며 삶의 여백이 없이 달려가는 것을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여백을 가지십시오. 육신과 정신이 쉬게 하면서 영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지치고 낙심된 상황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기진맥진하거나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그렇게 열에 아홉은 어리석은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나를 몰다보면 앞만 보이고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러한 삶은 성공적인 삶인 것 같지만 가장 피폐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의 여백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바쁜 공생애의 삶 가운데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조용히 성부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하는 시간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폭풍같이 영혼을 향한 능력의 사역을 하시면서도 고요한 하늬바람처럼 물러날 줄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열심인척 하지 마십시오. 이제 달리기만 하는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삶의 여백을 만드십시오. 삶의 여백, 그것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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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하수룡 장로] 울이
    오랜 시간 인도에서 선교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에게 카스트 제도와 사회적 편견에 매여 말씀으로 변화를 시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생수에 목말랐고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성령 하나님은 장소나 사람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거침없이 그들에게 임하여 큰 역사를 일으킨 것이다. 언어적 한계와 피부색깔이나 문화적 차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예수를 영접한 이가 늘어난 후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인해 고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왕복거리가 꽤 먼데도 선교사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구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하는 정성을 보였다. 선교사가 전하는 짧은 메시지에 감동받아 인도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진심으로 울어주는 눈물의 감격이 선교사도 엉엉 울게 만든 것이다. 울어주는 이의 마음과 우는 이의 마음이 이어지고 언어보다 시선을 통해 의미가 전해지면서 행복을 빌어주는 최고의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어느 날 마포대교 위의 난간에서 우산을 쓰고 혼자서 고개를 숙인 여고생이 있었다. 잠시 뒤 저 멀리서 한 여순경이 허겁지겁 뛰어와 여고생 앞으로 달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처음엔 경찰을 보고 놀랐지만 진심어린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듣고 따돌림과 떨어진 성적으로 죽기로 결심했던 여고생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가 이런 고민을 알고 혹시나 큰일이 날까 봐 울면서 다급하게 신고한 것이다. “너를 위해 울어 줄 친구 한 명이 있다면 넌 정말 괜찮게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야. 일단 언니랑 좀 걸으면서 얘기하자.“ 이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이가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구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위의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을 위로하고 진정 울어줄 사람이 되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참된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별이다. 장례식장에서 임종 예배 등을 드릴 때 목회자가 장례 예문에 따라 틀에 박힌 말씀보다는 마음을 다해 정말 그 가정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울어 줄 수 있을 정도의 은혜의 말씀이 전해진다면 가장이나 자녀들의 미미한 믿음도 새롭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인도사람들의 울어주는 눈물이 선교사와의 행복한 관계를 만들었고 한강에서 자살의 순간까지 갔던 그 여고생을 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모두 울어 줄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어줄 이가 있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큰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마르틴 니묄러 목사는 나치 정권의 폭력이 닥쳤을 때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하고 마지막엔 교회로 끝을 내는 것을 보아도 자기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이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인생의 끝과 엄청난 환난이 엄습했을 때 진정 나를 위해 과연 울어줄 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항상 우리 주님은 날 위로해 주시고 울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남을 위해 주님처럼 내가 먼저 울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 그리하면 최고의 관계가 회복되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분명히 변한다.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3-11-29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7) (민12:1-3)
    교회는 성도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야 하겠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장로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성도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참 민주적이고 좋을 것 같습니까?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사람이 통치하는 세상과 같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보여야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것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간혹 교회 안에서 우리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은근히 원망과 불평이 깔려있는 말투입니다. 이런 원망과 불평이 비방으로 튀어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막측합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 우리 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는 원망과 불평, 비방의 말을 했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목회자의 공화국처럼 보이는 것이 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모세에게 맡겼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70명의 어른들, 장로, 지도자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장로들은 모세의 통치를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당연히 모세의 공화국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명을 맡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 누구의 공화국처럼, 누구의 왕국처럼 보이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착각하여 이스라엘이 자신의 공화국인 줄 알 때 그것으로 끝입니다. 순간이라도 이 사실에 대해 모세가 실수하면 모세는 곧바로 즉결심판에 넘겨집니다. 그래서 아주 순간적인 착각이었지만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친 것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100%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세는 끝도 없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기색만 살피면 됩니다. (에1:14)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목사가 목회를 하는 여정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사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구스여자를 핑계 삼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70명 장로들의 충성을 자신들에게로 옮기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권력을 따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창3:4-5)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성경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미리암만 나병에 걸린 것을 보면 비방의 주인공은 미리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이 주도하는 일에 아론이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이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3: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론의 비방이 아니라 미리암의 반역이었습니다. 미리암의 반역이 모세의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십보라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세의 통치를 비방하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신 것에 대한 비방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미리암의 비방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장막을 떠나는 순간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민12:9-10)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이스라엘의 문화는 남남 여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 반, 여 반을 나누었습니다. 기관도 남녀로 구분해서 분류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미리암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성을 돌보았을 것이며, 여성들의 대변자였을 것이며, 여자들의 세계를 주도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갔으니, 모세를 돕는 배필인 아내로서의 사명은 누나 미리암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병에 걸린 오빠 나사로를 대신해서 동생 마르다가 집안일을 돌아본 것처럼 말입니다. (눅10: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이런 위치에 있었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1-29
  • [김성수 총장]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의 대상이었던 위치에서 선교 대국으로 성장 발전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감사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선교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한번쯤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또 변화하고 있는 선교 동향과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보다 낙후된 나라로 가서 재정적인 도움을 좀 베풀어 주고 오는 것을 선교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들도 ‘선교’, ‘선교사역’, ‘선교사’, 또는 ‘선교지’라는 단어들을 아직도 주로 “지리적 확장”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 또는 선교사역은 주로 소위 서구 기독교 국가로부터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지리적 이동 또는 확장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선교사는 이러한 확장을 감당하는 주역이다. 선교지는 서구사회 밖에서 이러한 확장을 진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지역이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을 진부한 것으로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특별히 두 가지 요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요인은전통적 선교지였던 제3세계 교회의 성장이다. 오늘날 세계 교회의 거의 2/3는 소위 전통적 선교지인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덧 붙여서 제3세계 교회의 생동감, 그리고 이들 제3세계 교회들이 지금 서구 교회보다도 다문화 선교사들을 더 많이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세계를 선교지로 보는 시각이 진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요인은 서구 교회의 쇠퇴이다.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이 소개하고 있는 바렛트(David Barrett)의 지적을 간접적으로 인용해 보자. 바렛트에 의하면, 1980년대를 통해서 서구 교회는 매일 7,600명의 신자들을 잃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서구 교회의 점증하는 명목상의 신자들,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간주의자의 세계관에 대한 굴복, 그리고 타문화선교에 대한 관심의 상실을 생각하면, 오늘날 선교지는 진정 어느 곳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선교에 대해서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와 20세기를 지배해 온 선교 운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관심은 이 시기의 선교 운동을 지배하였으며, 이러한 관심은 오늘날 교회의 선교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선교는 더 이상 소위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에서부터 “비기독교적”인 제3세계로의 문화 간 이동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없다. 선교는 멀리 있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간에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증거의 문제다. 선교는 단순히 선교사들을 파송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체 교회를 파송 하는 과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슬로건이 이를 잘 포착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모든 6개 대륙에서, 6개 대륙으로 그리고 6개 대륙으로부터 행해지는 사역이다. 모든 대륙에서 우리는 선교 본거지와 선교 필드를 보게 된다. 둘째선교는 전체 교회가 총체적인 복음을 온 지구촌에 전인을 향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구원이 전 세계에 전달되고 알려 지도록 의도 하셨는가? 이 점에서 예수님을 모하메드와 대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둘 다 그들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유효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하메드는 책을 썼다: 알라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코란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으셨다. 그는 신앙 공동체를 결성하고 이 공동체에다 메시지를 구현하고 선포하도록 위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구현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계다. 이들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함께 좋은 소식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 지르는 다양한 소명들 속에서도 좋은 소식을 구현해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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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결코 자신의 무덤을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조금이라도 우상시할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유언을 중시하여서 스위스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월이 흐르면서 후세의 사람들은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칼빈을 깊이 흠모하던 네델란드인이 수소문 끝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유언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비석 대신에 존 칼빈의 이니셜인 J. C.를 새긴 붉은 벽돌을 박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비로소 칼빈이 묘는 그 위치가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죽은 지 435주년이 되는 때에, 스위스 제네바 시의회 의원인 미셸로제티라는 사람이 그 칼빈의 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무덤 주위에 대리석을 깔고 철책을 두른 다음에 그 앞에 정식으로 동판까지 설치했습니다. 그 동판은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이라고 쓰인 동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샤를 죠르지라는 이름의 한 제네바 시민이 동판을 설치한 미셸로제티를 고발했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칼빈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분의 묘를 치장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고발을 접수한 제네바 주 정부 검찰총장은 개인의 유언이 과연 형사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독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의 묘지를 꾸미고 동판을 세운 것은 잘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뜻은 다릅니다. 자신이 종교개혁의 과업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결코 자신을 기념하는 무덤의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고, 그리고 동판을 세운 사람을 고발한 사람은 바로 그 칼빈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분들의 이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선조의 생가나 묘지를 거의 신성시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꾸미고 기념물로 삼으려고 하는지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들의 신앙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사참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어서 출옥을 하신 고 한상동 목사님은 사역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별세하시기 전, 후배 목사님들과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나에 대해서 기록하고 나에 대해서 말한 모든 문서들이나 사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남겨야 될 만한 몇 가지만 최소한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라.” 왜 한 목사님이 이런 유언을 하신 것일까요? 자신이 복음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이 기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세상이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 인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기에 그런 기념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순교와 헌신의 역사는 책이나 기록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는 것으로 배움과 귀감이 되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거나 생가를 복원하여서 기념하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드린 선조들의 신앙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여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반추해 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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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이정희 목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I. 서언(序言) ‘우리 말 바르고 아름답게’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이런 면으로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표어와 함께 오늘도 올바른 호칭과 지칭어에 대한 내용으로 논하고자 한다. 먼저 본 호에서는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조부모(祖父母/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호칭어와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의 뜻과 유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시댁이나 친정의 구분 없이 많아졌다.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손주의 입장에서 조부모님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1. 뜻과 유래 :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자어는 조부와 조모이다. 그 뜻은 조상 조(祖), 아비 부(父), 어미 모(母)자 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다.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도 문제는 없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조모, 조부보다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을 논할 때마다 의문이 되는 것은 한자 용어와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이나 발음이 전혀 다른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한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란 순수한 우리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할아버지에 대한 친족용어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란 책에 ‘한아비’라는 호칭으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다. 그다음은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하나비’로 표기하였고, 친족용어들을 모아서 정리한 ‘최재석’의 ‘한국의 친족용어’에 의하면 할아버지, 할아버님, 할아범, 할애비, 조부, 조부님, 조부주, 현조부, 가조부, 조고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었으나, 결국 중세국어의 음운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되었다. 2.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할까? 먼저 아버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어머니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부른다. 하지만 양가의 조부모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을 때는 구분을 위해서 ‘외’자를 붙여서 호칭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구분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수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생존해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曾祖)’라는 말을 붙여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로 부른다. 그러나 외가의 증조부들에게는 ‘진외(陳外)’자를 부쳐서 ‘진외증조 할아버지’, ‘진외증조 할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 결혼해서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존칭어인 ‘님’자를 붙여서 할아버님, 할머님으로 부르면 된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에게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소개할 때는 ‘시 할아버님’, ‘시 할머님’으로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와 외손주를 호칭하고 지칭할 때는 어떠할까? 누구든지 마찬가지지만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즈음은 휴대폰에 손자 손녀의 사진을 배경 그림으로 넣을 정도로 유별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스러운 손주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칭과 지칭보다는 그냥 가장 친근한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나 손주가 결혼해서 자녀가 생기면 그 아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OO 아범, OO 어멈’, ‘OO 아비, OO 어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이런 친족용어의 호칭어와 지칭어들은 흔히 사용하는 익숙한 말들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혼돈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더 노력한다면, 가족 상호간의 아름다운 위계질서와 집안의 화목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바람직한 가족 간의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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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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