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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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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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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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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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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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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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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5: 삼복(三伏)더위와 개(犬)에 대한 비속어
    I. 서언(序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날들, 이제 삼복(三伏)중에 초복(初伏)과 중복(中伏)이 지나고 오는 15일(월)은 말복(末伏)이 된다. 옛날부터 이런 삼복더위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입추(立秋)와 처서(處暑)를 기다리기도 했다. 이런 기대 속에 지난 8월7일에 이미 입추가 지나갔고, 23일에는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가 온다. 이런 즈음에 삼복의 날들이 오면 왜 ‘개’를 생각하게 될까를 논하고자 한다. 이는 영어권에서도 복날을 ‘dog days’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복날이 되면 왜 보양식의 복달임으로 닭이나 개고기를 즐겨먹을까? 본 호에서는 이에 대한 유래와 오해를 살펴보고, 또한‘개’와 관련한 용어들과 쓰지 말아야 할 비속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삼복(三伏)과 개(犬)의 연관성 서언에서 논한 대로 삼복(三伏)이 되면, 왜 개고기를 생각하게 되고 보신용으로 먹으려고 할까? 실제로는 아무 연관성이 없다. 단지 복날의 복(伏)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변에 개 견(犬)자로 되어 있다는 것뿐이고, 마치 여름철 무더위에 사람이 개처럼 납작 엎드린 모습과 같다고 해서 엎드릴 伏자를 쓰고 있을 뿐이다. 또한 영어에서 복날을 ‘dog days’라고 하는 이유는 시리우스(Sirius)란 별이 ‘큰 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삼복더위 때가 되면 이 별이 태양과 함께 떠올라 무더운 여름 날씨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서 ‘dog days’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복날과 개는 단어의 형성과정과 용어상으로는 관계가 있지만, 개장국을 먹는 일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다만 먹을 것이 부족했던 옛날에 여름철의 보양식으로 개고기나 닭을 구하여 먹는 것이 가장 손쉬웠기 때문에 이런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III. 개(犬)에 대한 비속어 우리나라는 개와 연관된 말을 할 때는 거의 다 비속어를 쓴다. 예를 들어 ‘개소리’, ‘개새끼’,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등등 많은 비속어들과 개를 비하해서 사용하는 말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의 뜻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는 말’을 뜻하고, ‘개새끼’는 하는 짓이 얄밉거나 더럽고 됨됨이가 좋지 않는 사람을 말할 때 쓰는 비속어이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은 천하게 벌어서라도 떳떳하고 가장보람 있게 쓴다는 뜻으로 이 말도 역시 천하게 돈을 버는 것을 개로 비유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개뿔도 없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 ‘개 떼 모이듯 하다’ 등, 개를 비하하거나 비속어로 쓰는 용어들이 너무 많이 있다. 또한 직접 개와는 전혀 관계없지만 ‘개꿈’이란 말도 그렇다. 여기의 ‘개’는 동물의 개가 아니고 접두어로 쓰여 질 때 ‘야생의’, ‘마구 되어서 변변하지 못한’이란 뜻으로 명사 앞에 붙여서 사용되는 말이다. ‘개죽음’, ‘개살구’ 등의 말도 다 그런 의미의 말들이다. 또한 ‘개꿈’이란 말은 꿈을 꿀 때 개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어수선하게 꾸는 꿈’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상에서 본대로 개는 옛날부터 천하게 취급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과거 조선시대의 유교 문화권의 삼강오륜을 논하던 시대에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근친상간을 일삼는 동물이 바로 ‘개’였다는 점에서 개는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이면서도 저속한 동물로 취급되었고, 그래서 비속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견해들이 있다. IV . 결 어(結語) 결과적으로 볼 때 그 유래가 어떠하든, 개와 관련된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너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개 팔자가 상팔자’, ‘반려견(伴侶犬)’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개를 좋아하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삼복더위의 무더운 여름철에 복날과 관련된 개에 대한 오해와 엉뚱한 비속어 등으로 인해 불쾌지수를 높이는 일들은 없어야 될 것이다. 항상 경우에 합당한 말과 아름다운 말로서 막말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이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또 하나의 사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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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신재철 목사] 사장님이 너무 싫다!
    사장님이 너무 싫다! 새벽 신문 배달, 첫 번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동생을 등교시킨 후 나는 잠시 쪽잠을 청한다. 다음 일정을 위해 알람 바늘을 9시에 돌려둔다. 혹시나 일어나지 못할까 싶은 불안감에도 눈꺼풀은 내려앉는다. 눈 한번 감은 것 같은데 신경질적인 알람 소리는 울리고 나는 지겹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시계 버튼을 누른다. 익숙해질 법한데 내 입에서는 욕보다 더 짜증 섞인 소리가 튀어나오며 두 번째 일정이 시작된다. “아, 지겨워.” 출근하는 식당, * * 칼국수. 충남대학병원 건너편에 있는 칼국수 전문점이다. 메뉴는 다양하다. 찌개류, 덮밥류, 돌솥비빔밥까지. 나는 식당에서 오토바이를 타며 배달을 한다. 가정집 배달은 별로 없다. 주로 대학병원이다. 의사와 직원들 식사는 물론이고 병원식에 질린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비밀스런 접선도 진행된다. 병원 출입 시 경비 아저씨에게 직원식사로 왔다는 당당한 뻥은 필수다. 승강기에 올라타면 음식 냄새에 소리 없는 눈총이 불편하지만 모르는 척, 더 당당해야 한다. 어렵게 환자에게 배달을 완수하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식당 스티커를 몰래 병원 안에 붙여둬야 한다. 화장실과 휴게실 구석이 ‘딱’이다. 때로는 환자들이 사용하는 서랍장 안쪽에 넣어둔다. 나의 이런 위험스런 도전은 다음 환자에게 큰 복지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문을 나선다. “재철, 뭐해줄까?” 배달과 그릇 수거를 끝내고 들어온 내게 주방 이모가 반가운 질문을 한다. 식당 직원은 점심 식사가 늦다. 다른 사람들 식사 준비하는 것이 일이기에 모든 일정이 끝나면 오후 3시 정도에나 함께 늦은 식사를 한다. 절대 오후 3시 전후로 식당에 가면 안 된다. 사장 빼고는 아무도 마음으로 반겨주지 않을 시간이다. 여하튼 나에게는 행복한 선택의 시간이 주어졌다. 주방 이모는 언제든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만들어 주었다. 칼국수를 배달하지만 칼국수를 싫어한다. 그래서 엄마 느낌 나는 된장찌개와 돌솥비빔밥을 주로 부탁드린다. 돌솥비빔밥을 앞에 두고 드리는 감사의 기도. 그런데 금방 기분이 별로다. 내 앞자리에 사장님이 앉으셨다. 최근 사장님은 내게 회유와 압박을 넣는다. 학교 복학이나 군 입대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매일매일 그만두지 말라는 말씀을 한다. 분명 학교에 다시 돌아가거나 군대를 갈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미루고 식당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한다. “칼국수 가게가 잘 되고 있으니 더 일을 도와주면 안될까?” 20대 초반의 아르바이트 학생이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데. 그도 상황이 어려우면 군대라도 빨리 다녀와서 학교로 가겠다고 했는데. 자신의 장사에 차질이 있으니 복학을 미루고 일을 더 하라는 것이다. 난감하다. 아니, 속상하다. 철가방을 들고 다니며 내 또래 학생들과 마주칠 때 보다도 기분이 엉망이다. 무방비 상태로 듣게 되는 손님들의 막말과 모욕에도 웃어넘겼다. 그런데 지금은 웃어지지 않는다. 사장님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보다 몇 살 많은 아들이 있는 사장님. 그래서 열심히 사는 내가 아들 같아서 좋다고 하더니. 다 거짓말이다. 그 좋아하던 돌솥비빔밥인데 그냥 꾸역꾸역 욱여넣는다. “돌비 12개요!” 돌솥비빔밤 12개 배달이다. 분명 의사들이 때를 놓치고 늦은 점심을 시켰을 것이다. 주방 이모가 급히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고 나도 철가방을 살피며 준비한다. 음식이 나오고 무거운 돌솥이 하나씩 채워진다. 한 가방에 12개가 들어가지 않는다. 국물과 김치도 넣어야 하고, 돌솥 12개를 채우려면 철가방 2개를 가득 채 날라야 한다. 돌솥 그릇이라 엄청 무겁다. 들고 나가는 내 마음도 무겁다. 그런데 사장님은 무거워진 철가방을 보며 즐거워한다. 바를 정(正)자로 12개를 표시한 전표가 그에게는 행복이다. 주문이 많으면 사장은 웃고, 직원은 운다. 돌솥 12개의 무게에 나도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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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김성수 총장]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일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일 하루의 삶 또는 예배, 기도, 말씀, 전도, 구제와 같은 삶의 방식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별난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영위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일상적인 문화와 사회적 삶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와중에서 영위되는 삶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 자체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는 세상을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오신 것과 같이 세상을 향한 섬김과 봉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므로 교회의 강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현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신자로서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구비시켜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어떤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의 광범위한 영역, 즉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는 구원받지 못한 삶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세상은 항상 자신과는 별개의 실체로 저 멀리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적응적인 경향성을 보여서도 안 되지만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잘못된 경건성을 추구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세상 도피적인 경향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 속에서 문화적 순종의 기독교적 삶을 완전히 영위하지 못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된 거듭난 삶은 세상 도피적인 삶이나 세상 적응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삶을 통해서는 물론,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증거하는 증거적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는 항상 두 가지 위험성이 상존해 왔습니다. 첫째는 우상 숭배적인 세상 문화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위험성이며, 둘째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안락한 신앙의 삶을 살고자 시도하는 위험성입니다. 이 두 가지 시도 모두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문화 발전에 사랑과 열정과 공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문화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은 소명과 과업을 항상 복음의 조망 하에서 책임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증거의 삶은 언어적인 복음 전도의 행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성경적 증거는 인간 삶의 전체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증거, 그리스도인의 직업과 그리스도인의 선교는모두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이 세상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고 문화적 갱신과 순종의 과업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것은 세상 속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삶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웃을 봉사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종으로 섬겼듯이, 그의 백성들도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을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동료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모든 구체적인 인간 삶의 노정에서, 그리고 오염된 인간 문명의 구조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곧 의복이 필요한 자들에게 의복을 나눠주며, 목마른 자들에게 물을 주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어려움을 당하는 영혼들에게 위안을 주며, 권력에 희생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며, 헛된 거짓 신들로부터 사람들을 자유케 해주며, 혼란한 세상 속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며,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며, 자유와 평강의 소망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그리스도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리고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 신앙을 구현하는 삶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사회 질서와 구조의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 인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표본심리 메카니즘이 행위 선택의 가장 큰 결정요인인 반면에, 현대세계 체제의 동인이 작동되는 사회에서는 합리주의의 증가, 분화의 증가, 귀속주의의 감소, 가치일반화의 증가 등이 현대 사회의 미시구조의 특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속 사회의 구조에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구조는 단순히 자연적 질서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결정에 의한 산물이며 인간의 협력과 노력에 의해서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싸워야 할 책임은 제자도의 한 일면입니다. 이것은 종교 위에 부가되는 하나의 첨가물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핵심에 있는 어떤 것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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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7)
    사랑의 은사 사랑의 은사는 큰 은사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가 있지만 사랑의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이고 최고의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이 잘 안 되기도 합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고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 충만 받고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의 하나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은사가 있으면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며 사는 것이 쉽고 즐거움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이 더 힘들고 미운 생각이 사라집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을 얻는 것이 재산이고, 사람을 잃은 것이 큰 손해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람에 대해 기대를 낮추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람에 대해 욕심을 버립니다. 욕심 이 끼면 사랑이 아닙니다. 욕심을 가지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사람에 대해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과 사랑의 은사를 하나님께 사모하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은사를 주십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 최고의 삶, 지혜의 삶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입니다.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며 식어진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능력 사랑은 능력입니다. 사랑은 핵폭탄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세상 권력보다 사랑의 능력이 큽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사단 마귀는 잔인합니다. 사랑하면 서로 느끼고 통합니다. 사랑으로 대화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육신의 병, 마음의 병, 마음의 상처가 치유됩니다. 미움은 스트레스와 병의 원인이 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쫒는 능력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은 사단과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참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사랑으로 전도하고, 상담하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사랑은 관계의 능력이 되고 갈등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미움은 관계를 깨뜨리고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랑이 최고의 능력이고 설득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교육해야 교육이 잘 됩니다. 사랑은 리더십의 비밀입니다. 다윗의 리더십의 특징은 사랑 실천입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시기 질투하며,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마음으로 원수까지 사랑을 실천한 다윗을 향해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했습니다. 요셉의 리더십도 사랑의 리더십입니다. 구덩이에 던지고 애굽에 팔아넘긴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요셉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의 능력을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이고 지혜자입니다. 참 사랑은 말만 가지고 하는 사랑이 아니고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병든 자를 돌보아 보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리더와 인격이 성숙한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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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황권철 목사] 요한(John's Behind Stories)-사랑의 사도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이다. 사도요한의 정보는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관한 일반적인 자료는 그 형제 야고보를 통해 언급한 고로 그 외 부분만 기술하고자 한다. 요한은 야고보 형제로 갈릴리 벳새다 출신 어부로서 예수님 사후에 모친 마리아를 돌본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다. 요한복음과 요한 일, 이, 삼서와 계시록을 집필했다. 그는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선교했으며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밧모섬으로 유배를 갔다. 사도들 중 제일 먼저 순교했던 형 야고보와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사도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역하고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또한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를 당하거나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은 주후 98년 경 에베소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에베소에 거주하는 동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몇 년간 모셨다고 한다. 요한이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을 때 로마의 도미티안(Domitian) 황제의 핍박을 받아 밧모 섬에 유배당하게 되는데 밧모 섬에 있는 계시의 동굴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묵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유배에서 벗어난 후 요한은 에베소로 돌아왔으며 트라얀 황제 시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요한은 소아시아 전역에 교회를 세우고 주님이 돌아가신 후 68년을 지내다가 에베소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우뢰의 아들 요한    요한은 세배대와 살로메의 아들로서 야고보의 동생이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보아네르게(Boanerges) “천둥의 아들(Son of Thunder)”이란 별명을 가졌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그들이 주님의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하자 성급한 요한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해 버리라고 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마 9:54). 이 같은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갈 5:22-23).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마 4:21-22; 막 1:19-20; 눅 5:10).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모친이 살로메(Salome)였음을 시사해 준다(마27:56; 막 15:40). 마가가 그 아버지와 품꾼들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의 가족들이 부요하게 살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가는 그의 가족이 가버나움이나 그 근교에 거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막 1:21). 세배대의 아들로 그를 언급할 때 두 번째로 불러짐을 보아 야고보의 동생 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와 함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으며(마 10:2; 막 3:17; 눅 6:14), 그는 예수와 가장 가까웠던 세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때로는 두 사람이 선정될 때 요한이 부름받기도 했다. 예수께서 유월절 준비를 위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함께 보냈으며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사도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갔다.  요한은 주님이 승천 하신 이후 베드로와 함께 동역했다. 사도행전에서 세 번 언급이 되는데 세 번 모두 베드로와 관련되어 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었던 열한 사도들의 명단에 요한의 이름은 베드로 이름 다음에 나온다(행 1:13).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 예수 이름으로 고쳐 주었다. 그때 거기 모인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고 밤새 감옥에 갇혀 유대 지도자들의 조사와 협박을 받고 풀려났다(행 3-4장).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의 사역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진실함을 알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행 8:14-25).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도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요 대변인이었다. 그 형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AgrippaⅠ) 에 의해 처형되었다(행 12:2). 그리고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한번 언급한다(갈 2:9).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기독교 지도자대회에 관하여 말하면서 기둥으로 일컬어지는 저명인사 세 사람을 언급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언약사상을 마감한 요한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 2, 3서를 기록하고 마지막으로 계시록을 기록했다. 그가 쓴 복음서는 공관복음과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는 당시 유대와 로마와 헬라라는 시대적인 정황에서 복음서를 기록했지만 요한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 그는 태초에서부터 언급하여 당시 유대와 지배국가 로마와 헬라 문화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초자연적 복음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흩어진 유대의 디아스포라들에게 당시 이단자들인 영지주의 유혹에 미혹 받지 않도록 특별한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말세에 일어날 교회의 모든 환란을 이기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나아갈 천국을 소개하므로 구원역사의 언약사상을 마감한 최후의 사도였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사상에 변함이 없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8-9). 그는 순교는 하지 않았으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순교자였다.  또한 그는 신약의 묵시록을 기록한 자이다. 신약 성경의 제일 마지막 책으로써 문학적 유형으로 보면 구약의 에스겔서, 다니엘서, 스가랴서와 대단히 흡사하다. 그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와 결별한 때였고, 또 로마 제국에 의해서 독립된 운동으로 간주되었던 시기이다. 저자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이름이 요한이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예)이다. 이 책의 환상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신앙 때문에 유배지인 밧모섬에서 받은 것이다. 그는 아시아교회에 잘 알려진 인물이며 이미 예언자로 인정받았고(계 22:6, 9, 19), 전에도 계시적 성격을 띤 환상을 받아 왔던 사람이었다. 유스티누스(Justinus AD 150년경)는 계시록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인 그리스도의 사도중 한 명인 요한에 의해 쓰여졌다고 했다. 그 외에도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AD 200년경), 오리게네스(Origenes AD 225년경) 등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 요한의 저작설이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서방교회들에 의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2-08-10
  • [특별기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 - 영진칠기사와 안세제 집사
    지금은 폐업했지만 부산시 동구 좌천동 가구 1번지 거리에 있었던 ‘영진칠기가구점’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나전칠기(螺鈿漆器) 전문 가구점인 영진칠기가구점은 양질의 제품을 공급했던 신뢰받는 업체였고, 영진칠기 가구점은 부산은 물론 전국적으로 입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고, 1970년대 아파트 붐이 일면서 크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영진칠기사의 창업주 안세제(安世濟, 1927-2021) 대표가 기독교 신자였고 그가 얻은 상당한 재물을 교회에 기부하거나 장학재단을 설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경남 진주 봉래동에서 7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한 안세제 집사는 1970년대 초 영진칠기 가구점을 열었는데, 그는 특별한 경영원칙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직과 신뢰, 그리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것이었고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사업을 시작했던 당시만 하더라도 아침에 첫 손님이 왔다가 그냥 가면 오늘 재수가 없다며 뒤에서 욕을 하거나 소금을 뿌리던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안세제 집사는 첫 손님이 와서 가구점을 둘러보고 그냥 나가도 타올을 곱게 싸서 선물했다고 한다. 물건도 사지 않고 그냥 가게 되어 미안해하는 손님에게 “우리 가게를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인사한 것이다. 다른 가게는 재수 없는 첫 손님이라 하였으나 안세제 사장은 잠재적 고객으로 예우하고 대우해 준 것이다. 그는 가구를 판매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구매자가 원할 때는 언제든 가구를 수선해 주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기업도 판매 후 관리, 곧 AS 개념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AS담당 직원을 채용해 부산 전역을 순회하면서 무료로 훼손된 가구를 수리해 주었다고 한다. 물론 제품을 판매하기 전에도 가구 상태를 사전에 철저히 점검하고 말끔히 청소하여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최상의 칠기 가구를 전시했다고 한다. 이런 정신으로 사업을 했으니 신뢰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사업이 번창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정신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안세제 사장은 본래 부산진교회 출석하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 신앙정신을 따라 70여명의 성도들이 부산진교회를 나와 성산교회를 설립할 때 설립 교인으로 참여한 이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성산교회 집사로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고, 물질적으로도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다. 특히 2011년 10월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해운대의 110여 평의 상가와 덕천동의 400여 평의 부동산을 성산교회에 헌납하고 장학사업을 시작하게 했다. 기증받은 부동산(현재 약100억원 상당)의 임대료만 연 1억 원이 넘는데 매년 100여명의 교인 자녀 및 지역 사회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하고 있다. 이 때 안세제 집사는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여러 성도들과 지역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도리어 성도들에게 감사했고, 자녀들도 이버지의 결정을 존중하고 순종했다. 안세제 집사는 부동산의 교회 기증과는 별도로 2013년 12월에는 영진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안세제 집사는 이처럼 자신이 땀 흘려 모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위해 장학사업을 전개했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인색했고, 일생동안 절약하며 검소하게 살았다. 부인 임성애 권사에게는 명품 가방 한번 사준 적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는 꼭 필요한 용돈만 주고 그것도 일일이 사용처를 기록하게 했다고 한다. 자신은 소박하게 살면서 남에게 한없이 관대한 삶을 사신 것이다. 신앙인으로 선한 모범을 보인 안세제 집사는 2021년 12월 28일 9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정관의 백운공원 묘지에 묻혔다. 그의 3남 2녀, 곧 5남매는 다 믿음으로 성장하여 각기 교회에서 장로로 집사로 혹은 권사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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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2-08-04
  • [박동철 장로] 라이얼선교사가 이끈 백정해방 형평운동의 역사적 이해
    요즘 경남도립 미술관을 가면 궁금증이 생기는 형평(衡平)운동의 예술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백번의 고통’이란 제목의 전시회는 옛날 당시 백정의 신분 타파를 위한 사회운동이었던 형평사의 각종 유물과 역사자료 문학작품으로 구성돼 눈길을 끌었다. 백정의 고통과 현대적 차별은 여전히 있다는 취지다. 형평운동은 1923년 진주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일어나 사회운동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조선 오백 년 사회 폐악적 관습을 깨는 사회혁신이 되었다. 1967년 신성일 주연의 ‘일월’이란 영화의 이야기는 근대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조상의 백정 신분 때문에 결혼에 방해를 받는 시대상을 그린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외에도 조명희 작가의 낙동강 등 문학작품이 백정의 슬픔을 담은 소설로 남아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난 이러한 형평운동의 저간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인간해방의 불씨가 타국에서 들어온 선교사의 남다른 복음운동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30년이 넘은 경남의 선교역사의 중심에는 당시 126명의 호주 선교사들의 순교적 복음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부산으로 거제로 들어와 경남 전역 곳곳에 복음을 전한 호주 선교사들의 선교 발자취는 경남의 선교기념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형평운동과 관련되는 선교사는 데이비드 머리 라이얼 선교사이다. 라이얼 선교사는 호주 멜버른대 문과 출신으로 아버지 선교사의 유지를 받아 190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다음 해 디커니 엘리스 로리 여사와 결혼한 이틀 후 곧 부산을 거쳐 진주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라이얼 선교사는 옥봉교회 지금의 진주교회 담임으로 섬겼다. 당시만 해도 교회 내 예배석에는 백정 신분이 동석을 할 수 없었다. 백정들이 따로 예배 드리는 장면을 보고 라이얼 선교사는 1910년5월 일반성도와 백정이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이에 성도 4백 명 중 3백 명이 반대하고 예배당을 나가는 사건이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기독교역사연구회 박시영 목사 기록) 바로 이날 예배가 진주지역 백정 신분 해방 형평운동의 효시다. 지금 진주교회 앞에는 형평운동의 기념석이 있다. 이후 진주지역에서 백정 신분 타파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진주지역에 백정이 400가구 살고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백정 해방은 백정 신분에서 부를 이룬 진주지역 이학찬이란 자가 형평사 단체를 1923년 4월 24일 조직하고 전국화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백정 멸시의 사회관습이 타파하게 되었다. 백정이기 때문에 받은 고난은 말할 수 없었다. 호적상 신분 명기를 분명히 하고 몸에 붉은 점을 찍어 나타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악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 백성을 더욱 장악하기 위해 더욱 심했다고 전해진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축복 아래 신분 차가 있는가. 라이얼 선교사는 예배의 장면을 본 순간 예수 구원에 만인이 평등함을 선포한 것이다. 초대 선교사역은 많은 우리들의 악습을 타파했다. 남녀 차별을 타파하고 남성들의 축첩을 없앴다. 설교가들은 말씀을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니라(갈3:28절). 예수 구원 십자가 위에서 강도마저 예수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구원받은 사건이 있다. 그 역사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우리의 지난 어두웠던 시대를 결국 복음의 힘이 혁파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 진주 형평사 운동은 정치적 대전환기마다 이념에 편승되는 때도 있었다. 지난날 어두웠던 시대 신분 타파 운동이 기독교 복음의 순수함에서 이뤄졌다는 사실(史實)이 오늘날 모두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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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3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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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박동철 장로] ‘팬덤 문화’가 교회와 사회에 주는 폐해
    요즘 세상에 ‘팬덤’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팬덤(fandom)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단어로 요즘 온·오프라인에서 생겨나는 지나친 팔로어(follower)를 지칭하고 있다. 팬(fan)과 지역(dom)의 합성어로 팬의 집단을 말한다. 어떤 인물을 따르는 팬의 현상은 나쁠 게 없다. 스포츠계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위 ‘오빠부대’가 지난 70·80년대 크게 유행했다. 나훈아, 남진, 조용필의 오빠부대는 크게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80년대 이후 스포츠 문화가 대중을 탈 때도 팬 문화가 생겼으며 사람과 사람들의 좋은 관계를 형성해갔다. 한데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회자되는 팬덤 현상은 그 정도가 넘치고 왜곡 돼 새로운 사회 병리현상이 되고 있다. 스타급 정치인들을 따르는 팬덤이 지나치게 경쟁화하고 나아가 맹목적 대립화하는 경향이 있어 개선 돼야 할 현상으로 대두된다. 정치이념에 대한 선택권으로 자연스러운 지형이 형성되는 수준을 넘어 무조건 지지와 함께 선거판에 ‘묻지 마’ 투표현상의 사회적 역기능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지역 감정 선거에서 나아가 연대의 진영, 성별 진영으로 나뉘어 폐해를 만들어 내는 현상들이 큰 걱정으로 보인다. ‘개딸들’, ‘이대남’등 남녀 대결이라도 하듯 분열 팬덤화하는 사회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 시대도 팬덤 현상이 있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12제자를 찾을 때만 해도 많은 사람이 따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곳저곳에서 배척을 당하시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병자를 고치실 때 갑자기 예수를 따르는 팬덤 현상이 생겨났다. 마태복음 14장 13절 “예수께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따라간지라”했고, 14절에 “큰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 병자를 고쳐주시니”라고 했으며, 이후 저녁이 돼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사하셨다.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의 떡이 남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후 또 두루 다니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팬덤 현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의 팬들은 갈수록 떨어져 나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십자가 도의 행사 앞에는 애제자 열두 제자마저 떠나버리는 비극을 만들었다. 오늘날 사회현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그림인 팬덤 문화를 지적하는데 예수님 시대상을 대조함이 적절한지는 의문이 갈 수도 있지만 우리들의 인간 군상(群象)에서 교훈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특별히 정치문화의 팬덤 현상은 사회 공동체를 왜곡시키고 건강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다. 무엇보다 맹목적 진영의 편가름에서 팬덤으로 왜곡 확산되는 기이한 사회현상이 정작 한국의 정치발전을 이끌 수 있을까 짐작이 충분하다. 이러한 저급한 정치문화가 교회에도 침투, 예수님의 십자가 도만을 바라봐야 하는 복음의 본질을 뒤로하고 목회자나 한지도자에 팬덤화하는 교회 공동체도 생기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그리고 이단종교화의 큰 문제도 보고 있다. 복음의 진리만이 영원히 죄인인 우리를 자유케 할 권능이 있을 뿐이다. 사회 한 분야의 병폐가 여러 곳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정치권의 문화현상이 사회 여러 분야에 파급 영향을 줌은 불문가지다. 오늘날 진단되고 있는 정치권의 잘못된 팬덤 현상이 사회 저변에 확산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한국 기독교 교회 공동체가 대형화하고 유능한 설교가의 인기몰이가 사회 팬덤 현상에 편승될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 기우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복음 앞에 선 구원의 백성, 우리들은 주님 십자가 죽음 앞에는 말할 수 없는 팬덤이 일어나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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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9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움은 사단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못하며 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듭난 자, 은혜받은 자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쉽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 자녀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고 거짓 된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의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사랑이 아니고, 마음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랑, 실천하는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사랑이요 위선입니다. 잘 가르치고 설교를 잘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위선이요 가짜입니다.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불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미움은 사망이요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자신도 살고 남고 살리는 생명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 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진다 예수님은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언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하고 마음이 따뜻하지 못합니다. 말세는 자 기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세는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식어지고,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기주의 자신만 사랑할 때 삶이 삭막해지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들이 사납고 악합니다. 정죄하고, 고소하고, 죽이는 일까지 행합니다. 사랑이 식어진 가정과 교회는 행복하지 못 합니다. 사랑이 부흥과 화목,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말세의 징조, 사랑이 식어진 시대에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령 받아 사랑의 열매 맺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 미움이 가득 찬 삶은 잘못된 영,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악하고, 사납고, 거짓되고, 미움이 가득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이단의 잘못된 점을 알고 빠져 나올려고 할 때 협박합니다. 만물의 마지막때, 말세에 정신 차리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말세에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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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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