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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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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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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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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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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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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4)
    예수님의 사랑 나폴레옹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실패 했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십자가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억지로 죽어주신 것이 아니요 스스로 자발적으로 죽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이 많아도 나 대신 죽어 줄 자가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 하나 대신해서 죽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인데 사랑의 복음입니다. 사랑의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준다는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희생하신 삶, 섬김의 삶입니다. 죄인들, 수많은 병든 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들을 사랑해서 구원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희생입니다. 사랑하면 희생합니다. 희생하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과 사명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는 희생으로 죄인을 살려주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희생해서 살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랑은 살려 주는 지혜요 힘입니다. 미움은 살인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미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향해 비웃고 저주하고, 욕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불쌍히 여겨 주고 용서해 줍니다. 사랑은 단점을 보지 않고 장점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요 우리를 위해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함을 체험하시면서 우리의 가난을 이해하시고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은 죽고 대신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의 슬픔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나 위하여 천국 준비하시고 나 위하여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고 나 위하여 모든 삶을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희생으로 많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사랑은 열매 맺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행할 때 열매 맺게 됩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계의 능력, 화목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불화의 관계를 화목의 관계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사랑은 좋은 관계를 맺게 하고 화목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나로 인해 관계가 좋아지고 화목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사역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무리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 주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죽어주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 화목을 만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능력이고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고난 후에 영광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십자가 고난을 참고 인내할 때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사랑하면서 살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신실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신 예수님을 우리도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식어진 말세 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은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삶입니다. 힘든 시대에 서로 사랑함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06-28
  • [김성수 총장] 교육의 삼각 받침대
    우리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들이 많이 있지만 전통적인 기관으로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정은 아마도 자녀 교육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 양육의 명령을 첫째로 부모에게 내리십니다. 사도 바울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엡6:4). 우리의 자녀들은 사랑과 훈육이라는 안정된 가정환경 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방식과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가정교육은 비형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매일의 상호 작용과 토론, 예배, 허드렛일 분담, 함께 외출하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가 매일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방식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기독교적 양육과 교육의 책임을 지고 있는 두 번째 기관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은 사도행전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를 통해 일하시고, 또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하셨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헌신과 사역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의 교육이 회심이나 신앙고백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구성원들을 하나님 말씀의 초보적 진리로부터 더욱 깊이 있는 자리로 나아가도록 가르쳐야 하고, 계속해서 신앙적 삶의 실천으로 인도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라는 명령은 가정과 교회를 훨씬 넘어서는 사역입니다. 현대 사회는 대단히 복잡해서 가정과 일상적인 교회 교육 프로그램만으로는 언약의 자녀들에게 충분한 교육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와 같은 제도교육은 필수적인 교육기관이 되었고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사회 속에 속속들이 침투해 있는 세속적 문화에 홀로 맞서서 교육의 과업을 수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부모님들은 학교교육에 대하여 엄청난 신뢰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가치 있는 모든 지식은 학교교육을 통하여 획득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학교교육을 사회적 성공이라는 문을 열수 있는 황금 열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학교교육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정말 엄청난 효과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학교교육은 부모님들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교육이 많은 허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교육학자들에 의해서 지적되어 왔습니다. 제도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신뢰와 기대는 허상이며 신화일 뿐이라는 비판은 이미 60년대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현대 교육은 그 기초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교육철학에 있어서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며 때로는 반 기독교적이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욕구와 경험, 자유, 행복, 이성, 자율성 등이 현대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지배하고 있는 중추적인 개념들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더 이상 초월적인 절대자에게 의존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지성을 발휘하고 이성의 능력을 활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철학 위에 오늘날의 학교 교육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철학은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현대교육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종교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물과의 연속선상에서 행동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 학습 이론은 이러한 인간관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창조, 타락, 구속의 성경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하고 자유롭고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현대 교육의 특징입니다. 현대의 학교교육은 심지어 반 신앙적인 경향성까지 띄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립학교 교육에는 성경교육이 전혀 없는 상태입니다. 학교교육의 세속화는 아주 위험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육의 세속화는 아동의 신앙 인격 형성에 막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런 세속화된 교육을 통해서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필요로 하며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는 성령의 불꽃과 하나님 말씀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교육의 삼각 받침대를 구성해야 합니다. 가정과학교와 교회라는 이 세 기관은 모두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함께 협조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삼각 받침대중 학교라는 받침대가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학교는 가정이나 교회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가정은 학교가 담당하는 공식 교육을 위해 필수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교육기관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화목하면서 부모님들이 기도와 말씀 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언약의 자녀들을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교회가 교육적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대안교육과 기독교학교교육에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물질로 후원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한 기반을 두는 삼각 받침대를 형성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양성하는데 협력하게 되면 교육의 영역에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확장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6-28
  • [하수룡 장로] 보험
    현대인은 일상생활 가운데 화재나 자동차 등에 큰 어려움이 생겼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손해보험이나 생사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보장을 받기 위해 생명보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의료나 건강을 위해 보험을 넣는 경우와 직장을 잃어 곤란을 당할 때 도움을 받는 사회보장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앞날의 안위를 알아보기 위해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는 것은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험의 역사는 개항 이후 영국 보험회사가 설립되었고 일본도 1880년 동경 보험 주식회사가 제일은행 부산지점에 대리점을 개설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자기의 인생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덜어주는 보험 제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의료발전으로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오래 살아서 좋은 것보다 문제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다. 장수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간 무엇을 먹고 살며 혹시 병이 들어 장시간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의료 혜택으로 수명이 늘었다고 좋아하지만 그 수명이 늘어난 만큼 걱정과 염려도 비례하여 늘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인 생사화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살면 해결되는데 왜 걱정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제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한낱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세상 보험에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자는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만이 세상의 어떤 보험보다 든든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누구든지 형식적으로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 나를 위해 큰돈을 보험에 투자를 하는 것과 같이 제대로 투자하고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모두 책임을 지신다. 세상에 걸쳐 살던 삶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믿음으로 결단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보자. 전능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분명히 누리고 질병도 이기고 사망도 이긴다. 세상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머뭇거리지 말고 큰 믿음으로 아낌없이 보험에 투자해보자. 분명 주님의 말씀에 의거한 보증 보험에 투자한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 분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도 붙여주시고 불치의 병도 낫게 해 주신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가능한 길도 열어 주시고 미래의 안위도 책임져 주는 보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보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투자하는 보험만이 살길이다.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2-06-28
  • [황권철 목사] 안드레(Andrew's Behind Stories)-실천의 사도
    안드레는 요나(요한)의 아들이자 베드로의 형제이며 예수를 제일 처음 만난 자이다. 안드레는 헬라어 이름인데 유대인들도 다수가 사용했다. 이것은 유대인들도 어느 정도 헬라화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마16:17), 또는 요한(요1:42, 21:15-17)의 가족은 헤롯 빌립(Herod Philip, BC 4년 AD 34년)의 수도 벳새다(Beth-saida, 요1:44)에서 살았는데 헤롯 빌립의 영역은 갈릴리 해 동북쪽까지 이르렀다. 빌립은 벳새다를 재건하여 그 이름을 아구스도(Augustus)의 딸인 율리아(Julias)를 본따서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라 불렀다. 갈릴리 해의 동북쪽에 있는 이 도시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거주했다. 이 도시는 빌립의 형제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영토인 갈릴리와 상업과 문화적인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시몬과 안드레는 아람어는 물론 헬라어까지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다소 이교도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를 만나기 전, 안드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을 따르고 있었다(요1:35-40). 예수에 관한 세례요한의 증언 때문에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요1:41). 그리하여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예수께로 인도했다. 벳새다에 온 빌립과 나다나엘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요1:43-51). 안드레는 건실한 유대인으로서 메시야의 날이 오기를 열망하고 기다렸으며 그는 유순했으며 온순했다. 안드레는 그 형 베드로에 비하여 그리 많이 언급되지 않고 대부분 형인 시몬 베드로와 함께 나온다. 우선 자신과 형 시몬이 주님께 부름 받은 사건을 보면 마태와 마가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마4:18-20, 막1:16-17). 그러나 누가의 기록을 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많다(눅5:1-11). 거기서 더 나아가 요한복음을 읽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요1:40-42). 이 같이 공관복음과 사복음서에 기록된 동일한 예수님에 대하여 복음을 받는 대상이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헬라인이나 또한,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에 대하여 그 기록한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체적으로 종합해서 서술해 보면 이런 것 같다. 제일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은 안드레이다. 그는 스승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를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형 시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시몬은 동생 안드레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게바라는 이름까지 얻어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신분인 어부의 일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부의 일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른 것은 조금 후에 일어난 일이다. 마태와 마가는 주님의 부름을 받은 한 순간을 포착하여 기록했을 뿐이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이 주님을 따르게 된 현장을 아주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의 부름 받은 소명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복음서에서 나타난 사건들을 통해 이들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적극적인 실천자 안드레    안드레는 세례요한을 말을 믿고 주님을 따른 신뢰형이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요1:35-37). 안드레는 세례요한을 존경하고 따름으로 처음에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세례 받으러 온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Messiah)”이라고 하자, 그는 즉시로 주님을 따랐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따른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 하고도 아직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갈릴리 호수에서 형과 함께 그물 던지는 중에 밤새도록 수고 한 후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실패를 통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온전히 따르게 된 것이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믿고 따르는 순종자였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6:8-9). 빌립은 이성적이고 계산적이라 200데나리온 이상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오늘날의 화폐개념으로 생각하면 수 천 만원의 돈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안드레의 사고는 달랐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고 나가서 빵을 가진 자들을 찾아 그를 설득하여 오병이어를 주님께 헌신하게 했다. 그는 형 시몬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단순하고 정직한 순종형으로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주님께로 나아왔다.  그는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실천자였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요 12:20-22). 그는 담대한 전도자였다. 빌립은 의론가였으나 안드레는 실천가였다. 빌립은 명철한 사고를 가졌으나 겁이 많은 의론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드레는 이성적 논리에 부족함이 많으나 실천적인 행동주의자였다. 빌립은 의론적이고 사무적인 사람으로 그는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용기와 담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드레에게 말하고 안드레와 함께 주님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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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6-2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12
    I. 서언(序言) 오늘은 먼저 주제의 글을 논하기 전에 우리 국어의 표준 용어 중에서 사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거나 한자 표기로도 문제가 있고, 우리 순수한 용어로도 맞지 않는 용어들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그중에는 이미 세계적인 명품 용어로 된 김치란 말도 그러하고, 처갓집, 상갓집, 해안가등 많은 용어들이 있다. 물론 잘못된 표기와 뜻이 문법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면, 국어사전에 표준말로 등제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전에 등제된 말이라 할지라도 어법에 맞지 않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될 일인 것은 분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거의 모든 교회에서 보통 7월 첫 주에 드리는 맥추(麥秋)감사주일의 麥秋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맥추(麥秋)’라는 말은 바른 말인가? 맥추라는 말이 최초로 나오는 말씀은 출애굽기 23장 16절이다. 여기에서 분명히 ‘맥추절을 지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교회의 전통으로 볼 때 상반기가 끝난 시점에서 보리를 거둔 농부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상반기를 무사히 잘 지내왔다는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맥추감사절은 아주 당연한 절기이며 분명한 기독교적 용어이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맥추감사주일 때마다 ‘과연 이 용어가 합당한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왜냐하면, ‘맥추’라는 용어 때문이었다. 이에 ‘맥추’의 용어분석을 해 본다. 먼저‘맥추’에서 맥(麥)을 파자해보면, 올 래(來)와 천천히 올 쇠(夊)로서‘봄이 오면 보리를 천천히 거둔다’는 뜻의 보리 맥(麥)자 이다. 한자어의 뜻으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추(秋)를 파자해보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秋는 벼 화(禾)에 불 화(火)를 합한 말로서 한자어의 뜻 그대로 ‘가을에 벼가 불처럼 익어간다’는 뜻의 가을 ‘추(秋)’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보리 맥(麥)자와 가을 ‘추(秋)’의 조합으로 맥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해 보인다. 하지만, 국어사전의 뜻은 ‘보리가 익어 거두는 철’로서 음력 4월을 뜻하는 ‘보릿가을’로 되어 있다. 아마 이러한 관점에서 ‘맥추 감사주일’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사용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秋’라는 말은 가을을 의미한다. 추수(秋收)라는 말도 사전적인 의미로는 ‘가을걷이’로 명시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히브리 원어는 어떠할까? 출애굽기 23장 16절의 ‘맥추절’이란 말의 원어는 ‘하그 하카츠르’로서 ‘거두어 수확하는 절기’라는 뜻이다. ‘칠칠절’이라고도 하며, 수확한 밀로 만든 첫 빵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 ‘초실절’로 불리어 지기도 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오순절’의 절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영어 성경에는 ‘The barley harvest season(보리 수확의 시기)’로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이 감사절의 명칭에 보리 맥(麥)자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을 추(秋)가 들어가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앞에서 전제한 바와 같이 히브리 원어의 뜻이나 영어 표기의 어디를 보아도 가을을 의미하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추라는 한자어로 번역한 것은 당시에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었거나 수확(收穫)이란 말을 추수라는 말로 잘못 통칭하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필자 나름대로 가져본다. III . 결 어(結語) 지금까지 논한 내용은 어떤 선행연구에도 없는 순수한 필자 스스로의 생각이다. 또한 짧은 지식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논 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여러 어법에 맞지 않는 엉뚱한 말로 변형 된 다수의 용어들이 있는 것처럼 ‘보리 수확’이란 말이 ‘보리 추수’라는 말로 바뀌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논하여 보았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이런 면으로 생각해 볼 기독교적 용어들이 많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언젠가 논한바 있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이란 단어이다. 우리 개신교로서는 정말 가치 있는 일이요, 단어이지만,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면. 종교개혁 보다는 교회 개혁이란 말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이상과 같은 용어들과 논점은 무엇인가? 그건 분명히 사전적으로나 표면적으로는 확실한 말들이고 쉽게 고칠 수도 없는 고착화된 용어라고 할지라도 극히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한 번쯤은 그 말의 어원과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돌아보아야 되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어설프게 논하여 보는 것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다면, 서로 나누고 공유하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오늘의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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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오성한 목사] 성화되는 지름길이 있다(2).
    예수님은 죽으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하나가 되어 함께 죽게 하셨다(롬6:3).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롬6:2).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죄에 반응할 수 없는 죽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육정으로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신을 발견해 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우리는 육적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으로 난자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육신으로는 수용하려고도 않고, 수용할 수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고 한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영으로 난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완전한 구원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의 과정을 성화라고 한다. 성화할수록 감격이 있다. 깨달음이 있을수록 감격한다. 감격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 된다. 기도의 사람은 사모함이 넘치게 된다, 사모함 속에 있는 사람은 삶의 증거가 있다. 성화의 출발은 깊은 영감을 얻게 한다. 영감이란 예수님과의 깊은 친밀한 교제라고 할 수 있다. 힘찬 성화의 출발을 선포해보라. 감격으로 살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놀란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깨달음이 온다. 예수님만이 나의 생명이요, 능력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만 붙잡겠다고 회개하게 된다. 진실된 깨달음은 회개와 함께 감화와 감격이 올 수밖에 없다. 이미 완벽한 생명과 능력이 다주어졌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의 생명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감격을 주신다. 감사와 감격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인정하며 기도하게 한다. 기도는 주님의 언약에 빠져드는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응답 속에 산다. 모든 것을 다 주셨음을 알아가면서 풍성해한다. 임마누엘을 안다. 그것이 기도다. 그래서 기도는 축복이다. 기도는 행복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언약 속에 빠지게 된다. 기도는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 친한 친구는 일만 생기면 먼저 전화한다. 이야기하는 것이 지겹지 않다. 만나면 만날수록 좋고, 못 보면 보고 싶어 안달이다. 주님이 이루신 일을 알고 주님과 친밀해진 사람이 그렇다. 기도는 주님을 향한 사모함을 준다. 기도는 믿음을 든든히 세워준다. 기도는 주님을 향한 간절함을 더욱 가져온다. 기도를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기도는 기도하게 만든다. 기도의 불은 기도로 붙일 수 있다. 감격이 있는 사람은 기도할 수 있다. 기도하면 할수록 믿는 자의 권세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 사모함이 더욱 생긴다. 주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주님에 대한 매력에 빠져 주님에 대한 갈망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주님을 갈망함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증거를 가져오게 된다. 더 깊은 주님과의 동행을 믿는 것이 성화 되는 길이다. 감격 속에 주님을 위한 삶, 행함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행함도 주님이 주신 능력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심어주셨다. 하나님만이 가지신 아가페 사랑을 우리에게 심어주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주셨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심어 놓으셨다. 당신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래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속는 것이다(롬7:11).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죄로 더욱 죄 되게 한다(롬7:11). 아가페의 사랑이 당신 안에 있다는 믿음으로 원수를 사랑하라.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주셨어.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나는 원수를 사랑할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라고 믿고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아가페의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면 원수를 사랑하고픈 갈망이 생길 것이다. 그 증거나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갈망은 주님과의 교제가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믿음으로 자신에게 아가페의 사랑이 있음을 말해 보라. 감격 아닌가! 마음속에서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쉽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과 주고받는 마음의 대화도 해 보라. 주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믿고 마음의 음성에 귀 기울여보라. 주님을 만나 대화하는 당신은 오늘 감격의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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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조희완 목사] 망각은 금물 (전12:9-14)
    사람의 뇌 속에는 기억하는 기능과 잊어버리는 기능이 있습니다. 더 새로운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오래 된 것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쁜 것을 잊어버리고, 기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슬픈 것을 잊어버립니다. 마치 신선한 공기를 들이기 위해서 묵은 공기를 내보내는 환기(換氣)의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잘 잊어버려야 하고, 새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옛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기억하는 것보다 망각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음악가 <슈베르트>는 지독한 건망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약 2주가 지나면 자기가 만든 곡을 다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작곡한 음악을 가지고 연습을 시키다가도 “여보게, 그 곡이 참 좋은데 도대체 누가 작곡한 것인가?”하고 물을 정도로 건망증이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건망증이 심한 그가 많은 불후의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항상 새 것을 추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기억하는가 하면 쉴 새 없이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머리가 돌아버리는 이유는 바로 많은 것을 기억하는데 비해서 잊어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뇌 속에 메모리 기능의 용량이 넘쳐서 그런 것입니다. 만약 잊어버리는 기능이 없다면 우리도 머리가 복잡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도 축복이지만 잊어버리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 평생토록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전12:13) 둘째로, 삶의 우선순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33) 셋째로, 받은바 은혜를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시103:2) 우리 모두 좋은 기억 속에 행복한 인생을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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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신재철 목사] 도둑놈의 새벽기도
    하나님과 줄다리기 끝에 신학대학에 진학 했고 동시에 집이 망했다. 도망가듯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셨고 동생과 나의 사글세 독립생활이 시작되었다. 겨우 입학은 했지만 두 번째 학기 등록이 어려워 휴학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교차로’ 신문을 뒤지는 것이 내 일상이 되었다. 아직 고등학생인 동생이 무너진 환경으로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어설픈 다짐이 나를 더 무겁게 한다. 고등학생의 참고서는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지. 분명 얼마 전에 산 것 같은데... 그닥 성적이 좋지 못한 동생의 참고서 구매 속도에 의심이 든다. 그리고 너무 부담스럽다. 갑자기 시작된 가난이 너무 힘겹지만 원망은 없다. 신학대학 진학에도 후회는 없다. 그렇지만 짜증은 난다. 집이 망해서인지, 고단하고 서글퍼서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새벽 3시 30분 기상. 신문보급소 출근. 그렇게 하루가 시작된다. 중학교 때 경험으로 신문 배달을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눈 뜨기가 싫고, 몸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정신줄 꼭 붙잡고 일어나 옷을 단단히 입고 밖에 나선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렇게 움직여야 안정된 수입이 생기는 것을 알기에 해야만 했다. 출근하면 가끔 듣는 배달 사고 소식이 유쾌하지 않다. 잘 던져 넣었는데 신문이 오지 않았다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는다. 특이사항은 없는지 확인 후 신문을 챙겨 뒷자리에 싣는다. 적당한 수량을 둥글게 말아 잘 묶어두면 달리며 던지기 좋은 셋팅이 된다. 내가 볼 스포츠 신문 한 부를 여유 있게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이른 새벽이라 사람도, 차도 없다. 내 오토바이 소리만 경쾌하게 울린다. 어느 집은 대문 아래로 깔아서 던지고, 어느 집은 2층 계단으로 던지며 집집마다 원하는 곳으로 던져둔다. 앗차! 잘못 던져 한 집은 지붕 위로 올라가 버렸다. 분명 저 집 보급소로 연락이 오겠지? ‘모르겠다.’ 아직 남은 집도 많고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싫어 그냥 달린다. 소장님께 한 소리 듣고 말지모. 그렇게 속도를 내던 내가 한 집 앞에 멈춘다. 대문에 걸려 있는 우유 가방. 그곳에 신문을 넣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은 우유 아주머니가 먼저 오셨나 보다. 가방에 흰 우유가 들어 있다. 배가 고픈데 왜 머리가 복잡할까? 오토바이에서 내려 우유 주머니 앞에서 잠시 더 고민 하다 신문과 양심은 넣어 두고 우유는 급히 뺀다. ‘과연 손은 눈보다 빠를까?’ 누군가 보지 않을까 싶어 급히 마셔버린다. ‘도둑놈!’ 배고파서 우유 하나 먹은 정도는 무죄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훔친 것은 사실 아닌가.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얼른 오토바이에 올라타 급하게 이동한다. 새벽 골목은 조용하다.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 콩나물, 두부 배달차도 보이지 않는데 내 가슴은 왜 이리 뛰는 걸까. 보급소에서 한 소리 들을 우유배달 아주머니가 맘에 쓰이면서도 입속에 우유는 고소하기만 하다. 새벽 5시 30분이면 집에 도착한다. 아직 동생은 자고 있다. 조용히 전기밥솥에 쌀을 올리고 집 근처 교회로 가 새벽기도에 참여한다. 눈을 감으면 우유가 자꾸 떠오른다. 신학생이 우유를 훔쳐 먹었다는 생각에 괴로움이 깊어진다. 집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경건과는 거리가 먼 스무 살 신학생의 새벽기도는 그렇게 깊어졌다. 집에 돌아오면 밥은 되어 있고 할 수 있는 반찬을 만들어 본다. 오징어 볶음, 소시지 부침, 콩나물국. 그리고 얻어온 밑반찬을 더해서 아침상을 차리며 도시락을 싼다. 오늘은 잘 참아내던 동생이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한다. 형이 할 수 있는 반찬 가지 수가 얼마 없으니 동생도 많이 참다가 저러는 것이리라. 이해는 하지만 또 속상하고 서글프다. 대학 친구들은 멋지게 비전을 이야기하며 학교생활을 하는데 나는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버는 모양이 초라하다. 망해버린 집이 내 삶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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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박봉석 목사] 빨리 할 것 한 가지, 느리게 할 것 두 가지
    한 의사가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는 긴급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급히 들어와 수술실로 향했습니다. 수술실 앞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아이의 아버지가 의사를 보자마자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오는 데 종일 걸리나요? 지금 내 아들의 생명이 얼마나 위급한데, 당신은 의사로서 책임감이 없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저도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왔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시작할 수 있도록 조금만 진정해주십시오.” “진정하라고요? 만약 당신의 아들이 지금 여기 있다면 진정할 수 있겠어요?” 그런 옥신각신 끝에 의사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수술을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 수술을 잘 끝내고 나온 의사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다른 상황은 간호사에게 물어봐 주십시오.” 그리고는 수술실에서 급히 달려 나갔습니다. 이를 본 아이 아버지는 화를 내며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아니, 저 의사는 왜 저렇게 거만한 거요? 내가 아들의 상태를 묻기 전에 가버리다니, 좀 더 기다려줄 수는 없는 건가요?” 이 말을 들은 간호사는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자녀가 어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장례 중이지만 수술 연락을 받고 급히 들어온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님의 아드님 목숨을 살리고 그리고 지금 자녀의 장례를 마무리하러 급히 가신 겁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경우가 때때로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 판단하여서 그 사람을 비방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알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았을 때에 비방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그 말을 들어보는 것이 꼭 선행되어야 합니다. 나중에 해도 아무 상관없는 비방, 아니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비방을 먼저 해버림으로 말미암아 내가 생각지 못하는 상처를 상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르면서 성급히 비방을 해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상처가 그 사람에게 어떤 큰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말씀대로 삶에서 한 가지는 빨리 하고 두 가지는 느리게 하는 습관을 꼭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19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참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랜 옛날에 빈체시오라 이름하는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과 밤낮없이 싸우는 한 부인이 와서 그에게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너무나 큰 절망에 빠져 넋두리하는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후, 빈체시오 수도사는 그 해결법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우물물을 한 항아리 길어서 그녀에게 주며 말을 했습니다. “이 물은 성수입니다. 당신의 가정을 치유할 수 있는 거룩한 물이지요. 남편과 싸우려고 할 때마다 이 물을 마시시오. 그러나 단 하나 꼭 지켜야 할 것은 남편 말이 다 끝날 때까지는 물을 삼키지 말고 입에만 물고 있으시오. 그러다가 남편 말이 다 끝나면 그 때 물을 삼키시오. 그러면 한 달 안에 부인의 가정에 평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이 부인은 성수라고 하니 그 물이든 항아리를 마치 보물을 다루듯이 감싸 안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그 물을 입으로 들이키고는 수도사가 가르쳐준 대로 남편이 말을 다하기까지는 입에 물고 있다가 남편 말이 다 끝나면 그 물을 삼켰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달이 지나자 가정에 놀라우리만치 평화가 찾아 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유는 말 안 해도 다 아시겠지요? 그 부인은 다시 수도사를 찾아와서 “정말 신비한 물을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빈체시오 수도사가 말을 했습니다.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고 침묵이 신비이지요.” 무엇입니까? 수도사가 준 물로 인해서 저절로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 하게 되어서 가정에 화목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성경 야고보서에서 명한 빨리 할 것 한 가지와 느리게 할 것 두 가지를 늘 삶에 실천하고 사십시오. 여러분이 속한 곳에 이전에 없던 평화가 찾아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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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28
  • [오태열 목사] 믿음은 전적 수용이다
    세상에 장점만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점이 있으면 약점도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것처럼 최고의 장점이 있으면 최고의 약점도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 시, 북군의 패색이 짙었다. 남군에는 탁월한 전략가 “리”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군에는 리 장군과 버금가는 “그란트” 장군이 있었는데 술주정뱅이라는 약점이 있어 군 지휘권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나 링컨은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남군의 리 장군과 최후의 일전에서 그란트 장군이 승리한다. 이 역사적 승리로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었다. 애굽의 노예인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말을 잘하지 못하니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며 거절하였다. 그러한 모세를 하나님께서 말을 잘하게 하여 쓰시지 않았다.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주었고,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어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실 때 약점을 고치시고 쓰시지 않고 약점 있는 그대로 사용하신다. 그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더 강하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다. 우리는 종종 기도시 나의 뜻을 이루려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며 하나님을 설득하려 든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설득당하려 하지 않고 내 뜻만 이루려 고집한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떠난다. 세상일은 모두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야구 경기에 투수와 포수의 역할을 아는가? 포수는 투수에게 사인을 하나 던지는 것은 투수의 마음이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놓치지 않고 잘 받으면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하다. 하나님은 투수요 우리는 포수다. 우리는 하나님께 요구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모습이다. 강점이든 약점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으면 된다. 우리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쓰실 자가 알아서 쓰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냥 가라 하셨다. 가라 하실 때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뜻이다. 도구의 의미는 쓰는 자가 필요해서 쓰는 것이다. 도구는 내 모습 이대로 여야 한다. 우울증, 영적 침체에 자주 빠지는 자들은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자아가 굉장히 강하다는 점이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치유가 된다. 내 뜻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힘쓰고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면 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포도나무가 열매 맺는 것은 그냥 붙어 있으면 된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민족을 구원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항공기 조종사들이 훈련받을 때 눈을 믿지 말고 계기판을 믿으라고 교육받는다. 회전을 하면 바다가 하늘같이 보인단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계기판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라 한다면 종은 자기의 뜻이 없고 뜻을 내세울 수도 없다. 자기 뜻이 있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면 된다. 종에게는 왜냐가 없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에 물이 포도주로 변한 이적이 나타난다. 주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 하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된다. 전문가들이 쓰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전문가란 생각으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를 때 전문성이 더욱 발휘된다. 고기잡는 전문가는 베드로이다. 목수인 예수의 말을 듣고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의 전문성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 만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믿음은 전적 수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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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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