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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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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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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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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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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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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잘한 자를 칭찬해 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은 격려, 칭찬,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급 신앙이 성경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시18:20)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도 상 받는 것입니다.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명예, 지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은 하나님께서 억울함, 고난 속에서 인내로 믿음 지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나의 삶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늙도록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노년의 축복,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상입니다. 바울은 상급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7-8 )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킨 자에게 상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상을 주십니다. 충성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상주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고 목양을 잘한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을 준비하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상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잘 섬기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요셉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상 주신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남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에게 세상에서도 축복받는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0-09-04
  • [조희완 목사] 신뢰하며 삽시다.
    한 TV방송 프로그램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를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시고 퀴즈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카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차례가 되어서 카드에 적힌 단어를 열심히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날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할머니가 알아맞혀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방송 프로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머니가 동문서답만 하시고 알아맞히지를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셔서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혀?”라고 힌트를 드렸더니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말해봐!”라고 다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평생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방청객들과 전국의 시청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안타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같이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으니까 대단한 것이고, 부부이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원수같이 여기고 살았으니까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는 부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부사이보다 우리가 더욱더 신뢰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견고케 하십니다.(대하20:20) 둘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렘39:15-18) 셋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사30:15-17)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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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 칼럼
    2020-09-04
  • 행복콘서트[정연철 목사]복된 사람의 비결(5)
    하나님을 만나야 하늘 문이 열린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이나 왕위를 지킨 행운아입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국력을 든든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라도 상당히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말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온갖 교만과 불순종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제사장만이 분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 나병에 걸려 비참하게 말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받은 이사야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게 됐습니다. 첫 번째로 깨달은 것은 우선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부정부패로 썩어져 가는 사회를 돌아보면 살 소망이 없어집니다. 진실 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고, 힘 있고 돈 많은 부정한 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시대가 돼 가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불의 한 자들을 이대로 두십니까?”라는 한탄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웃시야의 죽음을 통하여 이사야는 교만한 자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한때 존귀한 위치에서 크게 쓰임 받았어도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섭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들은 시편 49편 20절의 말씀대로 “존귀하나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52년 장기 집권하던 왕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자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살아 있음을 믿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공의로 다스리시며 치료하실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52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리며 굳건한 왕위를 지켰던 웃시야 왕이지만 하나님이 버리시자 순식간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이사야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인생의 허무’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한 발짝 귀에서 잠시 돌아보면, 인간의 삶이란 것이 사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길어야 80년 남짓 살다 가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허무한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립돼야만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됐을 때에는 존경받는 인생으로 평가받게 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다 간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초대 왕 사울이 자만과 죄악 속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윗이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기도한 내용은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그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제법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이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것을 더 깊이 절간하고 있습니다. 이 긴 목회의 여정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 어려운 고비 때마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저는 제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20년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 보니 그야말로 저는 탈진 상태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부산의 모 교회에서 교사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부흥회를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엉금엉금 기어갈 정도로 영육이 메마른 상태를 지나온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메마른 풀과 같은 저의 영혼과 육신에 힘을 주시옵소서. 저의 영혼과 육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새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는 누구라도 우리 인생을 쓸데없이 버려진 메마른 풀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쓸데없다 하시고 버리시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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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0-09-04
  • 기독교인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무아지경(無我之境), 인생무상(人生無常)
    I. 서언(序言) 언젠가‘기독교 윤리 실천 위원회’에서‘바른 교회 언어사용’을 연구하여 발표하면서“교회 안에는 국적이 없는 신조어, 잘 못 번역된 말, 비 복음적인 말, 무례한 말, 폭력적인 말 등이 무분별하고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이런 잘못된 언어문화는 잘못된 신앙문화를 낳고 복음전파도 막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며, 이러한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명감을 다시 한 번 더 가져본다. 이런 용어들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의 언어들은, 아마 타 종교에서 유래된 말들일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앞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불교, 유교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종교들의 용어는 이미 천년에서 2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종교적 용어들은 우리 민족의 언어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반면 우리 기독교 언어는 신, 구교 합치더라도 이제 겨우 2백여 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타종교의 언어를 그대로 쓸 수도 없지만, 특히 그들의 교리적인 용어들, 기독교의 진리에 어긋나는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쓸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교적인 용어에서 파생된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무아지경(無我之境)과 인생무상(人生無常) 먼저는 무아(無我)라는 말이다. 이 말과 연관된 말로는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무아지경(無我之境), 인생무상(人生無常) 등의 용어들이 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고(苦)나 열반(涅槃)과 같은 불교의 전형적인 교리와도 연관된 말들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용어들은 불교의 세계관과 연결되고 있다. 먼저 불교의 보편적인 세계관은 어떠한가? 이 세상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동서고금,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이 세계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고통의 세계인가? 아니면 고통이 사라진 평화와 행복의 낙원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의 세계관은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으로 설명한다. 사법인이란 먼저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흘러간다고 본다. 그다음은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 모든 사물은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존재로서 우리의 인생은 덧없이 흘러간다고 보고 있다. 세 번째 법인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인데, 무아와 무상은 늙고 병들고 헤어지는 고통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한 마디로 생노병사(生老病死)인 것이다. 반면에 이 모든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인간의 모든 번뇌는 사라지고 고요한 평화가 오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곧 열반적정(涅槃寂靜) 또는 해탈(解脫),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nirvana)’라는 용어로 말하고 있다. III. 결어(結語) 이상으로 볼 때 이런 용어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세계관은 불교의 사법인(四法印)으로 보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으로서 지금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이 우주만물이 운행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사명자이다. 이 세상은 결코 제행무상(諸行無常)도 아니고, 제법무아(諸法無我)도 아니며, 일체개고(一切皆苦)도 아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와 수양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난도 이길 수 있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 차원에서의 여러 용어들, 특히 무아지경이나 인생무상 등의 용어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로는 적절하지 않는 불교의 교리적 용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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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0-09-04
  • [이상규 교수]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해방75주년 기념 (세계로교회, 2020.8.9)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시126:1-6 A nation that forget its past has no future 과거를 잊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 Winston Churchill -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박정곤 대표회장님과 경남성시화본부 오승균 대표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차례 기념 예배를 드렸는데, 첫째는 매년 3월 첫 주에 드렸던 3.1절 기념예배였고, 둘째는 8.15일과 가까운 주일에 드렸던 광복기념예배였습니다. 이 전통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경남의 교계지도자들이 이런 한국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오늘의 교회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6편에 기대어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과 수난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뒤돌아보는 역사 : post tenebras lux 우리나라는 1910년 8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타율에 의해 해방되었던 1945년까지 35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만 일제의 한국침략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1876년 일본대표 이노우에(黑田淸隆)와 조선대표 신헌(申櫶)사이에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입니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고 명시하므로 청(淸)의 세력(宗主權)을 배제하고자 했고, 1882년의 임오군란은 일본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일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94-5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침략의 방해가 되는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1904-5년에는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러일강화조약, 곧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선점하게 됩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점진적인 침략과정을 거쳐 일제는 1910년 8월29일에는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를 정당성하기 위해 ‘한일합방 韓日合邦’ 혹은 ‘한일합병 韓日合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한일병탄 韓日倂呑’이라고 말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조선은 주권을 상실함으로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시작된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純宗, 1872-1926)을 끝으로 51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배경을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합니다. 우리는 ‘지나사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남아전 지역과 태평양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보통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서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따른 제2차 대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이 일본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전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 전세는 급변하였고,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 1945. 2-3)와 오끼나와(沖縄, 1945.6)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일본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역의 경우, 이탈리아가 1943년 6월에 연합국에 항복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했습니다. 수도 베르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은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세가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게 되자, 1943년 11월 12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로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 것입니다. 이 결의문 작성자는 루즈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는데, 그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는 연합국대표는 독일 포츠담에 보여 일본의 무조적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여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때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미국은 히로시마(廣島, 1945.8.6.)와 나가사끼(長琦, 8.9)에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하게 됩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迪官裕仁, 1901-1989)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동남아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35년간의 질고를 끝내고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광복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박정곤 대표회장이 인사말에서 언급처럼 빛을 회복한 것입니다. 2. 광복의 의미 그렇다면 이 해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3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빨리 해방을 맞게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싸워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때 전인구의 10%인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1,700여회의 집회를 하고 5만여 명이 수감되고, 7천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1만6천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독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국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애국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제국과 제왕을 다스리시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십니다. 그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서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120년 간의 통일 왕국시대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왕국의 존속기간은 509년으로 우리나라 조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대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당시 제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은 바벨론이 최강국이었으나, 바사라고 불리는 페르샤가 신흥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기원전 549년에는 메데를 정복하여 바사에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메데와 바사를 연합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동시에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메데 바사’ 혹은 ‘바사 메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에1:3, 18, 19, 10:2, 단5:28, 6:8, 12, 15, 8:20 등). 이 신생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가 기원전 539년이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바사의 고레스(Cyrus II)왕은 그 이듬해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서'(詔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역대하 36장 23절, 에스라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민족에게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26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포로된 자들을 시온으로 돌리실 때’(the captives to Zion)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토(故土) 곧 두고 온 고향을 의미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해방을 얻는 자유민은 본토로 돌아오는 데, 그 거리가 1,200km였습니다. 1차 귀환 때 약 5만 명이 이 먼 거리를 걸어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지배하에 있다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과 2절, 3절,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해방을 주신 이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126:2)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생제국인 페르샤의 고레스는 이스라엘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된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과거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기병들 곧 지금의 문화제를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해답이 역대하 36장 22절과 에스라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of Persi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 신도, 1900여개처의 교회,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 선교사 270명, 3백 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상의 재학생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식민지배의 성패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회가 반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한국교회를 탄압하여 그 힘을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친일 세력으로 물들여 황도주의(皇道主義) 기독교로의 변질시키거나, 일본의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를 통해 조선인들을 충량한 일본국민으로 교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는데, 첫째는 법적 제제를 가하고자 했습니다. 보안법, 범죄즉결령, 조선 태형령과 같은 일반적인 법령 외에도, 한국교회 종교활동을 통제하려는 ‘포교규칙’(1915)을 제령83호로 공포했는데, 포교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얻게 하는 등 신교의 자유를 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사립학교령(1911. 8), 사립학교 규칙(1911.10),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3) 등과 같은 법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를 옥죄고 종교교육을 제한했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제한하고 설교를 감시했습니다. 성경 중 출애굽기 에스겔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설교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일부 찬송가를 금지시키거나 개사(改詞)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찬송가는 1934년에 편찬된 신편찬송가였는데,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 만왕, 신앙적 결의, 재림 찬송은 금지곡이었습니다. 특히 만유의 쥬(32장), 면류관 드리세(33), 만왕의 왕(54), 믿음이 세상을 이김(201), 하나님은 피난처(206), 십자가 군병(222), 영원한 문아 열어라(286), 여호와만 섬기세(337), 의의 길(385)를 못 불렀습니다. 자구 수정을 강요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전능왕’(7장)을 ‘쥬시여’로, ‘만유의 대왕’(10)을 ‘우리의 쥬님’으로, ‘만유의 쥬’(38)를 ‘우리의 쥬’로, ‘만유의 주제’(48)를 ‘우리의 쥬님’으로, ‘태평왕’(56)을 ‘우리 쥬’로 변경하여 부르게 했습니다. 넷째는, 기독교회를 줄이기 위해 교회를 통폐합시켰습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 처 교회가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경남노회 지역의 교회 3분지 1을 폐쇄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박해는 우상숭배의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강요는 193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10년간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습니다. 신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 한 것입니다. 이 일로 200여개 처교회가 폐쇄되고, 2천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하신 대표적인 경남의 인물이 최상림, 주기철, 이현속 장로 같은 분들입니다. 이처럼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이 패망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은 길어야 십년입니다. 권불십년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투옥되어 있었으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사악한 일제 권력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일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던 26명의 종들(평양감옥 20명, 대구 3명, 부산 2명, 청주 1명)이 8월 17일 감옥문을 열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입니다만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독교신자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에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이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석방된 것입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이들은 다 처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수사건이 된 것입니다. 거짓 불의 위선 음모와 같은 인간의 모사(謀事)는 한줌 모래 위에 쌓는 누각일 뿐입니다. 해방은 정치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해방기념 주일을 지키고 자유를 주신 하나남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으로 기도할 때 늘 드렸던 기도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갈5:1)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하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는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 하와이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해방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체제의 나라를 건설하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해방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게 된 것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였습니다. 일본과 홀로 싸우며 큰 희생을 치루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대(對) 일본전에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계속 미루다가 종전 6일 전에 참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이 곧 항복하자 소련은 별 희생 없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전 선언 후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8월 12일에는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인민위원회 중심의 공산주의 독제정권이 북한에 자리 잡게 됩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소련군 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미군정(美軍政,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실시되는데, 당시 남한은 혼란했습니다. 그 혼란을 해방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 정치 결사체가 난립했습니다.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 등이 조직되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허위로 끌어들이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 안이 발표되자 민족 세력 중심에 있던 이승만, 김구,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문제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좌익은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및 좌파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전자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후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결국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 결렬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독자적 정부 설립을 촉진 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남한에서 좌익들의 반발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반미운동을 선동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는 나라를 만듦으로써 공산화된 북한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한의 독자적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를 주장한 이가 이승만이었고, 후자를 지지한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주장하고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올라갔으나 본격적인 회담도 못한채 이용만 당하고 빈손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김구, 김규식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5월 9일 선거를 하려 했습니다만 일식(日蝕)예보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여 하루 늦춘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의도로 일부러 주일 선거를 실시했지만(1946.11.3)남한에서는 주일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선거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보통, 평등, 비밀원칙에 입각한 민주적 방식의 선거였고,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스위스(1971)보다 앞섭니다. 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4.3폭동이 발생했던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첫 국회, 곧 제헌국회를 개원하게 됩니다. 이때가 오전10시였습니다. 이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윤영 의원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는데, 서울의 종로구 갑 지역구 의원이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하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기도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신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제헌국회의원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공문서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에 바로 이 기도문이 기제 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이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회집한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했습니다. 8월 15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독립(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사에서 그날의 행사가 우리 민족의 광복과 건국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여,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표, 기권1 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민국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결의안, 제195-III호). 이어 미국을 시작으로(1949.1.1.)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승인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때 참전이 통과되었고,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원래 계획은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서울의 미군은 평양의 소련군에게 물자의 자유로운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38선을 차단합니다. 북한을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자 전문에서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소련식 공산정부를 세우기보다는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게 지시했습니다. 기만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협조하지 않자 1946년 2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광복된 지 6개월 만에 정부를 세워 놓고는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위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선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한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니 북한은 9월 9일 이미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노선을 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헌이며, 이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 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습니다.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反共)노선을 고수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1875-1965)의 큰 업적은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제로 확립한 일입니다.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인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는데, 11월 28일(수요일) 김규식 김구와 미군 아놀드 대령과 같이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는 황치헌 목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고 인사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성경말씀의 토대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말: 우리의 과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게 되었고, 오늘 7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탄생했거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85개국인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회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해방당시는 유엔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아 살던 최빈국이었고, 휴전 당시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나 70여년이 지난 2017년 3만 달러가 넘어 OECD회원국 가운데 22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는 7번째로 3만 달러를 달성해 3050클럽(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진입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자유와 인권을 탈취당한 채 독제정권하에서 신음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살게 되었고, 짧은 시기에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다 성취했으나, 북한은 공산체제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마크 크라머 라는 사람이 쓴 ‘공산주의의 검은 역사 The Black Book of Communism’라는 책을 보니 공산주의 혹은 공산국가에서 죽임을 당한인구가 무려 9천 4백만 명, 곧 1억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만 기근, 문화혁명, 대장정 기간에 6천5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에서 2천만 명, 캄보디아에서 2백만 명이, 북한에서 3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3대 세습국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혹은 성경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투옥된 자가 5-7만 명에 달합니다. 월드워치리스트(WWL: World Watch List)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19년 째 세계 최악 기독교 박해국 제1위라고 합니다. 정치법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12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살 수 없다며 생명 걸고 탈북한 이가 3만5천명에 달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백주에 공산주의가 좋다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다니고, 김정은 정권을 칭송하는 백두칭송위원회라는 괴이한 조직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혼란합니다. 해방정국과 비슷합니다. 1947년 해방을 기념하는 주일, 손양원 목사가 부산 제일영도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좋습니까,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그때만 해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무지했고 분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주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경주의입니다. 여러분,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순교자로만 아는데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좌익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받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 잡혀 끌려 다니다가 28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북한은 일제하 35년, 공산정권 하에서 75년 꼭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김정욱(2013.10), 김국기(2014.10), 최춘길(2014.12), 고현철(2016.7), 김원호(2016.7), 함진우(2016.7) 선교사입니다. 북한 주민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혔고,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등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형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은 부서지는 육신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억류된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이 오만방자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죽은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유해를 발굴하고 정중히 모시고 예우를 다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구출하지 않습니까?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의 구출과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둔가 진정한 해방과 광복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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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생각 한토막[김문훈 목사] 참여자 행복자 유통자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는가? 성경에 ‘여호와의 회의’가 나온다.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친밀한 소통”, “은밀한 교제”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교통하는 것과 연합하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나를 향한 크고 놀라운 계획과 구원역사를 깨닫고 나면 아버지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경륜, 섭리의 손길에 감격할 수밖에 없다. 어떤 아비가 자녀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는가? 성자 예수님은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겸손하게 성육신 하셔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성령 하나님은 이 놀라운 사실을 조명해 주시고 기억나게 하시고 감화 감동하신다.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탄식하시며 친히 간구하시는 분이다. 나를 변호하며 중보하며 위로해 주신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겹줄 사랑은 크고 놀라운 비밀이다. 이 사랑을 맛본 자는 분명 행복한자이다. 열 처녀 비유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함께 잔치 집에 들어가서 참여했다. 달란트 비유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이다. 어린양 혼인 잔치에는 세마포 흰옷 입은 자만 들어갈 수 있다. 천국에 초청받고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서 귀를 기울여 그 말을 알아듣는가? 회의 회의론, 교육 무용론, 훈련 불가론이 있다. 똥개는 훈련을 시켜도 진돗개가 될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리 회의를 해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교회에 출석해도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별개이다. 기도는 자격이 아니라 자세이다. 은혜는 직분이 아니라 관계이다. 세상을 향한 한쪽 귀를 막고 주RP로 귀를 기울여서 말씀을 상고하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성령님이 귀를 열어 듣게 하신다.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서 듣고 본 메시지를 전하여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자는 듣고 본 바를 가서 전해야 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전파해서 백성들을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야 된다. 주를 만나고 그 사랑을 받은 자는 흘려보내야 될 사명이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방의 사도가 되었다. 여호와의 회의는 친정처럼 편안하고 잔치 집처럼 풍성하고 은혜의 동산이고 추억의 자리이다. 그 사랑을 또 다른 충성 된 사람들에게 전해야 된다. 성도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한 특권자요 사랑을 흠뻑 받은 행복자요 이 복음의 유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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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기독교인 생활용어[이정희 목사] <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심금(心琴)과 마음 심(心)을 쓰는 용어들 >
    I. 서언(序言) 기독교인으로서 잘못사용하고 있는 말들이나 타 종교의 영향을 받아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연구해 보면서 ‘이런 용어들까지 타 종교, 타 문화권의 말이구나.’라고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심금(心琴)과 마음 심(心)자로 시작되는 여러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사용하는 이 단어들도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이 많이 있다.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II. 심금(心琴)과 심(心)자로 시작하는 여러 용어들 1. 심금(心琴)의 뜻 “심금(心琴)을 울린다.”이 용어는 일반인 뿐 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심지어 설교를 들은 성도가‘오늘 설교는 심금을 울리는 설교여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도 있다. 그렇다면 뜻은 무엇이며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심금이란, 마음 심(心), 거문고 금(琴)자로 ‘마음의 거문고’란 말이다. 사전적인 뜻은 ‘마음속 깊이 품은 생각’,‘걷잡을 수 없는 미묘한 마음을 거문고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로 되어 있다. 즉, 이 말은 여러 가지 일로부터 오는 자극에 따라 미묘하게 움직이는 마음의 상태를 거문고에 비유한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어떠할까? 이 용어는 원래 불교의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 ‘스로오나(srona)’사이에서 있었던 대화의 내용이다. 초기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아함경(阿含經)’에 있는 ‘거문고 비유’ 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인데 이 대화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석가모니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스로오나’가 스승의 가르침대로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행을 하고 최선을 다해도 깨달음의 길에 진척이 없게 되면서 그는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치고 조급해지게 되었다. 이 때 이 모습을 지켜 본 석가모니가 그를 불러서 이런 말을 했다. ‘이보게 스로오나, 거문고를 쳐본 적이 있느냐? 거문고 소리는 어떤 때 잘 나더냐?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지 않고, 늘어지지도 않아야 고운소리가 나지 않더냐? 그것처럼 수행을 하는 일도 너무 강하면 들뜨기 쉽고, 너무 약하면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수행도 알맞게 해야 몸과 마음이 어우러져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란다.’라고 일러주었다. 바로 이 대화를 나눈 일화가 지금의 ‘심금을 울린다.’는 말로 사용되어 지게 되었다. 2. 심(心)으로 시작하는 여러 용어들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중에서 마음 심(心)으로 시작되는 말들이 많다. 먼저 심경(心境)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을 보면 ‘깊은 경지’를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즉,‘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인 내심(內心)과 인식되는 대상인 외경(外境)의 경계’를 가리키는 말로서, 심경본적(心境本寂)이라고 하는 불교적 용어이다. 또한, 한자어가 다른 심경(心經)이 있는데 이는‘반야바라밀다심경’의 약칭이다. 이 외에도 ‘마음이 집중되지 않거나 어지럽고 뒤숭숭한 상태’를 말하는 심란(心亂)’,‘심성이 곱다.’라는 의미의 심성(心性)도 마찬가지이다. 심성의 뜻은‘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으로서 바로 불성(佛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심인(心印)이란 말도 그러하다. 뜻은 ‘글이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내심(內心)의 깨달음을 일컫는 말’로서 심지(心地), 불심인(佛心印)이라고도 한다. 또한‘심지’는 흔히 ‘심지가 곧다.’는 말로 모든 이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심광(心光)이란 말도 있다. 뜻은 내광(內光), 지혜광(智慧光)이라고도 하는데 불심(佛心)을 빛에 비유한 말이다. 심(心)으로 시작되는 불교적 용어는 이 외에도 많이 있다.‘마음을 더럽히는 때, 번뇌를 일컫는 심구(心垢), 깊은 비밀이란 뜻의 심밀(深密), 사물을 의식하는 정신 을 의미하는 심법(心法) 등이 다 그러하다. III. 결어(結語) 불교의 용어에서 마음 심(心)으로 시작되는 용어가 많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불교의 특징이 마음을 다스리는 자력종교(自力宗敎)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많은 용어들의 사용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러하다. 몇 차례 언급했지만, 비록 이 용어들이 불교에서 유래되었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으로서 수용하기 힘든 교리적이거나 우리의 신앙을 헤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라면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앞서 소개한 용어들을 보면, 비록 불교에서 유래된 것은 분명하지만, 교리적인 말은 아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단지 불교에서 온 용어라고 해서 사용하지 못할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분별없이 자주 사용할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보다도 더 좋은 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금을 울린다.’보다는,‘마음에 은혜 많이 받았다.’, ‘마음에 진한 감동이 왔다.’는 등의 말들이 더 좋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경, 심란, 심성, 심인, 심지 등, 앞서 소개한 말들도 마찬가지다. 구분 없이 불교 색 짙은 말을 하기 보다는 같은 말이라도 마음 심(心)을 한자로 쓰지 말고 순수한 우리말인‘마음’이라고 표현해도 그 의미는 오히려 더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이러한 논의는 어쩌면 우리만의 폭이 좁은 소아병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언어문화가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된다는 열망에서 구분하면서 논의하여 본 것이다. 하루빨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언어문화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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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행복콘서트[정연철 목사] 복된 사람의 비결(4)
    예수 그리스도, 하늘 문을 여는 열쇠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주 다정하게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될 만큼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우연히 교회를 다니게 됐고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다 보니 둘의 관계가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던 친구는 섭섭한 마음도 들고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교화 나가는 친구를 불러서 섭섭한 마음을 내비치며 교회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이 몇 살에 돌아가셨냐?” 그랬더니 “몰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설교를 몇 번이나 하셨냐?”, “예수님이 태어난 고향이 어디냐?”라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질문에 답변을 못하자 그 친구를 보면서 “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예수를 믿냐? 넌 진짜 예수쟁이가 아니구나!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거냐?”하면서 희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이 된 친구의 대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나는 교회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예수님 고향도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어. 첫 번째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무엇인지를 알고, 세 번째는 나 자신이 변했다는 거야. 나 자신이 변했어. 너도 잘 알겠지만 3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술독에 빠졌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제는 술을 끊었어. 그리고 가족의 중요성을 알았고. 내 인생에서 정말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 친한 친구가 정말 그렇게 변화된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그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을 남과 같이 몰라도, 예수님께서 몇 살에 세상을 떠나셨는지 몰라도, 예수님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그것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달라졌는가? 내가 변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교회에 나가더니 변화됐구나! 이런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어야만 그 사람이 정말 복음으로 변화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사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 것은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가 누구입니까? 바로 이사야 선지자와 사촌지간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는 웃시야 왕을 많이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의지했던 웃시야가 처음에는 선왕이었지만, 나중에는 사울처럼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저 적당히 제물만 차려놓은 채,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은 잊은 채 통과의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웃시야는 나병에 걸려서 죽게 됩니다. 교만한 육체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사야가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것이 허망하게 됐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을 때, 이사야는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부복하고 헌신된 마음으로 “나를 보내소서.”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진정한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마 이‘웃시야의 예배’와 같은 형식적인 예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없이 적당히 종교적 안위를 얻기 위해 교회에 다니면서 참된 예배자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합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한 이후에도 자신의 아집을 온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여러 번 실수를 거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고집 센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변화되는 것이 어려운지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성경은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성이 변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타고난 모습이 새로워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제가 이런 변화의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저 역시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된 후에 성경을 보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수도 없이 기도를 했지만 변화됐나 싶어 뒤를 돌아보면 변화된 모습이 별로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너무나 잘 압니다. 사람들은 “정 목사가 정말 달라졌어. 정말 예수를 믿는 목회자다워”라고 말하지만, 제가 저 자신을 가만히 보면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작은 것 하나 용서하지 못하고, 작은 것 하나 이해하지 못하며, 겉으로는 양보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양보할 줄 모르고, 내 속에 증오와 미움이 있는 것을 보면서 정말 달라지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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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28장)
    대제사장의 음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단의 음모는 여러 가지이다.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절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했던 것을 장사하여 다시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군병들이 예수의 죽은 것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환상설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열렬한 팬이었던 여인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환상을 보고 부활했다고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사단의 전략을 미리 아시고 열한 차례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다. 환상이란 개인에게 일시적으로는 나타날 수는 있어도 많은 공동체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는 나타날 수는 없다. 그리고 도적설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설인데 이 사실은 본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때 파수꾼 몇이 성으로 달려가 대제사장들에게 밤새 일어난 사실을 보고했다. 그들은 너무도 끔찍한 사건들이 현실로 다가옴에 놀라 장로들을 불러서 대책을 세워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예수의 시체는 그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거짓으로 유포하게 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심으로 누구도 부활사건을 부인할 수 없게 하셨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창조신앙이 기독교의 뿌리라고 하면 부활신앙은 열매이다. 창조신앙 없이 부활신앙이 있을 수 없고, 부활의 열매 없는 창조사건은 무속적인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신앙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우리나라 중견 탤런트 한인수 씨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명함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어버린다 해도 당신은 잃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인명예수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밀러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성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죠지 베러리쉬는 한 때 돈과 명예가 약속된 직업을 포기하고 복음성가만 부르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빌리 그래이엄과 동역하는 찬양사역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분부 주님은 지상 최대 명령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명확하고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 마태복음이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어 세상으로 파송 했다. 그러면 하늘의 권세는 무엇이고, 땅의 권세는 무엇인가? 주님은 하늘에서 온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 독생자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이를 자가 없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셨다. 땅 위에는 하늘에서 버림을 받은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순종의 자녀가 되도록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목숨을 바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의 장벽을 십자가로서 허물어 버렸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주님이 이 땅 위에서 구원역사를 완성하여 땅의 권세를 되찾는 날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권세도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가서 누릴 수 있고, 땅의 권세도 주님의 이름으로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든 권세를 주님은 사도들에게 주셨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 주님의 파송 명령에는 네 가지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있다. “간다”,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준다”, “가르친다” 이 네 가지 동사가 원문에서는 한가지 만 명령형 동사이고, 다른 세 가지는 그 동사를 수식하는 분사 형으로 되어 있다. 명령형 동사는 오직 “제자를 삼으라”는 말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보조적으로 도와준다. 목적은 제자 삼는 일이다. 우리가 헌신적인 삶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고, 세례를 주어 수많은 영혼을 불러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가르쳐서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제자를 삼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 당대에 끝나버리고 만다. 최후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요 약속이다. 구약에서 성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떠나 본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는 직접 오셔서 육의 몸으로 우리와 동행하셨다. 구원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에게 의탁하여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당부하셨다. 옛날 어느 나라에 사냥을 즐기는 왕자가 있었다. 하루는 깊은 계곡에서 사냥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피를 흘려 죽게 되었다. 그때 나무꾼이 그를 업고 와서 잘 보살펴 주었다가 왕궁으로 모셔다 드렸다. 얼마 지난 후 왕궁에서 전문이 와 급히 왕실로 갔다. 소박한 시골 젊은이인 그가 왕 앞에 갔을 때 왕이 이르기를 “자네가 무엇이든지 원하면 다 들어 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저의 집을 방문해 주십시요” 너무도 어리석은 요구인 것 같았으나 최고의 선택이었다. 임금이 방문하게 됨으로 그의 집이 새로워지고, 동네가 바뀌고, 새로운 도시가 생기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잠깐이나마 왕이 그 집에 머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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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십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기에 의로운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삶,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 죄, 정직하지 못함, 거짓을 싫어하십니다. 죄성을 가진 죄인이지만 공의, 정직, 진실, 신실, 의로움을 선택해야 합니다. 거짓된 마음, 불의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정직, 진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진실, 정직해야 합니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마음, 좋은 생각,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 불의, 잘못된 마음과 생각은 의로움을 좋아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가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의를 기뻐하십니다.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선을 구하고 공의를 행해야합니다.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 쓰임 받습니다. 불의, 죄,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정직, 의, 공의는 시간이 갈수록 빛이 나고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분임을 묵상하고 믿어야 합니다. 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의를 구하고 공의롭게 행하고 언제나 신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15:1-2) 거룩하고, 순결하고, 착하고, 베풀고, 위로해주는 선을 행하는 것이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리를 따르고 원칙과 원리를 따라가는 삶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고 반듯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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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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