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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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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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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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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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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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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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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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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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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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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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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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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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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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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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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 부활에 아침에 고백할 승리의 고백 매해 맞이하는 부활절인데 올해는 더욱더 그 의미가 깊이 다가온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 의 한말씀, 다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이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모든것을 하나님께맡기시고, 다 이루심의 완성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그분의 마지막은 승리와 완성의 선언이셨다. “다 이루었다.”이 한마디에는 완전한 지불의 선언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값을 하나하나 치르셨다. 낮은 땅에 오심, 모욕과 조롱, 가시 면류관, 십자가의 고통까지 치르시면서 그 모든 과정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는 길이었다. 이때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죄로 인해 닫혀 있던 길이 열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다가오시는 분이 되셨다.어쩌면 우리는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두 팔을 벌리사 안아주신 사건이다. “이제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상징에서 용서와 초대의 상징이 된것이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고백은 죽음을 앞둔 체념이 아니다.사명을 완수한 자의 평안이며, 전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안식’을 쉼으로 이해한다.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인간은 여섯 날 동안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안식일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날이라는 것이다.이 통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효하다.우리는 끊임없이 계획하고, 통제하려 하며, 결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두려움이 커진다.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준다. “맡겨라.”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괴로움과 눈물의 시간이 찾아올 때, 심지어 과거의 상처와 실패까지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경험한다. 부활절을 맞이하면 우리는 승리의 선언을 한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면 패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가 담겨 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말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따라서 믿음의 삶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삶.붙잡으려 하기보다 의탁하는 삶.그리고 그 고백은 매주 예배 속에서, 또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내 삶을 주께 맡김을 통해 신앙은 완성되어 간다. 참된 안식과 승리를 경험하게 되기실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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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창녕기연 안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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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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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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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험담 부작용 (잠26:20-28)
-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숲속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문병을 왔는데 여우만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여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늑대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지금이 바로 여우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숲속의 왕이시여, 여우가 문병을 오지 않은 것은 필경 사자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침 여우가 도착을 했습니다. 사자가 크게 노를 발하면서 “네 이놈, 왜 이리 늦었느냐? 네가 나를 무시하는거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여우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꾀를 냈습니다. “예, 제가 이렇게 늦은 것은 우리 사자님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알아보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그래, 그 약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예, 늑대의 가죽을 벗겨서 그것을 뒤집어쓰시면 병이 금방 낫게 된답니다.” 그러자 사자는 앞에 있던 늑대를 잡아서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을 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면 반드시 칭찬이 돌아오게 되고, 내가 남을 험담하면 반드시 험담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치 부메랑을 던지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반드시 내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중상모략하거나 험담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이나, 험담하는 것이나, 중상모략 하는 것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험담이 가져오는 결과가 나쁘고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첫째로, 험담은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잠26:20,21) 둘째로, 험담은 비밀을 누설하는 원인입니다.(잠20:19) 셋째로, 험담은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입니다.(잠16:27,28) 불필요한 말로 인한 공해가 너무 극심한 이 시대에 험담을 줄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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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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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험담 부작용 (잠26: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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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이군불사(二君不仕)
-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종교인 말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또한 십자가를 지고 좁을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부인과 희생이 따른다. (마태복음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한 발은 교회에, 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기회를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성도가 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한 적이 있다. (여호수아24:15)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당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신앙에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옛날 표현으로 하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군불사(二君不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선비의 근본사상을 풀이하는데 충(忠)이란 말뜻의 풀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글자를 뜯어보면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임을 알게 된다. 중(中)이란 한복판을 뜻하지만 아울러 가운데가 가득찬 상태, 가슴 속이 꽉 차 빈틈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허위가 없는 충실한 참 마음이 중심이요, 충이다. 이 빈틈없는 참마음은 단지 나라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사체가 달라짐에 따라 가치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의로운 일에 투사되었을 때는 절(節)이라 부르고, 부모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효(孝)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인(仁)이 되고, 도덕적 규범에 투사되었을 때는 예(禮)가 된다. 옛 선비 중에 이군불사(二君不仕)의 귀감이 되는 한 선비가 있는데 바로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이다. 많은 무고한 선비가 죽어갔던 갑자사화 때 그 화에 말려든 대제학 홍언충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옥문 밖에 버려져 있었다. 그 옥문 앞을 때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지나갔다. 이 두 사람은 어릴 적 글 공부를 같이 한 막역한 사이다. 이 처참한 꼴을 본 김안로가 ‘참혹하다. 이게 웬일인가’, 이에 피범벅이 된 홍언충은 ‘홍문관의 물이 묻어 그렇네’ 라고 대답했다. 홍문관은 글 읽는 학교다. 곧 홍문관의 물이라면 학문에서 익힌 의리를 홍문관의 물로 비긴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문관에서 익힌 의리를 굽힐 수 없어 이 처절한 꼴을 당했으며 고문을 당하고 범벅이 된 피고 곧 홍문관의 물이란 뜻이다. 결국 홍언충은 진보 땅으로 귀양하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사람을 죽일 때 귀양을 보내 놓고 귀양가는 도중에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이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러기에 홍언충은 금부도사가 오늘 내려오려나 내일 내려오려나 하면서 귀양길을 가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품속에 미리 묘비 문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평생 우활하고 옹졸함은 학문의 공이라. 서른 두 살에 세상을 마치니 명이 어찌 그다지 짧으며 뜻은 어지 그다지 긴고. 천추만세 뒤에 누기 이 들판을 지날는지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지어다’ 라는 내용의 비문이다. 이 같은 비문을 지니고 문경새재를 넘어 대탄원에서 쉬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신행렬이 뒤따라 달려왔다.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반정했다는 소식과 새 조정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매우 기쁜 전갈이었다. 죽음의 길이 영광의 길로 돌변한 것이다. 한데 홍언충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마냥 구슬피 울었다. 새 임금을 위해서 우는 기쁜 울음이 아니라 옛 임금을 위해 우는 슬픈 울음이었다. 홍언충은 영광의 길을 등지고 귀양길을 택한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지내며 거듭된 조정의 부르심을 거절하였다. 이 선비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쉽게 납득은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의를 위해 가혹한 고난을 당해가며 불의와 싸워 이겨놓고는 승자의 개선길을 등지고 패자의 길을 택하는 이 선비의 소행을 무엇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 홍문관의 물을 피보다 진하다고 했다. 홍언충에게는 또 다른 대의, 바로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 있었다. 홍언충은 낙향한 이후에도 연산군이 유배되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매일 절을 올렸다고 한다. 거듭되는 조정의 입사를 끝내 거절하고, 그를 죽이려 했던 연산군을 향해 절개를 지키다 죽어갔다.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들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홍언충과 같은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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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이군불사(二君不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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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3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유래와 의미
- 1. 서언(序言)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서로를 축복하면서 덕담을 나눈다. 이는 신정과 구정(설날)을 함께 의미 있는 날로 지내는 우리나라의 경우, 설날이 지난 정월대보름까지 이러한 인사를 나누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인사말은 단순한 덕담을 넘어 오랜 역사와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본 호에서는 이러한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더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인사말, 그리고 우리의 신앙적 관점은 어떠한지를 논하고자 한다. 2.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성경의 복 이 주제에 관해서는 오래전 기고에서 기술한 일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복(福)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복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러한 복에 대한 기대 심리는 전통적인 거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복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면 총 32,569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아주 많은 말씀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신년의 덕담과 인사는 교인이든 아니든 아주 좋은 새해 인사라고 볼 수 있다. 3. 우리나라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의 유래 복에 대한 개념과 기대는 신년이 되면 더욱 커지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유래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1)고려시대 : 이러한 새해 인사는 대략 고려시대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에는 새해가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복을 내리는 의미에서 상을 내리는 행사가 있었고, 백성들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을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 2) 조선 시대 : 고려시대보다 좀 더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유교적 예절이 새해에는 왕과 신하들의 군신 관계 속에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화되면서 더욱 일반 국민에게까지 중요한 의례적인 인사로 덕담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다. 3) 현대의 의미 : 이러한 새해 인사는 현대에 이르러 스마트폰 등의 다양한 기기의 발달과 현대적 문화의 현실 속에서 여러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연하장을 비롯해 카카오톡 인사, 각종 이모티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4. 여러 나라의 새해 인사말 신년에 덕담을 나누는 인사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거의 비슷한 유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각 나라의 새해 인사와 새해 풍습 및 행위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다만 지면 관계상 몇 나라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하의 원문과 내용은 AI 자료에 의거했음을 먼저 밝혀둔다. 1) 중국: 춘절인 새해의 인사말은 ‘新年快乐’이며, 춘절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대청소로 집을 정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교자나 만두, 어묵 등 특색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또한 홍바오라 불리는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 아이들에게 주며 행운과 번영을 기원한다. 폭죽과 불꽃놀이로 악귀를 쫓고, 사자춤 등 새해 공연도 열린다. 2) 영국과 미국 등의 영어권 나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Happy New Year’로 서로 인사한다. 송구영신의 의미로 12월 31일 자정에 카운트다운 이벤트를 하며, 불꽃놀이 등의 거리 축제와 샴페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새로운 결심을 한다. 3) 스페인: 영어권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송구영신 시간에 종을 울리며 포도 12알을 차례로 먹으면서 소원을 빌고 ‘¡Feliz Año Nuevo!’라는 새해 인사를 한다. 4) 인도: 새해 인사말은 ‘नया साल मुबारक हो (Naya Saal Mubarak Ho)’이다. 축하 방식은 지역과 종교(힌두교, 시크교 등)에 따라 새해 축하 방식이 조금씩 다르며 매우 다양하다. 남인도에서는 새해 첫날 집을 청소하고 코코넛이나 쌀과 같은 전통 음식을 나누며, 도시 지역에서는 서구식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와 불꽃놀이 등 일반적인 행사를 하기도 한다. 5. 신앙적 의미와 결론 및 제언 이상에서 살펴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새해 인사에 대한 각 나라와 우리나라의 전통과 의미를 볼 때, 이는 우리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덕담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복이 새해에도 임하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이 인사말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친 기복적 의미와 기대를 담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우려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새해에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이러한 덕담의 인사말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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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3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유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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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나와의 관계
- 수많은 관계 가운데 나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가 깨지면 삶이 불행해집니다. 불평하고 비난하고 열등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나와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 되나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신감이 없고 나와의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에 있어서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교의식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나는 나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습니다. 내가 나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귀히 여기고 축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전 세계와 바꿀 수 없습니다. 사탄은 나를 향해 약점을 잡고 공격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참소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 존귀한 자 택한 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나와의 관계가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좋은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목회자는 나와의 관계가 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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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나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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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논평] 정교분리를 오독한 권력의 폭거 이재명 정권의 ‘교회 전쟁’ 선포를 규탄한다
- 지난 1월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내놓았다. 그는 이른바 ‘정교유착’을 “나라가 망하는 길”, “반란 행위”로 규정하며, “큰 돌부터 집어낸 다음 자갈과 잔돌을 집어내는 단계가 올 것”이라는 표현으로 개신교를 향한 단계적 수사와 탄압을 노골적으로 시사했다. 이는 단순한 법 집행의 의지 표명이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종교 세력을 구조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명백한 ‘종교를 향한 전쟁 선포’에 해당한다. 1.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치명적 오독과 대통령의 무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자 왜곡에 기초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말하는 정교분리는 종교가 정치 현실에 대해 침묵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국교화하거나 종교 영역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원칙이다. 정교분리는 권력의 방패가 아니라 신앙의 보루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원칙을 정반대로 전도하여, 종교인이 정치 권력을 비판하면 처벌하겠다는 입막음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정신에 대한 정면 위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권의 정책 실패와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반란 행위’로 규정하고 수사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점이다. 신앙과 양심에 따른 공적 발언을 범죄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발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에게서 나올 수 없는 독재적 사고다. 대한민국은 천부인권 사상 위에 세워진 나라이지, 권력 비판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체제가 아니다. 2. 역사 속 종교 탄압 정권들의 공통된 말로 역사는 종교를 억압하고 교회를 적으로 돌린 정권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분명히 증언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며 교회를 굴복시키려 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되고 순교했지만, 교회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신앙의 자유를 유린한 일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패망했다. 나치 독일 역시 교회를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백교회와 본회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저항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교회를 통제하려던 나치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 집단으로 기록되며 붕괴했다.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 또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고 교회를 파괴했지만, 국민의 영혼까지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 탄압으로 유지되던 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이재명 정권의 현재 태도는 이러한 전체주의 정권들이 반복해 온 종교 통제의 전형적인 수순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3. 왜 개신교인가: 권력의 불안이 드러난 ‘돌 깨기’ 전략 이 대통령이 “큰 돌부터 잡겠다”고 공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개신교가 가진 공적 발언의 힘과 사회적 결집력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정권의 부정부패, 정책 실패, 자유민주주의의 훼손을 가장 집요하게 비판해 온 집단이 교회라는 사실을 권력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사’라는 칼을 먼저 휘두르며 공포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특정 목회자를 먼저 표적 삼아 교계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이 방식은 비겁한 갈라치기 전략이다. 그러나 한 명의 목회자를 탄압하는 순간, 그것은 곧 수많은 성도와 한국 교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가 된다. 신앙 공동체는 공포로 해체되지 않는다. 4. 결론: 한국 교회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교회는 파수꾼의 자리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을 방치하는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동조다. 오늘 강단의 자유가 무너지면, 내일은 신앙의 자유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한국 교회는 권력의 협박 앞에 고개 숙이지 말고 진리와 공의의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내야 한다.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천부인권을 부정하는 권력 앞에서 교회는 기도의 무릎과 행동하는 양심으로 동시에 서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자유 침해의 현실을 국제사회와 자유 진영에 알리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 위에서 연대해야 한다. 거짓과 탄압은 결코 진리와 자유를 이길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역사의 교훈을 직시하고 종교 탄압의 칼춤을 즉각 멈춰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앙의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일어서, 대한민국과 교회의 자유를 지켜낼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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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논평] 정교분리를 오독한 권력의 폭거 이재명 정권의 ‘교회 전쟁’ 선포를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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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배우 안성기가 남긴 ‘세상에 필요한건 착한사람’
- 1994년 개봉되었던 베트남 전쟁사 이야기 ‘하얀전쟁’은 한국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 남은 베트남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많이 참전했다. 전쟁이 전쟁으로 끝나지 않고 그 속에 응어리로 남는 비극이 바로 전쟁의 트라우마다.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사명 뒤에 인간의 순수 심성이 양심을 괴롭힐 때가 많다. 그 큰 응어리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남는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 속에 전쟁 없이 살아온 인류사는 없다. 영화 하얀전쟁의 이야기는 적을 죽이는 전장에서 겪는 사람의 양심과 선한 심성에서 겪는 괴로움이 쉬 가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국민배우 고 안성기가 주연으로 이야기를 그려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심성이 있지만 배우 안성기는 아역 배우에서부터 70평생 수많은 작품을 쏟아내면서 착한 심성의 캐릭터를 잃지 않았다. 국민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안성기의 심성을 남기는 어록(語錄)이 회자되고 있다.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 속에 “아들 다빈아,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 필요하단다”라는 말이 담겨 있다. 아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의 말이지만, 세상을 떠난 후 안성기가 남긴 말이 큰 울림이 되면서 특히 오늘의 세상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날로 악해지고 범죄 문화가 선함을 덮어가는 세상이 되고 있다. 급속한 발전의 뒷면에서 겪는 영악(獰惡)의 극치가 슬픈 현실로 자리 잡는 암울한 사회문화의 트렌드를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사회 각계 지도층들이 보여주고 있는 선함을 가장하고 부패의 심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문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밀려오는 때가 많다. 어떠한 범죄 윤리적 갈등 속에서도 뚜렷한 죄 앞에서 반성이 없다. 온갖 생떼를 쓰고 위기를 넘기면 사회적 예우로 회복되어 위선적 위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파렴치한 일들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옛 유교문화 시대에도 사회 윤리적 작은 범죄에 처벌이 가혹했다. 그리고 신분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신본문화 속에 있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우상의 범죄는 차치하자. 일상에서 겪는 소위 세상에 넘치는 자범죄(自犯罪) 앞에서 우리는 신앙의 양심에서 회심의 단계를 겪는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가장 큰 울림이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양심의 작동은 어디에서 나올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 바로 십자가의 도에서 출발하여 땅끝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사명에 있다. 성도는 처음에도 선이요, 마지막에도 선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길이 진리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과 양심의 ‘생산공장’이라고 해야 할까. 바울 선생은 디모데전서에서 아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를 탓하기 전에 곳곳의 교회 현장에서 선함과 착함의 능력이 사라지고 세속적 다툼으로 승부를 내려는 교회 문화를 많이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를 일으킨 원동력은 고귀한 복음의 능력이었다. 140년 전 기라성 같은 선교사들이 캄캄한 한국 땅을 깨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실현함으로써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누렸다. 지금 세상이 필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친 선한 양심의 작동 그리고 회복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날로 약해져 가는 세태를 방관하지 말고 한국 교회가 교회로 밀려오는 세속문화를 밀어내고 양심과 착함으로 불의와 부당함을 이기는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 국민배우가 남긴 어록에 감동되는 동기도 중요하다. 더더욱 중요한 일은 교회가 더욱 세상을 리드하는 양심과 착한 문화의 생산공장이 되도록 확장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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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배우 안성기가 남긴 ‘세상에 필요한건 착한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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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7)
- 8. 결론: 용기와 분별, 그리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고신 교단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이 선택은 단지 행정적 방향을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교단의 미래,교회의 지속성,다음 세대의 신앙,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는 교회 개척을 성장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그 시대에는 그것이 옳았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습니다.그러나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 한국 사회는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고령화는 가속화되고 신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사회 전체는 급속하게 탈 기독교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도과거 전략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성경적 충성도, 개혁주의적 보수성, 교회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맹목이고,역사적 무지이며,결국 교회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 앞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라고. (행 15)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라고. (대상 12:32) 남은 것을 정리하고 구조를 재정비하라고. (딛 1:5) 다수의 지혜로 교회를 지키라고. (잠 11:14) 교회를 하나로 세우고 강하게 하라고. (엡 4:11–13)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전략적 리더십의 본질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더욱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라.” — 존 녹스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라.” — 『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라.” — 조지 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 — 새뮤얼 러더포드 “각 시대를 위해 다른 결정을 하라.” —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것이 바로 장로교 정치의 핵심 정신이며,고신 교단이 따라야 할 신학적 정체성입니다. 고신 교단이 회복해야 할 것 고신 교단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과거 방식의 반복이 아니라 성경적 분별이며 무조건적 확장이 아니라 지혜로운 재건이며 개척의 숫자가 아니라 교회의 건강이며 독립의 자유가 아니라 장로교적 연합과 협력이며 구조적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조직 개편이 아니라,영적 각성이며신학적 회복이며개혁의 정신을 다시 붙드는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지금 고신 교단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닙니다.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멈출 용기 질문할 용기 진단할 용기 과거를 내려놓을 용기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용기 성경 앞에서 결단할 용기 성경은 과거로 돌아가라 하지 않습니다.성경은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하고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마지막 권면: 고신 교단이여,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고신 교단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만약 우리가 지금 필요한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면,10년 후, 20년 후, 고신 교회들은유럽의 교회처럼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예언적 경고입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성경의 지혜,개혁주의 전통의 정신,그리고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을 붙든다면,앞으로의 10년, 20년은 새로운 부흥과 건강한 재건의 시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개척의 시대가 아니라, 개혁의 시대이다. 지금은 확장의 시대가 아니라, 분별의 시대이다. 지금은 숫자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이다. 고신 교단이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그리고 이 시대에 다시 한번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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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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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한동훈의 몰락과 자유의 윤석열의 사형 구형 배신이 완성한 대한민국의 참혹한 비극
- 괴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방조, 자기기만, 그리고 권력 엘리트의 오만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다. 그리고 그 괴물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선명한 날짜로 기록된다. 2026년 1월 13일. 어제 대한민국 정치사는 거대한 분기점을 통과했다. 한쪽에서는 국민의힘 전 대표 한동훈이 당 윤리위원회에서 ‘제명’이라는 최고 수위의 징계를 받았고, 같은 시각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전 대통령 윤석열에게 특검이 ‘사형’을 구형했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배신의 시작과 그 처참한 최종 결과가 같은 날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 배신의 서막: 익명 뒤에 숨은 조롱과 기만 이 모든 비극의 파편은 한동훈 전 대표와 그 가족이 연루된 ‘당원 게시판’의 충격적인 문장들에서 시작되었다. “건희는 개목줄 채워서 가둬놔야 돼.” “윤석열은 알코올성 치매 같고 김건희는 걸레짝 같습니다.” 당무감사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문장들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이 아니었다. 특정 IP 대역에서 가족 명의 계정들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반복 작성된 ‘여론 조작’의 산물이었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검찰 엘리트 출신의 당대표가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을 발탁한 주군과 동지들을 향해 혐오의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사태가 불거지자 그는 부인했고, 정황이 드러나자 가족의 소행이라며 비겁하게 숨었다. 증거 인멸을 방불케 하는 새벽 시간대의 대규모 게시물 삭제는 그가 그토록 외치던 ‘법치’가 사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음을 방증한다. 2. 구조적 배신: 보수의 궤멸과 ‘수사 정치’의 부메랑 한동훈의 배신은 개인적 일탈을 넘어 구조적이었다. 그는 검찰 권력을 정치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보수 진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했다. 정치의 사법화: 수사를 정책보다 앞세우며 보수 진영의 인물들을 연이어 사법의 도마 위에 올렸다. 그 결과 보수는 ‘범죄 집단’이라는 낙인을 얻었고, 이 틈을 타 이재명 정부가 탄생하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엘리트주의의 오만: 법을 독점한 소수 엘리트가 도덕과 정치를 재단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겸비해야 할 인간이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을 때, 공동체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3. 주군을 향한 칼끝, 그리고 사형 구형 역사는 배신을 기억한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찔렀고,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그러나 한동훈의 배신은 한 개인을 넘어 자유 대한민국의 체제와 보수의 가치를 무너뜨렸다. 정의의 칼이라 믿었던 것은 결국 주군을 향한 비수가 되었다. 어제(13일), 조은석 내란 특검팀은 12·3 비상계엄을 헌법 파괴로 규정하며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한때 자유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인물이 ‘내란의 수괴’로 호명되는 참담한 광경 앞에서, 그를 보좌하며 권력을 누렸던 이들의 ‘배신’과 ‘방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배신자는 당에서 쫓겨났고, 주군은 형장의 문 앞에 서게 된 이것이 바로 배신이 완성한 최종적 풍경이다. 4. 한국 교회와 국민을 향한 호소 이 사태는 단순히 정당 내부의 분쟁이나 특정 정치인의 몰락이 아니다. 대한민국 검찰 엘리트주의의 민낯이며, 지난 수년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정치 수사가 가져온 피의 청산서다. 이제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국민에게 던져진다. 우리는 이 기만과 파국의 과정을 보고도 침묵할 것인가. 1919년 3·1운동이 신앙적 양심의 각성이었듯,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거짓과 배신을 걷어내고 진실을 바로 세울 ‘제2의 영적 각성 운동’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법의 이름을 빌린 증오와 보복에 의해 계속해서 파괴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침묵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비겁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공의와 회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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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한동훈의 몰락과 자유의 윤석열의 사형 구형 배신이 완성한 대한민국의 참혹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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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손현보·전광훈 목사 구속과 윤석열 사형 구형: 자유민주체제의 위기
- 지난해 ‘예배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섰던 손현보 목사가 구속되었다. 그리고 어제, 광화문에서 현 정권의 폭주를 비판해 온 전광훈 목사마저 구속되었다. 거의 동시에,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는 검찰이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다. 이 세 사건은 결코 서로 무관한 개별 사건이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선으로 꿰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선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이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궤도를 이탈하여, 점점 더 깊은 ‘공산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위기이며, 국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위험한 신호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이 위기의 실체를 다음 네 가지로 고발하고자 한다. 1. 본질을 가리는 ‘낙인의 정치’와 법치주의의 붕괴 손현보 목사와 전광훈 목사는 무장봉기를 획책한 적도 없고, 국가기관을 점거한 적도 없으며, 폭력을 선동한 적도 없다. 그들이 한 일은 오직 헌법이 보장한 ‘말할 권리’를 행사하며, 신앙의 양심에 따라 이 나라의 타락과 폭주를 향해 예언자적 경고를 보낸 것뿐이다. 그런데 정권은 그들에게 ‘체제 위협 세력’이라는 굴레를 씌워 감옥으로 보냈다. 이것은 법치가 아니라, 정치다. 그것도 가장 저급한 형태의 정치, 즉 반대파를 범죄자로 만드는 정치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 구형은 이 광기의 정점을 보여 준다. 쿠데타도 없었고, 무장 반란도 없었으며, 국가 전복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국가 전복 세력에게나 적용되는 ‘내란죄’를 끌어와 사형을 구형한다. 이것은 법 집행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이며,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적 처형의 예고다. 2. 역사의 반복: 나치와 홍위병의 수법이 다시 살아났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극우”라는 낙인 프레임이 거의 마술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 딱지가 붙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시민도, 존중받아야 할 목회자도, 심지어 전직 대통령도 아니다. 그는 곧바로 “제거해도 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전체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여 대중의 증오를 조직했고, 문화혁명기의 중국은 지식인과 종교인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 홍위병을 동원해 숙청했다. 지금 한국에서 난무하는 “극우”, “내란”, “체제 위협”이라는 언어는, 정권에 비판적인 인물들을 하나씩 격리하고, 침묵시키고, 제거하기 위한 숙청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단지 총 대신 판결문을 들었을 뿐,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3. 십자가 대신 홍위병의 완장을 찬 일부 목회자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참담하고 더 부끄러운 장면은, 일부 목회자들이 이 광기의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고사모’ 목사 장로들은 동료 목회자를 향해 “극우”라는 낙인을 찍으며 구속을 정당화하고, 오늘 아침 한 목사는 전직 대통령을 향해 “사형이 마땅하다”고 외친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치 시대의 선동가를 본다. 나는 그들의 언어에서 문화혁명의 홍위병을 본다. 복음을 선포해야 할 입술이 고발과 선동의 도구가 되었고, 교회는 권력을 향해 예언자적으로 외쳐야 할 자리에서 권력의 확성기로 전락하고 있다. 광화문 성도들이 들었던 것은 총과 폭탄이 아니라 태극기와 찬송가였다. 그들의 요구는 단 하나,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깊은 영적 타락을 보여 주는 증거다. 4. 지금 멈추지 않으면,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다 손현보 목사 구속, 전광훈 목사 구속, 윤석열 전 대통령 사형 구형. 이 세 사건은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명확한 이정표다. 우리는 지금 자유에서 통제로, 민주에서 관리로, 공화국에서 전체주의 체제국가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역사는 준엄하게 경고한다. 이 길의 끝에는 결코 정의도, 평화도, 인권도 없다. 이 길의 끝에는 언제나 공포와 침묵, 그리고 뒤늦은 후회만이 남았다. 지금 이 광풍을 멈추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생각이 다르면 제거되는 나라”, “말하면 잡혀가는 나라”로 완전히 변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 동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 역시, 머지않아 그 돌을 맞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진리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광기의 확성기가 되어 있는가.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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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손현보·전광훈 목사 구속과 윤석열 사형 구형: 자유민주체제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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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6)
- 7. 고신 교단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한국 사회의 변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변화에 무기력하게 휩쓸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더욱 성경적이고, 더욱 개혁주의적이며, 더욱 전략적인 길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교회와 고신 교단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구조를 재정비하는 ‘지혜로운 전략’입니다. 아래는 고신 교단이 시대에 맞게 반드시 선택해야 할 7가지 방향입니다. A. 국내 교회 개척 프로그램의 일시적 중단 개척을 멈춘다는 것은 선교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지금의 혼란 속에서 더 바른길을 찾기 위한 신앙적 결단입니다.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 분석 기존 교회의 건강 평가 지역별 실제 수요 조사 개척이 아닌 통합·강화 전략 필요성 확인 사역자 배치 구조 재점검 총회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개척을 일시적으로 멈추고,오히려 더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해야 합니다. 성경적 명령은 “계속 진행하라”가 아니라,“모여서 논의하라”(행 15)입니다. B. 다음 세대 복음화에 교단적 역량 집중 한국의 미래 교회는 다음 세대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지금 고신 교단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청년·청소년·어린이 사역의 재건입니다. 대학·캠퍼스 선교 강화 청년 신앙 공동체 회복 어린이/청소년 교육 커리큘럼 재정비 디지털·미디어 기반 복음 전도 가정 사역 및 부모 교육 지원 한국의 다문화·외국인 가정 자녀 선교 다음 세대를 잃으면, 교회 전체를 잃습니다.개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대를 복음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C. 교회 통합(합병)을 적극 추진하여 건강한 공동체로 재편 지금 한국은 교회를 늘릴 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만들 때입니다.작고 분산된 교회를 합쳐 하나의 강하고 지속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 전략입니다. 교회 통합은 다음과 같은 열매를 가져옵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피로 감소 사역의 집중과 다양성 확보 다음 세대 사역 강화 재정 효율성 증가 지역 내 건강한 교회 생태계 조성 서로 고립되지 않는 장로회적 협력 구조 회복 이는 바울이 디도에게 말한 “남은 것을 정리하라”(딛 1:5)는 명령을 오늘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D. 기존 교회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기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이미 있는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고신 교단은 다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회 리더십 교육 강화 목회자 재교육 및 코칭 제도 평신도 신학 교육 및 사역 훈련 교회의 재정·행정 구조 개선 지역 공동체 봉사 및 선교 활성화 현대 문화에 맞는 예배 및 교육 개편 건강한 교회는 성장합니다.그러나 약한 교회가 많아진다고 해서 성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E. 목회자를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지도자’로 양성하기 오늘의 목회자는 성경 지식뿐 아니라,시대 분석 능력, 문화 이해, 미디어 활용, 사회 구조 이해, 가정·심리·교육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고신 교단은 목회자를 아래와 같은 분야로 훈련해야 합니다. 인구 구조 변화 분석 현대 청년 문화 이해 디지털 시대의 목회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해 지역 선교 전략 실제적 교회 구조 개혁 방법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때를 알고 이스라엘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자들”(대상 12:32)의 역할입니다. F. 한국의 새로운 선교지를 향한 전략적 전환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단일 민족·단일 문화 사회가 아닙니다.오히려 다음과 같은 새로운 선교 기회가 열린 시대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국제 학생 난민 사역 디아스포라 귀환자 온라인·디지털 세대 고신은 한국 안에서 새로운 열방(mission field)을 발견해야 합니다.이는 고신 교단 전체의 미래 사역 방향을 확장할 기회입니다. G. 장로교 정치의 본질 회복 — ‘독립’이 아니라 ‘연합’에 서기 교회 개척이 ‘독립’과 ‘자율성’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장로교 정치의 정신은: 서로 연결되고 서로 돕고 서로 보호하고 하나의 교회 됨을 실현하는 것 여기에 있습니다. 고신이 교회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면,더 많은 작은 교회가 아니라, 더 강한 연합의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요약: 지금 고신에게 필요한 것은 ‘양적 확대’가 아니라 ‘질적 재건’이다 지금 고신 교단의 사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척을 잠시 멈추고 교단의 전체 구조를 분석하며 기존 교회를 재건하고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 세우며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사역을 확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이고,개혁주의적이며, 2026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는고신 교단의 참된 길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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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