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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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은 목사] 양심을 따라 섬기는 사명자 (행 23:1-11)
    사도행전 23장은 바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긴박한 순간 중 하나를 보여준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성령의 경고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목사와 장로의 자리는 세상이 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이다. 연약한 사람이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에 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의미한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바울은 평생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 두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역자는 사람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판단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선한 양심은 곧 거짓 없는 믿음이며, 사역의 출발점이다. 영적 침체에 빠진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면한 것도 바로 이 청결한 양심의 회복이었다.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곧 회복이고 부흥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양심은 죄와 세상의 영향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강하게 말한 후,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 즉시 태도를 바꾼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로잡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양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은 말씀에 의해 점검되고 바로 세워져야 한다. 양심을 빌미로 자신의 확신이나 경험, 고집을 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여 무뎌진 양심도 문제이지만, 자기 확신으로 굳어진 양심 역시 위험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는 공회 앞에서뿐 아니라 총독과 왕 앞에서도 동일하게 부활을 증거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사명이었고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복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다.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도 이 복음에 더욱 충실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오늘의 사역 현장 속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십자가와 부활을 뒤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사역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한다. 바울의 삶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육체적 피로와 두려움, 사역의 결과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겹친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밤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더 큰 사명을 주셨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주님의 위로와 약속이 임했다. 바울이 품고 있던 로마 선교의 비전은 바로 그 밤에 다시 확증되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오늘 이 기도회 역시 그러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세우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세상의 인기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경험이나 고집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삶,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드는 삶이야말로 사명자의 길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깊은 밤에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다. ※ 위 설교문은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특별기도회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6-04-03
  • 고신총회,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 강령 선포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총회장 최성은 목사)가 ‘고신총회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을 선포하며 교회의 신뢰 회복과 목회자의 도덕적 책임 강화를 강조했다. 이번 윤리강령은 4월 2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열린 제23회 고신총회 특별기도회에서 총회 임원회 명의로 발표됐다. 고신 전국장로회연합회(회장 윤창현 장로)와 함께한 이날 기도회에서 참석한 목회자와 교역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가운데 총회 서기 김종민 목사가 윤리강령을 낭독했다. 앞서 윤리강령 제정을 위한 TF팀 위원장 권오헌 목사는 “총회에서 일어난 상황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윤리강령 제정이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해 TF팀을 구성했다”며 “이번에는 총회 임원회 명의로 발표하고, 향후 총회 절차를 통해 보완·구체화하여 채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총회는 윤리강령 전문을 통해 “오늘날 교회는 세속화와 물질주의, 윤리적 타락으로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위기에 직면했다”며 “특히 목회자와 교역자의 영적·도덕적 해이함과 부주의한 언행이 교회의 품위와 신뢰를 훼손하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거룩한 삶과 바른 목회를 실천하고자 윤리강령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이번 윤리강령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기초로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서서 교회의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지키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목회자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종이자 그리스도의 대사로 규정하며,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는 사명을 강조했다. 세부적으로는 목회자의 소명과 정체성을 비롯해 개인 윤리와 성 윤리, 혼인과 가정 윤리, 목회 사역 윤리, 교회 정치와 치리, 교회 재정 및 재산에 관한 기준을 제시했다. 특히 설교와 목회에서의 표절과 왜곡을 금지하고, 교회의 권위를 개인의 권력이나 소유로 삼지 않도록 명시했으며, 재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조했다. 또한 동역자 및 타 교회와의 관계에서 경쟁이 아닌 협력과 연합을 지향하도록 했으며,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의 역할도 포함했다. 더불어 창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적 책임을 명시해 환경 보존과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까지 범위를 확장했다. 윤리강령은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천과 치리 조항을 통해 이를 위반할 경우 교단 헌법에 따른 권면과 징계를 수용하도록 명시함으로써 실효성을 강조했다. 고신총회는 이번 윤리강령을 통해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목회 윤리를 재정립하고, 교회의 거룩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음은 윤리 강령 전문이다. <고신총회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 강령> I. 전문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목회자와 교역자로 부르심을 믿는다. 우리는 오직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임을 고백하며, 개혁주의 신앙 위에 서서 교회의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지키는 사명을 받았다. 오늘날 교회는 세속화와 물질주의, 윤리적 타락으로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어버린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목회자와 교역자의 영적·도덕적 해이함과 이에 따른 부주의한 언행은 교회의 품위와 신뢰를 훼손하고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거룩한 삶과 바른 목회를 실천하고자 다음과 같이 고신총회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을 선포한다. II. 기본신앙과 원칙 1.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무오를 믿으며 이에 따른 삶을 살고 사역에 임한다. 2. 우리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임을 자각한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도록 성심껏 섬긴다. 4. 우리는 교회의 질서와 치리를 존중하며 교단 헌법 및 개혁주의 교회 정치 원리를 따른다. III. 윤리 강령 1. 소명과 정체성 우리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의 인준을 받아 말씀과 기도와 돌봄의 직무를 맡은 자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 성공이나 물질적 이익을 목회의 목표로 삼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주의 몸 된 교회를 견실하게 세우는 일에 힘쓴다. 2. 개인 윤리 우리는 설교자의 삶은 그 자체로서 교회와 세상을 향한 메시지임을 알고 온유하고 겸손하기를 힘쓰며,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의 조명 가운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추구한다. 설교와 목회에서 표절과 왜곡을 금하며 말을 포함한 일체의 폭력과 비윤리적 행위를 멀리하며 스스로를 엄격히 다스린다. 3. 성 윤리 우리는 성적 순결을 유지하며 목회자에게 주어진 공동체적 책임을 바탕으로 성적 유혹과 위험 상황을 경계하며 성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지킨다. 또한 목회적 권위를 이용한 어떠한 성적 착취도 단호히 배격한다. 4. 혼인과 가정 윤리 우리는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고 가정을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 이해하고 언약에 기초하여 가정을 든든히 세운다. 목회와 가정의 균형을 이루며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과 책임으로 돌보아 신앙의 본이 된다. 5. 목회 사역 윤리 우리는 성도를 하나님이 맡기신 양으로 여기고 사랑과 진리로 양육한다. 어떤 경우에도 성도를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한다. 우리는 모든 직무를 말씀과 교단 헌법, 개혁주의 신앙고백 문서에 따라 성실하게 수행하며, 결코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를 개인의 소유나 권력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6. 교회 정치와 치리 윤리 우리는 당회, 노회, 총회의 질서와 결정을 존중하여 성실히 따르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 등 교회의 모든 회의를 성경과 헌법을 따라 공정하게 인도한다. 또한 불법적 청빙이나 금권 선거 등 교회 질서를 해치는 행위를 단호히 배격한다. 7. 교회 재정 및 재산 윤리 우리는 교회의 재정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하며 부당한 헌금이나 기부를 요구하지 않고 정당한 과정을 거쳐 지출한다. 우리는 교회 재정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으며, 교회의 재산을 목회자나 가족의 소유로 삼지 않고 검소하고 절제된 삶으로 성도들의 본이 된다. 8. 동역자 및 타 교회와의 관계 우리는 동료 목회자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존중하고 협력하며, 이웃 교회와 경쟁하기보다는 연합을 추구한다. 우리는 이단이 아닌 교회와는 진리 안에서 사랑으로 협력하고 말씀 안에서 연합한다. 9.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 우리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따라 책임을 감당한다. 모든 구조적 악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며 교회가 생명과 정의, 평화의 공동체가 되도록 힘쓴다. 또한 이념, 지역, 세대 등의 갈등과 분열이 있는 사회와 국가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며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해 힘쓴다. 10. 창조 세계 및 환경에 대한 책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청지기임을 자각하며 환경 파괴와 생태계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해 책임 있게 행동한다. 자연환경을 다음 세대에게 잘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인정하고 생태계 보호와 회복에 최선을 다한다. IV. 실천과 치리 우리는 본 윤리강령을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교단 헌법과 치리 절차에 따라 주어지는 권면과 징계를 겸허히 수용한다. 우리는 본 윤리강령을 성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서로 권면하고 돌보며, 교회의 거룩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일에 함께 헌신한다. 주후 2026년 4월 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제75회기 총회 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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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단 및 연합회
    2026-04-03
  • [특별기획] 기독문화유산을 지키자(6)
    창원특례시 합포구 진동 호주선교사 마산공원묘지에는 8분의 호주선교사 발자취가 있다. 이 중 경남지역에서 온몸으로 선교활동에 헌신하다 소천할 때 비석을 세우고 공덕을 기록한 세 분이 있다. 지난번에 다룬 맥피 선교사, 그리고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선교사는 G.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이다. 그리고 한 분은 진주 성남교회를 설립한 목회자 아더 윌리엄 선교사의 묘비이다. 먼저 G. 네피아 선교사는 한국명 남성진(南性眞)으로, 1912년부터 1936년까지 주로 진주지역에서 기독교병원 배돈병원에서 헌신적으로 간호선교사로 활동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1872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다. 잠시 교사로 활동하다 에든버러 간호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호주장로회 선교사로 1912년 12월 12일 내한했다. 입국 후 처음 마산지역에서 복음전도활동을 하면서 모자 건강을 위한 진료소를 운영했다. 이후 진주지역으로 옮겨 호주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배돈병원 간호부장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배돈병원은 환자 진료뿐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간호는 남성들이 중심이었고 여성 간호사는 천박한 직업으로 멸시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점차 시간이 지나 간호사 양성소를 거친 여성 간호사가 생겨났다. 여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남아 있다. 1820년 가을 통영에 콜레라가 유행했다. 긴급히 예방을 위해 남자 간호사를 양성하여 이들이 주사를 놓게 되었는데,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주사 맞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여성 간호사 양성의 시급함이 대두되어 많은 여성 간호사들이 양육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여성 간호사를 양성하는 데 네피아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간호정신을 강조하면서 교육했다. 그리고 네피아 선교사는 백인의 여성으로서 한국인들에게 헌신적인 간호의 섬김을 실천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진주 배돈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25년간 봉직하면서 유아복지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모유가 부족한 산모들에게 콩가루, 미숫가루 등으로 모유 대체물을 개발하여 체계적으로 산모와 아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배돈병원에서의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조선일보에 ‘칭송 자자한 진주 培敦病院(배돈병원)’이라는 제목으로 돈이 없어 약을 못 먹는 환자를 무료로 입원시켜 치료하고, 의령군 가례면 대천리 백재관 씨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으나 개복수술로 소생했다는 미담이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마산과 주로 진주 등지에서 평생 독신으로 환자를 돌보다 1936년 8월 29일, 64세의 일기로 소천하여 진주시 평거동 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묘지가 도시화로 멸실되면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교회 이호준 목사의 주도로 1992년 6월 9일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호주선교 대표 존 브라운 목사 집례로 이장 추모예배를 드렸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는 소천 후 진주에서 장례를 치를 때 세워졌다. 당시 묘비에 새긴 글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준다.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서 진주 배돈병원에서 사랑의 봉사를 하다 1936년에 천국에 가시어 이곳에 안장되다." 이 묘비는 지금부터 90년 전에 세워져 귀한 헌신을 새겨 두고 있다. 묘비 글자는 퇴색되었지만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다. 국가적 유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후 2005년 창신대학 강병도 장로(창신대학장) 주도로 네피아 선교사를 비롯한 8명의 호주선교사 순교기념사업이 진행되었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와 유해는 2009년 9월 산청에서 마산 호주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 자료는 기독역사학자 박시영 목사의 연구자료에 근거함) 글.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회장
    • 뉴스
    • 종합
    2026-03-25

오피니언 검색결과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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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연속기고5] 손봉호의 신학적 이탈, 그 뿌리는 ‘칸트적 합리주의’인가?
    서론: 뿌리가 다르면 열매도 다르다 지난 호에서 필자는 손봉호 교수의 신학적 정체성이 정통 개혁주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토록 ‘윤리’를 신앙의 본질보다 앞세우며 복음을 도덕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가? 그 해답은 그의 학문적 모태인 ‘칸트(Immanuel Kant) 철학’에 있다. 손 교수는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며, 그의 사고 체계 전반은 칸트의 윤리학과 의무론적 사고방식, 합리주의적 도덕 철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칸트의 철학이 하나님의 절대 계시를 다루는 기독교 신학과 만날 때, 신앙의 초월성이 파괴되는 비극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1. 칸트의 ‘이성의 한계’가 성경의 ‘초월성’을 가로막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영역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현상계'와, 신이나 영혼처럼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영역인 ‘본체계(Noumena)’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 ‘본체계’를 들여다보거나 깨달을 수 없다는 ‘인식의 장벽’을 높이 세웠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는 분이니, 골치 아픈 신앙의 신비나 절대 진리는 제쳐두고 오직 인간의 머리로 이해 가능한 ‘도덕적 실천’에만 집중하자"는 논리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칸트적 사고에 갇혀,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인 성경 말씀보다 우리 눈에 보이고 이성으로 납득되는 ‘시대적 대세’와 ‘사회적 합리성’을 신앙의 주인으로 모시는 위험한 우를 범하고 있다. 손봉호 ①: “동성애 반대 운동이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이미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버린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교회가 시대적 조류를 읽지 못하면 고립될 뿐이다.” (출처: 손봉호 교수 강연 및 언론 인터뷰 취지 요약) 손봉호 ②: “기독교가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강조해도, 그것이 보편적인 도덕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하면 세상을 설득할 수 없다.” (출처: 손봉호, 『기독교 윤리』 강연 중) [비평]: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경의 초월성을 ‘시대적 대세’라는 세속적 잣대 아래 굴복시키는 신앙적 변절이다. 성경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손봉호는 ‘대세’를 운운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시대적 유행과 타협시키려 한다. 진리는 다수결이나 대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손 교수의 사고방식은 시대정신을 계시보다 앞세우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전형이며,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세속적 합리주의’의 발로다. 그는 칸트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느라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와 거룩한 법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 2. ‘정언명령’이 ‘복음의 은혜’를 대체하는 율법주의적 독소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란 어떤 조건이나 보상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세운 도덕 법칙이기에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무조건적 의무'를 뜻한다. 문제는 이 명령의 주체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라는 점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 칸트적 의무론을 기독교에 이식하여, 성도의 삶을 기쁨의 열매가 아닌 엄격한 도덕적 의무 수행으로 변질시켰다. 손봉호 ①: “그리스도인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다.” (출처: 손봉호 교수 다수 칼럼) 손봉호 ②: “윤리적 실천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출처: 방송 인터뷰 및 대담) [비평]:그리스도인의 정직과 윤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즐거이 맺는 성령의 열매이지, 이성적 법칙에 따른 의무적 고행이 아니다. 손 교수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성경의 은혜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복음을 무거운 도덕적 멍에로 바꾸어버렸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은혜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손봉호의 윤리지상주의는 5세기 교회가 배격했던 펠라기우스(Pelagianism)의 행위 구원론적 망령을 소환하는 것이며, 윤리를 구원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고신이 수호해 온 이신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와 맥을 같이 한다. 3. 도덕적 주체자가 된 인간, 하나님을 조연으로 만들다 칸트 철학에서 인간은 스스로 도덕 법칙을 세우는 자율적 주체다. 손봉호 교수의 기독교 윤리 역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동성보다, ‘윤리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손봉호 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신학의 부재가 아니라 윤리의 부재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서야 교회가 산다.” (출처: 『현대 사회와 기독교 윤리』) 손봉호 ②: “하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 때 비로소 우리와 함께하신다.” (출처: 기윤실 행사 강연) [비평]:교회의 문제는 윤리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종’이다. 복음이 사라졌기에 윤리적 열매가 없는 것인데, 손봉호는 선후 관계를 뒤바꿔 인간의 도덕적 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조연으로 격하시키는 오만방자한 발상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극대화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자연주의적 인본주의’이며, 기독교를 단지 사회적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세속주의 교회론의 결과물이다. 결론: 철학의 하녀가 된 인본주의 신학을 거부하라 손봉호 교수의 윤리 운동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칸트의 이성을,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앞세우는 위험한 철학적 기반이 자리 잡고 있다. 신학이 철학의 하녀가 될 때, 복음은 생명력을 잃고 도덕 교과서로 전락한다. 손 교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속에 박제된 무력한 신에 불과하다. 고신 총회와 한국 교회는 이제 손 교수의 율법 선생질 하는 ‘철학적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앞에 무릎 꿇고,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이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성화되어 가는 것은 손봉호식 윤리적 실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 거듭나게 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성령님과 말씀의 능력 때문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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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기고] 초고령사회 대한민국, 노인요양원 세례는 성경적일까?
    대한민국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1,084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1%를 차지하면서 이제 국민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노인인 시대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령화 사회’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초고령 요양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는 누구나 부모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 가능성이 높은 시대가 되었고, 동시에 우리 자신 역시 요양원의 돌봄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복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선교 구조 자체를 바꾸는 사건이다. 과거 교회의 선교가 주일학교와 학생들, 교회당 중심이었다면, 앞으로의 선교는 병원과 요양원이라는 삶의 마지막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신앙을 갖지 못한 부모 세대를 둔 자녀들에게는 “어디에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가”가 곧 영혼 구원의 문제로 이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전환 속에서 요양원에서의 예배와 성례, 특히 인지 기능이 약해진 어르신들에게 베푸는 세례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주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목회적·신학적 질문이 되었다. 이번 부활주일에도 우리 요양원에서는 어르신 10명을 대상으로 세례식을 거행했다. 노인요양원 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치매나 노환으로 인지 능력이 저하된 어르신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세례의 자격은 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자 ② 일정 기간 학습교인으로 교회에 출석한 자 ③ 당회 문답으로 그 신앙을 확인받은 자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병원이나 요양원 현장에서 이러한 절차를 온전히 밟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사리 분별이 어려운 치매 노인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자칫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요양원이라는 특수한 선교 현장에서 지난 27년 동안 수천 명의 어르신을 돌보고, 1,200명 이상의 임종을 지켜보며 줄곧 세례를 베풀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례는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례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시험하는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언약 가운데 받아들이셨음을 외적으로 인치시는 표이기 때문이다(롬 4:11). 나는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선 요양원 세례식의 정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온 룻과 보아스의 환대 요양원 세례의 강력한 성경적 모델로 나는 룻을 자주 인용한다.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왔을 때, 보아스는 그녀를 향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고 축복했다. 물론 룻은 베들레헴에 들어오기 전 이미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라는 신앙고백을 했다. 보아스가 이 고백의 전모를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룻을 향해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라고 축복한 환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요양원에 입소하여 매일 예배의 자리에 머무는 어르신들이야말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온” 분들이다. 비록 질병에 밀려 이곳에 오셨을지라도 복음의 공동체가 운영하는 성읍에 머물며 찬송을 부르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 자체가 이미 거룩한 입성이다. 세례는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거룩한 환대이며 언약 공동체 안으로의 인치심이다. 2. 은혜의 보편적 휩쓸림: 출애굽 ‘잡족’의 홍해 세례 출애굽 사건에서도 중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올 때 ‘중다한 잡족’이 함께 섞여 있었다(출 12:38). 그들이 모두 투철한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구름 기둥 아래로 모으셨고 홍해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바울은 홍해 통과 사건을 공동체적 ‘세례’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잡족들은 광야 교회 안에서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셨다. 물론 세례 자체가 곧 구원의 자동 보증은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인간의 인지 능력의 완성도를 시험하는 절차이기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약 공동체 안으로 불러 들이시는 표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파도는 신앙의 성숙도나 혈통을 따지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 복음의 대열에 합류한 어르신들이 비록 인지 기능이 낮을지라도 그들을 이 ‘홍해의 세례’에서 제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3.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 즉각적인 은혜의 집례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이사야서를 읽고 있으나 그 뜻을 알지 못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말씀을 통해 복음을 깨달은 내시는 즉시 세례받기를 청했고 빌립은 지체 없이 세례를 베풀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차의 무용성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믿음의 반응 앞에서 은혜의 표를 불필요하게 지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치매 어르신들도 말씀을 들을 때 영혼 깊은 곳에서 반응하신다. 예배 참석 자체가 곧 “아멘”의 신앙고백이다. 인지적 계산이 아닌 영혼의 피난처로서 천국을 사모하는 그들에게 목사가 즉각적인 은혜의 방편인 세례와 성찬을 베푸는 것은 마땅한 사명이다. 4. ‘영적 유아’가 된 이들을 위한 언약적 수용: 유아세례의 원리와 칼빈의 성례 이해 우리는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영아에게도 유아세례를 베푼다. 이는 아이의 의지보다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창 17:7)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4항 역시 세례의 대상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뿐 아니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됨을 분명히 한다. 이는 세례가 인간의 의식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15장에서 세례를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양심에 인치는 표”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세례를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외적 표라고 말하며, 세례의 효력은 인간의 이해력이나 기억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는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나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자기 언약 안에서 기억하시고 붙드신다는 사실을 교회 앞에서 선언하는 은혜의 표지이다.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섬기다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시는 분들이 많다. 특히 치매 어르신들은 인지적으로 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인다. 스스로를 표현하고 고백할 힘이 약해진 어르신들을 향한 세례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 온 가족과 공동체의 믿음을 담보로 한다. 어르신은 하나님을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어르신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언약의 신실함에 의지하여 나는 오늘도 세례를 베푼다. 5. 장로교 헌법이 보여 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목회적 배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헌법 예배지침은 세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성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음과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됨을 표하고 인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세례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확인 절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 언약적 표이며 하나님의 소유 됨을 선언하는 성례이다. 또한 개혁주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임종 직전 세례, 병상 세례, 위급한 상황에서의 세례와 같이 정상적인 문답 절차를 충분히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목사의 신중한 판단과 당회의 목회적 배려 아래 세례를 시행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5항은 말한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시행되는 그 순간에만 제한되지 아니한다.” 이 고백은 세례가 인간의 인지 능력이나 기억의 지속성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병상에 있거나 인지 능력이 약해진 어르신들에게 베풀어지는 요양원 세례 역시 장로교 헌법과 개혁주의 교회의 성례 이해 안에서 충분히 정당한 목회적 집례라고 할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세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노인들은 체계적인 성경공부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소망한다. 나는 그 영적 신비를 현장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예배를 드렸다. 초창기 10년 동안은 하루 두 번씩 예배를 드렸다. 노인들은 밤사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부활절에도 세례문답을 진행하며 어르신들의 신앙 고백을 들었다. “하모 하모, 믿고 말고!” 이 고백 앞에서 어떻게 세례를 주저할 수 있겠는가? 치매는 인간의 기억을 지우지만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내가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요양원에서의 세례식은 어르신이 하나님을 붙잡는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어르신을 끝까지 붙잡고 계심을 선포하는 예식이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 가는 마지막 순간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은 그 영혼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입혀 드리는 가장 존엄한 예복이다. 인지를 넘어선 은혜, 그것이 우리가 요양원 세례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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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연속기고3] 손봉호 교수의 민낯, 최철호와의 ‘위험한 동행’
    그동안 필자는 두 차례에 걸쳐 ① ‘손봉호 교수는 한국 교회를 극우로 모는 좌파 본산인가’ ② ‘로잔 이후 한국 복음주의의 변질, 존 스토트에서 손봉호·SFC·기윤실까지’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번에는 세 번째로 ③ ‘손봉호 교수의 민낯, 최철호와의 위험한 동행, 단순 연대를 넘어선 사상적 융합의 실체’를 다루고자 한다. 서론: ‘도덕적 스승’의 가면 뒤에 가려진 인적 연계의 실체 손봉호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 내에서 '윤리와 도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도덕적 권위가 과연 성경적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특정 이념을 교회 내부로 이식하기 위한 ‘트로이 목마’였는지 이제는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 의문의 핵심에는 ‘종북 주사파’ 논란의 중심에 선 최철호 목사(아름다운마을공동체 대표)와의 끈끈한 인적·사상적 연계가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손 교수가 어떻게 종북적 색채를 가진 활동가들에게 ‘도덕적 세탁기’ 역할을 했는지 폭로하고자 한다. 1. 성서한국, ‘종북 논란’ 최철호와 ‘교계 원로’ 손봉호의 위험한 공생 독자들이 먼저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아름다운마을공동체’를 이끄는 최철호 목사다. 그는 2005년 8월, 성서한국 영역별 준비위원 자격으로 금강산을 방문했을 당시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현수막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어 교계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또한, 그가 운영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김일성 찬가를 부르거나 교시를 인용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잇따르며 종북 주사파 논란의 중심에 섰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인물이 한국 복음주의 사회 선교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성서한국’의 핵심 이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점이다. 성서한국은 2002년 창립 초기 복음주의적 사회 참여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점차 좌편향적 활동가들이 장악하며 교계를 좌경화하는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 바로 이 단체의 얼굴이자 정신적 지주인 공동대표와 자문위원장 자리에 손봉호 교수가 10년 가까이 군림해 왔다. 손 교수는 최 목사의 이러한 이념적 편향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시대의 양심’으로 포장하며 교회 내부로 침투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손봉호의 발언 ①: 손 교수는 2011년 성서한국 전국대회 축사 등을 통해 “성서한국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가장 순수한 복음주의 운동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은 시대의 양심이다”라고 공언했다. 손봉호의 발언 ②: 더 나아가 그는 최철호 목사의 공동체 운동을 두고 “자본주의의 탐욕을 극복하는 성경적 대안이며, 우리 시대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며 극찬했다(2013년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관련 대담 등). [비평]:결국 손봉호라는 거대한 ‘도덕적 브랜드’가 최철호의 종북적 색채를 탈색해 주는 ‘세탁기’ 역할을 한 셈이다.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양의 옷을 입고 들어온 이리에게 손 교수가 직접 목자의 지팡이를 쥐여준 격이며, 이는 한국 교회를 향한 치명적인 영적 배신행위다. 2. S.F.C.의 좌경화와 폐지론 사태: 고신의 심장에 박힌 독화살 손봉호 교수가 '복음주의적 멘토'로 군림하는 동안, 그와 동행한 최철호의 독소는 고신의 미래인 S.F.C.(학생신앙운동)의 뿌리까지 침투했다. 최철호는 2010년대를 전후하여 S.F.C. 간사들을 자신의 '마을공동체'로 불러들여 공동체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사회주의적 해방 담론과 반미 의식을 주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2016년 5월 18일, 당시 총회 SFC지도위원장이었던 안병만 목사가 코람데오닷컴에 기고한 충격적인 폭로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안 목사는 해당 기고문에서 “북한 노동당 청년 적위대들이 부르는 노래인 ‘청춘’을 아무런 제지나 여과 없이 기독 청년들이 부르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고 일갈했다. 문제의 노래 가사 끝부분은 “어머니 당(노동당)을 위해 조국을 위해”로 끝난다. 고신의 청년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어머니 당’을 노래하게 만든 이 영적 오염의 배후에 바로 최철호가 있었고, 그 최철호를 ‘우리 시대의 모델’이라며 고신 교회에 소개한 장본인이 바로 손봉호 교수다. 이로 인해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되어야 할 간사들이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시위(2012년) 등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급기야 2022년 고신 총회에서 SFC 폐지론이 제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신의 심장에 독화살을 쏜 자는 최철호지만, 그 활을 쥐여주고 사로(射路)를 열어준 자는 바로 손봉호다. 3. ‘평화’라는 이름의 굴종, 안보 해체의 선봉에 서다 손 교수의 좌편향성은 국가 안보 문제에서 그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최철호가 이끄는 생명평화연대 등과 손잡고 2014년 ‘키리졸브 중단’ 요구나 대북 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며 북한 정권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북한의 핵 위협에는 침묵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훈련을 비난하는 것이 과연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 윤리’인가? 손봉호의 발언 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이며, 기독교인은 무조건적인 비폭력과 평화를 외쳐야 한다.” (대북 관련 시국 성명서 취지) 손봉호의 발언 ②: “한국 기독교가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에 앞서 남한의 자본주의적 죄악과 안보 지상주의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시국 강연 중) [비평]:적이 칼을 들고 위협하는데 방어 훈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어떻게 윤리가 될 수 있는가? 손 교수는 "남한의 죄악을 먼저 회개하라"는 논리로 북한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으며, 최 목사가 친북적 행보를 보일 때마다 그 곁에서 ‘기만적 평화주의(Pseudo-Pacifism)’라는 도덕적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결론: 이제는 ‘도덕적 방관’을 끝내고 고신 정신을 회복해야 할 때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 고신의 정신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곁의 ‘원로’는 특정 이념에 경도된 인사들과 손잡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손봉호 교수는 본인의 행보가 ‘인도주의’라고 강변하지만, 최철호라는 인물이 가진 종북적 색채를 알고도 그와 함께 강단에 서서 ‘공의’를 논했다면 이는 무지를 넘어선 사상적 공모다. 손 교수는 더 이상 '기윤실'과 '복음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지 마라. 이제 우리 고신인들은 도덕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그의 실체를 직시하고, SFC와 고신과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한 교단적인 대책과 수습방안을 강력히 촉구 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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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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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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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통영기연 곽만섭 목사
    사랑하는 경남신문 독자들과 경남 성도들께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선 교회와 성도들이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다시 붙들며, 믿음 가운데 새 힘을 얻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대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세상의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흔들지만, 주님께서 살아계신 한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우리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우리를 다시 일으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위에 부활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여, 각 가정과 삶의 자리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부활의 기쁨이 실제가 되어, 지친 마음을 회복시키고 서로를 위로하는 은혜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흘려보내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작은 섬김과 나눔이 모여 이웃에게는 위로가 되고, 사회에는 선한 영향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어둠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은혜로 날마다 새 힘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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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해기연 정용기 목사
    사랑하는 진해와 경남 지역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우리의 믿음의 핵심으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현재의 능력이며, 미래를 향한 확실한 약속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처럼, 고난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오늘의 시대는 세계 각국의 이기주의와 전쟁의 소식, 경제적 어려움과 이념의 대립, 빈부와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각자의 삶에 놓인 무거운 짐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평강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사회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 신앙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 희망을, 상처의 자리에 치유를, 분열의 자리에 화해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진해와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가 한마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나누며 이 땅 가운데 생명의 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는 증인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부활절 진해기독교연합회 회장 정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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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진주기총 이경은 목사
    부활에 이르는 십자가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이요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인류 역사 이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이는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절망을 느낍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과 종교와 철학들이 죽음을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그 누구도 죽음의 벽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죽은 자의 부활이 실재함을 친히 증명하신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는 모든 인생들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큰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지지만 부활 이후의 삶은 영원합니다. 사라질 것에만 소망을 두고 살면 죽음 앞에서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소망을 두고 살면 죽음 앞에서 허무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더 아름답고 더 영화로운 삶으로 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과 영원한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 부활을 통해 주는 기쁨과 영원한 소망이 여러분의 삶 속에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 앞에 십자가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에 이르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는 반드시 고난과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고통을 인내하며 감당할 때 비로소 우리가 있는 곳에 부활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부활을 얻게 됩니다. 부활의 영광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요 소망의 소식이지만 그 부활의 영광은 말씀에 순종하며 고난과 고통을 통과한 자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영광을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십자가의 고난을 묵묵히 인내하며 잘 감당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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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장유기연 이경로 목사
    사랑하는 경남의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2천 년 전,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 앞에서 들었던 그 한 마디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살아있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신비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교회로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지금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안팎의 도전 앞에 서 있고, 사회는 분열과 혼란 속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이 모든 현실보다 크고 깊습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한, 교회는 살아있고, 복음은 멈추지 않으며, 소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혹시 마음이 춥고 힘든 분이 계신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여러분의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장유 지역과 경남의 모든 교회가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웃음을 전하는 따뜻한 봄날의 햇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유 땅과 경남 땅의 모든 교회가 이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 되어, 우리 지역 사회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부활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2026년 부활절에 장유기독교연합회 회장 이경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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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기획 검색결과

  • [특별기획] 기독문화유산을 지키자(6)
    창원특례시 합포구 진동 호주선교사 마산공원묘지에는 8분의 호주선교사 발자취가 있다. 이 중 경남지역에서 온몸으로 선교활동에 헌신하다 소천할 때 비석을 세우고 공덕을 기록한 세 분이 있다. 지난번에 다룬 맥피 선교사, 그리고 이번 호에 소개하고자 하는 선교사는 G.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이다. 그리고 한 분은 진주 성남교회를 설립한 목회자 아더 윌리엄 선교사의 묘비이다. 먼저 G. 네피아 선교사는 한국명 남성진(南性眞)으로, 1912년부터 1936년까지 주로 진주지역에서 기독교병원 배돈병원에서 헌신적으로 간호선교사로 활동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1872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했다. 잠시 교사로 활동하다 에든버러 간호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호주장로회 선교사로 1912년 12월 12일 내한했다. 입국 후 처음 마산지역에서 복음전도활동을 하면서 모자 건강을 위한 진료소를 운영했다. 이후 진주지역으로 옮겨 호주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배돈병원 간호부장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배돈병원은 환자 진료뿐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당시 간호는 남성들이 중심이었고 여성 간호사는 천박한 직업으로 멸시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점차 시간이 지나 간호사 양성소를 거친 여성 간호사가 생겨났다. 여기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남아 있다. 1820년 가을 통영에 콜레라가 유행했다. 긴급히 예방을 위해 남자 간호사를 양성하여 이들이 주사를 놓게 되었는데,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주사 맞기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여성 간호사 양성의 시급함이 대두되어 많은 여성 간호사들이 양육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여성 간호사를 양성하는 데 네피아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간호정신을 강조하면서 교육했다. 그리고 네피아 선교사는 백인의 여성으로서 한국인들에게 헌신적인 간호의 섬김을 실천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진주 배돈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25년간 봉직하면서 유아복지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모유가 부족한 산모들에게 콩가루, 미숫가루 등으로 모유 대체물을 개발하여 체계적으로 산모와 아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했다. 배돈병원에서의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조선일보에 ‘칭송 자자한 진주 培敦病院(배돈병원)’이라는 제목으로 돈이 없어 약을 못 먹는 환자를 무료로 입원시켜 치료하고, 의령군 가례면 대천리 백재관 씨가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으나 개복수술로 소생했다는 미담이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네피아 선교사는 마산과 주로 진주 등지에서 평생 독신으로 환자를 돌보다 1936년 8월 29일, 64세의 일기로 소천하여 진주시 평거동 묘지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묘지가 도시화로 멸실되면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교회 이호준 목사의 주도로 1992년 6월 9일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호주선교 대표 존 브라운 목사 집례로 이장 추모예배를 드렸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는 소천 후 진주에서 장례를 치를 때 세워졌다. 당시 묘비에 새긴 글은 지금까지도 큰 울림을 준다.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서 진주 배돈병원에서 사랑의 봉사를 하다 1936년에 천국에 가시어 이곳에 안장되다." 이 묘비는 지금부터 90년 전에 세워져 귀한 헌신을 새겨 두고 있다. 묘비 글자는 퇴색되었지만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고 있다. 국가적 유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후 2005년 창신대학 강병도 장로(창신대학장) 주도로 네피아 선교사를 비롯한 8명의 호주선교사 순교기념사업이 진행되었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와 유해는 2009년 9월 산청에서 마산 호주선교사 묘원으로 이장되어 안장되었다. (네피아 선교사의 묘비 자료는 기독역사학자 박시영 목사의 연구자료에 근거함) 글.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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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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