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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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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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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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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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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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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오성한 목사] 정체성(2)
    만약 말씀이 아닌 것 같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아직 내가 계시가 열리지 않아서 그렇거나 내 생각이 틀려서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요한일서 3장 9절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구절에 세 번이나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강조를 한다. 이런 말씀을 보고 나 자신을 볼 때 수용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안 맞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다. 말씀의 조명이 덜 열려서 그렇다고 받아 들여야 한다. 또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데 나 자신을 볼 때 죽은 것 같지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일단 성경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을 믿는 자가 아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다.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길을 지나가면서 "엄마 저것 뭐예요?"하고 자꾸 질문한다. 그러면 "저건 자동차란다"하고 말하지, 저 차는 3,000CC이고, 가격이 얼마이고, 차 길이는 얼마이고, 등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자동차의 구조를 다 몰라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간다. 그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하나가지고 따지고 들어가 "내 생각은 이런데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꼬?"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믿다가 무너지기 쉽다.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육적인 고집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영의 생각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을 생각하는 것이다. 거듭난 자의 영은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말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부로 삼았다고 이해하면 된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비밀이 크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한 말씀이다."는 결론을 맺는다. 부부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네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하나님이 교회를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분들은 "아니 아내만 복종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그 말만이 아니다. 뒤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씀했다. 이것이 교회의 비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해 놓았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이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만드셨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점점 거룩한 신부로 나아가다가 딱 죽을 때 거룩한 신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미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었다. 입술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단순한 반복된 고백이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 이전엔 나는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믿음으로 거룩한 신부임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초임을 알았다. 너무 신이난다. 좋은 신부는 신랑과 같이 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신랑과 함께 하는 자체가 축복이다. 예수님과 부부가 된 자체가 복이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있는 자체를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나는 많이 행복하다. 행복하다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 고백한다. 나의 최고의 신랑이라고 고백한다. "주님 난 주님으로 인해 너무 행복해요."라고 자주 고백한다. 때로는 너무 행복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주님께 더 잘 표현 해 드리고 싶은데 입술의 표현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한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어제 했던 말만 또 되풀이 한다. 부부가 살다 보면 아내를 "사랑해요"라는 표현도 특별한 표현 외에 특별한 표현을 못하듯 주님께도 그러하다. 표현이 부족해도 난 주님이 좋다. 이미 이루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다. 십자가는 나를 해방했다. 서로 "여보 사랑해"라는 간단한 표현을 자주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부부이듯 주님과 좋은 부부가 되고 싶다. 시랑과 친밀한 대화를 원하는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가? 깊은 대화를 잘 하려면 단순한 이야기 자주 하면 된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 사랑해요."라고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으로 너무 많이 이야기하다가 새벽기도시간인데 늦을 뻔 했다. "주님 잘 잤습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부족과 연약함도 다 짊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생각 더 많이 하길 원합니다." 이러는데 나도 모르게 방언기도가 나오고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늦을 뻔 했다. 짧은 대화가 밝고 명랑하게 잘 되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등의 대화가 자유로 와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에 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고 언제 학교에서 왔는지 모르게 집에 들어온다면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짧은 대화가 잘 안 되는 관계에서 긴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환영하고 영접해 주셨다. 우리와 친근하고 인격적인 삶을 살길 원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것을 깨달은 바울처럼 우리도 깨달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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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황권철 목사] 마태(Matthew's Behind Stories)-언약의 사도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마가복음에 이어 마태복음을 쓴 사람이다.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레위였다(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태는 본래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이 레위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 9:9). 그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이다. 당시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때라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도시락 하나가 귀한 시대였다(마 14:13-21). 그렇지만 세리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세관에서 앉아서 일하는 좋은 자리에서 사직서를 내고 방랑자와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따른 것은 그가 인간이 배를 불리는 빵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앉았어도 복음과 상관없는 시간과 물질과 권력은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했다. 세속 풍속과 유행을 따라 고귀한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영혼을 구하고 생명을 건지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   복음서를 기록한 세리 마태    마태복음의 저자는 세리 마태이다. 그런 레위가 마가의 복음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 아마도 같은 레위 지파 출신의 마가가 그에게 사본을 전했을 수도 있다. 레위는 그의 율법 지식과 세리 특유의 치밀함으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예수 그리스도에 연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는 자신의 이름 레위를 헬라식 이름 마태로 고쳐서 구약의 이스라엘 시대에서 신약의 이방 시대로 들어섰음을 선언했다. 특히 그의 복음서에는 마가복음에 없는 예수 탄생의 경위와 동방 박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세원을 추적하는 세리 특유의 솜씨로 마리아를 인터뷰하여 그 사실을 캐냈을 것이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같은 동족 유대인을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이런 마태복음은 결코 구약의 참된 계시를 인본주의적이요, 패쇄적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에 물들지 않고 예수의 복음과 구약의 계시가 상호 연속성을 가진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비하여 구약의 인용이 많다. 또한 그는 당시 세리직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자로 헬라어도 잘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상당한 재산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눅 5:29), 화폐에 대한 빈번한 언급과 회계에 능한 그의 관심을 통계 수치에 밝은 직업적 기질을 그의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과 신약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하게 했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때는 주후 397년경 칼타고 회에서 이루어졌다. 그 기준은 이러하다. 첫째는 사도들의 후원을 받은 책들이다(엡 3:1-5). 둘째, 그 내용이 진실한 책이다(고후 2:17). 셋째,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다(벧후 1;21). 그러나 이 성경을 편집할 때 연대순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구속계시의 성취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신약의 여러 복음서들 중에 가장 우선적으로 편집한 것이 마태복음이다. 마태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 역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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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3-01-11
  • [양대식 목사] 사랑의리더십에 대하여(17)
    사랑의 사도 요한 사도 요한은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질투심이 많고, 높아지고자 했으며, 사랑이 부족한 자였습니다. 예수님 가까이에서 말씀 듣던 요한이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사랑의 은혜에 감동 받아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요한입니다. 요한 1서 4장에서 요한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여 사랑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노령의 나이에 항상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사랑에 대하여 가르치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말로만 사랑을 외친 것이 아니고 자신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며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실까요? 사랑이 중요하고 실제 사람들이 사랑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자들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믿는 자들이 갈등이 생기고 틀어지면 서로 해결하지 못하고 속으로 꽁하면서 미워하며, 복수하려고 합니다. 좁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좁으면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넓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람들을 품게 됩니다. 사랑의 사도로 변화된 사도 요한을 보면 우리도 사랑의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은혜 받고 말씀 듣고 성령 받으면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최고의 변화와 기적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리더는 말 잘하는 자 보다 사랑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의 리더, 사랑하는 교사, 사랑의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가 가장 매력이 있고 잘 사는 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 살면서 소금과 빛이 되어 선한 영향을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유혹의 광장입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빠지면 죄짓게 되고, 유혹에 넘어가고, 시험에 듭니다. 세상은 사탄 마귀가 활동하는 무대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쾌락과 돈,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시험과 유혹에 넘어져 죄짓게 되고 믿음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근심하게 됩니다. 세상 유행 문화 풍조를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오락 취미에 빠져 하나님 섬기지 아니하고 예배드리지 않으면 믿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 세상에 취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면 세상이 우상이 됩니다. 세상은 화려해 보이고 우리에게 성공을 줄 것처럼 유혹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망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평안과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으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세상의 것은 헛된 것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다가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믿음이 식어졌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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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3-01-1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4: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란 연호 사용에 대해서
    I. 서언(序言) 그동안 연말연시의 때를 맞이하여 일 년 12달의 태양력에 따른 월별 명칭과 한 주간의 요일에 대해서 지난 호까지 논하여 보았다. 요일의 명칭은 1회 더 다음에 논하기로 하고 오늘의 본 호에서는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60간지 연호인‘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말이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란 연호 사용의 유래 1. 60간지(六十干支) 연호의 유래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연호는 60간지 연호이다. 이는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나온 것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60갑자 연호인 갑자, 을축, 병인, 올해의 신축년 등은 하늘의 줄기로 보는 천간(天干)의 10글자(十干)와 땅의 가지를 뜻하는 12개의 지지(地支)가 합쳐서 만든 연호이다. 또한 태어나서 60년이 되면 60연호가 다시 돌아오는 해가 되기 때문에 환갑(還甲)이 된다. 이때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생일의 마지막이라 해서 축하연을 전통적으로 해오기도 했다. 2. 60간지에서의 계묘년(癸卯年) 검은 토끼해의 유래 올해 2023년은 60 간지 중 마흔 번째 해인 ‘계묘년(癸卯年)으로 토끼해다. 10간(干)의 마지막인 계(癸)와 12지(支)중 네 번째 동물인 토끼의 묘(卯)가 만난 해라고 한다. 계는 색깔로는 검은색이기 때문에‘검은 토끼의 해’로도 불린다. 또한 토끼는 집에서도 사육하는 친숙한 동물이기 때문에 동양의 설화, 민담 등에서도 많이 나오며, 번식력이 강하기 때문에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한다. 또한 십이지 신 중 묘신(卯神)으로서 음력 2월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기기도 하고, 초식 동물로서 이미지는 약하지만, 삼국사기의 구토지설(龜兎之說)과 판소리 수궁가에서는 지혜와 임기응변으로 능한 동물로도 여긴다. 도교에서는 옥토끼 설화를 통해 달(月)의 계수나무 아래에서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설화는 나중에 불교설화에 영향을 주었고, 우리나라에선 윤극영 작사 작곡의 반달이란 동요에서‘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란 가사로 전달되고 있다. 또한 사주 명리학에선 계묘년의 계를 물의 기운으로서 어둠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고 보고 있고, 흑색은 인간의 지혜를 관장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계(癸)와 묘(卯)가 만나는 검은 토끼해는 지혜롭고 풍요로운 해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대로 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연호 사용은 다분히 도교와 불교와 전통무속 종교의 신앙이 스며있는 말로서 우리 기독교이 사용하기로는 거북한 용어이다. III. 바람직한 기독교적 연호는 무엇일까? 얼마 전의 기고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연호 사용은 세계 모든 나라 및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늘 사용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함께 앞에서 논한 60갑자(六十甲子)인 60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치하에는 명치(明治)란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으로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란 말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연호들에서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 연호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서기의 유래인 주전(主前; B.C)과 주후(主後; A.D)란 말로서 이미 기독교적 연호로 정착되어 있다. A.D 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가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모든 세계의 나라들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됨으로서 자랑스럽게도 예수님 중심의 연호가 된 것이다. IV. 결 어 지금까지 논한 대로 주전, 주후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의 기독교적 연호는 그 유래나 뜻으로 볼 때 아주 당연한 것이고, 큰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그 의미와 뜻도 잘 모른 체 육십갑자 연호와 12지 동물 띠에 관한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올해에도 공공연히‘계묘년 검은 토끼의 해’란 말을 하면서 60연호와 12지 등의 띠, 생년월일(四柱)로 결혼이나 인간 중대사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논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관계없는 버려야 할 미신적인 용어들이다. 마지막으로 주전과 주후 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의 연호가 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요 긍지를 가져야 할 연호이다. 이런 연호를 두고 비기독교적인 60연호와 12지를 선호하는 것은 우리 자체적인 모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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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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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신년사] 경남기총 대표회장 강대열 목사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3년에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영과 육이 많이 움츠려지고 무너졌습니다. 이제 새해에는 움츠려지고 무너진 우리의 영과 육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물론 아직 우리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럴 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어나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움츠리고 무너진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도, 이룰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일어날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 2023년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열매를 거두길 기대한다면 지금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만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엡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순종일 뿐만 아니라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잠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의인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누가 의인입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이제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실패와 절망, 그리고 영적 침체와 무기력함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빛을 발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빛은 비추어야 합니다.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일어나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때 어두움과 캄캄한 곳에 갇힌 경남의 모든 영혼들이 살아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사6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향해 어떤 빛을 비추어야 할까요? 그 첫 자리는 바로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전1: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2023년,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일어나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세상을 향해 비추어야 할 빛은 바로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선한행실이 참 그리스도인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외쳐도 우리가 선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마음과 귀를 닫아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남의 영혼들을 구원하려면 입술과 더불어 선한 삶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2023년 우리 경남의 모든 성도들이 지역과 이웃을 향해 복음에 합당한 선한 삶의 빛을 비추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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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박동철 장로] 2022년 성탄절 “신앙의 우울증”
    2022년 성탄절을 보냈다. 교회는 온종일 성탄 예배를 통해 기쁘고 감사했다. 세상 사람들도 성탄일에는 이 땅 예수 탄생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본다. 올해는 주일과 겹쳐 성탄절이 공휴일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교회도 성탄 예배의 특별함을 맛보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도 특별한 휴일의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어김없이 성탄절이 달력에 새겨져있고 거리에도 캐럴이 울리고 있다. 예수 탄생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 땅과 우주 만상의 창조주가 말씀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로고스(Logos)의 역사이다. 이 위대한 역사의 중심이 예수 탄생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예수가 태어나서 병들고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해방 시킨 성인으로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강림의 위대함에 이해가 다르다. 이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 멸망의 길로 가는 순간을 예수가 돌이켜 놓은 것이다. 창조주 본인 예수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하셔서 인류의 대역사(大役事)를 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의 이 땅 탄생에 흥분하고 문화적으로 즐기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3년에서 남긴 메시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도를 행하셨던 과정, 그리고 부활의 길을 우리 마음에서 우려내야 한다. 성탄절의 기쁨과 함께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인류는 온통 죄악의 현장이 되어버린 이곳을 바꿀 수가 없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주 본인이 직접 내려와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실행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당시 시대상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육적 동족 이스라엘을 둘러싼 배경은 악(惡)의 최악이었다. 로마제국의 모든 억압과 학정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눌리어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태어나 로마를 뒤집는 말씀을 전파했다. 당연히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형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온지 33년 삼 일 만에 세상 바꿈을 단번에 이루었다. 예수의 십자가도의 역사는 발전해갔다. 천년 제국 로마가 서서히 망하고 세기의 역사는 예수로 바뀌었다. 바로 복음의 역사에 세계 역사가 얽혀 발전해 왔다. 사람 사는 온 세상에 눈물이 있고 고난과 기쁨은 있어왔다. 그러나 역사는 교차하면서 복음의 역사는 계속 쓰여가고 있다. 유럽의 복음은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기독교는 타락하고 순교의 종교개혁으로 발전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탈출한 청교도는 신대륙에 미주의 프로테스탄트를 이뤄냈다. 미국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을 민주주의 나라 세계의 중심국이 되게 했다. 130년 전 대한민국에 닿은 20대 벽안의 젊은 선교사들의 발길은 복음 전파와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 캄캄한 한반도를 깨웠다. 우상과 게으름 나태한 문화 속에 나라마저 강탈당한 한반도 이 땅이 복음의 눈을 뜨고 예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 광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서서히 일어선 이 나라는 복음이 능력이 되었다. 산업화의 기회, 강력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국민 갈등의 위기에서 민주화를 이루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복음을 이룬 가나안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의 나라가 되었다. 두 동강 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통일의 한반도기적을 앞두고 복음을 침탈하고 있다. 온갖 악령의 문화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악한 공산 사회주의 이념과 전쟁이 계속된다. 인본주의 문화가 홍수처럼 양산되고 있다. 정치적 이념 대립이 교회와 기독교 교계에서 공격적 적대를 하고 있다. 이것이 2022년 성탄절에 느껴지는 우울증이다.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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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국내외 정세를 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긴장, 미움과 질투, 싸움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권력,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다듬고 감싸주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요하게 해 주는 하늘의 평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는 오직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히 긴장이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긴장과 갈등, 막힌 것이 없고 오직 ‘누림’(enjoy)이 넘쳐나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단순히 긴장과 적대감,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관계 속에서의 ‘즐김’(enjoyment)이다. 한 국가는 주변 다른 국가와 평화로울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가난으로 비참할 수 있다. 평화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인간 동료와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예배, 기도, 말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평화 안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평화는 또한 자연과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와 물리적 환경 속에 거하는 기쁨을 포함한다. 평화는 우리가 노동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하는데서 성취감을 발견하고 그 결과에 기쁨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선지자는 평화의 날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백성들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그 날(사32:18)에는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화와 풍성한 이미지를 담은 평화-짐승들 사이의 조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조화(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해 도입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사 11:1-2). 이새의 줄기란 천사가 탄생을 축하하여 노래한 “그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스가랴가 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1:79) 분이시다. 또 시므온이“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고 말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화평의 복음”(행10:36)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신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말하면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분”(엡 2:17)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가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화는 이 세상 속에 일하는 하나님의 이유이며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평화가 역사 속에 완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선물이지 인간이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따금씩 찾아드는 평화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하고,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성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서서 평화가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유를 위한 사역자, 즉 평화를 위한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사역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헌신적 삶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의 추구라는 두 가지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평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면 삶의 두 차원 모두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명령과 함께 죄의 사슬에 결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함과 누리게 해 주는 사역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의 줄을 꺽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사 58:6-7)사역이다.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는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분열보다는 화합이, 긴장보다는 편안함이, 억압보다는 풀어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구주 성탄을 맞아 축하하며 기뻐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평강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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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6)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천국을 준비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의 편이 되시어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모든 것 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성, 이기심은 나를 위하여 사는 이기주의적인 삶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기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이깁니다. 사랑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여 범죄 했을 때 사단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사랑의 관계를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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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황권철 목사] 마태(Matthew's Behind Stories)-언약의 사도
    마태는 사복음서에 의하면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다(막3:18; 마10:3; 눅6:15; 행1:13). 그는 예수를 따르기 전에 세리였다(마9:9, 10:3). 마태는 레위와 마태가 동일인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레위와 마태를 동일인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나 유대인들은 흔히 2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태란 이름은 예수의 제자가 된 후에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태가 레위였다면 그는 가버나움이나 그 근처에서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섬겼을 것이다. 다메섹(Damascus)과 아크레(Acre)를 잇는 도로를 통하여 수송되던 상품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던 것이 그의 임무였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은 어업이나 공산품에 대한 세금 부과도 그의 임무였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설교를 하셨으므로 그가 부름받기 전에 이미 많은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막2:14).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으며 많은 동료들이 그의 집에 많았음을 누가는 말한다(눅5:29; 막 2:15). 이는 자신이 이제 변화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출신 세리 마태 본명은 레위이다. 레위 지파가 갈릴리 지방에 거주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갈릴리 땅은 본래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갈릴리로 대거 옮겨간 것은 BC 169년 안티오쿠스 4세의 대 박해 때였다. 마카비상 1:57 “율법서를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 성전을 지키던 레위 지파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도 몰랐고 고기를 잡는 방법도 몰랐다. 그들은 관청에 들어가 일자리를 얻기도 하고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신약시대 로마 제국을 도와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재무기관에 속한 관리들을 세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제도가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세리들은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유대인 중에 세리로 로마 정부를 섬긴 사람들을 매국노, 혹은 동족에 대한 착취자로 낙인 찍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이들에게 부정이 많이 따랐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도 세리들은 일반적으로 창기와 같이 죄인 취급했다(마21:32). 주님은 마태와 동일한 세리를 만나 주셨다. 그가 바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Zacchaeus)이다(눅19:1-10).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는 말이다. 그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유대인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가장 추한 창기와 같이 여겼다. 그는 평사원도 아닌 세리들을 거느린 세리장이었으니 얼마나 미움을 받았겠는가? 그러나 그 직위로 물질적으로는 부요함을 누리는 부자였다. 이런 추악한 죄인이 거하는 여리고 도성에 가장 거룩한 메시야 되신 주님이 오셨다. 주님은 당시 도덕적으로 반듯하게 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찾지 않고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삭개오를 찾았다는 것이 그 당시 여리고 사람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초청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했다.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토설해 내고 주님을 마음속에 구주로 영접했다. 세리 마태는 세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제자로 부름 받은 세리 마태 마태는 결단력과 진취성을 겸비한 자이다. 그래서 알패오는 아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레위의 부친도 레위지파 자손이라는 것을 감추고 살았다. 알패오라는 그는 헬라식 이름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들에게 레위란 이름을 붙여 무거운 짐을 지어 주었다. 아들의 때에는 레위 지파의 자존심을 되찾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복음서에서도 열두 제자 중 언제나 최하위에 기록되었다. 그 자신이 예수의 이름에 누가 될까 한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모습은 언제나 제자들의 뒷전에 있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아 마가복음에 이어 마태복음을 쓴 사람이다.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레위였다(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마태는 본래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레위 지파가 아닌 사람이 레위라는 이름을 쓰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마태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마9:9). 그는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이다. 당시 유대민족이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던 때라 얼마나 살기가 어려운지 도시락 하나가 귀한 시대였다(마14:13-21). 그렇지만 세리들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그가 세관에서 앉아서 일하는 좋은 자리에서 사직서를 내고 방랑자와 같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따른 것은 그가 인간이 배를 불리는 빵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는 자리에 앉았어도 복음과 상관없는 시간과 물질과 권력은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엡 5:16)고 했다. 세속 풍속과 유행을 따라 고귀한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영혼을 구하고 생명을 건지는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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