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고]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⑹- 장두노미(藏頭露尾)
필자는 지난 ?월 ?일 모 신문에 총장 선임의 불법성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고신총회와 고려학원 이사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없어도 되는 걸까요? 박영호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있을 때모 신문에 나온 기사를 가지고 신문에 나온 사건이기에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당시 총회 임원회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에 따라 총회는 격론을 벌이고 투표까지 하여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던 전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도 그 결정의 정신을 존중하여 총회와 관련하여 신문 기사에 난 사건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운영위원회에서라도 살펴야 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겠습니까? 자기편이면 덮고 다른 편이면 조사위원회를 만듭니까? 총회 임원회의 결정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 수시로 바뀌어도 괜찮은 겁니까? 다시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고신대 총장의 논문표절문제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사장이나 총장의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받는 당사자 대해 그 대학이 공정하게 심사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하지만 결과가 너무 느립니다. 이번에도 시간 끌기로 할 것 같습니다.“오래된 일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등으로 적당히 넘기려고 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사회가 바르게 하려고조속한 결론을 내자고 회의 한 일이 한번이라도 있습니까?어쩌면 이사회는 이 일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길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학원은 이사들의 개인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신총회 산하 성도들과 총회에서 파송한 이사들로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총회와 성도들의 뜻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도 의지도 없다면 이사회는 직무유기입니다. 알고도 문제없다고 강행한 이사회에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사회에 속한 목사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렇게 가르치고, 장로들은 대표 기도할 때 그런 자세로 기도하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이건 불법이지만 급한 불부터 끄고 봅시다.” 과연 이런 설교와 기도에 성도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은혜받을 것인지 심히 궁금합니다. 절차위반과 위조문서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총회의 ‘절차위반, 문서위조’, 이런 일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다니 참 신기합니다. 노회 구역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할 때 당회도 노회도 거치지 않는 괴문서를 총회장이 운운하는가 하면, 총회 서기가 임원회의 결정과는 다른 문서를 노회에 보내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이사회도 그런 불법을 보고 배운 것이 아닙니까? 지난 73회 총회에서 고려학원 이사회가 총장 인선을 위한 고려학원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장선임을 위해 ‘1차는 3분의 2 찬성을, 2차는 과반 찬성’으로 선임할 수 있도록 개정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 이런 절차가 진행되려면 이사회에서 먼저 결정하고 수정안이 총회에 상정되어야 합니다.그런데 지난해 총회가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12월 말에가서야이사회가 총회가 결정한 정관개정을 ‘추인’하는 형식으로 개정을했다 하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정말 이래도 괜찮습니까? 이일을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진행했습니까? 반드시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고신 총회와 500여 총대를 속인 일이고, 고려학원 이사회와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한 일입니다. 총장은 거짓과 불법으로 세움을 받았으니 주도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수인 역할을 톡톡히 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신총회 산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논문표절, 절차위반, 부정 정관개정 등,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이렇게 선임된 총장의 지도력이 서겠습니까? 정관개정도 불법이지만 불법적 개정안을 불법으로 총회에 상정 해서 총대를 속이고 총장을 선임했습니다. 총장 모집 공고를 낼 때의 법은 분명 3분의 2 이상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모를 보고 지원한 지원자들은 공고한 정관대로 선임해야 한다. 그런데공모한 후에정관을 ‘과반수’로 개정해서 뽑는 것은 누가 봐도 특혜입니다. 공모가 나갔다면, 공모한 정관대로, 기준대로 선임해야 합니다. 공모한 정관과 다른 정관을 만들어서 지원자 중에 총장을 선임한 것은 누가 봐도 특혜를 주기 위한 일종의 모략에 불과합니다.처음부터 과반수 개정된 정관으로 공모를 했다면, 더 많은 지원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3분의 2보다 과반수가 훨씬 당선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이사회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부당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런 행위에 대해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범위’와 관련한 대법원의 판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법원 2016. 8. 26. 선고 2015도11812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정치자금법위반]’을 예를 들어 살펴봅시다. 이때 판시사항은 ‘선거운동의 의미와 금지되는 선거운동의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며, 판결 요지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거운동은 대상인 선거가 특정되는 것이 중요한 개념표지이므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위한 것임이 인정되어야만 선거운동에 해당하는데, 행위 당시의 상황에서 특정 선거의 실시에 대한 예측이나 확정 여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시간적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행위자와 후보자의 관계 등 여러 객관적 사정을 종합하여 선거인의 관점에서 문제 된 행위가 특정 선거를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특정한 선거를 목표로 하여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가 표시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선거운동이라고 볼 것은 아니다.” “...특정 선거에서 특정인의 당선 또는 낙선을 도모하는 목적의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점이 당해 선거인의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판결 요지에 따르면, 고려학원 이사회가 시도한 정관 개정은, ‘행위의 시기와 특정 선거일 간의 간격, 행위의 내용과 당시의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분명 ‘특정인의 당선’을 도모하는 ‘목적 의사’가 분명한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총대들을 무지하게 보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필자는 몇 차례에 걸쳐서 바르게 하자고 강력하게 호소하는데, 이사회나 총회 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답을 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까? 잘못이 없으면 없다고 밝히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안에서 이것이 다루어지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로 표현하지만, 답이 없을 땐, 똥물을 뒤집어쓸 각오로 문제를 삼아도 저의 책임이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후의 모든 책임은 그렇게 행한 당사자들에게 있음을 알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얹어봅시다. 월간고신과 기독교보에 발행인은 현직유지재단 이사장, 총회장이 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현 총회장은 어디를 가고, 전례 없는 전 총회장이 발행인을 계속하는가?외국인이라 안된다면, 이에 관해 아무 문제 없다는 사람들이나 당사자가 답할 차례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 원나라의 문인 장가구가 지은 <점강진·번귀거래사>에 등장하는 이 말은 쫓기는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숨기지만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장두노미(藏頭露尾)는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밝혀 진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회는 장두노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6) (민12:1-3, 마5:5)
지면을 통하여 제가 목회하는 고신교회에 대해 잠깐 예로 언급함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고신교회도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대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370 용사는 못되더라도 37 용사는 있어야 합니다. 고신교회 목회자로서 오늘까지 우리 고신교회의 선교를 돌아보면 고신교회 성도들이 다윗의 37 용사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교회 분열의 아픔과 담임목사, 부목사들이 면직을 당하는 일 앞에서도 선교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의리가 있는 용사들이었습니다. 코로나19 기간에도 15개 정도의 교회를 필리핀과 네팔에 건축했습니다. 순간순간 어려움이 생겼을 때 구제하고 돌아본 것은 말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우리 교회 선교비가 1억이 더 지출되었습니다. 경상비 전체 25-30%가 선교비로 지출되고 있습니다. 일단 빚을 내서라도 선교비는 지출하고 봅니다. 돈의 액수를 떠나서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선교를 하는 실천에 우리 고신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고신교회 담임목사로서 우리 교회는 세계를 교구로 선교하는 일에 전 성도가 다윗의 37 용사와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성도들을 좋아하겠습니까? 잘은 몰라도 고신교단 안에서 저만큼 성도들 좋아하는 목사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는 매우 위험한 신호를 감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이 부분이 목회자가 감지할 줄 알아야 하는 위험한 신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하나님 외에 그 어느 것도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눈곱만큼이라도 하나님 의지하는 것을 성도에게로 돌리고 기대를 거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즉각 응징하십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로 하여금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목회자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성도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37 용사가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시도 때도 없이 풀무불 앞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온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풀무불에 던져 넣으십니다. (욥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그 결과 목회자는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당한다 하더라도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온유한 자가 되어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온유하게 된 목회자는 정금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아론과 70장로들을 규합하여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어느 정도 새가 결집 되니 미리암은 공개적으로 모세의 통치에 비방과 반역을 시도합니다. 아직 출애굽과 홍해를 건넌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때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증언합니다. 악한 무리들이 거짓된 계획을 세워 공격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은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지시기도 힘든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하게 끝까지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거짓된 계획으로 공격했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른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온유한 자를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온유한 자의 완성을 이루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약속하신 대로 땅을, 약속의 땅을, 교회를 주셨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교회인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입니다. 이미 복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가 아닌 것 같습니까? 온유한 사람 아닙니다. 교회와 한 몸 되지 못하고,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 복음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
[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
[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
[조희완 목사] 자유의 축복 (요8:31-36)
1997년 북한의 권력서열 제3위(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던 <황장엽>씨가 주중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우리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 망명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로 망명함에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 권력층의 실세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을 할 경우 남아 있는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해 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남한으로 망명을 감행한 이유는 바로 체제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고, 너무나 잘못되어 있는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무모한 망명을 한데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평가를 할 것입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을 깨달을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유의 소중함”입니다. 체제의 자유, 정치적인 자유는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억압이 있는 나라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몸을 던지고,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억압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의 소중함을 애타게 목말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한 정치적인 자유보다 더 필요하고 소중한 자유가 있는데 바로 영적인 자유(신앙의 자유)입니다. 그 영적인 자유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를 취하는 방법을 알아야합니다.(요8:32,36) 둘째는,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야합니다.(갈2:4) 셋째는,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갈5:13)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잘 지키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성경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오성한 목사] 차별 없음
- 성경 전체는 로마서를 풀어 놓은 것과 같다. 그것도 로마서 1, 2, 3,장을 펼쳐 놓은 듯하다. 로마서 1장은 <이방인> 이야기다. 이방인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이 주제다. 유대인이 아무리 율법을 중시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로마서 3장은 <우리>라는 주제다. ‘우리’도 나은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믿는 너희는 나으냐? 너희도 죄인이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모두 명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로마서 3:23 참고). 이방인의 멸망과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즉 모든 인류의 멸망을 선언하는 것인데 이것을 예언한 곳이 구약의 예언서이다. 여기서 반전이 없다면, 인류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도 소망이 없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있다. 성경 전체를 자세히 보라. 바로 이 말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반전 때문에 로마서를 즐겨 읽었다. 읽을 때마다 “하나님, 이 방법이 아니고는 제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무릎을 얼마나 쳤는지 모른다. 무릎이 패일 정도로 많이 친 것 같다. 로마서는 나에게 감격이었다. 정말 감격이었다. 로마서를 읽다가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입체낭독으로 바뀌곤 했다. “이제는”을 읽을 때는 힘이 들어갔다. “이”자에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간다. 나는 “이제는”을 좋아한다. 그래서 에베소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에베소서는 “전에는”과 “이제는”을 대조하여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은 나의 것이다. 정말 신나는 말씀들이다. 또 강조해서 읽는 부분이 있다.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이제는…. 차별이 없느니라”이다. “모든 사람에게 미친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차별이 없단다. “와-우! 나 같은 놈에게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임했다”라고 하신다. 놀라운 일이다. 기절할 일이다. “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니”, 엄청난 일이 십자가를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입체낭독으로 “이제는”과 “차별이 없느니라”에 악센트를 넣어 크게 읽고, 고백해 보라. 무릎이 쳐질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22)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일 어둡게 살 때, 놀라운 약속을 선포하셨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 신을 가져와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의 복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잘 살기 때문에 주신 약속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선포하신 것이 복음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라고 예언하신 배경을 볼 때 복음은 우리가 잘하기 때문에 주신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악 가운데 있을 때 일방적으로, 차별 없이 주신 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멸망 당하신 소식이다. 창조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마귀에게서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다는 소식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고, 하나님의 의가 된 우리 안에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주께서 좌정하셨다는 소식이다. 이 복음의 약속이 유다가 하나님 앞에 잘 살 때 주신 약속이 아니다. 아하스 왕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타락의 길을 신나게 가고 있을 때,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예언의 절묘함을 볼 수 있다. 타락 중인 유다에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하여 쳐들어 왔다. 온 백성과 아하스 왕은 숲이 흔들리듯이 떨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셔서 유다를 공격해 오는 두 나라는 타다 남은 부지깽이 같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을 요청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전했다. 이사야는 “왕이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고, 징표를 구하십시오.”라고 했다. 아하스 왕은 “나는 하나님을 시험할 마음 없어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돌아설 줄 모르고, 하나님께로 도저히 돌아설 수 없는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와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의 징표를 선포하셨다. 아하스가 잘해서 주신 약속이 아니다. 메시아가 처녀의 몸에서 오실 것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해 주셨다(이사야 7:14). 예수께서 유다를 대신해서 멸망 당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했기 때문 ‘임마누엘’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나나 당신이 잘했기 때문에 ‘임마누엘’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복음이다. 이것이 말씀의 핵심이다. 유다가 망하지만, 영원히 망하지 않고, 포로에서 돌아오겠다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신 복음이었다. 그들이 회개하고 잘 했기 완벽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해방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임한 것이 복음이다. 우리의 모습과 전혀 상관없이 임한 놀라운 복이다. 차별 없이 주신 복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차별 없음
-
-
[김성수 총장]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
-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 기독교 교육에서 성경의 중요성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성경은 모든 교육활동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초적인 토대로서 성경의 기능은 학교의 모든 활동에서 성경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성경을 근거로 학습된 개념과 원리들을 교육의 모든 측면에 스며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은 세상에 관해 공부할 때 성경의 관점과 전제로부터 학습이 시작되고 진행됨을 배워야 합니다. 세속적인 학교에서의 수업은 아동중심이거나 내용중심의 관점을 취하는 방식이 대부분입니다. 아동중심 교육관의 경우, 본질적으로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육 자체가 개개인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동중심교육관의 인본주의적인 접근은 비기독교적이며 따라서 왜곡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관점은 진실과 일치하지 않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절망의 철학으로 내닫게 만든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견해는 바로 세상이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내용중심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범신론적이기도 한 이러한 견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학,과학 등과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마치 궁극적인 진리가 되는 양 숭배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부분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의 산물입니다. 내용중심적인 견해는 사람들을 단지 기계적인 존재로 여김으로써 역사적으로 수많은 왜곡과 오류를 범했습니다. 산업혁명에서 야기된 많은 참사들은 바로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단지 유익하다는 이유만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세속의 지식, 전통, 문화에 대한 숭배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이 두 가지 견해 모두를 거부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연도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기독교 학교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은 우주만물이 창조주의 주권 아래 있으며 창조주 안에서 모든 생명이 움직이며 존재가 유지된다는 관점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창조주가 바로 지혜와 지식의 보물을 감추고 계신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의 기초적 기능 측면에서 점검되어야 할 것이며 학생들은 이러한 원리를 교육과정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켜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수학시간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학생들은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된다는 사실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그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항상 똑 같은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매 순간 지속됨으로써 간단한 공식이 진리가 되도록 끊임없이 작용하는 진리 안에서 학생들은 이러한 진리를 탐구하고 인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창조 세계의 모든 질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진행시키시는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학 과목에서 학생들은 환경 오염과 환경 파괴를 일으키는 기술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금지 차원을 넘어 우리에게 세상을 잘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이 각 교과목에서 성경을 교과서(textbook)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안내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과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합니다. 이는 단순히 교사가 자신의 과목을 성경말씀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불변의 인본주의라는 케이크를 덮는 장식물 따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교육과정 전체에 기반을 이루어 전체 학교 프로그램에 파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경은 교육이라는 빵 안에서 부풀게 만드는 효소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실에서 성경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교사가 교과과정에 포함된 모든 내용에 관하여 하나하나 성경말씀과 관련지어 이를 기독교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태도가 성경이 침투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믿지만 이는 해당하는 교과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매우 우연한 사건일 수 있으며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격하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성경이나 성경의 언급이 무리하게 사건과 연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르침의 핵심이 설정되면 교사는 가르치는 내용을 억지로 성경말씀과 관련시켜 버립니다. 이러 방법은 기독교 교육에서 성경을 올바로 활용하는 방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성경 말씀이 누룩처럼, 또는 광부의 등불처럼 교육의 모든 과정에 침투적으로 스며들어가는 교육입니다.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
[김성수 총장] 교육에 있어서 성경의 침투적 기능
-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무화과나무의 비유
- 무화과나무의 비유 왜 무화과나무로 비유했을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감람산은 무화과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산의 높이가 20-30척 되는 것이 많다.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유월절 직전이므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돋아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이 비유를 사용하셨다.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올리브나 오동나무가 상록수인데 비해 무화과나무는 낙엽수로 겨울에 잎이 떨어졌다가 봄에 잎이 돋아나 여름이면 무성해진다. 곧 결실의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종말의 때가 다가왔음을 기억하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인자가 문 앞에 이른 사실을 알림이다. 사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사역이 당도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재림의 주로 오실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이 당신의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둘째,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 중 영원한 비밀은 개인의 종말인 죽음과 우주적인 종말인 말세이다. 만약 이것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했다. 우리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주의 일에 힘쓰면 된다. 셋째,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다. 주인에게 신실한 청지기는 준비하여 깨어 있는 자이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준비성이다. 열 처녀 비유에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처녀 모두가 졸고 잤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생각하지 않고 잤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고 졸았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쉬고 다 같이 즐긴다. 그러나 기름이 없이 사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기름을 준비하고 사는 자들이 있다. 깨어 있는 성도들은 기름을 준비한 성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말세기 말을 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종말론적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삶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 너무도 희미해 졌다. 우리는 이전에 바울이 버린 배설물에 사로잡혀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고백한 사도 요한의 고백이 신약교회의 유일한 소망이다.
-
- 오피니언
- 성경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무화과나무의 비유
-
-
[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들의 고찰 :‘위하여’등의 건배(乾杯)문화
- I. 서언 (序言) 마지막 남은 캘린더 한 장과 함께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바쁜 시기이다. 이에 연말연시 문화와 각종 행사들, 이런 시기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는 각종 단체와 모임에서 망년회와 신년회를 하게 된다. 코로나시기에 모임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때에는 거의 대부분, 모인 사람들이 동시에 잔을 들고 건배(乾杯)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에 본 호에서는 건배문화와 용어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II. 건배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1. 건배는 무엇인가? : 사전적인 뜻은 서로의 건강이나 행복을 빌면서 함께 술잔을 들어 마시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주도자의 신호와 구호에 의해 다수의 사람들이 잔을 들거나 부딪혀가면서 건강과 행복을 서로 빌면서 덕담으로 외친다. 이런 건배 용어들은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면, ‘위하여’, ‘건배’, ‘지화자’, 또 일본 말인 ‘간빼이’, 영어로 하는 ‘원샷(One Shot)’ 등 아주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로 기도로 모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건배 문화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공사석 모임에서의 건배는 종종 경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상식 정도는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건배문화의 역사 : 건배문화나 용어들이 우리 한국문화에서는 어떤 역사성이 있을까? 한국의 역사 속에는 실제적인 건배 문화는 없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며 덕담을 하는 문화로 본다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혼자 마시는 자작문화(自酌文化)이다. 그다음은 다수가 모여서 앞에서 말한 건배를 하며 마시는 대작문화(對酌文化)로서 러시아와 동구권, 중국인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시는 수작문화(酬酌文化)로서 우리나라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든다면 신라시대에 경주 포석정에서 군신이 모여 술잔을 물에 띄우고 돌려 마시면서 동심일체(同心一體)를 다짐했든 일 등이다. 이로 볼 때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는 건배가 없었고, 대작문화에서 온 건배는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건배용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는 그동안 적절한 용어 표현은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와는 관계없지만 일반 사회에서는 건배문화가 거의 일반화 되어 있다. 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최근 세계보건기구(WTO)가 151개국 대상으로 술 소비량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는 2위였다. 이런 세계 최상위의 음주 문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건배 용어가 하나도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배 용어는‘위하여’란 말을 가장 많이 선호하고 있다. 이 용어는 고 박정희 대통령 때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라는 말을 건배 용어로 많이 사용함으로서 관료, 군대 사회를 중심으로 유행되어 온 근대에 조성된 말이라고 한다. 이 때 부터 이 말의 앞에다 사회자가 어떤 일에 대한 선창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위하여’란 구호로 화답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 용어를 건배 용어로 정하자는 국립국어 연구원들의 의견들이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이런 면에서 중국은 마를 건(乾)자와 잔 배(杯)자를 사용해서‘건강과 행복을 위해 잔이 마르도록 마시자’는 말을 한다. 우리나라의 건배는 바로 이 용어이다. 일본도 한자어의 건배를 자신들의 말로‘간빼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환호, 갈채, 격려의 뜻인 ‘치어스’(Cheers)라고 외친다. 그리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나라에선 모두 다‘당신의 건강을 위하여’라는 말을 자신들의 건배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다음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건배문화라는 말 그대로인 ‘건배’이다. 이 말은 앞서 논한 대로 중국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고, 또 일본 강점기 시절에 건배의 일본식 발음인 ‘간뻬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거부감을 가지는 이들도 많이 있다. 그 외의 용어들을 보면, 흥을 돋우는 전통적인 우리 민요에서 온‘지화자’나 ‘상사디아’를 사용하기도 하고, ‘곤드레, 만드레’, ‘뭉치자’, ‘듭시다’, ‘마시자’ 등의 순수한 우리말들을 하기도 한다. 외래어에서 온 ‘브라보’, ‘원 샷’ 등의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확정된 우리말은 없다. 하지만 곤드레, 만드레 같은 저속한 말이나 외래어를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밝힌 대로 교회 모임에서는 거의 대부분 기도로 시작하기 때문에 교인들의 모임에선 굳이 건배를 하거나 건배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건배용어자체는 단합이나 덕담을 나누는 좋은 말이기 때문에 분위기에 따라서 기도이후에 음료수 잔을 들고 건배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회의 건배용어보다는‘주의 영광을 위하여’라든지‘신년에는 좀 더 나은 주의 일을 위하여’등의 신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하여 건전한 기독교인의 생활용어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연말연시 용어들의 고찰 :‘위하여’등의 건배(乾杯)문화
-
-
[신재철 목사] 행복한 밥상 :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콩나물무침, 계란프라이
- 교회든, 학교든, 동아리든 어떤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있다. 주로 MT, 수련회 때 둥글게 모여 공통의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이다. 질문 내용은 대동소이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사람의 최고점과 최저점 그리고 변곡 지점을 알면 상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던 지점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시간제한을 두지만 대부분 시간을 지키지 못한다. 평소에 말도 없던 녀석이 인생을 펼쳐놓기 시작하면 안타깝게도 감동 보다는 몸이 뒤틀리는 고문이 된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세워진 타임키퍼가 아무리 수신호를 줘도 ‘직진’이다. 심플하게 아웃풋을 뽑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거기서 거기. 여기서 풀어낸 이야기가 다른 곳에서도 나오기 마련이다. 앞에 앉아 듣는 사람만 바뀔 뿐 이미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스스로 이야기하면서도 지루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 내 순서가 되었다.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다시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그 시간으로 빠져든다. 앞에서 듣는 사람의 몸부림은 이미 내 안중에 없다. 미안하지만 내 할 말을 다 해야 했다.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나는 너무 행복했으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아주 키 작던 어느 날로 돌아간다.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날의 행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아빠의 옆자리로 파고든다. 엄마는 이미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시기에 엄마가 누웠던 빈자리는 나의 2차 수면의 아지트가 된다. 이부자리에서 엄마와 아빠를 모두 느낄 수 있는 명당이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칙, 칙, 칙” 압력 밥솥의 김새는 소리에 다시 눈이 떠진다. 눈이 떠지며 후각도 살아난다. 복잡한 음식 냄새를 본능적으로 구분하며 아침상을 상상해본다. 칼칼한 된장찌개, 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고소한 고등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삭한 콩나물, 터지지 않은 노른자까지 잘 익은 계란, 새콤하게 익은 김치. 이부자리 옆, 동그란 스뎅 밥상에는 수저 젓갈만 올려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행복한 상차림이 이미 끝났다. 고된 하루가 시작 될 아빠, 형과 종일 땅 파며 구슬치기 할 동생, 그리고 분주한 우리 엄마. 하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본다. 조금만 더 눈 감고 기다리면 상상하던 밥상이 현실이 되어 있겠지? 즐거운 상상과 더불어 아빠 옆에서 조금은 억지스럽게 잠을 청해 본다. 밥솥의 말 수는 점점 많아진다. 삽화 작가 : 김주은
-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
[신재철 목사] 행복한 밥상 : 된장찌개, 고등어구이, 콩나물무침, 계란프라이
-
-
[박봉석 목사] 우산은 우산이 없다!
- 비 맞지 않도록 사람을 씌워주는 우산은 정작 우산이 없습니다. 우산은 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맞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암으로 투병 중인 여 성도를 심방했습니다. 병실에는 아직 신앙이 없는 남편이 병수발을 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그분을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의 등을 어루만지며 “수고 많으시지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 그분은 울컥하며 “목사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수년간의 아내의 투병을 곁에서 도우며 그분 또한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수년간을 병든 아내의 우산으로 살았지만 정작 자신을 씌워주는 우산은 변변히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별 것 아닌 위로가 그렇게 울컥할 정도로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서 우산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우산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묵묵히 봉사하면서 다른 성도의 우산, 교회의 우산이 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사실은 우산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더 큰 우산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서로서로에게 우산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위로받기만 바라며 우산이 필요한 사람의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산 같은 성도가 되어 보십시오. 가정을 책임진 아버지는 가정의 우산이 되기 위해서 평생을 살지만 정작 자신을 씌워줄 우산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 여러분, 문득 남편을 돌아보십시오. 자녀 여러분, 문득 아버지를 돌아보십시오. 가정의 우산이 된다고 지금 온통 비를 맞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남편 그리고 아버지를 씌워주는 우산이 되십시오. 또 온 가족을 섬기는 어머니는 가족의 우산이 되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분입니다. 지금도 그 우산 밑에 남편이 그리고 가족들이 안식하지만 정작 그 우산을 씌워줄 우산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가족의 우산이 되기 위해서 강해져야 하는 우산, 사실은 가장 약한 우산입니다. 이제 온 가족이 바로 그 어머니 우산을 씌워주는 우산의 우산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나를 씌워줄 우산만 찾지를 말고 오히려 내가 우산 같은 사람이 되는 결단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족에게 또 교우에게 이렇게 한 번 말해 보세요. “힘들면 힘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일까요? 우리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을 하지만, 낼 힘조차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힘내라는 말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힘들지요. 제가 작은 힘이라도 되어 볼게요. 우리 함께 기도해요.”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나를 씌워줄 우산만 찾지를 말고 오히려 내가 우산이 되고, 더 나아가서 다른 우산을 씌워주는 우산의 우산 같은 사람이 되는 결단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이 주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쳐갑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
[박봉석 목사] 우산은 우산이 없다!
-
-
[김성수 총장] 기독교 교육에 대한 오해
-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누구나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주일 하루 교회에서 받는 신앙 교육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받는 학교교육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육을 받기를 소원할 것입니다.기독교 학교는 바로 신자 부모들의 이런 바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학교라고 불려지는 사립학교들 중에도 실제로는 기독교 학교가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학교의 경우도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적 헌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기독 교사를 채용하기도 하고,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하며 힘든 점들에 대해 의논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 과목을 정식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 정직, 성실, 근면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좋은 교육을 시행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학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교육과정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성되고 진행된다면 이런 학교를 바람직한 기독교 학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학교는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면서도 실상 교실에서 창조 세계를 설명하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바로 그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순을 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비 기독교적인 교육을 감추기 위한 겉치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인 교육의 케이크 위에 기독교적 모양의 크림을 발라 덮어 버리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실제 교육의 구성이나 운영, 교육 내용과 방법은 비 기독교적이면서 단지 예배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기독교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기독교 학교가 ‘현실 세계’로부터 학생들을 격리시킨다는 우려를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헤매는 타락한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온실 속의 도피자로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이 너무나도 타락했기에 기독교 학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온실은 어린 화초를 잘 가꾸어 온실 밖에 내놓았을 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튼튼하게 잘 견디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학교의 역할 역시 언약의 자녀들이 말씀의 기초 위에서 잘 성장, 발달하도록 돕고, 이 세상에 대해 배워가며 자신의 사명을 위해 준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가 ‘온실’의 역할을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학교 뿐만 아니라 양육기관으로서 모든 학교가 온실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독교 학교는 모든 교육과정과 삶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그리고 온 세계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되고 배울 수 있다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또한 기독교 학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각 사람을 향한 부르심에 대해 기꺼이 그리고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올바르게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세상을 가장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본주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는 공립학교의 “온실” 속에서는 하나님을 세상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학교에서는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이 세상을 알아가고, 세상 가운데서의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알아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반 학교들은 세상과 삶에 대해 잘못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적 교육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에게도 잘못된 세계관을 갖도록 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서는 기독교 교육이 전혀 실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자 부모들은 심각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공립학교는 세속 인본주의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의 학문과 세상에서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립학교 안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며 헌신하고 있는 기독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공립학교의 기초를 이루는 잘못된 세계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공립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그 속에서의 역할을 언약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인해서 기독교학교들이 교육과정 편성권은 고사하고 이제는 교사채용권 마저도 박탈당하게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교육의 본질과 의미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히 이해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되고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특별 칼럼
-
[김성수 총장] 기독교 교육에 대한 오해
-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2) : 지붕 위의 아버지
-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재미없다. 늘 보던 시골의 풍경과 익숙한 모습은 지루함을 더한다. 재미난 것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걷던 중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보자!’ 우리 아빠는 온 동네 페인트 일을 도맡아서 하신다. 저기 군청도, 저기 파출소도, 저기 단독주택도, 저기 빌라도. 다 우리 아빠가 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를 누비며 걸을 때 건물의 페인트 상태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 아빠가 칠했을 것 같으니 자꾸 눈이 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종종 어른들이 나의 정체를 물어보곤 하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소개를 한다. “종합페인트, 신희목 사장님이 우리 아빠에요.” 특이한 내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아빠가 유명하긴 한가보다. 그렇게 나는 이곳저곳을 걸으며 아빠가 계실 현장을 찾는다. 분명 이 근처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현장을 찾아 기웃거리며 시멘트가 드러나 있을 공사현장을 찾아본다. ‘찾았다!’ 오래지 않아 지붕 위에서 긴 장대 롤러를 가지고 작업하는 아빠가 보인다. 시커멓게 탄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고생스러워 보인다. 땀범벅에 표정도 무겁다. 안쓰러움을 가져야 했을까? 하지만 내 몸과 표정은 반대로 반응했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의 현장으로 뛰어가 일하는 삼촌과 인사를 하고 ‘새참’으로 나왔을 빵도 얻어먹으며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만들어 내기에 성공했다. 역시 현장은 이 맛에 찾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빠의 마음을 다른 분을 통해 듣게 되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대부분 현장 일을 하신다. 폼 나는 정장이 아닌 작업복, 스킨 향이 아닌 땀내가 아빠와 친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종종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모른척하며 길을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의 친구들은 속이 상하면서도 미안해진다고... 그런데 지붕에서 땀 흘리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반갑게 현장으로 뛰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너무 고마웠단다. ‘에이~ 뭘 그런 걸로’ ^^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아빠가 왜 위험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는지 안다. 그렇게 고생하셔야 내가 좋아하는 고기도 먹고, 간식도 먹는다. 내 가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변신 필통도 아빠가 흘리는 땀의 대가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피부색은 멜라닌 색소 영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멜라닌과 무관할 것 같은 아빠의 검은 피부가 내게는 훈장처럼 자랑스럽다.
-
- 오피니언
- 칼럼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2) : 지붕 위의 아버지
-
-
[최호숙 목사]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개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 어느 젊은 부부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듯했지만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부터는 남편이 술만 먹으면 폭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가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이의 혈액형이 문제였다. 부인은 A형, 남편은 B형인데 아이는 RH+B형이라 남편 수준의 생각에 확률적으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되었단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결과가 말하겠지만 이처럼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자기 닮기를 원하고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로 새끼는 어미를 닮게 되어 있다. 닭 새끼는 병아리, 소 새끼는 송아지, 말 새끼는 망아지, 개 새끼는 강아지, 그렇다면 호랑이 새끼는 무엇이며, 곰 새끼는 무엇이라 부를까? (정답은 칼럼 뒤에... ) 남해안을 중심으로 서식하는 어종(魚種) 중에 전갱이(일본어로 아지)가 있는데 새끼를 ‘매가리’라고 한다. 명태 새끼는 ‘노가리’,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라고 한다. 이 새끼들은 모두 어미를 닮았고 어미처럼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다.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나온 것인데 그 당시 안디옥에서 많은 손해와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무리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부르던 용어가 그리스도인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삶을 사는 안디옥 교인들을 보고 구별하기 위해 지칭한 말로써 초기에는 조롱하고 경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불렀으나 후대에 영광스런 명칭이 되었다. 헬라어로 ‘Christianos-크리스티아노스), 라틴어로 ‘Christianus-크리스티아누스’인데 단어 어미에 붙는 헬라어 ‘~ianos’ 라틴어 ~ianus’는 ~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어감이 이상하여 ~닮은 자, ~에 종속된 자로 해석한다.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닮아야 하며, 언어가 닮아야 하며, 삶이 닮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을 가지고 사역한다고 고백하였다. 최용덕씨의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찬양 가사를 보면 2절 중반에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주님여, 나를 도와주소서~~♬♪♬♩” - 작사자도 온전히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말뿐이고 마음은 여전히 세속 된 마음 그대로 임을 고백하며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예수님 닮았다고 하지만 삶은 구별되지 못한 개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하며 조소(嘲笑)하는 뜻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녀답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길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호랑이 새끼 : 개호주, 곰 새끼: 능소니)
-
- 오피니언
- 칼럼
-
[최호숙 목사]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개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
-
[박무열 목사] 선한 영향력을 지속시키자
- 본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작은 선물을 손에 들려 보냈다. 필자가가 부임이후 11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초청하고 복음을 전하며 주역주민과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다. 참 쉬운 일은 아니다. 미 자립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시행한다는 것은 재정적 부담감이 늘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고 주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주민들을 초청하지 않고 선물을 준비하여 각 가정에 돌리려는 저의 생각을 교회 앞에 내어놓으니 목사님 그동안 많이 나누어주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해 좋은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초청해서 오시는 분들에게 대접하고 선물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내심 마음으로는 성도들의 성숙에 감사하면서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조심스럽기도 하고 누가 음식을 만들고 차량으로 주민들을 모셔오고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지금까지는 평일 행사를 함으로 이웃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차량운행이 가능했는데 주일이라 완전히 독자적으로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을 추스르기 전에 성도들 간에 메뉴가 정해지고 각자 분담해서 준비하자는 이야기 까지 진행되므로 중간에 저의 생각을 개입시킬 타이밍을 놓쳐 버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올해는 특이한 사항이 누구도 금전적으로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그저 놀랄 뿐 이였다. 순식간에 차량 담당 까지 정해졌다. 매주 금, 토요일은 전도하는 날이다 혹서기 2주간을 빼고는 코로나19 상황이지만 쉬지 않고 전도했다. 전도 팀에게 참석인원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고 준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저에게 주어진 분담은 식자재를 제외한 물품을 마트에 가서 구매해오는 것 이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추수감사절 감사예배와 주민들을 모셔놓고 아름다운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를 나누는 은혜의 날 이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행사를 기획하고 교회 앞에 내어놓으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다고 교회에 옵니까? 라는 부정적인 시각이었는데 이제는 저들이 절기가 되면 목사님 이번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역으로 되묻는 것입니다. 매번 행사를 기획하고 참석 인원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도 예상인원이 미달하여 음식이 남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상 인원 많큼 참석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잡혀 있어서 연기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는 걱정이 있었다. 저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오전에는 비가 오지 않고 저녁 늦게나 다음날 비가 내리게 해 주세요. 저의 아내가 목사님 기도대로 비가 저녁 늦게부터 온 다네요. 우리의 기도대로 비는 오지 않고 전형적인 가을 날 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면 응답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상황에 맞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시기가 되면 주민들이 기대한다는 것이다. 상황을 유지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흔히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다보면 처음의 열정과 결심이 흔들리고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지켜나가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쌓게 되고 관계가 형성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신앙의 길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생명과 삶의 전부를 들려서 가야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 영광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 순수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으로 일 하십니까? 지속적인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잊지 말자.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박무열 목사] 선한 영향력을 지속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