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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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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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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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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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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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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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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1년에 한두 번, 외가댁에 갈 일이 아니면 지나지 않는 길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 휘청휘청. 아스팔트와 푸른 산만 보이는 이 길은 여전하다. 여전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늘 그 지점이 되면 어머님이 아버지를 황급히 부르며 차를 세우신다. “차 좀 세워줘!” 참지 못하고 오늘도 엄마는 멀미의 끝을 보여주신다. 늘 같은 지점에서 그러는 엄마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다. 온 가족이 그런 엄마를 놀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엄마가 차에 다시 타시고도 여전히 삼부자는 유일한 여성인 ‘한정혜’씨를 놀려먹는다. 차는 다시 그렇게 대전을 향해 출발한다. 나는 오늘 전학을 간다. 고향과 부모님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대전이라는 낯선 곳에서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그것을 유학이라고 하셨다. 입학 후 5학년까지 늘 최상위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아들이 시골에서 살기에는 아까우셨단다. “대전에서 동생과 같이 살 수 있겠어? 엄마, 아빠는 너희가 가서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우리 부모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오셨고 나는 크게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가서도 공부 잘 할 자신이 있었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징징거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전교어린이회장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1톤 트럭은 어느 때 보다 가볍게 우리 네 식구를 태우고 열심히 달린다. 카세트에는 구수한 ‘김란영 카페음악’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늘 나오던 노래였기에 나도 익숙함에 같이 흥얼거린다. ‘안녕,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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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8
  • [오성한 목사] 내 이름을 더 많이 불러 줄 수 없겠니?
    걸어가며 주님께 하소연했다. “주님, 제가 기도할 때 듣고 계신 건가요?” 즉시, 마음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성한아, 듣는단다. 너는 내가 너의 음성을 듣는지, 안 듣지, 헷갈리지만 나는 늘 듣고 있단다. 네가 안 듣는 것 같이 여길 때도 듣고 있단다. 그런데, 성한아, 나는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감격한단다.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온몸이 절여져 온단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단다. 나는 네가 너무 좋단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전율이 온단다. 성한아, 성한아, 더, 더 많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겠니?”라고 하셨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 쪽에 서서 엉엉 소리 내어 한참 동안 울어 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왜 우는지 몰랐을 것이 틀림없다. 들려주신 음성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다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저절로 화답이 나오게 되고 천사들과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다. 내 안에 잠자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 후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난 울보인 것 같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나를 만들어 주심을 고백할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난다. 쾌활하고 명랑하다가도, 혼자 있을 땐 많이도 울곤 한다. 주님이 좋아서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난 주님이 너무 좋다. “주님,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운다.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그렇게 좋으시다고 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이다.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자.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주님을 감동을 드리는 일임을 믿음으로 알고 사랑을 고백하며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자.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자. 약속을 붙잡고 많이 기도하자. 자신에게 기도한 것을 선포해 주며 응답 되었음을 말해 주자. 그때마다 임마누엘의 열정이 넘쳐날 것이다. 복음증거를 위해 사는 인생 속에 표적과 기사로 더욱 확증해 주실 주님을 찬양하며 확신하자. 영감으로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이 많아지도록 말씀을 주장하고, 내세우자.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인정만 한다면 표적과 기적을 삶은 시작된 것이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노라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0:10 참고). 예수만 믿으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른다. 예수만 믿으면 아들이 있는 자가 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5:12 참고). 다른 것을 더 보태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산다.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빌립보서 1:6).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요한복음 6:32 참고). 우리에게 예수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일5:12).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이 있다(고린도후서 5:17 참고). 우리는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요한복음 14:20 참고). 주님은 어떤 문제보다 크신 분이시다. 당신이 날마다 영감을 받고 산다는 것을 발견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라.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관두게 된다. 성경은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3:12 참고).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 자신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아시는 나는 어떤 나일까? ‘온전한 나’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천국에서 생길 일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할 때,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만족이 넘쳐 안식하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만 돌리게 될 것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으며, ‘온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하신 일이 목숨을 버리셔야만 했다는 사실 앞에 영원히 찬양하는 힘이 생겨 버릴 것이다. 목숨을 바쳐 건져 낸 자녀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감격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 일은 먼 훗날 육신의 몸을 떠나 천국 가서 일어날 일이 아니다. 천국 가서가 아닌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면 된다. 바로 이 시간부터 영원히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자.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주님께 감격인 줄 알고, 주님의 이름을 자주자주 많이 불러드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만들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21)라고 하심은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얼마나 주님께 감격이심을 표현하신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후 주님의 이름만을 불러 달라고 하신다. 그러면 구원받는다고 오늘도 눈물 어린 눈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신다. 모든 역사의 중심축을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맞추시고, 전력을 다하셨던 주님은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을 간절히 기다리시고 계신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6-47)라고 소리 지를 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라고 했지만,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8)라고 부르짖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지금도 이렇게 주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신다. 십자가의 고통을 고통이라 하지 않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두시고는 “나의 이름만 불러다오”라고 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의 이름을 많은 사람이 불러드리도록 목숨 바쳐 세상 끝날까지,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전심전력할 것을 결단하자.
    • 오피니언
    • 칼럼
    2021-07-28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최근 신실한 교인이며, 대권 주자로 부각되는 어떤 유명인사의 부친상에서 삼우제(三虞祭)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적 장례 용어로 적합한가를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문제 있는 용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는 성경에 나오는 장묘문화와 용어 정립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면서 이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 밝힌 대로 여기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한계가 있다. 이에 지난 호부터 저명한 구약학 교수이며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을 축약해서 연재했고, 앞으로도 몇 차례 계속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2) 김 교수는 인류의 시대적 구분에서 이스라엘의 장례의 역사를 이렇게 나누었다. 먼저 지난 호에서 언급한 1, 2항을 다시 논하고, 계속 3항 이하를 축약하거나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매장은 옆으로 웅크린 자세와 두개골만 하기도 했고,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는 가공된 장신구들도 함께였고, 모든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기도 했다. 3. 신석기 시대(주전 8,300-4,500 년경): 고인돌(dolmen) 무덤 양식이 출현한다. 또 여리고 지역에서는 가옥의 터 아래에 유골들을 매장했다. 4. 동석기 시대(주전 4,500-3,100 년경): 팔레스틴 해안지역에 새로운 장묘문화가 생겨났는데, 토기로 가옥을 본떠 만든 뼈 상자에 유골을 담아 사암(砂巖)벽을 판 동굴에 보관했다. 또 큰 옹기에 시신을 넣어 가옥의 터 밑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100-2,200 년경): 무덤이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데, 주로 석회암 층에 수직갱도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원형 또는 사각형의 묘실에 이르는 구조를 보여준다. 부장품으로 다양한 토기그릇들이 있고, 그릇에는 음식물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다. 6.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200-1550 년경): 여러 형태의 무덤 양식들이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묘실을 만들고, 시신은 돗자리 같은 깔개나 나무 판자위에 반듯이 뉘었다. 비녀나 머리핀들이 발견되며, 다양한 일상적 도구들도 볼 수 있다. 또 바위를 직접 파서 묘실을 만들기도 했다. 보통 한 무덤에 40구까지 사용했으며, 매장할 자리가 없으면, 이전의 시신 유골은 한쪽으로 모아 쌓아 두기도 했다. 이 시대의 특이한 것은 봉분을 갖춘 무덤양식도 나타났다. 시신을 매장한 뒤 흙과 돌로써 높이와 지름이 각각 3-4m 되는 봉분을 쌓았고, 다수의 토기들과 무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7.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 1,200 년경): 수직 또는 경사진 계단식 갱도를 입구로 하여 묘실로 연결되는 무덤양식이 보편화되었다. 하나의 묘실은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많은 토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8. 철기시대(주전 1,200-600년경): 과거에 사용되던 자연 또는 인조 동혈이나 석실묘가 재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은 여러 개의 방을 갖춘 묘실로서, 지상에서 지하로 계단을 만들어 전실(前室)에 이르고 여기서 여러 묘실들로 연결된다. 묘실은 그 벽면의 둘레에 유해를 안치하는 대(臺)를 만들었고, 어떤 묘실에는 대 대신 벽을 파서 그곳에 유해를 안치했다. 이러한 석실묘 형태가 제2 성전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들은 석실묘를 사용하지 못하고, 평토장을 했다고 본다. 9. 바벨론 포로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주전 600-주후 70년경):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고, 부장품들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주전 3세기 헬라시대 부터는 카타콤(the catacomb)방식의 무덤형태가 새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무덤비문과 벽화 장식도 등장한다. 로마시대 이후 예루살렘 주변 무덤들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든 수많은 직육면체 유골함들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유해의 살이 다 내린 다음 유골을 수습하여 보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함께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 무늬가 새겨져 있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전 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김 교수는 그의 논고의 서론에서“성경 전체를 통해 장묘문화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었고,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솔직히 밝힌바 있다. 본 호에서의 그의 연구에서도 역시 그러한 면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앞서 논한 바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서양의 장묘문화와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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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1-07-28
  • [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정기총회의 공과 지난 5월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그동안 총동창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간접추천, 추인 등의 절차를 따라 임원들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해된다. 총동창회 회원들의 미온적인 협력이 결국은 그런 행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 바꿔볼 때도 되었다. 마치 어느 특정한 그룹의 밀실 야합적인 모습으로 임원들을 줄 세우기식으로 추천하였고, 총동창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고자 하는 회원들의 임원출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따른 총동창회의 임원선거는 동창회의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회원들이 공회 앞에 합법적인 발언 기회를 얻어 의제를 제시하였고, 의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격론 끝에 상정된 의제를 표결에 붙여서 회칙이 수정되었다. 개정된 임원선거 규칙은 공천위원 추천제에서 본회에서 직접추천, 혹은 자원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인 입김으로 이상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정기총회를 통하여 선출된 회장을 불신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다시 추대하여 보선한 초법적인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법한 정기총회를 뒤집은 불법적인 임시총회 총동창회는 2021년 5월 24일 오후1시 신대원101호 강의실에서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그 일정에 따라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회집된 회원으로 개회되었다. 총회는 회순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었고 임원 개선과 안건을 다루고 폐하였다. 그런데 전임회장단은 총동창회 회칙 12조 2항에 수석부회장을 수정하지 않아 그대로 살아 있고, 13조 1항에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로 전년도 총동창회 총회에서 받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총회를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총동창회 임원회는 임시총회를 받아 들여 공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기총회를 불법적인 임시총회로 뒤집은 초유의 사태이다. 무엇보다 지난 정기총회는 수석부회장을 당연직으로 추대하는 것을 본회에서 직접 추천하여 투표하도록 개정하였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시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하여 관철시켜야 마땅한데, 정기총회가 폐한 후에 문제를 삼아 임시총회를 요구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시총회를 적어도 1주일 전에는 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에 7월10일자에 공고하여 절차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임시총회 소집 요건에 보면 1)적법절차에 따른 임원 구성(보선)과 2)회칙보완 수정이라고 명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상정된 안건도 아니기 때문에 초법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렇게 볼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현 회장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서명한 회원200명에 절반도 못 미치는 61명(전임회장 9명과 임원 14명, 담임목사, 부목사)이 참석하여 정기총회를 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재론하여 회칙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불법적인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임시총회소집이란 말은 이미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임시총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만약 정기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법총회로 규정하고 정기총회 소집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상한 임시총회 사회 금번 총동창회 임시총회(21.07.16) 개회 시 지난 정기총회를 통해 선출된 회장으로 하여금 회의를 주재하게 한 것은 이미 정기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임시총회는 임원 개선에 들어가면서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전임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임원 개선을 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불법적인 임시총회이다. 전임회장은 이미 정기총회를 통하여 그 실효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적법한 회장을 의장석에서 내리고 무슨 자격으로 버젓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권한남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도 부끄럽다. 그리고 전임회장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회칙을 수정하는 것을 주재하였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더욱이 해괴한 일은 다른 임원 개선한 것은 차제하고 전년도 회칙을 들어서 수석부회장으로 있었던 김홍석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후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기에 사의한 것으로 하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임원개선이며, 이는 총동창회의 정기총회를 기만하였고, 또 총동창회 자체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회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코미디 같은 이 회의 진행에 동의하고 박수를 친 회원들은 상식과 법을 어떻게 알고 동의한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전임회장들의 놀이터가 된 임시총회 어느 모임이든 전임회장들은 그 경륜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미미하면 미미할수록 좋다. 한 교회에 원로목사는 담임목사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가도록 온전히 뒤에서 기도하며 도우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이고 정상적이 아닌가. 이런 상식과 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문제되어 상당한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총동창회에서도 전임회장들은 그야말로 전임회장이어야 한다. 전임회장이 상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금번 임시총회 건에도 전임회장들이 소위 총동창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미명 하에 도에 넘치는 개입으로 총동창회를 불법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차하면 세력으로 임시총회를 요구하여 정기총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설령 지난 5월 개최된 정기총회가 본인들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결코 그렇지 않지만), 전례 없는 임시총회 개최를 조종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총회가 전임회장들 발언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므로 총동창회의 격을 완전히 실추시켰다. 적어도 전임회장들이라면 정기총회에서 진행된 것을 존중하고, 문제점이 있을 때 그것을 차기 총회에서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전임회장의 처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총동창회 재정 통장 관리의 이중성 총동창회의 재정운영은 노회에 참여하는 목사회원들에게 소위 협동총무라는 굴레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각출하게 하여 회비를 수령하고 있다. 장학금 등으로 후배들과 신학교를 위해 사용한다니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무런 반론 없이, 회비 각출에 순응하여 지불한다. 총동창회의 운영을 위한 수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대원 장학금 명목으로 전체 회원을 상대로 봄. 가을 노회 시마다 일년에 두 번씩 거두어 가는 회비이고, 둘째는, 임원들의 임원 회비이고, 셋째는, 총동창회 부부수련회를 위한 목사들과 전국교회 후원금이다. 이 세 종류의 수입에 관하여 정기총회에서 종류별로 상세하게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임원회비는 용인된다 할지라도, 총동창회 부부수양회 시에 전국 교회에서 부담한 후원금은 결국 총동창회의 공적인 재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정의 지출에 대해 정기총회에서 공개적, 구체적, 객관적인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총동창회의 공식 행사에 대한 재정보고는 반드시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되는 것이 통상이다. 어떤 회든지 개회가 선언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경우 회칙수정을 하고, 그 수정된 회칙에 따라 임원개선이나 사업 등이 논의된다. 회칙수정이 앞부분인 것은 그 수정된 것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 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한다고 것이 회칙의 통상이다. 그런데 즉시 발효하도록 개정한 것을 두고,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회기, 아니 체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의 입김에 의해 종잇장 뒤집듯이 뒤집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정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려신학대학원 총동창회는 어떤 특정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모르나 왜 이렇게 전임회장들이 그 입김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순수한 친목 단체인 총동창회를 정치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순리를 따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이번 임시총회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고 자위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임회장들이 행동한다면 향후 총동창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 코로나19의 변종으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당장 오는 주일 예배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총동창회가 모여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헌법소원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상황보다도 어떤 더 중요한 명분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에 감염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와 고신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이 분명한데도, 예배보다도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겁쟁이 고신의 목사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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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1-07-17
  • [김병환 전도사] 사회 전반에 스며든 이단(異端)과 사교(邪敎)의 그림자
    이전 글에서는 기독교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통○교’가 “정치와 언론”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업·의료·문화·예술·교육·봉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통○교의 모습을 밝히고자 합니다. 통○교는 리조트와 여행사, 건설·식품·제조·출판 관련 기업들을 운영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들은 여러 언론이나 경제 전문지에서 이미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는 문화·예술 단체와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도 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단체에는 리틀 엔○○ 예술단, 유○○설 발레단, 청○평화월드센터가 있으며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서는 자원봉사 단체인 애○, 의료법인인 청○병원, 실버타운인 청○ 빌리지와 함께 여러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선○대학교, 청○국제중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여자중학교, 선○유치원, 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분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통○교 관련 신학교를 국내(선○대학교, 선○UP대학원대학교)와 해외(미국 통○신학대학원-UTS)에 설립하여 오랫동안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관련 교단과 단체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에 침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단과 단체가 있는 한국 기독교 현실에서 통○교뿐만 아니라 이단 단체가 설립한 위장된 교단과 단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설립되는 기독교 교단과 단체의 성격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인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통○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쉽게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가 설립하고 관여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단체는 서로 연결점이 돼 통○교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주요 언론과 기독교 언론들을 통해 보면 통○교는 사회 전반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의 모습이 한국교회에 주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된 통○교의 기업과 문화·예술·교육 단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통○교의 영향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칫 잘못 대처하면 법적소송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오랜 무관심과 우리의 안일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신앙의 후배와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현실을 물려주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함으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실 된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전하는 모습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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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7-13
  • [박봉석 목사] 진짜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촌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기잡이를 나간 배가 있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걱정이 됩니까? 온 동네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서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서 한 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완전히 울상이고 혼비백산이었습니다. 배는 놔두고 그 불을 끄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밤이었고 그러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저 멀리 그렇게 고대하던 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그 배를 발견하고 “배다. 배가 온다!”라고 소리를 치자 모두가 바닷가에 나와서 그 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탔던 뱃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젯밤 바다에 뜻하지 않는 풍랑이 일어서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먼 육지에서 큰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불빛을 보고 육지가 저기구나 생각하고 항로를 바로 잡고 이렇게 육지로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불난 집이 풍랑을 만난 많은 뱃사람들을 살린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한 가지 일만을 바라보고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일이 났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 천국을 주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지금 실제의 삶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의 단면만을 보면 시험이고 문제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안에서 볼 때는 더 크고 놀라운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그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입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그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자 그만 호들갑을 떱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난리가 났습니다.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일어나소서. 우리가 다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전부 다 죽은 것처럼 호들갑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 생각과 주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애에서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어떤 삶의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상황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를 유익되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그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지 590호 게제된 박봉석 목사님의 칼럼 <진짜 문제는?>의 원본으로, 첫 문장에 편집상의 오류로 수정해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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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1-07-09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인간의 삶은 어떤 면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또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깨어있는 대부분 시간을 일하는데 보냅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부유한 자거나 가난한 자거나 간에 우리 모두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전형적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이라는 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존엄성과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약이라는 것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건강을 얻는데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라는 것 역시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는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일 그 자체의 가치만을 가지고 일할 필요를 느끼거나 일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일을 하는 것은 돈을 필요로 하거나 돈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음식, 의복, 가옥, 오락, 휴가, 안전, 은퇴 후의 안락한 생활 등을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일은 필요하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럽고 끝없는 질병과도 같은 노동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과 관계하여 우리가 듣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는 오늘 일해야 한다!”는 말이지, “나는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며 영적인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일을 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일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의 신은 일을 하는 신이 아닙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은 위대하고 무한한 사상가일 뿐입니다. 플라톤의 신은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아니라 단지 계획했을 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는 귀족이며, 사상가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일을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높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교적인 헬라적 태도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셨으며,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법적인 파업이나 명퇴나 조기 은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 세계를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구속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과 빈 무덤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중생과 성화, 그리고 영화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하여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은 일의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존엄성을 가졌던 일(work)이 이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labor)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이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은 이제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요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에 새로운 활력과 존엄성을 부여해 주셨으며, 일을 한다는 것이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소명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 모두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로서 이제는 단순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명자들이 되었다는 사실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일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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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절실한 의문이요 관심사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란 대 명제일 것이다. 이에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으나, 이보다 우선 되어야 될 것은 장례 용어에 대한 역사와 그 문화적인 배경이 먼저 일 것 같았다. 이에 그동안 장례문화에 대한 동서양과 성경역사적인 고찰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계속 이에 대해서 논해 오고 있다. 이번 호부터는 성경 속에 나오는 장묘문화에 대한 역사를 논하면서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적 고증이나 신학적 연구와 분명한 장묘에 관한 구체적 예식에 대한 선행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 필자도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장례용어에 대한 기고와 강의도 많이 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이렇게 많지 않은 연구 속에서 구약학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진해교회 출신인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은 정말 반가웠다. 이에 김중은 교수가 연구한 내용을 축약하고 여기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3~4회 정도 피력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적 장묘문화의 서론 신구약 성경 본문에는 장묘문화에 관해 상세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로써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한편 지난 19세기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성서 고고학 발굴의 결과로 성경의 역사현장인 가나안 지역과 고대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무덤들이 발굴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인들의 무덤과 이방인들의 무덤이 확연히 구별될 만큼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무덤, 유해나 유골의 형태, 부장품들을 보아서 그 민족이나 종교적 특성을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지식만으로는 이스라엘 장묘문화의 특징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성경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야훼 유일신 신앙과 큰 갈등 없이 가 시대마다 고대 가나안과 그 인근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묘문화에 동참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경본문이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는바 나름대로 신앙생활과 연관하여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장묘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신 14:1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또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의 장례법”이 있었고, 예수의 시신도 이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요 19:40 참조; “... according to the burial custom of the Jews", NRSV).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나름대로의 장묘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 글에서는 신구약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중심으로 살표보는 데에 국한하기로 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각 시대에 보편적으로 공유했다고 생각되는 장묘문화에 관해 성서 고고학적인 견해를 요약해서 살펴본 후,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례문화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고자 한다. I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시대의 보편적 장묘문화 고찰 전통 민속신앙과 근대로 오면서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의 상례(喪禮)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장묘문화의 방식과 절차를 볼 수 있다: 1)초종(初終) 2)습(襲): 소렴(小殮)과 대렴(大斂) 3)성복(成服) 4)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 5)치장(治葬)과 천구(遷柩) 6) 발인(發靷)과 반곡(反哭) 등 여기에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제사절차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신구약 각 시대에 이러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다. 다만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에 따라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는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시신을 지하 구덩이에 넣고 그위에 돌들을 얹어 놓는 형식이며, 시신은 무릎과 양손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린 자세이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에는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시신은 옆으로 눞여 웅크린 자세가 나타나며, 두개골만 매장한 경우도 있다. 매장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피장자가 여성일 경우는 조개껍질, 뼈, 돌로 가공된 장신구들이 함께 드러난다.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었다. VI. 중략하고 맺는 말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한다. 여기까지 볼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저명한 구약 학자이지만, 여기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솔직한 지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진정한 우리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되겠다는 많은 이들의 학구적인 사명감이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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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1. 코로나 펜데믹이 18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국가도 어렵고,기업도 어렵고, 국민들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성도들의 어려움도 말이 아니다. 혹자는 6.25 전쟁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한다(?) ①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생기게 됐을까? 잠6: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ㄱ.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ㄴ.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와 교회안에 알곡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② 코로나 펜데믹이 무엇 때문에 왔던지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ㄱ.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a. 교회와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세상의 소금이 못되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됨을 회개하라 눅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시니라.아멘 b. 천국소망,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것,세상의 것만 위해 살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 전에 나가서 진실하게 회개하면 들으시고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필독(왕상8:37~40) 2.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시33: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로 자기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다. ②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③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다. (1) 황송하게도 “대한민국”은 이 믿음 위에 세우주신 나라이다. ① 구한말 세계 열강속에 이 나라가 망해갈 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소망이 없을 때 0.8% 밖에 안되는 기독교는 이 나라를 살렸다. 3.1 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독립운동,문맹퇴치,계급철폐,남녀차별철폐,미신타파,물산장려운동,농촌계몽,거룩운동(금연,축첩폐지,정직) ② 일제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주셨다. ㄱ. 1948.5.31. 제헌국회에서 198명의 의원 중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시작하였다. ㄴ. 1948.7.2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주셨다. ㄷ. 1948.8.15. 대한민국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1270년 몽골침략 이후 680년 만에 독립국가 된 것이다. ③ 그러나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해 주셨다. 1948.9.21.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인준을 받으려고 장면,모윤숙,김활란,장기영,정일형을 파송함. 그러나 소련 대표의 집요한 반대 공작과 위성 국가들의 “필리버스터”로 유엔 총회가 폐회되기 전날까지 승인도 못 받고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자 장면 대표와 모윤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날 소련 대표가 발언을 하다가 목이 아파 밖으로 나가고 즉시 투표하여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이것이 2년 후 소련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중 유엔이 참석 후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여 1950.7.7일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④ 이 기적도 6.25 발발 7일 후 7월 2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교회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비상기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초량교회와 모든 교회가 철야,새벽,금식 기도를 하고 시민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7.7일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아멘! ⑤ 인천상륙작전도 금식기도의 응답이었다.(1950.9.15~19)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장로님이셨는데 세계 상륙사를 살펴보니 500번 상륙에 성공은 단 하나 ‘노르망디’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 위에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역전시킨 것이다.아멘! 이 외에도 이런 기적은 대한민국에 계속되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 남,북이 국가 경쟁력이 역전 됨 1974년 엑스플로74 ~ 땅굴 발견,안보를 튼튼하게 됨 1977년 민족복음화 대회 ~ 4,300만석(쌀) 100억불 수출 1980년 세계복음화 대회 ~ 88 올림픽을 유치하게 하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됨 1975~1985 10년 동안 기독교는 350% 성장 경제는 980% 성장함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기적)이었다.아멘!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그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①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가 살고 우리와 자손 만대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힘쓰는 모두가 되자.아멘! ② 그리고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에 돌아가서는 오늘과 같은 기도를 쉬지 않고 하도록 하자. ③ 그리고 빨리 이 나라가 복음화 되도록 예수님을 부지런히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이 나라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영원히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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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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