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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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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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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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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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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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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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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정희 목사]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2/ 13일의 금요일
    I. 서언(序言) 기피하는 숫자 4(四)에 대해서 몇 주 전에 논한바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주로 금기시하는 숫자였고, 서양의 경우에 가장 기피하는 숫자는 13일의 금요일이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난 번 논한 바 있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는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미신적인 행위이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시하는 이유 1. 13에 대한 금기시 하는 보편적 현상: 숫자 13에 대한 공포증을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라고 한다. 이러한 13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의 현대 문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고층 빌딩에서 80%이상은 13층이 없다. 또한 많은 병원에는 13호실이 없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주소에도 13번지가 거의 없다. 또한 공항에도 13번 게이트가 없거나 비행기 좌석에도 13번열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13일의 금요일’ 때는 항공사에서는 약 9억 달러의 손실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재수 없는 13일에는 비행기를 타거나 금융거래를 피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2. 13에 대한 금기시의 유래: 황당하기 이를 때 없는 이런 미신적인 기피현상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민속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 이전의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부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12명의 신들이 그들의 천국에 건설된 발할라(Valhalla)란 신전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로키(Loki)’라는 초대받지 않은 13번째 신이 도착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로키는 어둠의 신 호더(Hoder)로 하여금 겨우살이나무로 만든 화살을 기쁨의 신 볼더(Balder)에게 쏘도록 일을 꾸민다. 결국 볼더(Balder)는 화살에 맞아 죽고 세상은 어둠에 덮였다는 것이다. 이런 유래로 13에 대한 기피현상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외에도 13이란 숫자가 언제나 예언과 운명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최후의 만찬’역시 이 신화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예수의 제자 중에 마지막으로 만찬장에 나타난 제자이며, 13번째로 식탁에 앉았다. 다음날 그는 예수를 배신했으며, 또 13일의 금요일에 예수님이 못 박히셨으므로 더욱더 좋지 않은 날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에서 마법사들의 모임은 보통 12명의 마법사들로 구성되었고, 13번째 참가자는 악마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13에 대한 기피증이 생겨났다. 또한 숫자로 점을 치는 사람에 의하면 12 다음에 나오는 13은 불운을 가져오는 숫자라고 여겼다. 그 이유는 완전수인 12는 반으로도 나눌 수 있고, 3과 4로도 균등하게 나눌수 있다. 또한 12는 예수님의 제자들, 별자리, 1년의 달, 올림퍼스 산의 신, 헤라클레스의 노역, 이스라엘 지파, 그리고 배심원의 숫자가 모두 12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13이 되면, 12의 완전함이 깨어지면서 불균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은 12단계를 거쳐야 되고, 13번째 단계는 내세의 생으로서 신비롭게 생각했고,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내세를 상징하는 숫자 13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13은 죽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전반적인 두려움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3이란 숫자는 고대 이집트보다 더 먼 고대의 여성의 힘과 연관되어 있었고, 당시의 여신 숭배문화에서 13이라는 숫자는 더 신성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1년 동안 도는 달의 회전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13×28=364일이었다. 또한 프랑스 라스코(Lascaux)동굴에 있는 27,000년 전에 조각된‘대지의 어머니 러셀(the Earth Mother of Laussel)’은 13개의 새김 눈(notch)이 있는 뿔을 들고 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이것은 여성의 힘을 정복하거나 수용할 수 없었던 무능력과 전반적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13이라는 숫자에 투영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III. 결 어 어떤 조사에 의하면, 13일의 금요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에서는 1,700만에서 2,100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고 한다. 이 공포증은 숫자 13에 대한 공포와 금요일에 관한 미신이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이 진짜 근원일 수도 있다. 즉, 금요일(Friday)은 하늘의 여신 프리가(Frigga)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기독교가 전파된 후부터 프리가는 마녀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금요일을 ‘마녀의 안식일’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13일의 금요일의 시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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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 [신재철 목사] 관리소장, 태풍과 만나다.
    “오늘 잠 자기는 틀렸네.” 태풍 소식에 긴장이 된다. 건물 관리가 안 된 아파트이기에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태풍, 장마와 같은 가혹한 상황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자지 않는다고 해서 폭풍 중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관리소장의 책임감이랄까? “순찰이나 한 번 돌아볼까?” 새벽 1시. 예보된 것보다 밖은 더 요란하다. 집 안에서도 태풍의 무서움이 느껴진다. 아파트 옥내 순찰이라도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다. 어차피 다 젖을 것 같아 가벼운 복장에 우의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밖을 나선다. 사람들이 오가는 유리 자동문은 뿌려지는 비를 맞으며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다 부서지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핀다. “어? 장난이 아니네?” 밖이 보이는 주차장에 서서 태풍에 버티며 몸을 가눈다. 큰 도로 상황이 어떤지 보려는 것이다. 보통이 아니다. 왕복 6차선이 작은 수영장이 된 듯 가로등 불빛이 물에 일렁인다. 이사 와서 이 정도 상황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물구경 하듯 살피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함을 느낀다. “지하 주차장! 괜찮을까?!” 헐거운 슬리퍼를 급하게 끌며 계단을 뛰듯 지하로 내려간다. ‘앗!’ 몸이 잠시 뜨더니 계단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슬리퍼가 물기 있는 계단에서 이렇게 위협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본능적으로 팔을 내어주고 허리와 머리를 지켰다. 일어나기 힘든 고통에 잠시 웅크리고 앉아 있어 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 나타나 위로하거나 돕는 일 따위는 없다. 몸을 일으킨다. 주차장 상황을 봐야만 했다. “아... 이게 뭐야.” 내 생에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지하주차장 진입로는 계곡이 되어 있었다.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주차장 바닥은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 올랐다. 배수펌프 한 개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역류되어 그마저도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주차된 차량 먼저 빼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급히 차주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차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마치 군사작전같이 긴박하다. 남자 입주민 몇이 함께 붙어 주차장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미 통제할 수준을 넘었고 차오른 물로 인해 자칫 감전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생겼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일단 퇴각한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황망한 상황에 차라리 여기가 군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대, 소대 인력이 함께 한다면 수습이 빠를 텐데, 이걸 어떻게 나 혼자 정리를 한단 말인가? 이미 승강기 지하는 물이 가득하다. 배수펌프 고장으로 물을 뺄 방법도 없다. 119는 계속 먹통이다. 무력감에 기계적인 못 짓으로 떠다니는 쓰레기를 치우며 생각이 깊어진다. 인생 별 경험을 다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친분이 있던 업체 사장님이 배수펌프를 가지고 와서 승강기부터 물을 퍼내며 진척이 보인다. 영화의 좀비처럼 생각 없는 몸놀림으로 계속해서 치우고 버리고 퍼낸다. “아! 진짜!” 오늘은 주일이다. 벌써 시간은 10시. 갑자기 짜증이 난다. 대강 물은 뺐지만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예배 인도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홀딱 젖은 옷에 누더기가 된 슬리퍼. 내 차림이 처량하다. 팔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예배는 가야지. 급하지만 느리게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 샤워를 한다. 개척하면 목사는 강단에서 많이 울어야 한다는데. 나는 왜 자꾸 엉뚱한 곳에서 눈물이 날까. 샤워기 물인지 눈물인지 자꾸 흘러내린다. 누구 들으라는 듯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나 부르신거 맞죠? 개척교회 잘 할 수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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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7
  • [박동철 장로] 대한민국 인구위기, 출생대책 교회가 앞장서야하는 이유
    인구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전 세계 각 나라별 인구대책이 다르다. 대한민국의 인구 위기는 눈앞에 닥쳤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를 합계출산율이라 한다.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으로 밝혀졌다. 보통 서구 여러 나라 인구대책을 잘 세우고 실행한 나라들의 합계출산율 1.3(핀란드) 1.6(미국) 1.3(일본)에 비하면 정말 위기를 실감 할 수 있다. 깜짝 놀라울 일은 그동안 인구 저출산 대책으로 쏟아부은 정부 재정이 200조 원을 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2050년이 되면 대한민국 인구가 거의 소멸된다는 끔찍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세상이 세태에 따라 급변하는 모습이 의아하지만 만군의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알겠는가. 불과 30여 년 전만해도 정부의 인구정책은 저출산을 위해 힘을 쏟았다. 한 가정 2명의 자녀를 권장했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셋 낳으면 삼천만의 나라가 망한다.’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필자의 30대 예비군 훈련 시 정관 시술의 특혜를 주는 문화가 유행했다. 사람은 한 시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인구 절벽 앞에 선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 같다. 인구대책에는 세상의 학자들의 고견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인구의 감소 정책이 필요하다는 고전 인구경제학자들의 역설적 주장이 한때 대세를 이뤘다. 미국 록펠러대 조엘 코헨교수는 한나라의 안정적인 인구유지의 출산율을 2.1로 봤다. 적정하게 인구 증가 속도가 느려지면 1인당 GDP가 오른다. 그리고 유한한 상태에서 경쟁자가 줄고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극히 상식적인 이 이론이 오늘날 유럽 선진국에 적용되어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었다. 문제는 선진국의 나라 형편이 잘 살게 될 때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의 급속한 변화’가 큰 문제를 낳는다. 오늘날 대한민국 앞에 놓인 형편이다. 소위 대한민국이 겪는 물질의 축복 속에 진통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복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대한민국, 급속 압축 성장에 성공한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가정 가정에 아이를 안 낳는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경제발전과 생육번성의 균형 잡힌 풍조가 깨져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인구위기 저출생 대책에 한국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기독교 선교방송 CTS가 앞장서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교회가 앞장설 것을 외치고 있다. 필자는 경남지역 저출생대책본부 위원으로 위촉받아 참여하고 있다. 아직 출범 단계이고 많은 실행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몇 번 세미나 등에 참여해 보니 한국 기독교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국가차원의 출생대책은 제자리걸음에서 머물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사회 지배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명령을 받았다. 창세기 문화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 하라는 위대한 말씀 앞에 경건히 서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갈라파고스는 너무 끔찍한 일이다. 저출생경남본부는 지난해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한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이경은 목사께서 본부장을 맡아 열정을 내고 있다. 본부장을 맡은 이 목사는 지난 세미나 때 기억나는 멘트를 남겼다. 교회가 한국 인구위기 출생대책에 앞장서야하는 이유는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되 사람 같은 사람을 양육하는 교육의 요람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억에 남기는 멘트였다. CTS의 저출생대책본부 조직과 경남지역본부에서의 열정의 활동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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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조희완 목사] 소싯적 예수 (눅2:41-51)
    과수재배 과정을 보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파종을 해서 묘목을 기르는 묘목기와 꽃이 피는 개화기와 열매를 맺는 결실기로 구분이 됩니다. 이 과정을 인생으로 비유하면 어린 시절을 묘목기라고 할 수 있고 청년기를 개화기라고 할 수 있고 장년기를 결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을 거치면서 과일이 익어가듯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린 청소년기는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울고 웃는 인생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릴 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전체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좋은 환경을 접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녀가 어릴 때 가정과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절대로 어린 자녀를 세상경쟁 구도 속으로 내몰리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토라(율법) 교육을 시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성경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를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1,42) 둘째는, 성전을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8,49) 셋째는, 효도를 중요시 하는 사람을 사셨습니다.(50-51) 그렇게 성장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삶을 닮은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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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오성한 목사] “다 믿어라”의 비밀
    구약의 말씀을 바꾸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다 지켜 행하라”를 “다 믿어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믿으면 행하게 되어 있다. 백집사님께서 전도하러 갔다가 그분께 과실 수 네 그루를 얻어와 교회당 화단에 심었다. 어디서 생겼느냐고 했더니 전도하러 갔다가 얻은 것이란다. 농사하시는 분도 아닌데 어디서 생겼느냐고 했더니 구청에서 식목일을 맞아 과실수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듣고 구청에서 얻어 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구청에서 나무를 나누어 준다는 말을 듣고 믿음으로 구청에 갔다. 나무를 얻어 온 분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겨 구청으로 가서 나무를 얻어 온 것이다. 듣고 생긴 믿음은 행함을 가져왔다. 성경에 다 지켜 행하라는 말을 믿음의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예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다 믿으라는 말로 바꾸어 듣는 귀가 필요하다. 우리 힘으로 지켜야겠고 생각하면 실패와 좌절뿐이다. 예수께서 이미 이루셨음을 믿고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일 때 행함은 즐거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다 지켜 행하라”는 말씀을 “주님이 하신 것을 다 믿어라”는 뜻이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셨다. 구약도 복음의 소식이다. 구약에서 사람은 철저히 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지다. 신구약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신약적인 예수를 믿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을 믿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똑 같다. 해석을 잘못해서 그렇다. 구약도 복음이다. 신약도 복음이다. 신구약 모두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회복의 약속을 믿으라는 것이다. 구약을 율법으로만 보면 안 된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고 그랬다(롬3:20). 예를 든다면 요즘 식당에서 담배피우는 것이 죄다. 화장실에서 흡연을 하면 죄다. 옛날에 담배 연기 때문에 식당가기 힘들었다. 옛날에도 담배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 그러나 법이 없을 때는 흡연이 잘못인 줄 몰랐다. 따져 보면 법이 없을 때도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답배를 피우는 일은 죄였다. 다른 사람이 담배 연기를 마시도록 한 일은 잘 못된 것이다. 그러나 법이 없을 때는 그런 의식이 없었다. 법이 정해지니 죄인 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복하게 살길 원하신다. 마음을 알고 율법의 요구를 저절로 실행하려면 사랑해야 마음을 알게 되고 저절로 실행하게 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다. 율법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우리에게 신부 마인드가 생기면 신랑인 하나님의 마음인 율법이 우리에게 오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있다. 사랑하지 않고는 마음을 진정으로 알 수 없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마음을 읽고 따라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얻지 못할 때는 즉각 그만 둘 수도 있고 원망하게 된다. 누가복음 15장의 첫째 아들이 그러했다. 수년 동안 아버지 옆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염소 새끼 한 마리 잡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을 한다.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아버지 옆에서 열심히 일만 했다. 아버지가 함께 한다는 행복을 전혀 모르고 열심을 내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15:31)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사랑 없이 행하려고만 하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된 지식의 열심히 되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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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오태열 목사] 다 이루었다
    I. Kant(1724-1894년)는 죽음이란 자기라는 개인의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최후의 순간만은 선하게 되며, 제아무리 거짓된 자라도 죽는 순간만은 진실해 진다는 말이다. 유언이란 순간적인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생을 통하여 마음 깊이 간직하였던 생각이 진실된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언은 그 사람의 생의 목표가 되고 가장 귀한 진실이 되기도 한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는 임종 직전에 말하기를, 아 사랑하는 이들이여 아무쪼록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은 명심해주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석가의 인생관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가비라 궁전을 떠나 “生老病死”(생노병사)에서 해탈하려고 평생을 고행하였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왕궁을 떠난 것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였는데 그 이유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같은 왕자의 신분으로 궁전을 떠나 고행, 고난의 길을 택한 이유가 얼마나 대조적인가?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임종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슬픔과 아쉬움이 없는 만족감과 승리의 환호성이다. 인류의 역사이래 그 누가 이런 말을 하였는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겨우 12명의 제자를 양성하셨지만, 저들의 배신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로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순간에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많은 업적을 남겨 공로를 인정받아 후세 사람들이 기념비도 세워주고 추모해야 할 정도가 되어야만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나라의 제갈량은 신출귀몰한 모사꾼이었다. 숙적 위나라의 사마의 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던 때에 사마의 삼부자를 “호로곡 계곡”으로 몰아넣고, 화공작전을 펼쳐 꼼짝없이 죽게 만든다. 사마의는 사마사, 사마소 아들 형제를 부등켜 안고 제갈량의 작전에 걸려든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울부짖을 때, 하늘에서 갑자기 소낙비가 내려 사마의 삼부자는 살아 도망침으로 화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언덕 위에서 이를 보고 있던 제갈량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일을 도모한 것은 사람이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謀事在人 成事在天”(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결과를 하늘에 맡기고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다. 제갈량이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결과를 하나님 뜻에 맡긴다는 뜻이다. 우리는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누구나 빌립보서 3:12절의 바울의 고백 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는 미완성의 삶이며, 아쉬움과 유감스러운 삶이다. 한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중요한 것은 내 생의 마지막 고백이다.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 유언이 내 삶의 핵심이며 인생관이 됨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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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박봉석 목사]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한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 마을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선교지의 사정상 한 동안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건축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센터가 몽땅 홍수에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1여 년 동안 이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지막 즈음에 송두리째 물에 휩쓸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제 남편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이해할 수 있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지금 그곳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선교교육센터를 무너뜨리고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물결을 보고 있는데 주님이 음성이 들려왔소. ‘나의 종아,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바로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소.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소.” 독자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내 기대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순적하게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전혀 안 될 때에도, 내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이루어져 갈 때에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존재라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세계의 존재이고 우리는 유한세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무한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하여 할 일은 따지고 증명하여서 다 이해해보려는 교만이 아니라 어떠한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그 하나님의 물음에 “예, 하나님 믿습니다. 어떠한 때에도, 아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대답이 독자 여러분의 대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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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7
  • [신재철 목사] 안녕하세요. 벤츠 두 대입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쓰레기가 쌓일 수 있지?’ 전임자의 소홀한 관리로 아파트는 너무 지저분했다. 70대 어르신이 관리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리수거장은 얼마나 묵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 쓰레기로 가득했다. 나는 관리소장이 된 후 며칠간 쓰레기만 치우고 있다. 처음에는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분리하다가 포기하고 마대에 쑤셔 담기 시작한다. 쓰레기를 뒤적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쥐새끼에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몸살이 날 지경이었지만 ‘나는 군인이다.’를 속으로 되뇌며 3주를 그렇게 보냈다. 결국 1톤 트럭 두 대가 와서 폐기물을 실어나른 후 나는 비로써 쓰레기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었다. 땀과 먼지에 범벅이 되어 퇴근하면 더러운 몸을 소파에 잠시 기댄다. 먼저 씻어야 한다는 상식을 모른 체하며 호흡을 정리한다. 개척교회 목사인지, 노동자의 삶이 시작된 것인지 헷갈리며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맞다! 오늘 수요일이지?’ 요일 지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아직 개척 후 예배가 시작되지 않아 사임한 교회 수요집회 찬양 인도를 당분간 이어가기로 했다. 씻고 나서야 한다. “여보, 나 수요예배 가기 싫어.” 목사가 할 말인가. 사실 평생 처음으로 해본 말이다. 가기 싫었던 적이 없지는 않지만 차마 입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미 통제력을 잃은 정신이 실언을 허락해 버렸다. 아내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 수요일에 금요일에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대단한 헌신을 이미 드리는 것이었다. 퇴근 후 교회로 달려온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믿음의 반응이고 신앙이라는 것이 체감되었다. 이제야 알게 되다니. 오늘 나의 투정은 큰 스승이 되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치우고 나서야 관리소장의 일상 업무를 익히게 되었다. ‘행정, 관리비 정산, 협력업체 사장님들과 업무 조율, 세 층의 주차장 청소와 매일 분리수거장 정리.’ 기술이 크게 필요치 않았고 성실하게만 감당하면 될 일이다. 그러고 보니 중소형교회 부목사 업무와 상당히 닮았다. ‘소소한 건물 관리, 행정, 민원 정리.’ 목회활동을 제외한다면 거의 부자(父子) 관계처럼 많은 부분이 교회 업무와 닮아있다. 상대해야 할 사람이 교인이 아닌 입주민이라는 것 정도가 차이일 뿐? 하지만 이는 내 삶을 흔들어댈 정도로 엄청난 차이라는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새로 오신 소장님인가 보죠? 안녕하세요. 저 벤츠 두 대입니다.” 싸늘하고 앙칼진 음성이 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는 내 뒤통수에 꽂혔다. 처음 보는 젊은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고 호의적인 태도라고는 1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인가. 교회 밥이 얼마인데 이 정도 느낌에 미소를 잃을 수는 없다. “안녕하세요. 몇 호 입주민이세요?” 자신의 정체를 벤츠 두 대로 표현하는 사람에게 나는 지극히 기초적인 정보를 요구했다. 상대가 어느 세대 입주민인지를 알아야 했으니깐. 사실 벤츠 두 대는 내게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량 정보를 밝힘으로 내가 더 겸손하기를 바랐던 것 같은데, 요즘 젊은 세대를 모르시는 듯하다. 상대가 벤츠를 타든 아우디를 타든 젊은 세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경차 스파크를 타도 상대의 외제 차에 기죽을 이유는 없다. ‘난 나니깐.’ 의도대로 내가 굽혀주지 못해서일까? 아주머니의 2차 공격이 이어진다. “나 12층 살아요. 알죠? 복층 50평.” 그렇다. 40세대 중 가장 위층 네 집은 가장 큰 50평이다. 벤츠 공격에 이어 아파트 크기로 나를 압도하려 했으니 이 역시 유효타가 되지 못했다. 내게 50평 세대는 관리비를 더 내야 하는 입주민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 깨닫게 된다. 조금 숙여주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임을. 재산공개를 첫인사로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미처 적절한 대처를 못 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아주머니가 우리 아파트의 빌런(villain)이며 나와의 악연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깊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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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7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6: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1/ 기피하는 4(四
    I. 서언(序言) 세계 어디를 가든지 특별한 기물이나 어떤 일들을 불길한 일의 징크스(jynx)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숫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는 4(四)를 가장 금기시하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한 금기와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와 여기에 따른 생각과 행위는 미신적이기도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더 배격해야 할 비 신앙적인 행태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기피하는 4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다음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4(四)를 금기시하는 이유 4의 금기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도 너무 황당한 일이다. 그 이유는 4가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고 해서 생겨진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한국 뿐 만이 아니라 한자문화권 지역인 중국과 홍콩, 일본,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다. 사회와 문화적이 차이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를 나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우는 아주 옛날부터 4를 무조건 기피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로부터 사신(四神)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 등을 중요시 한 것을 볼 때 무조건 4를 기피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볼 때 4의 금기 유래는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잘못된 기피현상은 근대에 와서 생과 사를 가름하는 병원들이 고층 건물이 되면서 환자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죽을 사(死)에 대한 민감성 때문에 발음이 같은 4를 회피하게 되었고, 이에 4층과 엘리베이터도 F층으로 표시하거나 아예 4층을 두지 않고 5층으로 표기하는 웃지 못 할 현상이 만연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례들은 병원 외에도 많은 경우들에서 볼 수 있다. 사례를 들면,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공동주택과 아파트 등에도 4동, 4층, 4호, 4단지가 없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군대의 편제에서도 4군, 4군단, 4사단, 4여단, 4군수지원 사령부, 4비행단, 4전대는 거의 없다. 해병대에서도 4를 쓰지 않는데, 이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결기의 뜻에서 4를 건너뛰고 바로 5를 사용하고 있으며, 국군 간호사관학교에도 환자와 관계되기 때문에 제4기가 없다.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등에서 버스를 반별로 나눌 때도 4호차는 F호차로 표시하며, 장례식장도 4호를 쓰면 고인을 두 번 죽이는 느낌이라 해서 4호실을 두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시내버스나 기차 등의 교통수단에도 4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고, 인천국제공항에는 4번과 44번, 244번 게이트가 없다. 기업 중에는 삼성그룹 계열회사들이 4자 금기가 많은 편이다. 회사의 여러 사업장에는 4층이 없는 곳이 많으며, 신라호텔 등에도 4층이 없다. 이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이런 면에 민감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2. 한자 문화권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 먼저 일본의 경우는 우리 한국 많 큼은 아니지만, 아파트나 차량번호 등에서 4를 기피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 외에 일본에서는 7이 행운의 숫자가 아니라 금기로 여기기도 한다. 이는 7의 발음이 죽음의 땅을 의미하는 시치(死地)와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도 조선인민군에는 제4여단이 없는 것을 볼 때 우리 남한의 경우처럼 4를 기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4에 대한 금기가 아주 심한 편이다. 중국의 건물에는 4층, 13층, 14층, 24층이 없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중국의 소유로 되어있는 홍콩의 경우도 지상 14층, 24층, 44층이 없는데, 이는 14, 24의 홍콩지역의 광동어 발음이 자살 등과 비슷하기 때문이며, 영국 등의 서양문화의 영향으로 13층이 없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III. 결 어 서언에서 언급한 대로 어떤 사물과 일들을 불길한 것으로 여기는 징크스(jynx)나 지금까지 논한 대로의 4(四)와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어로, 7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듯이 고도로 발달된 이 사회 문화 속에서도 사람의 심리는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양지속의 음지를 대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사명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다음 호에서는 13일의 금요일과 행운의 숫자 7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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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7
  • [조희완 목사] 소망의 대상 (시146:1-5)
    영국의 유명한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왓츠>가 그린 <소망>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구가 있는데 그 지구 위에 한 소녀가 걸터앉아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하프의 줄이 거의 다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아 있는데 그 소녀는 마지막 남은 한 줄을 가지고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줄이 정상적으로 다 있어도 연주하기가 어려울 텐데 한 줄이 남은 것으로 연주를 하자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 마지막 남은 한 줄의 이름이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 그림에 담겨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줄이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건강의 줄이 끊어지고, 물질의 줄이 끊어지고, 인간관계의 줄이 다 끊어지고, 광야에 나 홀로 남은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한 가닥 소망의 줄만 있으면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고 인생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강력한 메시지는 바로 소망입니다.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원수들에게 그렇게 쫓겨 다니면서도 낙심하지 않은 것도 바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불같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당당했던 것도 바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는 구원의 책이자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소망의 책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말하기를, “소망이 있으면 행복의 싹은 틀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싹을 틔우기 위해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주님께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시146:3-5) 둘째로,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행27:20-25) 셋째로,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벧전1:3-4) 불행이 닥쳐와도 소망이 있는 한 행복의 싹은 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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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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