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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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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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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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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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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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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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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동철 장로] 추락하는 한국교회 신뢰도, 그래도 교회가 희망이다
    한국교회 사회 신뢰도 조사가 자주 발표되고 있다. 지난해 말, 어느 조사기관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 신뢰도가 18.1%로 2년 전에 비해 13.7% 떨어졌다. 종교별 호감도는 불교 66.3%, 천주교 65.4%, 기독교 25.3% 로 나타났다. 개신교의 분포도는 17%로 신뢰도와 비슷한 수치였다. 조사 결과를 보면 개신교 인구는 아직 9백만 명에 이르지만 신뢰도는 인구대비 크게 낮다고 봐야한다. 이러한 통계가 큰 의미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회 공표와 인식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교회를 보는 사회인식에 불쾌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명자로서 사회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웃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자 이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 칼 바르튼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성도의 자세를 정의했다. 한국 개 신교는 선교 130년을 넘기며 무지했던 백성을 깨우고 구원의 지경을 넓혀왔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는 소망에 온 나라가 복을 받았다. 일제 강점의 고난을 넘기고 6.25전쟁의 참상을 겪었지만 산업화로 세계 속에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물질 풍요 속에 따르는 영적 그늘일까. 세상이 교회를 보는 시각은 좀 심각하다. 여러 문화의 시각이 기독교를 비틀어 바라보고 있다. 영화 드라마 작가들이 기독교를 뒤집는 작품을 만들어 인기를 얻고 있다. 교회의 가장 큰 적 진보 이념의 유물론자들의 교회공격이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고, 그리스도는 좋아도 크리스천은 싫다는 담론이 세상을 덮고 있다. 한국에는 예수 없는 교회가 너무 많다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인본주의 본산 동성애 동성혼의 법제화가 위기를 맞고 있다. 세상이 교회를 보는 시각이 심각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등 질 수 없다. 세상이 복음의 밭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원래 권력과 힘이 통치하는 곳이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은 적대의 관계다. 저 옛날 로마시대 초대교회, 우리의 일정시대 핍박받는 교회를 기억해 보자. 권력의 힘이 강할수록 교회를 더욱 억압했다. 권력과 인본주의 발전 이후 우리는 물질 풍요의 자유 문화를 향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싫은 사회문화가 급격히 발전한다. 세상은 빛과 소금이 되고픈 교회가 싫고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이 다르게 보임에 따른 공격이 더욱 일고 있다. 크리스천이 외치는 천국과 지옥, 성령과 악령의 분명함에 다원화 세상은 짜증이 나고 있다. 그래서 헬라시대 수많은 신(神)들의 담론을 즐기는 시대를 동경하며 혼합적 구원론이 각광받는 종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단테는 명작 신곡(神曲)에서 지옥의 문패에 ‘영원히 희망이 없는 곳’이라고 적었다. 우리는 세상의 변화와 시각에 주눅 들 필요가 없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교계정치가 세상보다 못하다는 혹평도 있지만 단테가 적은 것처럼 희망이 없는 곳이 아니고, 그래도 교회가 천국을 찬양하는 유일한 희망임을 뒤집을 순 없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회개할일 많고 더욱 사명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나아가야한다. 하나님은 왜 이 세상에 예수를 내려보내 구원의 작업을 하셨는가. 우리는 예수를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를 알지 못하면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의 주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은 예수구원의 복음을 알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 십자가의 본체임을 이해 못한다. 예수를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었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교회만이 하나님을 즐길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와서 보라, 와서 들어보라(요1:39)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니(마1:13), 세상의 신뢰도가 추락할지라도 우리의 사명은 오직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사랑과 구원의 키워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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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1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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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안동철 목사] 성도의 슬기로운 명절 생활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 친척을 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이 성도와 가정을 공격하는 ‘특별부흥회’(?)로 모이는 때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런 명절을 전후에 위기를 맞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우리 가정을 깨뜨리려는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명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 몇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문화로, 유교, 특별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의 500년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을 살펴보면 거짓과 신분 상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결탁된 제도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나아가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할 것을 명령합니다(출 20:12).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되, 당당히 대처하십시오. 둘째, 명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의 해설서인 <미드라쉬>에 의하면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말하는 사람,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명절 생활을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정치 이야기, 돈 이야기, 신변잡기 이야기, 결혼과 취업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명절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는 말입니다. 셋째, 명절 일은 함께 분담해서 해야 합니다. 명절의 많은 일들을 여성에게만 맡기고 남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어른과 아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차별이 없음을 선포합니다(갈 3:28).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엡 2:22). 그렇기에 모든 명절 일은 분담하여 함께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더욱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선물을 보내거나 따뜻한 문자를 보내봅시다. 병원에 있는 분들에게 사랑의 전화를 합시다. 고향교회를 방문하여 축복하고, 헌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한국의 도시교회는 시골교회의 눈물과 희생으로 세워진 것을 잊지 마십시다. 행복한 설명절,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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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박봉석 목사] 깊은 곳과 오른쪽
    신약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것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타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였고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은 21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난 후에 실망하여서 원래 자신들이 하던 어부의 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몇 명의 제자들은 밤 시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역시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제 아무리 뭔가에 대해서 뛰어나고 탁월하다 해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그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 역시 그대로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곁에서 보았던 갈릴리의 다른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부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건을 보고는 “나도 이제부터는 깊은 데로만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어부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 부활 후의 사건을 보고는 “나는 이제부터 배 오른편에만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만일에 진짜 이런 결심을 한 어부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 던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던지라는 곳에 던진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인데 오히려 그물을 던진 장소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데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른편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나라 기독교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험한 신앙체험이 진리가 되어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병든 사람이 어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여서 병이 나았더라는 소문이 나면 그 기도원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나음을 얻은 것인데 오히려 기도한 장소가 마치 성지처럼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십자바위(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산의 한 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서 아들의 취업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다면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뭡니까?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기도한 장소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독자 여러분, 어디서 기도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언제 기도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지침과 방법을 잘 배워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 약속대로 응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로만 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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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5: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의 고찰
    I. 서언(序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올해도 벌써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런 날들이 되면 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든 그 날에 대한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는 당시 부모님들이 불신자였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일들이나 믿음에 배치되는 세시풍속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갈등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짝 믿음을 가진 현재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은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II. 설날의 유래와 어원과 뜻 1. 뜻과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도 한다. 또한‘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란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여 지기도 하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 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첫발을 내 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설날을‘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의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유래: 설날의 유래에 관하여는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로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든 때부터 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해의 시작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아 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든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로 정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III.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은 주로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일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사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죽은 조상제사(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로 바뀌어졌다. 이는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한 것이다. IV. 결어와 제언 이상에서 논한 설 명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 먼저는 앞에서 논한 대로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될 것이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할 좋은 미덕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속 많 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주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성도들에게 더 이상 고민과 갈등을 주는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가족과 일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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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1)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의 생각을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생각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사로잡으려하는 죄의 법에 묶이면 안 된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그 실패의 생각을 묵상하지 말고 회개한 후 영의 생각을 더 깊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예수님은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소원하신다. 주님과 부부로 사는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삶이다. 당신은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커지는 것만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믿고 살 때 초자연적인 역사도 현실로 나타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다르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주님을 믿는 말이다.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이여야 한다. 여러분은 죄에서 벗어났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가 단순히 죄일 뿐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은 죄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죄는 죄 일뿐이다. 죄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다. 죄는 죄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우리는 생각이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더 어두워진다는 착각한다. 아니다. 세상은 나쁜 일을 더 하기 때문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좀 착한 일을 하면 조금 밝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착한 일을 하고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밝아진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 거듭남으로 의인이 된다. 어떤 착한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대하는 경우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은 그 사람의 생각에 있다. 믿음의 성장은 생각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영의 생각을 하라.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훈련은 생각의 훈련이다. 생각차이가 믿음 차이다. 영의 생각이 중요하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생각 속에 말씀을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주님이 이른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 무익한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 할 수도 없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며 선포하며 나의 것을 심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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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태열 목사] 작은 자에 대한 관심
    신부이며 작가인 H. Nouwen(1932-1996년)은 현대인의 불행은 무관심과 분노에서 온다고 하였다. 어떤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의 양이 낙오가 되었다. 내버려두면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남아 있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것이 길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있었다. 99마리의 양이 있다고 위안을 삼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하나에 관심을 쏟는 것을 비판하고 분노해 버린다. 하나 때문에 전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를 쉽게 포기한다. 사람은 숫자에 매인다. 긍휼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불행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그 하나에 있었다. 이는 숫자의 개념도, 재산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다. 현대인은 어느새 물질화, 물량화, 숫자화, 경영화 되어 하나를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회가 살벌해진다. 목자는 무리를 떠난 양에게 정죄와 책망,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멜로 영화의 고전인 러브스토리에서 여자주인공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단절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화해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주변 환경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한 마리의 양은 이유야 어떠하였든 목자와 무리를 떠남으로 길을 잃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을 필요가없다.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랬느냐? 그러면 되겠느냐며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건과 까닭을 묻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 떠나, 유흥비로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은 이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동네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사랑한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가 회개할 때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관 현장에서 그 모습대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면서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죄인이 죄인과 함께하면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지만, 의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4절에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드시고, 사랑한다. 마태는 훗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부모는 병들어 아파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듯,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병든 영혼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다.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지극히 작은 소자들,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까지라 하였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헤매시고 찾아서 벗들과 함께 기뻐하는 목자,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목사인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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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조희완 목사] 성장의 기쁨 (벧전2:1-10)
    성경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127:3) 그런데 저는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난산에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보통 첫 아이가 태어나면 기쁘다는데 저는 몸무게가 2kg도 채 못 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은커녕 이 아이가 과연 살 수 있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아이를 넣어야 하는데 그 당시 제가 가난한 신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저의 형편을 알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믿음으로 키우라고 했을 때, 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과연 살 릴 수가 있을 것인지 몹시도 걱정이 되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을 알고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말 눈물의 기도로 키웠습니다. 우유를 먹일 때마다 혹시 이 아이가 숨이 넘어갈까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의 몸무게가 드디어 2kg을 넘어설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쁘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들은 태어날 때 몸무게가 3kg이 넘지만 우리 아이는 태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몸무게가 3kg을 넘어섰을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은 키가 169cm나 되는 큰 아이로 자랐고,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대견한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버릴 것을 버려야 믿음이 성장합니다.(1) 둘째로, 먹을 것을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2) 셋째로, 힘쓸 것을 힘써야 믿음이 성장합니다.(9)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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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최호숙 목사]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우리는 보통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면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는 표현을 한다. 그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나는 2022년 한해였다. 정치적 혼란과 교계적으로 교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위축되고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달려온 영적 위기의 한해였고 경제적 곤핍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달려온 한해였다. 이제는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듯 이 땅에도 시온의 영광이 밝아온 것이다. 영어에서 정월을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로마의 쌍면신(神) ‘야누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로마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을 수문장으로 세운다. 뒤에 있는 얼굴은 지나간 해를 돌아보는 회고(回顧)의 얼굴이요, 앞에 있는 얼굴은 새해를 전망(前望)하는 계획의 얼굴이라고 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와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한국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영국 속담에도“시작이 좋으면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격언이 있고, 독일 격언에는 “입구에 들어서는 첫 발자국이 가장 힘들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는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벌써 첫발을 내디뎠다. 로마인들처럼 야뉴스 신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초장에 홍해의 장애물이 놓였던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순탄대로만 있을 수 없다. 홍해가 있고, 광야길이 있고, 춥고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현실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해야 한다. 아직도 마음과 삶에 시작이 없다면 2월이 오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 없는 끝은 있을 수가 없다. 광야 길 출발이 있어야 가나안 도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한 힘찬 출발이 있어야 도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 또한 우리는 한 해를 걸어가면서 성경(聖經)을 성경(聖鏡)되게 하여야 한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성경을 단순한 인생 교양을 위한 글(經)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영혼과 육신의 거울(鏡)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으면 내 삶 속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며 영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면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했으면 사랑의 폭이 넓어져 가야하고, “화 분내지 말라” 했으면 자기 절제 통제가 필요하며, “교만하지 말라” 했으면 하나님 앞에 교만을 버려야 하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했으면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하였다. 삶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새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는 2023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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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8
  • [박동철 장로] “죄와 벌”, 정말 양심이 움직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고전 명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제목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쾌하다. 죄에 따르는 벌과 이를 넘으려는 심리의 갈등을 그린 세계명작이다. 스토리를 논하기는 여백이 부족하여 제목이 던지는 직관적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람이 지은 모든 명작을 넘은 성경에도 ‘죄와 벌’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 인간에게 던진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세상의 죄를 찢어버리는 거대한 함의가 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하신 모든 일은 세상 구원을 위한 헌신이었다. 그리고 죗 값의 벌(罰), ‘죽음’이었다. 바로 사람의 죄로 인해 멸망해버린 세상의 죄를 ‘십자가 벌’로서 해결한 것이다. 예수는 그 긴 여정 33년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철저히 처벌받은 것이다. 마지막 남긴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거룩하고 거대한 음성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죄 사이에 있는 억만의 골을 인간이 벌로 해결할 수 없으니 당신이 스스로 벌을 받음으로써 ‘죄’가 해결되는 역사(役事)가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와 세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죄와 벌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토막이 있다. 19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47년 사망한 미국 정치인이자 법조인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이야기다. 라과디아가 판사로서 법조인 시절 재판 과정에서 눈물겨운 아름다운 판결을 내린다. 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기 위해 가게서 빵을 훔친다. 그리고 법정까지 오게 된 할머니에게 라과디아 판사는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판결한다. 그리고 벌금 10달러는 판사인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따라붙는 판결이 중요하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날 할머니 벌금 판결에 참석한 검사 변호사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 50달러를 선고한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죄가 있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죄와 벌’에 대한 양심이 주체할 수 없이 작동한 아름다운 판결이다. 이 판결은 긴 역사 동안 회자되며 죄와 벌을 해결하는 양심의 판례가 되고 있다. 죄와 벌에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해결한 하나님의 판례를 보고 우리는 최소한 양심의 작동을 살려내야 한다. 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 말이다.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서 죄와 벌을 위해 거대한 사회 작동이 움직이고 있다. 많은 법정이 성수기를 맞은 듯 오일장날처럼 복잡하다. 그중에서도 온 국민의 시선을 끌고 있는 한 국가지도자의 죄와 벌을 두고 국민을 피곤케 하는 다툼이 가관스럽다. 판사의 마지막 판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나 죄와 벌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도 작은 양심의 작동으로 나타나는 순리가 작은 아름다움이다. 검사와 판사가 공히 ‘죄 의혹’에 따른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데, “그건 조작이요”하고 진영 스크럼을 짜고 정치인 특유의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은 너무 가관이다. 차라리 이건 분명 사실이 아니고 이건 잘못이 있으니 공직은 내려놓겠다는 정도의 양심 작동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거대하게 보이는 듯한 정치적 방패를 만들다 썩은 동아줄처럼 국민을 위한 정당정치마저 허물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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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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