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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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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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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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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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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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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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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바란다!
    경남기독신문 독자들 중 혹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 당시에 ‘Again 1907 in Seoul - 서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되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이명박 전 시장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서울시 교통체계개편에 따른 혼란과 함께 이 시장을 이중으로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장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는 내용의 봉헌서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 일동’의 이름으로 낭독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네티즌들의 비난이 봇물을 쳤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 시장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정치인들은 호기를 놓칠세라 무참한 정치적 일격을 가하였습니다. 당시에 유인태 의원은 “그나 저나 서울이 이제 하나님 것이 됐으니 수도를 옮기긴 옮겨야 겠어요”라고 정치적 폄하 발언을 하였고, 임채정 의원은 “사람 땅으로 옮겨야지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배기선 의원은 “아니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좋은데 왜 자기 것도 아닌 걸 바친다고 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급기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이 시장의 발언이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성숙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언론계와 정치계와 종교계를 망라한 우리 사회 전반이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것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의연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기도집회는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 사회가 복음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하면서 기독청년들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는 순수한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은 행사 주최측이 작성한 내용을 주최측의 요구로 그대로 읽었을 뿐입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서울 봉헌서’의 내용을 처음 본 이 시장이 그대로 낭독하겠다고 동의한 것도 집회 자체가 정치적인 모임이 아니라 기독청년들의 순수한 기도 모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봉헌서의 내용도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관과 문화가 도덕과 윤리적 가치 차원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공통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표현도 서울 시장으로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말고, 서울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데 진력해 달라는 기독청년들의 마음을 서울 시장에게 전달하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건을 다시금 회고해 보면서 진솔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임이나 연합 집회를 정치화하거나 이벤트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이웃의 죄와 허물로 인해 애통하며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제사장의 모습과,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며 공의를 요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종교적 행사를 통해 권력자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잘못에 면죄부를 부여해주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이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서울시 봉헌사”를 낭독한 이명박 장로가 혹시라도 당시 행사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한 정치인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표를 몰아줄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찬기도회 개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하는 고민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건전한 사회 질서와 건강한 사회라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종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Mouw)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 지상에서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월터스톨프(Wolterstorff)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기독교화해야 하는 ‘성례적 사회’(sacral society) 또는 중립적인 삶에 종교를 추가하는 ‘중립적 사회’(neutral society)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헌신된 다양한 집단과 기관이 공평하게 취급을 받는 ‘다원주의적 사회’(pluralistic society)를 추구해야 합니다. 당시 서울 시장 이명박 장로의 서울시 봉헌 발언이 정치판에서 필요이상으로 폄하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은 물론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후보들의 인물됨과 자질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왜곡, 거짓 선동, 음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정치가들도 이제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통해서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제도교회의 문턱을 넘어 공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정책으로 구현해내어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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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오성한 목사] 내 이름을 더 많이 불러 줄 수 없겠니?
    걸어가며 주님께 하소연했다. “주님, 제가 기도할 때 듣고 계신 건가요?” 즉시, 마음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성한아, 듣는단다. 너는 내가 너의 음성을 듣는지, 안 듣지, 헷갈리지만 나는 늘 듣고 있단다. 네가 안 듣는 것 같이 여길 때도 듣고 있단다. 그런데, 성한아, 나는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감격한단다.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온몸이 절여져 온단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너무 좋단다. 나는 네가 너무 좋단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전율이 온단다. 성한아, 성한아, 더, 더 많이 나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겠니?”라고 하셨다. 나는 길을 가다가 한 쪽에 서서 엉엉 소리 내어 한참 동안 울어 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왜 우는지 몰랐을 것이 틀림없다. 들려주신 음성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다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다. 저절로 화답이 나오게 되고 천사들과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다. 내 안에 잠자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 후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난 울보인 것 같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나를 만들어 주심을 고백할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난다. 쾌활하고 명랑하다가도, 혼자 있을 땐 많이도 울곤 한다. 주님이 좋아서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난 주님이 너무 좋다. “주님,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라고 말하면 운다.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그렇게 좋으시다고 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이다.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자. 주님을 불러드리는 것이 주님을 감동을 드리는 일임을 믿음으로 알고 사랑을 고백하며 자주 주의 이름을 부르자.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자. 약속을 붙잡고 많이 기도하자. 자신에게 기도한 것을 선포해 주며 응답 되었음을 말해 주자. 그때마다 임마누엘의 열정이 넘쳐날 것이다. 복음증거를 위해 사는 인생 속에 표적과 기사로 더욱 확증해 주실 주님을 찬양하며 확신하자. 영감으로 깨닫게 해 주신 말씀이 많아지도록 말씀을 주장하고, 내세우자.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인정만 한다면 표적과 기적을 삶은 시작된 것이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노라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0:10 참고). 예수만 믿으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른다. 예수만 믿으면 아들이 있는 자가 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5:12 참고). 다른 것을 더 보태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예수 안에 산다. 그래서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빌립보서 1:6).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요한복음 6:32 참고). 우리에게 예수 생명이 있다(요한복음 일5:12).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이 있다(고린도후서 5:17 참고). 우리는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요한복음 14:20 참고). 주님은 어떤 문제보다 크신 분이시다. 당신이 날마다 영감을 받고 산다는 것을 발견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라.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관두게 된다. 성경은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말씀하신다(고린도전서 13:12 참고). 장성한 자가 되면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나 자신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아시는 나는 어떤 나일까? ‘온전한 나’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천국에서 생길 일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게 되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할 때,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만족이 넘쳐 안식하게 된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전적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만 돌리게 될 것이다. ‘온전한 나’를 발견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얼마나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으며, ‘온전한 나’를 만들기 위해 하신 일이 목숨을 버리셔야만 했다는 사실 앞에 영원히 찬양하는 힘이 생겨 버릴 것이다. 목숨을 바쳐 건져 낸 자녀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은 감격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 일은 먼 훗날 육신의 몸을 떠나 천국 가서 일어날 일이 아니다. 천국 가서가 아닌 지금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면 된다. 바로 이 시간부터 영원히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자.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주님께 감격인 줄 알고, 주님의 이름을 자주자주 많이 불러드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만들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2:21)라고 하심은 주의 이름을 불러드림이 얼마나 주님께 감격이심을 표현하신 말씀이다. 십자가를 지신 후 주님의 이름만을 불러 달라고 하신다. 그러면 구원받는다고 오늘도 눈물 어린 눈으로 주님의 이름을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신다. 모든 역사의 중심축을 십자가를 지기 위해 맞추시고, 전력을 다하셨던 주님은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만을 간절히 기다리시고 계신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6-47)라고 소리 지를 때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라고 했지만,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가복음 10:48)라고 부르짖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언제였던가? 지금도 이렇게 주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다 하신다. 십자가의 고통을 고통이라 하지 않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두시고는 “나의 이름만 불러다오”라고 하시며,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의 이름을 많은 사람이 불러드리도록 목숨 바쳐 세상 끝날까지,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전심전력할 것을 결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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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8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최근 신실한 교인이며, 대권 주자로 부각되는 어떤 유명인사의 부친상에서 삼우제(三虞祭)란 용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적 장례 용어로 적합한가를 잠시 생각한 적이 있다. 문제 있는 용어지만, 현실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먼저는 성경에 나오는 장묘문화와 용어 정립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면서 이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 밝힌 대로 여기에 대한 신학적 정립은 한계가 있다. 이에 지난 호부터 저명한 구약학 교수이며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을 축약해서 연재했고, 앞으로도 몇 차례 계속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시대에 따른 성경의 장묘문화 고찰(2) 김 교수는 인류의 시대적 구분에서 이스라엘의 장례의 역사를 이렇게 나누었다. 먼저 지난 호에서 언급한 1, 2항을 다시 논하고, 계속 3항 이하를 축약하거나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매장은 옆으로 웅크린 자세와 두개골만 하기도 했고,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여성의 경우는 가공된 장신구들도 함께였고, 모든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기도 했다. 3. 신석기 시대(주전 8,300-4,500 년경): 고인돌(dolmen) 무덤 양식이 출현한다. 또 여리고 지역에서는 가옥의 터 아래에 유골들을 매장했다. 4. 동석기 시대(주전 4,500-3,100 년경): 팔레스틴 해안지역에 새로운 장묘문화가 생겨났는데, 토기로 가옥을 본떠 만든 뼈 상자에 유골을 담아 사암(砂巖)벽을 판 동굴에 보관했다. 또 큰 옹기에 시신을 넣어 가옥의 터 밑에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초기 청동기 시대(주전 3,100-2,200 년경): 무덤이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졌는데, 주로 석회암 층에 수직갱도를 만들고 다시 옆으로 원형 또는 사각형의 묘실에 이르는 구조를 보여준다. 부장품으로 다양한 토기그릇들이 있고, 그릇에는 음식물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다. 6. 중기 청동기 시대(주전 2200-1550 년경): 여러 형태의 무덤 양식들이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묘실을 만들고, 시신은 돗자리 같은 깔개나 나무 판자위에 반듯이 뉘었다. 비녀나 머리핀들이 발견되며, 다양한 일상적 도구들도 볼 수 있다. 또 바위를 직접 파서 묘실을 만들기도 했다. 보통 한 무덤에 40구까지 사용했으며, 매장할 자리가 없으면, 이전의 시신 유골은 한쪽으로 모아 쌓아 두기도 했다. 이 시대의 특이한 것은 봉분을 갖춘 무덤양식도 나타났다. 시신을 매장한 뒤 흙과 돌로써 높이와 지름이 각각 3-4m 되는 봉분을 쌓았고, 다수의 토기들과 무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7. 후기 청동기 시대(주전 1,550- 1,200 년경): 수직 또는 경사진 계단식 갱도를 입구로 하여 묘실로 연결되는 무덤양식이 보편화되었다. 하나의 묘실은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많은 토기류가 부장품으로 드러났다. 8. 철기시대(주전 1,200-600년경): 과거에 사용되던 자연 또는 인조 동혈이나 석실묘가 재사용되었다. 이 시대의 새로운 발전은 여러 개의 방을 갖춘 묘실로서, 지상에서 지하로 계단을 만들어 전실(前室)에 이르고 여기서 여러 묘실들로 연결된다. 묘실은 그 벽면의 둘레에 유해를 안치하는 대(臺)를 만들었고, 어떤 묘실에는 대 대신 벽을 파서 그곳에 유해를 안치했다. 이러한 석실묘 형태가 제2 성전시대 가장 일반적인 무덤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들은 석실묘를 사용하지 못하고, 평토장을 했다고 본다. 9. 바벨론 포로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주전 600-주후 70년경): 바벨론과 페르시아 시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고, 부장품들을 통해서 그 시대를 알 수 있다. 주전 3세기 헬라시대 부터는 카타콤(the catacomb)방식의 무덤형태가 새로 나타나며, 여기에는 무덤비문과 벽화 장식도 등장한다. 로마시대 이후 예루살렘 주변 무덤들에서는 석회암으로 만든 수많은 직육면체 유골함들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유해의 살이 다 내린 다음 유골을 수습하여 보관한 것이다. 여기에는 피장자의 이름과 함께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 무늬가 새겨져 있다. III. 중략하고 맺는 말 전 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김 교수는 그의 논고의 서론에서“성경 전체를 통해 장묘문화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각기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었고,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본다.”고 솔직히 밝힌바 있다. 본 호에서의 그의 연구에서도 역시 그러한 면을 밝히고 있다. 이는 앞서 논한 바 있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동서양의 장묘문화와 비슷한 경로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상과 같은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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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8
  • [김병환 전도사] 사회 전반에 스며든 이단(異端)과 사교(邪敎)의 그림자
    이전 글에서는 기독교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통○교’가 “정치와 언론”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기업·의료·문화·예술·교육·봉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통○교의 모습을 밝히고자 합니다. 통○교는 리조트와 여행사, 건설·식품·제조·출판 관련 기업들을 운영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정보들은 여러 언론이나 경제 전문지에서 이미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교는 문화·예술 단체와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도 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 단체에는 리틀 엔○○ 예술단, 유○○설 발레단, 청○평화월드센터가 있으며 사회복지 관련 분야에서는 자원봉사 단체인 애○, 의료법인인 청○병원, 실버타운인 청○ 빌리지와 함께 여러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선○대학교, 청○국제중고등학교, 선○화예술고등학교, 선○여자중학교, 선○유치원, 선○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분야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통○교 관련 신학교를 국내(선○대학교, 선○UP대학원대학교)와 해외(미국 통○신학대학원-UTS)에 설립하여 오랫동안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관련 교단과 단체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에 침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단과 단체가 있는 한국 기독교 현실에서 통○교뿐만 아니라 이단 단체가 설립한 위장된 교단과 단체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설립되는 기독교 교단과 단체의 성격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인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통○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쉽게 부딪힐 수 있는 다양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가 설립하고 관여하고 있는 다양한 분야의 기업과 단체는 서로 연결점이 돼 통○교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주요 언론과 기독교 언론들을 통해 보면 통○교는 사회 전반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통○교의 모습이 한국교회에 주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이미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된 통○교의 기업과 문화·예술·교육 단체들은 사회적 이해관계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러한 통○교의 영향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자칫 잘못 대처하면 법적소송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교회의 오랜 무관심과 우리의 안일한 사회적 이해관계가 신앙의 후배와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뼈아픈 현실을 물려주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회복함으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실 된 사랑을 이웃과 나누고 전하는 모습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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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3
  • [박봉석 목사] 진짜 문제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촌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기잡이를 나간 배가 있었는데, 밤이 늦도록 돌아오질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걱정이 됩니까? 온 동네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서 설상가상으로 어느 집 아이가 촛불을 넘어뜨려서 한 집에서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완전히 울상이고 혼비백산이었습니다. 배는 놔두고 그 불을 끄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힘든 밤이었고 그러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저 멀리 그렇게 고대하던 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그 배를 발견하고 “배다. 배가 온다!”라고 소리를 치자 모두가 바닷가에 나와서 그 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배를 탔던 뱃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젯밤 바다에 뜻하지 않는 풍랑이 일어서 배가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먼 육지에서 큰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불빛을 보고 육지가 저기구나 생각하고 항로를 바로 잡고 이렇게 육지로 무사히 올 수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불난 집이 풍랑을 만난 많은 뱃사람들을 살린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우리는 우리 앞에 일어나는 한 가지 일만을 바라보고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큰일이 났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렇게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달라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저 천국을 주실 하나님만이 아니라 지금 실제의 삶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의 단면만을 보면 시험이고 문제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안에서 볼 때는 더 크고 놀라운 선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며, 그것을 믿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는 것입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그런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자 그만 호들갑을 떱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난리가 났습니다.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주여 일어나소서. 우리가 다 죽겠나이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전부 다 죽은 것처럼 호들갑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큰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 생각과 주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애에서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어떤 삶의 경우에도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선택하시고 구원하셔서 자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나는 그 어떤 사람이나 사건이나 상황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를 유익되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그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결코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길,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삶의 상황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믿음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담대히 이 세상을 살아가시는 독자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본지 590호 게제된 박봉석 목사님의 칼럼 <진짜 문제는?>의 원본으로, 첫 문장에 편집상의 오류로 수정해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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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9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인간의 삶은 어떤 면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또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는 깨어있는 대부분 시간을 일하는데 보냅니다. 남자거나 여자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받지 못했거나, 부유한 자거나 가난한 자거나 간에 우리 모두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전형적인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렇게 유쾌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이라는 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존엄성과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약이라는 것이 쓴 것이기는 하지만 건강을 얻는데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이라는 것 역시 유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는데 반드시 필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일 그 자체의 가치만을 가지고 일할 필요를 느끼거나 일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현대인들이 일을 하는 것은 돈을 필요로 하거나 돈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음식, 의복, 가옥, 오락, 휴가, 안전, 은퇴 후의 안락한 생활 등을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일은 필요하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스럽고 끝없는 질병과도 같은 노동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과 관계하여 우리가 듣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는 오늘 일해야 한다!”는 말이지, “나는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며 영적인 활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일을 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은 일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의 신은 일을 하는 신이 아닙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은 위대하고 무한한 사상가일 뿐입니다. 플라톤의 신은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아니라 단지 계획했을 뿐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는 귀족이며, 사상가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일을 천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높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교적인 헬라적 태도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기는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하셨으며,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불법적인 파업이나 명퇴나 조기 은퇴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 세계를 섭리하고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유지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구속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보혈과 빈 무덤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중생과 성화, 그리고 영화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하여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의 존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은 일의 존엄성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존엄성을 가졌던 일(work)이 이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labor)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이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은 이제 인간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요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에 새로운 활력과 존엄성을 부여해 주셨으며, 일을 한다는 것이 다시금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소명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일을 할 때 우리 모두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로서 이제는 단순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명자들이 되었다는 사실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일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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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절실한 의문이요 관심사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란 대 명제일 것이다. 이에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으나, 이보다 우선 되어야 될 것은 장례 용어에 대한 역사와 그 문화적인 배경이 먼저 일 것 같았다. 이에 그동안 장례문화에 대한 동서양과 성경역사적인 고찰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계속 이에 대해서 논해 오고 있다. 이번 호부터는 성경 속에 나오는 장묘문화에 대한 역사를 논하면서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적 고증이나 신학적 연구와 분명한 장묘에 관한 구체적 예식에 대한 선행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 필자도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장례용어에 대한 기고와 강의도 많이 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이렇게 많지 않은 연구 속에서 구약학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진해교회 출신인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은 정말 반가웠다. 이에 김중은 교수가 연구한 내용을 축약하고 여기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3~4회 정도 피력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적 장묘문화의 서론 신구약 성경 본문에는 장묘문화에 관해 상세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로써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한편 지난 19세기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성서 고고학 발굴의 결과로 성경의 역사현장인 가나안 지역과 고대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무덤들이 발굴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인들의 무덤과 이방인들의 무덤이 확연히 구별될 만큼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무덤, 유해나 유골의 형태, 부장품들을 보아서 그 민족이나 종교적 특성을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지식만으로는 이스라엘 장묘문화의 특징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성경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야훼 유일신 신앙과 큰 갈등 없이 가 시대마다 고대 가나안과 그 인근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묘문화에 동참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경본문이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는바 나름대로 신앙생활과 연관하여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장묘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신 14:1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또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의 장례법”이 있었고, 예수의 시신도 이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요 19:40 참조; “... according to the burial custom of the Jews", NRSV).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나름대로의 장묘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 글에서는 신구약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중심으로 살표보는 데에 국한하기로 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각 시대에 보편적으로 공유했다고 생각되는 장묘문화에 관해 성서 고고학적인 견해를 요약해서 살펴본 후,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례문화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고자 한다. I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시대의 보편적 장묘문화 고찰 전통 민속신앙과 근대로 오면서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의 상례(喪禮)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장묘문화의 방식과 절차를 볼 수 있다: 1)초종(初終) 2)습(襲): 소렴(小殮)과 대렴(大斂) 3)성복(成服) 4)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 5)치장(治葬)과 천구(遷柩) 6) 발인(發靷)과 반곡(反哭) 등 여기에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제사절차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신구약 각 시대에 이러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다. 다만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에 따라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는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시신을 지하 구덩이에 넣고 그위에 돌들을 얹어 놓는 형식이며, 시신은 무릎과 양손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린 자세이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에는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시신은 옆으로 눞여 웅크린 자세가 나타나며, 두개골만 매장한 경우도 있다. 매장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피장자가 여성일 경우는 조개껍질, 뼈, 돌로 가공된 장신구들이 함께 드러난다.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었다. VI. 중략하고 맺는 말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한다. 여기까지 볼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저명한 구약 학자이지만, 여기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솔직한 지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진정한 우리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되겠다는 많은 이들의 학구적인 사명감이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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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박동철 장로]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을 아십니까?
    해군 모든조직에 기독교정신으로 군가 만들고 군목 제도 창설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 남녘 진해 바다를 바라보는 기슭에 손원일 선교센터(다락방)라는 조그만 문패와 함께 낡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지나가는 왠만한 사람도 알지못하는 생소한 손원일 다락방이란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안고있는 보이지 않는 내용을 알고보면 기독교인으로서는 놀랄수 밖에없는 한국 군선교의 살아있는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1945년 8월15일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고 한국 군선교의 꿈이 이뤄져 오늘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바로 한국 해군의 창설자이자 군선교의 대부 손원일제독의 복음 사역의 숨결이 있는곳이다. 손원일 제독은 목회자이자 일정때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목사의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은 군선교로 이뤄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있었다. 손원일은 신앙교육과 해외유학 등 학습을 마치고 향후 나라의 미래는 해양에 있다고 판단하고 꿈을 꾸어왔다. 그래서 무역업을 시작했으며 일제말에는 실업인으로 성공한 손원일은 해방과 함께 뜻있는 사람들과 해사대를 조직하고 사재를 들여 대한 해군을 창설한다. 평소 아버지 손목사로부터 배움받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의 깊은 애국정신으로 대한 해군을 창설키로 한 것이다. 당시 미 군정과 협의하여 1945년11월 해방과 함께 급속하게 추진하여 오늘의 해군 전신인 해안경비단을 창설, 단장을 맡게된다. 18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사람이 손원일 제독이다. 손원일 제독의 해군 활약상은 우리나라 군역사에 길이 남아있어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초대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모든 분야분야에 기독교 정신을 담아 군조직을 하고 부인되는 홍은혜 권사와 함께 사재를 털어 군조직이 기독교정신으로 발전하도록하는데 온몸을 헌신했다. 해군조직이 취약할 때 음악을 전공한 홍은혜 권사가 기독교 정신으로 많은 군가를 작곡하여 부르게했다. 손원일 제독이 이같이 기독교바탕에서 해군을 일으키게 된 것은 아버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훈련에서 알수가 있다. 손정도 목사는 일정시대 유교의 가문에서 과거를 통한 벼슬을 꿈꾸었으나 복음을 받고 급격히 회심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한다. 일정시대 목회를 하는 동안 하나님 사랑은 나라사랑이라는 성경의 교훈에 따라 독립 운동에 참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대부가된 손정도 목사의 맏아들 손원일 제독은 해군 창설과 함께 해군사관학교를 세우고 모든 군 조직에 군목을 두고 군 선교를 제도적으로 국가가 허락하도록 하는데 초석을 낳은 인물이다. 바로 이러한 손원일 제독의 군 선교 정신을 기리고 실천하고자 지난 1974년 10여 명의 해군의 크리스찬 후배들이 기금을 모아 해군의 중심 진해 제황산 기슭에 손원일 다락방을 세우게된다. 그동안 40여년동안 손원일다락방은 먼 바다로 나가는 군함과 잠수함에 승선하는 장병들을 위해 소그룹 크리스찬 리더를 양성하는 선교 센터를 조용히 운영해왔던것이다. 최근 손원일 선교센터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건물이 낡아 새롭게 재건축해야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동안 해군 장교 후배들이 손원일 선교센터를 재단법인으로 만들고 해군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계획이 구체화 하고 착공의 즈음까지 진척되고 있어 하나님께서 참 기뻐하실 일일 것 같다. 필자는 몇 년전 CBMC(한국기독실업인회)를 섬기던 때 재단법인 손원일선교센터 이사장 김덕수 장로(해군 예비역 소장)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당시 경남CBMC연합회가 함께 기도하기로 했는데 그동안 재단법인 김 이사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눈물겹게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제 전국 곳곳에서 크고작은 기부금을 보내와 곧 재건축의 첫 삽을 뜨게 된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6월 15일 오후 한국군선교회 경남지회장 이상영 목사(명곡교회)를 비롯 지역 교계 지도자들과 해군 관계자들이 모여 기존 건물 철거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참 선하고 선한 사역임이 분명하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청년들이 줄어들고 있고 군선교의 길이 막혀가고 있는 때이다. 우리는 이때야말로 우리 지역에서 펼쳐지는 해군 선교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군선교의 산실이 되어온 손원일선교센터가 재건축될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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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자신의 확고한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도 성도들의 입에서는 너무도 쉽게 “주여!”라는 말이 어쩌면 습관처럼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할 때는 아마도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속해 주신 ‘구주’(savior)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이제는 그분이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lord)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이와 같은 고백은 모든 신실한 교회와 성도들의 핵심적인 고백이며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맥락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맥락입니다(빌2:2-4). 빌립보 교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 사랑은 공허한 감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모양을 가지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의 유익을 생각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나의 유익으로 삼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이란 단순히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의 삶을 구체적이며 실천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분을 향한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작용하게 되고, 이 사랑의 마음은 곧 종의 봉사라는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종이었던 그분이 이제 승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종 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습니다. 종이 주인이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무릎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며,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도록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맥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 중요한 문제를 지나치게 주관적인 의미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그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to make him Lord in our lives)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것 또는 저것을 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주인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는 주’(Christ is Lord)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인정하며 고백할 때 우리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가장 분명한 생각을 우리는 그의 또 다른 서신인 에베소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20-23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권위를 다스리게 하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그 어떤 구조도 더 이상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신다고 우리가 고백할 때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바울이 추가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저해하는 모든 능력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 사랑으로부터 살아가는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능력이 파괴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삶은 바로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의미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시도록 우리의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이미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예수는 주’라고 하는 그러한 고백은 피상적인 입술의 고백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한다면 교회는 진정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밝혀주는 샬롬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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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 [박봉석 목사]낙타의 하루
    사막을 오가는 상인들은 낙타를 운송 수단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또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동이 트고 하루를 시작할 때 낙타가 무릎 꿇고 기다리면 주인은 그 낙타의 등에 그날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을 얹어줍니다. 그리고 주인이 일으켜 세우면 낙타는 비로소 일어섭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끄는 대로 오랜 사막의 여정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또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등에 짊어진 짐을 주인이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낙타의 하루는 무릎으로 시작해서 무릎으로 마칩니다. 낙타는 압니다. 무릎을 꿇어야 짐이 오르고 내려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도 압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낙타가 짐을 얼마나 짊어질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낙타가 짊어질 수 있는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사막을 건널 때 홀로 걷지 않습니다. 늘 주인과 동행하며 걷습니다. 주인이 인도하는 길로만 걸어가면 됩니다. 그렇게 사막에서 주인과 낙타는 늘 하나입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낙타는 주인이 자신의 등의 짐을 내려주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무릎을 꿇습니다. 주인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낙타를 수고했다고 어루만지며 그 짐을 내려 줍니다. 그 때의 낙타의 기분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낙타는 안식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이 낙타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가장 겸손함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할 때에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하루의 감당할 수 있는 삶과 사명의 짐을 우리의 등에 얹어 줄 것입니다. 사막 같은 인생길이지만 늘 주인 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니 두렵지 않습니다. 늘 그 분의 인도하심만 따라가면 됩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또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루의 삶을 함께 해 주신 주인에게 겸손함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그리할 때에 주인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의 하루의 삶과 사명의 짐을 벗기시고 편안히 안식하게 할 것입니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라고 네티즌들에게 물었습니다. 답변자의 55%가 “시원한 물을 마신다.”라고 대답했고, 이어서 38%가 “화장실에 간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합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가장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나보다 먼저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 마귀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은 나의 하루의 삶의 주재자와 인도자가 되어 주셔서 나와 동행하시고 나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 때에도 나의 하루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또 무릎 꿇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나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삶에서 승리하는 습관 그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또한 한 마리의 낙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만큼 성숙해지고, 기도한 만큼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늘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기도의 삶, 항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동행의 삶, 그리고 늘 마음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감사의 삶, 그 삶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낙타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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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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