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설교/강의

실시간뉴스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2-28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0) (민12:1-3)
    모세를 살리는 일에 직접 앞장을 섰던 미리암입니다. 항상 모세 곁에서 모세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미리암입니다. 모세가 비우고 간 40년의 세월을 선지자가 되어 메꾸었던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 대신했던 40년의 세월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미리암이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미리암은 무엇을 했을까요? 미리암의 비방은 순간 충동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제법 긴 시간 모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리암의 마음에서 원망과 불만이 싹트고 있을 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10가지 재앙으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왕도, 애굽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능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 일을 가장 학수고대했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40년 동안 여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모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돌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출애굽의 역사를 주도하자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게 됩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 이탈입니다. 사명의 대한 월권입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을 이탈과 월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세워진 완전한 이스라엘, 신약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역사에서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동일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일어났던 10가지 재앙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친히 이루시는 현장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감화 감동했던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펼쳐지는 반면, 한쪽 구석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행6: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은혜가 넘쳐나 완전한 출애굽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 다른 한 편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불신앙이 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희생하고 헌신하고 도움을 주는 쪽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을 받고, 혜택을 보고 있는 쪽에서 말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잘 아는 선지자 미리암이 말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라지만 너무도 많은 상황과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연약한 우리는 원망, 불평,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사건이 심각했던 이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키워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지도하는 모세는 단순히 모세의 방법, 모세의 통치가 아닙니다.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미리암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에 대해 비방하며, 정면 도전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리암의 비방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바로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막을 떠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이라는 심판, 진영으로부터 격리되는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자기 입안에 있는 자신의 혀도 씹을 수 있는 우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의견도 다양하고 의견이 다양한 만큼 주장도 다를 수 있습니다. 주장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하다 보면 분쟁도 생기고 간혹 언성도 높아집니다. 이럴 때는 너무 상대를 몰아붙이지 마십시다.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더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뜻이 모아지도록 노력하고, 뜻이 모아지면 함께 하십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데 딴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눈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자기 기준, 자기 생각, 자기의 입장을 따라 원망 불평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입니다. 크게 짓고 싶은 사람, 작게 짓고 싶은 사람, 높게 짓고 싶은 사람, 낮게 짓고 싶은 사람, 동그랗게 짓고 싶은 사람, 네모로 짓고 싶은 사람, 수많은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 하나 하나가 다 교회를 위하는 일이고, 소중한 생각들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들 때문에 교회 건축이 중단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런 결과를 도출해서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기적 같은 능력을 확신하며 온 성도가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교회 건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긁어 원망의 입을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토론하고, 논쟁하고, 의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날 때는 그 앞에서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말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말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1-23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1-19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9) (민12:1-3)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던 것이 아주 크고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이스라엘 진영을 떠나가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형 아론이 모세에게 와서 누나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여 모세는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주시는데, 7일 동안 진영밖에 가두게 하십니다. (민12:15)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미리암은 7일 동안 진영으로부터 격리됩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가두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세상에 있는 사람이 갇힌 것 같습니까? 빨간 날인데도, 공휴일인데도, 노는 날인데도 놀러 가지도 못하고 주일을 지키며, 교회로 와서 예배드리고 있는 사람이 갇힌 것 같습니까?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이 부분에 대해 참 많이도 오해한 것 같습니다. 성도가 교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갇히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성도에게 시벌하는 것 중 제일 무서운 것이 출교입니다. 출교란 불신자와 같이 인정하여 교인명부에서 제명하고 교회에 출석을 금하는 것으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중범죄자나 이단에 가입하여 돌아오지 아니한 자에게 과하는 시벌입니다.(예배방해, 교회분리)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곧 진영 밖에 가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출교보다도 이 시벌에 담긴 영적인 벌이 더 엄중합니다.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려 이스라엘 진영으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기에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로 들어오지 못하고 세상에 갇혔습니다. 교회와 멀어지면 자유로운 것 같습니까? 예배와 멀어지면 자유로운 것 같습니까? 성도와 교회의 모임에서 빠지면 자유로운 것 같습니까? 목회자와 멀어지고, 목회자의 권면으로부터 멀어지면 자유로운 것 같습니까? 영적으로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결코 기쁨도, 만족도, 평안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자유함과 평안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려, 격리되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교를 당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예배의 자리로부터 출교당하여 격리된 자는 그의 날들이, 그의 인생이 연기같이 소멸 될 것입니다. 그가 자랑하는 것들이, 그의 뼈가 숯 같이 타버려 산화될 것입니다. 마음은 풀같이 시들고 말아버릴 것입니다. 객기부리듯 큰소리치는 것은 탄식이 되어 살과 뼈를 말라 붙게 만들 것입니다. (시102:3-5)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코로나19의 경고 앞에서도, 코로나19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질병들의 출현 앞에서도, 내 곁에서 발생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들 앞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심판의 증거들 앞에서도, 정신 차리지 못하면 결국 완전한 출교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7일 동안 가두어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을 발견하게 하는 은혜의 심판이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7일이 지나 8일째가 되어야 복귀할 수 있습니다. 7일과 8일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요20: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을 뜻하는 구약의 7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인 8로 완성되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8일이 되어야 진영으로 복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묵상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8일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17: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왜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다가 할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살펴보다가 그렇다면 진짜 이방인이 누군가 하는 설교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십보라를 살펴보았고, 십보라의 등장으로 미리암의 비방까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8일, 할례, 이방인, 십보라, 미리암 등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요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정도 되면 할례를 행하여 남편 모세를 살린 십보라와 예루살렘까지 순례하여 예배드린 에디오피아 내시를 연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까? 교회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까? 세상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까? 말씀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까? 자기 자신이라는 바벨탑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까?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출교를 당한 상태는 아닙니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철저히 가리고 숨긴다고 하여도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는 사실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2-20
  • [성탄메시지] 입다의 서원과 딸, 처녀, 애곡 그리고 마리아 (삿11:34-40)
    보편적으로 사사기 11장의 내용을 입다의 무모한 서원으로 바라봅니다. 입다의 서원을 무모한 서원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잘못으로 적용하여 교훈 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어떠한 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행동이고,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거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하나님의 영을 입은 입다가 서원하게 되었습니다. (삿11: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한 후에, 입다는 서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신 제사를 금하셨는데, “어떻게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논쟁거리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특히 이런 장면들을 접할 때, 이런 기록, 이런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묵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입다의 서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대가로 입다의 딸을 달라고 하신 사건입니다. 아니 입다는 승리하고 돌아올 때, 당연히 딸이 제일 먼저 마중 나올 것을 알았습니다. 입다는 자신보다 소중한 딸, 무남독녀 딸을 이스라엘의 승리,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서원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계시의 말씀들이 완성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조차 혼동스럽고 논쟁거리로 삼는 이 사건을 통해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핵심은 메시아까지 대가 끊어지지 않고 계승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 계승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서 수혼제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입다가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로 바치게 된다면, 여자의 후손으로 이어가는 입다의 대가 끊어지게 되고, 길르앗의 머리가 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입다의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시면서, 왜 딸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딸을 달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잔인한 것 같지 않습니까?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입다에게 부모가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십니다.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하나뿐인 자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합니다. 이 정도만 묵상을 해도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실려고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입다의 딸은 그의 무남독녀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독자입니다. 입다가 억울해 보입니까? 단 한 번이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너무 억울하시겠다는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시길래 하나뿐인 아들을 길르앗의 장로들과 같은, 입다의 형제들과 같은,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겠다고 서원하십니까? 입다는 딸을 보고 옷을 찢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옷만 찢으신 것이 아닙니다. (마27: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그 순간에, 하늘에서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소의 휘장을 위에서부터 밑으로 찢으시고 살이 떨리고, 찢겨져 나가고, 심장이 터지는 슬픔의 절규를 하셨습니다. 입다의 서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입다는 영원토록 지울 수 없는 비극을 자신의 손으로 치러야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들 이삭을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찔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다릅니다. 아비가, 그가 너무나 사랑하고, 너무나 소중하게 아낀, 무남독녀인 딸을 처녀인 딸을 벌거벗겨야 했습니다. 그녀를 결박해야 했습니다. 칼을 든 두 손으로 잡고, 그녀의 살과 뼈와 심장을 찌르기 위해 내려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입다가 죽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십자가에 벌거벗고 달려 찢겨 죽었던 그 장면을 영원토록 단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비싼지 아셔야 합니다. (삿11: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마치 입다의 딸의 이 고백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람 산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요, 교회의 딸들인 성도들의 입에 과연 이런 신앙고백이 있을까요? 입다의 딸의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애곡함이 관습이 되어 매년 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나흘씩 애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딸들이 애곡하였다 하지만, 매년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딸들의 애곡은, 아버지 입다의 애곡입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처녀로서 죽은 죽음은 성탄절로 완성이 됩니다. 입다의 딸로 시작된 관습이, 해마다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여자의 후손을 알리며 기대하고 소망하는 예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께서 오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입다의 딸을 위한 이스라엘의 애곡이 성탄으로 성취되어, 우리는 더이상 슬픔으로 애곡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마다 기쁨으로 성탄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입다의 딸이 애곡한 것은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어서 슬퍼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없어서 슬퍼한 것입니다. 그 애곡을 들으셨던 하나님께서는 처녀의 몸에서 아들이 나올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임마누엘로, 입다와 그의 딸과 이스라엘 딸들의 애곡에 응답하셨습니다. 입다는 영원히 그의 딸의 사건으로 슬퍼하고 애곡하였지만 성탄절로 응답받은 우리들는 영원토록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입다의 최후는, 그는 단지 이스라엘의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기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나열하는 위대한 현장에 입다의 이름을 거론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히11:32)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오늘날 교회는 이 서원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은 입다의 딸이 맞습니까?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은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축제보다도 못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2-19
  • [김성수 총장 ] 설교자의 영광과 책무
    개혁주의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다 거룩한 소명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 까지 넓고 광대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손길이 미치는 않는 삶의 영역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유명한 표현처럼 단 일 평방 인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위한 보다 더 직접적이며 수직적인 사역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영광스런 사역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은 목회 사역은 그 어떤 소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그 이유는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설교자로 부름 받은 거룩한 소명 때문이다. 또한 설교는 설교자가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설교자 스스로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그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설교는 예배의 다른 어떤 순서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곱 명의 집사를 선택하여 소외된 과부를 돌보게 한다(행6:4, 2:42).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말씀 사역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엡4:10-46).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교적 소명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되고 능력을 얻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설교자는 세상의 정치나 자신의 경험과 같은 잡다한 이야기가 아니라,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영화라는 성경의 거대 이야기 곧 총체적인 사도적 복음을 선포하는데 신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성취하셨다는 복음에 대한 설교자의 사도적 선포는 이제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하시는 권능을 드러낸다. 사도적 메시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선포된 예수님의 이야기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이며, 따라서 세상에 대한 참된 이야기다. 사도적 복음이 선포되고 가르쳐질 때, 그것은 선교적 공동체를 창조하고, 그 공동체가 신실한 백성이 되도록 형성하며, 그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로부터 흘러 나와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복음을 입고 오신다. 설교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단순한 언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권능이다. 이것은 단순히 확인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새로운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선포다. 그러므로 메시지 자체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이 된다(롬1:16, 고전1:18; 2:4). 설교자의 영광스럽고 막중한 책무는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어떤 설교는 예수님을 중심에 두지만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단순히 개인의 구주나 물질적 풍요함을 가져다주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창조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시고, 모든 만물의 구원자이시며 마지막 심판자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은 우리의 삶 속에 소규모의 사적인 영역, 곧 종교적, 윤리적 또는 신학적 영역에만 들어맞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내세적 구원에 대한 것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혹은 하나님 나라 복음의 풍요함을 개인적인 구원 정도로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복음의 포괄적인 주장과 주변 문화 이야기 사이의 선교적 대면과 세상을 향한 소위 “견딜 수 없는 긴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설교자의 책무는 세상에서의 포괄적인 선교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구원의 능력에 직면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개개인에게 개인적 구원의 은택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세상을 위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구현하는 백성을 형성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세상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는 이 메시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영광과 막중한 책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심하여 현대 문화의 다양한 우상숭배 풍조에 볼모로 잡히게 되면 설교자 스스로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통로를 막아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설교자의 영광과 책무성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맡겨 주신 사역에 신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2-18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8) (민12:1-3)
    어느 날 십보라가 돌아왔습니다. (출18:2-3)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이런 상황은 너무도 쉽게 오늘날 교회 안에서 여자 성도들의 생활로 연결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오죽하면 교회의 식당이 조용하면 교회가 평안하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어린 여자 성도나 신참 여자 성도가 아니라 여자 성도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있는 여성도, 그 여성도 중에서도 교회를 너무도 잘 아는 권사 급에 있는 성도, 권사들 가운데서도앞장 서 있는 권사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십보라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책잡힐 결정적인 핸디캡을 안고 있습니다. 구스 여자입니다. 굴러들어온 돌 정도가 아닙니다. 헬라파 여자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왜 구스여자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수군거리며 미리암과 함께 뒷담화 하는 모습이 너무도 쉽게 상상됩니다. 미리암은 그렇게 수군거리는 여자들을 혼내며 십보라의 위치를 (직분을) 확실하게 보필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십보라는 위함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의 통치를 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여성 지도자격에 있었던 미리암, 여 선지자였던 미리암은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이 땅에서 조직화 되면서 전례 없던 지도자의 갈등으로 십보라를 시기하며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 미리암은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십보라를 빌미로 모세를 비방했지만 결국은 모세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고 방해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결정에 이의를 달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막을 떠나 가시게 만들었습니다.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리암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에 스라엘이 반역을 할 때마다 두고두고 반역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중직자들! 수군거리지 마세요. 말을 흐리지 마세요. 앞과 뒤가 다르면 안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퍼트리지 마세요. 다른 사람에게 비방하도록 유도하지 마십시오. 문둥이가 됩니다. 여호와의 구름이 교회를 떠나가시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의 권력자들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해는커녕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모세는 순종했습니다. 모세의 명을 받은 아론도 순종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교회의 통치방법이요, 교회가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죽음 가운데 가장 비참하고, 처참하고 흉악한 십자가의 죽음을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은 믿음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 역시도 내 믿음으로는 안 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이라야 순종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 믿음과 순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주셨던 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도는 주일마다 예배의 자리에서 모든 문둥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구스 여인이 교회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전도했던 분이 자신보다 먼저 권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자존심 상하는 장면이 아니라 전도한 분에게 최고의 영광과 열매가 되는 순간입니다. 전도하여 교회로 오기까지, 교회로 들어와 믿음과 신앙이 자리를 잡기까지 전도하신 분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감당했겠습니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끝도 없이 돌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전도했던 그분이 교회에서 자신보다 앞서고 인정을 받는다 싶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리암이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은 거의 다 목회자에게 짐이 되고, 교회의 시험 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에 구스여자가 들어오게 될 것인데 그 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2-05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7) (민12:1-3)
    교회는 성도들의 눈에 어떻게 보여야 하겠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장로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어떨 것 같습니까?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성도들의 공화국처럼 보이면 참 민주적이고 좋을 것 같습니까?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교회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사람이 통치하는 세상과 같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보여야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것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간혹 교회 안에서 우리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은근히 원망과 불평이 깔려있는 말투입니다. 이런 원망과 불평이 비방으로 튀어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묘막측합니다. 사탄의 미혹에 넘어져 우리 교회는 목사 공화국이라는 원망과 불평, 비방의 말을 했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눈에 교회가 목회자의 공화국처럼 보이는 것이 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모세에게 맡겼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70명의 어른들, 장로, 지도자들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미리암과 아론은, 70명의 장로들은 모세의 통치를 도와야 하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당연히 모세의 공화국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명을 맡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이 누구의 공화국처럼, 누구의 왕국처럼 보이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착각하여 이스라엘이 자신의 공화국인 줄 알 때 그것으로 끝입니다. 순간이라도 이 사실에 대해 모세가 실수하면 모세는 곧바로 즉결심판에 넘겨집니다. 그래서 아주 순간적인 착각이었지만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친 것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100%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세는 끝도 없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니 모세는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기색만 살피면 됩니다. (에1:14)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목사가 목회를 하는 여정 가운데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자기가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목회자의 사명을 거두어 가십니다. 구스여자를 핑계 삼았지만 미리암과 아론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70명 장로들의 충성을 자신들에게로 옮기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권력을 따먹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창3:4-5)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성경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미리암만 나병에 걸린 것을 보면 비방의 주인공은 미리암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이 주도하는 일에 아론이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이용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3: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아론의 비방이 아니라 미리암의 반역이었습니다. 미리암의 반역이 모세의 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십보라에 대한 견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세의 통치를 비방하는 것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신 것에 대한 비방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미리암의 비방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름이 장막을 떠나는 순간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민12:9-10)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 이스라엘의 문화는 남남 여여,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 반, 여 반을 나누었습니다. 기관도 남녀로 구분해서 분류합니다. 이렇게 볼 때, 미리암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성을 돌보았을 것이며, 여성들의 대변자였을 것이며, 여자들의 세계를 주도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의 아내 십보라는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갔으니, 모세를 돕는 배필인 아내로서의 사명은 누나 미리암의 몫이었을 것입니다. 병에 걸린 오빠 나사로를 대신해서 동생 마르다가 집안일을 돌아본 것처럼 말입니다. (눅10: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이런 위치에 있었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해서 말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1-29
  • [김성수 총장]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의 대상이었던 위치에서 선교 대국으로 성장 발전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며 감사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선교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의 시점에서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에 대해서 한번쯤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선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또 변화하고 있는 선교 동향과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냥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리보다 낙후된 나라로 가서 재정적인 도움을 좀 베풀어 주고 오는 것을 선교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단체들도 ‘선교’, ‘선교사역’, ‘선교사’, 또는 ‘선교지’라는 단어들을 아직도 주로 “지리적 확장”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 또는 선교사역은 주로 소위 서구 기독교 국가로부터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지리적 이동 또는 확장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선교사는 이러한 확장을 감당하는 주역이다. 선교지는 서구사회 밖에서 이러한 확장을 진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지역이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 방식을 진부한 것으로 만드는 많은 요인들이 있다. 특별히 두 가지 요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요인은전통적 선교지였던 제3세계 교회의 성장이다. 오늘날 세계 교회의 거의 2/3는 소위 전통적 선교지인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 덧 붙여서 제3세계 교회의 생동감, 그리고 이들 제3세계 교회들이 지금 서구 교회보다도 다문화 선교사들을 더 많이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세계를 선교지로 보는 시각이 진부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요인은 서구 교회의 쇠퇴이다.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이 소개하고 있는 바렛트(David Barrett)의 지적을 간접적으로 인용해 보자. 바렛트에 의하면, 1980년대를 통해서 서구 교회는 매일 7,600명의 신자들을 잃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서구 교회의 점증하는 명목상의 신자들,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간주의자의 세계관에 대한 굴복, 그리고 타문화선교에 대한 관심의 상실을 생각하면, 오늘날 선교지는 진정 어느 곳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선교에 대해서 더 이상 동일한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와 20세기를 지배해 온 선교 운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관심은 이 시기의 선교 운동을 지배하였으며, 이러한 관심은 오늘날 교회의 선교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관심사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선교는 더 이상 소위 “기독교적”인 서구 사회에서부터 “비기독교적”인 제3세계로의 문화 간 이동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없다. 선교는 멀리 있거나 가까운 곳이거나 간에 교회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증거의 문제다. 선교는 단순히 선교사들을 파송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전체 교회를 파송 하는 과업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 가지 슬로건이 이를 잘 포착하고 있다: 첫째, 선교는 모든 6개 대륙에서, 6개 대륙으로 그리고 6개 대륙으로부터 행해지는 사역이다. 모든 대륙에서 우리는 선교 본거지와 선교 필드를 보게 된다. 둘째선교는 전체 교회가 총체적인 복음을 온 지구촌에 전인을 향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구원이 전 세계에 전달되고 알려 지도록 의도 하셨는가? 이 점에서 예수님을 모하메드와 대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둘 다 그들의 메시지가 본질적으로 유효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하메드는 책을 썼다: 알라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코란을 통해서였다. 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으셨다. 그는 신앙 공동체를 결성하고 이 공동체에다 메시지를 구현하고 선포하도록 위임했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구현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좋은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설계다. 이들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함께 좋은 소식을 구현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 지르는 다양한 소명들 속에서도 좋은 소식을 구현해 나타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좋은 소식을 알리도록 부름 받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삶은 선교적이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1-29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6) (민12:1-3)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6) (민12:1-3)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를 만난 이유들이 많겠지만 그 많은 이유 중 매우 중요한 시작을 말해보라면 저는 단연코 오늘 본문의 미리암과 아론 그리고 모세와 결부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교사의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니 노회에서 전도사, 목사 면접을 하는데가정사역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목사가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놀란 이유는 목사의 사명을 교회의사역과 가정의 사역으로 구분하더라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이 단순히 모세의 가정일로 끝나는 문제입니까? 본문 성경구절만 보더라도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가정의 일이 모세의 직분, 모세의 사역에까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 사역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까? 목회자의 가정에 문제가 생겨도 교회 사역과는 무관합니까? 목회자만 그렇습니까? 성도들의 가정은 다릅니까?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 생활에 타격이 있지 않습니까? 자식이 불신결혼을 하는데 왜 아버지가 장로직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성도들의 가정에 불신결혼을 하는데 왜 교회는 광고조차도 하지 않습니까? 왜 목사는 학습 세례받지 않은 남녀에게 주례를 서지 못합니까? 목사에게서 가정과 교회를 분리시키는 순간 한국교회 위기는 시작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디서 못 보던 이론이 나오면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습니다. 한때, 지금도 그렇지만 목사 청빙 할 때 외국 유학, 박사학위가 단골 메뉴였습니다. 어디 가서 들어보지 못한 이론 하나 듣고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난리 합니다. 이단성이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어디서 듣고, 보고, 배운 것 최고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무엇을, 배워왔는지는 몰라도 20년 전에 목사가 되는 면접에 가정사역, 교회사역이 단골 메뉴였습니다. 어줍잖게 배워와서 전도사, 목사가 되는 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교육을 했으니 사탄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고, 오늘날 그 결과는 너무도 심각합니다. 요즈음은 교역자들에게 월요일이 주일보다 중요한 날입니다. 가정사역의 날이라고 합니다. 월요일에 담임목사가 부 교역자에게 전화나 문자를 하면 그 순간 공공의 적이 됩니다. 신학적인 문제까지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하고 집에 가는 교역자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부 교역자들이 교회를 옮길 때 중요한 요구사항이 월요일 부르지 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월요일 재림하실 것이라는 우스운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놈들은 가정 사역한다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천국 안 가려고 할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월요일을 교역자가 쉬는 날로 알아주시는 것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역자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교회를 위하여 부름 받은 자들은 24시간이 공인이요, 공무입니다. 교역자는 똥 누는 시간도 공무라는 말을 저는 잘 합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심각한 위기가 온 이유 중 하나는 목회자가 교회와 가정의 일을 구분한 것이 매우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70장로를 세운 후 모세의 리더쉽을 비난한 것을 보면, 그 사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70장로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니 미리암과 아론 조차도 "이제 모세가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모세 없이는 이스라엘을 통제할 수 없었는데, 70명의 지도자들이 생기니, 이스라엘에 소위 "정치"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방대한 나라는 지도자 모세 한 사람으로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조직으로 통치되는 듯 보입니다. 2백만, 3백만이 되는 백성들을 모세 한 사람으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목회자도, 성도들도 쉽게 착각하고 우를 범합니다. 교회는 성도가 한 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교회는 성도가 천명, 만 명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지팡이일 뿐입니다. 성도가 많아지니 하나님 한 분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까? 목회자도, 당회원도, 성도들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친히 통치하시는 방법이 목회자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어렵고 힘들 때, 교회를 목회하면서 져야 할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하나님께서 친히 장로를 세우시고, 당회를 조직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왕은, 교회의 주인은, 교회의 통치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공화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셨던 것처럼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는 목회자를 통하여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목회자의 왕국 같아 보이고, 목회자의 공화국 같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를 세우셔서 성도들을 천국으로,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통치되는 곳입니다. 이 사실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여선지자 미리암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암의 비방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통치방법에 대한 비방이요, 반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미리암은 하나님을 향한 비방과 반역을 도모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1-15
  • [김성수 총장] 예수님의 왕국사명 이어가기
    미국 이민 교회 성도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자주 이분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가 들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다. 이민교회에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은 결국 교회의 정제성과 역할, 교회의 본질과 영광에 대한 성경적인 지식이 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직분을 받는 현실에 기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는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의 정립이 이민교회 성도들에게 시급함을 느낀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신 예수님의 사역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변화 되도록 부르신 것처럼, 교회도 이와 꼭 같은 일을 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치유하는 능력과 사랑을 증시 해 보여 주신 것처럼, 교회도 자비와 공의의 행위로 이웃을 이타적으로 섬기도록 부름 받고 있다. 예수님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눈물의 기도생활로부터 시작하고 진행되는 것과 같이, 교회 구성원들의 생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옛 질서에 도전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것과 같이 교회도 옛 질서에 선지자적으로 도전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에 따라 겪게 되는 고난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구현할 수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의 사명을 계속해 갈 수 있도록 일하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의 재능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신실하게 계속해 갈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았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Story)에서 차지하는 우리의 위치와 역할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살고 있다. 이 기간은 선교로 특징 지워진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과업을 감당하고, 열방 가운데서 그분의 나라를 증거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부름 받았다. 사도행전 1:6절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즉각적으로 도래할 것을 기대하였다. 예수께서 사망에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최종적 부활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이제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질문을 했다. “주님,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하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를 아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심판과 영화는 분명히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새롭게 형성하신 공동체의 삶과 말, 행동에서 소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통의 증거는 영화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 예고편은 도래할 매력적인 것의 실제적인 장면이다. 이 유비에서 두 가지가 중요하다. 예고편은 실제 현재적 장면과도 같은 것이며, 그 장면은 또한 미래를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기를 원하도록 만들어 준다. 교회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과도 같다. 교회는 열방을 향해서 미래적 왕국을 현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해 준다. 우리의 과제는 이 왕국을 마지막 때가 이르기까지 땅 끝까지 신실하게 매력적인 삶의 모습을 통해 증거 하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이 증거가 어떻게 수행될 것인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열방을 향해서 매력적인 삶의 모습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를 삶으로 보여주었다(행2:42-47; 4:32-35; 11:23).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갔다(행11. 24). 가정에서 보여주었던 이들의 신실함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곳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인 비전으로 이어졌다. 안디옥에서와 같이 로마 제국 전역에도 증인 공동체가 세워져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고 다른 지역에 복음의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했다(행13:1-2).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은 바울의 선교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나머지 대부분은 바로 이 공동체들에게 신실하도록 요청하는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불러 모으는 시간이다. 모든 민족 백성들이 이 종말의 왕국에 들어가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삶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창조물과 모든 나라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사명을 계속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실제를 무조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상이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분의 사명을 창의적으로 계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11-1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