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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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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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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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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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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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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2-28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김성수 총장] 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의 중요성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과 사물을 성경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고 사고하며 실천하는 일이다. 거듭난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영위하는 삶 전체가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한 질서를 왜곡시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와 같은 오류의 결과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집단 구성원의 삶의 양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왜곡의 모습의 한 예를 일에 대한 관점과 결과를 통해서 성경적 관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의 일이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거룩한 청지기로서의 소명이며, 영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일을 하도록 사명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많은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일을 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1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진리로부터 일의 존엄성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이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조명이 없었던 고대 헬라인들은 일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플라톤의 신은 일을 하는 신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신은 위대하고 무한한 사상가일 뿐이다. 플라톤의 신은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아니라 단지 계획했을 뿐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철학자는 귀족이며, 사상가며,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다.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일을 천한 것으로 보았다. 신에 대한 이러한 관점 때문에 이들은 일의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아직도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천하게 생각하고 머리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더 높고 존귀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라 이교적인 헬라적 태도이다. 헬라의 이교적 관점은 로마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 귀족은 하인이나 노예와 함께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했다. 그러나 공화국이 확장되고 카르타고와 헬라 문화를 접하면서 일에 대한 결정적인 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헬라 문화와 마찬가지로 정신에 대한 묵상이 물질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여겼다. 로마 귀족들은 ‘라티푼디아’(latifundia)로 알려진 노예가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점점 더 아름다운 예술품, 정원 및 주택과 함께 호화로운 삶에 자신을 바쳤다. 아름다운 미와 진리 속에서 사는 것이 정신적인 사색의 삶을 영위하는데 최고의 방법이라고 보았다. 완전한 신은 결국 선과 진실과 함께 아름다움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정신적 명상의 삶을 숙고하고 영위하기 위해 그들이 추구했던 사치스러운 삶은 그들을 육신을 위한 활동으로 냉혹하게 끌어당겼다. 종종 그렇듯이 사치는 폭식과 난교라는 죄악된 삶으로 이어졌다. 진흙 램프에서 로마 빌라의 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장식하는 포르노 이미지는 제국 시대 로마인의 성적 집착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성행위가 더 비뚤어지고 극단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펜트하우스(Penthouse)라는 잡지사에서 제작한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의 전기 영화는 이와 같이 극단적으로 왜곡된 삶의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로마의 엘리트들이 소위 세련되고 방탕한 삶에 빠져드는 동안 누군가는 이들의 삶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미 로마의 문화는 생산적 노동은 물질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하층 계급이나 노예와 같은 열등한 사람들에게만 어울리는 천박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노예들이 일하던 귀족들의 소유 라티푼디아는 그 때까지만 해도 로마 경제의 중추였던 소규모 가족 농장을 점차 폐업 시켰고 이제 농업 생산은 주로 노예 중심의 기업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사실상 전체 경제가 노예 노동에 의존해 있었다. 로마인들은 물레방아와 다른 노동 절약 기술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노예가 일을 하게 할 수 있는데 이런 기술에 자본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것은 민간 기업만이 아니었다. 국가는 노예를 사용하여 상품 운송, 특히 제국 주변의 군인을 운송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노예들의 노역을 통해 또한 황제와 귀족의 특권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거대한 정부 건물을 건설했다. 열등한자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자들을 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가치구조 위에서 신들이 자신들을 기리기 위해 사원과 조각상을 원했다면 황제와 귀족들도 자신들을 찬양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노예와 하층 계급은 황실 영지의 분수를 위한 수로, 항구, 하수구, 서민을 위한 다층 아파트를 건설했다. 이 모든 건설 프로젝트는 노예와 평민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로마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명 사회라는 점을 모든 기회를 통해 과시해야 한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의 도시 거주자 대부분은 열악한 공동 주택에서 지독할 정도로 불결한 생활을 했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 정도였다. 위대한 공학 기술과 건축 성과는 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엘리트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들은 대중에게 일자리를 제공했을지 모르지만 대중을 위해 유익한 다른 일들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일에 대한 헬라와 로마 사회의 왜곡된 관점이 가져온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결과는 우리에게 성경적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더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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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0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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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 (창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2)(창23:1) 하나님께서는 아내에 대한 역할을 창조하실 때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 사실도 단순히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성경은 어쩌면 삼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짝사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마냥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틈만 나면 자신이 편할 것 같은 세상의 음부를 향해 도망을 쳤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기까지 하십니다. (출20: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34:14)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다윗이 위대한 신앙인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왕국이 파멸에 이르는데 다윗의 책임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편애하시는 듯합니다.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심판을 즐겨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왜 이토록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목을 매는 것처럼 보일까요? 창조 이후로 사람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으셨던 말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시18: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아마도 사랑에 굶주리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사랑 고백에 완전히 무너지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라고 하십니다. 아담에게 과연 돕는 배필이 필요할까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아담에게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요? 이런 말씀 역시 윤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남녀차별이라는 이상한 주장도 하게 됩니다. (창2:24-25)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완전한 남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떠나 그의 아내인 교회와 합하여 한 몸 이루어 구원이 완성될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그러니 “돕는 배필”이란 삼위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데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여인 사라는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잘 순종하여 남편 아브라함에게 훌륭한 돕는 배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창17:10-11)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속했다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증과도 같았습니다. 남편을 비롯해서 집 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드러누워 고통스러운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해괴망측한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피범벅이 되어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며 며칠이고 꼼짝을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난 지 8일 된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니 그 갓난아이의 고통과 울음과 신음 소리는 또한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뒤치다꺼리는 누구의 몫이겠습니까? 성경은 참 재미있게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후 사라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창17: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할례 언약의 당사자는 남편 아브라함이지만 그 언약을 집행함에 있어 실제로 수고와 헌신과 순종은 누구의 몫입니까? 할례 하나만 보아도 돕는 배필의 사명은 절대적입니다. 할례는 구원의 증표입니다.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구원을 향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향하여 한결같이 순종했던 사라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만 하지 않아도 안타까움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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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김성수 총장] 인간 생명의 가치
    요즘 각종 언론을 통한 보도 중에서도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것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이 너무도 무참하게 희생되는 사건과 사고들이다.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희생되고 있는데도 역사상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현대인들이 인간 생명의 가치에 이처럼 무감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동식물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최고의 가치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생명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특별히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 삼는 인신 제사를 철저히 금하고 벌하셨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는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 인간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식을 행했다. 켈트족(Celts)의 세 주요 신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신 제사를 요구했다. 타라니스(Taranis)는 사람의 두개골을 도끼로 쳐서 불태우는 제사, 에수스(Esus)는 사람의 목을졸라 죽이는 제사, 테우타테스(Teutates)는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는 희생 제사를 요구했다. 이러한 제사를 관장했던 드루이드(Druids)는 전쟁 포로들을 나무의 잔가지로 엮어 만든 우리에 가두고 산 채로 불태워 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인들 또한 당시 편만해 있던 인신 제사 의식에 참여했는데, 아마도 가장 잘 기록된 것은 스웨덴의 웁살라 신전(Uppsala temple)에서 일어났던 제사 의식일 것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도 그들의 초기 역사에서 인간 희생 제사 의식에 참여했다. 그리스 전설은 미케네(Mycenaean)시대에 행해졌던 수많은 인신 제사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플루타르코스(Plutarch)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Salamis) 전투 직전인 페르시아 전쟁 당시 까지도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을 행했다.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망령(죽은 자의 영혼)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고고학자들은 로마의 성벽에 산 채로 묻힌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러한 희생자들 중 일부의 무덤을 발견했다. 로마인들은 어떤 경우에는 한 쌍의 희생자들을 산채로 묻었는데, 특히 로마가 칸나(Cannae)에서 한니발 장군에게 패배한 이후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모든 경우에서 우리가 추론해 낼 수 있는 사실은 거의 동일하다. 신들(또는 망령)이 인간의 생명을 원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인간 생명을 바치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들을 공경하거나 신의 비위를 맞추어 호의를 얻기 위해서 그 사회는 소모적일 수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완벽하게 적하고 정당한 행위였다는 사실이다. 로마 후기 공화정 제국 시대에 오면 이러한 관행은 대부분 사라지고, 로마인들은 켈트족을 계속해서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야만인으로 여겼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더 이상 신이나 망령을 위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갑자기 인간의 생명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죽은 자를 장사하기 보다는 기리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경기 게임’에서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하는 에트루리아 관습(Etruscan practice, 인신 제사의 또 다른 형태)을 채택하고 이것을 대중적인 오락의 한 형태로 바꾸었다. 검투사들의 시합(Gladiatorial matches)과 서커스의 광경은 경기장에서 싸우다 죽은 노예들의 피를 대가로 대중을 즐겁게 하고 후원자들의 명성을 높이는 인신 제사의 또 다른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로마 당국은 감히 자신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할 데 없이 잔인하게 행동했다. 고대의 사회 문화에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가치를 혹 찾아 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존재의 위계질서를 보는 관점 또는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인간을 동물 위에 두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합리성 곧 이성적 능력이었다. 합리성은 그들을 정신의 세계, 즉 사상과 형상(form)의 세계에 더 가깝게 가도록 인도해 주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만큼 합리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동일한 인간 사이에도 자연스러운 위계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노예는 본질적으로 자유인 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동물보다 조금 나은 ‘살아있는 도구’(living tools)로 평가했다. 남성은 여성보다 본질적으로 더 합리적이며 육체적으로 “분명히” 우월하다고 믿었다. 남자들 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지적으로 더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았고, 이 우월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회를 통제했다. 소위 철인-왕(Philosopher-kings) 계급은 플라톤의 이상 국가(Republic)에서 통치했고, 각 사람은 사회 질서 아래에 있는 계층 구조에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그 사회에서 적절한 위치를 부여 받았다. 부, 혈통, 권력이 누가 누구보다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실제로, 귀족(aristocracy)이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나머지 시민들은 사회의 최하층에 있는 노예와 함께 그들의 부와 교육의 정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 졌다. 이방 사회의 이와 같은 비성경적인 인간관에 비추어 보면 성경이 인간의 가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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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5
  • [김경헌 목사] 사순절
    사순절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구지 그 이유를 찾으라면 사순절은 성경에서 행하라고 가르치는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가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는 절기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하시는 절기들이 많으나 사실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꼭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성례뿐입니다. 세례와 성찬 외에는 신약성경이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과 성탄절도 성경이 지키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수님의 대한 아주 중요한 날들로 기념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되 사순절은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에서부터 분리하고,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분리한 것입니다. 사순절을 오늘 지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 절기가 천주교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순절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사순절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먼저, 천주교나 정교회나 개신교라는 분열이 있기도 전에 초대교회가 지키던 절기였습니다. 교부들의 글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합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신 것을 근거하여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에 금식기도를 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의도는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표시하는 40일 금식이 부활절로 마무리가 되는 사순절은 그 속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구속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개신교는 이렇게 좋은 의미를 담은 사순절을 더이상 지키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이 신명기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지 못하며,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힌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본문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8:2-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는지 시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어떠한 축복이 주어집니까? 4절부터 그 시험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축복이 기록됩니다. 끝에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신8:10)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의 광야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 옥토를 주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은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결과가 부활이듯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옥토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의도는 좋았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 가르침이 참된 하늘의 옥토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늘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옥토를 바라보고 세상의 형통함을 원하게 되어 초대교회가 지켰던 사순절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광야의 시험은 이스라엘이나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의 보고로 그들의 믿음과 신앙의 실체가 드러났고, 여호수와와 갈렙 외에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와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다윗을 통해 12지파를 통일하여 이스라엘이란 강대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옥토를 주신다고 했는데 왜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십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이 차지한 땅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대표하는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어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광야시험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니, 그를 믿는 자는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하늘의 옥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광야의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혹 그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그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사순절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며 그의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절기였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광야의 시험을 스스로 자신의 욕심으로 차지하려고 하는 절기가 되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구약의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질된 사순절은, 40일 금식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행(?)으로 받게 될 복을 예수님보다 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 이렇게 변질되다보니 우리 개신교회는 더 이상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개혁주의의 근본정신을 따라, 사순절의 본 의미를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더 가까이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적으로 동행하면 좋겠다는 믿음의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금식하였으니,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온 교회가 함께 금식하며 부활을 기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옥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대는 사순절만 아니라, 부활절과 성탄절까지 변질되어 세상적인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는 세상에 맞서 교회는 더더욱 예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도록 교회 문화를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활주일이 3주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떻게 그것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행동으로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신앙자체를 따라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하는 생활에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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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3
  •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1)(창23: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최고로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은 궁극적으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여백 속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이사를 가자고 합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모험을 할 만한 나이도 아닙니다. 자신의 나이가 65세, 남편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해야 하는 것 하나는 “어떻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하면 오늘날도 그렇게 부름을 받아야 성경적이고, 전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질문에 대한 힌트와 숙제를 동시에 드려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신앙을 가르친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브라함 때에 노아가 살고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아들)에 대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족장들의 사명은 생존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아들에 아들을 낳으면서 생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로 중요한 사람이 아내입니다. 아들에 대한 사명이 과연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졌을까요? 아브라함이 대표이기에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이지 이 사명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언약입니다. 우리는 “씨 언약”이라고 하니 아브라함(남편)이 사라(아내)보다 더 중요할 것처럼 보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께서는 씨(남편)로 오셨습니까? 자궁(아내)으로 오셨습니까? (마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브라함의 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3:15의 복음을 갱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의 땅에 큰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이민을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믿음의 약속을 합니다. “혹시 생명에 위협이 생기면 나는 당신을 오라버니라고 하고, 당신은 나를 누이라고 합시다.” 이런 결단과 약속은 남편으로서 또는 아내로서 죽는 것보다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씨 언약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희생과 아픔과 수고를 많이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소원하고 바라는 것과는 전혀 관점이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낳는 것, 아들의 아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의 여정에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아내의 자리도 포기했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살았던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역시 성경입니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역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라에게 유일한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주셔야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사라에게 최고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성취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았던 사라에게 손자의 손자는커녕 손자 정도는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손자가 아니라면 며느리라도 보게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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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3-22
  • [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중에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라는 복음 송이 있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는 한번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쯤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셔서 나에게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지, 내가 당하는 삶의 고통을 알기나 하시는지, 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 회의가 들 때 은혜의 문제를 한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사냥꾼인 척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감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까지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야곱의 계획과 간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했다. 에서는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창 27:41). 야곱은 목숨을 걸고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자신의 고향과 약속의 땅으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도망자 야곱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 집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어떤 곳에 이르렀다. 사실 그곳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다(12:8).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이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 밤에 그는 놀라운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이상을 보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금 아버지를 속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자신을 벌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실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을 벌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풍성한 약속으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나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망치는 교활한 야곱을 찾아서 만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약속이 이제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도망치는 도망자가 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취할 수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감사라는 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하고, 누려온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오직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도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것이 은혜라!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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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김성수 총장] 위대하신 하나님
    분주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한번씩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생각하며 감탄할 때가 있다. 장엄한 계곡과 아름다운 자연 경관, 밤하늘의 신비한 은하계와 별들을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와 함께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시8편).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하기에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다스리기는 커녕 오히려 자연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자연 숭배와 관련이 있다. 도시를 밝히는 인공 조명과 심지어는 기후까지 조절할 수 있는 시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신비한 자연의 질서에 훨씬 더 잘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 화복이 자연의 어떤 요소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였다. 작물은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나 너무 습하거나 너무 건조하면 파괴되거나 익지 않을 수 있다. 화산, 지진, 홍수, 폭풍은 그들의 삶을 끝내거나 기아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선고할 수도 있다. 질병은 그들이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 모든 것을 낭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연에서 초월의 원천, 곧 그들 자신보다 더 큰 힘을 보았고,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 이들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교도 신들은 원래 자연의 힘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들의 왕인 주피터(Jupiter)도 폭풍의 신으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번개를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의 주된 기능은 신들이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신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고, 좀 더 자비로운 신들에게는 자연계를 축복함으로써 사람들을 돕도록 격려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많은 이교 신들은 다산과 관련이 있으며, 농작물과 가축들이 잘 자라도록 독려하기 위해 숭배되었다. 따라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신전 매춘부들이 숭배자들과 성관계를 갖고 바알(하늘의 신)이 아세라(땅의 여신)와 성관계를 갖도록 해서 땅에 비를 내려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하는 숭배 형태도 있었다. 이와 같은 숭배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로마 세계에 와서는 자연 세계를 넘어 전쟁(Mars)을 포함한 인간적인 할동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그래서 구걸, 거짓말, 도적질(Mercury), 금속 세공(Vulcan), 음악과 시(Apollo) 그리고 섹스(Venus)와 같은 활동에까지 확대되었다. 신들은 본질적으로 인간 삶의 특정 영역이나 자연 세계의 최고 통치자였으며, 신들을 향한 숭배는 주로 신의 비우호적이며 적대적인 관심을 피하기 위해 그 영역에 대한 신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법으로 행해졌다. 예를 들어, 바다에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선장과 선원들은 바다에 대한 넵튠(Neptune)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영역에 대한 무단 침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의식의 희생 제사를 수행했다. 다르게 말하면, 압도적 다수의 숭배자들에게 있어서 신들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래서 심지어는 사랑의 언어가 사용된 곳에서도(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에서처럼) 그것은 신들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갖지 않고 신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종교 의식은 신들을 위무하고 달래기 위해 고안되었다. 신들과의 감정적 애착은 거의 없었고 신들이 숭배자들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들을 달래려는 욕망만 있었다. 그래서 적절한 형식과 의식을 따르고, 적절한 기도와 희생 제물을 바쳐서 숭배자가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로 인해 신들이 불쾌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예는 집에 조상 신을 모신 사당을 두는 로마 가족의 경우다. 로마에서 아버지는 가족의 최고 통치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자 그대로 가족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다른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로마법이 가족법을 거의 완전히 발전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둘 정도로 많은 권한을 가졌다. 왜 그러했는가?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가 집안의 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가족의 다른 가장들의 범신전(판테온)에 합류하고 집에 있는 조상 사당에서 향을 피워 숭배를 받았다. 집안의 최고 권위자로서 아버지(특히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종교 의식의 적절한 대상이었다. 이방 종교는 신봉자들에게 오직 한 신 또는 한 무리의 신들만을 숭배하도록 요구하지 않았다. 많은 이교도들은 신들이 지역적이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 자연스럽게 신들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종교 체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새로운 신들을 추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이교도 세계에서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오히려 마음이 넓고 포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고결하고 덕스럽고 국제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포용성을 로마 통치에 대한 종교적 반란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힘의 원천으로 여겼다. 게다가 로마를 지지하는 신들은 많을수록 더 좋았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만이 유일하게 참되며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자존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통치하는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과 경배하기에 홀로 합당한 분이시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모든 환난에서 지키고 보호해 주는 분이시다. 오늘도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소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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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3-14
  • [김경헌 목사] 보시니(창1:31)
    창세기 1장이 창조장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마음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의 경중을 떠나서 무슨 일이든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창조를 접하면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는 의외로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까지 언급합니다.(엡1:4-5)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면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면서 이 창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셨을까요? 창조의 결정체요, 핵심인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 닮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창조하셨을까요?(창1:26, 5:1) 결혼을 해서 2세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임신의 징후가 보입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가족, 친구, 이웃들까지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만약 임신한 여자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중병에 걸려 있고, 태어나면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 아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 1장에 와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부모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죽는다는 진단결과 앞에서 차라리 임신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완벽한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이셨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을 한 사람이 장차 선악과를 따먹고 완전히 죽게 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 것 같습니까? 빛을 창조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고기와 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정말 좋으셨을까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젖병 기저귀 속옷 겉옷 장난감을 장만하고, 모든 관심과 생각과 생활과 삶이 아이를 중심해서 달라지는데 정작 그 아이가 태어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위하여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볼 때 그 부모는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좋으셔서 좋아하셨겠습니까? 25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웃어요, 더 크게 활짝 웃으라고요!”라고 하는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이러지도 못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주인공 안소니 퀸의 일그러진 표정이 하나님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잔인하게도 그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이 그 지은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보시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을 보셨기에 심히 좋으셨을까요? 창세기 1장은 너무도 슬픈 하나님의 이야기,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이야기, 어쩌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너무도 슬프고 아프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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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3-07
  • [김성수 총장] 기독교적 지성과 세속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The Christian Mind: How Should a Christian Think?)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헤리 블레마이어(Harry Blamires)는 영국의 지적 풍토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기독교적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그는 정신(또는 지성, mind)이라는 용어를 “집단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념과 태도의 경향”이라는 의미로 규정하면서, 세속적인 정신의 영향력과는 달리 기독교적 정신은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생활에 대하여 밀접하고도 현저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 정신에 굴복하거나 고갈되어 버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적 정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블레마이어의 지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거나 경건적인 삶의 실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도 기독교적 윤리와 기독교적인 영성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블레마이어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인 존재로서 비그리스도인과는 다른 법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회의 일원으로서 비그리스도인이 무시하는 책임과 의무들을 잘 감당하고 있으며, 영적인 존재로서 기도와 명상을 통해 비기독교인이 탐구하지 않은 삶의 차원을 계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유하는 존재로서 삶에 대한 종교적 견해 즉, 모든 지상적 사건들을 종교적 맥락에서 해석하며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인 인간의 제 문제들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개인적인 행위만을 주로 다루는 매우 협소한 사고의 영역 이외에는 세속적 정신에 의하여 구성된 준거틀(frame of reference)과 세속적 가치 평가를 반영하는 판단의 틀을 수용하여 정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기껏해야 개인적 수준에서 영성과 도덕적 지침을 전달하는 도구 정도로 남아 있고, 공공의 수준에서는 감상에 빠진 연대 의식의 표현에 불과할 정도로 기독교 신앙의 지적 관련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블레마이어는 기독교적 정신 또는 지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적 지성의 결여 문제는 본질상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secularization)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세속화란 사회와 문화에 인접한 영역들이 사회와 문화의 중심부로부터 점차로 그 외곽을 향해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나 제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속화란 현대 사회의 중심 영역, 즉 과학이나 산업기술이나 정부조직 등과 같은 영역에서 종교가 미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을 희석시켜서 종교로부터 나온 개념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약화시키고 종교에 의해 형성된 제도들이 미치는 영향을 점점 작아지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점에서 세속화되어 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만나는 것은 예배하는 존재와 도덕적 존재로서 이지, 생각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을 주님의 집에서 보내는 것은 옳은 일이다. 또한 우리는 거짓말을 하거나 이웃을 비방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에 대하여 사고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는 개인적인 도덕과 영성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인 사유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인 영역과 활동 속으로 발을 들여 놓을 때에는 우리의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옷을 벗어 던지는 습관에 젖어 왔다. 그 주제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잘 훈련되어지고 잘 기초가 다져져 있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개념들은 뒤로 두고 세속주의의 어휘들을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린다. 그런 후에 우리는 돌아가서 정치가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사회 활동가들과 사회 복지를 이야기하고 노조원들과는 노동 관계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 머릿속에서 기독교적인 어휘와기독교적인 개념들을 비워버렸으며, 한 술 더 떠서 그 결과 우리가 그들과 완전히 접촉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신적으로는 세속주의에 발을 깊숙하게 들여 놓고 있다. 우리는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세속적으로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켰고, 심지어 단속하기까지 하였으며 또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인 것은 이런 일들을 양보하며 다른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기독교적인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었다고 우리 스스로를 애써 설득시키고자 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조우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 않으면 기독교적 지성은 시들고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지적관련성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단지 설교와 만 관계되는 것이고, 그런 종류의 단어는 교회의 거룩한 강단에서나 하는 것이 예의라는 요청을 더 공격적으로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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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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