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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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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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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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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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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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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조희완 목사] 보혈의 능력
    옛날 사극드라마나 전쟁영화를 보면 서로 싸우는 장면이 많이 나오고, 서로 죽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칼로 싸우든 총으로 싸우든 서로 싸우다가 칼이나 총에 맞아서 피를 많이 흘리면 죽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는 약 5-6ml의 피가 있는데 그 중에 약 30%를 흘리면 생명이 위험해 지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피를 수혈해 주면 다시 살아납니다. 왜 피를 흘리면 사람이 죽고, 피를 공급해 주면 살아난다는 말은 곧, 피가 곧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를 먹는 것은 곧 생명을 먹는 것이 됩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생명의 근원인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수혈이 되어서 살아난 것입니다. 성도들이 일 년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때가 바로 이 고난주간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생각할 때 가슴이 뛰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고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이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느껴보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보혈은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출12:23) 둘째로, 보혈은 화목의 능력이 있습니다.(엡2:13-14) 셋째로, 보혈은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벧전2:24) 십자가 보혈을 힘입어서 구원의 은혜와 화평과 치유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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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 칼럼
    2020-01-15
  • <정연철 목사의 행복콘서트>비전의 사람(7)
    꿈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새롭게 한다. 꿈꾸는 사람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롬12:2)하는 자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는 분명한 구분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역시 교인이 다르구나. 역시 교회가 다르구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충격을 느끼도록 교회가 교회다운 분명한 정체성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교회를 향하여 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교회를 두려워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분이 교회 나간단다.” 또는 “나 아무개 장로요.” 그러면 그 사람을 믿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성전 건축을 네 번 했습니다. 교회를 세 개 짓고, 교육관을 하나 지어서 건물을 네 개 지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모 건설회사 부회장이 조건을 제시하기를 , 교회를 다 짓고 나서 돈을 받겠다고 하기에 교회 건축을 시작했다가 아주 혼이 났습니다. 제일 처음 교회를 지을 때 부산의 모 교회 집사님이 지으면서 모르는 사람이 공사를 해야 목사님이 마음대로 얘기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공사를 하면 이것도 고치고 저것도 하고, 이것은 왜 이렇게 했는지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아는 사람이 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안다는 것 때문에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지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교회를 네 개나 지으며 깨달은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못됩니다. 교인들이 그렇습니다. 교인들은 전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믿을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황을 보면 교회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모릅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신부’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목사’에게도 잘 대접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할 경우에는 “너도 목사냐?” 그런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너무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본받으면 안 됩니다. 세상과 교회는 뭔가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충격을 줄 수 있는 교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하나님 나라가 왕성해 진다고 믿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려면 때론 외톨이처럼 살아야 하기에 외롭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니 외롭습니다. 노회에서도 외롭고 연합회에서도 외롭습니다. 친구가 없습니다. 목회를 하나 보니 친구들과 만남을 거절해야 합니다. 오라고 하면 안 나갑니다. 그러면 하나 같이 “저 혼자 목회하냐, 저 혼자 거룩하냐?”고 공격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믿음 생활을 바로 하려고 하면 외롭고 핍박을 받습니다. 시련이 있습니다. 때로는 왕따를 당하니 고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에는 유익인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려면 눈물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피 흘리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다 은혜가 되고 복이 됩니다. 하나님께 제물이 되고, 우리의 꿈을 이루려면 외로움을 감내하며 굳은 결심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저는 항상 다짐합니다. 변화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을 구분해야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최선을 다한다. 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량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저는 시골 교회에서 한 가정을 데리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총신신대원을 다니면서 차를 다섯 번 갈아타고, 20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도 5년 동안 새벽기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사례비는 3만 5천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저의 분량에 맞게 맡겨주신 목양지라고 믿고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니 양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co.kr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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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0-01-15
  • [김문훈 목사]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신앙생활에는 다섯 가지 구호가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인격을 향기롭게 그중에서 교회는 건강해야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지혜와 키가 자란다. 식물은 심어놓으면 반드시 자란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한다. 여기서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성경적인 교회, 사도행전적인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말한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걸어서 로마까지 가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가 되었다. 그가 가정을 이루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요 동업자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방에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사람은 각자 개성이 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 소망의 인내, 사랑의 수고가 대단하다고 칭찬받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 지방에서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해서 세운 베뢰아 교인들은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상고하였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변화가 되어서 그가 프로그램, 시스템을 만든다. 가정을 이룬다. 교회를 세운다. 가정은 교회처럼, 교회는 가정처럼 되어야 한다. 모든 가정은 행복해야 된다. 문제 부모는 있어도 문제 자녀는 없다. 가화만사성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 가정생활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우리는 천대까지 복을 받는 명가를 이루어야 된다. 교회는 영성이 있다. 교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야 된다. 성령의 영감이 넘쳐야 된다. 예배의 감격이 있는 곳이 건강한 교회이다. 교회는 복음이 흘러가야 된다. 나라는 국격이 있다. 성경에서 5대 제국은 무너져도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 성도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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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오성한 목사] 치유와 기적의 삶
    나는 믿는 자에게 주신 기적의 능력을 믿고 이미 주신 권세를 인정하고 환영하는 기도를 많이 한다. 신바람이 나기도 한다. 뜨겁게 말씀을 인정하는 기도를 할 때, 나에게 주신 능력이 믿어지고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고 하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보시고 그 일을 따라 하셨다는 말이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보았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본 사람은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따라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들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보셨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먼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아들도 그것을 행하셨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신 일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보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열심히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성경을 펴놓고 읽으면서 기도를 자주 한다. 특히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 마가복음을 행동 복음이라고 별명을 붙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성격이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평가되어진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서보다 “즉시”, “곧” 등의 단어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마가복음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했다고 본다. 제일 먼저 원천적인 강렬함이 보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는 마가복음을 보면서 기도하면 더 강렬한 믿음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성경들도 나의 기도목록들이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 4명을 부르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였다. 야고보와 요한도 형제였다. 이 두 형제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름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는데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일어남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장 안에 기사와 표적이 연속적으로 다섯 가지나 일어남을 볼 수 있다. 나는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이 기사와 표적이 함께 했음을 분명히 보았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심의 권세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뿐만 아니었다. 능력 있는 가르침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르칠 때 더러운 귀신들인 사람이 있어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경련을 일으키며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막1:26). 회당에서 나와 시몬의 장모가 집에서 열병이 들어 누워있었는데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을 즉석에서 들었다(막1:31). 저물게 되었을 때 소문을 듣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한다(막1:34). 밤이 되어 주무신 다음 새벽 일찍 기도하시러 한적한 곳을 찾으셨다고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아내셨다(막1:39). 연이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끓어 엎드려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간청을 할 때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한다((막1:41-42). 이렇게 짧은 기록 속에 다섯 번이나 생동감 있는 표적과 기사와 함께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신 것”이다(요5:19).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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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아침묵상] 마무리를 잘 합시다.
    영국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2019년이 끝나갑니다. 나는 오늘(28일) 올해의 마무리를 위하여 오늘 함양, 산청, 고령을 다녀왔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이 있어 아침 8시에 집에서 출발하였다가 밤 11시에 돌아왔습니다. 피곤하지만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일의 마무리로 다녀오니 마음이 개운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2019년이기에 나머지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정리하는 데에 하루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인생살이 마지막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게 됩니다. 젊은 날들은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이 범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나이 들어가면서 마무리를 잘 하게 되면 지난날의 모든 허물도 시행착오도 오히려 보석같이 빛나게 됩니다. 야구 경기에 9회 말 홈런으로 지고 있던 경기를 역전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살이를 그와 같이 9회 말 홈런으로 멋진 마무리로 마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너그러움’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너그러움이 인간관계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너그러움에 인색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로 부딪히고 서로 상처 받으며 스트레스를 쌓아 갑니다. 한 해를 너그러움으로 마무리하도록 힘써 봅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너그러워집시다. 자신이 지난날 멍청하게 살아왔던 일들에도 너그러워집시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줍시다. 그러면 인생 마무리를 훨씬 더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지난날들에는 그렇게 멍청한 일들을 하였으니, 이제 나이 들어 마무리를 잘하자. 내 인생 9회 말 홈런으로 마무리하자. 이런 식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멋있게 마무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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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배효전 목사] 사명
    은 나팔 뿔 나팔을불고 또 불지어다 언젠가 귀가 열려들릴 때가 있으리라 나팔수낙심 마라라 저 바다가쉼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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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신앙과 삶] 진짜 최선을 다했습니까?
    어느 집의 아이 하나가 큰 돌 하나를 마당 건너편으로 옮기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습니다. “넌 왜 네가 가진 힘을 다 쓰지 않고 있니?” 아이는 낑낑대며 고생하는 자신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가 밉고 속이 상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 제가 온 힘을 다 쓰고 있잖아요. 제가 낑낑대고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을 하세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너는 나보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니. 그것이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야!”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전혀 도움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이 자기 힘을 다 쓰지 않은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도 해보지도 않고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의 주역이었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도 외에 달리 의지할 것이 없다는 확신으로 인해 여러 번 무릎을 꿇곤 했다. 나 자신의 확신과 주변 사람들의 확신만 가지고는 하루를 살아가기에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무릎을 꿇으며 산다는 것, 그것이 내가 내 삶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갑자기 퇴출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해 보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책상에 해고 통보서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직장과 자신의 상관들에 대한 복수심이 끓어올랐습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는 며칠간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방황한 후에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나는 죽고 싶소. 나는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다 나를 배신하는 것 같소.”그 말을 듣던 그의 아내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만 한 가지 시도를 해보지 않았어요. 당신은 당신이 처한 이 상황과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하나님과 대화해 본 적이 없잖아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아내의 그 말이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해 본 적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는 아내와 함께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고 집중적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그렇게 며칠 기도하는 동안 마음속에 있던 직장과 상사를 향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먼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 속의 미움과 복수의 감정이 사라지자 머리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얻어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5년 만에 작지만 자신의 기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에 재미를 붙여서 늘 기도하던 그는 어느 날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축을 하면서 여기 저기 여행을 하다 보니 좋은 호텔이 없습니다. 멋진 호텔은 있지만 너무 비싸고, 작은 호텔은 너무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새로운 호텔을 지었으면 합니다. 아주 깨끗한 호텔, 그러면서도 적절한 가격에 쉼을 제공할 수 있는 호텔을 짓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 둘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세계적인 체인이 된 홀리데이 인 호텔(Holiday In Hotel) 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홀리데이 인 호텔의 창업자인 케몬스 윌슨이라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기도해 보지도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 그리피스 조이너는 자신의 승리의 비결을 말하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기도하고 나서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새해에는 진짜 최선을 다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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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박성규 목사] 교우들에게 드리는 송년 인사
    주안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를 최선의 길(the best way)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시다. 하나님은 매우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게도 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한계의 벽 앞에서 인내하는 믿음을 주기도 하셨습니다. 어찌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19년도는 정치, 경제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갈등이 우리 사회에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산다는 것이 스트레스 가운데 사는 것으로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은 성도님들도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헌금하여 주시므로 교회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물겨운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새해에 여러분의 믿음 생활과 건강, 자녀들의 미래와 경제생활에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축복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키고 헌신해 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이방인교회와 유대인교회가 하나라는 말씀처럼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지켜오신 올드 타이머(Old Timer)가 계시기에 오늘의 교회가 있습니다. 또한 새로이 뉴 커머(New Comer)가 오셨기에 내일의 교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러셨듯이 서로를 더욱 존중하면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연말과 연시에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송구영신예배에 온 가족이함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한 해를 보내며, 또 한 해를 맞이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둘째는 신년 및 특별새벽부흥회 등에 온 가족이 꼭 참석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자녀들의 손을 잡고 모두가 힘써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와 자녀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그 어두운 시대를 별처럼 밝혔던 에스더처럼 우리와 우리 자녀손들이 삶에서 당하는 어두운 환경을 극복하는 승리가 이번 신년 예배부터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아울러 가까운 성도 중에 차편이 없는 분들을 돌아보고 카풀로 섬기는 등 성도가 서로를 돌보는 아름다운 일들이 많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하시는 일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우리나라와 열방(列邦)을 위해 쓰임받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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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바이블 큐티]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마 21:1-46)
    주님을 성전에 모셔라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성전은 어떠했는가? ① 매매하는 상거래 장이었다. 우리가 간혹 교회에서 바자회도 하고, 또 기관에서 이런 저런 물건을 팔기도 한다. 그 자체를 보면 상거래 같지만 그것은 선교와 전도를 위한 선한 동기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지적한 것은 구원의 감격을 찬미하는 성전이 상거래 하는 이익의 도장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② 돈 바꾸는 금고였다. 물론 이방 지역에 흩어져 있었던 디아스포라들이 본국에 왔을 때 돈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전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성전 안에 들어온 모든 돈은 연보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연보궤 안에 들어가지 않은 돈이 교회 안에서 유통이 되고 실력행사를 하는 것은 타락한 중세 교회상이다. ③ 비둘기파는 새장이었다. 성전에 갈 때 양이나 비둘기를 가지고 간다. 그것은 놋제단에서 재물이 되어야 한다. 성전에서 울어대는 양이나 비둘기는 아직 제물이 되지 않았기에 죽어야 할 제물이 살아 있으니 소음 공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 제물이 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자아가 살아서 소리를 지르니 온 교회가 소란한 것이다. 성전은 만민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집이다. 성전에서 상거래 소리가 나서도 안되고, 성전에서 돈이 실력행사를 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오늘 우리 시대에 참된 제사를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주님을 배불리 대접하라 시장했던 주님은 열매를 얻기 위해 무화과나무 곁으로 갔다. 그 날은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물고 이튿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열매 없는 이 무화과나무가 당시 유대의 종교적 실상이요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이다. 이 무화과는 어떠한 존재인가? ① 길가에 심겨진 나무다. 유대지방에는 6월과 8, 9월 두 차례 열매를 거둔다. 그런데 지금은 4월 유월절 때이니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마가는 무화과 때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는 3-4월에 지극히 맛이 없는 빈민들이나 길 가는 나그네들이 식료로 사용되는「빠김이」라는 것이 있다. 주님이 찾으신 것은 바로 그 열매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그 사명을 저버린 것이다. ② 잎만 무성했던 나무이다. 잎은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잎이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다. 이는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모습이었다. ③ 결국 말라서 죽어버린 나무가 되었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처럼 사명을 저버린 인생도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열매 없는 나무는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없는 인생은 죽은 존재와 같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질서의 모든 피조 세계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살아있는 설교였다. 외적으로 율법의 규례만 좇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내적으로는 잎사귀 속에 감춰진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나 하등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흔한 빠김이 하나라도 맺지 않았으니 더 이상 땅만 허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께로 돌아와 순종하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①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가겠소이다”하고는 자기 할 일 다 하고 가지 않았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모습이다. 대답은 속시원하게 ‘예’했으나 행위는 그와 정반대였다. ② 이제 둘째에게 가서 이같이 말하니 ‘싫소이다’하고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려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다. 이는 당시 세리와 창기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고 자기의 정욕대로 살았다. 그러나 후일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왔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 자인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 중심을 보신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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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 [쉴만한 물가]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시는 하나님
    하루하루의 날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날이기에 하루하루가 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곱째 날을 복 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일곱째 날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안식일, 주일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복 되게 하신 날이기에 귀한 날이고, 복된 날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한 날입니다. 주일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주일을 복 되게 한 날로 정하신 하나님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고 영육을 쉬게 하십니다. 주일을 통해 축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주일에 하루 주일 쉬면서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영육이 강건해 집니다. 쉬지 않고 일만 하면 지치게 되고, 병이 들기도 합니다. 주일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재충전하여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정한 날, 주일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은 십계명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주일을 복 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일을 지키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살 때에 믿음이 떨어지게 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죄 짓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주일을 지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일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일, 주의 날에 성령이 임하고 은혜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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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쉴만한 물가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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