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
1. 들어가는 말: 위기에 놓인 한국교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설립된 지 13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 세계 선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줄기를 찾아 올라가 보면 그것은 피눈물과 땀에 얽히고설킨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의 그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우리의 선배요 선각자였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말처럼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교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기만 하다. 싸늘한 정도가 아니라 교회를 향한 비판과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면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참 부당한 비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소리들이다. 그뿐인가? 그동안 놀라운 부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고, 멈춘 정도가 아니라 숫자에 있어서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본 강의의 주제가 아니기에 더는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드는 것은 혹시 오늘 한국교회가 이제는 섬김을 받는 자가 되어 섬김의 자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피땀 흘리며 뿌린 씨앗의 열매를 따 먹으려고만 했지, 그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오늘 한국교회가 영광은 누리려고 하나, 그것에 앞서 반드시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혹은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지고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값싼 은혜만 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다시 말해서 구약의선지자들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순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교회의 설교가 물량주의와 성공 주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국 초기 교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눈물과 희생과 헌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그들의 순교적 신앙을 본받고, 또 그 순교적 신앙을 강단에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하여 본 강의는 한국교회에 귀한 신앙의 본을 보여주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순교적 신앙을 돌이켜 보면서 한국교회 강단의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주기철 목사의 설교 중심의 목회
주 목사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서 김인서 목사는 10중 7이 설교이고, 2가 심방이고, 나머지 1이 행정이었다고 말하면서, 주 목사의 목회는 설교에 주력하는 목회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주 목사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월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여 금요일까지 설교 작성을 완료하고, 토요일에는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하였고, 주일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주 목사가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 하는 점은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0년 어느 주일날 일본 경찰들은 산정현교회 예배당을 포위하고 주 목사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주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둘 것이요, 네 설교권은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요. 체포하는 것은 경관이 할 일이니 나는 내 할 일 하겠소”, “대 일본제국 경찰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일본의 헌법은 예배 자유를 허락한 것이요, 당신들은 지금 예배 방해요 헌법 위반이오.”
그래서 권연호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 “서문”에서 “주 목사의 설교는 그의 신앙고백이요, 그의 생활이요, 그의 정신을 그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만큼 주기철 목사는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다.
3. 설교자로서의 주기철 목사
주 목사의 설교와 글들은 여러 가지 잡지와 신문 등에 실렸는데, 그가 남긴 것은 소논문 1편, 기도문 2편, 응답문 1편, 설교문 37편이 전부다. 그리고 37편의 설교 중 15편이 「신생명」, 「기독신보」, 「종교시보」, 「복음시대」, 「새사람」, 「설교」, 「기도지남」 등에 실렸고, 22편은 김린서가 복원한 것이다. 김린서가 복원한 설교들은 그가 예배에 참석하여 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복원하여 해방 후에 정리 활자화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의 설교들과 기도 그리고 논문이 실린 잡지들이나 교계 신문 등을 통해서 설교가로서의 주기철의 면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는 평양장로회 신학교 졸업반 시절인 1924년 7월 「신생명」을 통해 계몽주의 논문, "기독교와 여자 해방"을 발표하였고, 1928년 6월 부산 초량교회 목회 시절(1928년 6.6) 그가 존경했던 김영구 목사의 부음을 듣고 쓴 추모기도문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이후 마산 문창교회 목회 시절인 1934년 그가 남대문교회 부흥회때 설교하였던 “은총과 책임”이 「종교시보」(1934.5)에 실렸다. 그 후에 장로교 기관지였던 「종교시보」에 “사의 준비”(1934.8)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1935.2)는 설교가 실렸다. 그 외에도 그가 1935년 금강산 목사 수양회 때 했던 설교인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설교가 「기독신보」에(1935.5) 실렸다.
그리고 1936년에 평양의 산정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이후에 12편의 설교와 기도문이 각종 잡지와 교계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거운 짐 진 자여 예수께 오라”(「복음시대」, 1937.6) “전도의 사명”(「설교」, 1937.3) “성신과 기도”(「설교」, 1937.3) “마귀에 대하야”(「설교」, 1937.4) “이삭의 헌공”(「설교」, 1937.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설교」, 1937.6)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설교」, 1937.8) “십자가의 길노 행하라”(「기독교보」, 1937.9) “주의 재림”(「설교」, 1937.10) “하나님을 열애하라”(「설교」, 1938.3) “겸손하기 위하야”(「기도지남」, 1939.2). 그리고 그의 설교문이나 글들이 1939년 초를 지나서는 잡지나 교계 신문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일제에 의해서 2차 검속을 당한 1939년 9월 이후에는 그의 설교나 글들의 지상 발표가 중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의 설교와 글들이 실린 이런 시기를 보면 주 목사는 이미 마산 문창교회 시절부터 설교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시절에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을 알게 된다. 교회사가 이덕주는 주기철 목사가 서울 남대문 교회 부흥회 때 행한 설교, " 은총과 감사"가 「종교시보」에 실린 것과 또한 주 목사가 1936년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장로교 목사수련회에 주 강사로 초청되어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한 것, 그리고 주 목사가 1937, 9월 대구 남성정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26회 총회에서 새벽기도회 설교를 도맡아 한 것을 예를 들면서 주 목사의 설교가 이미 그 당시에 한국교회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여 순교했던 순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하지 못할 듯이 설교했으며,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라고 고백했던 청교도 설교가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던 것이다.
4.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신앙
1) 코람데오의 신앙
그는 불꽃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신앙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은 그의 설교와 목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신앙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 강조한바 “코람 데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 목사의 신전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설교가 바로 1937년 산정현교회에서 행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 (창 17장)라는 설교이다. 7) 그는 이 설교에서 (1)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으로 완전하라 (2)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으로 완전하라 (3) 하나님 앞에서 태연함으로 완전하라고 외쳤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경건해야 하는 것이고, 정직해야 하는 것이고, 태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건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에 우리의 마음도, 입도, 발도 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음도 경건하고, 입도 경건하고, 또한 말도 경건하여야 하나니, 이는 경건의 실천이다. 마음이 경건하면서 몸으로 실천하지 아니하면 이는 이교도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니 모양으로만 경건한 체하고 마음이 불결하면 이는 바리새적인 외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강단에서 공공연히 자기를 자랑하며, 성도가 모인 좌석에서 불결한 논담을 토하는 것은 불경천만이요 무례 막심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 경건한 태도가 결여한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경건한 생활, 경건한 예배를 드림으로 완전한 신자가 돼라”
그는 이른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이원론적 사상을 거부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경건과 교리가 분리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전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이라는 설교에서도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 즉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경건을 일상생활에서 부정직한 것을 버리는 것 등의 삶으로 설명한다.
그의 신전 의식은 또 다른 설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눅 12: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설교는 1937년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양노회 사경회 때 행한 설교이다. 그 개요를 보면 1)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또한 엄위하심 2) 의를 근원한 사랑 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 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복.
그의 이 메시지는 율법적이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엄위하신, 즉 두려워할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는 인간들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로 담대히 설 수 있는 은총의 복음이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 그의 설교를 좀 더 들어보자.
“내 경험으로 보면 중생한 자는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그에게 복음의 은혜가 풍성하나, 거짓 선생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여(유다서 1:12) 그 소위가 흉악하다. 오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찬양대, 집사, 장로, 교인들과 너희 받을 형벌을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보지 못하게 숨어서 행하는 일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의의 하나님을 알라. 구약의 신앙이 있은 후에 신약의 신앙이 있고,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연후에 복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의 죽음이 있은 연후에 구원의 중생이 오는 것이다”
주 목사는 신전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반드시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더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의 설교 전편에서 이러한 코람데오의 사상, 즉 신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설교학자 김운용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 즉 신전 의식은 그의 설교와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었고, 모진 형극의 길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게 했던 힘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2) 예언자적인 신앙과 죽음의 준비
주기철 목사는 설교에서 불의한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신앙의 순결을 위한 “사(死)의 준비”를 강조하였다. 한국교회에 강요된 신사참배의 요구를 예언하면서 시작된 신앙의 순결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인 선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화되어 가면서, 그 저항과 대결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언자적인 신앙에 대한 주 목사의 설교는 1934년의 “죽음의 준비” 라는 설교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생은 나는 날부터 죽음의 경주자”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누구나 한번 죽어 심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죽음을 매일 준비하고 항상 준비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그의 이 설교에는 예언자적인 선포와 함께 신앙을 위한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준비를 위하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엄숙한 만찬으로 준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의 기도로 준비하셨다….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우리도 신자답게 죽어야 된다. 스데반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바울의 죽음은 그 얼마나 장열한가?”
그는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외쳤다. 그런데 주 목사의 이런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것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간섭이요, 역사였다.
사실 주 목사는 개인적으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에 가족들의 연속되는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1927년에 삼남이었던 영묵이 병사하고, 1931년에는 사랑하는 유일한 딸 영덕이 병사한다. 그리고 1933년에 사모 안갑수 여사가 급서하고 말았다. 그리고 1934년 여름에는 부친인 주현성 장로가 별세한다. 이렇게 피붙이들의 계속되는 죽음 앞에서 그는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그는 그 유명한 “죽음의 준비”라는 설교를 하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소년 시대에는 방탕하여 늙을 때를 준비하지 못하니 매우 둔한 자이다. 한번 들어 가고 다시 나오지 못하는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대게 인생 일사는 정리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는 것이며, 하루를 살았다면, 사망의 문에 하루 길을 가까이 간 것이며, 지구의 운전은 인생을 싣고 1분도 정지함 없이 사망을 향하여 달리는 것이며,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를 우리 인생의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이다….
사람이 죽는 일을 홀연히 당하며, 주의 재림도 갑자기 되는 것이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가서 저녁에 죽음으로 이르는 일이 없는가? 죽음에 있어서는 빈부의 차별이 어디 있으며, 형편의 다름이 무슨 상관이며, 노소의 구별이 있는가 없는가…?
인생아 아는가 모르는가? 너의 사망할 일자를? 만일 모르거든, 사망이란 급박하고 용서 없음을 알아두라. 우리는 죄를 위하여 반 시간만 연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걸할 날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10분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죄를 청산하고 가기는 가겠나이다’라고 애걸복걸한들 용서하실까? 하나님의 예정한 시기는 절대로 용서가 없는 것이다. 사망 시에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가겠다고 하지 말라. 사망 시에는 있는 믿음도 도리어 잃기가 쉬울지언정, 없던 믿음을 그 때에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비애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사망 시 슬프지 않다….
신자여! 준비하자. 죽음의 준비를”
이렇게 죽음의 준비에 대해서 외친 주 목사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언자적인 설교는 바로 1936년 금강산 수양관에서 행한 "예언자의 권위"(마 3:1-13)라는 설교다. 1936년 5월 주 목사가 경남노회장 시절이었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정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하기 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250여 명의 목회자가 참석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의 요지는 이렇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세례 요한은 왕에게도 말해야 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동생의 아내를 취해서 부정한 결혼을 한 헤롯왕에게 ‘….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죄인이다.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 회개하라’고 나무랐다. 이렇게 부르짖은 세례 요한은 벌써 일사각오를 하고 있었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도 일사각오였던 것이요, 루터도 일사각오를 했다, 일사각오를 한 사람이 예언을 하는 것이고, 일사각오를 해서 비로소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못 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 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되어 떨고만 있는가? 목사도 일사각오를 한 연후에야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순사 앞에서 절절매고서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서 주 목사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됐다. 주 목사는 강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그날 모였던 250여 명의 목회자들은 다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 설교는 비록 해방 후에 김린서에 의해서 복원된 설교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해(1936) 수양회 현장에서 주 목사의 설교를 들은 기자에 의해서 「기독신보」에 실린 “목사직의 영광” 이라는 설교와는 그 내용과 대지가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거와 목회자의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예언자적인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교라 하겠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적 열성을 가지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이런 순교적 열성이 있는가?
3) 일사각오의 순교신앙
그러므로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한 마디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이었다. 그의 이런 순교신앙은 그의 설교 전편에 흐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설교가 평양신학교 사경회 때(1935년) 행한 “일사각오”(요 11:16)라는 설교이다. 그는 이 설교에서 3가지 일사각오, 즉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그리고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를 외쳤다.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어 이르기까지 많은 피가 뿌려졌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서 50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황 악형 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뿌려졌다. 바티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클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데일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이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피로서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는 것이다. 일사각오를 한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 도상에서 피를 뿌렸다. 오오! 오늘날 우리에게도 부활을 복음을 위하여 일사각오를!”
그의 이러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인 “5가지 종목의 나의 기도”(마 5:18, 롬 8:18, 31-39)23)에서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5가지의 각오를 고백하였다. 주 목사는 마지막 5번째로 구속되면서, 이 설교를 유언과도 같이 남겼는데, 그는 이 설교를 눈물로 호소하듯이 하였고, 그날 2,000여 명의 평양 산정현교회의 성도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 탄식하며, 무릇 숨 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약 수사도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이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제자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천 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겠습니까?
오 주여! 이 목숨 아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 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아래에 밟게 하옵소서.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 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고난의 명상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이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영광의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 변치 아니하오리이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 리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끓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에 걷게 하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게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는가?
4)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그의 설교에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드러나 있다. 그는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담대하게 외쳤다. 그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대한 철저한 신앙은 팔순의 노모와 처와 자식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와 그의 유언과도 같은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 속에서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지중 하고, 가장으로서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 떼들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의 제단 앞에 바칠 것을 비장한 모습으로 설교하였고, 사랑하는 노모와 처자식들과 교인들을 오직 하나님의 손(주권과 다스림)에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이 눈물의 설교(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주권 하에 그의 후손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
“고아였던 내가, 아무런 세상적인 힘도 권력도, 백도 없던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의 피맺힌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고 주광조 장로의 고백)
주기철 목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교의 길을 가면서, “노모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양 떼들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대로 응답하심으로 그의 후손들을 책임지시고 역사하셨다. 주기철 목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설교하였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5. 나가는 말: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한국교회가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첫사랑의 순수성과 첫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려 가고 있다. 그리고 물량주의와 배금주의, 교파주의, 그리고 교권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을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교인들은 더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꺼리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최소한의 신앙생활로 만족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도 교인들을 향해 값싼 은혜를 남발하면서 그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도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만 하는 그저 긍정적인 말, 기분 좋은 말만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은 사라지고, 듣기에 편안하고 부담도 없는 철학적 에세이 같은 설교 아닌 설교가 환영을 받고 있다. 어쩌다가 설교자가 부정적인 이야기,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면 교인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부담스러워한다. 결국 십자가의 복음이 외쳐져야 할 강단에서 값싼 은혜만이 전달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래야 100여 년 전 이 민족의 가장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 주기철 목사가 감옥 안에서도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면서 고백한 고난의 명상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일사각오를 다져보자.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 주기철 목사 순교 80주년 기념 제3회 소양학술회에서 강의 된 내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