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4(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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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가족과 함께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을 관람했다. 선교방송 CGN이 제작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은 일제 강점기 일본 땅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이야기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욱 사랑했던 두 선교사의 예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영토 강점이란 원수지간의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복음으로 사랑과 용기를 보여준 선교사의 눈물 담긴 이야기다.

1863년 일본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노리마츠 마사야스 선교사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처참히 시해된 을미사변 사건을 보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1896년 노리마츠 선교사는 수원 땅에 들어와 조선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청년 조덕성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복음을 전했다. 지독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아내 사토와 함께 경기도 수원에서 수원동신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이어갔다. 얼마나 고난의 나날이었을까.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오직 조선인을 사랑하는 복음 정신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불행히도 사모 사토는 세 자녀를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노리마츠 선교사는 자녀들과 함께 조선 땅에서 한평생 선교사의 삶을 살다 1921년, 58세의 일기로 소천한다.

1896년에 조선에 입국한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노리마츠 선교사의 조선 선교를 보고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선교사는 1896년에 조선 땅에 들어와 이름을 전영복이라 바꾸고 북한 땅과 호남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오다 선교사는 특히 일본에 반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설파하고 복음을 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연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일본 땅으로 강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 청년 박중학이 오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기도 했다.

영화 무명은 국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관람은 미미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탁월한 다큐 영화였다는 느낌을 필자는 받았다. 일제 36년,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숨겨져 있던 고뇌의 복음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관람의 은혜였다. 문화 선교와 미디어 복음에 사명을 감당하는 CGN방송이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아 제작한 작품이다. 필자는 영화를 관람하고 크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오늘날 한·중·일의 동북아 지역은 갈등이 심화된 국제 정세 속에 있다. 이 갈등의 깊은 곳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방적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예수 사랑의 복음만이 ‘평화’의 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일본에 보내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안중근은 서슬 퍼런 일본 제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영웅의 주창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리 있겠는가. 일본은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삼키고 조선 찬탈에 성공, 36년간 압정을 했지만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지금 동북아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 미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초갈등 속에 긴장의 도는 더해 가고 있다. 날로 선교가 어려워지고 있는 일본 땅과 중국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하며, 우리도 오직 예수 사랑으로 일본 두 선교사의 조선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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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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